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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안도현 安度昡
1961년 경북 예천 출생. 1981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 『모닥불』 『그리운 여우』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 『외롭고 높고 쓸쓸한』 『간절하게 참 철없이』 『북항』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등이 있음.
ahndh61@chol.com
북촌
나는 북촌에 다녀왔다
서울의 북촌은 궁궐에서 북쪽으로 퇴근하는 관료들이 살던 마을이다 북촌은 대청마루에 큰 유리문을 달고 처마 끝에 함석 차양을 달아낸 한옥들이 오밀조밀하다 처마는 처마끼리 눈썹을 붙이고 벽과 벽을 잇대 함께 사용하는 마을이다
북촌은 아름답다
북촌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순간 파멸이 왔다 북촌은 가난하고 지저분하고 딱딱하고 붉고 악독하다고 썼어야 했다
나는 북촌에서 과일남새생채, 배속김치, 명태순대찜, 송엇국을 먹었다 여기에 없는 것이 거기에 있어 북촌은 여전히 맛있다
북촌은 가난해서 아름답고 모든 게 부족해서 아름답고 언행이 덜떨어져서 아름답다
그럼에도 북촌에 대해 말하지 말았어야 했나 하고 생각한다 북촌에 대해 수많은 편견이 있다는 것을 안다 학교는 북촌에 가자고 하면 안 된다고 가르쳤고 법원은 북촌에 가서 살자고 말하면 감옥에 보냈으니까
해방 후 나라가 없을 때
북촌으로 가서 나라를 세워보려던 사람들이 있었다 임화는 펜을 들고 북촌으로 가서 림화가 되어 사라졌고 이쾌대는 붓을 들고 리쾌대가 되었지만 살아남았다 리원조도 리태준도 펜으로 쓰려고 하지 말고 붓을 들었어야 했나 다 옛날이야기다
봄꽃이 북상해도 벌통을 트럭에 싣고 꽃을 따라가지 말았어야 했나
남쪽 오래된 바닷가에 살던 이광웅은 북촌에 간 오장환 시집을 읽다가 잡혀갔다 원양어업보다 북촌에서 쓰는 먼바다고기잡이가 낫다고 가르쳤다가 간첩으로 몰렸다 전두환 때였다 그리워하면 죽는다
북촌이 뭐길래
나하고는 그다지 관련 없다고 생각하던 북촌
비굴하게 명함을 내밀지 않아도 되는 북촌
사랑을 얻기 위해 아첨하지 않아도 되는 북촌
나는 북촌에 열번쯤 다녀왔다
하지만 지금 북촌은 없다 북촌은 죽었다 북촌을 꺼내는 일은 죽은 자기 무덤을 파헤치는 일이다
지금 그래서 겨우 북촌은 아름답다고 쓰고 있다 이건 내 어깨가 왼쪽으로 기울었다고 의심받을 짓이다 나는 도무지 북촌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나는 아직도 북촌을 잘 모른다 북촌에 대해 뭔가 의도나 의지를 가지고 있지도 않다 북촌에서 사업을 펼쳐 팔자를 고칠 계획도 없다
나는 하는 수 없이 1942년판 백난아의 찔레꽃이나 따라 부르는 수밖에 없다 천리객창 북두성이 서럽습니다
3월에서 5월까지
3월 17일 논둑으로 냉이를 캐러 갔다 땅에 발을 묻고 있던 눈발들이 가까스로 발목을 꺼냈다
3월 26일 달래 뿌리가 엄지발가락만큼 실했다 아내가 달래간장을 만들었고 나는 흰밥에 비볐다
3월 28일 고깔을 쓰고 나온 광대나물을 데쳐 무쳐 먹었다 다 뜯지는 않고 한고랑은 꽃 보려고 남겨두었다
4월 1일 고들빼기와 흰민들레를 한바구니 캤다 김치를 담글 요량으로 다듬었다
4월 6일 진달래 꽃잎을 따 입에 물어보았다 화전이 눈에 삼삼했으나 찹쌀가루가 없다 했다
4월 7일 화살나무 새순 손바닥 펼치기 전에 한움큼, 돌나물도 한움큼 주머니에 넣었다
4월 8일 비 온 뒤 논둑에 벼룩나물 지천이다 마당에 벼룩이 튈까봐 보기만 했다
4월 9일 오전에 원추리 새순 자르고 오후에 망초와 꽃다지 새순을 따 데쳤다 처음 해본 일인데 맛이 좋았다
4월 10일 아버지 산소 둘러보러 가는데 두릅 순이 돋았다 나도 두리번거렸다
4월 17일 소망실 사는 정문수가 엄나무 순을 따서 한봉다리 갖다주었다
4월 20일 뽕나무 새순 반뼘쯤 올라왔다 왼손으로 가지 끝을 잡고 오른손으로 톡톡 딸 때 나는 소리 지상으로 빗방울 뛰어내리는 소리
4월 26일 흰민들레 씨앗이 맺히는 대로 받았다 내년 봄에는 민들레밭을 일굴 것이다
5월 20일 참비름과 명아주 연한 잎을 한소쿠리 땄다 조선간장과 참기름으로 무쳐 고추장에 비벼 먹었다 끝내준다
5월 24일 왕고들빼기 잎사귀 몇장 쌈 싸서 먹었다 봄이 다 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