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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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돌아온 트럼프, 다자주의로 돌파하자

 

 

김준형 金峻亨

제22대 국회의원, 조국혁신당 외교안보특별위원장. 저서 『대전환의 시대, 새로운 대한민국이 온다』 『영원한 동맹이라는 역설』, 공저서 『코로나 사피엔스, 새로운 도약』 등이 있음.

 

김창수 金昌洙

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사무처장. 남북공동연락사무소 초대 사무처장,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정책실장, 청와대 NSC 정책조정실 국장 역임. 저서 『멋진 통일운동 신나는 평화운동』, 공저서 『협상의 달인: 다큐, 노무현과 김정일의 긴 하루』 등이 있음.

 

최배근 崔培根

경제학자, 건국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저서 『화폐 권력과 민주주의』 『누가 한국 경제를 파괴하는가』 『호모 엠파티쿠스가 온다』, 공저서 『한국 경제 긴급 진단』 『코로나 사피엔스, 새로운 도약』 『거대한 분기점』 등이 있음.

 

 

김창수(사회) 안녕하세요. 이번 대화의 사회를 맡은 김창수입니다. 새해를 맞았지만 국내외 상황은 ‘격동’이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 큰 변화의 와중에 있습니다. 국내적으로는 비상계엄 선포와 해제, 탄핵소추 국면에 있고, 국제적으로는 우끄라이나전쟁 이후로 세계질서가 요동쳐온 가운데 미국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으로 소위 트럼프2.0 시대가 열렸습니다. 북한이 남북관계를 교전 중인 두개의 적대국가로 선포하면서 남북관계도 당장은 안개 속에 있습니다. 이러한 큰 변화들이 맞물리고 있지만, 이를 잘 딛고 선다면 지금이야말로 21세기 한반도 미래를 향한 새판짜기의 기회일지 모릅니다. 이번 봄호 대화는 ‘트럼프 재집권과 세계질서, 그리고 한반도’를 주제로 진행하고자 합니다. 저는 그동안 시민단체와 정부를 오가며 평화와 통일이라는 화두를 붙잡고 활동해왔습니다. 평화운동·통일운동을 했고 김대중정부에서는 민화협(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노무현·문재인 등 정부에서는 청와대를 비롯한 행정기관에도 몸담았습니다. 가끔 공무원을 해서 ‘가공(가끔 공무원)’이라 불리기도 했어요.(웃음) 김준형 최배근 두분 선생님도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왼쪽부터 김준형 최배근 김창수 © 김준연

 왼쪽부터 김준형 최배근 김창수 © 김준연

 

김준형 안녕하세요. 저는 대학에서 25년간 학자로 지냈고, 중간에 2019년부터 2년간 국립외교원장을 지냈습니다. 인생 후반기에 갑자기 정치의 길을 걷게 된 이유는 무엇보다 윤석열정부가 망가뜨릴 외교에 대한 위기감이 컸기 때문인데, 지난 비상계엄 해제와 탄핵소추 투표에 참여하면서 역사의 한 장면에서 옳은 선택을 했다는 뿌듯함을 느꼈습니다. 어쩌면 운명처럼 이 시기를 겪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최배근 반갑습니다. 저는 평생을 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는 교수로 지내왔습니다. 집이 수명을 다했으면 새집을 지어야 하듯 오래전에 수명이 끝난 사회체제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를 최대 관심사로 삼고 있습니다. 분단 이후의 박정희 시스템이 수명을 다하고, 경제적인 양극화가 정치의 양극화를 초래하며 내적 모순이 심화되어왔습니다. 오늘 대담에서도 제 문제인식은 여기에서 출발할 것입니다.

 

김창수 국내정치, 남북관계, 국제정세라는 세가지 축이 맞물려서 진행될 변화 속에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더 예측 불가능한 시대가 열릴 것을 예고하는 것 같습니다. 한미관계 및 우리 외교의 나아갈 방향에 대해 명징하게 짚어온 김준형 의원님, 통계와 수치분석을 토대로 경제상황을 살피고 전망해온 최배근 선생님과 함께 트럼프의 재집권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천우신조가 된 비상계엄 사태

김창수 국내 상황부터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비상계엄 이후에 탄핵을 앞두고 매일매일 새로운 사건의 연속인데, 이는 한국현대사에서 우리가 겪어본 적 없는, 향후 역사에 기록될 날들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우선 현상황을 어떻게 보시는지 말씀해주세요.

 

최배근 비상계엄 선포를 본 순간, 저의 첫 반응은 “한편의 코미디네”였습니다. 군부독재를 직접 겪은 세대이기 때문에 갑자기 과거로 끌려간 기분도 들었고요. 그러고 나서는 천우신조(天佑神助, 하늘과 신령의 도움)라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저는 윤석열정부를 무지·무능·무치의 ‘3무 정권’이라고 표현합니다. 만약에 비상계엄 선포가 없었다면 지금 윤석열정부 3년차가 진행되고 있었을 겁니다. 윤석열·김건희 부부가 한복 입고 설 인사 메시지도 찍었겠죠. 그걸 앞으로 2년 반이나 더 지켜본다고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끔찍합니까. 윤석열정부가 출범한 2022년 2분기부터 2024년 4분기까지 연평균 GDP(국내총생산) 성장률은 1.5%밖에 되지 않습니다. 우리 경제를 놓고 보면 이미 모래탑처럼 취약해진 상태였어요. GDP에는 개인, 기업, 정부 소득이 포함되는데 2022~23년 2년간 연평균 성장률은 2.1%였지만, 실질 개인소득 증가율만 보면 -1.1%를 기록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내수위축과 경제붕괴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고, 비상계엄을 선택한 것도 일종의 자부월족(自斧刖足), 자기 스스로 도끼로 발등을 찍는 행위였던 겁니다. 제 주변 사람들은 아직도 불안에 떨고 잠에 잘 못 드는데, 저는 외려 마음이 평화롭습니다. 애초에 서울에서 실시간으로 수많은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비상계엄을 실행한다는 게 말이 안 됐고, 위헌이라는 점도 명백했으니까요.

 

김준형 지금이야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비상계엄이 선포되던 밤에는 근원적인 공포가 있었습니다. 목숨을 건 밤이었어요. 서부지법 사태처럼 가열된 행위가 단 한 사람한테서라도 촉발됐다면 정말 총질을 할 수도 있었다고 봅니다. 세계질서의 대전환기에 대한민국호 컨트롤타워의 공백이 걱정되지만, 그럼에도 지금 같은 국제질서 격변기에 윤석열정부가 계속되기보다 차라리 공백인 게 나을지 모릅니다. 트럼프는 협상대상을 거꾸러뜨리고 자신을 과시하기를 원하는데, 우리가 나쁜 협상자를 내세워 그 전략에 말려들기보다 시간을 벌 수 있으니까요. 미국 정치·사회학자 찰스 틸리(Charles Tilly)가 ‘국가라는 제도는 본질적으로 조직폭력배와 다를 바 없다’고 말했죠. 바이든정부에서도 한미일 관계에서 보스가 미국이면 중간보스는 일본이고 한국을 마치 행동대원처럼 취급했거든요. 조직폭력배 세계에서는 힘이 더 센 사람한테 상대가 굴복하게 되어 있습니다. 윤석열정부가 트럼프정부를 상대했다면, 미국이 원하는 대로 다 들어줬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트럼프 취임을 둘러싼 외교 공백이 차라리 나은 이유입니다.

 

최배근 이제는 정치 영역에서 새집을 짓는 일이 중요합니다. 일반 국민들은 탄핵문제에 몰두하고 있지만, 정치인들은 그다음까지 생각해야 하죠. 지금 윤석열이 하고 있는 것은 법적투쟁이 아니라 정치투쟁입니다. 박근혜 탄핵에서 교훈을 얻었잖아요. 법적인 문제에서는 자기가 끝났다는 걸 압니다. 그 대신 지지자를 유지하고 결집시켜야 사면 등 다른 가능성이 커진다고 생각합니다. 뒤에서 이야기하겠지만 그런 정치투쟁이 얼마나 효과를 보느냐는 우리 정치와 사회의 개혁, 경제적·정치적으로 분열된 우리 내부의 통합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김창수 아시아에서도 손꼽히게 발전한 민주주의 국가이고 K컬처를 통해 국가 브랜드 가치도 높아진 한국에서 위헌적이고 폭력적인 계엄 사태가 벌어져 국내는 물론 세계에도 충격을 줬습니다. 하지만 이번 기회에 우리 민주주의의 회복력을 전세계에 보여줬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이번 사태의 대외적 영향력을 살펴볼 때,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에 주미대사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들어가지 못한 일은 어떻게 봐야 할까요? 일각에서는 한미관계에 파고가 닥치는데 취임식 외교를 못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김준형 취임식 외교라는 건 원래 없는 겁니다. 미국의 취임식은 본래부터 철저히 국내 행사이고, 외국 게스트는 미국에 대사로 주재하는 인사들 정도만 정식으로 초청되죠. 그래서 한국의 경우 조현동 주미대사만 초청된 겁니다. 취임식 티켓이 22만개 뿌려졌는데, 미국에 다녀왔다고 하는 정치인들은 미국정부의 초청장이 아니라, 그 배분된 티켓을 구해서 가는 것뿐입니다.

 

최배근 트럼프정부에서 윤석열정부를 중요하게 고려 안 했을 것도 분명합니다. 윤석열정부가 바이든정부하고도 못했던 걸 갑자기 해낼 리도 없고, 국가적 이익을 위해서 열심히 뛰었을 리도 없습니다. 지금 같은 정치적 공백 상태가 아니었다 해도 취임식 외교의 내용물은 없었을 겁니다. 윤정부가 계속됐다면 차기 정부는 2027년이 되어서야 트럼프정부와 마주할 수 있게 되는데, 만약 올해 조기 대선이 열린다면 같은 해 출범한 트럼프정부를 새 정부에서 대응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윤석열이 탄핵되지 않았다고 가정하면, 2년 반 동안 한미관계의 판이 잘못 짜인 상태로 민주정부가 들어서서 수습해야 했으니 엄청난 차이입니다. 그런 점에서 역시 천우신조라고 봐요.

 

미국은 왜 또다시 트럼프를 선택했는가

김창수 이제 본격적으로 트럼프의 재집권에 대해 논해보겠습니다. 미국의 여러 전문가, 언론, 여론조사에서 트럼프의 당선 가능성을 압도적으로 높이 보는 경우는 많지 않았습니다. 경합주에서 해리스가 좀더 유리할 거라는 분석도 많았고요. 그런데 미국 국민들은 트럼프 대 해리스의 대결에서 트럼프를 선택했습니다. 어떤 점이 그의 재집권을 가능하게 한 걸까요?

 

김준형 사실 제가 2016년 미국 대선결과 예측을 잘못해서 한동안 비판받았습니다. 이번에는 다행히 트럼프 당선을 예측했어요.(웃음) 일단은 양극화나 삶의 질 저하 등 사회적인 추세가 트럼프에게 유리하게 작동했습니다. 지금 미국이 왜 이런가 하는 질문에 이민자와 유색인종 때문이라고 선동하는 게 가능했고, 원래 미국은 이렇지 않았다고 백인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면서 얘기할 수 있었던 거죠. 국가경제는 바이든정부 4년간 호황이었지만, 기름값이나 식료품값 등 물가상승에 대한 내부 불만도 팽배했습니다. 백인여성 유권자가 어떤 선택을 할지 주목됐는데, 남편한테 공화당 찍으러 간다고 하고 민주당 찍는다는 선전도 나왔죠. 그런데 실제로는 여성 유권자의 그런 선택이 잘 발휘되지 않았고 일곱개 경합주에서도 트럼프가 압승했습니다. 이 말인즉 ‘히든 해리스’는 거의 없었고 ‘샤이 트럼프’가 다시 위력을 발휘했다는 뜻입니다. 해리스가 표심을 잘못 짚으며 국내외 문제들에 대한 해결방향을 선명하게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가령 트럼프의 반(反)이민주의를 공격했지만 미국 백인들은 이민자가 자신의 일자리를 빼앗아간다고 믿기 때문에 트럼프에 동조합니다. 남미계 이민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트럼프에 등을 돌리기는커녕 이미 정착한 자신들의 파이가 작아질까봐 후발 이민자들에 대한 규제와 단속을 지지하고, 트럼프에 표를 주었다는 것이지요. 차갑고 비극적이지만 트럼프는 이 현실을 정확하게 읽었던 것입니다. 극우와 반이민은 이미 전세계적 풍조였고 해리스가 이길 수 없는 선거였어요.

 

김창수

김창수

김창수 트럼프 선거유세 당시 한 코미디언이 “푸에르토리코는 쓰레기섬”이라고 발언해 이슈가 됐던 게 기억납니다. 최대 경합주의자 푸에르토리코계 유권자 비중이 높은 펜실베이니아 표심에 악영향을 미칠 거라고 예상됐는데, 실제로는 펜실베이니아에서도 트럼프가 승리했습니다. ‘이민자들도 이민자들을 원치 않는다’는 사실이 씁쓸하지만 유효한 분석 같습니다.

 

최배근

최배근

최배근 트럼프의 승리는 경제지표로도 증명이 됩니다. 대부분의 서민 유권자에게 해리스는 ‘여자 바이든’이라는 인식이 큽니다. 연평균 경제성장률만 놓고 보면 트럼프 1기(2017~20)는 1.8%, 바이든정부(2021~24)는 3.2%로 바이든정부의 성과가 월등히 앞섭니다. 그런데 이때의 경제성장 혜택은 상위층에 집중되었습니다. 상위 1%의 소득 비중은 트럼프 1기 마지막 해에 18.6%였다가 바이든 때(2023) 21%까지 치솟습니다. 반면 같은 해 기준으로 하위 50%의 소득은 트럼프 때 10.8%, 바이든 때 10.4%입니다. 게다가 소비자물가는 트럼프 1기 4년간 8%도 채 안 오른 반면에 바이든정부 동안에는 무려 21%가 넘게 올랐습니다. 바이든 재임기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굉장히 힘든 시기였는데, 물가상승은 중산층과 저소득층에 피해가 클 수밖에 없었죠. 미국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 ‘좋아진 것도 없는데 바이든 후임자를 또 찍어줘야 돼?’ 하는 심리가 작용했다고 봐요. 그런 의미에서 트럼프는 필요로 하는 곳에 필요한 처방을 줬습니다. 트럼프가 취임식에서 보편관세 얘기를 바로 안 꺼낸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지금 미국 서민들한테 경제적으로 가장 위협적인 건 물가인데, 보편관세는 물가 공포를 자극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식당 종업원 등 대표적인 저소득층인 서비스직 종사자의 팁 소득에 대해 연방세를 폐지하겠다고 발표한 것도, 법인세 인하 같은 일반적인 감세를 꺼내들 경우 재정적자로 인해 인플레이션이 심화된다고 지적받을 것을 의식한 겁니다. 집권 초기의 높은 지지율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메시지를 피하는 아주 영악한 모습을 보여준 거예요.

 

김창수 두분 말씀의 공통점은 미국 유권자들이 트럼프와 해리스를 현실적으로 비교하면서 자기 삶에 누가 이익이 될 것인가를 우선으로 선택했다는 점 같습니다. 한반도문제와 관련해서 제가 특이하게 생각한 점은, 트럼프가 선거 과정에서나 취임식 직후에도 김정은에 대해 지속적으로 이야기했다는 겁니다. 김정은이 자기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은 물론이고, “북한은 핵을 엄청나게 보유하고 있다. 핵을 많이 가진 나라와 친하게 지내는 것이 좋다”라고도 얘기했습니다. 북한을 핵확산금지조약(NPT)에 따른 핵보유국으로 완전히 인정한 건 아니지만, 현실적으로 북한이 핵을 보유하고 있음을 전제하는 얘기입니다. 아주 지독한 현실주의죠. 심지어 김정은을 두고 “매우 위대한 지도자, 파워를 가진 지도자”라고 해요. 그런 말을 했는데도 당선이 됐습니다. 오바마정부와 바이든정부에서 ‘전략적 인내’라는 말로 한반도문제에 신중하게 접근했던 것과는 다른 방식인데, 그게 미국의 표심에 별로 영향을 미치지 않았거나 오히려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걸 시사해준다고 생각합니다. 한반도문제에 대해서는 뒤에서 더 이야기 나누어보겠습니다.

 

돌아온 ‘MAGA’

그 구체적인 내용은?

김창수 트럼프정부의 핵심 슬로건은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뜻의 MAGA(Make America Great Again)이고, 이번 취임식 연설에서도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를 최우선 가치로 놓겠다고 했죠. 그런데 MAGA 슬로건은 역설적으로 미국이 현재 국제질서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그렇게까지 위대하지는 않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 내용과 의미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최배근 트럼프의 MAGA는 한마디로 미국의 가장 큰 경쟁력을 활용해서 자국 이익을 극대화하고, 그 연장선에서 트럼프 자신의 이미지와 지지율도 극대화하겠다는 겁니다. 미국의 경쟁력이라 하면 군사력과 달러만 아니라 시장 크기도 있습니다. 시장 크기를 내세워 관세전쟁을 하고, 달러 결제 안 하면 보복하겠다고 협박하고, 군사적인 우위를 이용해서 안보비용뿐 아니라 협상력까지 쟁취하겠다는 거죠. 그런데 이같은 미국의 기조는 사실 닉슨독트린이 발표되고 1971년 이래 죽 진행되어왔습니다. 닉슨독트린 때도 미국이 무역적자 국가로 전락하니까 금본위제(세계 각국이 미국에 달러-금 교환을 요구할 수 있었던 태환제도) 포기하고, 관세 도입하고, 환율도 변동환율제로 바꿔버렸습니다. 아시다시피 2차대전 직후 미국은 엄청난 경제 강대국이었습니다. 전세계 인구의 6%도 안 되는 나라가 전세계 제조업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였죠. 그처럼 여유가 있으니까 자유주의 진영을 지원하면서 국제질서도 만들어간 거예요. 그런데 1960년대 말부터 그 시대가 끝납니다. 1960년대 중반 이후 일본과 서독 등에 무역적자를 보기 시작했고, 무엇보다 미국의 금 보유규모가 실제로 줄어들어 경제안보 취약성이 커졌습니다. 그러자 선진국에는 무역수지 구조조정을, 신흥국에는 금융약탈을 진행하며 국제사회에 부담을 떠넘기기 시작했고요. 이후로도 미국은 패권국가였지만, 국제사회에서 행동방식이 거칠어지죠. 예컨대 민주당이든 공화당이든 워싱턴 엘리트들은 중국 굴복시키는 데 국가의 총력을 기울이고, 바이든정부든 트럼프정부든 중국문제에 대한 입장은 본질적으로 같습니다.

 

김준형

김준형

김준형 MAGA에는 세 차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번째는 더 설명할 것도 없이 미국 우선주의입니다. 두번째는 백인 우선주의, 철저한 인종주의입니다. 트럼프정부 인사 대부분이 전형적인 백인 남자들이죠. 인종주의 측면에서 나치와 유사하다고 생각하고요. 세번째는 ‘트럼프 퍼스트’예요. 매우 권위주의적이고 독재적입니다. 스스로도 독재자가 되고 싶다고 말할 정도인데, 앞으로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일이 많을 겁니다. 여기서 고려할 문제가 트럼프정부에 트럼프의 일방주의를 견제하고 균형을 맞추어줄, 국제정치의 질서를 고려하며 정치적으로 올바른 선택을 이끌어줄 이들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트럼프가 세계질서를 더 혼란하게 흔들 수 있다고 봅니다.

더욱이 이번에 트럼프가 ‘아메리카 퍼스트’(미국 우선주의)를 넘어서 ‘아메리카 온리’(America Only)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미국밖에 보지 않겠다는 뜻이죠. 물론 미국 정치지형에서 정치적으로 죽었다가 살아 돌아온 것은 엄청난 일이고 선거전략으로서도 정곡을 찔렀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정당하다거나 좋다는 뜻은 아닙니다. 트럼프의 지향은 사회를 분열시키고, 우리가 인류문명이라 믿어온 평등 같은 주요한 가치를 위기에 빠뜨릴 수 있어요. 취임사의 내용을 네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요. 첫째, 국경을 막겠다는 겁니다. 미국을 키운 사람들은 이민자인데 이민을 막겠다는 거고요. 그다음에 “드릴, 베이비, 드릴”(Drill, baby, drill) 슬로건처럼 환경보호는 완전히 무시하고 에너지를 찾아 이곳저곳을 파서 에너지원을 개발하겠다는 겁니다. 셋째, 관세전쟁을 시작하겠다는 거고 넷째, 소위 ‘소수자 전쟁’을 하겠다는 겁니다. ‘성별은 오직 2개’라는 정책을 내세웠는데, 다양성을 증진하고 차별을 멈추려는 그간의 세계 추세와는 완전히 역행하는 거죠.

 

최배근 저는 트럼프가 어떤 면에서 이해하기 쉬운 사람이라고 봅니다. 많은 국제관계 전문가들이 그를 예측불허의 존재라 하는 이유는 2차대전 이후 미국 주도로 만들어진 국제질서와 국제정치 문법으로 트럼프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트럼프는 비즈니스맨 출신입니다. 비즈니스 세계는 이윤을 만들어야 하고,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합니다. 그렇기에 트럼프가 미국의 이익 추구가 어려워진 다자주의 틀을 거추장스럽게 여기고 심지어 무시하게 된 겁니다. 다자주의 틀 속에서 경제적 이익을 추구했던 우리한테는 트럼프의 셈법이 낯선 점도 있고 실제 세계경제에 미칠 부정적 영향도 있지만, 오히려 트럼프정부에서 우리의 공간을 넓힐 가능성이 클 수도 있습니다. 사실 산업과 경제위기는 트럼프와 관계없이 산업체계를 진화시키지 못하고 양극화를 심화시켜온 우리 내부의 문제가 더 크고, 트럼프정부에 지혜롭게 대응하면 여러 문제의 근원인 분단과 한반도문제에도 전환점을 만들 수 있다고 봅니다.

 

김준형 트럼프정부가 역대 미국정부와 다른 점 중 하나는 겉포장을 얼마나 하느냐입니다. 그전 정부들은 조금이라도 포장을 하려 했어요. 그런데 이제 정치적 올바름을 다 던져버리고 민낯을 보여주는 거예요. 이익만 되면 모든 걸 수단 삼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한미일 관계도 도움이 되면 유지할 것이고 도움이 안 되면 약화시킬 겁니다. 선거 직후 국회의원단과 함께 방미했을 때 만난 보수성향 싱크탱크인 허드슨연구소(Hudson Institute)의 소장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더군요. 솔직히 말해서 지금까지 한미관계는 힘대로 하지 않았다, 미국이 얻어낼 게 더 많았는데 양국의 힘 차이가 반영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 이제 이익도 힘대로 취하겠다고 했습니다. 조금 거친 표현이지만 미국은 이제 대놓고 한국에 ‘삥을 뜯을’ 것이고, 한국은 ‘빵셔틀’을 하게 될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트럼프 2.0 시대’ 미중경쟁의 향방

김창수 힘대로 반영하겠다는 국제질서 흔들기에서 특히 미중경쟁의 격화가 예상됩니다. 달라지는 미중관계가 동북아시아에 위치한 우리 한반도에 미치는 영향도 클 거라고 생각합니다. 바이든 전 정부는 ‘디리스킹’(derisking, 위험완화)을 추구했습니다. 미국의 대기업 중 중국에 진출해 있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위험관리 차원에서 적대적인 대결은 피하고, 경쟁할 부분은 경쟁하고 협력할 부분은 협력하겠다고 했죠. 많은 이들이 트럼프 2기는 다시 ‘디커플링’(decoupling, 탈동조화·분리)으로 갈 거라고 예측하고 있습니다. 닉슨이 러시아 견제를 위해 미중수교를 한 것처럼, 중국의 도전으로 인해 세력전이가 되지 않도록 러시아와 협력하는 이른바 ‘역(逆)키신저 전략’을 취할지도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그런데 취임사에서 중국에 대한 언급이 별로 없었던 것이 또 특이합니다.

 

김준형 디리스킹과 디커플링은 전문가들의 객관적 분석이고 설득력이 없지 않지만, 트럼프는 이런 식의 패턴에 구속되지 않을 것으로 봅니다. 차이가 있다면, 중국에 관해 소위 ‘한놈만 때린다’는 전략을 내세운다는 점에서 진영논리를 앞세운 바이든정부와 다릅니다. 바이든은 권위주의세력과 자유주의세력으로 나누어 진영 대결을 해왔는데 러시아가 우끄라이나전쟁을 일으키고 나니 미국은 아프리카와 중동에서도 세력 공백을 느끼고, 유럽에서도 세력 공백을 느낍니다. 그러다보니 한미일만 부각됐거든요. 바이든정부 시절에 중국에 대한 전략적 강박, 그러니까 훨씬 과장된 위협인식을 토대로 한미일과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를 연결시키려 했죠. 사실상 냉전 부활은 미국이 한 건데, 정작 국제질서에서 미국이 느끼는 효능감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중국만 때려야 된다는 전략이 남은 거죠.

트럼프가 1기 때 역키신저 전략을 적용하려고 했었습니다. 실제로 키신저(H. Kissinger)가 트럼프 대통령을 두번 만나서 조언한 바 있습니다. 다만 당시 러시아에 대한 미국 내 반감 등이 고조되면서 제대로 효과를 보지 못했습니다. 이번에 다시 시도할 것이라고 봅니다. 구체적으로는 우끄라이나전쟁을 러시아에 유리한 조건으로 종전시키고, 중국을 고립화하려는 생각을 하고 있을 거예요. 취임 직후 중국에 대한 공세가 잠깐 완화된 듯 보이는 것은 나중을 위해서 힘을 비축하는 것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과연 미국이 의도한 대로 중국을 압도할 수 있느냐입니다. 미중 대결의 승부를 두고 어떤 전문가는 250년이 지나도 확실한 승자가 나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만, 그건 너무 긴 시간이고 저는 지난 탈냉전 한세대 동안 중국이 미국을 맹추격했으니 향후 한세대를 전망하고자 합니다. 앞으로 30년간 다음 세가지 시나리오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미국이 중국을 완전히 무릎 꿇릴 수 있는가. 둘째, 중국이 미국을 추월할 수 있는가. 마지막으로 미국과 중국이 다시 친해질 수 있는가. 세가지 모두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러면 남는 건 미중의 치열한 경쟁이 지루하게 지속되는 겁니다. 미국은 닭싸움이라고 비유하는데, 승부가 나지 않는 닭싸움이 계속되는 거죠.

 

최배근 김준형 의원님의 세가지 시나리오와 예측에 기본적으로 동의합니다. 오바마정부에서 환태평양 경제동반자 협정(TTP)을 추진할 때도 저는 이미 늦었다, 중국이 너무 커버렸다고 판단했습니다. 싱가포르 주유엔대사를 지낸 키쇼어 마부바니(Kishore Mahbubani)가 이런 표현을 했어요. 미국의 대중정책을 보면 ‘비합리적인 적대감’(irrational hostility)만 있을 뿐 성공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국가이익 추구 면에서 장기적인 전략이 없다는 겁니다. 미국이 2차대전 이후 20세기 패권을 가질 때는 적어도 국제질서를 만들고 그 속에서 정당성과 명분을 확보했는데, 그게 다 무너지고 있는 거 아닙니까. 게다가 지금은 중국이 오히려 자유무역 질서를 앞세우고 활용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미국 일각에서 이란 제재처럼 중국과 거래하는 기업의 미국 시장 참여를 제한하는 방안이 제기되지만 요원해요. IMF 자료에 따르면 전세계 시장에서 미국 시장의 수입규모는 지난해 1~10월 기준으로 13.3%입니다. 그런데 중국은 10.5%이고, 홍콩까지 합하면 13.3%예요. 수출 규모에 있어 중국이 미국을 압도한 지 오래지만, 수입규모도 상당히 커졌어요. 그러니까 유럽 국가들도 중국 시장을 포기 못하죠. 결국 자국중심주의 국제관계가 지속되는 한 미중간의 갈등이 계속되리라는 건 커다란 상수입니다.

 

김준형 트럼프정부는 지금이 중국을 주저앉히고 패권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중국 봉쇄는 무조건 추진할 겁니다. 미국은 자신들이 만든 기존의 질서를 활용해서 중국이 부상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그 질서를 없애겠다는 거예요. 국제조약과 기구를 무력화시키거나 탈퇴하고, 자유무역체제를 뒤엎고 보호무역을 본격화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중국이 자유무역 수호를 주장하고, 국제기구를 통한 다자주의를 옹호하는 기이한 상황이 전개되는 것이지요. 미국이 중국에 관세를 부과하는 것은 WTO(세계무역기구) 협정 위반입니다. 그런데 미국이 이미 WTO 제소절차를 무력화했기에 국제기구를 통한 중국의 방어수단도 없어졌습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중국을 죽이겠다는 미국의 의도입니다.

 

최배근 더이상 20세기처럼 미국이 국제사회 합의를 통해 국제질서를 만드는 역할을 할 거라고 기대하면 안 돼요. 미국 민주당이 집권해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미국이 여유있던 시대는 50년 전에 이미 끝났어요. 트럼프는 미국의 장기적인 이익보다 자신의 재임기간에 이익을 극대화하려 하고, 이를 통해 위대한 대통령으로 자리매김해 노벨평화상 받는 데까지 관심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지금 중국에 대해서도 아전인수식으로 몰아붙이고 있는 겁니다. 군수산업하고 연결되어 있다면서 중국 기업을 제재하는 것만 봐도 그래요. 중화학 산업이나 디지털 분야 산업체 중에 군사기술하고 관련없는 데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나라나 미국 기업은 안 그런가요? 지금 워싱턴에서는 중국이 첨단 분야를 중심으로 미국을 추격하는 것이 못마땅해 모든 수단을 동원해 목을 조르려 하는 겁니다.

 

김창수 앞서 내부 결속을 위해 취임 직후 관세문제 대신 감세정책을 먼저 말했다는 얘기도 하셨는데, 중국에 대한 관세나 보편관세 문제는 어떻게 될까요? 트럼프의 대선 공약은 전세계 모든 수입품에 10%의 보편관세를 추가하고, 중국산 수입품에는 60% 추가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거였습니다. (미국은 현지 시각 2월 4일 중국산 수입품에 대한 10% 추가관세를 시행했고 캐나다, 멕시코의 경우 25%의 추가관세 부과방침을 한달 유예했다. 2025.2.9. 현재 기준—편집부)

 

최배근 미국정부 자료에 따르면 지난 1년간(2023.11~2024.11) 중국의 무역흑자 중 28%가 대미 무역흑자입니다. 반면 미국의 무역적자 중 대중 무역적자는 3분의 1을 차지해요. 미국이 멕시코, 캐나다, 중국, 유럽연합(EU)에 관세를 매기면 상대국들도 보복관세를 매길 수밖에 없습니다. 주권국가라면 그게 당연한 거예요. 그동안 중국이 베트남, 태국 등을 통해 미국에 우회수출을 하면서 그 나라들도 상대적으로 이득을 봤어요. 그런데 우회수출을 막겠다고 중국에 이어 동남아 국가에도 관세를 다 매기게 되면 결국 미국에 인플레이션이 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트럼프정부로서도 부담이 될 거예요.

그럼에도 관세정책은 하긴 할 겁니다. 관세를 높이려고 하는 이유 중 하나는 미국의 가장 큰 문제인 재정의 구멍이에요. 지난 1년간(2023.10~2024.9) 재정적자가 1.83조 달러였고 2025 회계연도에서는 2조 달러가 넘을 것으로 전망되는데, 증세를 하지 않는 한 구조적으로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트럼프는 이걸 관세 수입으로 해결하려는 겁니다. 미국 싱크탱크인 택스파운데이션(Tax Foundation)은 보편관세를 10%, 20% 높이면 향후 10년간 매해 1720억~2802억 달러의 추가수입이 생길 수 있다고 추정합니다. 상대 국가가 보복관세를 안 한다는 전제하의 계산이고 재정적자를 다 해결하기는 어렵지만, 어쨌든 미국의 수입에 도움이 되죠. 게다가 지금 트럼프는 국제사회의 여론이나 국제기구의 중재는 아랑곳하지 않고, 개별 국가와 개별 협상을 하겠다는 방침입니다. 일대일 협상으로, 힘의 불균형 속에서 미국을 상대해야 한다는 공포를 이용해 자신의 관세정책을 펼쳐나갈 거예요. 이에 대해 대부분의 국가는 보복관세로 대응하고, 대미 수출 감소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을 배제한 시장 통합을 꾀할 거예요. 이렇게 국제사회가 경제적 어려움을 노력하는 과정에서 미국이 고립될 가능성은 커질 겁니다.

 

훼손되는 미래가치

김창수 미국이 사실상 여유가 없다, 그래서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해서 국민들 등 따습고 배부르게 해주겠다고 선언함과 동시에 그걸 통해 트럼프 자신의 레거시도 만들려는 전략이다,라는 게 분명해 보입니다. 1980년대 일본이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할 때 미국이 일본을 견제하면서 비판한 멸칭이 ‘이코노믹 애니멀’(economic animal)이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미국이 스스로 부끄러움 없이 그렇게 되겠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미국사회에서 최근 20~30년 사이에 강조된 DEI(Diversity, Equity and Inclusion), 즉 다양성·형평성·포용성도 사라지는 모습입니다.

 

김준형 트럼프는 그 후과에 대해서는 생각 안 합니다. 이대로 가면 디스토피아일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역설적으로 중국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도 다자주의 얘기하는 게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다극화가 국제질서의 평등화를 되살릴 수도 있거든요. 그걸 지켜내지 못하면 인류의 운명이 다할지 모릅니다. 기후변화만 해도 국제적 협력 없이는 희망을 찾기 어렵습니다. 지나치게 묵시록적인지 몰라도 저한테는 그게 실제적인 공포로 다가옵니다.

 

김창수 기후변화 이야기가 나왔는데 트럼프 2기 행정부가 들어서자마자 한 일이 빠리기후협정에서 탈퇴한 겁니다. 이미 트럼프 1기 행정부에서 탈퇴한 바 있어 바이든정부가 다시 가입했는데, 또 탈퇴했어요. 트럼프 대통령은 기후위기론에 코웃음을 칩니다. 음모론이라 보기도 하고, 해수면이 몇 밀리미터 오르는 게 대수냐 하는 말도 하거든요. 그런데 기후변화라는 것은 서서히 그리고 장기적으로 영향을 미치잖아요. 아무리 단기적인 눈앞의 이익만 추구한다 해도, 화석연료에만 의존하는 트럼프정부의 정책이 실질적으로 미국에 도움이 될까요?

 

최배근 영국과 미국이 패권을 잡는 과정에서 혁신을 통한 산업경쟁력 확보를 명목으로 회사를 유한책임의 법인(法人)으로 인정했습니다. 기업은 이윤 극대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종종 사회적으로 많은 비용을 유발하는데, 그 비용을 법인에 귀속시키고 주주는 회피할 수 있게 된 겁니다. 게다가 자연생태계 파괴로 발생하는 비용의 상당부분을 국가 단위를 넘어 지구에 전가할 수 있게 됐어요. 이른바 ‘비용의 지구화’인데, 그 결과 중 하나가 기후위기 문제입니다. ‘석유를 더 뽑아 물가를 낮추자’는 트럼프의 화석에너지·자본 친화적인 행보 역시 비용을 지구화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양극화 속에 물가 고통으로 압박받는 서민의 지지를 끌어낼 수 있어서죠. 기후위기 문제는 개인과 기업, 국가 모두가 이익보다 적은 비용을 지불하게 하는 비용의 지구화 문제를 시사하고, 다시 말해 자국중심주의에 기초한 근대 국제관계의 파산을 의미합니다. 미국이 1990년대 기후문제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중국이나 인도 등도 책임을 나누어야 한다고 했을 때 신흥국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는 이제야 산업화하는데 우리보고 똑같이 부담하라는 것은 부당하다고 했어요. 트럼프의 재집권이 시사하는 바는, 미국 시민들이 이제는 미국이 과거에 멋들어지게 구축했던—그것이 실제로는 멋지지 않았더라도—세계질서 같은 데 관심없다는 거예요. 그만큼 미국사회가 각박해진 겁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예요. 물론 이것이 인류사에 미치는 영향은 굉장히 끔찍할 수가 있습니다.

 

김창수 말씀처럼 당장 먹고사는 게 힘든데 세계가 어떻게 되든 무슨 상관이냐 하는 인식에서 여러 문제가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철저하게 자기 눈앞의 이익에 기초한 논리가 작용하고 있어요. 한가지 덧붙이자면 북한은 기후문제에 관심이 없거나 걱정 안 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문재인정부 시절 남북공동연락사무소 사무처장으로 개성에서 일할 때, 대한이 지나서도 북극한파가 오지 않아서 미세먼지가 많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북한 사람들도 미세먼지 걱정을 하면서 차라리 미세먼지 없는 추운 날씨가 좋다는 겁니다. 화력발전이 기후변화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걱정하는 말도 들은 적 있고요. 코로나 팬데믹 이전에 북한이 국제사회에서 마지막까지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한 게 기후변화 관련 국제회의입니다. 북한은 기후변화 문제에 협력하려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고, 실제로도 탄소를 감축해 탄소배출권을 얻어 국제적으로 거래하기도 했죠. 기후변화 같은 전지구적인 이슈에 북한이 관심을 갖고 국제무대에 참여한다면 한반도문제를 풀어나가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북한 입장에서는 국가 이미지를 세탁하는 효과가 있는데다가 국제무대에 당당하게 등장할 수 있는 기회이고, 미국하고 만날 수 있는 의제도 늘어나는 셈입니다. 그런데 미국이 이런 협력 의제마저 신경을 안 쓰면, 저처럼 한반도문제를 고민하는 사람은 어떻게 실마리를 찾을지 갑갑하기도 합니다.

 

김준형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라고 부르는 미국 중심의 국제질서, 국제협력 시스템이 흔들리기 시작한 지는 오래됐습니다. 트럼프 1기의 등장이 그 원인이자 결과였습니다. 그동안 최소한 겉으로는 자유, 평등, 민주주의, 환경 등의 가치를 내세우며 국제관계에서의 패권적 리더십을 정당화했는데 이제 그 시대가 저물어버린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가치들의 추구가 지금 당장은 눈앞의 이익보다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도 그게 무너지면 결국 모두가 영향을 받게 됩니다. 지금은 이익이 더 클지 몰라도 어느 순간 손해가 확 커지게 되죠. 완전히 망가진 다음에야 새로운 질서를 만들 것인지 아니면 다가올 비극에 대비하고 저항하며 지금부터라도 새 질서를 짜나갈지 생각해야 합니다. 미국 없는 안보질서, 미국 없는 자유무역을 구체적 대안으로 그릴 때가 왔다고 봅니다. 트럼프가 그렇게 무너뜨리고 싶어하는 정치적 올바름이 미국에는 손해를 끼쳤고 다른 나라로서는 미국의 위선이었던 측면이 없지 않지만, 그렇다고 국제질서 공통의 가치까지 사라지는 것은 재앙입니다. 불공평하다고 자유무역을 포기하면 적자생존과 이전투구가 만연하던 야만의 세계로 돌아가자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가짜 평화를 몰아낸다고 진짜 평화도 함께 포기하는 것은 안 될 말입니다. 그런데 미국이 부수겠다고 해도 나머지 세계가 힘을 합치면 새 질서 세우기가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팍스 아메리카나의 후퇴는 그만큼 다른 나라의 역량이 커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유무역을 수호하고, 평화를 수호할 국제연대를 강화해서 역으로 미국의 국가 이기주의에 제동을 걸어야 합니다. 미국이 각개 격파를 하려고 할 때, 세계는 연대로 대응해야 해요. 할 수 있습니다.

 

불확실한 국제질서,

다자주의 구축의 필요성

김창수 어떻게 보면 지금은 국제질서가 가장 불확실한 시대 같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냉전체제가 40년간 지속됐고, 사회주의권이 붕괴된 이후에는 30년간 탈냉전이 진행됐습니다. 냉전시기에는 진영간의 대립이라는 명확한 구도가 있었고, 이후 1990년대부터 약 30년의 탈냉전시기에는 국제사회에서 상호의존과 협력이 가장 높았습니다. 김준형 의원님이 미국을 중심으로 하지 않은 새로운 국제질서를 생각할 때라고 하셨고, 앞서 최배근 선생님은 우리의 공간을 넓힐 가능성을 이야기하셨는데 불확실한 국제질서 속에서 우리의 전략은 무엇일지 구체적으로 들어보겠습니다.

 

최배근 가장 근본적인 것은 우리 내부의 개혁이라고 생각합니다. 국제관계는 국가와 국가 간의 관계인데 이 문제를 풀어가려면 내부가 결속되어야 해요. 내부의 결속이라는 건 결국 민주주의의 강화입니다. 국민들 대다수가 정치에 효능감을 느끼게 해줘야 하는데, 국민들의 경제력을 강화시켜주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옆나라 일본에서 자민당 일당독재가 계속되는 이유 중 하나로 인구 구성도 얘기합니다. 자민당에 거의 맹목적 지지를 보내는 65세 이상 인구가 30%를 차지하는 사회가 되어버렸으니까요. 조기 퇴직이 일반화된 한국에서 노인 빈곤은 65세보다 이른 60세 이후 광범위하게 진행되는데, 그 60세 이상 인구가 빠르게 증가해 지금은 10명 중 3명에 달하고 있습니다. 고령화와 저출생은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인데, 그런 배경 속에서 경제적 양극화가 극심해졌습니다. 출생률은 혼인율에 의해, 혼인율은 소득격차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경제적 양극화는 자신의 지지층만을 대변하는 정치적 양극화로 이어지죠. 한국사회에서는 여기에 분단체제 문제도 얽혀 친일 극우화로 치닫고 있고요. 그런 문제를 해결해가야 합니다. 사회가 통합되어 있고 민주주의가 강하면 다른 국가들이 함부로 못합니다. 우리 내부에서 얼마나 변혁을 만들어낼 수 있느냐가 관건입니다.

 

김준형 향후에 탄핵이 인용되고 민주당 정권이 창출되더라도 양극화된 정치문화가 새 정부를 엄청나게 흔들어댈 겁니다. 민주당만의 정부가 아니라 민주세력이 모인 공동연립정부, 또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거국정부가 되지 않으면 위기가 상존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국민 통합은 중요하지만, 극우는 절대 통합의 대상이 아닙니다. 극우를 제외한 민주세력의 통합과 연대를 통한 공동정부를 구성해야 합니다. 내란세력은 이재명 대 반이재명으로 끊임없이 프레임을 짜려 시도하겠지만, 헌법수호세력 대 내란세력의 구도로 가야 합니다.

국제질서에 있어서 지금은 국제기구가 사실상 기능부전에 빠져 있습니다. 이게 어디서 왔는가 하면 미국 스스로 패권에 대한 부담을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인데요. 전과 같은 압도적인 힘을 잃어버리니 국제관계에서 미국이 이용당했다고 생각하고, 자유무역 질서에서도 불리해지니 그 시스템 자체를 정치화해 경제를 안보문제와 연결시켰습니다. 트럼프 1기 행정부는 국제적인 합의나 국제기구를 무시하는 무차별적인 행보로 일부 이득을 봤지만 미국의 쇠퇴는 결국 불가피한 일입니다. 트럼프가 현상태를 흔드는 역할을 할 테고 완전히 흔들어버리면 오히려 좋아질 수도 있다는 시각도 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전세계적으로 다극화되는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야 합니다. 미국 중심의 일극이나 미중의 양극체제, 또는 미중러의 3극체제가 아닌, 계층화된 국제질서가 아닌 더 다극화된 국제질서를 재건해야 합니다. 국제정치에도 민주적 질서가 좋은 것입니다. 트럼프가 흔들고 난 뒤 혼란으로 빠질 수도 있겠지만, 노력에 따라 긍정적인 결과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최배근 트럼프정부가 국제질서를 무시하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다자주의 구도에서는 힘을 제대로 과시할 수 없다, n분의 1로 협상하기보다 개별 협상이 훨씬 유리하다는 거죠. 지금 다자주의 역할을 하는 국제기구가 없습니다. 한미관계가 비대칭적이라는 점에서 우리도 문제가 생깁니다. 트럼프가 캐나다와 멕시코부터 압박하는 이유는,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를 이용한 우회수출을 손봐야만 무역적자 축소와 일자리 창출의 가능성이 생겨서이지 한국에 관용을 베풀어서가 아닙니다. 지난해(1~11월) 기준 대미 무역흑자는 캐나다(550억 달러)보다 우리나라(602억 달러)가 더 컸습니다. 우리한테도 관세 압박은 시간문제고, 현재 우리는 광야에 홀로 서 있는 상태입니다.

그럼에도 이 상황을 풀어나갈 지렛대는 있다고 봅니다. 현재 미국이 가장 원하는 건 중국 견제입니다. 2020년에 이미 트럼프가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를 한국 등을 참여시키는 G11~G12로 확대하자고 한 바 있습니다. 심지어 러시아도 넣자고 했죠. 중국 고립화 전략이 중국 압박에 가장 효과적이라고 본 겁니다. 저는 G10이든 G11이든 한국이 들어가야 한다고 보고, 거기서 문제가 풀릴 거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G7에 아시아 국가로는 유일하게 일본이 들어가 있는데, 우리가 들어가면 일본의 하위 파트너가 아닌 대등한 파트너가 될 겁니다. 그리고 인도와 호주도 들어오면 일종의 변형된 다자주의 역할을 할 수 있어요. 특히 최근 브릭스에 치우친 부담을 갖는 인도와 힘을 모아야 합니다. G10을 이렇게 구성한다면 미국을 뺀 나머지 9개 국가의 시장 규모는 전세계 시장의 27%(2024.1~10)로, 13%에 불과한 미국의 두배 이상이 되거든요. 미국을 견제할 수 있는 실질적인 경제규모가 만들어지는 겁니다. 그런 그룹에 속하지 않고서는 아무리 개별 협상을 열심히 해도, 특히 한국은 트럼프가 원하는 대로 들어줄 수밖에 없습니다. 올해 캐나다에서 G7 정상회의가 열리는데 정치권에서 노력해서 그 자리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고, 늦어도 미국에서 열리는 2027년에는 가입을 성사시켰으면 합니다.

 

김준형 저도 비슷한 의견입니다. 좀 다른 표현입니다만 트럼프정부의 미국이 일으키는 태풍에 맞설 수 있는 연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 돌풍에 영향을 받을 나라는 유럽도 있지만, 글로벌 사우스도 주요합니다. 한국과 인도, 일본 등이 주도해서 미국을 빼고 시작해 미국까지 포함시키는 새로운 형태의 무역질서, 새로운 방식의 완충지대를 글로벌 사우스에서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국제질서에 가치가 없어지는 것은 인류문명의 보존을 위해 결코 이롭지 않습니다. 한계가 없지 않지만 국제협력을 통해 전쟁을 예방하고, 핵무기 확산을 제어하고, 어려운 나라들에 원조를 제공하는 일 등은 지켜나가야 할 중요한 가치입니다.

 

최배근 글로벌 사우스에 대해서는 중국이 영향력을 넓히고 있는데, 다만 인구는 많아도 경제력이 열세이긴 합니다. 그렇지만 열세라고 해서 일방적인 게임이 가능한 구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G10에 대한 모색을 해보면, 일부 사람들이 그러다 반중으로 읽히는 거 아니냐 하지만 그렇진 않습니다. G7은 군사안보동맹도 아니고 반중을 기치로 내걸지도 않습니다. 민주주의 가치, 시장경제, 언론의 자유 등을 공유하는 나라들이 모여 국제질서를 만드는 클럽으로 규정되고 있거든요. 그런 명분을 누가 반대하겠습니까. 우리가 독일이나 프랑스만큼 미국과의 관계, 중국과의 관계에서 자율성을 가질 수 있다면 현실적으로 최선입니다. 한가지 더 예를 들어볼게요. 2010년에 G20 정상회의가 열렸을 때 미국이 ‘경상수지 목표제’를 요구했는데 중국은 물론 일본과 독일도 여기에 반대했습니다. 필요에 따라 일본과 독일도 중국과 결을 같이하고 미국의 무리한 요구는 무산시키는 겁니다. 우리가 G10에 들어간다면 그게 곧 반중이 되거나 글로벌 사우스와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일이 아니라는 거죠. 글로벌 사우스와 관계는 G20을 통해, 그리고 중국과의 관계도 아세안 +3에서 풀어나갈 수 있습니다. G10이 꾸려졌을 때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이 가장 기댈 수 있는 나라는 한국일 테고, 우리가 글로벌 사우스와 미국 사이의 관계를 중재할 수도 있습니다. 요즘 한국의 소프트 파워가 각광받고 있는데 우리의 이점을 적극 활용해, 소프트 파워를 넘어 소프트 리더십을 발휘하고 국제외교의 공간을 창조해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만의 창조적 전략이 필요하다

김창수 두분 모두 다자 블록을 형성해서 한국의 기회를 찾자는 말씀을 공통적으로 해주셨습니다.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지점들을 짚어주신 것 같습니다. 김준형 의원님은 오래전부터 우리가 외교관계에서 전략적 자율성을 가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해오셨죠.

 

김준형 윤석열정부는 지난 2년 반 동안에 외교의 손발을 다 묶어버렸어요. 그건 외교를 한 게 아니라 전쟁을 한 겁니다. 전쟁은 흑백이고, 적과 아군밖에 없습니다. 반면 외교는 회색이에요. 동맹국이라도, 미국이라도 우리 국익을 위해서 철저하고 치열하게 협상해야 합니다. 북한, 중국, 러시아와의 관계도 관리해야 합니다. 그런데 윤석열정부의 외교는 일본하고 미국밖에 없었습니다. 만약 우끄라이나에 파병까지 했다면 러시아와의 관계는 완전히 망가졌을 거예요. 살상무기를 보내기 전에 멈춰서 정말 다행입니다. 러시아가 국제적으로 고립된 상태에서 벨라루스나 북한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한국과의 관계를 깨고 싶어하는 건 절대로 아니거든요. 우리가 그걸 역이용해서 한러관계를 회복시켜야 하고, 완전히 망가진 한중관계도 회복해야 합니다. 윤석열정부에서 부재했던 유럽이나 인도와의 관계, 외교 다변화도 다음 정부에서 다시 시작하리라고 봐요.

 

최배근 한중관계는 문재인정부의 유산을 이어갈 필요도 있어 보입니다. 2021년 5월 문재인 대통령이 바이든 대통령과 한미정상회담을 갖고, 중국이 내정 간섭이라며 예민하게 생각하는 대만해협 문제에 있어 “평화와 안정 유지의 중요성”을, 그리고 남중국해에서도 “평화와 안정, 합법적이고 방해받지 않는 상업 및 항행·상공비행의 자유를 포함한 국제법 존중” 정도를 합의했어요. 원론적인 표현이었기에 중국이 기분 나빠도 티내며 보복하진 못했습니다. 그 정도 선을 우리가 계승하면 됩니다.

 

김준형 문재인정부는 “한미관계를 근본으로 하되 한중관계를 해치지 않는다”라고 했는데, 그것이 실제 실행되었는가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이게 정답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중 사이에서 자꾸 균형을 추구한다고 하니까 오해받는단 말이에요. 그동안 한국정부에서, 심지어 김대중 대통령도 균형외교는 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만나는 사람마다 균형이라는 말 쓰지 마라, 균형 불가능하다, 중국도 균형까진 바라지 않는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한미관계를 근간으로 하더라도 우리 이익을 해치는 일을 요구받으면 저항해야 합니다. 바이든정부 4년간 한국은 미국에 약 1000억 달러(약 140조원)를 투자했지만 반대급부는 하나도 못 받았거든요.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에 따른 전기차 보조금 문제도 그렇습니다. 원칙적으로 미국 내에서 생산된 전기차 1대당 7,500달러의 보조금을 지급한다는 것인데, 우리는 예외적으로 막대한 대미 투자를 조건으로 내세워 받아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대로 된 협상 시도조차 없었습니다. 바이든정부는 보조금을 받으려면 빨리 미국 내 공장건설을 완성하라고 했고, 한국은 입 한번 뻥긋하지 못하고 수용했습니다. 반도체 관련법인 칩스법(CHIPS and Science Act)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정부가 한국이 중국에 반도체 칩을 판매하지 말라고 할 때, 첨단 반도체는 팔지 않더라도 소위 저사양의 ‘레거시 칩’은 팔 수 있도록 미국과 협상했어야 합니다. 한국의 저사양 반도체 칩 총수출의 60%를 중국이 수입하던 상황이었는데, 미국에 반도체공장을 지으면서도 이런 협상조차 하지 않은 것입니다. 첨언하자면 최근 미국의 견제와 봉쇄 속에서 중국은 저사양 칩의 성능을 최적화하는 방식으로 ‘딥시크’라는 AI를 개발했죠. 미국이 막을수록 중국이 자체 기술발전을 이루고 있는 상황인데 미국 일변도의 정책을 하는 것이 과연 현명하냐는 질문을 던져봐야 합니다.

결국 지난 경험을 뼈아픈 교훈으로 삼아 새로 들어설 정부는 전략적 자율성을 통해 미국과 협상해서 얻어낼 부분은 얻어내야 합니다. 특히 트럼프정부는 다자 방식이 아니라 국가별 양자 방식 협상을 하려 할 테니 우리는 그걸 다시 다자로 바꿔내야 해요. 똑같은 압박을 받는 국가와 연대해야 합니다. 그 구체적인 예가 최배근 선생님이 말씀하신 G10도 될 수 있겠지만, 당장 트럼프발 보편관세나 상호관세에 대한 연대가 필요합니다. 미국의 보편관세가 등장할 때 한국 입장에서 단독으로 보복관세를 매기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다른 국가들과 연합해서 대응관세 연대, 반(反)관세 연대까지는 모색해볼 수 있습니다. 그런 것도 다 전략적 자율성입니다. 철저하게 실리주의를 추구하는 트럼프가 한미동맹의 신화를 깰 수도 있고, 우리도 한미동맹 중독에서 벗어나 실리로 가야 합니다.

 

최배근 국제적인 자율성 확보를 위해 국내가 중요하다는 점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루즈벨트의 뉴딜연합에서 교훈을 얻을 필요가 있어요. 루즈벨트는 네번 재임에 성공했습니다. 네번이면 16년이니—실제로는 사망으로 13년만 재임했지만—대단한 거죠. 루즈벨트의 뉴딜은 최저임금제와 사회보장제 도입, 노동자 협상력 강화, 금융개혁 등 일종의 사회대개혁이었어요. 그걸 통해 루즈벨트는 정치지형을 바꿨습니다. 전통적으로 공화당 지지층이었던 흑인들과 북동부 공업지역을 민주당 지지층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양극화와 대공황이라는 여건 속에서 그런 통합을 만들어냈다는 게 놀랍습니다. 예를 들어 하위 50%의 소득 비중은 루즈벨트 취임 전인 1932년에 13.2%까지 하락해 있었는데, 사실상 재임 마지막 해였던 1944년에 19.7%까지 끌어올렸습니다.

앞서 김준형 의원님도 말씀하셨지만, 우리 사회의 통합이 필요합니다. 친일 극우세력이나 내란 동조하는 국민의힘 정치인은 배제해야 하지만, 국민의힘을 지지하는 국민들 상당수도 끌어안아야 해요. 그러려면 경제문제가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현재 세율구조로 보면 상위 10~30%에 속하는 대다수가 혜택은 못 보고 세금만 부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세후 월급이 얼마인 줄 아세요? 2022년 국세청 통합소득 기준으로 320~570만원밖에 안 됩니다. 소득 상층부라고 하는데 그들로서는 동의할 수가 없죠. 자산 규모로 보아도 마찬가지인데, 상위 10~20%에 속하는 가구의 순자산은 8억 3629만원 정도로 자기 집 한채 소유할 정도의 규모입니다. 물론 하위 20%의 자산과 자산불평등 문제는 더욱 심각하지만, 제가 얘기하는 것은 한국사회에서 상위층으로 이야기된다 해도 실제론 고소득층이나 고액 자산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전문가들이 유럽과 미국의 방식을 기계적으로 적용해서 이런 문제가 생기는데, 우리나라 현실하고 OECD 평균하고는 너무 다릅니다. 중간 50%의 소득이 유럽보다 터무니없이 낮습니다. 사회보장제도가 너무 약하니까요. 이런 조세체계를 바꾸려면 우리나라 정치인이야말로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상위 10% 이하부터 추가적인 부담 없이 혜택을 보는 조세개혁이 필요해요. 밑으로 내려갈수록 혜택이 더 많아져야 하는데 특히 하위 20%는 대부분 고령층으로 이들 중 많은 이들이 극우세력에 속해 있습니다. 조국혁신당에서 ‘사회권 선진국’이라는 기치를 내걸었던데, 저는 이걸 사회소득·사회금융이라고 칭합니다. 국민들의 실질적인 권리, 경제력을 강화시켜줘야지만 민주주의가 강화됩니다. 생존의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정치에 대한 효능감을 느끼게 해줘야 해요.

 

김창수 2025년은 김정은 위원장이 이야기하는 국방력발전 5개년 계획의 마지막 해입니다. 적어도 올해까지는 자기들의 성과를 만드는 데 집중할 거라고 생각하고, 트럼프 대통령이 구애를 한다 해도 김정은 위원장이 호락호락하게 움직일 것 같진 않습니다. 2019년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결렬의 경험이 있으니까요. 그만큼 회담 결렬이 북한에 끼친 영향이 컸습니다. 회담 전에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어떻게 하면 미국과 협상을 잘할 수 있을지 묻기도 했는데, 결렬 이후 김위원장이 문대통령한테 보낸 친서 중에는 ‘국제질서의 벽이 굉장히 높다는 걸 알았다, 자기 힘으로 쉽지 않다는 걸 알았다’ 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김위원장이 트럼프와의 대화에 응한다면 2026년 노동당 9차 당대회 이후, 다시 말해 5개년 계획의 성과를 최대한 화려하고 과장되게 평가한 뒤일 거라고 봅니다.

당면한 문제 중에는 트럼프 대통령이 주장하는 주한미군 방위비분담금 추가부담 문제도 있습니다. 문재인정부 시절에도 압력이 상당했습니다. 우리가 과거처럼 타당한 논리로 설득하려 해도 트럼프는 논리적으로 맞는지 아닌지를 따지기보다 자국 내 홍보를 위해 실제로 한국에서 얻어갈 거리를 필요로 할 겁니다. 그런 점을 고려해 협상했으면 합니다. 주한미군 철수문제는, 지금 주한미군 2만 8천여명이 대부분 보병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도 짚어봐야 합니다. 미국의 대중국 전략 차원에서도 군사력 배치를 다원화할 필요가 있는 만큼 우리가 당당하게 협상해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북한의 핵문제 역시 트럼프가 이미 북한의 핵보유를 인정하는 만큼 당장은 아니더라도 협상이 진전될 여지가 있다고 보고요.

트럼프의 취임사 중에서 정말 맘에 들었던 게 있습니다. 자신이 피스 메이커가 되겠다고 한 부분입니다. 선거유세 과정에서도 자기는 전쟁을 한번도 일으킨 적이 없다, 자기 있을 때 테러가 일어난 적도 없다고 계속 강조했습니다. 어쨌든 트럼프가 피스 메이커가 되겠다고 하면, 한반도에 평화체제를 정착시킴으로써 기회를 만들어나갈 수도 있다고 봅니다. 트럼프2.0 시대에 새로 출범할 정부와 우리 시민들의 과제입니다.

 

김준형 지난 10여년 동안 동북아 역내 국가들 간의 군비경쟁에 고삐가 풀려 있었습니다. 남북은 물론 중국·일본·러시아도 군비제한 시스템이 무너지며 재래식 무기부터 첨단무기까지 무한 경쟁이 진행되었고, 앞으로 상당기간 그럴 겁니다. 게다가 남북관계가 악화하면서 한반도에 긴장이 고조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트럼프정부의 대북접근으로 한반도문제에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면 긍정적입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측면에서는 우리가 패싱될 위험도 있습니다. 과거에 문재인정부가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도 미국과 북한은 기회만 있으면 한국을 배제하려 했습니다. 불편하니까요. 한국의 이익을 침해해가면서 북미가 결단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2018년에도 제기되었던, 미국이 북한의 ICBM(대륙간 탄도미사일) 개발만 중단시키고 핵무기는 인정할 수도 있다는 등의 시나리오입니다. 북한이 2019년에 하노이에서 뒤통수를 워낙 세게 맞았기 때문에 아무리 미국이 손을 내밀어도 쉽게 잡지 않을 거라는 김창수 선생님 전망에 저도 동의합니다. 그 시간 동안 빨리 우리 입지를 다지고 지분을 가지고 끼어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체적인 한반도 긴장 완화는 미국에 맡기되 구체적인 협상은 우리 없이 해서는 안 되도록 챙겨야 합니다.

 

최배근 한반도문제에 있어 트럼프정부는 미국의 이익이 계속 유지·강화될 것인가를 계산할 겁니다. 2019년 하노이회담이 좌초한 이유를 좀더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트럼프는 북한을 중국과 분리시키고 싶어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북한체제의 안전에 대한 제도적 보장을 전제해야 하고, 그에 따른 한반도 지각변동도 가늠해야 합니다. 워싱턴 엘리트들로선 갑작스러운 남북통일을 포함한 한반도 변화의 결과가 미국 이익에 부합해야만 하는데, 문재인정부에서 이를 자신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서독 주도의 통일을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이 동의해준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서독이 G7 멤버로서 다른 국가들하고 신뢰를 형성해온 결과였어요. 그렇게 보면 앞서 이야기한 G10 방안의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 방안은 민주정부를 친중과 종북좌파 세력으로 비난하는 수구진영의 프레임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미국이 세계질서를 관리하기 위해 만든 G10에 가입을 추진하는 민주정부를 친중이나 종북좌파로 몰아붙일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차기 민주정권은 G10과 뉴딜연합을 하나로 묶어 추진해 호랑이 등에 올라타야만 합니다.

이 지점에서 상기할 일은, 2017년 말에 한반도 전쟁위기설이 터졌다가 2018년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분위기가 확 바뀐 적이 있습니다. 민주정권을 공격하는 보수특권층의 단골메뉴가 안보문제(한반도문제)인데, 안보가 안 통하자 이들은 경제문제로 칼을 갈아 고용참사니 뭐니 하며 문재인정부를 마구 공격합니다. 새 정부가 들어서도 안보와 경제가 공격거리가 될 겁니다. 그런데 우리 무역에서 큰 비중을 자지하는 대미 수출이 트럼프정부에서 단기적으로는 어려운 상황을 맞이할 것이기에 내수 강화가 중요합니다. 지금은 인플레이션과 저성장의 결합으로 소매판매가 11분기 연속으로 감소해 내수가 악화되고 있습니다. 일자리 생태계도 더욱 취약해졌고요. 정부와 산업계가 머리를 맞대야 합니다. 현재의 우리 산업체계로는 자국 내수 약화를 수출로 돌파하려는 중국의 공세를 막기 어렵습니다. 식민지적·후진국형 산업체계는 수명을 다했고, 산업생태계를 재구성하기 위해서는 교육혁명과 자산 중심의 경제구조 수술을 포함해 사회경제 전체의 틀을 다시 짤 필요가 있습니다. 새로운 민주정부는 우리 사회가 직면한 문제와 과제 등에 대해 국민에게 솔직하게 밝히고, 협조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김창수 2015년 오바마 대통령은 알래스카에 있는 북미 최고봉인 매킨리(McKinley)를 데날리(Denali)라는 이름으로 바꿨습니다. 알래스카 지역 토착민이 ‘높은 곳’이라는 뜻으로 부르는 이름이라고 하죠. 그런데 트럼프는 취임 직후 이 봉을 다시 미국 대통령 이름을 딴 매킨리로 되돌립니다. 멕시코만도 미국만이라고 바꾸고요. 매킨리는 팽창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 정책을 펼치며 미국-스페인 전쟁(1898)을 통해 괌, 필리핀 등의 지배권을 얻었죠. 트럼프2.0 시대는 분명히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이 전개될 거 같습니다. 오늘 두분 말씀 종합해보면 결국 우리 내부의 민주적 역량을 강화시키는 것과 이를 바탕으로 국가의 전략적 자율성을 넓혀나가며 새로운 기회를 열어가는 것이 중요하겠습니다. 긴 시간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2025.1.22. 창비서교빌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