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특집 | 한국 장편소설의 미래를 열자

 

한국의 장편, 단절의 감각을 넘어서

 

 

진정석 陳正石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사회학적 상상력과 상상력의 사회학: 2000년대 젊은 소설을 보는 한 시각」 「길 위의 소설, 소설의 길」 등이 있음. jjsssj@hanmail.net

 

 

1. 주변화, 세계화, 보편성

 

2000년대의 한국문학은 문학의‘주변화’와 문학의‘세계화’가 중첩된 새로운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물론 따로 떼어놓고 보면 이 둘은 새로운 현상이라 하기 어려우며, 2000년대 들어 비로소 시작된 것도 아니다. 그러나‘주변화’와‘세계화’가 병치 혹은 중첩되고 서로 강화하면서 문학예술에 심각한 도전으로 다가오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문학의‘주변화’는 어쩌면 적절한 용어가 아닐지 모른다.‘중심화’의 반대라는 불필요한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데다,‘자율화’라는 좀더 널리 알려진 개념이 있기 때문이다.‘자율화’나‘자율적 예술’은 근대적 제도의 분화와 합리화에 따라 예술이 정치·경제·도덕 등의 영역과 분리되고 그에 대한 비판의 형식으로 존재한다는 주장이며, 모더니즘 유파에서 특히 강조하는 입장이다. 물론 자율적 예술의 제도화된‘상징적 저항’을 넘어 지적·인식적·도덕적 과제를 포괄하는 통합적 의지에서 근대문학의 창조적 활력이 발휘된 사례도 적지 않으며, 1970년대에 형성된‘민족문학’은 한국문학이 떠맡은 이런‘통합적’과제의 성격을 집약한 표현이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거대담론의 유효성이 의심받고 문학의 사회적 위상이 점차 하락하는 가운데, 한국문학의‘통합적’성격은 점차 약화되고‘주변화’경향이 지배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1990년대를 풍미한‘문학위기론’이‘민족문학 위기론’과 상당부분 겹치는 현상은 한국문학이 그동안‘주변화’된 자율적 예술로 머무는 데 그만큼 익숙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한편 문학의‘세계화’는 비교적 최근에 일반화된 용어지만, 이 역시 전적으로 새로운 사태는 물론 아니다. 한국문학의 해외 소개와 세계 진출이라는 좁은 의미로는 새로운 추세이되, 세계문학과의 영향관계라는 넓은 의미로 보면 문학‘세계화’의 역사는 서양 근대의 압도적 영향과 그에 대한 반응의 양상으로 진행된 한국 근대화의 전시기와 거의 겹친다. 그러나 최근 신자유주의의 주도적 성격이 분명해지면서‘세계화’는 전과 달리 한국문학에 대한 심각한 도전의 의미를 갖게 되었다. 1997년 IMF사태로 그 위력을 실감했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국경을 넘어 세계 전역에 자본주의의 가치와 규범을 확산시키는 한편, 모든 문화예술을 교환가치로 환원하고 상품화를 강제한다. 가속되는‘세계화’는‘정치적 저항’의 영역은 물론‘상징적 저항’의 공간마저 위협하고 있다. 이제 문학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심오한 성찰의 형식이 아니라 경쟁력 없는 읽을거리로 전락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2000년대 한국문학은 문학의‘세계화’를 위기 속의 기회로 활용하고, 이를 통해 문학의‘주변화’를 넘어설 준비가 부족한 상태이다. 민족문학운동의 퇴조와 사회적 상상력의 위축으로 한국문학은 전반적인 중심 부재의 상태에 있으며, 다양한 문학적 모색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종합의 전망은 그다지 밝지 않은 편이다. 이념적 중심이 약화된 상황에서‘주변화’의 강요를 거부하고‘세계화’의 유혹에 대응하기 위해 이제 한국문학은 다시 한번 문학의‘보편성’을 새롭게 숙고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시공을 초월한 문학 본연의 보편성을 새삼스럽게 상기하자는 제안이 아니며,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문학의 호환성에 무작정 편승하자는 주장도 물론 아니다. 지금 우리 문학에 요청되는 보편성의 윤곽을 거칠게 그려본다면, 그것은 한국문학 자체의 고유한 역사적 경험과 통찰에서 출발하되 경계를 뛰어넘는 가치와 자질을 발굴하고 그것을 일반화하는 보편성, 비유컨대‘우리 안의 보편성’1일 것이다. 물론 고유한 경험을 일반화하여 새로운 보편적 기준으로 재구성하는 것이 말처럼 간단한 일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해체를 위한 해체’와‘탈주를 위한 탈주’에 열중한 나머지 보편적 공감의 예술로서의 문학에서 점점 멀어져가는 한국문학의 방향 전환과 체질 강화를 위해서는 보편성을 중요한 문학적 의제로 설정할 필요가 있다.

2000년대 한국문학이 새로운 보편성을 지향해야 한다는 요청은 최근 활발한 국제교류로 시야를 넓혀가는 작가들이 훨씬 민감하게 의식하고 있다. 한 소설가는 한국문학이 세계무대에서 통하려면 일단 “보편적인 문제를 얘기”하는 것이 중요하고 “번역에 견딜 수 있는 작품”을 써야 하며, 무엇보다 먼저 “미국시장에서 팔려야”한다는 의견을 제시한 바 있다.2‘시장’에 대한 의욕이 앞선다는 우려도 들지만, 한국소설이 보편적인 차원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뚜렷한 자각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소설 장르의 문제로 좁혀서 생각해볼 때, 한국문학이 국내외적 경쟁력을 높이고 새로운 보편성을 만들기 위해서는 장편소설 분야가 지금보다 더욱 활성화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된다.

최근 여러 방식과 경로로 추진되는 장편소설 활성화 움직임은 대중성과 보편성에서 심각한 어려움에 처한 한국문학에 하나의 전환점, 위기 속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장편은 전통적으로 단편에 비해 훨씬 대중적인 장르였으며, 당대의 핵심을 건드리는 적실한 문제제기를 통해 독자들과 소통하는 데 유리한 형식이다. 문학의 보편성과 대중적 공감이 만나는 자리가 바로 장편소설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전망은 우리가 장편소설에 기대하는 하나의 장르적 가능성일 뿐이다. 장편소설의 활성화가 한국문학의 활로를 여는 유력한 방안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창작 방면의 구체적 성과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이 글에서 주로 다룰 대상은 김영하(金英夏)의 『빛의 제국』(문학동네 2006)과 김연수(金衍洙)의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문학동네』 2005년 겨울호~2007년 봄호 6회 연재)이다. 한국소설의‘중간세대’를 대표하는 김영하와 김연수는 1990년대에 장편소설로 첫 책을 펴낸 이래 장편 창작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지속적인 활동을 해온 작가들이다. 『빛의 제국』과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은 두 작가가 지금까지 써낸 장편 중에서도 가장 긴 분량의 역작이며, 이 점에서 한국 장편소설이 현재 도달한 지점을 가늠해볼 표준적인 사례가 된다. 이 글은 두 작품에 대한 분석을 통해‘주변화’와‘세계화’가 중첩된 새로운 상황 속에서 진행되는 한국 장편의 성취를 점검하고 향후 과제를 제시할 것이다.

 

 

2.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장르 변용과 소설적 쎄팅에 능숙한 작가답게 『빛의 제국』은 복잡한 이야기를 간명한 설정 속에 경제적으로 압축한다. 여기, 남한에서 20여년을 암약해온 고정간첩 김기영이 있다. 10년 전 선(線)이 끊어져 이제는 대한민국의 40대 보통 남자들과 별다를 것 없는 중년의 가장이다. 그에게 어느날 갑자기 24시간 안에 북으로 돌아오라는 귀환명령이 떨어진다. 명령의 출처도 이유도 직접 가보기 전에는 전혀 알 수 없다. 돌아갈 것인가 남을 것인가. 만 하루 동안의 시간에 그는 자신의 전생애를 정리하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절박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빛의 제국』은‘하루 동안의 모험’이라는 점에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씨즈』 같은 고전적 플롯에 이어지며, 체제와 이념에 대한 실존적 선택이라는 점에서 최인훈의 『광장』의 후예이기도 하다. 간첩이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하드보일드 장르소설의 영향을 받고 있는가 하면, 탈냉전시대의 한반도 주변 상황을 소재로 한 무라까미 류우(村上龍)의 근작 『반도에서 나가라』와도 상통한다.

『빛의 제국』의 주인공은 스파이소설의 장르적 관습에서 튀어나온 가공의 조형물이 아니다. 김기영은 오늘날 세계에서 몇 안되는 분단국가로 남아 있는 한반도 현실을 전제로 하지 않고는 태어날 수 없는 인물이다. 그러나 『빛의 제국』의 촛점은 한반도 전체가 아니라 철저하게 21세기 남한, 그중에서도 서울이라는 대도시의 일상생활과 삶의 윤리 문제에 집중되어 있다. 귀환명령을 받은 간첩의 하루라는 설정부터가 이념이나 체제에 대한 실존적 고민을 펼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평범한 영화 수입업자의 권태로운 일상을 의미심장한 하나의‘사건’혹은‘모험’으로 만들기 위한 장치에 가깝다.

 

이 세계에 있을 시간이 하루밖에 없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자 그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모든 장면들, 하나의 상투성에 불과했던 이미지들이 살아서 꿈틀대기 시작했다. 그는 바싹 마른 재생지가 되어 세상이라는 만년필이 자신에게 휘갈기는 모든 것을 탐욕스럽게 빨아들였다. 창작열에 불타는 얼치기 시인처럼, 엉겁결에 첫 키스를 하게 된 소년처럼,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이 시적인 것으로 몸을 바꿨다. (…) 그들은 현실이 아니라 마치 자본주의사회에 대한 그의 감수성을 일깨우기 위해 갑자기 등장한 연극배우들 같았다.(96~7면)

 

스파이소설이라는 설정을 걷어내고 보면, 이 작품은 변형된‘후일담’이자 21세기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 대한 세밀한 풍속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에 나오는 여러 유형의 인물 가운데 자본주의의 생리와 습속을 가장 깊숙이 체화한 인물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간첩 김기영이다. 그는‘장기여행자’‘이민자’‘옮겨다 심은 사람’‘일종의 유령’등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서울 같은 국제적 대도시에 여행자나 이민자가 아닌 뿌리내린 원주민이란 어차피 희귀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장기공연하는 연극에 너무 오래 출연해서 자기가 원래 누구였는지를 잊어버린 사람”(290면)처럼 어느새 그는 지난 20년 동안 엄청나게 달라진 세상에 “남한의 평균적인 중년남성”(92면)보다 더 잘 적응한 “수많은 양복쟁이들 중의 하나”(65면)가 되었다. 그는 “히레사케와 초밥, 하이네켄 맥주와 샘 페킨파나 빔 벤더스 영화”를 좋아하는 인간, “제3세계 인민을 권총으로 쏴 죽이는 뫼르소의 이야기를 사랑하고, 극우파 게이 미시마 유키오의 미문에 밑줄을 긋는” 인간, “일요일 오전엔 해물스파게티를 먹고 금요일 밤엔 홍대앞 바에서 스카치위스키를 마시는”(289면) 인간, 한마디로 “대도시의 익명성”과 “세련을 가장한 속물성”에 익숙한 자본주의적 인간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김기영이‘남을 것인가 떠날 것인가’라는 선택은 사실상 성립되지 않는 게임이다. 그는‘남이냐 북이냐’를‘현재냐 과거냐’의 문제로 치환한다. 사회주의 북한은 그의 과거이고 자본주의 남한은 그의 현재이다. 과거로 다시 돌아갈 수 없듯이 북한으로 갈 수도 없는 것이다.3“큰물이 나서 둑이 터지면 인간은 개돼지와 다를 게 없어”(115면)라고 일갈하는 북쪽 아버지의 말처럼, 김기영에게도 인간은 “추상적인 고민”을 일삼는 고상한 존재가 아니라 그냥 “살아남기 위해, 오직 살아남기 위해 미친 듯이들 사는”(362면) 생활인일 뿐이다. 만약 그가 사회주의 조국을 배신하고 전향한 것이라면, 그의 전향은 이념을 바꾸는 전향이 아니라, 이념적 인간에서 일상적 인간으로의 전향이다.

어디 김기영뿐이겠는가. 『빛의 제국』에 출연하는 전현직 간첩들은 모두 세련된 스파이라기보다는 근근이 먹고사는 소소한 직업인들이다. 기영이 가짜 주민등록증을 발급받기 위해 접선한 동사무소의 고정간첩은 “피곤에 찌든 중년의 남자”(78면)일 뿐이며, 다른 동료들도 대개는 자동차부품 대리점이나 휴대전화 대리점 등을 꾸리며 힘겹게 살아간다. 그들은 “일가붙이 하나 없는 남한에서 자력으로 살아남아야 했고 새로 생긴 가족을 거두어야 했다.”(130면) 김기영이 삼십평대 민영아파트를 소유하고 다른 고정간첩들보다 조금 낫게 사는 이유는 그가 대학을 나왔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자본주의 아니겠어? 양극화, 학력차별, 부의 세습, 팔십 대 이십의 사회.”(225면) 간첩을 추적하다 주차비를 걱정하는 기관원들의 처지 역시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빛의 제국』은 이처럼 간첩과 기관원들을 일상의 바깥에 존재하는 이념적 인간이 아니라 근면하게 노동하는 회사원이나 자영업자, 한마디로 일상적 인간들로 그려낸다.

김기영의 후배인 소설가 소지현의 원초적 체험은 이 사회를 주재하는 기본원리가 일종의‘교환’이며, 모든 인간관계는 계약에 기초한 교환관계로 환원된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대학시절 경찰에 연행된 그녀는 마조히스트인 공안수사 전문 총경의 제안에 따라 그의 얼굴에 오줌을 누고 침을 뱉는 변태적인 행위를 하고 풀려난다. “사람마다 원하는 게 다르고” “그걸 교환해서 서로 이득을 얻는 게 자본주의사회”인 것이다. 소지현은 이 거래를 통해 “어른이 된 것 같았고 세상이 굴러가는 비밀을 엿본 느낌”(61면)을 갖게 된다. 이 소설에 나오는 여러 선택의 공통점은 그것이 모두 일종의 교환이며, 그 교환의 결과는 소중한 무언가를 댓가로 지불하고 거대한 교환체계의 어른스런 일원이 되는 것이다. 김기영의 여중생 딸 현미가 친구를 배신하고 진국의 생일파티에 가는 에피쏘드는, 훼손되지 않은 것은 아직 훼손되지 않았다는 것일 뿐, 훼손을 강요하는 거대한 교환체계의 바깥은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자본주의 시장에서 교환의 주체는 내면이 없는 텅 빈 주체가 된다. 그의 인격적 가치는 교환가치로 환원되며, 그의 역할은 교환관계의 한 축으로 환원되기 때문이다. 『빛의 제국』에는 인물들의 내면묘사가 상당히 억제되어 있는데, 이는 그들이 내면을 가진 주체가 아니라는 인상을 준다. 그들은 주어진 성별과 직업과 연령에 따라 주어진 역할을 연기하는 자들이고, 자신의 삶이 일종의 연기라는 사실을 스스로 강하게 의식하고 있다. “세상은 힘과 힘이 부딪치는 곳인 동시에 연기와 연기가 교환되는 곳”(62면)이며, 그들은 “배우이면서 동시에 관객이었다.”(61면) 간첩이나 기관원처럼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직업인만이 아니라 이 소설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은 끊임없이 서로를 관찰하고 감시하며, 스스로를 연기하고 연출한다. 연기하는 삶이 개인의 정체성을 텅 비워버린다는 사실은 기영의 영화수입사 직원 위성곤을 통해 희극적으로 예시된다. 그는 알고 보니 기영의 감시역이었는데, “머리가 벗어진 포르노 중독자”에 “신용불량자”인 그의 면모는 위장된 연기가 아니라 평소 그의 실제 모습이라는 것이다.

『빛의 제국』은 우리가 어떤 이상이나 신념, 내적 확신도 무화시켜버리는 자본주의적 교환체계, 일상이라는 새로운 신에게 사로잡힌 포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세계에서는 어떤 모험도 가능하지 않다. 갑작스런 소환명령으로 김기영의 평온한 일상은 파괴될 위험에 처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이것은 진짜 위험이 아니다. 일상의 바깥에서 일상을 위협하는 것은 진정한 위험이 될 수 없다. 진정한 위험은 바로 일상 안에 있으며, 어떻게 보면 일상이라는 것은 바로 위험 그 자체, 불안과 공포가 만성화된 상태이다. 겉으로 평온해 보이던 기영의 일상도 안에서부터 조금씩 균열되고 있었다. 아내 장마리의 일탈이 바로 그것이다.

김기영이 동분서주하는 바로 같은 시간, 주사파 출신에 수입자동차 외판원인 아내 장마리도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고심한다. 연하의 애인 고성욱이 쓰리썸(threesome) 쎅스를 제안해온 것이다. 그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거절할 것인가. 받아들이면 “어디서부터 잘못된”(163면) 건지 알 수 없는 그녀의 삶은 한번 더 추락할 것이다. 거절한다면 마오 쩌뚱이나 체 게바라를 “독특한 취향”(136면)의 일부로 소비하는 스물한살의 법대생은 그녀를 떠날 것이다. 그녀는 결국 “세상을 향한 통렬한 복수”(178면) “스스로를 처벌하고 있다는 느낌”(210면)에 사로잡혀 성욱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작은 결정이 또다른 작은 결정으로 이어졌고, 마침내는 돌이킬 수 없는 결정으로 이어진 것이다.”(314~5면) 장마리가 모텔에서 두 대학생과 벌이는 난교 장면은 80년대식 후일담 주인공의 자기처벌 중에서도 가장 가혹한 수준에 속한다. 장마리는 혁명의 가능성이 사라진 시대에 불륜이라는 “흔하디흔한 모험”(283면)에 빠져버린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인 것은 『빛의 제국』에서 가장 높은 윤리적 위치를 점한 인물이 바로 장마리라는 사실이다. 이 작품에서 자본주의적 교환과 연기의 논리를 벗어난 어떤 윤리적 지향이 암시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장마리의 부친이자 광주의 주류도매업자인 장익덕의 “야, 노래하듯 사는 거야”(44면)라는 초월론적 인생관, 일시적인 판단정지 상태로 암시되는 소지현의 “일종의 간질”(55면) 증세 정도를 제외하면, 가장 압권은 역시 장마리가 간첩임을 고백한 남편을 질타하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일생 같은 하루가 저물어가는 밤 10시, 마침내 만난 기영과 마리 부부는 서로의 치명적인 비밀을 밝히고 부부싸움을 벌인다. 이 대목에서 장마리가 남편에게 당당할 수 있는 이유는 적어도 자신은 “쿨한 척”(350면) 연기하지 않았다는 것, “소통”과 “공감”“어떤 친밀한 관계”(349면)를 원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장장 20여 페이지에 걸쳐 길게 이어지는 기영과 마리의 부부싸움은 지금까지 김영하 소설이 한번도 보여주지 않던 너절한 명장면이다. 이 장면에 어떤 이념이나 전생애를 건 선택 따위는 전혀 개입되어 있지 않다. 여기에는 가장 친밀한 관계이면서도 타인일 수밖에 없는 부부간의 소통 부재, 각자의 현재에 대한 자책과 회한,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해야 했던 삶의 고난, 별볼일 없는 생활이라도 어떻게든 유지하려는 지속의 본능 등 중년부부의 고단한 일상이 있을 뿐이다. 여기서 어떤 공감이나 연대 같은 공동체적 윤리의 가능성을 곧바로 길어내기는 어렵겠지만, 김영하식‘쿨한 개인주의’에 대한 반성적 자의식, 어떤 변화의 징후를 짐작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파국으로 끝날 위기에 처한 이 부부의 일상을 회복시켜주는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김기영을 감시하던 기관원들이다. “쇼는 계속돼야”(375면) 하는 것이다. 알고 보니 김기영은 10년 전부터 이미 감시당하는 처지였다. 김기영은 기관원들의‘교환’제의에 응하고 이중간첩으로 남은 생을 살아가기로‘선택’한다. 『빛의 제국』에 나타난‘하루 동안의 모험’은 디지털시계의 액정화면처럼 분할된 장별 배치를 따라 진행되고, 순환하는 일상적 시간의 균질적 흐름 속에서 소설의 결말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다. 김기영의 일생을 건 모험은 딸 현미의 눈에 그저 출근했다 늦게 돌아온 아빠의 평상이며, 파국 위기에 처한 부부의 관계는 “둘이 또 한바탕 싸운 모양”으로 비칠 뿐이다. 소설은 딸 현미의 등교 장면으로 끝난다. 평소와 다름없을 하루,“새로운 날의 시작이었다.”(391면)

『빛의 제국』은 21세기 서울 중산층의 일상적 삶이 자본주의적 교환논리의 규범을 내면화하고 있으며,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논리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예증하는 작품이다. 교환의 체계는 일상 속에 편재(遍在)하면서 인물들의 운명을 좌우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다. 그것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보편은 아니지만, 우리 삶에 어느새 임재해 있는 보편성이다. 이 작품은 “권태”와 “공포”가 교차하는 이 거대한 감옥에서 벗어날 길을 알려주지 않으며, 오히려 어느 누구도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빛의 제국』의 인물들은 지금 존재하는 이 세계를 받아들이면서도, “상황에서 자신을 분리해내는”(375면) 연기의 방식으로 저마다 세계와의 거리를 유지하려 안간힘을 쓴다. 그들의 연기는 사로잡힌 자의 어설픈 연기, 다시 말해‘포로의 연기’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섣부른 윤리적 기준을 제시하지 않고 이 지점에서 멈춘 것은 장편소설 『빛의 제국』이 도달한 산문적 성취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모든 인간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갖고 있다

 

『빛의 제국』이 단일한 플롯과 고전적인 형식미를 갖춘 작품이라면,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은 선형적(線形的) 스토리와 고정된 의미화를 거부하는 하이퍼텍스트(hypertext)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에는 시작과 종결, 또는 문제 설정과 해결이라는 고전적 플롯이 존재하지 않는다. 수많은 개인들의 기이한 이야기가 끝도 없이 끼어들고 중첩되며 갈라지고 증식하는 이 작품은 어느 대목부터 읽어도 별 상관이 없을 정도로 사건과 사건,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에 일관되고 필연적인 인과관계가 부여되어 있지 않다. 여기에는 중심적인 주인공도 사실상 없다. 전대협 방북 대표로 베를린에 와 있는 대학생‘나’의 회고담으로 읽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독법이겠지만, 우리는 작품 곳곳에 산재한 수많은 이야기의 주인공들, 이를테면 강시우, 헬무트 베르크, 정민 삼촌 등을 자신만의 주인공으로 삼을 수 있으며, 심지어는‘나’의 할아버지가 남긴‘흑백 누드사진’또는 여자친구 정민의‘라디오’에서 시작할 수도 있다. 화자의 성격 역시 마찬가지이다. 텍스트 전체의 화자라 할 수 있는 베를린의‘나’는 말하는 화자인 동시에 듣는 청자이며, 무수한 이야기들의 수집가이자 편집자 그리고 논평자에 가까운 존재, 한마디로 김연수식 소설가의 화신에 가깝다. 요컨대 이 작품에는 단일한 플롯도, 중심인물도, 권위적 화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시작도 끝도 없이 한없이 이어지는”“일종의 라운지 소설”을 의도했다는 작가의 말처럼, 이 소설의 진정한 주인공은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 수많은 이야기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연수는 장편소설의 장르적 유연함을 한껏 활용하여 시공간을 종횡무진 넘나들며 다양한 개인의 수많은 이야기를 다채로운 파노라마로 엮어나간다.

메타픽션 형식을 빌린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1994)에서 시작된 김연수 장편소설의 가장 큰 형식적 특징은 리얼리즘적 서사에 대한 거부와 다양한 화법 실험이라고 할 수 있다. 기존의 방식과 다르게 표현하겠다는 자의식은 앞선 세대의‘영향에 대한 불안’앞에 놓인 모든 작가들에 해당되는 사항이지만, 우리 소설사에서는 특히 1990년대 세대에서 집단적으로 나타나며, 김연수는 그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작가이다.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에는 김연수의 도저한 방법론적 자의식이 시대적 외상(外傷)과 연관되어 있음을 암시하는 장면이 들어 있다.

이른바‘5월투쟁’이 막을 내린 1991년 여름, 서울의 변두리 골목을 하염없이 헤매고 다니는 한 대학생‘나’가 있다.‘나’는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분신하고 타살당한 지난 5월에 왜 죽지 않고 살아남았는지, 죽은 사람들은 왜 죽어야만 했는지 그 이유를 알기 위해 필사적으로 방황하는 중이다.

 

우리는 그 누구라도 그 어느 곳에서든 죽을 수 있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죽음보다도 더 우연적인 것처럼 보였다. 그해 많은 학생들이 스스로, 혹은 타의의 의해 생명을 잃었다. (…) 내가 살아남은 건 너무나 우연에 가까웠다. 그 죽음이 필연이라고 떠들어대면 댈수록 내 삶은 점점 더 우연에 가까워졌다. 그렇게 가장 먼저 삶과 죽음이 서로 그 자리를 바꿨고, 그다음에는 정의와 불의가, 진실과 거짓이, 꿈과 현실이 서로 뒤엉키기 시작했다. 김지하의 글과 박홍의 기자회견으로 시작된 그런 혼란은 유서대필사건으로 그 절정에 이르더니 결국 정원식 총리를 향한 계란과 밀가루 투척사건으로 완결됐다.(1회 150~1면)4

 

‘나’를 사로잡고 있는 삶의‘우연성’이란 문제는 삶과 죽음에 필연적인 이유가 없다는 것, 곧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의문으로 비약하는 근본적인 질문이다. 그러나 이처럼 삶의 의미를 곧바로 묻는 일은 라깡이 말하는‘실재’와 직접 대면하는 것이며, 이 치명적인 물음은 다른 우회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나’는 두가지 우회를 시도한다. 첫번째 우회는 역사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삶의 필연성을 실감하는 것이다. 이것은 공적 역사의 방향이고 1980년대식 방향이며 리얼리즘소설의 방향이기도 하다. 어느 책에서 “너의 인생을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맡기지 말라. 무엇보다도 네가 선출한 지도자에게는 맡기지 말라. 자기 자신이 되어라”(1회 151~2면)는 구절을 발견하고 위안을 얻은‘나’는 김귀정이 죽어간 백병원 영안실에서 상징적인 죽음과 재탄생의 제의를 치른 뒤,‘전대협’방북행사의 예비대표로 베를린에 파견된다.5 그러나 베를린에서도‘나’의 정체성 혼란은 극복되지 않는다. 학생운동 지도부의 붕괴와 교체 와중에서 잊혀진 존재가 되고 만 것이다. 북한으로 들어가게 될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게 될지, 아니면 독일에 계속 남아 있어야 할지,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불투명한 독일 체류기간 동안‘나’는 “내가 누구이며 왜 여기에 있는 것인지 이해하고자 안간힘을”(1회 142면) 쓰게 된다.

여기서‘나’가 삶의 허무와 우연성에 맞설 수 있는 두번째 우회가 등장한다.‘소설쓰기’가 바로 그것인데, 이는 사적 이야기의 방향이고 김연수식 소설이며,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이라는 텍스트 자체이기도 하다.‘나’는 노트를 하나 사서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알고 봤더니 이 세상은 이야기로 가득차 있었다”(2회 126면), “이 세상에 무의미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 세상은 온통 읽혀지기를, 들려지기를, 보여지기를 기다리는 것들 천지였다.”(2회 152면)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은‘나’가 그‘초록색 노트’위에 쓴 “아무런 의미도 찾을 수 없는, 믿지 못할 이야기들”(6회 176면)의 기록이다. 그 노트에는‘나’가 베를린에서 만난 사람들과 그들로부터 들은 기구한 사연들,‘나’가 기억하고 상상하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뒤섞여 있다. 거기에는 유대인 강제수용소에서 극적으로 생환한 뒤 죽은 동료의 이름으로 개명하고 제3세계 망명객들의 후원자가 된 헬무트 베르크의 이야기, 떠돌이 일용직 노동자에서‘광주의 랭보’이길용으로, 그리고 혁명적 문화운동가 강시우로 “이 세상에 두번 다시 태어”난 사람의 기막힌 사연, 모범적인 고등학생에서 느닷없는 폭행으로 망가져 자살에 이르는 정민 삼촌의 비극 등 역사의 우연한 폭력에 의해 삶이 완전히 바뀌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비롯, 평생을 무주 산골에 살면서 세상천지 안 가본 데가 없다는 정민 할머니, 간호사로 독일에 왔다가 화가가 된 안젤라 아줌마 등 서로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거나 아니면 전혀 무관한 수많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서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6회 153면)지는 이 무수한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나열하고, 그것들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고 또 흩어지는지 따지는 일은 상당한 품이 들 뿐 아니라, 그다지 효과적인 방안도 아니다. 한가지 모티프와 한가지 에피쏘드를 통해 그 소설적 의도를 추정해보기로 하자. 먼저, 작품의 서두를 장식하는 할아버지의‘입체 누드사진’. 몽상가로 한평생을 거침없이 살아온‘나’의 할아버지는 말년에 두편의 글을 남긴다. 하나는 “한국현대사의 모든 격동기를 온몸으로 지나온 한 남자의 생애를 담은 203행의 대서사시”이고, 다른 하나는 “지극히 개인적인 체험을 담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산문이다. 그런데 4·4조의 장중한 어조로 이어지는 대서사시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너무나 뻔”한 내용을 담고 있을 뿐이다. 할아버지의 진짜 생애는 아마도 “그 누구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는 진실”을 회고한 개인적 산문에 담겨 있었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임종 직전 대서사시만 남긴 채 모든 것을 불태워버리는데,‘나’는 타다 남은 산문조각과 사진 한장을 몰래 간직한다.‘누드사진’은‘대서사시’에 맞서는 인간의 사적 진실을 상징하는 모티프이자, 이 소설에 나오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이어주는 매개물이기도 하다. 베를린에서 열린 강시우의 양심선언 기자회견은‘모든 매스컴은 반(反)커뮤니케이션이다’라는 황지우의 명제를 희화적으로 예증하는 에피쏘드이다. 회견장에서 강시우는 자신이 안기부의 의식화교육을 받고 진짜 유물론자가 되었음을 장황하게 설명하려 애쓰지만, 그에게 주어진 역할은 프락치활동의 내용을 밝힘으로써 최근 벌어진 간첩사건이 조작되었음을 증언하는 것일 뿐이다.‘법정’과‘신문’과‘텔레비전’은 한 인간이 프락치로 변신하는 과정에 개입된 개인의 고통과 상처와 절망, 곧 “한사람의 인생”에 대해서는 무심한 것이다.

역사의 공적 기록은 필경 개인의 사적 진실을 누락할 수밖에 없다. 소설은 역사가 누락한 인간적 진실을 추적하고, 개별자들이 말하지 못한 이야기를 스스로 말하게 해야 한다. 그것은 필연의 정사(正史)가 아니라 우연한 이야기이며, 거창하고 분명한 공적 기록이 아니라 모호하고 이율배반적인 개인의 사연이 될 것이다.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은 이처럼‘서사시’에 누락되어 있는‘이야기’, 공적인 역사기술이 지워버린 개별적인 인간들의 사연을 최대한 그대로 복원한 이야기의 향연이다. “이 세상을 가득 메운 수많은 이야기”들은 “이 세상에 그만큼 많은 나”(2회 123면)가 존재한다는 신호이며, 결국 “이 우주의 모든 것들이 서로 연결돼 있다”는 것, 이길용의 말에 따르면 “섭동”(6회 139면)의 증거이다. 그 모든 이야기들을 듣고 받아적을 때‘나’는 비로소‘삶의 우연성’을 견디고 계속 살아 있을 수 있게 된다.

‘이야기’는 김연수 소설의 또다른‘가면’(『가면을 가리키며 걷기』)이며‘주석 달기’(『꾿빠이 이상』)의 다른 방식이기도 하다.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은 김연수 소설의 지속적인 명제, 예컨대‘삶의 의미는 이해될 수 없다’‘진실은 말해질 수 없다’‘세계는 투명하게 재현될 수 없다’는 근본적인 문제의식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를 암시하는 한편, 그 문제의식을 소설쓰기의 방법으로 밀고 나가는 현장 자체인 텍스트이다.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역사와 이야기를 맞세우고 단호하게 후자의 길을 가는 이 소설에서, 어떤 독자는 역사에 대한 환멸을 강요당한 한 세대의 상처를 발견할 것이고, 또 어떤 독자는 지나치게 단순한 대비에 내포된 단절에의 강박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장편소설이 가는 길은 갈 수 있는 하나의 방향이며 좀더 추구되어도 좋을 방향이다. 근본적인 질문과 도저한 절망을 소설쓰기의 집요한 동력으로 삼고 있는 이 작품을 통해 우리는 소설언어의 가능성의 한 절정을 경험할 수 있으며, 한국소설의 인식론적 깊이가 한층 심화되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4. 단절의 감각을 넘어서

 

김영하의 『빛의 제국』은 21세기 남한의 수도 서울을 살아가는‘386세대’의 현재를 그리며, 김연수의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은 1991년‘5월투쟁’의 경험을 작품의 기원으로 삼는다. 모두 한 세대의 역사적 경험과 연관된 소재이지만, 두 작품은 그 경험에 내포된 역사성, 이를테면 이상과 현실, 현재와 과거를 대조하는‘후일담소설’이나‘성장소설’의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과거의 기억보다 현재의 삶에 집중하는 전자를‘후일담 이후의 후일담’, 원초적 체험을 소설적 방법론으로 전환시킨 후자는‘중단된 성장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빛의 제국』은‘후일담’의 정념을 억제하고 현대 소비사회의 일상을 깊숙이 파고들며,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은‘성장’의 서사를 중단하고 글쓰기 자체의 한계지점까지 육박해간다. 그러나 『빛의 제국』에서 적극적인 윤리적 태도의 부재가 아쉬운 독자도 있을 것이고,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에서‘전대협세대’의 핍진한 성장소설을 기대한 독자도 있을 것이다.

두 작품은 이념, 역사 등 거대서사의 효용성을 의심하고 철저하게 개인의 차원에서 가치의 준거를 발견하려는 태도를 공유한다. 이런‘단절’의 감각은 대대적인‘탈주의 시대’였던 1990년대 이래 일반화된 것이기도 하다. 이런 태도는 두 작가의 기본적인 성향이고 문학적 성취와 매력의 중요한 근거가 되지만, 어딘가 한쪽에 치우친‘탈주’의 상상력이라는 느낌도 준다. 여기서 1980년대와 1990년대의 익숙한 대차대조표를 나열하거나 소박한 2000년대식 종합을 기대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세대의 장편소설이 대중성을 갖춘 보편적 공감의 형식으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한국소설의 과거 경험에서 활용할 만한 문학적 자원들을 다시 한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

카라따니 코오진(柄谷行人)은 최근 한국문단에 충격을 던진‘문학종언론’6에서 정치적·도덕적·윤리적 과제를 짊어지지 못하는 문학은 엔터테인먼트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카라따니가‘종언’을 선언하는 데 직접적인 동기를 제공할 정도로 현재 한국문학의 상태는 낙관적인 편이 아니며, 어쩌면 소수자의 언어나 단순한 읽을거리로 전락하기 직전의 상태일지도 모른다. 근거자료나 논증 부족을 이유로‘종언론’을 반박하기에는 한국문학의 전반적인 활력과 작품적 성과가 부족한 것이다. 카라따니처럼 문학을 근대적 제도의 일환이라는 관점에서 파악한다면, 한국문학의 종언은 불가피한 대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에게 문학은 제도이면서 제도 이상이었고, 문학은 정치운동의 “대리적 표현” 이상이었다. 1990년대 이후 세대는 단순히 자율적 예술에 머물지 않고 정치적·도덕적·윤리적 과제의 일부를 감당해온 한국문학 특유의 활력을 기억하고 활용하며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 살펴본 한 소설에는 다행히 그런 희망을 상기시켜주는 구절이 있다. “한 시대의 우울을 내가 감당해야만 한다면, 그래야만 내가 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라면, 기꺼이 그 모든 것을 내 등에 떠메기로 나는 마음먹었다.”(『모두인 동시에 하나인』, 1회 154면) 좋은 문학은 언제나‘한 시대의 우울’을 기꺼이 감당함으로써 문학을 넘어서고 또 문학 자신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렇다면 장편소설은 지금‘우리 시대의 우울’을 조금 더 등에 짊어지고 가도 좋을 것이다.

 

 

__

  1. 조희연 「우리 안의 보편성: 지적·학문적 주체화로 가는 창」, 신정완 외 『우리 안의 보편성』, 한울아카데미 2006 참조. 물론 이것은 하나의 방향 제시일 뿐, 개념 자체의 타당성과 효과에 대해서는 논의의 여지가 적지 않다. 조희연의 주장에 대한 비판적 평가와 재반론은 박명규 「‘오만한 자임’과‘겸허한 성찰’의 거리」, 『창작과비평』 2006년 가을호; 강정인 「우리 안의 보편성: 조희연,‘우리 안의 보편성: 지적·학문적 주체화로 가는 창’을 중심으로」, 『경제와사회』 2006년 겨울호; 조희연 「‘성찰적 자기보편화’의 과제는 여전히 유효하다」, 『경제와사회』 2007년 봄호 등 참조.
  2. 김이은 「김영하 작가 인터뷰-그가, 몸을 바꾸다」, 『작가세계』 2006년 가을호, 94~5면.
  3. 소설 속에는 김기영이 내면에서 어떤 선택을 하는지 명시적인 묘사가 나오지 않는다. 그는 하루 종일 동분서주하며 귀환을 준비하는 제스처를 취한다. 그러나 어렵게 다시 찾은 그의 위장여권은 이미 기한이 만료된 상태이다.
  4. 이른바‘분신정국’또는‘5월투쟁’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노태우정부의 3당합당과 공안정국에 반대하여 일어난 6월항쟁 이후 최대 규모의 저항운동이었지만,‘유서대필사건’‘정원식 총리 봉변사건’을 전후한 국가의 물리적·이데올로기적 공세에 밀려 운동의 도덕성이 크게 손상됨으로써‘실패’한 것으로 평가된다.‘5월투쟁’은 이른바‘전교조세대’‘전대협세대’‘91년 5월세대’등으로 불리는 동세대 작가들의 청년기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김별아의 『개인적 체험』(1999), 김탁환의 『누가 내 여자친구를 사랑했을까』(1999), 김종광의 『71년생 다인이』(2002) 등에 당시의 체험이 직간접적으로 담겨 있다.
  5. ‘나’의 베를린행을 기점으로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의 서사는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뉜다.‘나’와 애인 정민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전반부가‘5월투쟁’세대의 대학시절을 담은 일종의 성장소설에 가깝다면, 후반부는‘나’가 베를린에서 만난 사람들의 사연과 듣고 기억하고 편집한 수많은 이야기들이 뒤섞이면서 1인칭 화자의 통제를 벗어나 자립적으로 분화해나간다고 할 수 있다.
  6. 카라따니 코오진, 조영일 옮김 『근대문학의 종언』, 도서출판 b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