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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우리 시대의 에곤 실레–은희경
이선옥 李仙玉
숙명여대 강사. 문학평론가. 주요평론으로 「이기영 소설의 여성의식 연구」 「박완서 소설의 다시쓰기–딸의 서사에서 여성들간의 소통으로」 등이 있음. sun-oklee@hanmail.net
1. 머리말
이곳은 얼마나 추악한가…… 그림자가 드리워진 빈은 온통 잿빛이고, 일상은 기계적으로 반복될 뿐이다.
에곤 실레(Egon Schiele)의 「안톤 페슈카에게 보내는 편지」(1910)로1 이 글을 시작하며, 그의 「초록색 스타킹을 신고 누워 있는 여인」을 떠올린다. 진열장의 인형 같은 무표정과 도발적인 음모, 그것들을 둘러싼 단순하고 일그러진 몸매의 선. 실레의 드로잉에 묘사된 소녀들과 여인들, 자화상과 도시풍경들을 보면 묘하게 은희경(殷熙耕)의 작품과 겹치는 환상을 느끼게 된다. 한참을 인물들의 조롱과 위악을 따라가다보면, 두 남녀의 격렬한 「포옹」이 눈앞에 펼쳐진다. 그림에 전혀 문외한인 내게도 넘쳐나는 에너지가 느껴지는 「포옹」에 눈을 멈추면 냉정함을 가장한 그의 인물들은 감추어진 순정과 슬픔을 드러내며 스르르 갑옷을 벗어던진다. 인물들은 놀랄 만큼 저속하지만 쓸쓸함의 이면에 순정을 감추고 있고, 세상을 조롱하는 표정 뒤에는 세상을 사랑하고 싶은 격렬한 열정을 숨기고 있는 것이다.
실레의 화집은 『그것은 꿈이었을까』의 주인공 준이 유독 특별하게 여기는 세 가지 중에 하나로 등장하고 있어서 은희경과는 특별한 인연이 있는 것 같다. 인물들의 냉정함이나 위악적인 태도, 그 이면에 감춘 순정성에서 이들은 참 닮아 있다. 1900년대 초 빈(Wien)의 모더니스트 실레가 사창가의 흘러넘치는 성과 상류계층의 위선과 개인들의 욕망을 도시의 일상으로 그려냈다면, 은희경은 ‘익명의 성기’와 쎅스를 하거나, 늘 향상심(向上心)에 시달리지만 마이너리그일 수밖에 없는 우리 시대의 일상을 그려내고 있다.
199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이중주」로 당선되어 등단한 이후 은희경은 4편의 장편과 3권의 소설집을 펴냈다. 『새의 선물』(문학동네 1995) 『타인에게 말걸기』(문학동네 1996)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문학동네 1998)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창작과비평사 1999) 『그것은 꿈이었을까』(현대문학 1999) 『마이너리그』(창작과비평사 2001) 『상속』(문학과지성사 2002)2 등단한 지 만 7년 동안 일곱 권의 작품집을 발표했으니 한해에 한권씩을 출간한 셈이 된다. 제목만 훑어보아도 문학적 성취나 대중적 호응 모두에서 만만치 않은 성과를 얻은 선 굵은 작가임을 느낄 수 있다.
그간 은희경의 작품에 대해서는 사랑의 탈낭만화나 여성성의 드러내기, 환멸과 냉소, 농담과 위악, 아이러니의 기법 등의 논의가 이루어져왔으며, 이러한 논의들은 작품의 이해와 수용을 풍요롭게 만들었다. 사실 이 글이 그간의 논의를 뛰어넘는 새로운 글읽기가 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그간의 논의들을 바탕으로 삼으면서, 일상의 재발견이라는 측면에서 읽어보면 그것에 대한 이해가 좀더 진전되지 않을까 싶다. 그녀가 발견한 도시적인 삶과 지지부진한 일상의 강고함에 대한 풍자는 유쾌하지만 슬프고, 반복적이면서 또한 달라진 한 시대의 초상을 드러내는 힘으로 작용한다. 그 때문에 은희경은 직선적인 변화의 작가이기보다는 반복형의 작가로 보이며, 그녀의 작품들을 겹쳐 읽을 때 의미가 좀더 선명해지리라 생각한다.
2. 쎅스, 소통 불가능성의 상징
–『타인에게 말걸기』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아내의 상자」
지지부진하고 반복적인 삶이 일상이며, 따라서 진기하고 특별한 ‘사건’들은 일상의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어떠한 ‘사건’들도 일상의 바탕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 일상은 반복적이며 잘 변하지 않고 사소하지만, 또한 일상처럼 심오한 문제도 없다. 왜냐하면 일상은 사람들의 적나라한 삶이 진행되는 생존과 존속의 메커니즘이기 때문이다.3 이러한 일상에 대한 정의를 따른다면, 태어나서 성장하고 밥을 먹고 사랑하고 꿈꾸면서 죽어가는 모든 일들은 일상을 구성하고 그러한 하루하루로 우리 삶이 지속된다. 탄생·밥·사랑·꿈·죽음으로 문학의 다섯 가지 주제를 삼은 포스터(E.M. Forster)의 생각도 그러한 일상의 주제화라고 볼 수 있다.
우리 시대 일상의 양태 중 은희경 작품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소재는 성과 사랑이다. “난 섹스를 하는 것이 아니라 안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그러는 거야. 섹스를 안하기 위해 겪는 실랑이처럼 의미없이 나를 지치게 하는 것은 없어”(『타인에게 말걸기』 265면)라고 당돌하게 말하는 「먼지 속의 나비」의 선희처럼 그녀의 인물들은 프리쎅스를 실천하거나 혹은 세번째 남자를 만들며 냉정함을 연기하고 있다. ‘익명의 성기’와 벌이는 쎅스로 넘쳐나지만 정작 사랑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인식이 냉정함을 가장한 그녀의 인물들을 만드는 것이다. “난 네가 좋아.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게 만드는 그 냉정함 말야. 그게 너무 편해”(249면)라고 말하는 「타인에게 말걸기」의 주인공이나 “결혼은 아무하고나 하는 것”(114면)이라고 말하는 「연미와 유미」의 연미 모두 성과 사랑에 대한 특별한 기대를 무너뜨리고 있다. 사랑 없는 남자와의 정사 후에 정액 묻은 휴지가 손가락에 달라붙자 “옥수수를 먹듯이 이빨로 긁어대”(「타인에게 말걸기」, 같은 책 245면)는 장면에 이르면, 사랑에 대한 냉소는 극에 달한다. “사랑이란 다 변형된 자기애일 뿐이야 (…) 지속되는 사랑이란 건 없어”(258면)라고 말하는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의 주인공도 앞의 인물들과 마찬가지이다.
「그녀의 세번째 남자」(『타인에게 말걸기』)와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는 셋이라는 수 개념을 들여와 ‘그’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독특한 거리두기 방식을 취하는 작품이다. 아프리카 사람들의 숫자세기 방식은 “셋부터는 다 똑같다”라고 하는데, 사랑하는 ‘그’를 세번째 남자에 등재시킴으로써 그녀는 ‘그’를 수많은 타인 중의 하나로 위치시킨다. 하나가 지니게 되는 진지한 환상, 둘이기에 빚게 되는 불안정한 선택과 예정된 비극, 이 모든 굴레에서 자유로운 숫자가 셋이고, 그래서 작가는 세 명의 애인이라는 구도를 선택한다. “어쨌든 애인이 셋 정도는 되어야 사랑에 대한 냉소를 유지할 수 있다”(『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8면)는 것이다. 이는 특별한 한 여자와 한 남자가 만나 ‘특별하고도 위대한 연인’이 되는 사랑의 낭만성에 대한 부정이라 할 수 있다.
낭만은 사랑과 결혼을 포장하는 최상의 꿈이다. 어쩌면 우리에게 남은 마지막 신화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늘 사랑이나 결혼은 계층을 유지하는 사회의 인정구조 안에서 일어나며, 운명적인 위대한 만남은 금전결혼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은희경의 작품들은 그러한 사랑과 결혼의 환상에 감추어진 이면을 드러내는 데 뛰어난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고 모든 인물이 냉정함과 거리두기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위악의 반대편에 살고 있는 착한 여자들은 남편의 외도로 버림받거나 이혼하고 혹은 미치거나 술을 마시면서 고립의 상태를 견뎌나간다(「빈처」 「짐작과는 다른 일들」 「명백히 부도덕한 사랑」 「이중주」 「아내의 상자」). “이루어진 사랑”은 “남루한 일상”(「빈처」, 『타인에게 말걸기』 173면)일 뿐이며, “결혼하면 언제나 함께 있”을 것이라는 그녀의 기대는 “그가 들어가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집이 아니라 일상이라는 것”(「짐작과는 다른 일들」, 같은 책 138면)이 드러나면서 무너지게 된다.
위악과 냉소를 가장하는 앞의 작품들과 달리 이 작품들의 여자들은 착하다. 하지만 착한 여자들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고, 그들이 세상을 향해 말을 걸기도 쉽지 않다. 물론 위악을 가장하는 여자들의 목소리도 제대로 이해되고 소통되는 것은 아니지만 착한 여자들의 말걸기는 더욱 심각한 곤란을 겪고 있다. 「빈처」가 아내의 일기를 읽는 남편의 서술로 진행되거나, 「아내의 상자」가 아내의 말을 엉뚱하다고 생각하는 남편의 관점에서만 서술되는 방식은 그러한 상황을 드러내는 데 돋보이는 효과를 얻고 있다. 아내들은 시시하다고 할 만큼 평범하게 성장해서 결혼하고 된장찌개를 잘 끓이는 얌전한 여자들이다. 그런 아내들이 일탈을 꿈꾸거나 미치는 상황을 남편들은 이해할 수 없다. 남편들은 아내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그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단절된 상태에 있는 것이다. “우리집에서는 모든 게 말라버려요!”(「아내의 상자」, 『상속』 289면)라고 어느날 아침 아내가 지르는 소리는 남편의 논리적인 서술의 틈새에 마치 비명처럼 떠올랐다 사라지고 만다. 이러한 서사전략은 성·사랑·결혼에 대한 순정한 기대가 불가능한 상태에 처해 있음을 극명하게 드러내준다.
이처럼 소통이 단절되고, 오해로 둘러싸인 성·사랑·결혼의 불모성은 전경린이나 차현숙 등 여성작가들의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주제이지만 은희경의 작품은 ‘성별 사회화’(gendering)된 남녀의 차이가 소통 불가능성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오랫동안 관계 지향적인 여성성을 배우고 익혀온 여성들과 경쟁 지향적인 성향으로 성장해온 남성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친밀성의 관계를 형성하기는 어렵다. 어머니·아내·애인으로 친밀성의 관계를 꿈꾸는 여성들과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기업전사로 성장한 남성들 사이의 기대는 서로 다른 곳을 향해 뛰는 쌍두마차처럼 어긋남과 오해로 가득하다.
3. 성장의 논리와 좌절–「멍」 『마이너리그』
여성들이 성과 사랑, 결혼에 대해 좌절하고 있다면, 남성들은 일과 가장의 역할에서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기에 몰두한다. 그들은 내 인생만은 남과 다르다는 신념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 안에서 서열을 매기고 역할을 맡기고 죄과를 묻느라 바쁘다. 『마이너리그』는 그런 “남자의 인생과 사내들의 우주, 그 성취와 좌절”(17면)을 풍자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58년 개띠들의 자화상’이라 일컬어지는 이 소설에는 네 명의 친구가 등장한다. 고등학교 시절 ‘만수산 드렁칡’이라는 별명을 얻은 이후로 늘 운명이 얽혀들게 되는 김형준과 조국, 장두환과 배승주가 그들이다. 우연히 물리숙제를 안해간 네 사람이 엎드린 자세로 서로 몸을 얽고 벌을 받다가 얻은 별명인 만수산 드렁칡은 칡넝쿨처럼 얼크러져 하잘것없는 존재가 되어가는 삶의 여정을 상징하는 이름이기도 하다. 하얀 얼굴의 배승주, 가슴팍이 떡벌어진 장두환, 보이스 비 앰비셔스를 외치던 조국, 토머스 울프를 끼고 다니던 목욕탕집 아들인 김형준, 이 네 사람은 여학생 소희를 사랑하며 순수한 시절을 거쳐온 보통의 남자들이다. 소희는 그들이 사회생활을 시작할 무렵 불의의 사고로 죽게 되는데, 순수성이 추억으로만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상징적 사건이라 볼 수 있다. “자신이 순수하지 않다는 고민은 순수한 나이에만 할 수 있는 것”(171면)처럼 가장이 되고 먹고살기에 급급한 이들의 머릿속은 “오늘 이 자리의 술값은 누구의 지갑에서 나올까 하는 생각”(171면)이 고작이다. 적당히 때묻은 나이가 된 이들은 자기만은 특별할 것이라는 기대가 헛됨을 깨닫게 된다.
끊임없이 투덜대면서도 어쨌거나 가족을 부양했고, 그런 틈틈이 겸연쩍어하면서도 모르는 척 자질구레한 죄를 저질렀다. 그러는 동안 우리 모두 공평하게 사십을 넘겼다. 만수산 드렁칡. 삶의 여정이란 것이 사실로도 칡처럼 하잘것없는 존재가 되어가는 과정이었음을 깨달을 만한 나이가 된 것이다. (17면)
이제 사십이 넘은 이들의 운명은 어린시절 그들이 꿈꾸던 성장신화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두환은 먼 타국의 슈퍼마켓에서 강도의 총에 맞아 죽었으며, 조국프로덕션을 차린 조국은 거창한 이름과는 달리 회갑연이나 돌잔치, 유치원 졸업식 사진을 찍어주는 일을 하고 있다. 승주는 외판원으로 전전하며 허송세월을 하고 있으며, 유일하게 이들의 삶을 분석하고 성찰하는 위치에 있던 형준 역시도 광고회사를 그만두고 조국의 허풍으로 만들어진 이벤트 사업에서 퇴직금을 날리는 보통의 남자가 되었다. 모두가 만수산 드렁칡이 된 것이다.
이들의 성장에 대한 환상은 사랑받는 아내와 성공한 남편이라는 70년대식 발전모델과 무관하지 않다. 이 작품에는 검정 교복과 중국집, 빼갈병과 긴급조치, 월남 패망, 교련실기대회, 올드 팝송, 이소룡, 임예진, 재일교포 간첩단 사건, 휴거 등 70년대의 시대상황이 배면에 깔려 있어서, 그들이 70년대식 성장의 환상 속에서 자라왔음을 알게 해준다. 그러나 시대적 배경은 서사의 후경으로만 존재한다. 이러한 서사전략은 평균적인 삶을 살아가는 보통의 사람들에게 시대는 일상의 자질구레함으로 틈입되어 경험된다는 작가의 시각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드물게 「멍」(『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 같은 작품에서는 대학교 1학년 때 제적당하고 늘 온몸에 ‘멍’을 지고 다니는 운동권 출신의 심영규를 등장시키기도 하지만 은희경 작품의 주인공들은 심영규를 기억 저편에 묻고 살아가는 이진찬 교수와 같은 인물들이다. 누렇게 변색되었다가 사라지는 ‘멍’처럼 시대의 힘들은 일상에 드리우지만 그 실체를 가늠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가끔은 시대의 문제에 울분을 토하기도 한다. 하지만 자기 생존을 위해 적당히 타협하고, 잘살아보겠다는 향상심으로 버둥대면서, 결국은 다같이 경쟁의 논리에 휘말려가는 숙명인 것이다.
열두살에 자신의 운명을 알아버린 여자아이 진희(『새의 선물』)와 사십이 넘어서야 자신의 운명을 알아차리는 형준(『마이너리그』)의 대조도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다. 여성들의 성장이 사랑과 결혼을 둘러싼 원환적인 구조–어른들의 성과 사랑, 결혼의 실체를 알게 된 소녀는 사랑받느냐 사랑받지 못하느냐로 자신의 인생이 반복될 것임을 깨닫는다–라면 남성적 성장이 직선의 발전논리에 맞물려 있다는 명쾌한 대비가 이 두 작품 사이에 존재한다. 하지만 은희경의 작품들은 단지 대비에만 그치지 않는다. 성과 사랑의 환상이 탈신비화되듯이 발전논리의 허구성 역시도 여지없이 벗겨진다. 끊임없는 향상심은 결코 달성될 수 없는 욕망이기 때문이다. 정복하면 할수록 새롭게 등장하는 공주들을 구하러 떠나야 하는 게임처럼 새로운 목표, 새로운 방식이 우리를 기다리기 때문에 욕망 충족은 지연되고 우리는 언제나 ‘마이너리그’에 속하게 된다.
4. 가족 로망스, 변형과 지속의 힘–『상속』
여성과 남성의 운명이 다르게 구성되어왔고, 그로 인해 서로 갈등하지만, 은희경 작품은 젠더의 문제가 아니라 이들이 꾸려가는 일상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서로의 운명을 이해하지 못하는 소통 불가능성이 성별 사회화에 의해 극대화되는 현상에 착안하지만 그녀의 방향은 직접적인 남녀문제의 해결이 아니다. “아내를 가장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것은 그녀가 불행해진 데에 남편인 나를 비롯하여 그 누구도 잘못한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었다”(「멍」,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 63면)는 서술에서도 명확히 나타나듯이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성별 사회화는 유지될 것이고, 우리의 소통 불가능성도 지속될 것이라는 점이다.
최근에 출간된 소설집 『상속』은 이 문제에 대한 작가의 관심이 좀더 진전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성실한 가장, 사랑스런 아내, 귀여운 아이들이 강아지와 뛰노는 하얀 집은 우리 시대가 보여주는 가족 로망스이고, 이러한 이념형을 추구하는 일은 건전한 삶이자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권장된다는 것이다. ‘건전하고 착하다’는 이념형은 우리 몸에 각인되고, 우리의 생활은 규율화된다. 「딸기 도둑」 「누가 꽃피는 봄날 리기다소나무 숲에 덫을 놓았을까」 「내 고향에는 이제 눈이 내리지 않는다」는 건전함이나 착함이 우리를 어떻게 규율화해나가는지, 그 착함의 이면에 도사리는 위선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밝히는 독특한 작품이다. 은희경은 이 작품들에서 사람들이 행복한 가족의 깃발 아래 모여 획일화된 모습으로 소란을 떠는 이유가 결국 무리 속에 끼여 살아남으려는 자기보호본능 때문이라는 매서운 통찰력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왜 건전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어요. 그 건전함의 기준이 적절하고 자신도 동의할 만해서 그런 건 아닐 거예요. 어쩌면 말 잘 듣는 아이의 선택과 같은 건지도 모르죠. 그게 속 편하니까, 그리고 그렇게 해야 남들에 비해 빠지지 않는 것 같고 사회로부터도 정당한 보호와 이익을 얻으니까. 이른바 선량한 시민의 권리는 전과자나 음주 운전자, 에이즈 환자, 술집 여자들의 권리보다 우선이니 말이에요. 그렇게 본다면 무리에 섞이는 것 역시 살아남기 위한 본능일 수도 있겠군요. 아무튼 저는 그처럼 행복의 깃발 아래 모여 찍어낸 듯 똑같은 소란을 피우는 가족이라는 행태에 넌더리나는 지루함을 느꼈습니다. (「딸기 도둑」, 『상속』 172면)
「딸기 도둑」의 주인공 은혜는 그런 넌더리나는 가족의 행태를 과감하게 무시하는 위악적 인물이다. “저는 착한 사람은 못됩니다.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것도 갖고 있지 않아요”(157면)라는 위악적인 서술로 시작하는 이 작품에서 주인공 은혜는 아홉살에 딸기 도둑으로 호명된 이래 착한 사람이 될 수 없는 삶을 살게 된다. 예쁘지도 않고 가난한 그녀의 삶은 같은 이름의 착한 은혜와 항상 대비된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선함과 악함, 거짓과 진실은 전복되고, 독자는 악한 그녀의 운명에 동조하게 된다. 착하다는 사람들의 잔인한 배제의 원리 혹은 위선 때문에 그녀의 위악은 허약하게 보이고, 측은한 연민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제 인생을 질식할 듯한 규격 속으로 밀어넣은 것은 바로 그 착하다고 하는 사람들이었어요. 자기들이 만든 틀 속에 들어가야 한다고 강요할 때는 언제이고, 뭐야, 이건 잘 안 맞잖아, 라고 구박하면서 한순간 쓰레기더미 위로 가볍게 던져버리는 거죠. (…) 그의 억지나 투덜거림이 있는 곳, 그러니까 겉과 속, 중요한 것과 하찮은 것, 그리고 선과 악이 뒤섞인 전복된 상황 속에 있는 쪽이 저한테 더 편안한 일일 테니까요. (179〜80면)
자신의 삶을 틀에 맞추려 했지만 여지없이 버림받기는 「누가 꽃피는 봄날 리기다소나무 숲에 덫을 놓았을까」나 「내 고향에는 이제 눈이 내리지 않는다」의 주인공들도 마찬가지이다. 가족의 경제적 파탄이나 대인관계의 부적응 등등 이들이 그 틀에서 이탈하게 되는 이유는 다르지만 가족 로망스의 틀에서 밀려난다는 점에서는 서로 닮아 있다. 프로이트의 개념인 ‘가족 로망스’의 원래 의미는 “이제 자신이 낮게 평가하는 부모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대체로 더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들을 부모로 대체하고자 하는” 신경증이라고 한다. 그 개념을 빌려본다면, 권위적이거나 무능한 부모 대신 행복과 풍요의 이미지를 지닌 남편과 아내로 대체하려는 가족 이념이 우리를 지배하는 가족 로망스가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러한 행복의 꿈을 포기하기는 쉽지 않다. 어떤 여자가 착하다, 어떤 남자가 건전하다, 어떤 가족이 행복하다는 이상형이 남녀를 소통 불가능하게 만들고, 사람들을 배제하는 원리임을 안다고 할지라도 삶의 변화는 쉽지 않을 것이다. 사실 성별 사회화와 성별분업에 근거한 가족형태는 지금까지 먹고사는 일에서 이익을 제공해왔고, 그 이익이 설사 환상이라 해도 그것이 ‘착하고 건전한 방식’이라고 생각하는 한 포기되지 않을 것이다. 육체를 보살피고, 종을 번식하는 일이 일상의 근간이 되기 때문에 일상은 이념적인 선언과는 달리 보수적인 선택을 하기 쉽다. 잘먹고 잘사는 일이 포기되기는 쉽지 않은 것이다. 은희경의 작품에는 일상을 유지하고 싶은 우리의 욕망이 이상형에 공모해나가는 과정과, 그리하여 유지·존속되는 일상의 지속성에 대한 통찰이 담겨 있다.
그렇지만 그러한 강고한 지속성과 반복성의 구조를 발견했을 때, 변화를 위한 출구찾기는 어려워지게 된다. 그 때문일까, 최근 은희경은 육체의 권능이 소멸하고, 일상의 지속성이 끝나는 죽음의 이야기들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상속」 「내가 살았던 집」 「태양의 서커스」 등이 그러한 작품들이다. “삶을 지속하기 위해 육체는 늘 보살핌을 받는다. 인간의 삶이 육체가 있을 때까지만 존재하다는 데에 육체의 권능이 있었다”(「내가 살았던 집」, 같은 책 233면)는 말처럼 육체의 권능이 사라지는 싯점에 죽음이 있다. 일상은 육체가 보살핌을 받고 지속되어야 한다는 생물학적 조건에 매여 있기 때문에 지지부진하고 변하기 어렵다는 생각에 이르면, 자칫 죽음을 일상과 대비시킬 우려가 있다. 은희경의 작품에서도 이러한 우려가 없지 않다. 그러나 죽음을 둘러싼 양태를 일상의 한 양식으로 그려낼 수 있다면, 그녀의 작품은 좀더 넓은 성찰의 세계를 발견할 가능성이 있다. 「상속」과 「태양의 서커스」의 차이는 그런 점에서 은희경 작품이 풀어갈 새로운 도전으로 생각된다.
5. 맺음말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은희경의 작품은 성별 사회화된 남녀를 포착함으로써 성과 사랑에 대한 기대, 일과 성공에 대한 희망이 실제 공존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작품에서는 여자들의 운명과 남자들의 운명이 나뉘고 그들의 소통 불가능성이 반영되고 있지만, 이 문제는 단지 남녀관계만의 문제가 아니라 일상의 구조로 의미가 확산된다. 실제 우리가 살아가면서 성과 사랑, 결혼과 일은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성별 사회화로 무리하게 역할을 분담한다 해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결국 서로 다른 이념으로 균열되고 고립된 가족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능력있는 남편과 착한 아내라는 행복한 가족 로망스는 그러한 균열을 포장하고 유지해가는 힘으로 작동한다. 은희경은 그러한 일상의 반복성과 강고함을 만들어내는 이념의 허상을 드러내고 싶어한다.
“나는, 나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어릴 적에는 세상은 이러저러하다고 반듯한 교육을 받고 자랐습니다. 그러나 점점 그 반듯함이 세상의 본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는 그것을 견딜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소설을 쓴 것인지도 모릅니다. 내 소설의 위악은 삶의 그 허상을 걷기 위한 방법입니다”(『한국일보』 2001년 4월 13일자)라고 말하는 작가의 육성처럼 위악과 조롱은 허상을 드러내는 문학적 장치이고 순정성의 반어이다. 그녀의 작품에서 순정성은 미친 여자의 비명이나 자기 환상 혹은 빛바랜 멍으로만 존재한다.
물론 복잡한 일상의 얽힘들을 은희경의 작품이 단순화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의 목소리도 있다. 일상을 구조화할 때 닫힌 구조를 만들 수도 있다는 우려라는 생각이 든다. 고립화된 관계나 착함으로 위장된 삶을 드러내는 데 뛰어난 것에 비해, 순정성이 파편으로만 존재하는 서사적 특성도 그러한 우려를 뒷받침한다. 그러나 우리 문학이 지녀왔던 화해와 전망에 대한 조급증을 거두고 본다면, 일상생활을 유지하고 향상시키려는 욕망이 끊임없이 지배이념에 공모하는 과정에 대한 그녀의 분석은 90년대 우리 문학의 돋보이는 성과라 생각된다. 나는 은희경에 대한 글을 맺으면서 에곤 실레에 대한 당시의 평론 한 구절을 함께 읽고 싶다.
실레는 혼미한 세계에서, 두려움과 공포와 투쟁과 절망에 찌들어 극도로 뒤틀린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다. 그가 그려낸 여인들은 놀랄 만큼 저속하다. 그러나 그는 수치스러운 것을 아름답게 포장하거나 번지르르한 웃음으로 그려내지 않는다는 점에서 도덕가이다. ……지붕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옛 독일의 도시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쓸쓸한 사진첩이나 황량하고 우울한 건물들이 모여 있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초상화가로서 그는 인물의 개성을 꿰뚫는 놀라운 능력을 발휘했다. 그는 영혼을 읽어내는 발견자이며 깊숙이 숨겨진 비밀을 밝혀내는 탐구자이다. (프랭크 휘트포드, 앞의 책 187면)
수치스러움을 아름답게 포장하지 않음으로써, 인물들 안에 감추어진 영혼을 읽어낼 수 있었던 실레처럼 은희경의 작품들이 우리 시대 인물들의 초상화가 되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그러한 기대가 그녀의 작품들 속에서 희망으로 변해갈 때마다 나는 순수한 독자로서 그녀의 작품을 읽는 즐거움을 누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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