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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장혜령 張慧玲
2017년 문학동네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발이 없는 나의 여인은 노래한다』가 있음.
jaineyre0@gmail.com
사랑의 역사
이야기의 시작은 모른다. 다만 시원이 있었고 태고가 있었다. 시원이 태고에게 먼저 속삭였는지, 태고가 시원에게 속삭였는지는 모른다.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하늘과 땅은 하나였고, 아직 쓰이지 않은 거대한 종이 더미처럼 하나였고, 책상에 앉아 서랍의 어둠을 꺼내어보는 외로운 사람처럼, 처음 세상을 열어본 이가 있어 산이 솟고 물이 흘렀다.
「초감제」1의 어느 판본에 따르면 그때 하늘은 흰 모래로 된 서른세겹의 종이 같았다 한다. 하늘 위에 세 하늘, 발 위에 세 하늘, 발아래에 세 하늘…… 서른세겹의 하늘은 서른세장의 백지만큼, 바스락거리는 백지의 영혼만큼 외로웠다 한다.
자신과 헤어지고 자신으로부터 찢겨야 하는 그 고통이 얼마나 오래였는지, 얼마나 크고 깊었는지는 모른다. 그로부터 별이 솟고, 동서남북의 사방이 생겨나고, 치유할 수 없는 세상의 고독이 별처럼 깊어 당신을 헤아린다는 말이 생겨났는지는 모른다.
그리하여 별을 헤아리는 줄 모르고, 밤하늘의 무수한 당신을 헤아려보는 헤아림 속을 인간은 헤아려왔는지도 모른다. 별의 길을 따르는 운명이 자신의 내부에 지도처럼 새겨져 있음을 모르면서. 자신의 지도를 모르는 사람처럼, 지도를 찾아 사랑처럼 영영 도처를 헤매면서. 시원과 태고의 끝없는 속삭임 속에 아직 하나의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는 인간은.
모르는 당신
세상이 책처럼 열리자, 들판은 끝도 없는 페이지처럼 펼쳐졌다. 그곳에서는 안개도 길을 잃고 막막한 비단처럼 펼쳐졌다. 그리하여 길 잃은 안개 속에 길 잃은 외로운 소녀가 있었다. 소녀는 강림들에서 왔다고 했다. 그곳이 어디인지는 모른다고 했다. 자신의 성조차, 이름조차 모른다고 했다.2 다만 자신을 거두어준 어느 학의 날개만은 안다 했다. 그 날개깃 속에서 눈을 헤치며 소녀는 여기까지 왔다.
당신은 아는가. 어느 밤, 당신은 모르는 소녀가 옥처럼 강림들에 솟아났을 때, 소녀에게 한 날개를 이불처럼 깔아주고 한 날개를 이불처럼 덮어주며, 밤을 밝히는 구슬을 건넨 이름 모를 학이 있었다. 그 밤, 학의 그림자가 날개를 펼치고 당신 꿈속으로까지 날아간 일을 당신은 아는가. 그 그림자의 작은 발이 당신 이마에 발자국을 남기고, 그 상한 날개의 흰빛이 어린 당신의 이마에 잠시 깃들었던 그 일을, 당신은 모르는 듯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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