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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김용옥 『도올 주역 계사전』, 통나무 2024
주역 계사에서 찾은 ‘천지’ 코스몰로지의 현대적 소환
전종욱 全鍾頊
전북대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 교수 lovejnj@jbnu.ac.kr
“계사(繫辭) 없이 유교는 존재하지 않는다. 유교 없이 문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직전 작 『도올 주역 강해』(통나무 2022)의 후속이자 주역 해설의 완결판이라 할 『도올 주역 계사전』의 책날개에서 저자 김용옥은 이처럼 선언했다. 단순한 점서였던 『역(易)』이 유교의 최고 경전이 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계사전』, 주역을 가장 절실하고도 아름답게 해설한 천하의 명문 『계사전』을 우리말로 옮기고 그 철학적 함의를 치열하게 풀어낸 것이 바로 이 책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궁금증은 자연히 앞의 저 선언이 과연 얼마나 유효한지, 어떻게 저런 결론이 가능한지, 정말 그러하다면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 등으로 번져간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주역 계사전』은 소위 주자학의 이기론(理氣論)이 대세가 되기 이전 선진유학(先秦儒學)이 이미 그 사유의 절정에 다다랐다는 증거이자, 동아시아 전역이 동참해 이룬 사유체계의 진면목이라는 것이 김용옥의 주장이다. 그것은 동시대 노자 장자가 그토록 강조했던 인간의 언어를 뛰어넘는 진리의 체득, 후한(後漢) 이후 불교의 반야사상이 동방인들을 강렬하게 매혹했던바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선경(禪境)을 내장한 거대한 회통의 심연이었다. 그러므로 향후 인류문명이 가야 할 행로는 『주역 계사전』의 사유와 지향을 회복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단초는 먼저 ‘천지(天地)’ 우주론에서 출발한다. 저자는 『계사전』의 첫머리에 나오는 “천존지비(天尊地卑, 하늘은 높고 땅은 낮다)”가 바로 천지 코스몰로지(cosmology, 우주론)의 완벽한 표현이라고 하면서, 천지라는 개념이 전에 없던 독특한 우주론임을 세밀한 문헌비평을 통해 입증한다. 우리는 마왕퇴 한묘와 곽점 죽간 등 그간 발굴된 고고학의 성과 덕분에 철학적 개념과 용어에 대해 송대 유학자들보다 정확한 견해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계사전』 이전에 성립한 『논어』 『맹자』에는 천지라는 말이 한번도 나오지 않는 데 반해 『노자 도덕경』 『장자』에서는 매우 빈번하게 언급된다. 역의 철학은 유가의 전유물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계사는 노장철학이 지적하는 언어의 기능과 한계를 충분히 내면화한 위에, 물리적 자연으로서의 천지를 넘어 인문세계를 포괄하는 고도의 상징으로서의 천지를 64괘에 담는 철학적 프로세스를 장엄하게 열어 보였다. 계사는 역의 64괘가 인간 언어의 근본적 한계, 곧 언어로 표현된 모든 것을 고정된 실체로 보게 하는 인간 종의 근원적 경향성을 뛰어넘어 ‘영원한 변화’(變化, 易, Change)로 포착해낼 수 있음을 보여준 고전이요, 그럼으로써 인류사에서 한번도 만나보지 못했고 아직까지 진정으로 도달하지 못한 지점, 곧 만유의 존재 이유부터 만유의 현존 원리를 거쳐 만유의 윤리적 이상이 통합된 세계를, 여전히 한계를 가진 동일한 바로 그 인간의 언어로 풀어낸 걸작이었다. 그 핵심이 천지 코스몰로지라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이는 비트겐슈타인(L. Wittgenstein)이 인류사의 모든 철학적 질문과 대답이 물을 수 없는 것에 대한 ‘의미 없는’(meaningless) 언설일 뿐이었다는 지적을 아득히 벗어나는 위대한 성취라 평가할 만하다.
그리하여 천지 코스몰로지는 천지를 부모로 하여 나온 만물이 쉼 없이 생성하는 우주론이다. 거기서 인간은 만물과 동포가 된다. 인간이 천지 부모의 생생지덕(生生之德)을 본받아 개인적 차원에서 사회적 차원으로 확대하는 것이 『대학』의 수제치평(修齊治平)의 길이요, 부모인 천지가 제자리를 잡고 동포인 만물이 화육되게 일상의 매순간 희로애락의 중화(中和)를 완성해내는 것이 중용의 길이다. 그 근본에 있는 역은 우주 전체가 도덕형이상학이 되는 우주종교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것이야말로 인류가 그토록 갈망하는 미래가 아니겠는가라고 묻고 있다.
저자는 계사의 또다른 유명한 구절 “형이상자 위지도, 형이하자 위지기(形而上者謂之道, 形而下者謂之器. ‘형’이 있고 난 뒤에 위쪽을 ‘도’, 아래쪽을 ‘기’라고 한다)”의 본뜻을 제대로 파악할 것을 촉구한다. ‘형’은 곧 역이요, 태극이요, 만유이다. 저자의 박사논문 주제였던 왕부지(王夫之, 1619~92)의 철학에서부터 ‘도’와 ‘기’는 기본적으로 동일한 ‘형’에 통합된 두 측면일 뿐임을 재삼 강조했다. 그러고 보면 근세 서세동점의 위기상황에서 그 대응논리로 펼친 ‘동도서기(東道西器)’론은 이같은 계사의 논의를 곡해한 혐의가 짙다. 형 속에 이미 도와 기가 함께 있는 것인데도 이기론에 기운 우리 동방인 스스로 도와 기를 나누어 도를 리(理)의 본원적 측면으로, 기를 기(氣)의 현상적 측면으로 부지불식간 받아들여온 것이다. ‘이가 발하고 기는 그에 따른다[理發而氣隨之]’고 주장한 바 있는 남송의 주희(朱熹)와 조선의 이황(李滉) 모두 이미 그러한 곡해의 빌미가 있다. 이러한 흐름은 데까르뜨(R. Descartes)로 대변되는 근세 서양철학의 주어-술어 이분 구조와 친연성이 짙은 사유로서, 계사의 원래 의미에 크게 미달한 사상적 전략이 아닐 수 없다. 반면 개화기 서학기술 한역서에 전기(電氣)의 성질은 “없는 곳이 없고 작동하지 않는 때가 없다[無所不在, 無時不作]”라고 표현한 사례가 있는데, 도와 기의 통합적 설명의 단초라 할 만하다.
동방인이 보기에 매우 이질적으로 들리겠지만 서양에서는 로고스(logos), 즉 말이 곧 빛이라 하여 신적 권위에 해당하는 특별한 지위를 언어에 부여했다. “말 그 자체가 주술적 효용이 있다”(Spelling spells)는 고대인의 소박한 인식이 정교하게 지속된 결과일 수도 있다. 저자는 현대 서구철학자 중 하이데거(M. Heidegger), 비트겐슈타인, 화이트헤드(A. Whitehead)의 경우 도와 기의 합일을 탐색한다는 측면에서 『계사전』의 사유와 일부 공통점을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나아가 그들의 미비점을 짚어주는 계사의 깊은 우환의식(憂患意識)을 지금의 시각에 맞게 다시 벼리는 방안도 제안한다. 오펜하이머(R. Oppenheimer)의 원폭 제조로 상징되는 과학 그 자체의 폭주는 제어 가능한가? 첨단과학기술을 손에 쥐고도 전지구적 위기상황에서 하루하루 살얼음을 걷고 있는 우리 모습을 돌아보며 저자는 인류문명의 향방을 핸들링할 수 있는 철학적 지렛대가 과연 무엇인지를 처절하게 묻고 있다. 그런 점에서 『도올 주역 계사전』에서 설명한 계사는 유불도의 진리를 전관할 수 있는 출발점이요, 동서 철학의 분기점을 확인할 수 있는 시금석이요, 서구문명에서 배태한 과학의 힘의 파괴적 성향을 천지 코스몰로지라는 오래된 첨단 우주론으로 조절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철학적 훈련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