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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 이 계절에 주목할 신간들
다만 ‘나’의 이야기로 말해질 때
신용목 愼鏞穆
시인. 시집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 『아무 날의 도시』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 『나의 끝 거창』 『비에 도착하는 사람들은 모두 제시간에 온다』 등이 있음.
97889788@daum.net
다시 시에서 ‘나’ 사용법
시가 ‘나’에 대한 질문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화자’의 위치가 주는 엄연함 때문이다. 최선을 다해 객관화한다 해도 그 객관화의 주체 역시 자신일 수밖에 없는 ‘나’들이, 말하자면 시의 화자인 것이다. 일인칭의 오랜 주인이었던 서정적 자아를 벗어나 주체에 대한 탐색은 다양한 윤리적 측면들을 보충하면서 성별, 인종, 계급, 성적 취향은 물론 동물과 기계에 이르기까지 정체성에 대한 인식과 연대의 가능성을 확장시켜왔다. 한편 자아에서 주체로의 전환은 자신이 만든 세계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일에서 세계에 갇힌 자신의 이미지를 확인하는 과정으로 전환되었다는 말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자아든 주체든 거기 비친 ‘나’는 언제나 어딘가 늘어나거나 줄어든, 말하자면 뭉개진 자화상이 되고 만다.
모든 시인들은 의도와 무관하게 이 세계의 조건과 질서에 포함되지 않는 ‘주체’, 동시에 자기라는 미신에 오염되지 않은 ‘자아’로서의 ‘나’를 찾아 나선다. 세계의 질서가 아무리 견고하게 개인을 점령해오더라도 끝내 채워낼 수 없는 인간의 윤곽이 있을 것이고, 그것은 가장 가까운 미지처럼 자기 자신의 사유와 감각의 숲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과정이 한편으로는 (정체성에 대한 논의가 그러한 것처럼) 폭력에 대한 저항이면서 한편으로는 (동일성에 대한 논의가 그러한 것처럼) 폭력에 예속되고 마는, 양가적이고 모순적이며 어떤 불합리와 대면하는 과정이라 하더라도, 어차피 ‘시’라는 것은 정확한 인과나 논리, 합리성에 포함되지 않는 인간의 영역이 있기에 생겨난 장르가 아닌가.
이린아 『내 사랑을 시작한다』(문학과지성사)
많은 시들의 의미가 불투명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원관념뿐 아니라 보조관념까지 감각적 이미지로 포착하려는 노력 때문인데, 또한 그것이 시적 대상(타자)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개성(주체)을 드러낼 수 있는 가장 안전한 방법일 것이다. 이린아의 첫 시집 『내 사랑을 시작한다』 역시 비슷한 방법론을 가지고 있지만 원관념과 보조관념을 비교적 가까운 자리에 위치시킨다는 점에서 시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조금 더 선명하게 느껴진다. 공연과 배역, 또는 인격의 대체물로 등장하는 옷 등을 주요 소재로 가져옴으로써 세계를 유비적으로 드러내는 듯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최초의 공연」에서 “배역을 벗어나선 안 돼/혐오는 방백의 독백이고/애도는 최초의, 유일한 관중이었을 거야”라고 할 때, 배역의 역할은 일반적 생활 패턴이나 행동뿐만 아니라 ‘혐오’ ‘애도’ 등 그 내면까지도 대리한다. 그게 태초부터 시작된 공연이고 배역이라면, 얼핏 진짜 현실과 자신은 어디에 있는가와 같은 질문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 시는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첫 연부터 화자는 무심하게 “주목은 숨는 것과 같아”라고 하며 보여주는 것이 도리어 보여주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당연히 관객은 보고 있지만 보지 못한다. 그래서 ‘방백의 독백’을 하는 배우는 혐오(보여주면서 보여주지 않기에)를, 거대한 타자인 관중은 애도(보지만 보지 못하기에)를 할 수밖에 없다. 이 내면 풍경이 쓸쓸한 것은 “오래된 결말이야”라는 화자의 말이, 막이 내렸다는 뜻으로 읽히기보다는 이 공연이 혐오와 애도로 결정되어 있으며, 막이 오를 때마다 반복된다고 단정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젠더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는 「숨기는 옷」에서 “숨기는 옷에서는 끝의 냄새가 난다”고 말할 때 “끝”도 그러할 것이다. 여기에는 끝까지 내몰린 자의 절망 같은 것이 묻어 있지만, 마지막까지 화자는 거부나 거절의 의사를 내비치며 부조리에 대한 전선을 명확히 하거나 스스로를 윤리적 지대로 이끌어 희망의 주체를 자임하지 않는다. 그 대신 “밤이 할퀸 곳만 벌겋게 쓰라”린 시간을 감당하면서, 끝내 그것을 다 살아낸 “오래된 결말”과 대면한다(「최초의 공연」). 어떤 희망에도 빚지지 않겠다는 식의 강고함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이 시집의 주체는 “희생당하지 않으려/희생으로 만든” “추위”를 “입은 인간”(「처음 입은 인간」)으로 변주되기도 하며, 마침내 서로가 서로를 입고 ‘마주 보는 꿈틀거림’으로 “발견”(「2인용 요람」)되기도 한다. 두겹의 희생이라고 해서 곧바로 희망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젠더 분법에 대한 유비여도, 실존의 한편에서 맞이한 고독의 이미지여도 마찬가지겠지만 이는 상징적 갑옷처럼 무모한 만큼 절박함을 드러낼 뿐이다.
마침내 「최초의 공연」 마지막 연은 이렇게 끝난다. “조명을 쏜다는 말,/그건 화살에서 빌려 왔을 것이므로/여기까지야/나를, 쏴줘”. 이때 ‘나’는 마침내 도달한 ‘자기 인식’이겠지만, 그것은 또한 그 모든 과정을 이끌었던 힘이기도 할 것이다. ‘옷’이거나 ‘배역’ 자체를 통해 발견되는 ‘나’에 대한 부단한 희구 같은 것 말이다. 그래서 이 대목에는, 화살에 명중된 자신은 아마도 죽음을 맞이할 것이고 그 상징적 죽음을 통해 자신에게 주어진 배역을 끝내고 싶다는 갈망이 녹아 있다. 즉 죽음을 통해 세계를 끊고 온전한 자신으로 남는 것. 그러나 이 해석을 살짝 뒤집어볼 필요도 있다. 말 그대로 화살 같은 조명을 통해 진짜 자신인 ‘나’를 비춰달라는 것. 이때 조명에 비친 ‘나’는 숨겨진 나도 숨은 나도 아니다. “여기까지야”라는 선언처럼 어떤 외적 강제도 미신의 개입도 없이 오롯이 빛 속에 드러나는 ‘나’일 것이다.
그때 ‘표정이 없는 진실’(「원더랜드 페르소나Wonderland Persona」)이자 “인간이 아직 맡지 못하는 숨”(「돌의 문서」)처럼 오래되었으나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생명으로 머물러 있던 ‘나’가 등장한다. 어딘가 오롯한 자신이 존재한다는 저 믿음이 없다면, 화자는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것이 “나를 수없이 두드리던 그 창 앞에”(「동물원」)서 “늘 밖에서부터 우그러”지는 “양동이”(「양동이」)를 쓰고 “소리를 지르고 팔을 흔들고/물건을 던지고, 그 물건 뒤로 달아나”(「최초의 공연」)며 세계를 견딜 수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
덧붙이자면 화자는 목소리(발화)만 들려줄 뿐 자신의 몸(체험)을 보여주지 않는다. 시의 발화는 내용을 구체화하기보다는 주로 형식을 통해 화자의 상처를 전달하는 데 할애된다. 즉 이렇게 발화할 수밖에 없었던 구체적 현실, 곧 화자의 체험은 예감과 짐작과 암시 너머에 있다. 우리는 무대 안팎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대해서 알 수 없지만, 매혹적인 이미지로 엮어낸 메시지를 통해 젠더 문제를 중심으로 한 각종 차별과 소외, 그로부터 발생하는 고통과 상처를 떠올려 이 시에 대입한다. 말하자면 독자 자신의 사건으로 무대의 내용을 채웠을 때 비로소 이 시는 완성된다. 시는 감정과 고통의 교류이고 따라서 독자의 자기 경험을 통해 의미가 확정되는 것까지가 시적 체험이라는 데 동의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아마도 이린아 시에서 현실은 너무 단단한 나머지 오직 폭력적 과정으로만 정리되거나 세계를 장악한 법칙으로 강제될 뿐이어서, 그에 맞서는 주체는 늘 자신의 육체를 잃은 채 겨우 세계에 대해 발화할 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체험되지 않는 현실은 없다. 또한 시야말로 그 체험의 가장 개인적인 장소일 것이다. 어떤 발화에 대한 공감은 사실 동의에 가깝다. 우리는 누군가의 전언에 동의해서 울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자기 때문에 우는 것이다. 당연히 누군가의 체험에 공감해서 울 수 있다. 그것은 서로 때문에 우는 것이다. 연대는 그런 것이 아닐까.
유희경 『겨울밤 토끼 걱정』(현대문학)
유희경 신작 시집 『겨울밤 토끼 걱정』의 첫 시 「이야기—원형」은 무한한 시간 속에서 어떤 기원에 접근하려는 노력으로 읽힌다. 할머니의 “이야기”는 “타래에서 실을 뽑”는 일이자 “노래”이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넘어가는 실”처럼 “할머니의 노래는 끝이 나지 않을 것 같다.” 실과 노래의 수평적(횡적) 이행은 창밖에 “아슬하게 서 있”는 “늙은 나무”의 수직적(종적) 형상과 교차되어 하나의 좌표를 지시하는 듯한 이미지를 만든다. 화자는 “가을이 되면 저 위태로운 각도의 잎들을 모두 벗고 중심의 방향을 드러낼 것이다”라고 말함으로써 모종의 절대성을 예감한다. 그러나 여전히 “가을”은 아직 오지 않았고 그 “중심”은 끝내 직전에서 예감의 영역으로 남을 뿐이다.
이 시는 어떤 전제도 없이 “그때쯤. 그렇구나. 할머니의 목소리를 들은 것만 같다. 그런 노래였나. 그랬구나. 머리를 만져주는”으로 끝난다. 이때 과거형도 알게 되었다는 완료형이 아니라 알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짐작에 그친다. “그랬구나”가 무엇에 대한 수긍인지 알 수 없는데도 우리는 저 막연함 앞에서 그저 끄덕이고 만다. 이를 단순히 선험적 순간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언어를 통해 분리되기 이전의 너와 나 혹은 세계와 내가 서로를 공유함으로써 가능한 감각적 동의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화자가 “할머니의 목소리를 들은 것만 같다”고 할 때 (‘말’이 아니라) ‘목소리’처럼 의미는 지워졌으되 감각만으로 모든 필연성을 확보하는 순간 말이다.
이처럼 유희경 시의 화자는 예감의 청중이자 짐작의 독자로 남아 스스로 그 예감과 짐작의 통로가 된다. 그가 줄곧 ‘창가’를 지키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창밖에 내리는 눈을 통해 분할된 대상(모자 주인)을 행복-불행의 정념을 통해 한 자리로 이끄는 「이야기—겨울의 모자」뿐 아니라, “그 순간 나는 창밖을 보았습니다”로 시작되는 「이야기—겨울밤 토끼 걱정」에서도, 화자는 창문을 통해 세계가 숨겨놓은 무언가를 줄곧 찾는 듯하다. 이때 ‘창문’은 풍경의 페이지를 가진 한권의 책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시 「이야기—이야기」는 특별한 독서 경험을 통해 자신이 그 예감과 짐작의 실체에 어떻게 가닿는지를 아름답게 그려낸다.
“대수롭지 않은 책을 읽던 k는/문득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어떤 소리를 들었지만 “예민해”져서일 거라고 생각하고 다시 책을 들지만 더는 “한 글자도 나아갈 수 없”다. 이것을 삶이나 인생의 유비로 보는 일은 쉽다. 무의미한 일상에 숨은 기척을 느끼는 것. 하지만 본격적인 질문이 시작되는 건 “글자 하나 없이 비어 있는 48쪽”을 발견하면서부터이다. 이미 82쪽까지 읽은 화자는 48쪽을 읽고 지나왔지만 뒤늦게 그 페이지가 비어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47쪽은 “나”라는 주어에서 끝이 났고/49쪽은 “했었다”라는 종결형 동사로 시작했고/나와 했었다의 사이”의 빈 페이지인 48쪽은, 그래서 자신이 지나온 어떤 순간, 그러나 이제 텅 비어 도리어 “깊고 광활하고 아찔하며 아득한 사이”가 되어버린 시간으로 묘사된다.
k는 “그 페이지에 바짝 귀를 대어보”는데, 들리는 소리는 “보다 분명해졌”지만 “어떤 의미도 해석해낼 수 없었다”고 덧붙인다. 그리고 이렇게 설명한다. “누가 누구에게 말을 걸고/누가 누구에게 대답을 하는” 그 이야기는 “의미는 알 수 없고 다만,” “어떤 풍경”이었다. “잊고 있었던” 정겨웠던 시절의 풍경이자 그래서 슬프고 아름다운 풍경 말이다. 여기서 시적 전환이 일어난다. 이후부터는 다른 페이지들 역시 이상했으나 이상하지 않고 무엇이든 참을 수 있는 것이 된 것이다. 다시 책을 들고 “대수롭지 않은 내용들을/따라 읽기 시작”하는데, “여전했으나” 이제 참을 수 있게 된다.
마지막 연은 한층 흥미롭다. 그 소리가 궁금했던 화자가 k에게 “그 책은 어디 있어”라고 묻자 “k는 잃어버렸어”라고 답한다. ‘소리’의 특성이 그런 것처럼 그 책 또한 어느 순간 나타났다 어디론가 사라진 셈이다. 활자가 실어 나르는 의미와 무관한 예감과 짐작 속으로 사라지는 것. 즉 화자가 만난 것은 자신 속으로 침몰한 의미이며 따라서 자신이 된 순간 자체이다. 이 세계의 ‘창문’ (또는 책) 밖에서 자신을 향해 두드리는 자신의 기척 같은 것 말이다. ‘창문’과 ‘빈 페이지’가 그렇듯이 이쪽과 저쪽, 곧 예감과 짐작이 드나드는 장소는 텅 비어 있어서 줄곧 잃어버렸던 자신의 자리가 된다.
이러한 과정은 이 ‘이야기’들에 보편성을 부여한다. 독자들은 누구나 화자가 비워놓은 자리에 들어가 이야기의 주인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다만 보편성의 자리가 그렇듯 자신이 겪었거나 겪고 있는 구체적 현실을 가지고 들어가기는 어렵다. 말하자면 시의 주체는 스스로를 간접화함으로써 자신의 경험을 체로 걸러 거기 남은 상실과 연민의 정서만을 훌륭하게 재구성해 독자에게 내어준다. 이린아 시와 반대로 유희경의 시에서 세계는 한없이 자라나 묽게 희석되어버렸거나 보이지 않는 한 점으로 모아진 것 같다. 그로 인해 자신의 기원을 탐색하게 만든 현실의 조건까지도 아련하게 멀어진 듯하다. 물론 진공에서 더 잘 보이는 것도 있다. 하지만 ‘기원’의 자리가 그러하듯 어쩌면 그것은 하나의 조짐으로 전부를 설명하려는 시도이기도 할 터이다. 전부 말하는 것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자신으로만 견딜 수 있음
이린아의 ‘공연’이 부조리의 그물에 걸린 자신을 허공에 달아놓는 과정이라면, 유희경의 ‘이야기’ 연작은 자신도 알지 못하는 긴 서사 속에서 문득 ‘나’를 건져올린다. 전자가 자신을 직접 보여주는 데 맞춰져 있으며 그래서 자기가 위치한 공간을 채워나가는 형식이라면, 후자는 자신을 바라보는 위치에 둠으로써 오히려 자기 자리를 비워내는 것처럼 보인다. 즉 전자는 시간을 횡단하여 공간의 결정성을 보여준다면, 후자는 시간을 종단하여 공간의 유동성을 보여준다. 그것은 시어의 파장을 통해 현실의 틈을 벌리거나 현실의 벽을 지워냄으로써 거기에 얼핏얼핏 제 얼굴이 비치게 만든다. 그러므로 그때의 ‘나’는 적극적으로 구조화되지도 동일성으로 수렴되지도 않는다. 오히려 거기 ‘있다’라는 예감과 짐작의 확실성만 남길 뿐이다.
우리는 영원히 자신을 알 수 없고 그래서 그 자리는 자주 비어 있다. 그러나 또한 아주 비어 있지는 않아서 자리를 찾으려는 노력이 지나간 순간에 세상은 잠시 굴절되어 이상하게 커지거나 작아진다. 다름 아닌 그 굴절과 변모가 다시 ‘나’라는 실감을 불러일으킨다. 그 실감이 주는 안도이거나 위안이거나 어쩌면 체념일지도 모르는 정동으로 인해 우리는 이 세계를 견딜 수 있는 힘을 얻는지도 모른다. 시가 그런 것처럼, 스스로를 찾아 나서는 이유는 단 하나일 것이다. 세계 속으로 돌아와 자신의 현실과 마주하기 위함. 그래서 미처 다루지 못한 서대경의 시(『굴뚝의 기사』, 현대문학 2023)처럼 불가능한 ‘상상’의 자리이거나 김영미의 시(『투명이 우리를 가려준다는 믿음』, 아침달 2023) 속 ‘한강’ ‘망우’ ‘보타닉 가든’ 그리고 ‘로얄 롤러장’에 이르러서도, 도리어 우리는 그 ‘장소’에 경험을 선사할 수 있다. 여전히 스스로를 찾고자 하는 노력이 그 장소를 대결과 반목, 인정과 부정으로 끝없이 고쳐지는, 미지의 현장으로 바꾸어놓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