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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규리 李珪里
1955년 경북 문경 출생. 1994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앤디 워홀의 생각』 『뒷모습』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당신은 첫눈입니까』 등이 있음.
vora2234@hanmail.net
함께 운 적 없지만 울고 있었지
灰色과 悔色과 懷色
사진 찍는 걸 좋아하지는 않지만
노출 콘크리트 벽 앞에서 우리 사진을 찍었지
벽이 거칠어서 마음이 놓여
실내에도 벽지를 바르지 않고 콘크리트를 그대로 드러낸 건
비밀이지만, 믿음이야
그런 날이 있지
세상이 너무 미끈하게 질주를 해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어
종일 은유 속을 오고 갈 때
그때 벽은 우리의 편,
회색의 편,
누군가의 편이 된다는 건 순전히 개인적이지만
회색의 고독이라는 게 맘에 들어
손으로 쓸어보면 차고 거친 실존들이
사방을 싸고 있을 때
우리 시를 썼지
—나 지금 울어도 돼?
—울어도 돼
회색(灰色)은 오해되기도 했으나
모든 처음과 나중은
회색의 다리를 건너야 하는 걸
회색(悔色)은 참회하고
회색(懷色)으로 품어주면서
노출 콘크리트를 색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회색팬츠 회색니트 회색코트 회색구두 회색가방 중 하나라도 회색을 착용한 날
회색은 실수를 하지 않아
우리는 쏟아지지 않았다
어려운 과정을 지나고 있을 때
작업실 문에 붙어 있던 글
非詩勿視
회색은 회색끼리 있을 때 두근거린다 증폭된다
왜 그러냐 묻는다면,
대답 대신 벽 앞에 너를 세우고 사진을 찍어주고 싶어
시절
꽃은 누가 선택하는 기분일까
안개꽃을 한아름 안고 현관 앞에서 떨고 있는 사람 있다면
우선 그를 안으로 들여야 하지
떨고 떨리는 일은 태생 이전이야
예리하게 진심은
예리하게 또 칼날이라
셋째 언니를 따라다니던 커다란 남자가 장미꽃이 가득한 바구니를 들고 대문 밖에 한시간을 서 있었지만 아버지는 대로했고 우린 아무도 문을 열어줄 수 없었다
‘근본이 없어’
근본은 장미보다 중요한 거구나,
대문을 열고 나간 아버지는 호통과 함께 꽃바구니를 내던졌는데 우린 꽃바구니가 아깝지 않을 만큼 무서웠다 남자는 막무가내 버티며 아버지를 더 돌아서게 하였고 끈질기게 찾아온 남자는 장미 때문일 리 없지만 언니와의 결혼에 성공했으나 장미꽃의 능욕만큼 남자는 언니를 학대했을까 굴욕이 꽃처럼 피어올라 장미 가시는 수시로 언니를 찔러댔을까 언니가 스물여덟에 떠난 이유를 달리 설명할 길이 없어 그렇게 우리에게 장미는 금기가 되었는데
오랜 후
장미가 아니라 안개꽃을 한다발 들고 현관 앞에 선 남자를 어떻게 해야 하나
슬픔을 더 보아서는 안 돼
안개꽃은 안개의 나라를 지나왔으니 장미의 시절이 아냐
생각과 달리
다른 말을 하고
낯선 모습을 보였던 시간은
나빠서가 아니라
날씨나 온도 같은 거였어
무엇으로도 생활을 구할 수 없을 때
누구나 제 안의 악마와 손을 잡고
극한에 떨어져보았을 거야
놀랍게도 아버지는 안개꽃을 받아 안고선
—꽃이 별을 가득 품었구나
지상에 내린 별들이 어느날은 수국이었다가 또 수선이겠지만
우린 얼른 화병에 남자를 꽂았다
지루하고 암울했던 그날들을 꺼내볼 때면
안개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떨리는 것만큼 아름다운 게 있느냐고
그거 마음이 나온 거라고
상처 입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에서
우리는 모두 별이 남긴 먼지1였을까
손금에서 손금으로 이야기가 이어져
저절로 슬픔에 길을 텄으니
떨고 떨리던 그 무늬가
어느날 어느 시 당신이라서,
―
- 슈테판 클라인 『우리는 모두 별이 남긴 먼지입니다』, 전대호 옮김, 청어람미디어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