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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김원 『여공 1970, 그녀들의 反역사』, 이매진 2005

발본적 물음, 성실한 탐구, 남겨진 숙제

 

 

박명규 朴明圭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parkmk@snu.ac.kr

 

 

여공1970

1970년대의 여성운동사를 860면이 넘는 투박한 분량으로 다룬 『여공 1970, 그녀들의 反역사』는 날렵한 장정과 매력적인 제목이 선호되는 요즘의 감각에서 볼 때 철지난 주제를 낡은 시각으로 다룬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실제로 책에 담긴 문제의식은 놀랄 만큼 현재적이고 이론적 시각은 최신의 것이며 주장하는 논지는 매우 발본적이다. 자전적 고백을 장문의 ‘프롤로그’로 실음으로써 자신의 고민과 관점을 그대로 드러내려 한 저자의 진정성 역시 강렬하다. 그런 탓에 손에 쥐기도 불편한 책이지만 끝까지 읽어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저자 김원(金元)은 1970년대 여성노동에 대한 현재의 담론체계가 87년 이후 진행된 노동운동 내부의 헤게모니 전환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드러냄으로써 70년대의 실상을 아래로부터 재구성하고 현재의 담론이 갖는 구성성, 신화성을 벗겨내고자 한다. 미셸 푸꼬(M. Foucault)의 담론분석, E.P. 톰슨(Thompson)의 문화사, 그리고 미시사적 시각을 종합적으로 적용하면서 저자는 무엇보다도 노동운동과 계급형성에 대한 기존의 시각에 여성성, 젠더에 관한 문제의식이 희박함을 비판한다. 저자는 70년대 여성노동자들이 비좁은 다락방에서 장시간 혹사당한 수동적 존재였고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강력한 외부의 개입이 불가피했다는 설명체계를 ‘다락방 담론’과 ‘여공보호론’이라 개념화하고, 이것이 영웅적인 민주화항쟁을 강조하는 정통론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본다. 70년대 여성노동운동을 ‘경제주의’ ‘조합주의’로 규정하는 것도 강인하고 투쟁적인 남성성을 중시하는 관점이 여성성과 개별적 차이를 억압한 결과라고 본다.

이러한 문제제기는 단지 페미니즘적 시각의 중요성을 지적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국노동운동사에서 중요한 상징성을 갖는 전태일(全泰壹)에 대한 집단적 기억의 성격을 파헤치는 데까지 이르고 있다. 전태일 담론은 대공장 남성노동자 중심의 노동운동이 힘을 얻은 1987년 이후 숙련직 대기업 노동자들의 세력화를 낭만화하고 전노협 소속 민주노조의 급진적 정치성을 담보하는 ‘반복적이고 습관적인’상징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전태일 상징이 결과적으로 노동운동 주체들 내부의 균열과 분열을 은폐하고 모든 것을 중성적 또는 남성중심적인 것으로 사고하게 만들었다고 본다. 동일방직 사건의 예를 통해 민주파의 강인한 투쟁력을 신성화하는 과정에서 여성들 내부의 다양함과 차이들은 타협주의, ‘장애요소’또는 ‘어용’의 표상으로 구성되었음을 강조한다.

같은 맥락에서 저자는 노동운동의 급진화와 민주노조운동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도시산업선교회와 가톨릭 지오세(JOC)에 관한 담론도 비판적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다. 「여공들은 ‘투사’였나?」라는 장과 「교회는 여공들의 친구였나?」라는 연이은 장에서 저자는 실상은 그렇게 단일하거나 단순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에게 도시산업선교회는 그 헌신성과 기여도 못지않게 전태일의 영웅신화를 확산시키고 남성중심의 투쟁성을 강조함으로써 노동운동에서 여성성과 자율성을 억압하는 결과를 낳기도 한 주체로 파악된다. 노총과의 대립구도 속에서 민주노조의 확실한 후원자였던 교회조직들도 결국은 강인한 남성적 영웅담론을 민주화의 이름으로 강화하는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이다.

이 책의 이러한 논의는 이론적으로 구해근(具海根)의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창비 2002, 원제는 Korean Workers)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구해근의 연구가 ‘여성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탓에 70년대 여성노동운동을 이후 전개된 민주노조운동의 전사(前史), 계급형성의 초기상태로만 파악한다는 것이다. 여공들의 투쟁을 한(恨)이라는 정서적 차원에서 설명하고 전태일 등장 이후 전개된 강력한 노동운동을 ‘계급의식’의 발전과정으로 파악한 구해근의 시각은 이 책이 지속적으로 비판하고 극복하려는 이론체계인 셈이다. 저자는 책의 앞부분에서 “근대적 개인을 발견하고 개인의 권리에 기반해서 인간 사이의 관계가 맺어질 때 비로소 평등한 인간관계가 가능”(16면)하리라는 점, 따라서 노동운동사를 계급형성사로만 파악하는 시도의 한계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강인한 노동계급 형성을 역사적 진보로 믿어 의심치 않는 태도들에 대한 저자의 ‘우울’한 회의가 이런 입장에 녹아 있다고 생각된다.

이처럼 원대한 구상의 책이지만 실제 저자의 의도가 이 책에서 충분히 구현되었는지는 의문이다. 우선 여공들의 생활상을 분석한 여러 장의 내용들이 반드시 저자의 주장을 뒷받침한다고 보기는 어렵고, 오히려 비판하고자 한 기존 설명을 뒷받침하는 부분들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도 담론이 구성되고 신화화되는 부분을 반복적으로 비판하면서도 정작 80년대를 지나면서 담론의 형태가 달라지고 지적 헤게모니가 구축되어가는 과정에 대한 세밀한 분석은 부족하다. 담론의 구성과정을 분석할 때 가장 중요한 변수가 될 담론의 생산과 유통과정, 지식인과 매체의 역할 분석, ‘익명의 지식’과 이데올로기적 담론의 긴장 등에 대한 정치한 분석은 매우 부족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저자의 놀라운 성실함과 뚜렷한 문제의식이 자주 반복되는 서술로 인해 훼손되는 문제도 아쉬운 부분이다. 심지어 일부분은 같은 내용이 중복 서술되어 있어서 좀더 밀도를 높이고 경제적인 글쓰기를 했더라면 좋았으리라 생각한다.(이 서평을 퇴고하는 순간, 초간본의 여러 문제점을 수정한 개정판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또한 저자의 문제의식이 너무 뚜렷한 탓인지는 모르나 선행연구와의 대립이 지나치게 일방적으로 강조되지 않았나 싶다. 예컨대 구해근이 지적한 장인문화의 부재, ‘한’에 대한 언급 등은 오히려 계급중심적 논의가 놓치기 쉬운 한국적 맥락, 담론적 힘, 여성성의 어떤 측면을 드러낼 가능성이 있고, 그런 점에서 저자의 문제의식과 연결되는 부분도 함께 논의되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끝으로 양극화 심화와 노동운동의 위기가 논해지는 현싯점에서, 8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신화적 성격을 비판적으로 독해하고 그 담론적 헤게모니를 젠더적인 관점에서 해체·재구성하는 작업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또는 약속하는 이론적·실천적 함의는 무엇일까라는 중요한 질문에 대해 저자의 입장이 좀더 부각되었으면 싶다. 여성성을 주목하면서, 노동자들의 경험적 다양성을 복원하는 것이 갖는 현재적 함의를 명확하게 드러낼 저자의 다음 저작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