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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 K- 담론을 모색한다 ②
K-현대사의 성취와 역동성
홍석률 洪錫律
성신여대 사학과 교수. 저서 『민주주의 잔혹사』 『분단의 히스테리』 『통일문제와 정치·사회적 갈등』, 공저 『한국 현대사 연구의 쟁점』 『4월혁명의 주체들』 『백년의 변혁』 『쟁점 한국사: 현대편』 『한국현대 생활문화사』 등이 있음.
srhong@sungshin.ac.kr
K-현대사의 성취를 말하는 이유
한국현대사의 성취라 하면 다소 의아해할 사람도 많을 것이다. 한국에서 대체로 보수는 현대사의 성취를 강조하는 반면, 진보는 문제점을 지적해왔다. 성취를 자화자찬하기보다는 문제점을 거론하고 그 해결방향을 모색하는 것이 좀더 나은 역사적 성찰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누적된 문제점을 나열하기만 하고, 성취는 거론하지 않는다면 문제해결을 위한 자신감과 능력, 내적 동력은 어떻게 발견할 수 있을까?
또한 한국현대사의 성취라 하면 이승만, 박정희의 건국과 부국(富國)의 위대한 업적이라는 ‘뉴라이트’ 역사관이 연상되기 쉽다. 근대를 넘어 탈근대를 이야기하고, 복수성과 다양성을 추구해가는 21세기의 현실에서 이러한 최고지도자 중심 역사관은 낯설기만 하다. 대통령 공과(功過)를 중심으로 한 역사논쟁은 기본적으로 그밖의 다양한 행위자의 역할을 부차화한다. 중요한 역사적 성취가 최고지도자의 위대한 업적으로만 설명된다면 사람들은 중대한 문제에 직면할 때마다 영웅적인 지도자가 나타나 해결해주기만을 기대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신을 역사의 능동적인 주체로 정립하기 어렵다.
1945년 해방 이후 한국현대사에서 많은 성취가 있었음은 부정하기 어렵다. 2010년대를 경과하면서, 특히 2020년 코로나19 위기를 전후하여 한국인들은 어느덧 자신들의 나라가 이른바 ‘선진국’이 되었다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또한 K-pop을 위시한 K-culture(또는 한류)에 대한 전지구적인 열광 등 과거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현상을 목격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성취를 스스로 설명하는 논리에는 많은 문제가 있다.
흔히 한국은 과거 식민지였던 나라 중 산업화와 민주화를 모두 달성한 유일한 나라라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주장은 일단 근대 역사의 발전 경로를 산업화와 민주화로 매우 단순화하는 측면이 있다. 경제발전은 단지 경제성장이나 공업화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민주화는 정치적 민주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둘을 모두 달성했다고 이야기하는 것도 큰 문제이다. 나아가 산업화와 민주화를 ‘선(先)산업화 후(後)민주화론’같이 이분법적으로 분리하여 선후관계로 정립하는 논리는 더욱 큰 문제이다. 정치와 경제를 선후관계로 분리할 수 있느냐도 문제이지만, 이 논리에는 민주주의를 산업화가 진행되고 나면 자연스럽게 달성될 수 있는 결과적 파생물로 보는, 민주주의의 독자적 가치와 그것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바쳐진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희생을 부차화하는 측면이 있다.
K-현대사의 성취는 최고지도자와 권력을 잡은 주류집단만이 아니라 이들에 의해 소외되고 심지어 탄압받았던 집단까지 포함한 다양한 주체들의 참여와 활동을 바탕으로 기본적으로 역사가 진행되는 경로의 복수성을 인정하면서 좀더 다변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태초에 분배가 있었다
선산업화 후민주화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선성장 후분배론을 공식처럼 여긴다. 이는 경제발전이라는 틀에서 성장과 분배를 이분법적으로 분리하고 분배를 부차화한다는 면에서 문제이지만, 실제 한국현대사의 전개과정과도 맞지 않는다.
한국경제의 고도성장을 이야기할 때 그 밑바탕으로 거론되는 것이 대한민국 정부수립 직후와 한국전쟁 무렵 진행된 토지개혁이다. 태초에 분배가 있었다. 물론 남한의 토지개혁은 북한 등 공산주의 국가가 행한 것처럼 국가가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배하는 급진적 방식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사적 소유권을 인정한 바탕 위에서 진행되었다. 지주가 소유한 농지 중 3정보(町步)까지는 남겨두되, 나머지 농지는 국가가 그 가격을 연평균 생산량의 150%로 정해 지주로부터 일률적으로 매수하여 농민에게 분배하였다. 토지를 분배받은 농민은 5년간 한해 수확물의 30%를 상환하였다. 토지개혁은 국가가 강제로 소유권을 통제하고 조정하는 정책이었다. 토지개혁이 지체되면서 여러 문제가 야기되었으나, 이후 대한민국에서 토지개혁에 비견될 만한 획기적인 경제개혁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비슷한 시기에 대만도 토지개혁을 했는데, 토지 가격을 연평균 생산량의 250%로 정하고 농민은 10년에 걸쳐 현물로 8%의 이자까지 붙여 상환하였다. 한국의 토지개혁은 대만보다도 더 농민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1 토지개혁은 한국사회에서 지주계급의 소멸을 가져왔고, 이것이 산업화와 급속한 경제성장을 달성하는 밑바탕으로 작용했다는 점은 대부분의 학자들이 인정하고 있다.2
당시 대한민국의 정부와 국회를 차지한 주류집단은 지주 등 유산자층이었고 보수적인 우익인사였다. 그런데 어떻게 자신의 기득권을 제약하는 토지개혁을 단행할 수 있었을까? 일단 동학농민전쟁부터 일제 식민지시기 급진적 농민운동으로 이어진 농민들의 저항, 밑으로부터의 압력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러한 운동을 이끌었던 좌익세력들은 해방 직후 민족분단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대한민국에서 폭력적으로 배제되었다. 그러나 이들이 조성한 밑으로부터의 압력은 보수우파라고 하더라도 토지개혁의 필요성을 외면할 수 없는 정치적 환경을 조성하였던 것이다. 북한의 토지개혁도 소련의 주도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한반도 내부에서 형성된 요청과 동력에 의해 추동된 바가 컸다.3
한편 대한민국의 틀을 규정한 제헌헌법의 경제조항은 지금 보면 다소 당황스럽게도 중요 자원과 산업의 국유화를 추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나아가 헌법 조항에는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기업에 있어서는 근로자는 법률의 정하는 바에 의하여 이익의 분배에 균점할 권리가 있다”(제18조), “모든 국민에게 생활의 기본적인 수요를 충족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기함을 기본으로 삼는다. 각인의 경제상의 자유는 이 한계 내에서 보장한다”(제84조), “농지는 농민에게 분배하며 그 분배의 방법, 소유의 한도, 소유권의 내용과 한계는 법률로써 정한다”(제86조) 등의 내용이 있었다. 자유방임주의와는 지극히 거리가 멀고, 수정자본주의, 나아가 사회주의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 역시 기본적으로 밑으로부터의 압력과 관련이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되기 어려운 측면 또한 있다.
한국은 식민지였기 때문에 근대 세계질서를 주도하고 그 표준으로 간주되던 서구와는 달리 이념적인 지형이 훨씬 더 복잡한 양상을 띨 수밖에 없었다. 근대는 서구에서 시작된 새로운 자본주의 문명이 제국주의/식민지체제 속에서 전지구적으로 확산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식민지인들은 근대를 수용하고 이에 적응하여 살아갈 수밖에 없었지만, 한편으로 근대의 제국주의/식민지체제를 비롯한 서구중심적 질서는 식민지인에게 정치적 자유와 기회를 박탈하고 예속과 종속, 고도의 착취 등을 강요하기도 했다. 따라서 식민지인은 근대의 모든 측면을 그대로 수용하거나 순응해서는 자신을 자유롭고 독립적인 개인이라는 근대적 주체로 정립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한다. 그러하기에 백낙청이 지적한 바대로 “근대에 동시적으로 적응하며 극복하는 이중과제”4를 수행해야 하는 상황, 근대에 제대로 적응하기 위해서라도 근대극복의 노력이 필요한 상황에 직면한다. 즉 산업화 등 자본주의적 발전을 위해서도 전근대적 지대착취를 유지하고 확대했던 식민지의 유산을 청산하기 위해서도 자본주의 사회가 기초한 개인들의 소유권을 통제·조절하는 개혁을 단행하고 나아가 사회주의적인 지향성도 표방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일제 식민지하의 한국인 중에도 유산자층이 있었고, 그중 일부는 일본의 식민통치에 협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식민지에는 기본적으로 민족차별이 존재하기에 설사 한국인이 식민통치에 협력하여 지위 상승을 도모한다 하더라도 일본인과 완전히 동등한 기회를 누릴 수는 없었다. 그들도 식민지체제에 대해 불만이 전혀 없을 수는 없었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식민지시기에 보수적인 유산자층이라 하더라도 현실비판적이고 개혁적 성향을 보일 수 있었다.
예컨대 일제강점기 『동아일보』 그룹을 이끌었던 송진우는 보수적인 우익 민족주의자였지만 일찍부터 자유방임주의에 비판적이었으며 수정자본주의적인 이념을 보여왔다. 그가 주도하여 만든 해방 직후의 대표적인 보수정당인 한국민주당도 “공장의 경영 및 관리에 노동자대표의 참여” “토지사유의 극도제한(極度制限)과 농민본위의 경작균권 등 확립” “대규모의 주요공장 및 광산의 국영 내지 국가관리” 등 진보적 정책을 공식적으로 표방하였다.5 이에 해방 직후 미군정을 이끌었던 하지(J. R. Hodge) 사령관도 “한국의 우익세력도 미국사람들의 사고와 비교해보면 극단적으로 급진적이다. 그들의 강령도 급진적이고 사회주의적”6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사실 일제 말기와 해방 직후에 한국의 보수집단과 진보집단 사이에 이념 차이는 분명히 있었지만 그 격차가 그리 큰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해방 직후 좌우합작을 추진했던 움직임도 애초부터 비현실적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대한민국 제헌국회에서도 중도적 성향의 소장파 의원 그룹이 존재했는데, 이들이 국회 내에서 지주의 입장을 대변하는 세력을 제어하고 ‘농지개혁법’을 지주의 지대착취를 근절시키는 좀더 개혁적 방향으로 만드는 데 기여하였다.7 문제는 한반도를 분할점령한 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이 냉전적 관계를 형성해나가면서 한국인의 탈식민을 향한 움직임에 심각한 균열과 왜곡을 발생시켰다는 점이다.8
4월혁명과 5·16 쿠데타, 그리고 고도 경제성장
1960년대에 접어들어 한국은 고도 경제성장을 시작했고, 이는 한국사회의 모습과 세계적 지위를 크게 변화시켰다.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30년 동안 한국은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9%가 넘는 성장을 해왔는데,9 이렇게 30년 동안 고도 경제성장을 한 사례는 세계적으로 매우 드물다. 그러나 1997년 IMF 무렵부터 경제성장률은 5년에 1%씩 하락하는 추세를 보인다.10
한국의 고도성장을 정치와 연관 지어 설명할 때 1961년 5·16 쿠데타와 박정희 군사정부의 등장을 흔히 거론한다. 그러나 그전에 1960년 4월혁명이 있었다는 점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4월혁명과 5·16 쿠데타는 단절과 연속이 중첩되어 있는 매우 미묘하고도 복잡한 관계이다.
4월혁명이야말로 여러 측면에서 한국현대사에 역동성을 부여한 사건이었다. 한국전쟁이 휴전된 지 불과 7년 밖에 되지 않은 시점에서 대중적인 항쟁에 의해 최고지도자 이승만이 물러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한국에는 강한 국가도 존재했지만 시민사회의 역량도 만만치 않았다. 군사독재정권이 장기 지속됐지만, 4월혁명의 ‘승리의 기억’을 되새기며 군사정권에 대한 저항 역시 장기적으로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그레고리 헨더슨(Gregory Henderson)은 당시 주한미국대사관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하며 4월혁명을 직접 목격하였다. 그는 “이 혁명을 목격했던 사람들은 당시 한국의 각 도시를 휩쓴 전원합의성, 자발성, 그리고 철저한 신념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좀더 다원적인 사회들도 그런 감정의 색조를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고는 믿기 어렵다”11고 소감을 밝혔다. 자연생동성이 넘쳐나고, 발전된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발견하기 어려운 독특한 분위기와 행태가 있었다는 것인데, 최근 한국의 촛불시위에서 서구의 지식인과 언론인들이 받은 인상과 유사하다.
4월혁명은 내각책임제 개헌과 보수야당에 의한 정권교체라는 제한적인 정치적 변화로 귀결되었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4월혁명 직후 사회 각 부문에서 분단과 전쟁, 독재정권하에서 은폐되고 억눌렸던 각종 불만들이 분출되면서 다양한 사회운동이 나타났다. 이러한 움직임들은 1960년 가을을 경과하면서 분단극복을 추구하는 통일운동으로 합류해가는 모습을 보였다. 당시 통일운동은 경제발전 문제와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며 진행되었는데, 한국인은 물론 미국 관리들도 한국은 통일 없이는 발전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12
당시 한국의 보수집단은 일단 경제를 먼저 부흥시켜 북한과의 체제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고 북한주민을 남한체제로 끌어들이자는 ‘선건설 후통일론’을 주장했다. 장면정부도 경제제일주의를 내세우며 외국자본을 도입하고 한일관계도 개선하려 했으며 5·16 쿠데타 직전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작성하기도 했다. 한편 개혁적 성향의 집단은 한반도를 영세중립화하는 방식으로 냉전에서 벗어나 통일을 달성해야 한다고 했다. 이 그룹의 사람들은 대체로 서구 복지국가를 모델로 한 민주사회주의적 경제발전을 주장했다. 반면 좀더 급진적인 집단은 반외세·반봉건·반매판 민족혁명을 주장하며, 통일이 곧 이러한 민족혁명을 달성하는 길이라고 보았다. 이들 그룹은 반제국주의적이고 민족혁명론적인 입장에서 외국자본의 도입 자체에 비판적이었다.13 이렇듯 4월혁명 직후에 다양한 정치, 사회 집단이 통일문제와 연계된 경제발전의 방향 설정을 두고 논쟁하고 경합하는 역동적인 상황이 창출되었다. 이에 시인 김수영도 “요즈음은 시집을 읽는 것보다도 경제학 책을 읽는 날이 많다”고 했을 정도이다.14 이러한 과정을 통해 경제발전에 관심과 역량을 집중해가는 아래로부터의 합의와 분위기가 조성되었던 것이다.
5·16 쿠데타의 주체들은 박정희 소장을 중심으로 조직된 젊은 영관급 장교들이었다. 이들은 4월혁명 직후 한국군 선배 장성들 중 부패와 부정선거에 책임있는 사람들은 퇴진하라는 이른바 정군(整軍)운동을 통해 규합된, 애초 군대 내부에서 출현한 4월혁명 개혁집단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쿠데타 거사 단계에서 그 성공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북한의 간접침략을 막는다는 반공과 한미동맹을 핵심 공약으로 내세우며 쿠데타에 성공하였다.15
5·16 쿠데타는 기본적으로 4월혁명 당시 분단극복과 경제발전의 방향을 두고 다양한 집단이 경합하는 상황의 틈을 치고 들어와 성공한 것이었다. 박정희 군사정부는 4월혁명기 장면정부 및 보수정치집단이 주장했던 외국자본의 도입을 통한 경제건설론, 통일은 이러한 경제건설 이후로 유보한다는 선건설 후통일론의 입장을 기본적으로 계승하였다. 다만 장면정부와 차이점은 보수집단과는 상이한 통일과 경제발전 방향을 피력한 개혁적·급진적 집단을 군대의 물리력을 통해 폭력적으로 억압하고 봉쇄했다는 점이다. 또한 장면정부는 경제개발을 위해 군대를 감축하려 했지만, 박정희정부는 베트남 파병, 군사주의의 확산 등 지극히 군사화된 근대화를 추진한 것이 달랐다.16
1960년대 초 장면 및 박정희 정부가 추진한 경제개발정책은 미국의 제3세계 개발정책인 근대화론과의 밀접한 관련 속에서 전개되었다. 근대화론의 중요한 특징은 모든 발전 경로는 단일하며 따라서 ‘후진국’은 ‘선진국’이 이미 지나간 경로를 좇아 근대화되어야 하고, 후진국의 발전은 서구 선진국들과의 접촉을 통해 가속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었다.17 그러나 한국의 경제개발은 미국발 근대화론을 무조건 추종하거나 순응하는 방식으로만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해방 직후 분출했던 개혁적·진보적 움직임은 분단과 전쟁을 거치면서 철저히 봉쇄되었으나 제헌헌법의 경제조항과 토지개혁으로 흔적을 남겼다. 쿠데타로 좌절된 4월혁명기의 개혁적·진보적 움직임도 1960, 70년대 고도 경제성장에 흔적을 남겼는데, 민족·국민경제의 자립적 토대 건설을 강조하는 ‘내포적 공업화론’ 등이 그것이었다.
1950년대 말부터 시작되어 4월혁명으로 활성화된 다양한 경제발전론은 외국자본의 도입 여부를 비롯하여 경제의 대외개방성, 국공유화와 사유화 등등 여러 쟁점에서 차이를 보였지만, 기본적으로 외국의 원조에 의존하지 않는 ‘자립경제’를 추구하고 소비재산업만이 아니라 중화학공업 등 기간산업을 발전시켜 자립적 경제의 토대를 구축한다는 내포적 공업화론을 일정 부분 공유했다.18 내포적 공업화론은 해방 직후의 토지개혁처럼 진보와 보수가 겹치는 지점에 놓여 있는 주장이라 할 수 있었다. 박희범은 대표적인 내포적 공업화론자이자 초기 박정희 군사정부의 경제정책에 영향을 미쳤던 사람이다. 그는 민족혁명론을 주장하는 급진적인 인사와는 달리 외국자본의 도입에 긍정적이었고, 근대화론자들과 마찬가지로 불균등 발전론을 수용하였다. 그러나 근대화론을 비판하며 “내포적 공업화의 노력 없이 선진국의 이해관계에 추종하여 무계획적으로 〔외국자본을〕 받아들인 후진 지역에는 경제적 예속을 결과했을 뿐이었다”라고 하면서, ‘국제분업’에 순응하기보다는 기간산업을 육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19
애초 장면 및 박정희 정부가 기획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62~66)은 세계시장의 논리에 순응하는 수출주도형이 아니라 내포적 공업화론에 입각한 것이었다. 그러나 1963년을 거치면서 미국의 권고와 압력으로 외국자본을 들여와 값싼 노동력으로 세계시장에서 비교우위를 점할 수 있는 소비재 경공업 산업에 우선적으로 투자하여 그 생산품을 수출하는 방식으로 경제개발 계획이 수정되었다.20
흔히 박정희정부가 수출주도 정책을 추진하여 고도 경제성장을 성공시켰다고 평가한다.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67~71)이 수출주도정책으로 큰 성과를 거두어 한국은 고도 경제성장에 돌입했는데, 여기에는 물론 한일관계의 개선 및 베트남 파병 등 국제적 변수가 중요하게 작용했다. 이와 같은 성공으로 말미암아 한국정부의 경제개발정책은 수출주도형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그런데 경제개발 계획의 실행 양상을 당시의 한국정부 및 미국정부 기록을 통해 면밀하게 분석한 박근호의 연구에 따르면 제2차 5개년계획의 실제 진행은 정부의 계획대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섬유산업 부문에서 박정희정부는 주로 직물을 수출하려 했지만, 실제로는 스웨터를 비롯한 의류와 신발, 완구류 등에서 큰 수출 실적을 올렸다. 또한 정부의 계획은 전자산업 부문을 강조하지 않고 라디오 등 전자기기 수출에 중점을 두었는데, 실제로는 트랜지스터나 콘덴서 및 이들 부품을 조립한 직접회로(IC) 같은 전자부품 분야에서 큰 실적을 거두었다. 이들 전자부품산업은 주로 미국기업이 한국으로 진출하여 미국에서 가져온 소재를 한국의 값싸고 질 좋은, 주로 여성노동자의 노동력을 활용해서 조립해 미국으로 되가져가 완제품을 만드는 방식으로 발전하였다.21 이와 같은 양상은 경공업 중심의 수출주도 산업화가 정부의 정책적 실효라기보다는 기업과 우수한 자질을 보인 노동자들의 활동에 더 많이 의존하여 성공을 거두었음을 보여준다.
1960년대 후반 수출주도 산업화가 추진되기는 했으나 내포적 공업화 정책이 완전히 포기되거나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도 석유화학, 제철 및 금속 등 기간산업의 육성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내포적 공업화론이 주장한 국민경제의 자립적 토대 건설, 중화학공업의 건설을 강조하는 사고는 여전히 잠재해 있었다. 1970년대에 접어들어 박정희정부는 중화학공업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포항제철 건설로 대표되는 중화학공업화에 대해서는 미국 원조기관은 물론이고 한국의 경제관료들도 모두 시기상조라 여겨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으나, 박정희정부가 의지를 갖고 추진하였다.22 이 부분에서는 정부의 정책이 좀더 비중있게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중화학공업화 추진 과정에서 여러 난관과 문제점이 발생하였지만, 아무튼 1980년대에 이르면 한국은 중화학공업에서도 국제적 비교우위를 확보하게 되었다. 중화학공업화는 대만이나 싱가포르, 홍콩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규모있는 국토와 인구를 가진 한국이 오랫동안 고도성장을 달성할 수 있는 중요한 발판으로 작용하였다. 이와 같은 양상은 한국의 경제성장이 세계시장, 국제분업의 논리에 단순히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그에 도전해 극복해가는 과정에서 진행되었음을 보여준다.
주입식 교육을 넘어서
한국의 경제성장을 설명하는 연구들은 대부분 교육의 역할을 강조한다. 교육이 고도 경제성장에 필요한 양질의 노동력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그러한 연구는 한국정부가 1950년대부터 적극적으로 각급 학교를 만들고 상당한 교육비를 지출한 점, 되도록 많은 사람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보편교육을 진행한 점 등을 지적한다. 비록 콩나물시루 같은 교실에서 암기 위주의 주입식 교육이 이루어졌지만 한국이 선진국의 지식과 기술을 흡수하여 선진국을 추격해가는 과정에서 이러한 교육이 효과적인 측면도 있었다고 주장한다.23 이러한 견해는 일단 노동 문제를 노동력의 제공으로 한정시키고, 교육의 역할을 우수한 노동력의 양성에만 국한시킨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또한 한국에서 이루어진 교육과 지식활동의 영역을 너무 협소하게 설정한 채 역시 단선적으로 해석하는 것도 한계이다.
대한민국의 학교는 국가가 주도하는 주입식 교육의 장이었지만, 또한 4월혁명 이래 학생운동의 공간이기도 했다. 학생들의 의식이 국가가 통제하는 제도권 교육의 내용에 따라 일률적으로 규정되었다면, 학생운동을 통해 표출된 학생들의 현실비판적 의식과 행동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1950년대 이승만정부는 학도호국단을 만들어 학생들에게 반공의식을 주입하였지만 학생들은 이 활동을 통해 민주적 의사를 결정하는 방식을 학습하고 각 학교 호국단 간부들 사이에 형성된 유대감과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4월혁명 시위에 나섰다. 독재정권기 대학가에서는 공식·비공식적인 여러 이념 써클이 있었고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비공식 신문과 각종 유인물 등 출판물이 간행되었다.24 학생들은 학교가 가르쳐주지 않는 책을 읽고 발제하고 토론하며 현실비판적 의식과 스스로 사고하는 능력을 키워나갔다. 학생들뿐 아니라 노동자들도 1970년대 민주노조 활동에서 보이는 바처럼 각종 노동단체와 노동조합의 활동 과정에서 다양한 차원의 지식을 쌓아가는 데 열의를 보였다.25
최근 촛불시위 현장 등에서 한국의 대중이 각종 온라인, 오프라인 공간에서 행하는 패러디, 풍자, 퍼포먼스 등은 그 기발함과 창의성이 감탄할 정도이다. 이는 제도권 교육만이 아니라 학생과 대중이 자발적으로 형성한 영역에서 구축해온 다양한 지식활동을 통해 주입식 교육의 한계를 보완하고 극복해나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26
불평등 해소와 평화 정착이라는 과제
한국현대사의 성취는 이렇듯 근대화든 선진화든 어떤 단선적인 길을 따라간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복수의 경로를 놓고 다양한 집단이 다양한 영역에서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경합하고 갈등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그러하기에 남다른 역동성을 보여주었다. 물론 이러한 경합과 갈등은 평화적으로 진행된 것이 아니라 분단과 전쟁, 장기 지속한 독재정권하에서 매우 폭력적인 양상으로 진행되었고 많은 문제와 피해를 양산하였다. 그러나 주류집단에 저항하다가 탄압당하거나 배제된 사람들의 행동과 주장도 분명 한국사회의 발전 과정에 영향을 미치고 기여하였다.
1987년 이후 한국이 민주화로의 이행을 시작하면서 그동안 역동적이었지만 매우 파괴적이었던 경합 과정에서 발생한 피해와 문제가 드러나고 개선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과제들이 남아 있다. 그중에서도 불평등과 평화 정착 문제가 두드러진다.
해방 직전의 한국은 매우 불평등한 나라였다. 그러나 식민지로부터의 해방, 토지개혁 등을 통해 해방 이후 불평등 문제는 크게 개선되었다. 고도 경제성장기에는 재벌기업에 경제력이 집중되는 등 불평등한 구조가 형성되었지만, 빠른 성장 덕분에 하층계급도 수입이 증가하고 상층으로 상승할 수 있는 기회를 얻어 경제적 불평등 정도는 여타 나라들과 비교해볼 때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부터 경제성장은 정체되고 불평등 문제가 악화되는 추세이다.27 1987년 이후 한국의 민주화는 정치적·절차적 차원뿐 아니라 경제적·실질적 평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좀처럼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한국사회는 민주화로 말미암아 정치적 갈등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방면에서는 큰 진전을 보였다. 2016~17년 박근혜 탄핵을 둘러싼 수개월의 촛불항쟁 과정에서 사망자가 단 한명도 발생하지 않았고 구속된 사람조차 아무도 없었다. 정말 감탄할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북한과의 관계, 주변 강대국과의 관계를 평화적으로 정립하는 문제에서는 오히려 퇴보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동안 남북관계의 개선, 한반도의 평화 정착을 위한 적지 않은 시도와 노력이 있었음에도 2019년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이 좌초된 이후 남북관계는 장기간 공전 상태이다. 특히 최근 미중 패권경쟁이 가시화되고 우끄라이나전쟁 및 이스라엘을 둘러싼 중동전쟁 등 심상치 않은 국제적 분위기에서 한반도의 평화를 어떻게 유지하고 공고히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더욱 긴박하게 다가오고 있다. 그러나 정치권을 물론이고 시민사회에서도 이 문제에 대한 본격적인 토론과 행동은 찾아보기 어렵다.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지 못할 때 위기는 쉽게 그리고 크게 찾아오는 법이다.
불평등 해소와 평화 정착의 문제는 선건설 후민주화론같이 상호연결되어 있는 것을 이분법적으로 구별하여 양자택일하거나 우선순위를 정하는 사고방식으로는 풀 수 없다. 이와 관련된 다양한 차원의 문제들을 서로 연결해 네트워크적으로 사고하고, 여러 주체들의 참여 속에서 해결할 수밖에 없다. 일방적이고 단선적인 경로로 설정된 목표를 향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달려가는 군사주의적 돌진 방식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경로의 복수성을 인정해야 한다. 다양한 정치·사회집단이 복수의 길을 놓고 경합할 때 역동적인 역사가 가능하며, 창의적이고 민주적인 문제해결도 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한국현대사가 성취를 이뤄온 방식이기도 하다. 이러한 측면에서 한국현대사가 주로 이념투쟁의 도구로 활용되는 현실은 매우 개탄스럽다. 단선적으로가 아니라 복합적으로 다양한 주체들의 이해관계와 행동을 포괄하며 한국현대사를 지속적으로 성찰해나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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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병식 「한국과 대만의 토지개혁 비교연구」, 『한국과국제정치』 4권 2호, 1988.↩
- 김낙년 『한국경제성장사』, 해남 2023, 368~72면.↩
- 김성보 『남북한 경제구조의 기원과 전개』, 역사비평사 2000.↩
- 백낙청 『근대의 이중과제와 한반도식 나라만들기』, 창비 2021, 27~52면. 백낙청은 적응과 극복이라는 이중과제는 양자가 분리되어 선후관계로 단계화되거나 병립될 수 없는 동시적이고 이중적인 단일한 과제임을 강조한다.↩
- 윤덕영 「일제하·해방직후 동아일보 계열의 민족운동과 국가건설노선」, 연세대 대학원 사학과 박사학위 논문 2010, 46~61, 321~24면.↩
- “Corps Staff Conference,” 1946.3.25,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XXIV Corps, G-2 Historical Section, Historical Files 1945-1948, RG 332. 정용욱 편 『해방직후 정치·사회사 자료집』 1권, 다락방 1994, 205면 참조.↩
- 신병식 「제1공화국 토지개혁의 정치경제」, 『한국정치학회보』 31집 3호, 1997.↩
- 최근 출간된 정병준의 연구는 해방 직후 한국인의 탈식민을 향한 움직임이 미소의 한반도 분할점령 상태에서 발생한 조숙한 냉전에 의해 어떻게 갈라지고 왜곡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정병준 『1945년 해방 직후사』, 돌베개 2023 참조.↩
- 김낙년, 앞의 책 40~42면.↩
- 김세직 『모방과 창조』, 브라이트 2021, 46~66면.↩
- 그레고리 헨더슨 『소용돌이의 한국정치』, 박행웅·이종삼 옮김, 한울아카데미 2000, 268면.↩
- 브루스 커밍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 김동노 외 옮김, 창비 2001, 435면.↩
- 졸저 『통일문제와 정치·사회적 갈등』, 서울대학교출판부 2001, 213~308면↩
- 김수영 「민물」, 1961.4.3, 『김수영 전집』 2권 산문, 민음사 1981, 27면.↩
- 졸고 「4월혁명 직후 정군운동과 5·16 쿠데타」, 『한국사연구』 158호, 2012.↩
- 군사화된 근대화, 군사정권기 군사주의에 대해서는 문승숙 『군사주의에 갇힌 근대』, 이현정 옮김, 또하나의문화 2007; 권인숙 『대한민국은 군대다』, 청년사 2005 참조.↩
- 마이클 레이섬 『근대화라는 이데올로기』, 권혁은 외 옮김, 그린비 2021, 17~52면.↩
- 조석곤 「1970년 전후 제시된 한국경제발전론 비교 검토」, 『민주사회와 정책연구』 17호, 2010.↩
- 박희범 「로스토우 사관의 비판적 고찰」, 『정경연구』 1966년 3월호, 97~98면.↩
- 기미야 다다시 『박정희 정부의 선택』, 후마니타스 2008, 122~76면.↩
- 박근호 『박정희 경제신화 해부』, 김성칠 옮김, 회화나무 2017.↩
- 같은 책 216~18면; 박영구 「구조변동과 중화학공업화」, 이대근 외 『새로운 한국경제발전사』, 나남 2005.↩
- 김낙년, 앞의 책 132~43면; 김세직, 앞의 책 182~209면.↩
- 오제연 「1960~1971년 대학 학생운동 연구」, 서울대 대학원 국사학과 박사학위 논문 2014.↩
- 졸저 「똥과 지식: 여성노동자와 동일방직 사건」, 『민주주의 잔혹사』, 창비 2017, 83~116면.↩
- 라종일은 민주화운동이 한국인의 진취성과 창의력을 키우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지적한다. 라종일 외 『한국의 발견』, 루아크 2021, 121~24면.↩
- 김낙년 「한국의 소득분배」, 이영훈 외 『한국형 시장경제체제』,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