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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오늘의 한국시, 이룬 것과 나아갈 길
우리가 기억하는 시, 시가 기억하는 우리
주민현 朱民賢
시인. 시집 『킬트, 그리고 퀼트』 『멀리 가는 느낌이 좋아』 등이 있음.
1003jmh@naver.com
어릴 적 안방에 있던 책장은 부모님의 것이었다. 거기에는 주로 코난 도일,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을 비롯한 추리소설이나 강석경 소설가의 『숲속의 방』으로 시작되는 한국소설전집이 꽂혀 있었다. 국문학도였던 아빠가 구입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그 책들을 읽으며 문학을 접했고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어렴풋이 상상했다. 소설은 공상의 세계였다. 구체적인 장면과 대화들로 시간과 장소를 훌쩍 뛰어넘어 아늑하고 아득한 저 너머의 세계로 데려다주었다. ‘지금, 여기’를 벗어날 수 있었으므로 늘 그 세계를 좋아했다. 시간이 조금 더 흘러 부모님의 책장이 내 책장이 되었을 때 좋아하는 시인들의 시집을 꽂을 수 있었다. 고등학생 때는 기형도의 시집을, 대학생이 되자 진은영, 김행숙, 허수경, 오규원을 비롯한 무수히 많은 시인들의 시집을 책장에 채웠다. 한때 합정동에 위치했던 시집 서점 ‘위트앤시니컬’에서 친구들과 매주 시를 쓰고 시집을 읽었다. 그곳에서 함께 읽은 책들을, 때로 중고서점에서 찾은 절판된 시집을 내 책장으로 옮겨 오기도 했다. 시의 세계는 소설의 세계와 조금 달랐다. 나를 저기 먼 곳으로 데려가는 게 아니라 언제나 ‘지금, 여기’로 데리고 왔다. ‘아주 먼 저기’의 시도 ‘아주 먼 옛날’의 시도 현재형으로 울려 퍼지는 시인의 육성을 통해 바로 ‘지금, 여기’의 이야기로 펼쳐졌다.
시를 막 배우기 시작하던 시절, 아름다운 말놀이가 이어지는 이제니의 시, “나는 정말 요롱이가 되고 싶어요. 요롱요롱한 어투로 요롱요롱하게”(「요롱이는 말한다」, 『아마도 아프리카』, 창비 2010)와 같은 새로운 시의 출현은 신비로웠다. “연관 없는 어휘들”(「알파카 마음이 흐를 때」, 같은 책)의 신선한 충돌과 언어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한 시는 무심결에 나도 시를 쓰고 싶다고, 신비한 중얼거림을 갖고 싶다고 생각하게 만들곤 했다. 말을 자유롭게 부리는 즐거움, 그리고 말놀이 그 자체로 시가 되는 즐거움을 이제니의 시를 읽으며 느꼈다. 그때 내게 시는 신비하고 매력적인 장르이자 홀로 할 수 있는 가장 고독하고 내밀한 놀이였다.
최정례의 시는 산문시의 형식을 띠고 있어서 술술 읽히면서도 울컥하고 한번쯤 멈추게 하는 힘이 있다. 그의 시를 읽으면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게 아니라 삶이 우리를 덮쳐오는 것이라는 막막함을 마주하게 된다. 그의 문장은 거울 같아서 나의 초라함을, 인생의 별 볼 일 없음을 바라보게 만든다. 그가 담담히 부려놓는 생활은 때로는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부산스럽기 그지없다. “세상이 날 홀대해도 용서하고 공평무사한 맘으로 대하자”(「개천은 용의 홈타운」, 『개천은 용의 홈타운』, 창비 2015)는 울컥의 감정이,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구, 아무런 설명도 안한 채로, 나를 묶어놓고 벌써 며칠째 끌고 다니는 건지 모르겠어”(「너의 여행기를 왜 내가 쓰나」, 같은 책)와 같은 진퇴양난의 감정을 마주하게 만든다. 삶과 죽음 사이에 끼어 있는 것이 인간의 삶이라면 그 고통을 담담히 마주하고 헤아리게 한다.
진은영의 시를 읽을 때면 시란 때때로 삶에 모든 것을 다 내주고서야 한줌 손에 쥐어지는 아름다운 문장 같다. “너는 전나무의 보랏빛 꼭대기를, 나는 교회의 하얀 첨탑을 사랑”하는, 두 사람의 “동상이몽”(「방법적 회의」, 『훔쳐가는 노래』, 창비 2012)을 바라볼 때, 그 불일치하고 불화하는 사랑의 언어는 때론 삶 그 자체가 아닐까. “지금 주머니에 있는 걸 다 줘 그러면/사랑해주지, 가난한 아가씨야”(「훔쳐가는 노래」, 같은 책)와 같은 문장에서 볼 수 있듯 사랑은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주고 나서야 겨우 얻을 수 있는 그 무엇이다. 언어가 결코 그릴 수 없는 것을 그리고자 하는 욕망이고 사랑이란 결코 가닿지 못할 타인의 존재에 대한 뜨겁고 열렬한 감정이라면, 실패하고 미끄러지면서도 계속되는 운동성 그 자체가 사랑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나도 나의 고통을, 그리고 나만의 아름다운 언어를 은밀히 갖고 싶어졌다.
그런 아름다움에 취하다가도 번개처럼 나를 일깨우는 시를, 자세를 고쳐 앉게 하는 시를 사랑하기도 했다. 송경동의 시에서 직설적으로 뿜어져나오는 시적 에너지와 있는 그대로의 솔직함은 나의 시가 현실에서 멀리 도망가려 할 때마다 단단히 붙잡아주었다. 우리 삶이 조금 더 편리하게, 발 빠르게 변화할 때 그뒤에서 고통받는 무수한 노동자들의 현장과 절규와 투쟁의 목소리를 담은 송경동의 시를 뜨거운 마음으로 따라 읽곤 했다. 나도 한명의 노동자로서 노동을 시작했을 때 그의 시는 더욱 유의미하게 다가왔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의 곁에서, 기륭전자 비정규직 투쟁에서 그의 시는 현장과 늘 함께해왔다(「너희는 참 좋겠구나」,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 창비 2016). 길 위에서 잠을 자고 투쟁하는 이들 곁을 지키며 그들을 기록하는 그의 손이 “용산4가 철거민 참사 현장/점거해 들어온 빈집 구석에서 시를” 쓸 때, “허가받을 수 없는 인생”에 대해 쓸 때(「무허가」,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창비 2009) 시란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누구의 곁에서 함께하는 어떤 목소리여야 하는가를 일깨워주곤 했다. 서울 거리에 늘상 경찰차벽이 즐비했고 데모하는 이들을 향해 물대포를 쏘던 시절이었다. 현실에서 마주치는 무수히 많은 장면들 중 무엇을 선택하고 어떤 것을 써야 하는가, 그 첨예한 시의 자리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그리하여 습작 시절 오랫동안 ‘나’만을 바라보는 글쓰기를 해왔다면, 그즈음부터 타인에 대해 말하기, 타인의 고통에 대해 말하기를 고민하게 되었다. 나의 고통과 타인의 고통, 그리고 우리의 고통에 대해 말하기. 그 고통의 뿌리를 바라보는 것이 시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시란 한 사람의 지극히 내밀한 목소리를 담는 장르이지만 각 시인이 저마다 살아온 시대의 공통적인 정서와 감각이 깃들어 있다고 본다면, 각각의 시는 그때그때의 시대적 요청에 대한 응답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의 시는 한국전쟁과 4·19혁명, 민주화항쟁이라는 격동의 시기를 거치는 과정에서 다양하고 풍성해져왔다. 시가 하는 일이 시대를 바라보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내면을 가장 깊이, 가장 고독하게, 가장 진실하게 바라보는 것이라면, 개인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폭력에 대항하는 목소리, 특히 민중의 이야기는 한국시의 한 근간이자 뿌리이기도 할 것이다.
이와 같은 민중, 그중에서도 특히 여성의 목소리를 주목한 고정희 시인이 고통을 말해온 방식은 나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고정희는 1980년대의 군부독재와 자본주의, 광주항쟁, 노동현실을 관통하는 다양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가부장제 사회의 여성이 처한 현실을 간과하지 않았다. 시인은 “여자 속에 든 어머니가 매를 맞는다/여자 속에 든 아버지가 매를 맞는다/여자 속에 든 형제자매지간이 매를 맞고 쓰러진다”(「매 맞는 하느님: 여성사 연구 4」, 『지리산의 봄』, 문학과지성사 1987)와 같이 매를 맞는 한 여자의 안에서 매를 맞는 어머니와 아버지, 형제자매, 할머니, 하느님을 소환하며 지극히 개인적인 아픔을 겪는 한 사람으로부터 거대한 역사와 뿌리를 읽어낸다. 민중은 제각기 하나하나의 평범한 사람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 목소리들이 모이면 역사가 된다. “맞벌이 부부 우리 동네 구자명 씨/일곱 달 된 아기 엄마 구자명 씨는/출근 버스에 오르기가 무섭게/아침 햇살 속에서 졸기 시작한다”(「우리 동네 구자명 씨: 여성사 연구 5」, 같은 책)에는 개인의 미시적인 목소리에서 시작하는 거시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다. 유고시집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창작과비평사 1992)의 ‘밥과 자본주의’ 연작, 『여성해방출사표』(동광출판사 1990)의 「황진이가 이옥봉에게」 「사임당이 허난설헌에게」 같은 ‘이야기 여성사’ 연작 등에서 드러나듯 역사적 비극이나 절망적인 현실에서도 비탄이나 슬픔에 그치기보다 새로운 언어를 힘있게 발화하는 그의 시는 다시 읽어도 새로운 감각을 준다.
고정희가 이 시대를 살아가고 또 살아갔던 이들의 역사를 방대하게 호명해왔다면 최승자는 지극히 홀로인 여성의 내면을 날것 그대로 드러낸다. “매독 같은 가을”(「개 같은 가을이」, 『이 시대(時代)의 사랑』, 문학과지성사 1981)이라든가 “내가 살아 있다는 것,/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일찌기 나는」, 같은 책)와 같은 시구의 강렬함은 좀처럼 잊을 수 없다. 버려짐의 감각, 불행과 외로움, 병든 삶, 고통에 대해 말하기. 최승자의 시가 가진 뿌리 깊은 병듦의 상태는 통각에 가깝다. 폭력과 억압은 외부에서 온다 하더라도 그에 따른 고통의 층위는 저마다 다르며 지극히 개인적일 수밖에 없다. 누군가에게 그 고통은 연대할 수 없는 것이며, 사랑을 통해 구원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를 씀으로써 자기구원에 이를 수 있을까? 구원에까지 이르지는 못할지라도 적어도 최승자 시는 상처와 쓸쓸함을 드러내는 것 자체로 이상한 위로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시는 사회적이고 외부적인 부름에 응답하는 목소리이자 그 누구와도 연결될 수 없을 때 부르는 고통의 노래이기도 한 것이다.
김혜순은 바리데기 설화를 근간으로 ‘시하기’의 작업을 밝힌다. 바리데기가 세번의 죽음을 경험하듯이, 시인 역시 ‘시’라는, 여성시인만의 언술을 발명한다고 생각해왔다(시론집 『여성, 시하다』, 문학과지성사 2017)고 말한다. 시인으로서 그냥 살아가면서 보고 듣고 겪은 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여성시인’으로서의 시적 자아를 발견하고 다시 태어나는 경험, 그리하여 삶의 진실을 새롭게 발견하는 경험은 나 역시 여성시인으로서 나의 시가 출발하는 근원과 토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각각의 시인이 ‘시하기’를 한다면, 시를 쓰는 사람이자 읽는 사람으로서 나는 ‘시인하기’를 한다. 그 모든 시인들의 ‘시하기’를 함께 체험한다. 시읽기, 동시에 시쓰기란, 시의 역사란 나에게 그렇게 온다.
시와 시인들이 너무 좋아서 나는 가끔 나 자신이 시 쓰는 사람이라는 걸 잊고 시를 읽는다. 시인을 좋아하는 시인. 아마 내 시에서 어떤 전통성이라고 할 만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면 내가 좋아하는 시인들의 목소리가 함께 들렸으면 좋겠다. 한 사람의 DNA에 여러 사람의 얼굴이 섞여 있듯이, 그래서 완전히 새로운 하나의 얼굴이 나오듯이 하나의 시, 한권의 시집에는 그 시가 토대로 하는 그 모든 이들의 얼굴이 섞여 있을 것이므로.
나에게 시의 전통과 역사, 그리고 시간의 역사는 순차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것은 얼굴과 얼굴의 겹쳐짐이고, 발설되거나 사라지는 목소리의 뒤섞임이고, 선후가 구분되지 않는 눈물과 웃음의 향연이고, 민중을 짓밟아온 구둣발과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의 겹쳐짐이다. 먼저 존재하는 역사가 시의 언어에 드러나는 게 아니다. 역사는 시의 언어에서 사후적으로 체험되는 그 무엇이다.
이처럼 편편이 흩어진 시들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신경림의 『농무』(창작과비평사 1975)를 비롯해 곽재구의 『사평역에서』(창작과비평사 1983), 김용택의 『섬진강』(창작과비평사 1985) 등의 굵직한 시집이 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읽히는 까닭은 이들 시집이 평범하게 살아가는 대다수 민중의 이야기,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신경림 「농무」, 앞의 책)는 장면에서 비료 값도 나오지 않는 현실에 눈물 흘리는 대신 신명나게 거리를 도는 눈물과 웃음의 아이러니는 여전히 나의 마음을 건드린다. 대다수의 평범한 이들은 여전히 치열한 노동현실을 살아가고 있으며, 구조적인 허점이 언제나 존재하는 고통스러운 현실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고통의 현재적 글쓰기이자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과 함께 숨 쉬고 생각하고 생활하는 글쓰기로서 민중의 삶을 조망하는 시들을 나는 오랫동안 좋아해왔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신경림 「갈대」, 같은 책)을 알아차리는 장면,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곽재구 「사평역에서」, 앞의 책)는 장면, “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김용택 「섬진강 1」, 앞의 책)는 장면에서 시는 저 멀리 떨어진 곳에서 홀로 중얼거리는 말이 아니라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 가까이에서 함께 노래하는 어떤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시는 결국 나의 이야기이자 우리의 이야기가 모여 흘러온 역사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다른 시들이 출현하고, 그 시들은 다시 새로운 역사가 되어 쌓인다. 현실참여의 요청에 응답하는 시뿐만 아니라 감수성과 예술의 자율성을 극대화하는 시, 내면의 서정을 말하는 시, 정체성을 발견하고 시적으로 탐구하는 시 등 다양한 문학적 시도가 시단을 넓혀왔다. 시의 모습은 제각기 다를지라도 그 뿌리는 하나일 것이다. 시가 인간에게 무엇이었나를 생각하면 한 시절을 살아낸 시인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건 지나간 역사로 체험되기보다 여전히 현재에도 존재하는 고통의 언어, 자유를 갈망하는 언어에 가깝다. 그 목소리와 목소리의 이어짐, 목소리와 목소리의 화답과 단절, 고독과 아름다움이 우리의 언어를 만들어왔다.
지나간 시들을 읽는 게 좋아서 올해 봄 무렵부터, 이제 막 첫 시집과 두번째 시집을 낸 시인 친구들과 1980, 90년대 여성시인들의 시를 함께 읽고 있다. 한번쯤 우리 시의 토대가 되는 글을 읽고 그 시적 에너지와 영감을 발견하는 것이 의미있으리라는 데 뜻이 닿은 덕분이다. 친구들과 함께 시를 읽다보니 시의 역사란 한편 한편의 시가 탄생하는 결이나 모양이 그러하듯 정형화되지 않으며, 선험적이거나 선형적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도 연속성이 없는 것 같은 시인들의 시를 읽어내려가며 밤하늘의 별자리를 찾듯 보이지 않는 선을 그어보는 일, 우리를 여기 있게 함의 토대를 살피는 일은 우리가 어디로 나아가는가를 짚어보는 데에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하나의 시는 고정된 맥락 안에서 단일한 메시지로만 읽히지 않는다. 그 시의 메시지는 시간이 흘러도 어떤 면에서 여전히 유효하며, 새로운 맥락에서 다시 읽힌다. 시란 읽는 자의 육성으로 다시 새로운 목소리를 얻는 신비한 장르이므로 언제나 새롭게 시작되는 노래이자 자유롭고 영원히 이어지는 목소리이다. 시를 기억하는 목소리와 시가 기억하는 목소리, 그 목소리의 겹침과 겹쳐짐, 거기에서부터 다시 새로운 목소리는 출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