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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일상의 권태에서 재난의 상상력으로
하성란론
이선옥 李仙玉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이기영 소설의 여성의식 연구」 「박완서 소설의 다시쓰기―딸의 서사에서 여성들간의 소통으로」 「우리 시대의 에곤실레―은희경」 등이 있음. sun-oklee@hanmail.net
1. ‘여성’이라는 단일한 호명에서 벗어나기
1988년 커피콩 가는 기계를 샀다는 배수아 소설의 한 대목을 오랫동안 잊을 수 없었다. 올림픽이라는 화려한 국가적 사건을 치러냈던 해를 그녀는 커피콩 가는 기계로 기억한다. 어떻게 그런 당찬 개인의 선언이 가능할 수 있을까.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 오래 남아 있었다. 우리가 사람을 기억할 때 어떤 한 장면이나 사건으로 그를 떠올리게 되는 것처럼, 작가들 역시도 하나의 강렬한 인상으로 기억하게 되는 것 같다. 신경숙의 소설은 퇴에 앉아 오래도록 이를 닦는 ‘그 여자’의 모습으로, 은희경의 소설은 셋부터는 다 똑같아라고 말해버리는 냉소적인 정사의 장면으로, 그리고 전경린의 소설은 마녀의 빗자루를 타고 파멸을 향해 돌진하는 열정의 모습으로 떠올리곤 한다. 작가들에 대한 이런 인상은 나의 개인적인 기억이기도 하지만 또한 독서 관례 속에서 형성된 집합적인 기억이기도 하다. 특히 90년대 여성작가들의 경우 단순화가 가능할 정도로 그러한 인상은 집중되어 있다.
왜 이러한 집합적인 기억이 가능한 것일까.1990년대의 문학적 혹은 사회적 여건 속에서 여성을 단일성으로 호명하는 것, 즉 다양한 차이를 희생하고서라도 여성성을 동일성으로 불러내는 데 집중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작품의 창작이나 해석의 과정 모두에서 이루어졌던 여성성에 대한 단일한 호명은 성, 사랑, 쎅슈얼리티에 대한 재인식이기도 하면서 또한 거대서사에 대한 카운터파트로서의 시대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여성작가들의 문학은 사회적으로는 여성의 정치세력화를 가능하게 했으며, 문학적으로는 어떤 역사적 사건들도 일상의 지리멸렬함을 통해 경험된다는 새로운 사실들을 일깨워주었다.
하성란(河成蘭)의 작품을 이야기하는 데 왜 90년대 여성작가들에 대한 기억을 더듬으면서 장황한 서두를 꺼내는 것일까 궁금해할지도 모르겠다. 영화의 기법을 연상시키는 미스터리 기법과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몽환적 이야기, 느슨한 서사를 채우는 치밀한 묘사력 등으로 새로운 문학의 영역을 일구어나가는 작가에게 90년대 여성작가들과의 연계성은 오히려 족쇄가 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이 작가들의 성과를 염두에 두면서 하성란이나 천운영, 이명랑 등 신진 여성작가들을 읽어내는 편이 이들의 변화를 좀더 분명하게 드러내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작가들의 작품을 따라 읽다보면, 어딘가 서로 소통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는데 그 이유는 이들의 작품세계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90년대 여성작가들이 재구성해낸 일상과 여성성에 대한 도전에서 시작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성란은 일상의 심연에 도사리는 재난의 위협과 공포를 불러내 권태로운 일상을 오히려 무시무시한 괴물로 만들어낸다. 이러한 전복적 이미지는 90년대 여성작가들의 권태로운 일상, 유폐된 사적 공간이라는 문법을 과감하게 뒤집어엎는 도전이라 볼 수 있다. 천운영은 여성성을 식물성의 상상력 대신에 동물적 상상력으로 대치하고 있으며, 이명랑은 중산층 여성의 유폐된 공간 대신에 시장통의 열린 공간을 택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이면에 90년대 여성작가들이 재구성한 일상과 여성성이 자리하고 있음을 염두에 두었을 때 이 작품들의 성취와 고민이 무엇인지 분명해지리라 생각한다.
2. 일상―권태에서 위협으로: 『옆집 여자』
하성란은 1967년생으로 1996년 서울신문으로 등단한 이래, 소설집 『루빈의 술잔』(문학동네 1997), 『옆집 여자』(창작과비평사 1999), 『푸른수염의 첫번째 아내』(창작과비평사 2002)를 출간하였고, 장편소설 『식사의 즐거움』(현대문학 1998), 『삿뽀로 여인숙』(이룸 2000), 『내 영화의 주인공』(작가정신 2001) 등을 펴냈다.1999년에는 동인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2000년 한국일보문학상,2004년 이수문학상을 받았다. 간단한 이력에서도 그녀의 작품이 상당히 주목받았음을 알 수 있는데, 특히 『옆집 여자』는 그녀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곰팡이꽃」과 함께 주목되는 작품집이다. 우선 이 작품집에 실린 소설의 특징을 살펴보기로 하자.
이 작품집에는 삶의 유기체성을 잃고 떠도는 도시인들의 군상이 그려져 있다. 덜덜거리며 안간힘을 쓰는 세탁기와 이야기를 하는 여자(「옆집 여자」)와 자기 삶에서 탈출하고 싶어하는 자동차 쎄일즈맨(「깃발」), 강간을 당하고 정신착란 상태에 있는 여자(「악몽」), 서로를 죽이고자 하는 욕망을 품고 함께 야유회를 가는 상가회 사람들(「즐거운 소풍」)이 그들이다. 그 외에도 뜻하지 않은 성장으로 삶의 방향을 잃어버린 체조 선수(「촛농 날개」)와 도둑질을 하는 여자와 함께 탈출하는 상가의 감시원(「당신의 백미러」), 타인에 대한 기묘한 호기심으로 쓰레기 뒤지는 일을 포기하지 못하는 남자(「곰팡이꽃」), 성형미인으로 다시 태어나 과거를 지우고 싶어하는 광고모델(「치약」), 모범생과 날라리의 두 얼굴을 가진 여자아이(「올콩」), 우연한 사고를 계기로 만난 여자와 함께 도시를 떠났지만 자동차 사고로 파국을 맞게 되는 횟집 요리사(「양파」)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서민 아파트와 그 주위를 둘러싼 상가의 생태학(과수원을 배경으로 한 「악몽」만이 예외)이라 할 만큼 하성란이 그려내고 있는 인물군상은 복닥거리면서 얼크러져 살고 있는 우리네 모습에 밀착해 있다.하지만 그들의 관계, 그들의 운명을 그려내는 방식에선 하성란만의 독특한 색채가 느껴진다. 작가는 현미경처럼 세밀하게 그들의 일상에 촛점을 맞춰서 무심코 지나치던 사물들에 각인된 삶의 흔적들을 주워올리고 있다.(영화 「스모크」가 떠오르기도 한다.) 그러고는 고요한 일상이 한순간에 흔들리는 징후와 급격히 무너지는 순간들을 포착해낸다. 고장나기 직전인 세탁기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고,“마지막으로 한번 더 힘을 내자꾸나, 영미야”(12면)라고 격려하는 「옆집 여자」의 위태로운 상황처럼 일상은 덜덜거리며 파국의 징후를 드러내고 있다. 「깃발」의 쎄일즈맨은 전봇대에 허물만 남긴 채 틈새로 사라졌으며, 「촛농 날개」의 체조선수는 급격한 성장으로 자신의 삶에서 밀려나버린다. 이처럼 하성란 소설의 인물은 익숙한 일상이 전복되는 순간 낯선 세계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곰팡이꽃」에 이르면 그 낯선 세계는 썩은 냄새를 풍기는 ‘쓰레기봉투’가 된다.
쓰레기봉투를 뒤지며 일상의 뒷면에 각인된 삶의 흔적을 추적해나가는 하성란의 묘사는 일품이다. 특히 쓰레기봉투에서 쏟아져나오는 쓰레기의 고약한 냄새와 물크러지는 생선 내장에 대한 묘사는 압권이다.
푸른 곰팡이가 핀 밥알과 사놓고 먹지 않아 버린 곯은 감자알들은 집어들기가 무섭게 손안에서 물크러진다. 고약한 냄새 때문에 몇번이나 헛구역질을 했다. 분명 자신이 버린 쓰레기들인데도 쓰레기들은 낯설었다.(175면)
자신의 쓰레기에서 낯선 자신을 보게 된 남자는 타인의 쓰레기봉투를 뒤지며, 옆집 여자의 생활을 훔쳐보기 시작한다. 매일 밤 쓰레기를 뒤지며,퍼즐게임처럼 쓰레기의 흔적을 추적해가는 남자의 행동은 기이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그를 따라 쓰레기의 족보를 추적해가는 재미 또한 적지 않다.
20리터 봉투 한개의 쓰레기는 헤쳐놓으면 욕조의 반이 찬다. 배춧잎과 감자껍질이 미끈둥거리면서 고무장갑 손가락 사이로 달아난다. 냄새가 제일 지독한 것은 단백질류다. 생선 내장과 머리, 먹다 버린 닭조각들이 썩는 냄새는 새록새록하다. 닭뼈가 붙은 고무장갑이 딸려나온다.오른손 고무장갑이다. 핑크색이고 팔목에 마미손이라고 눌린 글씨가 보인다. 남자는 수첩을 뒤적이며 며칠 전 쓰레기 봉투에서 발견한 왼손 고무장갑이 적힌 페이지를 찾는다.3월 23일. 제일제당 비트(750그램). 쿨 담배, 코카콜라, 농심 새우탕면, 마미손 고무장갑(핑크, 왼손)―상표와 색깔까지 똑같다. 이렇게 되면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한집으로 묶는다.(177~78면)
핑크색 마미손 고무장갑 오른손 한짝을 발견하던 날 쓰레기를 추적하던 그 남자는 한달 만에 드디어 그녀의 쓰레기를 발견한다. 그리하여 그녀가 생크림 케이크를 싫어한다는 사실, 그리고 현재 다이어트 중이라는 사실도 알게 된다. 하지만 그녀를 사랑한다는 사내는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다. 그녀가 생크림 케이크를 좋아한다고 믿는 그 사내는 여전히 옆집 여자와 엇갈리고 있다. 남자는 그 사내가 그녀의 쓰레기봉투를 볼 수만 있다면 그들이 헤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가볼러지(garbology), 쓰레기장을 조사하여 사람들의 생활실태를 알아보는 사회학의 수법을 모티프로 삼은 이 작품에서 하성란은 “진실이란 것은 쓰레기봉투 속에서 썩어가고 있”(192면)으며, 쓰레기야말로 “숨은그림찾기의 모범답안”(188면)이라는 선언적인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 작품집을 통해 일상은 물크러지는 쓰레기처럼 다시 낯설어졌고, 재구성되어야 할 대상이 되었다. 현실과 환상을 교차시키는 기법 또한 그것을 낯설게 만드는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다. 그렇다면 일상의 숨은그림찾기, 쓰레기를 통해 일상의 뒷면을 추적해나가는 과정에서 그녀가 새롭게 발견한 세계는 무엇일까. 표층의 안전함, 권태로움의 껍질을 벗기고 하성란이 재발견해낸 일상은 그 심연에 도사리는 위협, 재난에 대한 상상력이다. 추락사고, 실종, 강간, 살인, 도둑질 등 이미 이 작품집에서도 얼핏얼핏 일상을 위협하던 재난은 『푸른수염의 첫번째 아내』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작품화되기 시작한다. 예측하지 못한 재난이 특히 극적인 의미를 띠게 되는 이유는 일상을 안전함, 권태와 고립으로 그려낸 기존 작품에 익숙한 독서의 기대지평을 반전시키기 때문이다. 일상 역시도 수많은 의미화가 가능하다고 할 때 그것이 재난의 상상력으로 진전되는 이유는 안전함과 권태로움이라는 90년대 작품에 대한 반전 때문임이 분명하다.
3. 재난의 상상력: 『푸른수염의 첫번째 아내』
일상의 뒷면을 추적하는 본격적인 작업은 『푸른수염의 첫번째 아내』에서 진행된다. 이 작품집에 실린 작품들은 아버지―딸 관계를 다룬 「오, 아버지」를 제외하고는 모두 재난의 상상력이라 할 만한 소재를 다루고 있는데, 각 작품의 소재만 훑어보아도 흉흉한 사회면 기사를 연상시킬 정도의 사건 사고로 가득 차 있다. 우순경 사건에서 영감을 얻어 단편 「파리」를 썼다고 창작노트에서 밝혔던 것처럼(「삶과 죽음의 경계선」, 『작가세계』 2001년 여름호) 하성란 작품의 재난들은 최근의 사건 사고를 작품으로 불러들인다. 씨랜드 화재 사건을 다룬 「별 모양의 얼룩」을 시작으로 사기결혼(「푸른수염의 첫번째 아내」), 총기사고(「파리」 「밤의 밀렵」), 집단강간(「기쁘다 구주 오셨네」), 실직과 실종(「와이셔츠」), 아이 유괴 사건(「저 푸른 초원 위에」 「고요한 밤」), 한 밤의 폭행 사건(「새끼손가락」), 교통사고(「개망초」) 등 그 재난들은 현실 속 사건들을 연상시킨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현실 그 자체가 아님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내가 재난을 다루는 텍스트들을 ‘재난의 상상력’이라 부르는 이유는 재난 역시도 다루는 방식에 따라 가치화되는 담론이라는 점 때문이다. 흔히 보게 되는 할리우드식 재난영화들은 재난을 일상화된 공포로 경험하게 하면서 보수적인 질서의 회복과 영웅주의를 부추긴다고 비판받곤 한다. 그런 영화에서 재난을 일으키는 주범은 주로 돈밖에 모르는 자본가이거나 이기적인 과학자 혹은 무책임한 관리자 등등 자본주의사회가 근본적으로 안고 있는 불안요소들이다. 이러한 악당들이 처벌되고 영웅이 재난을 극복하면 불안요소가 제거됨으로써 질서가 회복된다. 현실의 불안을 담론적으로 처벌하면서 오히려 안전함의 환상을 지속시켜나가는 것이 재난영화들의 기능이라 볼 수 있다. 화산폭발을 다루었던 「단테스 피크」나 공룡의 습격을 다루었던 「쥬라기 공원」 등을 예로 들면 좀더 쉽게 그 특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다른 재난영화들은 미래사회에 대한 불안을 그리는 경우이다. 문명 발전에 대한 경고를 메씨지로 삼고 있는 이 영화들 역시도 영웅의 등장으로 부분적이나마 위기를 극복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유토피아적 전망이 주를 이룬다.
그렇다면 하성란의 작품에서 그려지는 재난은 어떠한 상상력일까. 크게 두 가지 정도로 그 특성을 정리해볼 수 있는데, 첫째는 재난 자체가 서사화되는 것이 아니라 사후의 경험이 서사의 중심이 된다는 점이다. 「별 모양의 얼룩」은 스물두명의 유치원 아이들을 죽음으로 몰았던 씨랜드 화재사건을 떠올리게 되는 작품이다. 화재의 원인을 가리기 위해 떠들썩했던 현실의 진행과는 달리 이 작품은 아이를 잃은 가족들의 상처에 서사의 중심을 두고 있다. 너무나 평범해 어디에서도 또렷한 흔적을 찾을 수 없는 한 아이의 죽음은 아이의 엄마에게 현실이 되지 못한다. 어디에서도 아이의 죽음을 확인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별 모양의 브로치를 단 아이가 화재 직전에 캠프를 빠져나갔다는 소문에 ‘여자’는 그 아이가 자신의 아이일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가지게 된다. 직장에 다니는 여자는 늘 바빴고 얼룩진 옷을 아이에게 그대로 입혀 보냈던 기억이 떠오르자 별 모양의 브로치가 별 모양의 얼룩일지도 모른다는 기대로 미쳐간다. 하성란의 작품에서 재난은 너무나 급작스러운 것이어서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심리적 공황상태에 머물러 있거나, 죄책감을 동반하거나, 원망과 공격성을 동반하는 사후적 경험이다. 사건 자체가 아니라 사후적으로 재구성되는 서사적 진실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앞서 말한 「별 모양의 얼룩」이 부정과 죄책감을 동반하고 있다면, 「푸른수염의 첫번째 아내」는 “도대체 나는 무슨 잘못을 했을까”(60면)라고 반문하지만 그 재난의 이유를 찾을 수 없는 심리적 공황상태에 빠져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 ‘나’는 세살 연하이며 뉴질랜드 시민권을 가진 교포 남자와 결혼을 한다. 그러나 그 남자는 동성 애인과의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위장결혼을 한 사실이 들통나자 아내를 죽이려 하고, 극적으로 도망쳐 귀국한 ‘나’는 도대체 뭐가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없는 혼란에 빠진다. 그 사건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오동나무 장롱이 실려오는 장면은 그녀가 태어나던 해 오동나무를 심던 부모들의 소박한 꿈과 대비되면서 재난의 광포한 힘을 극대화한다. 그에 비해 「와이셔츠」의 주인공 은옥이 겪는 심리적 상태는 죄책감에 가깝다.8년간의 안전한 결혼이 남편의 실직과 실종으로 한순간에 무너져버렸지만 그녀는 그의 실종이 우연히 날아간 와이셔츠 한장처럼 느껴진다. 옛집 옥상 위에서 나뒹구는 남편의 와이셔츠는 남편의 자살을 암시하고 그녀는 그 와이셔츠를 따라 그의 흔적을 더듬는다.
남편도 이곳에 앉아 여자애가 그랬던 것처럼 옛집을 들여다보았을 것이다. 창문으로 벌꿀색의 불빛이 새어나오고 자지러지는 계집아이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왔을 것이다. 남편은 이곳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늘 욕심이 많던 제 아내를 떠올렸을 것이다. 일주일치의 와이셔츠를 세탁해 새것처럼 다려놓던 아내를 떠올렸을 것이다. 조금은 목을 조이는 와이셔츠를 입고 은행에 나가던 때를 떠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꿈이 건달이라고 말했던 몇년 전의 그 모임을 떠올렸을 것이다.(179면)
평범하고 안전했던 8년간의 일상은 그의 실종으로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기억이 되어버렸다. 삶에 욕심을 부리는 평범한 아내와 다림질이 잘된 일주일치의 와이셔츠, 가지런한 삶이 약간은 권태로워 농담을 건네는 남편, 이 모든 것들이 너무나 평범해서 그의 실종은 마치 거짓말처럼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의 흔적을 따라가며 아내는 실직 후 그가 느꼈을 두려움과 자유로워지고 싶었을 그 마음을 뒤늦게 함께하며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저 푸른 초원 위에」도 재난 후에 죄책감이 드러나는 작품이다. 장애아를 둔 부모의 이야기를 다룬 이 작품은 아이 대신 재롱을 떨던 개를 도둑맞자 이를 찾으러 다니다가 집에 방치한 아이가 유괴되는 기묘한 이야기이다. 무심결에 방치한 아이가 유괴당하자 부모는 자신들이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인지 그제서야 깨닫게 되지만 이미 아이는 사라지고 만 상태이다.
이처럼 하성란의 작품에서는 재난 자체가 다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재난이 일어난 후 그것이 경험되는 방식이 서사의 중심이 된다. 그리하여 사건들은 현재의 제한된 시점에서 왜곡정보나 과소정보에 의해 재구성되며, 마치 떠도는 유령처럼 실체를 잡을 수 없는 무엇인가가 되어버린다. 유난히 실종, 유괴, 기억상실 등이 많이 다루어지는 것도 재난을 미스터리로 만드는 한 장치로 보인다. 재난이 이처럼 실체를 잡을 수 없는 무엇인가가 되었을 때 일상의 안전함은 훨씬 불안하고 허약한 것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재난이 일상의 심연에서 유령처럼 떠도는 무엇이라면 할리우드식의 통제력을 발휘하는 자만은 불가능해진다. 그녀의 소설에서 재난을 당한 이들이 절대적인 상처, 회복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 이유도 재난을 통제할 수 없는 무력함 때문이다. 그러한 오만한 통제력을 거부하는 것이 하성란 소설의 장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 통제불능 상태는 자칫 재난을 어쩔 수 없는 숙명으로 만들어낼 우려가 있다. 다음 장에서 다시 논하겠지만 일상이 재난의 상상력이 되면서, 논리의 세계로 재구성해낸 90년대 여성작가들의 일상이 다시 숙명으로 돌아갈 우려 또한 적지 않다.90년대 여성작가들은 일상을 여성의 유폐된 공간, 공적 영역의 바깥에 존재하는 타자의 공간으로 그려냈다. 이러한 작품들은 남성중심의 사회가 일상을 통해 재생산되고 지지된다는 점을 설명해내는 데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일상이 재난의 우연성, 광포함에 지배되는 낯선 괴물이 되어버린다면 일상은 다시 숙명의 세계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둘째로는 재난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집단적 공모관계를 다루는 경우인데, 이 작품들은 집단의 배타성으로 이방인에게 가해진 폭력과 재난을 삼켜버리는 침묵의 카르텔을 드러내고 있다. 이 작품들에 좀더 주목하고 싶은데 왜냐하면 재난의 한 측면이 우연성, 운명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면 다른 한 측면은 여전히 논리의 세계에 기인한다는 아주 소박한 사실을 이 작품들이 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건 사고가 날 때마다 인재(人災)냐 천재(天災)냐를 따지며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이 우연과 필연 모두가 작동하는 재난의 속성을 반영하는 것임은 물론이다. 우순경 사건이 모티프가 된 「파리」, 밀렵꾼들의 총기사고를 다룬 「밤의 밀렵」, 집단강간을 다루고 있는 「기쁘다 구주 오셨네」 등이 그러한 작품들인데 그중에서도 「파리」는 매우 흥미로운 작품이다.
운곡리 청봉부락의 씨족마을로 전근을 오게 된 사내는 씨족마을의 희생양으로 선택된다. 외지에서 바람난 처녀를 감쪽같이 속여 그에게 떠맡기고는 도리어 그에게 책임추궁을 하고 비난하는 마을 사람들에게 떠밀려 그는 결국 총기난동 사태를 벌이게 된다.“외부인이 오면 이 마을 전체가 커다란 개가 되”는(79면) 이름도 얼굴도 비슷비슷한 청봉부락은 집단적 배타성이 어떻게 재난을 불러오는지 또 재난을 중심으로 어떻게 배타적 집단을 형성하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하성란처럼 현실의 사건에서 소재를 취재하는 경우 현실적 맥락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데 때로는 현실과의 ‘겹쳐읽기’가 텍스트의 의미를 풍성하게 하기도 하고, 때론 협소하게 만드는 작용을 하게 된다. 우순경 사건은 한 개인의 난동으로 취급되었던 현실의 담론과 대비되면서 작품 속에서 오히려 집단적 배타성이라는 그 이면을 함께 의미화하는 긍정적인 효과를 지니게 된다. 현실이 오히려 우연성을 강조했다면 소설은 여기에 필연성의 구조를 덧붙여놓은 셈이 된다. 재난의 상상력이 운명으로 귀착되는 것,혹은 완벽한 통제의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 모두 답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재난을 화두로 삼은 작가의 가장 큰 고민이 될 터인데 그 점에서 「파리」는 새로운 양식을 열어줄 가능성을 보이는 작품이다.
4. 권태와 재난의 빈틈 채워읽기: 최근작의 모색
최근 하성란의 작품은 재난 자체를 다루고 실험하기보다는 다시 재난과 일상 사이에 대한 고민으로 옮겨가는 것 같다. 어찌 보면 재난이 운명이냐 의지냐라는 딜레마에 빠지는 주제에서 조금 선회해서 일상의 권태와 재난의 위협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얽혀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권태만으로도 재난만으로도 일상을 설명할 수 없다는 어려움이 90년대 여성작가들과 하성란의 작품에 있다는 것이다. 하성란의 해결방식은 현실과 환상의 기묘한 줄타기로 보인다. 현실과 환상의 교차는 이전의 작품에서도 지속되어온 기법적 실험인데, 최근작에선 환상의 지배력이 훨씬 강해지는 것 같다.
먼저 최근작의 소재를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중편 「여우여자」(『문예중앙』 2001년 겨울호)는 여우의 환생이라는 환상적 기법으로 살인사건을 추적하는 미스터리 소설이고, 「자전소설」(『문학사상』 2002년 8월호)은 살인사건을 둘러싼 집단적 공모관계를 다루고 있다. 「극지호텔」(『파라21』 2003년 봄호)은 약물중독으로 인해 삶의 나락으로 떨어진 가수의 이야기를, 「그것은 인생」(『실천문학』 2003년 봄호)에서는 어린시절 유괴당해 곡마단 칼잡이가 된 아이 이야기를 다룬다. 「그림자 아이」(『현대문학』 2003년 9월호)는 교통사고로 기억을 잃은 남자의 기억찾기가, 「무심결」(『창작과비평』 2003년 여름호)은 무심결에 잘못 읽은 오독의 이야기가, 그리고 「낮과 낮」(『작가세계』 2004년 봄호)은 남편의 죽음과 그 원인을 밝히려는 아내의 추적 여행을 다루고 있다. 「무심결」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기존의 작품과 거의 동일한 소재를 다루고 있고 서사기법도 유사해 보인다.
그러나 이 작품들을 읽다보면, 환상과 현실을 겹쳐놓는 서사기법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으며, 그에 따라 전혀 다른 주제로 바뀌고 있음을 알게 된다. 물론 앞서의 작품집들에서도 환상적 기법이 작품에 지속적으로 도입되어왔다. 『옆집 여자』의 작품들을 예로 들어보아도 환상은 허상에 불과한 일상의 실체를 얼핏 비추어주는 진실의 거울과 같은 기능을 하고 있다. 특히 「악몽」의 경우 환상이 실체이고 현실이 허상인 전도된 현실이 그려지는데, 강간을 모티프로 한 이 소설에서 현실과 환상은 팽팽한 긴장상태를 이루고 있다. 분명 강간을 당하고 그 사내를 죽여 배밭에 묻었다고 믿고 있지만, 그 넓은 배밭 어디에서도 시체의 흔적은 찾을 수 없고, 아버지는 낮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악몽을 꾸었다고 말해준다. 안전한 삶, 아버지의 잔잔한 목소리와 단정한 식탁,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환각이고 강간과 살인의 환각이 실제라는 짐작은 독자들의 ‘채워읽기’에 의해 사실로 드러나고 의미화된다. 현실적 맥락들이 이미 강간과 살인을 실재로 해석할 만한 조건들을 마련하고 있기 때문이다.
「악몽」에서 이미 시작된 것처럼 하성란의 작품은 일상과 재난을 현실과 환상, 안전한 권태와 위협으로 교직하는 기법을 시도하고 있다. 그리고 독자들은 현실의 맥락을 참조로 재난과 위협이 환상으로 그려질 때도 그것을 현실의 한 측면으로 해석해낸다. 그러한 채워읽기의 가능성이 열릴 때 하성란의 소설은 훨씬 풍성해진다. 그러나 재난의 상상력은 안전함의 허상과 그 이면의 공포 구조를 드러내주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재난의 우연성, 운명성에 의해 모든 것이 지배되어버릴 위험이 늘 존재한다.“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상상인가요?”(280면)라고 묻고 있는 「자전소설」의 한 대목처럼 그녀의 최근작들은 점점 환상과 현실의 팽팽한 긴장 대신 환상의 힘에 압도되어가는 느낌이 든다. 여우의 환생을 다루는 「여우여자」나, 주위 사람들의 모두 다른 기억으로 자신을 재구성해야 하는 기억상실증 환자의 혼란을 다루는 「그림자 아이」 역시 그러하다. 어린시절 유괴되어 서커스단 칼잡이가 된 남자가 무념의 지경에서 칼을 던지는 「그것은 인생」도 서커스단의 몽환적 분위기와 어우러져 환상의 힘이 더욱 강렬하다. 환상적 기법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환상이 억압된 것들의 귀환이라는 문구를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현실의 음화(陰畵)가 환상임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하성란의 환상 세계에는 재난이 담겨 있고, 그 재난이 늘 운명성으로 귀착될 위험성이 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여우여자」의 징후는 좀 우려스럽다는 말이다.
「여우여자」는 1999년,1985년,1973년 세 개의 시간대가 교직되면서 살인사건이 추적되는 작품이다. 각각의 시간대는 이형진의 익사체가 발견된 싯점, 이형진이 구미호 임미화와 다시 만난 싯점, 그리고 이형진이 다섯살 때 ‘여우여자’와 함께 놀던 싯점이다. 여우여자는 자신이 오백년을 살아온 구미호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형진을 죽임으로써 인간이 되기를 포기하고 이 살인사건을 추적하던 형사 ‘이’와 함께 새로운 삶을 찾아 어디론가 사라진다. 이 작품에서 재난은 구미호라는 비현실적 존재가 되어버려서, 환상이 더이상 현실과의 긴장관계를 이루지 못하게 된다. 일상의 두 측면을 채워읽을 수 있는 가능성 자체가 차단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생」에서도 아이 유괴사건을 다루지만 그것이 현실을 위협하기보다는 슬픈 운명으로 다루어진다. 아이 유괴를 다룬 「고요한 밤」이나 「저 푸른 초원 위에」와는 달리, 「그것은 인생」의 유괴사건은 환상인지 실제인지 기억이 모호하게 되면서, 곡마단의 칼잡이로 살아가는 팽팽한 긴장상태에 틈입할 여지가 없다.“쇼가 시작되면 남자의 앞에는 보이지 않는 커다란 과녁이 있을 뿐이다. 과녁 중앙엔 일곱살짜리만 한 엄지장군 톰이 서 있다. 열 개의 칼을 다 던질 동안에는 어떤 잡념도 끼어들지 않았다. 집 생각도 어머니 생각도 잠시 잊는 순간이다.”(272면) 작품의 결말부분인 이 대목은 환상적이고 기괴한 이미지를 만들어내면서 현실의 삶이 환각임을 명시해버린다. 그리고 실제의 기억이 차단되기 때문에 칼잡이는 환각의 상태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비극적 운명에 놓여 있다. 재난은 이제 운명이 되고 우리는 슬픈 운명에 갇힌 곡마단의 칼잡이가 된다.‘반 호프 슈트라쎄’라 불리는 도시에서 거짓말처럼 주검이 되어버린 남편을 추적하는 「낮과 낮」도 재난이 슬픈 운명이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녀는 죽음의 의미를 찾는 데 실패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그 죽음에는 특별한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림자 아이」의 기억상실은 이러한 현실과 환상에 대한 작가의 직접적인 관점을 읽어낼 수 있는 작품이다.“기억허나”로 시작되는 주변사람들의 진술을 들을 때마다 ‘그 남자’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기억으로 기워진 허수아비”(108면)라고 느낀다. 그와 함께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썬더보이’라는 인물도 허깨비 같기는 마찬가지이다. 영화배우였다는 사실만이 지워지고 그가 맡았던 수많은 역할이 ‘그’가 되어버린 썬더보이 역시도 무엇이 환상이고 무엇이 실제인지 구분할 수 없는 혼란된 인물이다. 인물들의 혼란된 기억을 통해서 하성란은 사실과 상상, 환상과 실제를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라는 새로운 주제로 나아가고 있다.‘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상상인가요?’ 계속 타인의 새로운 기억으로 대치되는 기억상실증 환자처럼 그녀의 소설에서 환각은 점점 더 슬픈 운명의 힘을 키워가고 있다.
이 작품들의 변화를 보면서, 일상이나 정체성의 문제를 단일성으로 호명해내는 것에 대한 지나친 거부감이 모든 것의 해체로 나아가는 것은 아닌지, 혹은 그러한 해체의 과정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발견해갈 것인지 궁금해진다. 일상을 논리적인 세계로 단성화하려는 기존의 작품을 넘어서는 하성란의 소설은 우리에게 분명 새로운 상상력이다. 특히 재난의 상상력은 일상을 재구성하는 수많은 방식들이 가능함을 시사한다. 그러한 도전이 어떻게 단성화의 자장을 넘어서 갈 것인지 하성란의 새로운 작품집이 벌써부터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