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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세계서사, 어떻게 쓸 것인가
한국의 ‘글로벌’ 담론을 추적하다
박노자 朴露子
노르웨이 오슬로대 인문학부 문화연구 및 동양언어학과 교수. 저서 『박노자의 만감일기』 『주식회사 대한민국』 『당신이 몰랐던 K』 등이 있음.
volodya@hanmail.net
‘글로벌’(global)은 ‘지구’, 즉 ‘globe’에서 파생된 형용사다. 한국의 ‘글로벌’ 담론의 역사를 고찰하자면, ‘지구설’ 자체가 서구에 비해 한국에 다소 늦게 알려졌다는 사실부터 거론해야 할 것이다. 동아시아에서 본래 ‘평평하다’고 생각해왔던 땅이 사실 둥근 모양이라는 점을 처음 보여주는, 예수회 선교사들이 북경에서 제작한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는, 그 제작의 이듬해인 1603년에 조선까지 전해졌다. 북남미까지 다 그려진 둥근 지구의 이 지도가 조선에 온 뒤 비로소 한국의 ‘글로벌’ 담론의 성립이 가능해졌다고 봄이 타당할 것이다. 이러한 성립조건은 이 담론이 어디까지나 이중의 패권적 시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곤여만국전도」를 그린 유럽 선교사들은 유럽을 ‘천주상제성교(天主上帝聖敎, 기독교)를 숭봉하는’ 문명의 영역으로, 북남미를 유럽인들이 ‘발견한’ 야만과 개척의 ‘신대륙’으로, 그리고 아프리카를 역시 야만의 지대로 각각 그리는 등 그들의 자기중심적 세계관을 지도에 유감없이 내비쳤다. 동시에 중국인을 상대로 선교를 하는 이들이 중국에서 한문으로 제작한 지도인 만큼 지구의 중심에 명나라가 그려져 있었고 조선은 ‘기자(箕子) 시대부터 중국의 군읍(郡邑)’이라고 못을 박았다. 이처럼 조선에서 ‘글로벌’이 가능해진 그 첫 순간부터 조선의 ‘글로벌리티’(지구의식, 지구론)는 유럽과 중국이라는 이중의 패권적 시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물론 이 이중의 패권적 시각을 상대화하는 장치 역시 조선의 자의식에 충분히 갖추어져 있었다. 조선인들이 ‘보편’으로 생각했던 성리학적 세계질서에 따르면 조선은 명나라의 ‘적통’으로 ‘소중화’ 내지 ‘오랑캐 청나라’보다 더 문명적인 진정한 ‘중화’의 위치에 있었다. 동시에 ‘서양의 사교(邪敎)’인 천주교를 배격하면서 서양을 ‘금수의 영역’으로 하위 배치시킬 수도 있었다. 한데 이와 같은 조선의 자기중심적 주장을 가능케 했던 성리학적 보편의 틀은, 두차례의 아편전쟁과 청일전쟁을 거치며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서양의 기술을 수용하되 종래의 정치·사회 제도를 그대로 지킨 중국이, 서양의 입헌군주제까지 다 받아들인 일본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던 것이다. 이 역사적 분수령을 전후하여 한국의 ‘글로벌리티’ 담론에 중국의 패권적 시각이 남아 있기란 사실상 불가능하게 됐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중국의 입장에 다소 우호적이거나 친화적인 담론들이 공론장에 종종 제기되어도 중국을 중심에 놓고 세계를 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되고 말았다. 그 대신 근세부터 그 영향력을 이미 행사하기 시작한 또 하나의 패권적 시각, 즉 유럽중심주의가 줄곧 한국의 공론장을 장악해온 것이다. 물론 유럽중심주의도 숱한 도전들에 직면했지만, 그 도전들조차 유럽중심주의의 내재적 논리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유럽중심주의는 1880, 90년대 ‘문명개화’ 담론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에 착근되기 시작했다. ‘문명’의 중심은 서구나 (특히 개신교 개종자들의 경우) 미국이었고, ‘문명’의 언어는 대개 서양 용어들을 일본에서 번역한 번역어를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후꾸자와 유끼찌(福澤諭吉)가 조어한 것으로 유명한 경쟁(競爭, ‘competition’의 번역어)부터 ‘신문’ ‘공화국’ ‘헌법’ ‘대통령’ ‘회사’ ‘민족’까지, 일본식으로 번역된 근대 서구의 주요 개념어들이 ‘문명한’ 한국어에 자리를 잡았다. 번역된 개념어와 함께 새로운 개념들이 도입되며 ‘문명인의 상식’을 결정짓게 되었다. 정기적으로 출석을 해야 하고, 헌금을 내야 하며, 복수 소속을 가져서는 안 되는 (기독교를 모델로 하는) ‘종교’ 개념부터 모든 ‘국민’이 배타적 소속감을 느끼고 병역의무 등을 다하고 동시에 정치참여도 할 수 있는 ‘국민국가’ 개념까지, 조선시대에 없던 새로운 개념들이 ‘당연한’ 상식으로 받아들여지게 됐다. 과거의 중화 담론이 그랬듯 ‘문명개화’ 담론도 지극히 위계적이었다. 새로운 공간적 위계질서에서는 예컨대 동유럽은 서유럽보다 덜 ‘문명적’이었고, 아시아의 ‘반(半)개화’ 국가들은 동유럽만도 못했는가 하면, 아프리카나 미주의 ‘야만인’들은 ‘당연히’ 구미권 ‘문명국’들의 ‘지도’(즉, 지배)를 감수해야 했다. 중화 질서하에서 조선이 ‘소중화’의 위치까지 오를 수 있었듯이, 이 새로운 질서에서도 조선은 잘만 하면 ‘문명국’으로 비상하여 그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해방 이전 이와 같은 기조의 문명개화론적, 즉 서구중심주의적 시각에 대해 두개의 대규모 도전이 있었다. 하나는 왼쪽으로부터의 도전, 즉 공산주의자나 아나키스트 등 좌파의 도전이었다. 좌파의 입장에서 서구 중심의 ‘문명’은 자본주의, 그리고 자본주의적 착취와 억압에 씌워진 미명에 불과했다. 나아가 좌파는 한국에 번역되어 정착한 수많은 개념들을 비판적으로 해부했다. ‘공화국’은 억압과 착취의 현실 위의 상층구조에 불과하다는 점, ‘민족’은 자본주의 시대에 비로소 구성될 수 있는 인간 집단이라는 점 등은 1920, 30년대 좌파의 비판적 근대관의 주요 요점들이었다. 단, 좌파도 결국 자본주의적 생산력 발달을 사회주의로의 전환의 전제조건으로 본 만큼 결국 기존 서구중심주의적 사회발전의 논리와 그 궤를 같이했다. 또 하나의 도전은 오른쪽으로부터의 도전, 즉 일제 말기의 ‘일본주의’ ‘동양주의’였다. 일제 말기 어용 이데올로기 역시 서구중심적 근대의 근저에 깔린 억압과 착취 비판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이 경우 비판의 대상은 보편적 제도로서의 자본주의가 아닌, 특수 인간 집단으로서의 서양 내지 백인, 심한 말로는 귀축영미(鬼畜英米, 귀신과 가축 같은 영국과 미국)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같은 제국주의 열강이던 일본이 자본주의나 제국주의의 한계를 진정으로 넘을 수 있었다는 뜻은 결코 아니었다.
한데 이 두 도전은 1945~48년 해방기 이후로 남한에서는 힘을 잃었다. 일제 말기의 반(反)서구적 극우사상은 족청(조선민족청년단) 등 남한의 일부 극우이념 형성에 영향을 미쳤지만, 이들 국수주의 극우는 남한사회의 주변부에 머물렀다. 한편 분단체제하 남한에서 축출당한 좌파 이데올로기가 북한에서는 1960년대 초반 이후로 ‘주체’의 깃발 아래 어떤 면에서 ‘소중화’의 논리를 연상케 하는 자기중심적인 폐쇄적 이념으로 변모됐다. 1980년대 이후 이 이념은 남한의 시민사회로도 비공식적으로 유입됐지만, 역시 주변부에 머물고 있었을 뿐이다.
한국 공론장의 주변부에서는 각종 신흥종교와 함께 주체사상 등 폐쇄적인 좌파 민족주의나 반서구 극우주의 등을 찾을 수 있었지만, 1949년 건국 초기부터 지금까지 그 주류는 서구중심의 글로벌리티를 기본 전제로 깔고 있었다. 단, 여기에는 유의미한 단서 두개를 달아야 할 것이다. 첫째, 이 서구중심주의는 1960년대 이후부터 또 몇차례의 도전을 받아 훨씬 더 풍부한 비판적 논의를 흡수하며 ‘균형’을 향해서 나름대로 진화했다. 둘째, 한국의 위상 자체가 1948년 이후 당시와는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에, 오늘날의 한국적 서구중심주의는 예컨대 1950년대에 비해 훨씬 더 자기중심적이기도 하다. 결국 한국도 이제 ‘명예’ 서구 국가가 된 만큼 서구중심주의는 동시에 한국의 자기중심적 논리일 수 있다는 것이다.
1950년대만 해도 서구중심주의의 흐름은 거의 도전을 받지 않았다. 미국의 원조가 절대적이었던 당시 상황을 염두에 두면 충분히 납득할 만하다. 이승만정부가 ‘반공’에 방점을 찍은 반면 『사상계』 등의 재야는 ‘민주주의’를 강조했는데, 그 당시의 ‘반공’도 ‘민주주의’도 마찬가지로 미국발 담론이었다. 미국이 아닌 반서구 극우사상 전성기의 일본을 그 배경으로 한 박정희라는 인물의 등장도 상황을 크게 바꾸지 못했다. 그러나 1963년 이후부터 차차 괄목할 만한 변화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여권은 국가주도 개발을 실시하는 데 있어 5개년 경제계획 등 일본제국 말기의 ‘통제경제’ 유산을 활용하기도 했는데, 구미권과 공유하는 경제발전이라는 목표를 지향하는 가운데 구미권과 다소 다른 역사적 경험이라는 자산을 동원해야 했다. 한데 동시에 1965년 한일수교를 반대하는 『사상계』 등 광의의 야권 역시 비(非)서구 반제 민족주의라는 이념적 자산을 동원하기에 이르렀다. 1920, 30년대 못지않게 서구중심주의적 ‘상식’들이 또다시 도전을 받게 되었다.
1960년대 중반부터 그랬듯 1970, 80년대에도 서구중심주의라는 종래의 주류 이데올로기를 수정하는 문제에 있어 여와 야는 일종의 평행선을 그렸다. 본인이 한때 체험했던 ‘만주국 모델’을 기반으로 한 국가주도 개발의 성공에 고무된 박정희는 1970년대에 접어들어 ‘서구 보편’의 민주주의와 결별하고 유신독재체제를 구축하면서 문화 영역에서 국수주의와 복고주의를 장려했다. 공식 영역에서 서구 위주로 설정된 ‘보편’보다 ‘우리 민족’이라는 ‘특수’가 더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동시에, 야권도 탈춤이나 마당극, 그리고 단재 신채호 사상과 같은 한국적인 저항적 민족주의 전통에 눈을 돌렸다. 동시에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에 영감을 준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등 외국의 저항적 민족주의도 한국의 반독재운동에 중요한 참고틀이 되었다. 독재냐 민주냐를 두고 여야가 갈렸지만, 점점 부유해지고 자신감이 생기는 나라에서 서구 본위의 ‘보편’에서 ‘민족’이라는 이름의 ‘특수’로 점차 눈을 돌리기는 마찬가지였다. 같은 선상에서 1980년대 중반 이후 운동권 일부로 주체사상이 도입되게 한 일등공신은 박정희 시절과 그후의 어용적 민족주의로 일관되는 역사 및 사회과학 교육이었을 것이다. ‘외세와의 투쟁’ ‘국난 극복’ 사관에 익숙해진 이들은,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 공적을 내세우는 문건을 접하고 나서 김일성이야말로 강감찬이나 이순신 이상의 구국 영웅이라는 생각을 비교적 쉽게 품을 수 있었을 것이다.
어용적 민족주의는 1970, 80년대에 학교에 다닌 한국인들의 의식세계를 강력하게 규정했다. 그러나 그 어용적 민족주의에는 치명적 결함이 하나 있었다. 국가주도로 형성된 민족주의 담론은 정치적인 이유로 식민지 시대를 비롯한 과거 트라우마의 제대로 된 거론 자체를 회피했다. 거론했다가는 지배 엘리트의 ‘민족적’ 명분부터 회의하게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친일파 문제를 거론할 경우 박정희뿐만 아니라 만주국 관료 출신인 최규하 등 공직자 집단 원로·중진층 상당수의 과거가 문제될 수 있었다. ‘위안부’ 문제를 거론할 경우 한일수교로 이어진 한일협상 과정에서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언급 자체가 왜 거의 없었는가에 대한 질문이 자연스럽게 나올 법했다. 결국 친일파나 ‘위안부’ 등을 비롯한 굵직굵직한 과거, 즉 역사적 트라우마들의 문제들은 1990년대 민주화와 함께 비로소 처음으로 제대로 제기될 수 있었다. 이 문제제기는 ‘민족’ 담론의 심화와 질적 진화를 의미했다. 친일파 미청산은 식민지 시대와 분단 시대 남한 사이의 ‘연결’을 가시화해 ‘민족국가’였어야 하는 한국의 탈식민 실패를 웅변적으로 보여주었다. ‘위안부’ 피해자들은 식민지의 조선인으로서도 피해를 당했지만 동시에 가난한 집안 출신의 여성으로서도 차별과 잔혹 행위에 노출되었기에 과거의 피해를 ‘민족 문제’로만 환원시킬 수 없음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특수’인 ‘민족’ 담론은, 이렇게 해서 세계사적 ‘보편’의 영역인 탈식민화나 젠더·계급·종족 차별의 교차성과 오버랩됐다.
서구중심의 ‘보편’(제도적 의회 민주주의 등)과 그 결이 상당히 다른 과거청산, 즉 집단의식과 기억 차원의 탈식민화는, 미군정 시기와 그후의 대미 종속적 원조경제 시기, 미국에 의존했던 독재 시기에는 이루어지지 못한 채 1990년대 이후 뒤늦게 진전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과정과 동시에 1990년대 후반 이후의 한국은 글로벌 신자유주의의 자장 속으로 흡수되었다. 냉전 종식 전까지 냉전의 최전선에 섰던 한국의 특수한 위치성은 영미발 신자유주의의 (미국과 미국 영향 밑에 있는 국제금융기관에 의한) 강요를 연기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냉전 종식 이후 이 예외성은 더이상 적용되지 않았고 박정희 식의 국가주도 개발 레짐은 더이상 버틸 수 없었다. 결국 아이러니컬하게도 한때 사회민주주의적 ‘참여경제’의 입장에서 박정희의 개발주의에 반대를 제기한 적이 있었던 김대중은, 대통령에 취임한 뒤에는 사회민주주의적 ‘보편’이 아닌 신자유주의적 ‘보편’의 입장에 서서 개발국가를 신자유주의국가로 변형시켜야 했다. 동시에 김대중과 노무현은 신자유주의적 글로벌 무한경쟁의 ‘보편’과 전혀 무관한 탈식민 프로젝트인 과거청산도 병행해야 했으며, 또한 과거의 한국형 국가주도 개발과 매우 유사한 궤도를 그리고 있었던 중국과의 경제적인 지역적 분담구조를 형성해야 했다. 즉, 1997~98년 이후 한국에서 그 성격이 매우 상이한 몇가지 국가적 프로젝트들이 동시에 진행된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세계적 ‘보편’과 한반도 차원의 ‘특수’에 대한 보수와 진보의 태도가 새롭게 규정됐다. 1960년대 이후 어용적 민족주의에 대한 강한 선호를 보여온 주류 (극)우파는 친일청산 등을 받아들이지 못해 1950년대로 후퇴하듯 다시 자본주의적 세계체제 규범 본위의 ‘보편’을 절대시하는 입장을 취했다. 2004년 이후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낸 ‘뉴라이트’들은 사실 1890년대 이후의 ‘문명개화’ 담론의 가장 극단적인 변종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민족’이라는 사상적 요소를 거의 제거시킨 그들은 자본주의와 시장, 종합적으로 ‘근대성’을 절대시하는 차원에서 일제 식민정책과 친일행위, 그리고 독재를 ‘긍정적인 역사유산’으로 둔갑시킨다. 문명개화 담론의 초기 대변자였던 이들 중에서 서재필 등이 그래도—온건했지만—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뉴라이트’들의 식민지 지배 합리화가 얼마나 극단적인 사상의 변모(내지 변질)를 의미하는지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반대로 진보는 사회·경제적인 영역에서는 북유럽 등의 사회민주주의적 ‘보편’에 기반한 신자유주의 비판을 전개하는 한편, ‘한반도 문제’ 영역에서는 탈식민화나 통일 문제 차원에서 ‘민족’이라는 이름의 ‘특수’에 대한 고민을 끝내 버릴 수 없었다. 2014년 이후 미중 갈등이 본격화되면서 보수는 미국 본위의 ‘보편’을 사수하는 입장에서 종종 극단적인 혐중 논리로 치달았는가 하면, 진보는 유럽의 온건파 정치인들과 비슷한 기조로 중국과의 경제 위주 ‘협력관계 유지론’을 펴왔다.
혐중 외에도 이슬람이나 페미니즘 등에 대한 혐오 경향을 보여주는 한국 (극)우파는 사실 그들의 롤모델에 해당되는 구미권의 (극)우파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여론을 둘러싼 경쟁에서 한국의 (극)우파가 거둔 성공들이다. 한국처럼 여론조사 응답자의 81%나 중국에 대한 ‘비호감’을 나타내는 서구사회는 어디에도 없다.1 마찬가지로 20, 30대 남성의 5.5%만이 페미니즘 지지에 동의한다는 자유민주주의 국가 역시 한국 이외에 없다.2 최근 대구에서 일어난 이슬람사원 건설반대운동은 세계적으로 봐도 상당히 높은 수위의 이슬람 혐오 현실을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극)우파의 이와 같은 여론전 성공들이 결국 1997~98년 이후에 실시돼온 초강력 신자유주의화 정책이 초래한 사회의 원자화와 전반적 보수화에 기인한다고 보는 것이 정당할 것이다.
한국의 진보는 (극)우파의 신자유주의적 글로벌리티나 각종 ‘혐오 장사’에 반대하지만, 한국적 진보의 상상력 역시 1960~80년대 개발국가 레짐에 여전히 묶여 있다. 진보, 보수 할 것 없이 한국의 공론장 전체가 2020년대 초반 한국의 선진권 진입의 공식화를 뜨겁게 환영했지만, 한국은 ‘선진국’(민주주의가 제도화된 고소득 국가)에 걸맞은 ‘국제적 책임’을 지려는 태도를 보이기보다는 여전히 개발주의 시대의 ‘국익 제일주의’에 더 치중한다. 한국은 여전히 선진권에서 난민 인정률(2.1%)이 가장 낮은 편에 속하는가 하면,3 1인당 탄소 배출량은 세계평균보다 거의 2배나 많다.4 한국의 (극)우파는 잔인한 난민정책이나 부실한 기후정책 등에 아예 관심도 없고, 주류 진보정당의 경우에도 기후나 난민 문제 등은 결코 의제의 중심에 있지 않다. 기후문제에 대한 관심이 있다 하더라도 탈성장 등 급진적 방식보다는 ‘저탄소 산업 개발’이라는 기술 본위의 개발주의적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다. 한국의 진보는 중국과의 정상적인 경제관계 운영 실패 등 ‘국익’을 해치는 현 윤석열정권의 친미·친일 편향 외교를 ‘국익 제일주의’ 관점에서—충분히 근거있게—비판하지만, 이스라엘 등 최악의 인권침해를 감행하고 있는 국가를 포함해 한국산 무기의 해외 수출 등에 대개 침묵하거나 아예 ‘ K-방산의 성공’을 같이 기뻐하기도 한다. 한마디로 한국의 (극)우파가 자본주의적 ‘보편’을 절대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반대편에 선 이들마저도 종종 일국 차원의 자본주의적 이해(利害)를 떠나 전체로서의 ‘인류의 이해’ 범위 내에서 사고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결국 한국의 진보는 지금 글로벌리티 문제와 관련하여 이중의 과제를 안게 되었다. 한편으로 ‘뉴라이트’ 식의 글로벌 자본주의의 절대화에 제대로 맞서려면 궁극적으로 같은 자본주의에 불과한 개발주의 논리를 넘어서 글로벌 차원의 비자본주의적, 탈자본주의적 대안을 제시할 줄 알아야 한다. 기후위기가 날로 심화되는 현금의 상황에서 글로벌 탈성장, 즉 자본 지배와 개발 논리를 지양하는 급진적 노선은 서구중심주의나 자본중심주의를 완전히 벗어난 하나의 대안적 글로벌리티를 대표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대안적 글로벌리티, 즉 서구중심이 아닌 ‘보편’을 모색함과 동시에 지금까지 ‘특수’의 탐구 속에서 축적된 긍정적이며 유의미한 유산을 비민족주의적 방식으로 재해석하여 글로벌화할 줄 알아야 한다. 예컨대 ‘뉴라이트’의 반발을 산 과거 친식민지 부역 문제는 식민주의의 체험을 공유하는 세계 주변부의 공통적 의제이며, ‘위안부’ 문제는 본질적으로 전시 여성인권이라는 보편적 문제다. 식민지 유산 청산이나 ‘위안부’ 피해자를 위한 정의구현을 둘러싼 지금까지의 한국 시민사회의 노력들은 충분히 글로벌화되어 특히 세계체제 주변부에서 상당한 관심을 끌고 공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노력들을 지속하는 것이 ‘위안부’ 피해자들의 강제연행을 포함해 식민지 피해를 똑같이 경험한 북한과의 대화 재개를 위한 차후의 노력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아시아 곳곳에서 민중항쟁의 노래가 된 「님을 위한 행진곡」처럼, 한국사회의 특수한 투쟁 경험들이 세계체제 주변부의 ‘보편’으로 수렴되는 것이야말로 서구중심주의를 넘어 진정한 ‘보편’에 도달하는 가장 정당한 방식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자면 앞서 언급한 후꾸자와 유끼찌의 그 악명 높았던 ‘탈아입구론’을 꼭 이은 듯한 비서구 지역과 그 출신에 대한 아류 제국주의적인 한국 주류사회의 태도부터 근절해야 한다. 한국인들이 매일 먹는 식량의 상당부분을 생산하는 국내 농장들의 캄보디아 출신 이주노동자들이 여전히 컨테이너에서 살면서 임금체불과 폭행, 폭언, 성추행에 시달린다면, 과연 캄보디아 사회가 한국의 근현대적 여정과 그 성취들을 하나의 ‘보편’으로 수용할 수 있겠는가? 한국의 주류사회가 더이상 스스로를 ‘명예 백인’ ‘명예 서구인’으로 여기지 않으며, 아프리카, 아시아, 중남미의 주변부인들과 동등한 입장에 서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해야 한국적 ‘특수’가 세계체제 주변부의 ‘보편’으로 폭넓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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