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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장옥관 張沃錧
1987년 『세계의문학』으로 등단.
시집 『황금 연못』 『바퀴소리를 듣는다』 『하늘 우물』 『달과 뱀과 짧은 이야기』 『그 겨울 나는 북벽에서 살았다』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등이 있음.
og-jang@hanmail.net
신천은 흐르고 오리는 떠 있다
희망교 중동교 사이 오리 스물다섯마리, 백로 한마리 중동교 상동교 사이 오리 열마리, 백로 세마리, 왜가리 한마리 희망교 대봉교 사이 오리 여덟마리, 쇠백로 한마리 수달은 없다 수달이 산다는 신천인데 한번도 보질 못했다 그런데 희망교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매일 오갔는데 모르겠다 혁명은 1960년 2월 28일에 일어났다 한평생 이 고장을 떠나 산 적이 없는데 모르겠다 오리를 세는 날이 많았다 어제는 전 직장 경리과에 근무하던 H를 집 앞에서 만났다 악수도 없이 그는 다짜고짜 말했다 장형, 여기 성서공단 와보이 고자가 억수로 많더라 총무부장도 고자고 관리부장도 고자더라 고자 만나면 삼년 재수 없고 꼭 패가망신한데이 인사도 없이 휘적휘적 사라졌다 내가 고자인 줄 눈치챈 듯했다 고자라서 제3공화국에서 제6공화국까지 한 아파트에 붙박여 살았다 신천의 청둥오리들도 고자라서 시베리아로 안 돌아가고 여름을 견디는지 모르겠다 매일 저들을 세고 있는 고자가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겠다 고자이면서 고자가 아닌 척 너를 속이고 나를 속였다 신천이 흐른다 어제 흐른 물에 파이프 박아 내일의 물로 흐르게 한 신천이다 곽상도가 어깨띠 두르고 유권자에게 손 내밀던 신천이다 물가에서 장정들이 한낮에 신문지 펴놓고 소주를 마신다 신천은 흐르고 오리는 떠 있다
의자
의자를 개처럼 데리고 다니는 사람 있을까
개 대신 고독을 의자에 앉히고 진눈깨비 내린 비탈길을 내려간다 무릎이 없어서 의자에 앉을 수 없는
슬하의 오후였다
의자에 끌려가는 이를 전철에서 만났다 의자 앞에 정수리 숙이거나 변기에 기대 우는 날이 많았다
개새끼 죽일 놈
의자를 치켜들고 벌벌 떨거나 의자를 엎어놓고
후배위로 올라타는 똥개도 보았다
푹신한 소파를 꿈꾼 적은 없으나 각목으로 짠 직각의 의자, 반듯한 자세로 흐트러진 뼈를 간추리고 싶을 때는 있었다
노을 속에서 등 굽은 의자가
걸어가고 있다 기다림을 잃은 보폭이다
무릎 꿇고 통성기도하는 새벽이 아니다 손목과 발목 묶인 고문대도 아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옥중서신을 의자로 삼은 청춘도 아니다
골목에 내어놓은 의자가
먼눈으로 먼 산을 바라보는 오후다
동네 개들이 찾아와 오줌을 지릴 때도 있었으나 개의치 않는 자세, 추운 방에서 밤새 새처럼 오그려 잠든 자세
허리도 굽고 하루도 굽고
곧 쓰러질 듯 삐걱대는 저 의자에
너는
굽은 못을 박지 마라 의자는 의자가 아니다
의자가 의자로 있게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