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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갈림길에 선 한국 시와 시비평

 

고도자본주의 시대의 사회생태적 상상력

김진경·하종오·백무산의 근작시

 

 

임홍배 林洪培

문학평론가, 서울대 독문과 교수. 주요 평론으로 「시와 혁명」 「주체의 위기와 서사의 회귀」 「현실주의 논쟁의 교훈과 노동소설의 진로」 「괴테의 세계문학론과 서구적 근대의 모험」 등이 있음. limhb059@snu.ac.kr

 

 

1

 

김진경(金津經)은 『슬픔의 힘』(문학동네 2000)에 부친 자서(自序)에서 “세상이 사람의 속도를 넘어 사물의 속도로 진입한” 지 이미 오래된 자본의 시대에 맞서는 시의 존재방식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속도가 빨라지면 차도의 폭이 점점 좁아져 마침내 하나의 선 속에 사라지듯이 나날이 빨라지는 속도가 모든 풍경과 관계를 소멸시킨다.

이 속도 속에서 시란 과연 무엇일까?

속도가 뱉어낸 모래알로 이루어진 거대한 사막, 시는 그 사막 위를 지루하게 걷고 있는 낙타인지도 모르겠다. 낙타는 거대한 초원을 꿈꾼다. 그 꿈을 포기한 건 아니지만 이제 가끔 숲 한구석에 웅크리고 온몸으로 세계를 느끼는 짐승에게만 허용되는 죽음의 문과 그 너머의 영원한 시간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러한 발언은 시집 『지구의 시간』(실천문학사 2004)에까지 이어지는 시적 사유의 전개양상을 명료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요컨대 모든 인간관계와 사물의 질서를 자본의 운동 속에 포섭시키는 현실을 다름아닌 자연사(史)의 과정으로 파악하는 방식이다. 90년대 이래 시단에 유행처럼 번진 자연서정시에서 흔히 자연은 현실의 피안으로 설정되지만, 김진경의 사회생태적 상상력에서 자연은 현실에 대한 비판적 성찰의 매개물인 동시에 현실의 작동원리 자체로 내재화된다. 그래서 시인은 자연사를 관통하는 생성소멸의 철칙이 어떻게 사회현실의 내적 원리로 작동하는가를 ‘죽음의 문턱’에서 ‘온몸으로 세계를 느끼는 짐승’의 감각으로 감지한다. 가령 “천천히 시멘트를 되새김질하는/믹서기를 등에 얹고/거리를 질주하는 레미콘차”는 “지질학적 자본의 시대가 발명해낸/육식공룡”(「레미콘차」)으로 표상된다. 더 많이, 더 높이, 더 빨리 뭔가를 쌓아올리기 위한 레미콘의 질주에서 시인은 제어되지 않는 포식성으로 인해 멸종한 육식공룡의 질주를 보는 것이다. 이 ‘육식공룡’은 일단 현실의 추상을 통해 얻어진 관념의 유비물이지만, 관찰자인 ‘나’까지도 육식공룡의 먹이사슬 속에 위치시킴으로써 그것은 다시 관념이 아닌 현실이 된다.

 

그놈이 거침없이 곁을 지날 때면

맹렬히 움직이고 있는 그놈의 이빨

바퀴 밑으로 나는 빨려들어가버린다

그리고 잘 되새겨진 시멘트 범벅을

소화액처럼 확 뒤집어쓴다

 

나는 나날이 잘 소화되고 있다

―「레미콘차」(『슬픔의 힘』) 부분

 

이렇게 ‘나’의 일상을 규제하는 불가항력을 일단 현실로 승인하는 ‘나’는 마침내 육식공룡의 ‘살점’이 되어 어쩔 수 없이 공룡의 속도에 끌려가면서도 “매일매일 그놈의 위장 속 같은/아파트로 돌아와 몰래몰래 탈출을 꿈꾼다”. 그렇지만 시의 마지막 연에서 유보하듯 “시멘트 범벅 속에서 날아오르는 것”은 사막의 낙타가 초원을 꿈꾸는 것처럼 지난한 일이다. ‘죽음의 문 너머의 영원한 시간’을 느끼는 일은 온몸의 촉수가 죽음의 문을 향해 열려 있을 때만, 그리하여 자연사의 일부인 인간사회가 자연생태적 순환의 바깥에 있지 않다는 것을 온몸으로 체감할 때만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김진경의 시가 ‘육식공룡’의 다양한 변주를 시도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의 시에서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들이 종종 등장하는데, 물고기는 청동의 물속을 헤엄쳐다니고(「청동 물속을 헤엄쳐다니는」, 같은 책), 잡식성의 인간은 끈끈이주걱으로 변종이 되며(「사람도 때로는 끈끈이주걱일 때가 있다」, 『지구의 시간』),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에 힘입어 지구적 차원의 ‘청정’ 관광상품이 된 자연공원의 사자와 홍학은 환경주의자가 먹다 버린 빵조각의 형상으로변형된다(「내셔널 지오그래픽」, 『슬픔의 힘』). 이 그로테스크 시편들은 ‘모든 풍경과 관계를 소멸시키는’ 사물화의 원체험에 대한 미메씨스를 통해 자본주의적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일체의 삶의 방식을 낯설게 보여주면서 지금과는 다른 삶의 방식을 절박하게 촉구하고 있다.

자연과 인간, 인간과 기계를 동일한 생태계의 벡터(verctor)로 포착하는 이러한 시적 사유는 「레미콘차」에서 보듯이 주로 이질적 시공간을 중첩시키는 방식을 취한다. 다음 시도 그런 경우다.

 

뜯어먹다 만 초식동물의 몸뚱이처럼

노숙자 하나 건너편 벤치에서 입을 벌린 채 혼곤히 잠들어 있다

 

주위 풀밭이 온통 핏빛이다

―「겸손한 여생」(『슬픔의 힘』) 부분

 

「레미콘차」 같은 시가 다분히 산문적 진술로 기우는 것과 달리 이 시는 일상의 한 장면을 간명한 이미지로 응축하고 있다. 노인네들이 장기를 두고 비둘기 모이도 주는 한가로운 공원풍경에서 시인은 얼핏 “영양들이 한가하게 되새김질하는 초원”을 떠올리지만, 그 평화로운 일상의 심연 사이로 노숙자의 곤핍한 모습이 “뜯어먹다 만 초식동물의 몸뚱이처럼” 처절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그 몸뚱이가 일순간 ‘핏빛 풀밭’의 대극적 이미지로 시의 전경에 클로즈업되면서 나날의 안위조차도 생존의 바닥으로 내몰리는 사람들을 양산하는 사회질서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섬뜩하게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일상의 작은 단면을 사회적 차원으로 확대하여 투시하는 방식은 최근 시집 『지구의 시간』의 표제작에서 일상의 축과 지구적 시간이 엇물리는 양상으로 펼쳐진다.

 

애기배추를 갉는 토끼와

갉아먹힌 애기배추 그루터기에 속이 상하는 나와

통학버스와

이 아침밥의 시간들과

그 위에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폭탄을 퍼부을 수 있는 시간들과……

―「지구의 시간」 부분

 

각각의 시행은 한 개인의 일상에서 서로 무관해 보이는 원근의 관심사를 나열하고 있다. 인용된 부분의 앞에 각 시행의 정황이 길게 서술되어 있지만, 그 대목까지 함께 읽어보아도 이 마지막 연에서 병치된 상황들 상호간의 연결고리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미완의 종결로 그런 궁금증은 더욱 증폭된다. 알다시피 이처럼 우발적 계기들의 동시적 병존을 즐겨 구사한 것은 초현실주의자들이다. 그들이 시간의 흐름을 그 어떤 인과율로 구성하지 않고 우연의 연쇄로 해체시킨 것은 포디즘(Fordism) 시대에 진입한 자본의 작동방식이 개개인의 삶을 표준화하는 경향에 대한 저항의 의미를 지니며, 그들이 자본주의적 삶의 합리화 기제에 의해 억압된 무의식의 분출에 골몰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그런데 「지구의 시간」 같은 시는 외형상 그런 초현실주의적 어법을 빌리는 듯하면서도 문제의식으로 보면 오히려 그 역방향을 지향하고 있다. 동시적 우발사건들의 상호연관성에 대한 설명을 고의로 생략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전체를 통괄하는 막강한 힘의 실체를 더욱 강하게―말하자면 ‘보이지 않는 손’의 위력으로―환기시키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시의 심드렁한 어조가 과연 그런 생각의 표현에 적합한 것인지는 잘 가늠이 되지 않는다.

앞에서 살펴본 시들이 산문적 확장을 꾀하는 것과 달리 다음 시는 절제된 서정적 깊이를 통해 ‘죽음의 문 너머의 영원’을 포착한 경우다.

 

1

촛불 연기처럼 꺼져가던 어머니

 

“바―압?”

마지막 눈길을 주며

또 밥 차려주러

부스럭부스럭 윗몸을 일으키시다

 

마지막 밥 한 그릇

끝내 못 차려주고 떠나는 게

서운한지

눈물 한방울 떨어뜨리신다.

 

2

그 눈물

툭 떨어져 뿌리에 닿았는지

이팝나무 한 그루

먼 곳에서 몸 일으킨다.

 

먼 세상에서 이켠으로

가까스로 가지 뻗어

경계를 찢는지

 

밥알같이 하얀 꽃 가득 피었다.

―「이팝나무 꽃 피었다」(『지구의 시간』) 전문

 

임종의 순간에도 자식에 대한 사랑을 다 베풀지 못한 어머니의 눈물이 이팝나무에 꽃을 피우는 생명의 힘으로 현재화되고 있다. 죽음의 속도를 만들어내는 크로노스(chronos)적 시간은 이 사랑의 기억술을 통해 죽음까지도 넘어서는 영원한 현재에 자리를 내주게 된다. 이 영원은 당연히 삶의 초월이 아니다. 그것은 삶과 죽음, 인간과 자연의 경계를 찢고 “먼 세상에서 이켠으로” 생성되는 충일의 체험이기 때문이다.

김진경의 근작시들은 변화하는 삶의 조건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대응을 보여준다. 필자는 거북이의 행보로 시와 현실의 단단한 접목을 모색하는 그의 시정신에 기본적으로 공감하고 신뢰가 가지만, 새로운 모색의 과도기를 감안하더라도 적지 않은 아쉬움이 남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의 시는 견고한 시적 사유의 도정에 자리잡고 있지만 요컨대 삶의 구체성으로 육화된 것이라 하기는 어렵다. 사회생태적 상상력이 발휘된 시편에서 일상의 정황과 그 이면이 포착된 것까지는 좋지만, 정작 그 일상에 어른거리는 인간의 모습은 거의 예외없이 사물의 그림자처럼 추상적 익명성을 띠고 있다. 이러한 결핍은 물론 주관의 개입을 배제하고 사물화된 삶을 즉물적으로 포착하기 위한 의도의 결과일 테지만, 그러한 의도의 과잉이 오히려 현실주의적 탐구정신에 상반되는 양상을 노출하고 있는 것이다. 시에 등장하는 사물과 인간이 추상적 익명의 틀에만 갇혀 있을 때, 시의 이미지는 그 직접적 쓰임새와 무관하게 상품 브랜드처럼 교환가능한 기호가 될 수도 있다. ‘죽음의 문’은 시인 자신이 말한 것과 다른 맥락에서 시의 언어를 향해서도 늘 열려 있다는 것이 오늘날 시의 존재조건이기 때문이다.

 

 

2

 

하종오(河鍾五)의 시집 『무언가 찾아올 적엔』(창작과비평사 2003)을 펼치면 강화 섬에 둥지를 튼 시인의 처소와 그 주변풍경이 선연히 보인다. 유현한 서정성과 날카로운 현실인식이 돋보이는 이 시집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편에 드는 다음 시를 보자.

 

밭가에 심긴 등나무는

가지를 뻗어도 휘감을 나무가 없어

서로 꼬며 꼬이며 휘어 오르다가 멎어서

사방으로 잔가지들 하늘거린다.

저 홀로 직선으로 허공을 오르지 못하자

등나무는 그 푸른 힘을 밑으로 내려 퍼뜨린다.

저 홀로 땅속에 곡선으로 휘어 뻗은 뿌리는

팔방으로 이리저리 퍼져나가다가

불쑥불쑥 밭고랑에 새 가지를 돋아올린다.

새 가지는 새순 내어 사방팔방을 더듬어보다가

휘감을 나무가 없으면 구불구불 엎드린다.

누가 밭가에 등나무를 심었을까.

저 홀로 흙바닥에 직립하지 못한 사람이었을까.

그이 온몸도 기댈 데 없어 휘었을 게다.

―「살아서 가는 법」 전문

 

우리가 아는 등나무는 조경의 용도 때문에 사람이 만들어놓은 버팀대에 의지하여 줄기를 뻗는다. 인공에 의해서만 이름값을 한다는 점에서 인간에게 점유된 자연의 한 표본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시의 등나무는 밭가에 심겨 의지할 곳을 잃고 있지만, 그것이 오히려 스스로 살아가는 법을 터득하는 조건으로 전화된다. 그리하여 자생독화(自生獨化)의 생명력을 회복하는 반전의 계기는 “저 홀로 직선으로 허공을 오르지 못하자/(…)/저 홀로 땅속에 곡선으로 휘어 뻗은 뿌리”의 생생한 대비로 묘사되고 있다. 앞의 행이 말하는 수직상승의 운동은 「괴로운 수직」 같은 시에서 직설적으로 언명하듯 인간사에서 언제나 위계질서의 더 높은 곳에 올라서려는 욕망의 움직임이다. 등나무가 사람의 손을 타거나 다른 식물의 영역을 침범하여 줄기를 뻗는 생리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이 시의 등나무는 그런 상승욕구에 포획된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푸른 힘을 밑으로 내려 퍼뜨”림으로써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고도 오히려 더 활기차게 스스로 휘묻이를 하고 있다. ‘밭고랑’에 ‘불쑥불쑥’ 돋아나는 새 가지는 건강한 노동의 대지에 뿌리내린 삶의 이치와 인간이 본래의 자연을 회복하는 일이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는 눈부신 장면이다. 따라서 시의 마지막은 이 등나무를 심고 밭을 경작한 무명의 농사꾼의 고단한 생애에 대한 추념인 동시에 기댈 데 없이 생존의 무게에 짓눌린 사람들을 향한 깊은 애정의 고백이자 그들과 우리 모두가 함께 보듬어야 할 희망의 방향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하종오 시의 또다른 갈래는 자연의 눈으로 도시의 삶을 보고 있다.

 

먼 산이 보기엔 아침에 수천 명의 아이들을 부려놓은 엘리베이터는

간밤 엎치락뒤치락하던 수천 명의 남녀들의 오르가슴을 싣고

낮에는 위로 위로만 솟구쳐 올라간다

먼 산은 그들을 보면서도 상대적으로 낮아지는 자신은 못 본다

―「고층아파트」 부분

 

간밤의 끈끈한 육체적 욕망이 대낮에는 생존경쟁의 기계의 욕망으로 이어져서 앞서 말한 수직상승의 운동을 반복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마지막 행의 복합시선이다. 매일같이 동물적 본능을 발산하고 다시 부와 권세를 위해 몸을 파는 욕망기계의 반복운동이 ‘먼 산’의 관점에서 거리를 두고 볼 때만 그 실상대로 보일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먼 산이 상대적으로 낮아지는 자신은 못 본다는 것은 인간세상의 높낮이에 무심한 자연의 자립적 실재를 상기시키기도 하지만, 고층아파트로 표상되는 인간세계가 위로 치솟을수록 문자 그대로 자연은 스스로에게도 보이지 않는 존재로 파묻히고 망각되는 것이다. 시의 여백을 좀더 확대해석하면 그 먼 산의 눈 즉 대자연의 눈을 잃고 뭔가를 탐하는 데만 길들여진 인간의 눈은 자신이 더 높이 오를수록 실은 낮아지고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하는 형국으로 읽히기도 한다.

앞의 시집과 한 해 시차를 두고 나온 『반대쪽 천국』(문학동네 2004)에는 이런 생각을 더욱 급진적으로 밀고 간 시들이 있다. 소비사회의 천국인 대도시의 삶을 시집 제목처럼 ‘뒤집어진 천국’의 풍경으로 드러내는 방식이 그것인데, 「카트 천국」이라는 시도 그런 경우다.

 

여인이 나무늘보같이 아기 안고 상품을 눈여겨보며

카트를 천천히 밀고 간다

여인이 얼룩말같이 고개 쳐들고 진열대를 쳐다보며

카트를 천천히 밀고 간다

여인이 사자같이 머리카락 흔들며 가격표를 노려보며

카트를 천천히 밀고 간다

 

이렇게 몇번을 더 반복한 끝에,

 

사냥을 끝내고 숲속을 빠져나가는 야생동물떼같이

계산대를 지나가는데

카트들이 그녀들을 재빨리 끌고 나가서 다 비워내고

다른 그녀들이 올 때까지

알을 낳은 지네같이 편안히 있는다

 

먹이를 노리는 짐승의 당당함으로 카트를 ‘천천히’ 밀고 갈 때는 인간이 스스로의 주인인 것 같지만, 카트들이 그들을 ‘재빨리’ 끌고 나가서 비워내는 순간 사태는 역전되어 인간이 자본의 증식과정에 몸을 바치는 소모품임이 확인된다. 자본의 운동을 실어나르는 카트가 줄이어 늘어선 모습을 지네에 비유한 것도 ‘얼룩말’이며 ‘사자’ 등과 절묘하게 대비된다. 굳이 사족을 달자면 지네는 다족류답게 부산히 움직이지만, 먹이사슬의 꼭대기에 있는 인간의 눈으로는 도대체 뭘 먹고 어떻게 번식하는지 알아차리기 어려울뿐더러 홑눈만 있거나 아예 눈이 없는 개체인 것이다. 천생 인간의 뒤집어진 모습이다. 이런 시는 전통적인 시의 어법으로 보면 시의 어떤 한계점에서 시가 된 경우라 할 수 있다. 시집에는 ‘반대쪽 천국’ 연작이 여러편 실려 있지만 이런 유형의 시가 같은 형태로 더 지속되긴 어려울 것이다. 파격은 모방될 수 없는 것으로 남을 때만 진가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이 시집에도 「살아서 가는 법」의 시풍을 떠올리게 하는 시들이 상당수 눈에 띈다. 김진경의 「이팝나무 꽃 피었다」를 떠올리게 하는 「옹알이」라는 시를 보자.

 

늙은 어미에게 업혀 나들이 가던

늦둥이 아기가 감나무 곁을 지나갈 때 옹알거리니

감꽃 하나가 피어났다

그걸 모르는 어미가 난들 보며 그냥 가자

아기가 더 자주 옹알옹알 옹알거리니

가지마다 감꽃이 스르르 피어났다

감꽃이 떨어지는데도 말문 아직 안 트여서

늙은 어미에게 안겨 나들이 가던

늦둥이 아기가 감나무 곁을 지나갈 때 웅얼거리니

감 하나가 커졌다.

그걸 모르는 어미가 난들 보며 그냥 가자

아기가 더 크게 웅얼웅얼 웅얼거리니

가지마다 감이 알알이 커졌다

감나무 주인이 그걸 다 눈치채고는

늦둥이 아기가 늙은 어미에게 업혀 나들이 갈 적에

짐짓 입 한번 맞추려고 길에 나와 서 있으면

어느새 아기는 아앙 울음보만 터뜨렸다

감이 투욱 떨어졌다

어미에게는 난들이 누르스름해져 보이던 날

―「옹알이」 전문

 

말문을 트려는 늦둥이의 옹알이가 감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경이 아닌 경이가 너른 들녘의 벼가 익기를 기다리는 늙은 어미의 설렘과 어우러져 한폭의 아름다운 그림으로 펼쳐져 있다. 그렇지만 이 그림의 아름다움은 어쩐지 사물에 직핍한 감각이라기보다는 미리 소화된 감각으로 빚어진 느낌을 준다. 그런 서정성이 농익어서 깊은 맛을 낼 수도 있지만 이 시집에 수록된 시들은 대체로 그런 기대에 못 미치는 편이다. 특히 시골동네 풍경을 담은 다수의 전원시편은 일상의 담담한 스케치에 그치고 있어 밀도와 긴장이 현격히 떨어진다. 시집의 2부는 이주노동자의 애환을 다루는데, 자연서정의 교착상태를 타개하기 위해서라도 그런 시도에 좀더 주력해서 현실 구석구석으로 시인의 발길과 눈길이 가닿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때로는 자연에 관한 ‘앎’까지도 과감히 벗어던지고 사람살이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직시할 때 인간사회가 회복해야 할 자연 또는 그 무엇이라도 더 잘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우리가 아는 자연의 척도로는 설명하기 힘든 고통과 모순으로 병들어 있지 않은가.

 

 

3

 

백무산의 시집 『초심』(실천문학사 2003)과 『길 밖의 길』(갈무리 2004)에 일관된 사유는 좀 단순화해서 말하면 권력화되는 모든 것과의 싸움이라 할 수 있다. 80년대의 백무산이 노동자의 편에서 권력과 자본에 맞서는 싸움에 투신했다면, 지금 백무산은 싸움의 주체인 나 또는 우리가 과연 권력과 자본에 의해 관리되는 사회체제 혹은 삶의 방식으로부터 자유로운가 하는 의문의 끈을 놓지 않고 나와 대상의 모든 관계에서 거듭 되묻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예컨대 “뒤집어 지배한다고 이기는 것이 아니야”(「그 아이 집」, 『초심』)라고 단언하듯 단지 권력주체가 바뀐다고 해서 억압과 지배의 관계가 저절로 해소되지는 않는다는 올바른 통찰에 바탕을 두고 있다. 아울러 노동자들의 투쟁에 관한 생각 역시 그에 상응하는 변화를 수반한다. 이미 여러 평자들이 인용한 구절이지만, 백무산의 시적 사유가 자꾸만 나 자신과의 싸움으로 귀착하는 경위를 파악하기 위해 다시 한번 읽어보자.

 

생존을 분배받기 위해 화염병으로 저항하고, 생활을 분배받는 일로 쇠파이프로 무장하는 일이 어쨌단 말인가. 그러나 욕망을 분배받는 일은 벼랑으로 가는 일, 노예 되기를 동의하는 일, 저 강물을 배반하는 일, 나무를 능멸하는 일, 저들과 공범이 되는 길. 이제 다시 물어야 한다, 왜 파업을 하느냐고, 다시 물어야 한다, 그리고 그 대답은 이제는 달라야 한다고.

―「욕망의 분배」(『초심』) 부분

 

임금인상만을 위한 투쟁을 과거와 달리 욕망을 분배받는 일로, 그리고 벼랑으로 가는 일로, 심지어 노예가 되기를 동의하고 저들과 공범이 되는 길로 바꾸어 생각해야 할 직접적인 이유는 지금 우리 현실의 도처에서 목격된다. 갈수록 비정규직 노동자가 양산되는 가파른 현실을 외면한 채 조직력이 막강한 대기업 노조에서 임금인상 요구만 앞세운다면 그것은 노동유연화라는 미명하에 진행되는 이윤창출의 극대화에 공범으로 동참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래서 투쟁의 이유를 다시 물어야 하고, 대답도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백무산의 시집을 아무리 뒤져보아도 즉답은 발견되지 않는다. 단지 투쟁의 요구조건을 이러저러하게 바꾸는 것만으로는 궁극의 대답이 될 수 없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은 욕망의 분배구조를 재생산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삶의 방식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로 나아간다.

다음 시는 앞의 시에서 던진 질문을 다른 차원으로 변환하여 사유하는 백무산 특유의 방식을 보여준다.

 

연어가 자신이 떠났던 곳으로

수만 리 먼 여정을 다하였다

그러나 아직은 회향이 아니다

 

산란을 마치고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배를 뒤집고 처음 본 그 하늘 다시 본다

그러나 아직은 회향이 아니다

 

자연은 고단한 그를 거두어

긴 안식의 집으로 데리고 갔지만

아직은 회향이 아니다

 

나서 죽기까지 어떤 경로도

아직은 직선이다

 

알에서 깨어난 새끼들이 어미에게서

물려받은 운명을 더듬어 길을 나선다

새끼들은 분신이지 내가 아니다

 

나는 죽어서도 아직 나다

내가 나를 내려놓았으나

아직은 회향이 아니다

 

내가 나를 비켜가는 것이다

달은 한번도

같은 달이었던 적이 없었다

―「회향」(『길 밖의 길』) 전문

 

근래에 생태적 사유가 범람하는 분위기를 타면서, 머나먼 회향 끝에 산란한 새끼들을 위해 제 몸을 먹이로 내주는 연어의 특이한 생태는 자연에 내재하는 자기조직화 원리의 압권으로, 또 나아가서 숭고한 모성의 경이로운 사례로 이목을 끈 적이 있으며, 그런 연어를 소재로 시와 성인동화 등이 쏟아져나온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시인은 아마도 그 씬드롬을 지켜보면서, 과연 그럴까 하는 의문을 품다가 이런 시상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시에서 연어가 산란을 마치고 목숨을 다하여 자연의 품으로 돌아간 뒤에도 아직 회향 즉 온전한 귀향이 아니라고 하는 이유가 처음 암시되는 대목은 “나서 죽기까지 어떤 경로도/아직은 직선이다”라는 구절이다. 이때의 ‘직선’이 ‘무리의 본능에 따라 미리 정해진 길만 추구하는 삶의 방식과 경로’를 가리킨다는 것은 그 다음 연에서 분명해진다. 새끼들 역시 유전인자에 각인된 생존본능에 따라 어미와 똑같은 일생을 시작하고 마감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 마리의 연어는 무리의 ‘표본’(‘분신’)으로만 존재할 뿐 자율적 개체성은 결여하고(‘내가 아니다’)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연어를 빌려 말하려는 속뜻은 과연 인간인 나는 무리의 본능, 즉 소유욕과 지배욕에서 자유로운가 하는 문제제기다. 시인은 “내가 나를 내려놓았으나/아직은 회향이 아니”라고 말한다. 아무리 욕망을 비워도 온전히 나를 허물지 못하고 자꾸만 나를 비켜가기 때문이다. 여기서 백무산의 시적 사유는 돈오수행(頓悟修行)의 길로 접어든다. 그런데 스스로 닦아놓은 길에 안주하는 것도 결국 나를 비켜가는 것이므로 그 수행은 언제나 ‘길 밖의 길’을 지향할 수밖에 없고, 끝이 있을 수 없다. “달은 한번도/같은 달이었던 적이 없었다”는 말처럼 이 회향의 사유는 곧 자아의 창조적 변이를 지향한다. 무리의 욕망을 끊고 스스로 자재(自在)하되, 나와 나 아닌 것의 차별도 허물고 대상과의 열린 관계를 지향하는 것이다.

 

천지사방 흩어진 몸들은

나무를 통해 마음으로 돌아오고

세상에 지천으로 흘린 마음들은

나무를 통과해 몸으로 돌아오는데

―「마음에 심는 나무」(『초심』) 부분

 

나와 대상의 차별적 분별이 사라질 때 땅에 심은 나무가 인간과 대지 사이에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듯 마음의 안과 밖의 경계도 허물어지고 나와 나 아닌 모든 것은 상생의 관계로 소통한다. 이런 상태는 세상의 속도에 길항하면서 “나무처럼 뜨겁게/달려가는/역의 속도”(「역의 속도」, 『길 밖의 길』)로 명명되기도 하거니와, 그것은 마음이 어느 한곳에 머물러 대상을 관조하는 정적 상태가 아니라 나와 나 아닌 것들이 한몸으로 어우러져 시시각각 뜨거운 열도로 진행되는 사건이다.

다음에서 보듯이 그런 관계에서는 먼저 것이 나중 것에 앞서지도 않고, 무리가 개체를 억압하지도 않으며, 개체는 다른 모든 것과의 관계 속에서 전체가 되기도 한다.

 

넝쿨에는 암꽃과 수꽃이 함께 피어

향기로운 손을 거쳐 씨앗을 맺고

다시 꽃을 피우기를 무수히 반복한다

그 행위는 무수하므로 모든 씨앗이

최초의 것이고 단수도 복수도 아니라

전부다

―「씨앗 한 알에」(『길 밖의 길』) 부분

 

불가에서 말하는 불성의 편재(遍在)를 떠올리게 하는 이러한 시적 사유는 오늘의 시대환경에서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닐까. 정남영(鄭男泳)은 네그리(A. Negri)의 생각을 빌려 이러한 ‘다중적 소통’의 사유가 “근대적 자아를 탈근대적 자아로 바꾸는 의미”1를 갖는다고 높이 평가한 바 있다. 그러면서 그는 다중적 의사소통 환경에 관한 네그리의 다음 말을 인용하고 있다.

 

다중을 횡단하고, 다중으로 다중을 가로지름으로써, 다중은 섞이고 혼합되고 잡종적이 되고 변형된다. 다중은 끊임없는 운동과 상호적인 변형 속에 있는 파도들과 같다.(「다중의 존재론적 정의를 위하여」)

 

이러한 생각은 개인을 계급적 귀속성으로만 규정하는 경직성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 오늘날 고도화된 자본의 운동이 개개인의 미세한 일상에까지 전일적으로 관철되고 있다는 현실인식, 그리고 사회적 의사소통이 문자 그대로 개인과 다중이 동시에 접속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진단을 그 바탕에 깔고 있다. 또한 이러한 현실진단은 개개인의 자발성에 기초하지 않은 변혁운동은 유기적 힘으로 전화될 수 없다는 고려도 함축한다. 개인의 해방은 인류의 해방을 위한 전제조건이라는 맑스의 말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필자 역시 스스로를 바꾸는 일과 현실을 바꾸는 일은 동시적 과제라는 점에서 그러한 생각에 대체로 공감하는 편이다. 그렇지만 다중의 접속공간이라는 것이 현재로서는 네그리가 기대하듯 창조적 소통의 토양과는 거리가 멀뿐더러 상품유통에 최적의 조건을 갖춘 공간인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요컨대 네그리적 사유에는 개인과 집단, 지역과 국가에 따라 다른 강도로 작용하는 권력과 자본의 차별적 힘들을 쉽게 균등화하고 그럼으로써 현실을 낙관적으로 보게 만드는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 것 같다.

다시 백무산의 시로 돌아가면, 「씨앗 한 알에」 같은 시를 읽으면 분명 마음이 환해지지만, 시를 접고 현실을 돌아보면 과연 그 밝음이 저 현실의 어둠을 흡수할 만큼 힘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떨칠 수 없다. 그래서 시인 자신도 “나의 이 생각은 다만/넝쿨이 자라는 동안에 일어난/밖의 생각이므로/언제라도 부정된다”고 유보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다시 돈오수행에 용맹정진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백무산의 도저한 마음공부는 시의 눈을 밝히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될 수도 있다. 불가(佛家)의 깨달음에서 ‘말길이 끊기고 마음이 끊기는 상태’〔言語道斷心行處滅〕는 도가 깊어지는 경지를 일컫겠지만, 그것은 아비규환의 현실에서 멀어짐으로 인해 욕망과 함께 시의 몸까지 비우는 길이 될 수도 있다. 태초부터 한번도 같은 적이 없었던 달을 보며 “밖에 내다 건/생의 안쪽”(「달」, 같은 책)을 보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 달이 무심하게 비추고 있는 저 낮은 곳에서 엎치락뒤치락하는 사람들의 생활이 시의 몸속으로 들어와야 한다. 대개 기억의 편린을 끄집어낸 몇편의 시에서 그런 풍경이 보이긴 하지만, 그 정도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현재의 상황에 주목한 다른 몇편의 시들은 주로 노동자 현실을 다루고 있는데, 그런 시들이 표출하는 분노의 목소리는 불가적 사유의 시편과는 문체의 단절이 느껴질 만큼 어조가 거칠다. 거친 어조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만큼 현실을 거칠게 보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박영근(朴永根)이 “욕망–비움이라는 그의 구도적 사유와 욕망–현실이라는 자본의 세계가 시 속에서 어떤 창조적 접면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2고 한 말은 깊이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4

 

따로 머리말을 달지 않은 변명 삼아 몇마디 부연하는 것으로 글을 맺고자 한다. 최근 시단의 흐름에 대하여 특정한 갈래와 유형으로 정형화되는 창작경향을 우려하고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다. 자연서정시의 주류를 이루는 생태적 상상력 역시 김수이(金壽伊)가 날카롭게 지적했듯이3 자연에 대한 정형적 사고에 갇혀서 고착되는 양상을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미리 주어져 있는 자원을 소비하는 일방적 운동에서 에너지를 얻는 동력이 결국 에너지 총량의 불활성을 증대시켜 삶의 터전을 황폐화하는 엔트로피의 법칙은 시의 경우에도 똑같이 해당된다. 정해진 어법을 따라가는 시는 독자에게 편하게 소화될지는 몰라도 결국 시의 생명을 단축시키고 독자를 시에서 멀어지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마련이다.

앞에서 소략하게 살펴본 세 시인의 시세계는 분명히 그런 위험에서는 비켜나 있다. 그리고 같은 세대의 다른 시인들에 비해 진정성과 치열함이 돋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시인 모두에게 현실적 구체성이 모자란다고 거듭 강조한 것은 현실이 곧 문학의 자양분이라는 평범한 진실이 오늘날의 고도자본주의 시대에는 한층 각별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사회의 각 영역이 갈수록 분화되듯이 시가 여러 갈래로 분화되는 것 역시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연스러워 보이는 모든 것은, 소비가 곧 존재의 실현인 것처럼 느껴지는 환상과 마찬가지로 현실을 은폐하거나 호도하는 신비화의 함정을 품고 있다. 세 시인의 시에서 압도적 비중을 차지하는 사회생태적 상상력의 향방 역시 그런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인간사와 대비되는 자연의 이치를 통해 인간현실을 되짚어보려는 애초의 의도는 현실을 단순화하는 결과로 역전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생태적 상상력에 기대는 시적 사유 역시 자신의 경계를 찢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만 시대가 부과하는 소임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시의 본분에 충실한 길이기도 하다. 그 어떤 코드로 환원되지 않는 총체성을 궁구하는 혼신의 운동이 시의 본령일 것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시의 형식도 버려야 하는 그 운동의 모험을 멈출 때 시의 언어 역시 사물화의 운명을 면치 못한다. 그렇다고 그 모험이 종작없는 개성의 추구로만 감당될 성질의 것도 아니다. 포스트포디즘 시대의 상품생산에서 표준화보다는 차별화가 더욱 고도화된 자본의 지배전략이라면, 그에 상응하는 의사소통 환경의 변화 속에서 차이의 생산은 자본의 차별화 전략과 시소게임을 벌이는 아슬아슬한 곡예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게임이 어느 쪽으로 기울 것인가는 그야말로 한편 한편의 시에서 판가름날 것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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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남영 「건너는 일과 다시 살아나는 일」, 백무산 『초심』, 실천문학사 2003, 167면.
  2. 박영근 「백무산 읽기―변화의 의미와 그 미래」, 『내일을 여는 작가』 2005년 봄호 83면.
  3. 김수이 「자연의 매트릭스에 갇힌 서정시」, 『파라21』 2004년 겨울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