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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 이 계절에 주목할 신간들

 

 

일상의 감수성을 재조정하는 소설들

 

 

하혁진 河赫進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감각의 질서와 그녀들의 환상통」 등이 있음.

10deristhenight@naver.com

 

 

 

폐허가 된 일상에서 올바른 세계를 상상하는 것은 가능한가. 올바른 세계에 대한 상상은 ‘어떤 세계인가’라는 질문뿐만 아니라 ‘어떤 삶인가’라는 질문 역시 포함한다. 요컨대 세계에 대한 상상력은 세계를 구성하는 각각의 삶에 연결되어 있고, 삶에 대한 상상력은 삶을 이루는 하루하루의 일상에 연루되어 있다. 일상을 지키기 위해 대문을 걸어 잠그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 된 작금의 상황에서, 가장 시급한 정치 중 하나는 폐허가 된 일상의 재건이다. 자신의 일상이 지속 불가능하거나 이미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올바른 세계에 대한 상상은 멀게만 느껴질 것이다.

지난 계절 같은 지면에 쓰인 글의 제목 역시 ‘평범한 일상을 위한 고군분투’라는 점에서 근래의 문학이 일상에 주목하고 있다는 진단은 무리가 아닐 듯하다. 그런데 정주아는 일상의 회복이 “단순히 재난 이전 상태로의 원상복구를 가리키는 말은 아닐 것”이라고 말하며, 그보다는 “개별 인간의 사정 따위는 봐주지 않는 시간 속에서, 좀더 익숙한 방식으로 그 흐름을 견디려는 인간의 생존본능이 다시금 발동되는 국면”이라고 덧붙인다.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은 ‘생존본능’이라는 단어다.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취약한 기반 위에서 유지되고 있었는지를 그 어느 때보다 절감하게 된 지금”1, 일상을 위한 고투는 생존의 문제와 직결된 싸움이라는 문제의식이기 때문이다. 한 작가의 에세이가 떠오른다. 그 글에서 황정은은 세계와 일상의 관계에 대해 자문한다.

 

어떤 일상인가, 일상이던 것이 영영 사라져 버린 일상, 사라진 것이 있는데도 내내 이어지고 이어지는, 참으로 이상한 일상. (…)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고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이 없어, 거듭, 거듭, 습격당하는 일상.

 

왜 그런 일상인가.

그의 일상이 왜 그렇게 되었나,

그의 일상을 그렇게 만들어 버린 세계란 어떤 세계인가.

그 세계에서 내 처지는 어떤가.2

 

인용한 글에서 “세상에 관한 신뢰가 사라졌다”(88면)고 고백한 작가는, 그러나 이내 “내가 이미 믿음을 거둬버린 세계의 어느 구석을 믿어보려 하고 있었던”(97면) 사람들에 주목한다. 그리고 작가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얼마나 쉬운지 모르겠다. 희망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세상은 원래 이렇게 생겨먹었으니 더는 기대도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은. 내가 이미 이 세계를 향한 신뢰를 잃었다고 말하는 것은”(96면). 그러니 응답해야 한다고 작가는 말한다. “세계와 꼭 같은 정도로 내가 망해버리지 않기 위해서”(97면)라도 각자의 일상을 지키며 응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일상은 세계를 뒤로한 도피처가 아니라 세계에 맞서는 전선이 된다. 따라서 “‘나’를 중심으로 세계가 해석되고 시야가 제한되는”3 근래의 문학적 경향 역시 세계에 대한 포기나 단념이 아니다. 주체의 반경을 최소화하고 일상으로 파고드는 전략은 어쩌면 새로운 세계로의 이행을 준비하는 방책일 수 있다. 주지했듯 올바른 세계에 대한 상상은 지속 가능한 일상 위에서, 지속 가능한 ‘나’를 통해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결국 “‘나’라는 정체성 자체가 서사의 핵심 주체로 등극”한 상황과, “‘전체’ 또는 ‘총체’를 향한 인지감수성의 필요성이 커지”는 상황은 한동안 병행될 것이다. 이때 비평의 역할은 일상의 정치성을 놓거나 놓치지 않는 것이다.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는, “대안보다 먼저 일어나는 이행으로서의 에너지”4가 이미 일상 속에 잠재되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번 계절에 출간된 이주란과 임솔아의 신작 역시 일상의 사건을 통해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두 소설 속 우정과 이별은 그 중요성만큼이나 수없이 남용되고 오용되어온 연대의 가치를 되짚어보게 한다. 서로 다른 일상을 사는 ‘나’와 ‘너’는 어떻게 만나 ‘우리’가 되었는가. 광장에 모였던 ‘우리’는 왜 다시 ‘나’와 ‘너’가 되어 각자의 집으로 흩어졌는가. ‘나’에 대해 말할 용기와 ‘너’에 대해 들을 용기가 ‘우리’ 모두에게 부족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어느 것 하나 정치적이지 않을 수 없는 질문들이 인물들의 일상에 빼곡히 들어차 있다.

 

 

이주란 『해피 엔드』(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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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이별은 두가지 경우로 나뉜다. 작위에 의한 이별과 부작위에 의한 이별. 이주란의 『해피 엔드』는 후자의 경우다. 요컨대 ‘원경’이 한 것보다 ‘나(기주)’가 하지 않은 것에 주목해야 한다. 소설은 “나 자신 그 자체”(28면)로 존재하게 해주었던 둘도 없는 친구인 원경과 ‘사소한’ 계기로 멀어진 기주가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떠나는 여정을 다룬다. 이때의 사소한 계기란 원경의 장난이 기주의 마음에 정체 모를 얼룩을 남긴 일을 말하는데, 문제는 별것 아니어 보이는 일이 왜 유독 기주에게만 상처가 됐냐는 것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주의 세계를 알아야 한다. 기주에게는 치명적인 정보가 원경에게 누락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이 사건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시도 때도 없이 “무자비한 폭력과 간지럼을 반복하던”(29면) 아버지, 가난과 폭력에 지쳐 “여분의 사랑까지 줄 힘이 없”(79면)었던 어머니, 높은 곳에 오를 때면 “누군가 나를 밀어버릴 것 같아 다리가 후들거”(83면)렸던 낮과,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 되면 그것들을 휘두를 생각”으로 “식칼과 망치를 베개 밑에 깔아두”(90면)었던 밤들. 기주의 세계에는 있지만 원경의 세계에는 없는 것들이다.

다시 말해 서로 다른 대본을 들고 있는 두 사람은 언제고 관계에 실패할 위험을 안고 있었던 것이다. 사건의 내막에 자신이 모르는 이유가 있음을 눈치챈 원경은 솔직하게 말해줄 수 있을 때 연락해달라며 화해의 손길을 건네지만, 기주는 원경의 메시지에 답하지 못한다. 자신의 존재가 이해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상황이라면 차라리 침묵을 택하는 것이 지옥 같은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기주의 생존전략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장난이 아버지의 폭력과 이어지리라고는 꿈에도 몰랐을 원경, 원경마저 자신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에 침묵을 선택한 기주, 둘 중 누구에게도 이별의 책임을 묻기 어렵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지옥 같은 세계’이다. 어째서 기주는 삶보다 생존을 먼저 배워야 했는가. 기주는 그런 가족도, 그런 가난도 선택한 적이 없다. 그저 남들보다 조금 작은 손톱을 가진 것처럼 그런 세계가 주어졌을 뿐이다. 따라서 독자는 기주가 원경의 메시지에 답할 수 있기를, 그녀가 주어진 운명에 지지 않고 자신의 일상과 우정을 회복하기를 바라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이주란의 소설에는 자신의 선택과 무관하게 주어진 세계에서 죄책감을 느끼는 인물들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그들은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이 최우선의 과제라고 생각하는데, 그럴수록 오히려 자신과 멀어지는 딜레마에 빠진다. 자기부정, 자기혐오, 자기방어를 반복하는 인물들은 결국 “생각을 멈추자”(12면)는 말만 주문처럼 되뇐다. 그런 점에서 원경과 무관한 기주의 일상은 주목을 요한다. 실패가 두려워 되도록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시도하지 않는, 즉 ‘하지 않음’이 삶의 기본값인 기주가 무엇인가를 ‘하는’ 순간들이 포착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수프를 나눠 먹은 것이 인연의 전부인 ‘윗집 노인’의 고독사 이후, 기주는 장례를 포기한 그의 가족 대신 혼자만의 장례를 치른다. 기주의 애도는 아무도 모르게 이뤄진다는 점에서 사회적인 의미를 얻지는 못하지만, 타인을 향한 닫히지 않는 마음을 드러냄으로써 관계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 기주는 오히려 가까운 관계가 아니었기에 나눌 수 있었던 미지근한 온기를 떠올리며 “가까운 사이란 무엇일까?”(17면)라고 자문한다.

‘장과장’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기주는 엉뚱하면서도 다정한 직장동료인 장과장에게 인간적인 관심을 느낀다. 물론 원경과의 이별을 경험한 후 헤어지지 않기 위해 곁을 주지 않는 것이 자신의 진심이라 여기며 가까운 관계가 되는 것을 경계한다. 그러나 기주는 원경을 만나러 가는 중요한 순간에 장과장과 함께한다. “올 때는 좀 걸렸지만 갈 때는, 이제 가기만 하면 되는”(136면) 기주는 장과장에게 동행을 부탁하고, 장과장은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잘될 거예요”라는 응원으로 화답한다. 기주는 그 말을 “반만 믿기로 했다”며, “반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반을 믿기로”(119면)라고 덧붙이는데, 이렇듯 기주의 믿음이 반전되는 순간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관계의 장과장이 곁에 있다는 사실은 우정의 알맞은 거리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결국 기주는 원경을 만나지 못한다. 원경은 끝까지 ‘먼 풍경〔遠景〕’으로 남는다. 그러나 기주의 용기를 실패로 단정할 필요는 없다. 그녀가 극복해야 했던 것은 처음부터 자기 자신이었으므로, 완고했던 마음의 문을 열고 타인에게로 향한 순간 그 여정은 이미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주란의 『해피 엔드』에는 기주의 변화를 뒷받침할 만한 ‘반전의 계기’가 없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있지만 보이지 않는다. 세계에 대한 기주의 불신을 ‘절반의 믿음’으로 바꿔놓은 것은 극적인 사건이나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변화를 일으킨 것은 일상에 이미 존재하고 있던 사소한 다정과 미지근한 온기다. 이주란의 고유성은 “실물의 세배 크기로 보이는 거울”(25면)로 봐야 겨우 보이는 그 마음들을 놓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비관적인 인물처럼 보였던 기주의 일상을 통과한 후에 독자들이 마주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따스함이다. 희망은 완전한 절망을 유보하게 하는 ‘아주 작은’ 순간들에 깃들어 있다는 것, 그것이 이 책의 제목이 ‘해피 엔드’인 이유일 것이다.

 

 

임솔아 『나는 지금도 거기 있어』(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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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연대를 위해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동일이 아니라 더 많은 차이임을, 그러한 차이를 은폐한 연대는 성공해도 실패한 것임을 임솔아는 알고 있는 것 같다. 임솔아의 『나는 지금도 거기 있어』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폭력적인 이분법으로 모든 것을 재단하는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그리고 그때마다 자신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느낀다. 누구나 어느정도는 자신이 맡은 역할을 연기하면서 살아가지만, 그렇다고 누구에게나 같은 정도의 연기가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보통’과 ‘평범’이라는 기준의 바깥에 위치한 어떤 이들은 소위 말하는 “애티튜드”(22면)를 갖추기 위해 자기 자신을 속여야 한다. ‘좋은 사람’이 되어갈수록 ‘없는 사람’에 가까워지는 그들의 연기는 진정한 자신을 무기한 연기(延期)하는 한에서만 가능하다. 그들은 끊임없이 세계의 눈동자를 의식하고 쉴 새 없이 주변의 눈치를 살핀다. “없는 사람 같아서 제거할 필요도 없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야말로 생존에 있어서는 더없이 탁월한 재능이라는 걸”(30면), 그들은 배워서가 아니라 겪어서 알고 있다.

소설은 각자의 이유로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며 살아온 네명의 예술가가 그룹 전시를 하기 위해 만나며 펼쳐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각 부의 중심인물인 네 여성은 각자의 고유한 경험이 담긴 작품을 만들며,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친밀한 관계를 형성해나간다. 그들은 작품에 대해 평가하거나 예술관을 두고 토론하는 대신 사소한 일상을 함께하며 서로의 이야기를 듣는다. 서로 연결될 수밖에 없는 관계를 통해 원치 않게 선택했던 가면을 벗고 조금씩 자신의 얼굴을 마주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동시에 임솔아는 마이너리티를 공유하는 것이 곧장 연대로 이어질 것이라는 환상을 탈피한다. 예컨대 “티가 나지 않”(38면)는 장애를 가진 ‘화영’과 “감추는 게 불가능”(66면)한 장애를 가진 ‘석현’의 연애가 그렇다. 서로의 상처를 알아본 두 사람은 이내 사랑에 빠지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나’와 ‘너’를 구분하고 계산하기 시작한다. 가면 뒤의 얼굴을 공유한 두 사람은 자연스레 더 많은 어긋남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화영은 이별 직후 “무엇을 기대했던 걸까”라고 말하며, “손 하나가 없는 사람과 귀 한쪽이 안 들리는 사람의 사랑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를 거라고, 마땅히 그럴 거라고 여겼던 걸까”(77면)라고 덧붙인다. 그러한 화영의 자문은 아플 만큼 집요하지만, 가면 뒤의 얼굴을 마주하기 위해 결코 회피할 수 없는 질문이기도 하다.

레즈비언 커플인 ‘우주’와 ‘선미’의 동거도 마찬가지다. 친구들 사이에 끼기 위해 ‘여자다움’을 연구하고 연기해온 우주는 선미를 만나고 나서야 온전한 자신으로 살아가게 됐다고 느낀다. 그러나 ‘작은 방’만으로도 행복한 우주와 달리 선미는 정상성의 사회에 편입되기 위해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들을 만난다. 선미는 부를 이름조차 없는 불안정한 관계를 두려워하고, 우주는 그런 선미에게 안정적인 일상을 선물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우주는 자신이 여성인 이상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어쩌면 두 사람의 이별은 “그럼 그냥 같이 있을까”(120면)라는 문장이, “네가 남자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121면)라는 문장으로 바뀌었던 순간 이미 예정됐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주는 선미와의 이별을 “함께 만들어낸 축복”이라고 말한다. 헤어짐을 두 사람이 “기어이 같이” 만들어낸 “결실”(170면)이라고 믿는 우주의 진심은, 가면 뒤에 숨겨진 진짜 얼굴을 마주 본 적 있는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단단한 마음을 보여준다.

「초파리 돌보기」를 비롯한 임솔아의 최근 소설에는 문학의 역할에 대한 ‘순수한 낙관’ 같은 것이 감지되는데, 그런 점에서 각기 다른 세 인물의 사연을 하나의 서사로 연결하는 ‘정수’의 캐릭터는 중요하다. 정수는 뛰어난 공감능력 덕에 타인의 이야기를 쉽게 지나치지 못한다. 그런데 세상은 정수를 유별난 사람으로 치부할 뿐만 아니라 “오버하지”(261면) 말라고 다그치기까지 한다. 결국 정수는 타인의 이야기에 담긴 진실을 훼손할 거라는 두려움에 자신의 존재감을 지워가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타인의 곡절이 흘러들어오는 일은 중단되지 않는다. 정수에게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 일은 “무언가를 먹는 것과”(256면) 비슷한데, 그녀는 그것을 “외부의 자극”으로 여기지 않고 자신의 “내부에 자리”(257면)시키기 때문이다. 그러한 경청의 태도는 작가가 생각하는 문학의 윤리를 가늠하게 한다. 요컨대 임솔아는 이야기의 주인도 아니고 청자도 아닌, ‘나’의 이야기도 아니고 ‘남’의 이야기도 아닌, 보이지 않는 중간 지대에서 문학의 역할을 찾는다. 정수 역시 “스스로 경험한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에 끝끝내 알 수 없는 부분”(292면)을 남겨둔 채로 자신의 작업을 계속해나간다. “얼마나 오래 곁에 서 있든” “희미한 그림자로만”(320면) 기억될 그 자리에서, 가장 오래 듣기 위해 알맞은 거리를 모색하면서, 정수는 “지금도 거기 있다”고 말한다.

임솔아의 『나는 지금도 거기 있어』는 각자의 일상에 파편처럼 흩어져 있는 이야기들을 그러모아 퍼즐 조각을 맞추듯 재배열한다. 이때 주목해야 하는 것은 ‘나’의 일상을 사유하는 일과 ‘너’의 일상을 사유하는 일이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소설의 말미에 등장하는 ‘당신’, 정수가 혼자라고 생각했던 순간에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함께하고 있었다고 묘사되는 당신은 바로 그 연결이라는 조건 자체를 가리킨다. 자신의 일상에 대해 사유하는 ‘나’는 언제나 또다른 ‘나’를 전제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일상의 감수성을 재조정하는 소설들이 시사하는 정치성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나’와 같으면서도 또다른 방식으로 올바른 세계를 고민하는 ‘너’가 있다는 사실이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상상력도, 새로운 연대에 대한 가능성도 그 작은 점들로부터 다시금 시작될 것이다.

 

 

  1. 정주아 「평범한 일상을 위한 고군분투」, 『창작과비평』 2023년 가을호 참조. 인용은 419면.
  2. 황정은 「가까스로, 인간」, 김애란 외 『눈먼 자들의 국가』, 문학동네 2014, 92~93면. 인용한 부분의 ‘그’는 세월호참사 유가족을 가리킨다.
  3. 정주아 「일인칭 글쓰기 시대의 소설」, 『창작과비평』 2021년 여름호, 56면.
  4. 황정아 「미래를 도모하는 문학」, 『창작과비평』 2022년 겨울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