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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새로운 출발점에 선 민족문학론
김명인과 신승엽의 논의를 중심으로
하정일 河晸一
문학평론가. 원광대 국문과 교수. 저서로 『20세기 한국문학과 근대성의 변증법』 등이 있음. jungil@wonkw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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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만큼 문학비평이 불신을 받은 시대도 드물 것이다. 7,80년대의 비평이 차지했던 위상과 비교해보면 그 편차는 아득할 정도이다. 90년대 비평은 80년대의 정론비평에 맞서 ‘비평의 제자리 찾기’를 외치며 출발했다. 하지만 지금 남아 있는 것은 문학비평의 정체성에 대한 깊은 회의뿐이다. 비평의 제자리를 찾겠다는 당찬 선언이 ‘비평의 자리가 과연 있기나 한 것인가’라는 자조(自嘲)로 마감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필자의 소견으로는, 90년대 비평은 두 가지 점에서 치명적인 잘못을 범했다.
하나는 출판상업주의와의 유착이다. 80년대 비평에 대해 ‘파당적’이라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지만, 80년대 비평의 파당성은 적어도 이념적 동질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그 이념이 얼마나 타당했던가는 엄정하게 따져야 하겠지만, 어쨌든 이념적 동질성에 따른 분화와 파당화는 나름의 내적 필연성을 갖는다. 반면에 90년대 비평은 출판사와 매체의 이해관계에 따라 분화되고 파당화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이 점은 작품집 해설만 훑어보더라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비판의 실종, 무조건적 상찬, 아전인수 식의 과잉해석, 이 모든 파당적 행태들이 바로 출판사의 상업적 이해관계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문학비평이 출판상업주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때 객관성과 공정성은 기대하기 힘들며, 객관성과 공정성이 훼손된 비평이 신뢰를 잃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다른 하나는 주석비평으로의 경도이다. 문학비평은 작품에서 출발해 작품으로 귀환한다. 그런 점에서 작품에 대한 치밀한 독서는 비평의 전제조건이다. 그러나 이 말이 비평은 작품의 자장 내부에서만 움직여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비평은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동시에 작품의 ‘부재(不在)’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야 한다. 이를테면 비평은 작품에 이러저러한 것들이 ‘있다’고 말하는 동시에 작품에 이러저러한 것들이 ‘없다’고도 말해야 하며, 나아가서는 ‘작품이 없다’고까지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문학비평은 비로소 비판이 된다. 비평이란 일종의 경계의 글쓰기이다. 문학과 과학의 경계, 문학과 이념의 경계, 문학과 현실의 경계. 비평은 이렇듯 문학과 문학 바깥의 경계선상에 버티고 서서 양쪽을 소통시키는 행위이다. 그래서 비평은 문학의 이름으로 과학과 이념과 현실에 대해 발언하는 동시에 과학과 이념과 현실의 이름으로 문학에 대해 발언한다. 주석비평의 한계는 이 점, 곧 경계의 글쓰기에 대한 자의식이 부족하다는 사실에 있다. 그로 인해 주석비평은 작품의 자장을 넘지 못한다. 말하자면 ‘작품이 없다’고 말하지 못한다. 크게 보아 90년대 비평은 이러한 주석비평의 테두리 안에서 맴돌았다.
출판상업주의와의 유착과 주석비평으로의 경도라는 90년대 문학비평의 두 가지 문제점은 특히 90년대 문학에 대한 입장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90년대 비평은 90년대 문학을 정당화하는 데 급급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평이 본질적으로 시시비비를 가리는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90년대 비평은 작품의 부재와 결여에는 눈감은 채 90년대 문학을 변호하는 일에만 몰두했다. 이같은 비평은 그것이 아무리 휘황한 이론으로 치장하거나 충분한 작품적 근거를 갖추었다 할지라도 끝내 문학의 상투화를 낳기 마련이라는 점에서 위험하다.
변호론적 비평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90년대 비평이 90년대 문학을 적극 옹호한 것은 원천적으로 출판사와 매체의 이해관계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속된 말로 책장사에 비평가가 대거 동원된 것이다. 좋은 책을 대중들에게 좀더 널리 알리기 위해서라면 그러한 작업은 문학의 대중화란 관점에서 오히려 장려되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기본조차 갖추지 못한 책들까지도 비평가들이 앞장서서 선전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필자 자신부터 비평무용론을 외치고 싶은 심정이 되곤 한다.
출판상업주의와 90년대 비평의 유착은 주석비평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작품 바깥으로 이동하는 순간, 가령 작품을 사회적 맥락 속에 집어넣는 순간 작품에 대한 무조건적인 상찬이나 과잉해석이 어려워질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작품 바깥으로 나가는 대신 90년대 비평이 선택한 길은 텍스트주의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90년대 문학의 알리바이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90년대에 국한해보건대, 출판상업주의와 주석비평은 서로 악순환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90년대의 전반적 추세 속에서도 비평의 정체성을 올곧게 세우기 위한 노력들이 곳곳에서 진행되었다는 사실에도 우리는 주목하지 않으면 안된다. 필자는 90년대 비평의 가능성을 여기서 발견한다. 특히 작년에 나온 평론집들 가운데는 비평의 정체성과 관련해 진지한 사유와 고뇌를 보여주는 책들이 적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두 권의 평론집이 필자의 눈길을 끌었다. 신승엽의 『민족문학을 넘어서』(소명출판 2000)와 김명인(金明仁)의 『불을 찾아서』(소명출판 2000)가 그것인데, 이 평론집들은 날카로운 비판정신과 경계의 글쓰기에 대한 자의식으로 충만해 있다는 점에서 90년대 비평의 전반적 추세와 뚜렷이 변별된다. 그런 점에서 생각이 같으면 같은 대로 다르면 다른 대로 2000년대 문학비평의 향방을 이 책들과 더불어 점검해보는 일은 여러모로 유익하리라 여겨진다. 더구나 이들 평론집은 민족문학론의 자기갱신과 관련해 예리한 안목을 보여준다. 그런만큼 민족문학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문제를 중심으로 두 책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작업은 참으로 반갑고 즐거운 일이다. 물론 마냥 즐겁지는 않은 것이 민족문학의 자기갱신에 대한 두 저자의 생각과 필자의 생각은 여러 부분에서 충돌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충돌이 있어야 발전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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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학을 넘어서’라는 평론집 제목이 암시하듯이 신승엽은 90년대 내내 민족문학의 내부로부터의 극복에 주된 관심을 기울여왔다. 신승엽은 이를 ‘내파(內破)’라 표현하기도 하는데, 여기에는 민족문학의 역사성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가운데 민족문학을 넘어선 새로운 문학이념을 창출하고자 하는 문제의식이 담겨 있다. 민족문학(론)에 대한 이러한 접근은 한국 근대문학 연구자로서의 진중한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한다. 그런 점에서 ‘민족문학의 내부로부터의 극복’이라는 신승엽의 문제의식은 목적론이니 환원론이니 하는 90년대의 몰역사적 민족문학 비판과는 질을 달리한다.
신승엽의 민족문학 ‘내파’론은 두 개의 이론적 줄기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80년대의 사회주의문학론을 새로이 갱신하고자 하는 욕구이며, 다른 하나는 민족문학론의 민족주의적 편향을 극복하려는 의욕이다. 민족문학 내파론은 두 줄기의 접점이라 하겠는데, 이때 주목되는 것이 80년대의 사회주의문학론에 대한 은밀하면서도 강렬한 애착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민족문학 내파론은 민족문학론에서 민족주의적 요소들을 제거하고 사회주의적 이념을 강화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해석을 가능케 해주는 근거로는 먼저 80년대 민족문학론의 갱신에 사회주의문학론이 중요한 기여를 했다는 주장을 들 수 있다. 80년대의 민족문학론이 “사회주의문학론과의 교섭을 통해(…)계급론적 시각을 보완하여 노동자계급 당파성을 민족문학 이념의 중요한 계기로 인정하는 등 한층 과학화되었”다는 평가가 그것이니, 이 연장선에서 신승엽은 “향후의 민족문학론의 새로운 모색에 있어서도 사회주의적 이념과의 끊임없는 변증법적 교섭은 불가결한 사업”(17면)이라고 진단한다. 말하자면 사회주의문학론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민족문학론이 사회주의적 이념을 점차 내면화하는 과정이 곧 민족문학의 내파과정인 셈이다.
이와 함께 그의 분단체체론 비판도 또하나의 중요한 논지라 할 수 있다. 책의 1부에 실린 세 편의 글은 모두 분단체체론 비판에 대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분단체제론이 90년대 민족문학론의 정화라는 점에서 분단체체론 비판은 곧 민족문학론에 대한 전면 비판과도 같은 무게를 갖는다. 신승엽은 분단체제론의 여러 문제점, 이를테면 환원론적 경향이나 민족주의적 편향, 그리고 민중의 생활현실에서 멀어지고 있는 점 등이 근본적으로 민족을 모든 것의 중심에 두는 사고방식에 기인한다고 해석하면서, 이의 극복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민중을 아래로부터 주체화”(50면)하는 작업이 급선무라고 주장한다. 요컨대 추상적인 ‘민족’이 아니라 구체적인 ‘민중’을 민족문학론의 사유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민중을 아래로부터 주체화한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주체의 구성이 결국 자본주의의 전복으로 지향”되는 것과 상통하며, 따라서 ‘사회주의 내지는 맑스주의 이론과 정신은 특히 새로운 민중문학의 창조에 있어 불가결한 자양분이”(같은 곳) 된다. 이러한 신승엽의 논리에서 우리는 사회주의적 이념의 도입을 통해 민족문학론을 재구성─그의 용어로는 내파─하려는 의도를 어렵지 않게 간파할 수 있다.
민족문학론에 대한 신승엽의 비판에 필자는 대개 동의하는 편이다. 자본주의의 극복이라는 전망 속에서 민족문학론을 재구성해야 한다거나 민족주의적 편향을 극복해야 한다는 주장은 필자 역시 여러해 전부터 제기해온 터였고, 90년대의 민족문학론, 특히 분단체제론이 민중현실과 상당히 괴리되어 있다는 지적도 일정 부분 인정한다. 하지만 앞으로의 생산적인 논의를 위해 몇가지 이견을 제시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그 이견들에는 민족문학론의 역사에 대한 입장차이가 내재해 있기 때문에 반드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필자는 80년대의 민족문학론이 사회주의문학론과의 교호관계 속에서 계급론적 시야를 확충하게 되었다는 신승엽의 지적을 부인하지 않는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때의 ‘사회주의문학론’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냐는 점이다. 필자의 견해로는, 80년대 말의 급진적 소장파가 받아들인 사회주의문학론이란 대개 공식 사회주의문학론(까간M.S. Kagan까지 포함해)이나 북한의 주체문학론이었다. 신승엽은 그것들을 자양분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인가. 필자는 80년대 말의 급진적 민족문학론이 보여준 목적론적 편향과 환원론적 편향이 공식 사회주의문학론이나 주체문학론의 영향에서 비롯된 바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금의 싯점에서 이들과의 상호교섭을 통해 민족문학론이 얻을 것은 거의 없다고 본다. 그렇다면 신승엽이 생각하는, ‘민족문학론의 갱신에 불가결한 자양분’이 될 사회주의문학론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이에 대한 설명 없이는 ‘사회주의문학론과의 상호교섭을 통한 민족문학론의 갱신’이란 주장은 공소한 슬로건에 머물기 십상이다.
따라서 문제의 핵심은 ‘어떤’ 사회주의냐 하는 것이다. 사회주의 혹은 맑스주의와의 대화 속에서 민족문학론이 성장해왔다면, 그리고 신승엽이 생각하는 사회주의문학론이 공식 사회주의문학론이 아니라면, 그냥 사회주의를 얘기하는 것은 생산적인 논의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의문에 대한 구체적인 답변이 없기 때문에 무어라 판단하긴 어렵지만, ‘민중의 아래로부터의 주체화’란 명제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이런 유의 주장은 민족문학론의 역사 내내 제기되어왔기 때문에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다.
그의 주장에서 새로운 것은 “지금 이곳의 현실에서 민중에 가장 직접적인 고통을 선사하는 것”이 “개인의 단자화”(43면)이므로 “새로운 민중의 재구성의 가장 기초적인 조건으로서 ‘개인의 단자화’를 위치”(71면)지어야 한다고 주문하는 대목이다. 따지고 보면 이 ‘개인의 단자화’야말로 신승엽이 민족문학론의 이념적 혹은 실천적 유효성에 대해 회의하게 만든 핵심준거이다. 개개인이 단자화된 마당에 민족이니 계급이니 하는 거대담론이 절실한 의미를 갖기 힘들다. 당연히 이들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온 민족문학론도 대중적 호소력을 얻을 수 없게 된다. 그러니 ‘개인의 단자화’라는 민중의 생활현실에서부터 민족문학론의 전체 내용을 재구성해야 한다. 이것이 사회주의와의 교섭을 통한 민족문학 내파론이 내놓는 나름의 대안이다. 그러나 ‘개인의 단자화’를 강조하는 것이 사회주의적 이념과 얼마나 어울릴 수 있을지는 매우 회의적이다.
단자화가 자본주의가 낳은 구조적 산물임에는 틀림없다. 그런 점에서 단자화에 대한 주목에 나름의 사회주의적 시각이 깔려 있다고도 해석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렇게 이해하기에는 단자화에 대한 신승엽의 설명은 지나치게 일면적이다. 그의 주장이 설득력을 지니려면 먼저 단자화가 어째서 “지금 이곳의 현실에서 민중에게 가장 직접적인 고통을 선사하는” 요인인지를 해명해야 한다. 이와 관련해 그가 거듭 제시하는 근거 가운데 하나가 “최근의 의미있는 소설들”(43면) 혹은 “지금 이곳에서 생산되는 ‘진지한’ 문학작품들”(328면)이다. 말하자면 90년대의 진지한 혹은 의미있는 소설들이 ‘단자화된 개인’을 주제로 삼고 있다는 사실에 유념해야 한다는 것인데, 신승엽이 진지하고 의미있다고 생각하는 신경숙(申京淑)이나 배수아(裵琇亞)의 작품들이 진정 그러한지도 의문이려니와, 백보 양보해 그러한 평가를 인정하더라도 그것이 곧 단자화를 지금 이곳의 민중에게 가장 직접적인 고통을 선사하는 요인으로 보아야 할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단자화는 현실인 동시에 이데올로기이다. 즉 단자화는 자본주의가 낳은 구조적 결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본주의가 사회를 관리하기 위해 유포하는 이데올로기이기도 하다. 자본주의는 사회구성원을 사적 개인으로 분할함으로써 그들을 등질화한다. 등질화된 사적 개인들이란 계급적·민족적(인종적)·성적 차이가 지워진 이른바 ‘대중’이다. 자본주의가 고도화할수록 등질화된 대중들로 구성된 대중사회는 더욱 강화된다. 그런 점에서 단자화는 현실이다. 그러나 대중사회라고 해서 계급적 차이가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간접화되기는 하지만, 자본주의체제가 지속되는 한 사회구성원들은 항상 계급적으로 나누어진다. 단자화는 이러한 계급적 분할(그리고 민족적·성적 분할)을 은폐한다는 점에서 이데올로기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신승엽이 꼽은 90년대의 ‘진지한’ 작가들은 단자화의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측면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다. 그 때문에 소통 가능성 혹은 주체 형성의 가능성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단자화의 현실에만 매달려 있는 한 새로운 민중 주체의 형성은 불가능하다. 단자화가 아무리 심화되더라도, 아니 오히려 그에 정비례해 계급적 분할 역시 심화되는 것이 자본주의사회의 법칙이다. 그렇다면 단자화의 추세 속에서도 의연히 작동하고 있는 계급적·민족적(인종적)·성적 분할에 대한 인식이야말로 민중의 아래로부터의 주체화의 진정한 조건이 아니겠는가.
같은 맥락에서 단자화가 민중의 가장 직접적인 고통이라는 주장에도 동의하기 어렵다. 단자화의 이면에는 계급적 분할과 착취가 가로놓여 있다. 단자화된 일상을 외면해서도 안되겠지만, 민족문학이 정작 관심을 기울여야 할 부분은 바로 단자화의 이면이다. 요컨대 그 배후에서 교묘하게 진행되는 살벌한 계급적 분할과 착취가 민중의 가장 직접적인 고통인 것이다. 이 점은 자본─노동 타협을 무산시킨 IMF사태를 통해 극명하게 드러났거니와, 정리해고와 고용유연화의 현실에서 단자화란 그들의 고통을 심화시키는 한 계기는 될지언정 고통의 본질일 수는 없다. 그러므로 단자화된 삶 역시 계급적 분할과 착취라는 거시적 맥락 속에서 조망될 때에만 자본주의 극복을 지향하는 민족문학이라는 이념에 걸맞은 인식이 비로소 가능해질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단자화에 대한 신승엽의 시각에는 그 겉과 속을 두루 통찰하는 총체적 사유가 부족하지 않은가 싶다.
신승엽의 『민족문학을 넘어서』는 너도나도 민족문학론의 시효 상실을 외쳤던 90년대의 경박한 시류에 영합하지 않으려는 꿋꿋함과 새로운 문학이념 혹은 주체 형성의 가능성을 끈질기게 모색하는 실천적 진지함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만큼 민족문학론에 대한 그의 비판은 민족문학론을 좀더 현실정합적인 이념으로 단련하기 위한 채찍질로 경청할 필요가 있다. 다만 현실정합성이라는 것이 작품에 ‘있는 것’에 충실해야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작품에 ‘없는 것’, 나아가 ‘작품이 없다’는 것에도 주목할 때 진정한 의미에서의 현실정합성을 성취할 수 있는 법이다. 현실은 존재하는 것인 동시에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작품의 안과 밖, 존재와 부재를 동시에 읽어내는 것이 참다운 맑스주의적 비평 아닐까. 『민족문학을 넘어서』를 읽으며 마지막으로 느낀 소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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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김명인의 『희망의 문학』(풀빛 1990)을 읽은 적이 있다. 그의 두번째 평론집인 『불을 찾아서』를 통독하면서 세월의 거리만큼이나 벌어진 ‘이념의 거리’를 보게 된다. 민중적 민족문학을 설파하던 투사가 이제 민족문학은 하나의 담론일 뿐이라고 나지막하게 말하는 문학평론가로 변신했다. 여기서 필자는 김명인 개인의 변화와 함께 시대의 분명한 변화를 느낀다. 하지만 이러한 변신에도 불구하고 그의 열정은 여전히 살아 있다. 김명인은 여전히 진보적 문학의 가능성을 신뢰하며, 총체성을 인식론적 기반으로 삼고 있고, 현실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늦추지 않는다. 다만 민족문학에 대한 신념을 철회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김명인은 왜 민족문학에 대한 믿음을 철회했고, 어디서 진보적 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고 있는 걸까. 『불을 찾아서』에 대한 필자의 주된 관심은 이 점에 있다.
『불을 찾아서』에는 김명인의 정신적 변화의 궤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그의 변화는 “실천운동과의 매개를 잃어버린 채, 민중의 실재하는 고통에 실천적으로 답할 수 없는 관념의 대차대조표를 짜는 것, 그리하여 운동의 담론화로 귀결”(41면)된 90년대 민족문학운동의 정황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 ‘민족문학’은 끝이다. 깃발을 내림은 물론 문도 닫아야 한다”(178면)는 ‘청산선언’으로 이어진다. 필자는 이에 대해 “김명인의 선언은 다분히 민족문학을 완결된 이념, 즉 정답으로 생각하는 80년대적 민족문학관에 고착된 채 90년대의 달라진 현실에 적응하려 한 데 따른 논리적 귀결”(「90년대 문학의 지형과 민족문학의 새로운 가능성」, 『실천문학』 1995년 겨울호)이라는 비판을 가한 바 있다. 이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민족문학이 모든 문제에 대한 정답을 제공하는 완결된 이념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민족문학은 이데올로기로 화석화된다. 민족문학 역시 모든 진정한 이념들이 그러하듯 진리를 찾아가는 과정이자 진리에 대한 끝없는 질문이며, 진리를 이루어가는 부단한 실천이다. 그러한 실천을 ‘민족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수행하는 것은 한국적 근대(문학)의 특수성 때문이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다.
어쨌든 김명인은 이 청산선언 이후 동면에 들어갔다가 2,3년 전부터 다시 비평활동에 복귀했다. 이 복귀는 8,90년대 한국문학에 대한 그 나름의 정리가 이루어진 것과 관련이 깊다. 따라서 8,90년대에 대한 정리는 이 책의 기본입장을 가늠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열쇠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80년대의 급진적 민족문학운동이 실패로 귀결된 주요인으로 김명인은 ‘과학의 과잉’을 꼽는다. 요약하자면, “과학이 싸움을 했고 문학은 그것에 형상의 옷을 입혔으며 우리의 실존은 열심히 그 뒤를 좇았다.”(20면) 그 결과 과학이 주인이 되고 문학은 부차화되는 ‘전도’가 발생했고, 이로 인해 사회주의 이념의 붕괴가 곧 민족문학운동의 붕괴로 직결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필요한 일은 “과학을 본래의 자리로 돌이키고 문학과 과학의 관계를 다시 정립하는”(같은 곳) 작업이다. 김명인의 복귀는 이러한 새로운 작업과 무관하지 않다. 90년대 한국문학의 상황도 그의 복귀의 명분이 되고 있다. 그가 특히 문제삼는 것은 90년대 비평이 보여주는 ‘쇄말주의’ (trivialism)이다. 90년대의 쇄말주의적 비평에는 ‘정치적 계몽의 의지’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그런 점에서 90년대 비평은 말의 참다운 의미에서의 ‘비판’을 보여주지 못했다고 혹평한다.
8,90년대 문학에 대한 정리를 거쳐 김명인은 자신의 향후 비평적 지향이 ‘계몽비평의 복권’, 곧 문학과 과학의 올바른 상호관계에 기초한 문학의 사회적 실천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그것은 “생애에서 가장 치열했던 시기에 가장 근본화되어 있었던 세계와 인간에 대한 관점을 회복하는 일”(24면)이다. 그렇게 보면, 그는 정신적으로─이념적으로가 아니라─80년대로 귀환한 셈이다.
계몽비평을 복원해야 한다는 김명인의 선언에 필자는 충분히 공감한다. 90년대의 주석비평에 가장 결여된 부분이 바로 문학의 현실연관에 대한 적극적 관심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비판은 필자가 서두에서 행한 비판과 큰 맥락에서 상통한다. 그러나 80년대의 민족문학운동을 계몽의 정신이란 범주로 규정하는 것은 무언가 막연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러한 범주화는 지나치게 포괄적이지 않은가. 그것은 80년대 민족문학의 실상을 희미하게 만드는 것 아닌가. 그런데 사실은 여기에 김명인의 숨은 기획이 담겨 있다는 것이 필자의 추측이다. 그가 생각하는 계몽비평은 민족문학을 지움으로써 정치적 비평을 살리려는 전략이다. 다시 말해 민족문학론을 “그 의미와 한계가 정확히 설정되어야 할 하나의 담론에 지나지 않는”(271면) 것으로 상대화함으로써 ‘비평의 공공성과 운동성’을 되살리려는 기획인 것이다. 그 까닭은 민족문학론을 가지고는 더이상 현재의 한국문학을 주도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김명인은 현재 ‘민족문학운동의 주체와 이념과 강령적 실천의 내용’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그에 대해 김명인은 “대답은 쉽지 않을 것”(230면)이라고 한다. 그가 보기에, 70년대에서 90년대까지의 민족문학운동은 “‘우리’의 외연을 과잉 확장했었고 한갓 담론을 금과옥조의 혁명적 이론으로 분식했으며 그 때문에 눈이 멀어 객관현실의 변화와 주체적 조건의 변질을 읽지 못”(같은 곳)했다. 그가 80년대 말의 급진적 민족문학론의 폐해를 전체 민족문학론으로 과잉 일반화시키고 있다는 점만 제외하면, 민족문학론을 상대화해야 한다는 김명인의 생각은 전적으로 옳다. 민족문학은 절대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 세상에 절대진리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이념은 역사적인 존재이며, 그런 점에서 민족문학 또한 철저히 상대화되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이때의 상대화가 민족문학론을 담론 수준으로 제한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민족문학이 역사적 이념인 것은 그것이 근대라는 역사의 한 기간 동안에만 유효하기 때문인 동시에 적어도 그 기간 동안에는 진리성을 담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자리에서 민족문학의 역사적 진리성에 대해 상술할 수는 없지만, 간단히 얘기하자면, 그것은 민족문학이 ‘근대성의 성취를 통한 근대극복’의 이념이라는 데 있다. 그동안 근대성의 달성을 외친 이념도 많았고, 근자에는 탈근대를 내세우는 이념들이 대거 등장하고 있지만, 그 어느 것도 양자의 내적 연관을 이해하지 못했다. 거칠게 요약하면, 근대성의 달성을 주장하는 쪽은 그것을 곧 역사의 종말로 생각했고, 탈근대를 주장하는 쪽은 근대를 막무가내로 부정하기에 급급했다. 반면에 민족문학론은 해방 직후부터 지금까지 시대의 변천에 따라 구체적 내용들을 계속 변화시켜왔지만, 그러한 변화 가운데서도 ‘근대성의 성취를 통한 근대극복’, 곧 근대 내부로부터의 근대극복이라는 이념적 지향을 의연히 견지해왔다. 김명인의 ‘민족문학 상대화’론에는 이에 대한 역사적 인식이 부족하다.
이러한 역사적 인식의 부족은 리얼리즘 대 모더니즘이라는 이항대립을 지양하자는 주장에서도 발견된다. 리얼리즘의 ‘역사철학적 근대성’과 모더니즘의 ‘미적 근대성’의 고향이 같은 곳이라는 김명인의 해석은 수긍되는 바가 적지 않다.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양자의 내면 깊숙한 곳에는 분명 “자본주의 시대의 전개와 함께 상실된 삶과 세계의 조화, 영원한 것과 일상적인 것의 행복한 통일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강한 열망”(245면)이 숨어 있다. 그런 점에서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원시반본적 재통합을 통해 근대극복의 미학적 실마리를 찾아내야”(264면) 한다는 그의 주장은 일리가 없지 않다. 그러나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원시반본적(原始返本的) 재통합이든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회통(會通)이든 그 작업은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역사적 운동이라는 구체적 실상에 대한 정확하고도 엄정한 평가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것은 전술적 야합으로 변질되거나 서로가 서로에게 독이 되는 악순환을 낳을 위험성이 농후하다. 역사적 운동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미적 근대성의 이념은 미적 자율성으로 협애화되면서 문학과 사회 사이에 소통 불가능한 단절을 만들어낸 데 비해, 리얼리즘은 숱한 굴곡 속에서도 문학과 사회를 소통시키기 위한 미학적 노력을 끊임없이 경주해왔다. 김명인은 이 엄연한 문학사적 사실을 ‘원시반본’이라는 말로 너무 쉽게 무화시키는 것 아닌가.
뿐만 아니라 김명인이 기대고 있는 사회적 근대성 대 미적 근대성이라는 이분법에도 문제가 적지 않다. 사회적 근대성 대 미적 근대성이라는 이분법은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역사성을 사상하면서 창안된 일종의 상징 조작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상징조작을 통해 사회적 근대성은 몽땅 부르주아적 근대성으로 환원되고 미적 근대성은 그에 맞선 저항이념으로 미화되는 이론적 왜곡이 발생한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모든 사회적 근대성들은 그것에 적합한 미적 근대성의 이념을 갖고 있다. 요컨대 리얼리즘의 사회적 근대성에 기반한 미적 근대성이 있는 것이고, 모더니즘의 미적 근대성에 조응하는 사회적 근대성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역사철학적 근대성과 미적 근대성을 통합하는 것이 아니라, 리얼리즘의 미적 근대성은 무엇이고 모더니즘의 사회적 근대성은 어떤 것인지를 역사적으로 규명하는 작업이어야 하지 않을까.
김명인이 제시한 진보적 문학비평의 새로운 대안, 특히 총체성과 ‘정치적 계몽 의지’에 대한 각별한 강조는 90년대 문학 혹은 비평이 상실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우리로 하여금 되돌아보게 해준다. 그러나 계몽비평의 복원이 굳이 민족문학을 지워버려야만 가능한 것일까. 민족문학이야말로 20세기 한국문학의 계몽 전통을 잇는 적자였다는 점에서, 오히려 민족문학의 이름으로 계몽비평을 복원하는 것이 좀더 계몽의 정신에 걸맞은 것 아닐까. 민족문학에 대한 항간의 오해와 편견이 짐이 될 수도 있다는 측면에서 김명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그것은 너무도 소극적인 대응 아닌가. 필자는 이런 식의 대안으로는 최대치까지 나가더라도 좋은 의미에서의 인문주의 비평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크다는 생각이다. 계몽비평의 복원이라는 문제의식에 동의하면서도 끝내 그의 입론을 받아들일 수 없는 소이(所以)가 이 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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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계나 학계나 민족문학(론)의 입지가 크게 약화된 것이 90년대의 현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국문학이 융성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민족문학이 죽어 한국문학이 살 수 있다면’ 민족문학은 죽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의 상황을 보여주었다. 민족문학(론)이 힘을 잃으면서 한국문학도 덩달아 아니 그 이상으로 힘을 잃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90년대는 민족문학의 위기 이전에 문학의 위기의 시대였다.
민족문학론의 방향 내지는 위상 조정을 통해 민족문학, 나아가 한국문학 전체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비평적 노력을 90년대 내내 꾸준히 진행해 온 신승엽과 김명인의 작업이 소중한 것은 그래서이다. 따라서 우리는 신승엽과 김명인의 민족문학론 비판과 제안에 귀를 기울여 민족문학론의 자기갱신을 위한 디딤돌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두 사람의 논리에서 어떤 위태로움을 느끼기도 한다. 이 위태로움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들에게서 위기의식의 차원을 넘은, 민족문학(론)에 대한 일정한 절망감이 감지된다는 점과 관련되어 있다. 위기의식은 발전의 원동력이 되지만, 절망감은 그렇지 않다. 신승엽이 어느 글에서 윤지관(尹志寬)에 대해 ‘터무니없는 낙관’에 빠져 있다고 비판했지만, 그리고 그 비판이 나름대로 일리도 있지만, 필자는 때에 따라서는 ‘터무니없는 낙관’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터무니없는 낙관’으로부터 새로운 의욕과 창조가 나오는 경우도 종종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낙관이 ‘근거 있는 낙관’이면 더 바랄 나위 없겠지만.
지금 민족문학론은 혼란과 도전과 가능성이 착종된 어둠의 시대를 지나고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작업은 그 어둠이 새벽녘의 어둠임을 어렴풋이나마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민족문학론은 이제 새로운 출발점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