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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박영근 朴永根
1958년 전북 부안 출생. 1981년 『反詩』로 등단. 시집 『취업 공고판 앞에서』 『대열』 『지금도 그 별은 눈뜨는가』 『저 꽃이 불편하다』 등이 있음. bakyk9@hanmail.net
돌부처
저렇게 오래
돌아앉은 돌부처는 말이 없다
골짜기 저 밑바닥에서 안개는 올라와
지난날의 전나무와 갈참나무 숲을 지우고
어두워가는 살 깊은 곳으로
바위 가파로운 산줄기를 문득 밀어버린다
어느 때쯤 돌부처마저 보이지 않고
알 수 없구나
다만 맨몸인 내가
사방 허공에
뼈마디까지 적나라한데
어디선가 희미하게 물소리 들리고
바람에 불려가는 안개
뜨거운 이마에 맺히는 시간의 물방울들
내 안에서 수천수만 햇살의 숨구멍들이 한꺼번에 열린다
돌부처 하나이 바위 절벽 속에 제 몸을 새기고 앉아
빙그레 웃고 있다
낡은 집
1
기왓장을 울리는 빗소리 속으로 낡은 집 한채 흘러간다
깨어져 빗물이 새는 기왓장들 사이를
천막쪼가리들이 안간힘으로 깁고 있는,
손바닥짜리 마당이 남향으로 나 있는
그 집
공단 마을의 단칸방들과 골목을 떠돌다
처음으로 대문 밖을 향하여 이름을 내걸며 웃던,
인천시 부평구 부평4동 10의 22번지
빗소리가 울린다
온통 빗소리에 갇혀 집이 울린다
장미철 꽃들이 일제히 목을 떨어뜨리고,
그래, 십여년의 시간이 가파르게 흘러갔다
2
이 집에서 언제부터 혼자 살게 되었는지 대답을 못하겠어요 기억이 나를 밀어내는 것인지, 한밤중 골목에 나와 밤고양이 울음소리에 몸을 떨면서 하수돗물 흘러가는 희미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곤 했어요
생(生)에 대한 그리움이나 기다림이 남아 있었다면 조금은 편안했을까요 내가 쓰는 글이란 잠자리를 축축하게 적시는 식은땀 같은 것이었고, 정오 가까운 시간에 일어나면 한기에 떨리는 몸으로 마당에 내려 쌓이는 햇살을 멍하니 바라보았어요
(제발 80년대니 90년대니, 그런
헛소리로 나를 불러내지 말아요
나는 지금 2000년대의 근사한 헛소리를 씹고 있고
달콤한 똥을 싸고 있다구요
밤새 불을 켜고 있던 불륜의 활자들이
얼굴을 처박고 벌써 납덩어리가 되었잖아
아, 나에게도 홈페이지가 있다면
무슨 별이 뜰까
소주병이 애국가를 나발부는 이 질탕한 밤에)
브로크 막벽돌은 금이 벌고
창틀과 문짝들은 휘어지고 제멋대로 패어 이빨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지붕의 기와가 삭아 자주 방의 천장이 젖었고
기억은 늘 둔중한 지하철처럼 시간을 깔아뭉개고 지나갔어요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 집에서, 허공엔 듯 길을 내어 처마와 담벼락에 꽃을 매달고 오르던 나팔꽃들을 믿을 수 없었지요 플라스틱 흙판에 묻어놓은 씨앗이 넝쿨을 올리고 꽃을 피우다 이윽고 가을이 와서 지붕에 잘 익은 제 몸덩어리를 의젓하게 올려놓던 그 호박들을 당신은 지금 믿을 수 있나요 세탁기가 돌아가고, 마당에선 빨래가 마르고, 국이 끓는 부엌에서는 도마질하는 소리가 들려오던
그때에도 나는 시를 썼던가요
3
그것은 바람이 바뀌는 첫겨울의 문턱에 파르르하게 깔리는 살얼음 같은 것이었을까, 몇번쯤인가 몸살이 찾아왔어요 고열이 머리통을 불덩어리로 만들었고, 입천장과 혀가 타는 듯 뜨거워서 침을 제대로 삼킬 수 없었지요 나는 혼자였고, 기댈 끼니라고는 찬 생수가 전부였어요 통증과 외로움 때문이었을까, 한밤중이 두려웠습니다 그리고 낮이 오면 후들거리는 몸으로 병원을 찾는 것이었는데, 집에 돌아와 약을 먹으면 문득, 문득 토막잠이 찾아오곤 했어요
그때에 나는 꿈을 꾸었을까
환영(幻影)을 보았을까
혹은 환청?
시커먼 꽃잎을 벌리고 있는 나팔꽃들이
마당과 지붕을 뒤덮고,
깨어나면 또 밤중인데
통증 속으로 시계 초침 돌아가는 소리가 뜨거운 물방울처럼 뚝뚝 떨어져내리고
그때에 나는 어디에 있었을까,
태연하게 골목을 점령하고 있던 포크레인과 굴착기와 덤프트럭 몇대가 껄껄거리며 손발을 움직이기 시작했지요 지붕이 내려앉고, 브로크담이 주저앉고, 어디선가 전화벨이 울리고, 문짝이 떨어져나가고, 창틀이 깨어지고, 누군가 다급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 내가 흙먼지 속을 더듬고 있는 동안 그 집에서 간신히 버티고 있던, 내가 어떻게 헤아려볼 수도 없을 만큼 오랜 시간들이 가뭇 사라져버렸어요 그 자리, 어느덧 공터가 되어버린 집자리에 무심히 내리는 해거름녘의 햇살 몇줌과 문득 흙먼지를 일으키고 지나가던 바람, 그 자리, 그래요, 공터 가녘 한켠에 쓰러져 누워 있는 모과나무 한그루의 잔뿌리털에는 아직 흙덩이가 매달려 있었어요
내 몸 밖 어디로 몸살이 빠져나갔는지 모르겠어요
문득, 눈송이들이 하늘에 비치고
허공을 뻑뻑하게 채우고
4
내가 살고 있는 낡은 집 한채
제가 살아온 지붕도
두 칸 방도 창도,
시간도 다 떼내어 버리고
오래 허공속을 떠돌고 있다
그래, 그래, 아픈 몸이 지치도록 밀고 가는 구름의 떼
빗소리가 울린다
빗소리가 울린다
골목에서는 레미콘 트럭이 시멘트 개어 올리는 소리
흙탕물 속을 곤두박질치며 쓸려오다
물위로 떠오르는 옛 문장들 몇편
내가 살고 있는 낡은 집 한채
마당귀의 토마토 두 그루
여자 하나이 꽃대를 세우고
흙살을 돋우고 있다
나는 빗소리를 열고
그 푸른 줄기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