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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테주 콜 『오픈 시티』, 창비 2023
한 자유주의자의 초상
이정진 李廷進
서울대 영문과 강사 godard1@naver.com
‘오픈 시티’(Open City, 2011, 한기욱 옮김)라는 상징적인 제목은 여러 연상을 불러일으키지만, 일단 모더니즘풍의 스타일을 예고한다. 시인 보들레르(C. Baudelaire)의 경우가 전형일 터인데, 고독한 배회자 ‘플라뇌르’(flâneur)를 내세워 거대한 근대도시의 명암을 살피는 문학적 기획은 모더니즘의 유력한 한갈래이다. 이 소설을 펼치면 바로 그런 플라뇌르형 인물이 등장한다. 정신과 레지던트로 일한다고만 밝히는, 뉴욕 주민인 화자는 “지난가을 저녁 산책을 시작”(25면)한 것이 그저 “저녁들의 단조로움을 깨”(30면)고 “정신적으로 엄격히 규제된 업무 환경에서 놓여나는” 개인적인 “치료법”(32면)이라고 말하지만, 이런 무심한 언사와는 달리 그의 산책은 강박적이다. 직업활동 이외의 거의 모든 여력을 산책에 쏟아붓는 이 인물은 의식적인 도시의 탐구자이다.
화자는 한참동안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다. 독자들은 화자가 옆 방 남자와 인사하는 대목에서 줄리어스라는 그의 이름을 처음으로 듣게 된다. 나이지리아 출신 흑인이라는 인종적 배경이 밝혀지는 것은 그보다도 후이고, 그 과정 또한 점진적이다. 이렇듯 화자에 대한 정보를 통제하며 더디게 실체를 부여하는 것은 소설 초반부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예술적 장치이다. 서평가 제임스 우드(James Wood)는 이런 장치로 말미암아 “이 작품이 우리가 읽기 전에 시작된” 듯한 느낌을 준다고 평한다. 플롯 전개의 작위성은 물론이고, 작가의 통제 흔적을 지우는 데 꽤나 성공했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런 스타일은 화자에게 ‘초연한 관찰자’라는 긍정적인 면모를 부여하는 효과적인 포석이다. 우드 또한 화자를 둘러싼 모호함 때문에 독자들은 화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로부터 그를 읽어내려는 유혹을 느끼고, 그 점진적인 발견의 과정이 플롯을 대체하는 측면이 있다고 본다.
독자를 의식하지 않는 진실한 화자로서 줄리어스라는 인물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자못 흥미롭다. 대부분의 독자들은 그가 자신의 탐색대상인 거대도시 뉴욕의 방대함을 감당할 만한 정신의 소유자임을 빠르게 인정할 것이다. 화자의 산책은 기본적으로 무작위한 경로를 따르면서도, 멜빌(H. Melville)과 말러(G. Mahler)를 비롯한 다수의 예술가들과 관련된 장소에 가닿는 경우가 많다. 세세한 지식들이 자못 과시적으로 쏟아지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첨예한 비평적 사안에 대한 독자적인 사유가 펼쳐지고는 한다. 예컨대 숱한 예술적 실험대상이 되어온 9·11참사 현장을 찾은 화자는 재앙의 직접적인 묘사를 금기시하는 비평적 합의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런 금기는 잔혹행위가 이미 체계적으로 사람들의 시선에서 가려지게 만드는 현대적 경향에 동조하는 태도가 아니냐는 것이다. 이 질문은 맥락과 형태를 달리해 소설 곳곳에 등장하며 논의의 포괄성을 확보한다. 그밖에도 도시를 배회하다 우연히 마주친 각양각색의 대상들이 자극하는 그의 사유는 지구온난화나 테러리즘의 정당성, 미국 민주주의의 한계처럼 하나같이 문명적 차원의 문제들로 향한다. 비교적 짧은 분량에도 이 소설이, 이즈음 낯설어진 개념인 ‘총체성’에 도전하는 느낌마저 주는 이유일 것이다.
소설의 3분의 1 지점쯤이 되면 화자의 자기상은 명확해진다. 거듭해서 통념을 깨는 것을 즐기는 모습의 그는 자신의 지성에 대한 자부심이 지나치다. 오만한 이 인물에 대한 독자의 호감이 유지되는 것은 앞서 설명했듯 인물과의 거리를 지우는 독특한 스타일 탓도 크지만, 무엇보다도 그가 자기 지성의 쓸모를 찾고자 애쓰기 때문이다. 그는 거대도시 뉴욕을 “쓰이고 지워지고 다시 쓰인 팰림프세스트”에 비유하면서, 소수자들이 희생당하고 지워진 역사의 ‘판독가’를 자처하고 더 나아가 “이 이야기들 속 내 역할과 연결해주는 선을 발견하고 싶었다”(130면)고 말한다. 과연 그는 도시를 배회하면서 비극적인 역사가 현재에도 가차없이 반복되는 현장을 거듭 목도하게 되는데, 비극의 당사자들은 신기하게도 화자에게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는 데 주저함이 없다.
그러나 화자가 3주간 브뤼셀에 체류하는 동안 파루크라는 이름의 모로코 출신 청년과 만나면서 그에 대한 독자들의 시선은 급격히 조정될 수밖에 없다. 자신을 급진적인 이슬람 지식인으로 내세우는 파루크는 화자 줄리어스와 동류이고, 그를 되비추는 거울 노릇을 한다. 둘 사이의 정신적인 힘겨루기가 시작되면서 이 작품은 비로소 소설다운 소설로서 출발한다. 둘은 팔레스타인 등 정치적 행동 가능성의 범위에 대한 입장 차이를 드러내는데, 파루크가 헌신을 다짐하는 변혁의 비전은 줄리어스에게는 비현실적이다. 그는 바로 그런 이유로 파루크에게 끌리지만, 동시에 그의 마음은 그 정치적 열정을 폄하할 근거를 찾느라 바쁘게 움직인다. 상대가 지적으로 덜 여물었다는 증표를 발견할 때마다 은근한 기쁨을 표하고, 더 나아가 자신의 정신적 승리를 위해서 일체의 정치적 가능성을 사라지게 할 파국의 도래마저도 상상한다. 그 댓가는 그간 소중하게 가꿔온 자신의 정치적 기획의 말소이다. “유일한 길은 어떤 대의도 갖지 않는 것”이라 생각한다면 “그건 분노 그 자체보다 더 심각한 윤리적 과오”(219면)인 것이다. 과거사에 관한 충격적인 사실이 폭로되는 등 소설 후반부의 전개는 화자의 자기기만적 면모를 강하게 시사한다. 다수의 서평들이 이 인물에게 속지 말라고 말하는 이유일 것이다.
나는 이 소설이 이 시대 자유주의자들에 대한 생생한 전형을 제시했다는 우드의 평가에 동의하는 편이다. 여기서 자유주의는 흔한 미국식 용례로서 공동체와 약자에 대한 정치적 선의를 실천하려는 태도를 지칭하고, 민주국가의 상당수 시민들이 표명하는 ‘이념’에 해당된다. 이 소설의 화자이자 주인공인 줄리어스는 엄청난 지적 욕구 등 개성적인 면모가 돋보이지만, 바로 그런 자질과 무관하지 않은 강렬한 자유주의적 신념 때문에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는 시련까지 맞닥뜨리게 된다. 사실 소설의 논리를 벗어나 평소의 상식으로 이 인물을 바라보면, 혹은 나 자신을 소설 속 상황에 대입해보면 이 인물을 미워하기 어려웠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확실히 작가의 존재가 느껴지는) 이 작품에 빼곡히 채워진 지적 사유를 그저 문제적 인물의 허위의식을 보여주는 장치로만 보기도 어렵다.
첫인상과는 달리 유행하는 예술적 모델의 흔한 모방작이 아니었고, 시대정신을 담고자 하는 분투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다만 이 소설이 작가 테주 콜(Teju Cole)의 장편 데뷔작인 만큼 의욕이 지나쳐 예술적 통제를 놓친 면도 있는 듯하다. 후속작이 기대되는, 주목해야 할 작가 목록에 올려야 할 소설가임에는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