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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 K- 담론을 모색한다 ①

 

왜 귀신의 공공성인가?

다산과 우리 담론의 모색

 

 

백민정 白敏禎

가톨릭대 철학과 교수. 저서 『정약용의 철학』 『강의실에 찾아온 유학자들』 『맹자: 유학을 위한 철학적 변론』, 공저서 『다산학 공부』 『혜강 최한기 연구』 등이 있음.

mjbaek@catholic.ac.kr

 

 

정약용과 만나는 길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사유에 이르는 여러갈래의 길이 있다. 20세기 초 식민지 지식인들은 정약용을 대표적 경세가, 국가와 민족의 위기를 타개할 사회개혁론자로 호출했다. 민족독립과 부국강병이라는 서구식 발전 모델이 아니라 이른바 유교적 근대성 혹은 실학적 근대성을 운위할 때도 다산은 심각한 병폐를 보인 조선후기 사회를 개혁할 경세 방안을 마련했던 인물로 조명된다. 『목민심서』 등 정법서(政法書)가 정약용의 대표적 저술로 각인된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다. 그렇다면 그의 사상은 어떤 점에서 서구식 발전 경로와 다른 유교적 근대성의 특징을 보였던 것일까?1 과연 이런 방식의 질문과 대답이 가능한 것일까? 나는 이 문제를 고민하기 위해 오늘 다산의 귀신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정약용의 가계에는 초기 한국천주교회의 성립과 관련이 있는 인물들이 여럿 포진해 있다. 맏형 정약현의 처남인 이벽, 자형 이승훈, 조카사위인 황사영 등은 천주교 전래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들이다. 특히 광암 이벽은 정약전과 정약용 형제가 서양 학문과 천주학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784년 4월 15일에 정약용은 고향 남양주 마재에서 형수의 제사를 마치고 뱃길로 상경하던 중 이벽에게서 처음으로 천주의 천지창조와 영혼불멸설을 듣고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2 정약용이 상경한 다음 이벽의 집으로 가 『천주실의』와 『칠극』 등 천주교 교리서를 빌려 본 것이 서학(西學)과의 첫 만남이었다. 1791년 호남지역의 유생 권상연과 윤지충이 모친상에서 신주를 불태우고 천주교식 장례를 지내서 처형당한 진산사건이 발생하였다. 윤지충은 다산의 외종형제였다.

1797년 정약용은 서교(西敎)에 물들었다는 정치적 비방이 멈추지 않자 더이상 벼슬하기가 어렵겠다고 판단했다. 당시 국왕 정조가 그를 동부승지로 임명하자 다산은 이를 사양하는 장문의 상소문을 올렸다.3 다산은 이른바 ‘자명소(自明疏)’로 알려진 이 글에서 자신이 천주학을 처음 접했을 때에는 조상 제사를 폐지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고 항변했다. 1801년 이후 유배기에 정약용이 지은 글을 보면 그의 말은 단순한 변명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다산은 『상례사전』 『제례고정』 등 상례와 제례에 관한 예학서를 썼고, 조상의 혼을 다루는 다양한 의례 절차를 소개했다. 또한 『춘추고징』과 『상서고훈』에서는 국가의례에 해당하는 제천(祭天)의식과 사직제(社稷祭), 체(禘) 제사, 시향(時享), 묘제(廟祭) 등에 대한 정밀한 고증과 대안도 제시했다. 흥미롭게도 정약용의 이런 저작들에는 세상을 빼곡하게 채운 온갖 귀신들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다산은 상제(上帝)를 필두로 다양한 천신(天神)과 인귀(人鬼)로 구성된 귀신들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특히 그는 귀신 중에서도 부모를 포함한 조상들의 혼령을 중시했고, 조상 보본(報本)의 제사의례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고민했다.

다산은 천주학 서적을 보면서 상제의 존재를 인정했다. 그리고 상제가 세상과 인간을 감독하고 상선벌악(賞善罰惡)한다는 점도 수긍하였다. 그런데 서양 신부들은 왜 나의 조상에게 제사 지내는 것을 금지한 것일까? 바로 이 문제가 다산이 마음속에 품은 중요한 고민이었다. 조상 제사를 지내면서도 상제를 섬길 수 있는 길은 없을까? 다산 사유의 핵심에는 조상 제사를 시작으로 의례를 통해서 천신과 상제에 이르는 유대의 긴 과정을 복원하려는 열망이 존재한다. 다산은 영성(靈性)을 공유한 상제와 천신, 인귀의 초월적 세계를 조밀하게 구성했고, 그에 상응하여 군주와 신하, 만민의 세속 정치를 동일한 논리로 설계하였다. 그는 상제가 지상의 군목(君牧, 군주·목민관)을 간택한다고 보았으니, 상제의 명령은 세상에 포진한 온갖 명신들과 군신 모두에게 미친다. 다산이 제시한 다양한 귀신 제사들은 이런 초월과 세속의 존재들을 연결하는 중요한 정치적 행위라 할 수 있다.

다산이 믿었던 상제와 천지의 명신들, 수많은 조상의 혼령들은 무성한 귀신의 숲을 이룬다. 합리적 정신과 실용주의, 개혁사상으로 잘 알려진 정약용, 그는 왜 귀신과 제사, 조상의 혼을 그토록 중시한 것일까? 나는 이 문제를 돌파하면서 유교적 근대성의 이름으로 다산을 호명하는 것이 왜 부적절한지 따져보고자 한다.

 

 

유교적 근대성론, 무엇이 문제인가?

 

정약용은 19세기 전반까지 사유하고 글을 썼다. 그는 천주학과 서양의 중세과학을 소개한 책을 여럿 보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천주학에 연루된 그의 집안은 큰 고초를 겪었고 다산 자신도 정조가 사망한 후 오랜 유배길에 올랐다. 고전학자이자 실학 연구자인 임형택은 17세기 이후 급변하던 동아시아 질서, 즉 명청 교체와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움직임을 보면서 시대적 변화를 뚜렷이 자각한 주체들이 모색한 새로운 학술사상을 실학으로 소개했고 “실학이 당초에 서학에서 촉발되어 일어났던 것”임을 지적하였다.4 그는 정약용과 최한기의 사유를 ‘동서의 학적 만남의 두 길’이라고 소개할 때, 이것이 두 인물의 사유를 서학에 대응하기 위해 구축된 것으로 단정하려는 의도는 아니라고 말했다. 다만 관심을 밖으로 돌릴 때 서세의 측면이 결정적 요인이었음을 간과할 수 없고, 17세기 이래의 새로운 학풍인 실학도 서세동점이라는 세계사적 조류에 대한 주체적 대응의 한 방법이라고 평가하였다.

그런데 나는 서양에서 일어난 파장이 극동지역에 상륙한 것은 16세기 중반부터지만 ‘적어도 19세기 중엽까지 동아시아에 무슨 충격적인 상황을 연출하지 않았다’는 그의 말에 주목하고 싶다. 실제로 조선 지식인이 서양문명을 극히 경계하고 두려워하며 대응을 모색한 것은 아편전쟁 이후이고, 그것이 극에 달한 시점은 1894년 청일전쟁에서 서양을 학습한 일본이 동아시아의 패자로 등장했을 때였다. 이렇게 보면 다산은 서구문명을 전혀 의식했던 사람이 아니다. 그는 서양 책을 보았고 천주교 때문에 정치적 파국을 겪었지만 서구 근대성을 경계하거나 그 대안을 모색하지는 않았다. 그에게 서학은 조선사회를 비평하고 새롭게 성찰할 수 있는 작은 단서를 제공했을 뿐이다. 동아시아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던 정약용은 유교적 문명의 문법을 혁신하고 보완하는 데 주력하였다.5

여기서 서구 근대성을 반성하며 이른바 ‘유교적 근대성’의 의미를 맹렬히 모색해온 김상준의 주장을 살펴보자. 그는 현대 사회과학자들이 제시한 다중 근대성(multiple modernities), 대안 근대성(alternative modernities) 이론은, 서구 근대의 특징을 근대성의 지표로 삼고 이것이 비서구 지역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구현된 결과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분명한 한계를 지닌다고 비판했다.6 그는 “근대성이란 인류문명의 합작품이었지 특정 문명이나 지역의 특산물, 독점재가 아니었다”고 평가하며 ‘중층근대성론’을 제시한다.7 그는 근대성의 역사적 층위들을 원형 근대성(기원전), 식민-피식민 근대성, 지구 근대성(현재)의 층위로 분류한다. 조선후기 실학의 가능성을 논한 글에서는, 글로벌한 근대사가 초기근대(11, 12세기)-서구주도근대(18세기 전후)-후기근대(19세기부터 현재 진행 중)의 세단계를 밟아 상호 포괄적이고 중층적으로 작용했다고 말한다.8 그에게 ‘유교적 근대성’은 이미 중국 송대의 정주학(程朱學)에서 분명한 성격을 보였고 그 자체의 역동성으로 지금까지 깊은 저류를 형성해왔다.

김상준은 유교적 근대성론을 조선후기에 적용한다. 그리고 예송(禮訟)을 통한 ‘유교식 근대적 주권론’이 형성되는 과정, 온 나라가 양반이 되는 유교적 평등화 현상의 메커니즘, 대중 유교 혹은 유교 대중화 현상으로 탄생한 동학(東學)을 유교적 동력이 분출된 역사적 사례로 소개한다. 내가 김상준의 유교 근대성론을 끌고 온 것은 그가 주장한 조선에서의 근대 주권의 탄생 과정이 매우 문제적이기 때문이다. 김상준은 17세기 이후 예송논쟁을 통해 조선형 혹은 유교적 국민국가가 이미 탄생했다고 말한다. 그는 18세기 조선에서 유교형 (군주) 절대주의가 출현했고, 이로부터 19세기 사회 밑바닥에서부터 유교형 인민주권운동이 치솟아 올랐다고 평가한다. 물론 동학의 흐름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내가 동의할 수 없는 지점은, 그가 조선에서 근대적 주권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 중세의 마지막 고리와도 같은 유교의 ‘친족 요소’ ‘친족윤리’를 끊어냄으로써 가능했다고 주장한 점이다. 그는 종법의 이름으로 종법을 지우고 친족적 요소를 말끔히 제거함으로써 높은 추상적 수준의 절대군주주권이 세워졌고, 혈연적·친족적 속박에서 벗어난 근대 주권이 다음 세기 인민주권의 형성으로 이어졌다고 분석한다. 고도로 추상화된 군주의 절대권력이 귀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군주 이하 만민의 평등화 과정을 촉진했다고 본 것이다. 이 대목에서 그는 조선과 프랑스에서 인민의 평등이 이루어지는 과정이 외형상 너무나 비슷하다고 주장한다.

나는 김상준이 윤휴, 정약용의 주장을 빌려 남인의 예론이 가(家)와 국(國)의 연결고리를 끊고 근대적 군주주권론을 탄생시켰다고 주장한 대목에서 서구 근대의 프레임이 얼마나 강고한 것인지를 다시 한번 절감한다. 가족은 사적이며 사회와 국가는 공적이라는 이분법, 혈연적 친족윤리의 고리를 끊어야 근대적 주권, 인민주권의 사회가 가능하다고 보는 관점, 여기에는 유교적 가부장제 혹은 유교의 친족 원리인 종법제가 전근대적인 씨족사회의 산물이라고 보는 오랜 관행이 잠복되어 있다. 나는 정치학계의 한 논문에서 한국은 씨족의 혈연적 유대가 한번도 붕괴된 적이 없으며, 이런 씨족의 유대가 학연·지연·혈연의 다양한 모습으로 표출되었고, 씨족 내부와 외부를 확연히 구분해서 편 가르는 한국사회의 양상을 ‘확대 씨족체계에 기반을 둔 매우 분절된 부족사회’라고 묘사한 대목을 보았다.9

한국 시민사회의 공적 가능성은 협애하고 폐쇄적인 가족윤리를 벗어나야 가능하다고 보는 점에서 김상준의 유교 근대 주권론도 이와 비슷한 맹점을 보인다고 생각한다. 그는 다산이 친족적 윤리에서 해방된 국가례(국가의례)를 구상했고 그것이 『방례초본』(훗날의 『경세유표』)의 집필로 이어졌다고 보았다. 그는 이것을 오늘날의 헌법과 유사한 다산의 헌법적 왕조례(王朝禮)라고 말한다.10 이는 다산이 종법과 관습에서 해방된 공적 권력으로서 근대 왕권을 『경세유표』에서 제시했다고 본 것이다. 그렇다면 유교적 근대론자 다산은 친족윤리로부터 정치윤리를 해방시킨 자일까? 그는 사적인 가족과 친족 집단의 혈연적 구속에서 벗어나 공적인 근대 주권을 만들어낸 자일까? 정약용의 사유를 유교적 근대성론으로 해명한 이런 논의들이 어떤 난관에 부딪히는지, 다산의 귀신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상제와 귀신, 천상에서 벌어지는 일들

 

다산이 말한 귀신에는 가장 높고 존귀한 상제와 상제가 하늘과 땅에서 부리는 수많은 신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중요한 것은 사람 귀신, 즉 인귀다. 사람 귀신이란 누군가의 조상이므로, 다산이 말한 인귀란 곧 조상의 혼령을 뜻한다. 그의 귀신론을 살펴보려면 우선 『춘추고징』과 『상서고훈』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다산은 『춘추』라는 경전이 주나라 제도와 의례가 춘추시대에 실제로 구현된 역사적 증거라고 보았다. 『주례』 「춘관」에는 다섯종류의 국가례〔五禮, 길례(吉禮), 흉례(凶禮), 빈례(賓禮), 군례(軍禮), 가례(嘉禮)〕가 나온다. 다산은 『춘추고징』에서 길례와 흉례를 집중적으로 분석했다. 특히 길례는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는 의식이므로, 길례를 살펴보면 다산이 생각한 귀신들의 성격과 의미, 역할을 이해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염두에 둔 상제와 귀신은 단순히 개인적 신앙의 대상이라기보다 국가의 제사의례에서 섬김과 공경을 받는 대상이라는 점이다. 그의 귀신설은 왕조의 정치적 기획 및 운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다산은 한나라 유학자들이 영(靈)이 없는 천계의 별들을 근거 없이 떠받들고 천상의 궁전〔天庭〕을 가공한 것을 신랄하게 비판한다.11 하지만 정작 본인도 상제와 천신·혼령을 대동하여 귀신들의 궁전〔帝庭〕을 만들고, 초월과 세속, 우주와 지상을 긴밀하게 연결하였다. 다산이 그린 상제와 귀신의 조정은 군주와 신민으로 이루어진 세속의 조정과 정확히 일치한다. 다산은 한나라 유학자 정현(鄭玄) 같은 주석가가 일월성신(日月星辰)을 받들었으나 자신은 영험한 귀신에게 제사함을 강조하며 이렇게 말했다. “다만 온갖 신들이 분속하여 상제의 조정〔帝庭〕에서 명령을 받는데 (천신들은) 일월성신을 담당하여 관리하고 (땅의 신은) 토곡과 산천을 담당하여 관리하였다. 성인께서 이들을 사전(祀典)에 배열하여 상제를 밝게 섬기는 뜻을 펼쳤다. 주석가들은 매번 형체가 있는 사물을 떠받들어 신으로 삼으니 옳겠는가?”12

과연 정현이 말한 천상의 궁전과 다산이 제시한 상제의 조정을 구별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다산은 천상의 궁전에 영험한 존재가 없다고 비판했지만 이보다 중요한 것은 다산이 강조한 귀신의 공(功)과 덕(德), 즉 귀신의 공적 가치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이것을 귀신의 공공성으로 표현한다. 다산은 모든 제사는 하늘 제사에서 나왔기 때문에 교(郊), 체(禘), 조(祖), 종(宗)의 제사가 배천(配天, 하늘에 짝하여 제사 지냄)의 의례양식을 갖는다고 말한다. 자기 조상과 조상의 먼 시조에게 제사하는 체 제사, 땅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하는 사직제 등 모든 제사는 상제를 주향(主享)으로 삼고 조상과 천신을 그에 배향(配享)하여 제사를 지냈다는 것이다. 다산은 왕가의 조상과 그 조상의 시조인 다섯 제왕〔五帝, 복희, 신농, 헌원, 소호, 전욱 등〕을 상제에 배향할 때 가장 중요한 기준은 공과 덕이라고 보았다. 그는 고대의 제사가 공덕을 기준으로 그 덕이 상제에 짝할 만하고 그 공이 하민(下民)에게 미칠 만하여야 천신과 인귀가 상제의 제사에 배식(配食)할 수 있었다는 점을 강조했다.13 그는 상제가 명령한 공과 덕을 천신이 수행하듯이, 지상의 군목도 그러한 공덕을 수행함으로써 천신과 상제에 배향될 수 있다고 보았다. 상제와 귀신과 인간(인귀)은 공덕을 낳는 존재라는 점에서 서로 밀접하게 조응하며 제사를 통해 소통한다.

다산은 오제(五帝)의 선양(禪讓)과 하은주 삼대의 세습은 가치가 다르다는 점을 주목했다. 삼왕(三王)은 세습하였기 때문에 조상 혈연의 사적 가치를 중시했지만, 오제는 세상을 공물(公物)로 간주했기 때문에 선양을 통해 성현의 도통(道統)을 계승했다는 것이다. “삼왕은 후손에게 왕위를 전했으므로 그들의 제사는 조고(祖考, 조상)의 혈맥(血脈, 혈연)을 전하는 것을 귀중하게 여기고, 오제는 현인에게 선양했으므로 그들의 제사는 신성(神聖)의 도통을 전하는 것을 귀중하게 여겼다. (…) 하늘에 배향한 것은 같지만 오제의 예는 오직 성덕(聖德)만을 고려했고 삼왕의 예는 오직 조고만을 높였다. 이것이 둘의 다른 점이다. 대개 오제는 ‘관천하’(官天下, 세상을 공적으로 관리함)하였으니, 전욱·제곡·요·순은 모두 황제의 후손이기는 하지만 귀중하게 여긴 것은 도와 공과 덕에 있었지 혈맥에 있지 않았다.”14

성인 군주들이 공적일 수 있는 것은 우선 그들이 명을 따르는 세상의 천신들 그리고 명령의 근원인 하늘〔상제〕 자체가 공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산은 하늘을 지공무사(至公無私)한 존재로 묘사한다.15 다산은 목목(穆穆)한 상제가 위에 있고 명신들이 사방을 비추며 배열하고 있는데, 그들의 위엄은 귀신의 완전한 덕에서 나온다는 것을 분명히했다.16 또한 하늘의 상과 벌은 귀천을 가리지 않고 지위와 신분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점도 강조한다.17 천신과 인귀가 천명을 따르는 것은 상제의 완전한 덕과 공적인 가치 때문이지 위압적 명령 때문은 아니다. 제사는 가장 공적인 존재인 천, 즉 상제와 상제의 명령을 수행하는 천신들 그리고 인귀들의 덕성과 공로를 공적으로 기리는 의례이다. 인간에게 제사는 가장 공적이고 덕스러운 귀신의 능력을 본받는 것이며, 후손에게 이런 공적 존재의 가치를 잊지 않게 교육하는 일이다. 일상 속 제사의례는 모범이 되는 귀신의 공공성을 계승하는 자발적 행위다.

다산은 제사의 이치를 논하면서 “오직 덕만이 제물이 된다”〔유덕예물(惟德繄物)〕는 논점을 강조한다. 덕있는 자가 바친 제물이라야 제사에 올린 서직(黍稷)과 생폐(牲幣)가 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18 다산은 상제가 흠향하는 인간의 덕과 사특함은 모두 형체가 없는 것이며 형체있는 것의 좋은 냄새나 악취는 상제에게는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육신을 가진 인간은 형체있는 것의 모습을 보고 냄새를 맡으나, 상제는 오직 무형한 덕의 향기와 악의 더럽고 역한 악취만 판단할 따름이다.19 오직 공덕만이 귀신이 흠향하는 무형의 제물이다.

여기서 나는 두가지 점을 강조하고 싶다. 하나는 섬길 만한 귀신이라야 섬길 수 있다고 본 점이다. 어떤 이유로든 공덕이 있는 귀신이라야 인간에게 존경받을 수 있다. 존경할 만한 공덕이 없으면 귀신은 제사에서 흠향할 자격이 없다. 다른 하나는 제사의 주관자들, 즉 군목과 후손들이 스스로 공덕을 쌓아야 제사에 임할 수 있다고 본 점이다. 체 제사의 대상이 되는 인귀도 그의 덕이 상제와 천신에 짝할 만해야 배향이 되고, 제사를 지내는 후손도 그의 덕이 귀신과 같아야 조상에게 유효한 제물을 바칠 수 있다. 따라서 천상의 신들 사이에도, 귀신과 인간 사이에도 공덕의 수행이 빠지면 의미있게 논할 만한 가치가 없다.

 

 

효란 무엇인가? 나쁜 부모를 원망하다

 

부모는 곧 미래의 조상이다. 유교에서는 사후의 조상 제사와 평소의 효를 모두 중시했다. 부모에 대한 친애의 감정인 효(孝)와 형을 비롯한 연장자에 대한 공경을 의미하는 제(悌)는 유학자들이 인간관계를 조율할 때 가장 중시한 태도이자 방법이다. 공자는 “효제하는 사람은 밖에서도 난(亂)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라고 믿었다.20 맹자는 “친한 이를 친애하고 어른을 어른으로 공경하면 세상이 다스려질 것이다”라고 했고,21 “인의(仁義)의 핵심은 곧 부모를 친애하고 형을 공경하는 데 있다”고 했다.22 공자와 맹자가 강조한 효제는 인간이 가진 효의 선천적 정감에 주목한 것이라기보다 춘추전국시대의 극심한 무질서와 전쟁을 종식하고 평화와 질서를 회복하는 데 관심을 둔 것이었다. 공자와 맹자처럼 부모와 자식의 잘잘못을 따지지 않고 지켜주는 친애함이 결국 사회적 안녕과 공존에 도움이 된다고 본 입장이 있던 반면, 순자 학파처럼 대효(大孝)는 분별없이 부모를 따르거나 부모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며 의리를 따져 부모에게 간쟁(諫爭)하는 자식이 있어야 질서가 회복된다고 보았던 입장도 있다.23

다산은 가족 사이의 효제를 어떻게 이해했을까? 『논어』에는 양을 훔친 아버지를 숨겨준 자식에 관한 유명한 이야기가 나온다. 다산은 부모가 위법한 행위를 했을 때 자식은 울면서 간언할 뿐 부모의 뜻을 거스르는 행위를 할 수 없다고 보았다.24 『맹자』에는 순임금의 아버지인 고수(瞽瞍)가 살인했을 때 순임금과 그 신하인 고요는 어떻게 대처할지를 묻는 가상의 질문이 등장한다. 다산은 신하인 고요가 임금을 핍박하여 순임금의 부모를 법대로 처벌하기는 어렵다고 진단했다.25 그렇다면 다산은 부모와 자식간의 효제를 자연적 본능으로 인정하고 위배할 수 없다고 본 것일까?

맹자와 그 제자인 만장 사이의 대화를 살펴보자. 순임금은 아버지 고수에게 극진히 효를 다했으나 부모는 그를 자애롭게 사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학대하고 죽이려고까지 했다. 그러자 순은 하늘을 우러러 원망하고〔怨〕 사모하는〔慕〕 마음으로 울부짖었다. 만장은 맹자에게 순이 어떻게 부모를 원망할 수 있느냐며 반문하였다.26 주희와 조선 학자들 대부분은 이 구절을 두고 자식이 부모를 원망한 것이 아니라 부모에게 온전한 사랑을 받지 못하는 자식의 부족함을 스스로 책망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잔혹한 부모인 고수가 아니라 그런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순임금 자신을 원망한 구절로 이해한 것이다. 다산은 선배들의 해석이 잘못이라 비판하며 순이 부모를 원망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고수가 매일 순을 살해하려고 했는데 순이 무심하게 근심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나는 공경히 자식의 도리를 다할 뿐이다. 부모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나에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라고 했다면, 순은 마음이 냉정하여 부모를 마치 길거리의 사람 보듯이 멀리한 자이다. 그래서 하늘을 향해 울부짖으며 부모를 원망하고 사모했으니 이것이 자연스러운 이치이다.”27

다산은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나쁜 부모를 원망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부모를 원망하는 것이 오히려 부모를 섬기는 효도의 한 방법이다. 만약 잔혹하고 냉담한 부모를 원망하지 않으면 그것은 부모를 남처럼 대하는 것이다. 그에게 효는 부모에 대한 복종이 아니라 자식에 대한 부모의 책무〔慈〕와 함께하는 상호적이고 호혜적인 관계 원리였다. 원망함을 분석한 다산의 글이 있다. “아버지가 자애롭지 않으면〔不慈〕 아들이 원망해도 되는가? 아직 안 된다. 그러나 자식이 효를 다했는데 아버지가 자애롭지 않아서 마치 고수가 순임금에게 한 것처럼 한다면 부모를 원망해도 된다. 임금이 보살피지 않으면 신하가 원망해도 되는가? 아직 안 된다. 신하가 충성을 다했는데도 임금이 보살피지 않기를 마치 회왕(懷王)이 굴평(屈平)에게 한 것처럼 한다면 임금을 원망해도 된다.”28 흔히 유학적 관계 원리를 가족에서 사회로 확장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부모 자식 관계에도 이미 사적이며 공적인 친소(親疏)의 두 원리가 함께 작동했다는 점이다. 효와 제가 가리키는 친애함과 공경함은 친밀하고 가까운 관계와 공경하고 경외하며 거리를 두는 관계를 모두 포함한다.

다산은 기본적으로 부모를 섬기고 그 뜻에 따르는 친애함의 태도를 중시했다. 그러나 잘못한 부모를 책망하고 원망하면서 자식에 대한 부모의 책무를 환기해야 한다고 보았다. 물론 이것은 부모와 자식 관계의 경중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맹자는 제자 공손추와 함께 부모를 원망하는 사례를 이야기했다. 『시경』의 「소반」은 주나라 유왕(幽王)이 포사(褒姒)의 참언으로 태자 의구(宜臼)를 폐위한 이야기를 담은 시이다. 맹자는 의구가 아버지를 원망한 것은 부모의 잘못이 크므로 자식이 부모를 원망하는 것이 친애하는 태도라고 공감했다. 반대로 『시경』 「개풍」은 부모의 잘못이 작은 경우다. 부모의 잘못이 작은데 자식이 계속 원망하면 이것도 불효가 된다.29 다산은 공자가 시(詩)로 원망을 표현할 수 있다고 했고, 마땅히 원망해야 할 때 원망하지 않는 것을 오히려 걱정했다고 풀이한다.30 부모가 나를 학대하면 ‘내가 하늘에 무슨 죄를 지었는가, 내 죄는 과연 무엇인가’라고 반문하기보다 자애롭지 못한 부모의 잘못을 직시하고 순이 하듯이 그 부모를 원망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산의 이러한 발언에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친애함과 공경함이라는 두가지 측면에서 조율하는 유교적 관계 원리에 대한 성찰이 담겨 있다. 가령 부모의 상(喪)을 치를 때의 모습을 보자. 초상(初喪) 때는 방금 돌아가신 부모의 혼을 대하는 후손의 안타깝고 절망스러운 감정, 깊이 친애하는 태도를 표현하는 것이 가장 우선적인 일이다. 이때는 망자와 상주를 매개하는 번다한 의절(儀節)을 생략하고 꾸밈을 최소화하는 형태로 상례를 진행한다. 시신을 관에 넣고 빈소에 안치하면 상복으로 갈아입는 등 몇단계의 문식(꾸밈)이 세밀하게 덧붙여진다. 그다음 시신을 매장하는 장례 의절을 절차대로 마치면, 그때부터 가까운 혈연간의 친애를 표현하는 곡(哭)을 완전히 그치는 졸곡(卒哭) 단계로 넘어간다. 이 순간부터는 망자의 혼을 귀신으로 간주한다. 부모와 자식의 친애가 아닌 귀신에 대한 공경, 다시 말해 나와 거리가 있는 존재에 대한 공경과 존중의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31 이것은 자식이 부모에게 어떻게 효를 실천해야 하는지에 대한 단서를 보여준다. 부모의 뜻을 받들고 부모를 섬기는 친애의 태도뿐 아니라 부모의 잘못을 간언하고 부모를 책망하는 태도 역시 필요하다.

유학자로서 다산이 본 부모와 자식 관계는 사적 친밀함만의 대상이 아니다. 다산은 사람이 부모에게 본능적으로 효심을 느낀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자식에 대한 사랑과 책무를 경험해야 부모에 대한 효심도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았다.32 여기서 중요한 점은 유학자들이 부모에 대한 효심을 부모에 한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부모가 사랑하던 이들까지 돌보고 살피는 것이라고 이해했기 때문이다. 생사를 불문하고 부모를 섬기는 일은 그 부모가 사랑하고 아끼던 이들을 부모의 삶 이후에도 함께 돌보고 살피는 것을 의미한다. 국가의 태학(太學, 성균관)에서, 지방 향교에서, 문중에서 노인과 연장자를 돌보고 고아를 함께 먹인 것은, 효제의 가족적 원리를 일상의 공동체로 확장한 사례이다.33 다산은 현군이 천명을 받아 정치할 때 효를 확산하여 달효(達孝)를 이루는 것을 급무로 삼았다고 보았다. 그리고 “온 집안의 환심을 얻어 조상을 섬기는 것이 사대부의 효이고, 온 나라의 환심을 얻어 선왕을 섬기는 것이 제후의 효이며, 세상 사람들의 환심을 얻어 상제를 섬기는 것이 천자의 효이다. (…) 그분들이 공경하던 이를 공경하고 (…) 그분들이 친애하던 이를 친애한다”고 말한다.34 다산은 조상에게 바치는 제물이 향기로운 것이 아니라 오직 명덕(明德)만이 향기롭고, 귀신은 오직 명덕만을 흠향한다고 말한다. 이때의 명덕이란 허망한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함께 느끼는 큰 기쁨, 환심을 의미한다.35 나의 명덕은 곧 귀신이 좋아하고 흠향하는 공덕이다. 귀신이 좋아하는 것은 친애함과 공경함, 보살핌을 확충하여 우리가 함께 기뻐하는 큰 환심이다.

 

 

다산 그리고 우리 담론의 모색

 

다산의 발언을 딛고 유교적 근대성론의 문제를 다시 짚어보자. 가족과 사회의 이분법이 아니라 부모와 자식으로 대변되는 가족의 공공성이 핵심 문제이다. 씨족의 혈연적 속박에서 벗어나야 근대적 주권과 시민사회가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가족 관계와 효제자(孝悌慈)에 나타난 상호돌봄과 책무의 공적 성격을 간파해야 유교적 인륜 관계의 공공성을 성찰할 수 있다. 내가 조상 혼령과 귀신 이야기로 다산을 소개한 것은 제사의례가 가진 공적 지향성 때문이다. 공덕이 없는 귀신은 제물을 흠향할 자격이 없고, 공덕이 없는 후손은 제사를 지낼 자격이 없다. 부모가 자애롭지 못하면 자식은 부모를 원망한다. 조상이 탐관오리였을지라도 청백리라고 해야 후손을 규합하여 조상 제사를 지낼 명분이 생긴다. 조상혼과 귀신의 공공성, 부모의 책무와 자식의 효도는 가족이 필요로 하는 공적 가치의 성격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가족은 단순히 혈연으로 연결된 생물학적 집단이 아니라 좋은 가치를 공유하고 함께 지켜나가는 공동체다. 그렇지 않으면 가족의 정체성은 대를 이어 계승될 수 없다.36

이른바 ‘유교적 근대성론’으로 정약용의 사유를 조명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입장이다. 유학자인 다산은 절대왕정에 버금가는 군주의 절대주권을 고민한 자가 아니라 가족의 공적 효제자가 지역의 노인과 아이를 돌보는 상호돌봄과 공존의 가치로 확산되는 길을 모색한 인물이다. 그는 가족의 공적 운영이 향촌과 지역사회의 공공성을 제고하는 토대라고 생각했다. 가족이 공적이지 않으면 사회도 공적일 수 없다. 나는 이 글에서 서구 근대에 대한 강박이나 부채감이 없던 다산의 귀신 이야기를 통해 돌파구를 고민해보았다. 우리 담론의 가능성을 모색하려는 긴 여정에서, 조상혼과 부모자식의 관계, 가족의 공적 기능을 숙고했던 다산의 성찰이 어떤 단서를 줄지 생각해본다.

19세기 중반 이후 우리가 몸으로 체감한 서양문명의 압도적 흐름과 위세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군사적 물리력과 과학기술, 자본주의를 등에 업은 서구 근대성은 여전히 피할 수 없는 문제다.37 이 점에서 백낙청이 제안한 근대극복과 근대적응의 이중과제는 우리가 직면한 현행 문제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누군가는 찬성하든 비판하든 근대성 문제에 연연하는 것이 도리어 서구중심주의를 스스로 내화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우려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이 문제를 회피하거나 무의 상태에서 시작할 수도 없다. 서구 근대성이 우리에게 부과한 정신적 족쇄 가운데 하나는 전통에 대한 중도적 비판을 어렵게 한 점이다. 전통 부정론, 비판론 못지않게 전통 긍정론, 예찬론도 균형을 잡기가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다.38 자기중심을 잡으려는 중도적 비판의식을 더 깊이 고민하게 된다.

 

 

  1. ‘근대성’은 영어 모더니티(modernity)의 번역어다. 모더니티는 근대, 근대성, 현대, 현대성 등 다양한 방식으로 번역된다. 어떤 시기로서의 근대, 서구 근대의 중요한 특징을 일컫는 근대성 등을 엄격하게 정의하지 않은 채 ‘유교적 근대성’을 말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회피할 위험을 낳는다. 요컨대 근대와 근대성을 규정 없이 광범위하게 사용함으로써 자본주의근대, 식민지 수탈, 환경파괴 등에 대한 비판의 초점을 도리어 흐리게 만든다. 이 문제점에 대해서는 백낙청 『근대의 이중과제와 한반도식 나라만들기』, 창비 2021, 29~31면 참조.
  2.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권15 「묘지명(墓誌銘)」 ‘선중씨묘지명(先仲氏墓誌銘).’
  3. 『다산시문집』 권9 「소(疏)」 ‘비방을 변명하고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사양하는 상소.’
  4. 임형택 『21세기에 실학을 읽는다』, 한길사 2014 참조. 인용은 88면.
  5. 임형택은 비판 담론으로서 실학을 소개하며 황종희와 정약용을 중요하게 지목했다. 그에 따르면 다산은 동아시아에서 중화질서의 변화를 숙고했고, 정치체제에서는 권력의 정당성을 성찰하는 「원목」과 「탕론」 같은 글을 썼으며, 수기치인(修己治人)을 완비하기 위한 학문적 방법을 모색했다. 임형택 「비판담론으로서의 실학」, 『한국실학연구』 제31호, 2016 참조. 나는 다산의 학문적 성과가 서구 근대의 광포한 흐름에 잠식되기 이전 유교적 문명사회의 기획과 이상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한다.
  6. 김상준 『맹자의 땀 성왕의 피: 중층근대와 동아시아 유교문명』, 아카넷 2011 참조.
  7. 같은 책 68~69면.
  8. 김상준 「實學은 하나인가, 여럿인가, 아니면 애초에 없었던 것인가?」, 『한국실학연구』 제32호, 2016 참조.
  9. 이현휘 「한국정치와 가치의 권위적 파탄」, 『정치와 평론』 제9권, 2011, 193~94면. 그는 다른 논문에서도 한국사회의 정치적 파행과 타협할 줄 모름을 전통적인 혈연적 씨족 중심의 가치관 때문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이현휘 「정당 대변인의 말과 한국정치의 관습」, 『정치와 평론』 제4권, 2009 참조.
  10. 김상준, 앞의 책 474면.
  11. 『상서고훈(尙書古訓)』 권6 「24. 군석(君奭)」.
  12. 『춘추고징(春秋考徵)』 권1 「길례(吉禮)」 ‘교구(郊九).’
  13. 『상서고훈』 권1 「요전(堯典)」 ‘월정원일(月正元日), 순격우문조(舜格于文祖).’
  14. 『상서고훈』 권1 「요전」 ‘정월상일(正月上日), 수종우문조(受終于文祖).’
  15. 『논어고금주(論語古今註)』 권9 「양화(陽貨)」(下).
  16. 『상서고훈』 권7 「30. 여형(呂刑)」.
  17. 『상서고훈』 권2 「3. 고요모(皐陶謨)」.
  18. 『매씨서평(梅氏書平)』 권3 「여오(旅獒)」 ‘공벽본유문무주(孔壁本有文無注), 재십육편중(在十六篇中).’
  19. 『상서고훈』 권7 「30. 여형」.
  20. 『논어(論語)』 「학이(學而)」 제2장.
  21. 『맹자(孟子)』 「이루(離婁)」 제12장.
  22. 『맹자』 「이루」 제27장.
  23. 『순자집해(荀子集解)』 「자도(子道)」.
  24. 『논어고금주』 권6 「자로(子路)」(下), ‘섭공어공자왈오당유직궁자(葉公語孔子曰吾黨有直躬者).’
  25. 『맹자요의(孟子要義)』 권2 「진심(盡心)」(上), ‘도응문(桃應問) 순위천자(舜爲天子), 고요위사(皐陶爲士), 고수살인(瞽瞍殺人).’
  26. 『맹자』 「만장(萬章)」 제1장.
  27. 『맹자요의』 권2 「만장」 제5장.
  28. 『다산시문집』 권10 「원원(原怨)」.
  29. 『맹자』 「고자(告子)」(下).
  30. 『시경강의(詩經講義)』 「소민지십(小旻之什)」 ‘소반(小弁).’
  31. 이봉규 「인륜: 쟁탈성 해소를 위한 유교적 구성」, 『태동고전연구』 제31권, 2013, 131면 참조.
  32. 『대학강의(大學講義)』 「전구장(傳九章)」.
  33. 정약용 『역주 목민심서』(전7권), 다산연구회 역주, 임형택 교열, 창비 2018. 제2권 제4부 「애민 6조(愛民六條)」 참조. 다산은 양노(養老), 자유(慈幼), 진궁(振窮), 애상(哀喪), 관질(寬疾), 구재(救災) 조목에서 지역의 노인과 고아, 어린이, 빈궁하고 가난한 자, 질환자를 구제하고 재난에 함께 대비하는 방책을 상세히 소개했다.
  34. 『중용강의보(中庸講義補)』 ‘천기위, 행기예(踐其位行其禮).’
  35. 『다산시문집』 권10 「원덕(原德)」.
  36. 미야지마 히로시(宮嶋博史)는 18, 19세기 조선후기와 일본을 비교 분석하면서 2대 이상 대를 이어 ‘계승되는 가족 정체성’이라는 것은 매우 특이한 현상이라고 주장했다. 「18-19세기 동아시아 주자학: 사회적 확산과 그 배경」,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국제학술회의 기조강연 발표문, 2023.1.12.
  37. 김상준의 ‘중층근대성론’도 이 문제에 대한 지적 고민의 한 결과라는 점에서는 유의미하다고 본다.
  38. 백낙청은 서양 근대문화에 대한 양가적 정서가 처음에는 민족문학론의 형태로, 다음에는 한반도 현실을 해명하는 분단체제론으로, 그리고 근대세계 전체에 관한 이중과제론으로 발전했다고 소개한다. 나는 이것이 전통 비판과 극복 그리고 전통 발굴과 재창조라는 두 욕망과 유사한 성격을 지닌다고 생각한다. 백낙청, 앞의 책 33면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