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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지하철을 탄 ‘호모 크리티쿠스’
정과리 비평집 『네안데르탈인의 귀환』
류신 柳信
문학평론가, 중앙대 독어독문학과 교수. 저서로 『다성의 시학』 『이카루스, 다이달로스, 시시포스』 등이 있음. pons@cau.ac.kr
정과리의 비평집 『네안데르탈인의 귀환』(문학과지성사 2008)은,‘소설의 문법’이란 부제가 보여주듯이, 황순원, 이청준, 김주영, 복거일, 윤흥길, 이인성, 성석제, 백민석 등 문단의 노·장·청 소설가의 문제작에 내재한 문법구조를 밝히는 데 주력한다.
여기서 그가 깔끔하게 총정리한 소설의 내적 문법이란‘되풀이 살면서 다르게 살기’로 괄약(括約)될 수 있다. 요컨대 소설이란 “다시 살아보기, 즉 생의 반복으로써 생으로부터 차이나는 짓”, 부연하자면 “현실의 좌절과 절망을 글로써 되풀이하여 다른 (불)가능한 현실을 꿈꾸는 방법적 장치”라는 것이다(9면). 이렇게 보면 소설의 문법이 생성되는 곳은 생의 반복과 차이가 회통하는 역설적 점이(漸移)지대이자, 절망의 나락과 희망의 심연 사이이다. 물론 반복적으로 좌절을 요구하는 현실의 내부에‘또다른 곳’(heteropia)을 기획할 수 있는 방법, 즉 되풀이 살면서 다르게 사는 방식은 각양각색, 무궁무진할 터. 부단히 새로운 이야기가 씌어질 수 있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정과리는 이 무한히 생산되는 삶의‘반복-차이’의 세목들을 유형별로 나눈다. 말하자면 그는 소설의 기본문법을 세분화하는 것이다. 문단에서 이미 정평이 난 작명가답게 그는 소설의 기본문법에서 파생된 세가지 변형문법에 각각 대위법, 중첩법, 혼종법이란 이름표를 달아준다. 여기서 문제는 이러한 소제목 아래 배치된 개개의 소설론에서 이들 변형문법의 원리가 명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의 평문은 얄궂게도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 내적 문법을 찾아내도록 암시만 줄 뿐이다. 그의 비평이 정교하게 짜인 추리소설처럼 매혹적인 이유도, 동시에 주모(主謀)하는 바를 파악하기 힘든 사발통문처럼 난해한 소이도 여기에 있다.
그럼 이제 그가 분석의 표적으로 삼은 소설의 변형문법의 정체를 밝혀보자. 먼저 대위법. 이청준(李淸俊)의 『당신들의 천국』과 김주영(金周榮)의 『홍어』를 관통하는 내적 문법이다. 전자는 인류의 두가지 근본적 가치인 사랑과 자유를 손쉽게 화해시키지 않고 둘 사이의 길항을 의도적으로 계류시킴으로써, 후자는 나의 성장사와 어머니의 수난사라는 두개의 주선율을 쉴 새 없이 교차 반복시킴으로써 서사적 긴장을 강화한다.
중첩법. 윤흥길(尹興吉)의 단편소설들과 이인성(李仁星)의 『한없이 낮은 숨결』을 추동하는 근본원리이다. 전자에서는 자아와 타자, 주체와 객체가 서로 오버랩되어 있다면, 후자의 경우에는 의식, 전의식, 욕망이 세겹으로 포개져 있다. 윤흥길 소설의 인물들은 “인력을 가진 존재들이며, 인력 속에 놓인 존재들”(156면)이라서,‘나’는 타자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비로소 진정한 자아로 되돌아오며, 타자는‘나’와 포개짐으로써 비로소 타자성을 획득한다. 한편 이인성 소설 속의‘나’는 데까르뜨적 독립주체가 아니라 “복수의 욕망”(191면)으로 들끓어 수많은 일인칭으로 핵분열되면서 합리적 이성이 갈라놓았던 의식과 무의식, 현실과 허구를 겹쳐놓는다.
혼종법. 성석제(成碩濟)의 『홀림』과 백민석(白旻石)의 『16믿거나말거나박물지』에 산종된 종요로운 씨앗이다. 근대의 공간에서 또렷하게 분리되어 있던 풍자와 비애가 돌연 엇섞이고 뒤섞이면서 자아내는 포스트모던적인 웃음, 이것이 성석제식 웃음의 요체라면, “책과 뉴미디어의 이 협잡, 위대한 진공관 시대와 디지털 음향의 이 공모, 창조의 신화와 자질구레함의 이 나락 사이의 이 안달복달”(265면), 즉 다종다양한 사물들의 이합집산, 합종연횡에 의해 주변으로 밀려난 무기력하고 권태로운 인간, 이것이 백민석이 간파한 현대인의 존재방식이다.
여기서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정과리가 소설의 금광맥을 찾으려고 애면글면하는 동안 그의 글쓰기 방식 역시 어느새 자신이 규정한 소설의 문법이 낸 길을 좇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의 글쓰기는, 바로끄시대 바흐가 완성한 서양음악의 기본원리, 즉 독립성이 강한 둘 이상의 멜로디를 동시에 결합시키는 대위법적인 특징을 보이기도 하고, 르네쌍스시대 화가 마자치오(Masaccio)가 창안한 회화기법, 즉 앞의 물체와 뒤의 물체를 겹치게 그리는 회화의 중첩법을 차용함으로써 2차원의 텍스트에 3차원의 공간적 깊이를 창출하기도 하며, 호미 바바(Homi Bhabha)가 이론적 밑돌을 놓은 탈식민주의의 핵심개념, 즉 이질적인 서구의 문화를 수용하면서 동시에 제3세계의 독자적인 관점에서 타자의 문화를 변형시키는 혼종성에 기대어 이식과 창조의 변증법적 글쓰기 전략을 모색하기도 한다. 이렇게 보면 그에게 소설의 문법은 곧 비평의 문법인 셈이다. 그는 텍스트에서 소설의 문법을 추출하고, 이 소설의 문법에 기초해 비평의 문법을 세워간다.
그렇다면 정과리 비평의 세가지 변형문법을 낳은 보편문법은 무엇인가? 단언컨대, 그의 글쓰기 유격전을 위한 교본은 변증법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의 글쓰기 문법이 모순을 지양함으로써 종합이라는 궁극적 목표를 향해 질주할 때도 있고, 두가지 가치 중 어느 하나가 절대적 진리를 쥐고 있다는 이데올로기적 오류를 경계하며 양극 사이에서 부단히 요동할 때도 있다는 사실이다. 전자인 헤겔의 변증법을 실천할 때 그의 비평은 문제를 던지면서 처방을 제시하고, 가정을 세우자마자 결론을 도출해내는 논리적 추진력과 박진감있는 문장을 얻는다. 후자인 바흐찐(M. Bakhtin)의‘변증법적 양가성’을 수용할 때에는 진리의 이중성을 드러내고 상황의 입체성을 보여주는 반성적 회의와 아이러니한 문체를 얻는다. 이렇게 보면 정과리는 변증법의 중독자이면서 변증법의 반성자이다. 그가 첫 평론집을 포함해 네권의 평론집에 모두‘문학, 존재의 변증법’이란 이름을 부여한 사정도 그의 이중정체성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그렇다면 이제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왜 그는 『네안데르탈인의 귀환』에서 자신이 정초한 비평의 문법을 동원해 소설의 문법을 세우려 하는가? 당겨 말하면, 그것은 비평의 쇠락시대에 비평의 기원과 목적을 다시 생각하기 위함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멸실의 위기에 직면한 공감의 비평의 입지를 새롭게 다지기 위함이다. “아이디어와 이론으로 작품을 포장하는‘조념(造念)비평’이 전국적인 유행이 된”(10면) 이즈음, 텍스트의 살 속으로 파고들어 그것과 하나가 되려는 화간(和姦)의 비평, 즉 성애적 교감의 비평을 되살려내려는 조용한 야심을 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작품에 장식처럼 덧입힌 두터운 이론적 추상의 겉옷과 정치경제, 문화사회적 해석의 외피를 벗겨내고 작품의 알몸을 세세히 톺는 원시적 비평감각의 복원을 선언하는 것이다.
이 평론집의 제목으로 등장한 네안데르탈인은 현학적 꾸밈과 이론적 치장에는 관심 없지만 작품의 원기소(元氣素)만큼은 집요하게 채집하는, 비평의 원시성을 체현하는 인류학적 표지이다. 정과리는 정교한 인공물을 만드는 기술은 보유하고 있었으나 의상과 장신구, 보석과 귀걸이로 자신을 치장할 줄 모르는 네안데르탈인의 아비뛰스(habitus)에서 이론에 오염되지 않은 비평의 순수한 처녀성을 읽은 것이다. 그러니까 네안데르탈인의 귀환이란 공감의 비평으로 복귀하려는 정과리의 출사표에 다름아니다. 정치한 분석의 반달돌칼을 손에 쥔 비평의 선사인(先史人)‘호모 크리티쿠스’(homo criticus)가 돌아온 것이다.
김치수(金治洙)는 공감의 비평을 “비평가와 작가의 의식의 만남”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공감의 비평을 위하여』). 평자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킨 작품에 다가가 그 깊숙한 내부에서 글을 지은 이의 문제의식과 “통째로 눈 맞추고 몸 비비는”(『네안데르탈인의 귀환』 12면) 것이 공감의 비평이라는 말이다. 이번 비평집에서 정과리는 “저 옛날의 비평”의 “복원사업”(같은 곳)을 수행하기 위해 줄곧 텍스트의 시원으로 내려가 작가의 전언을 귀담아듣는다.
하지만 공감의 비평이 지니는 한계도 있다. 작가의 의식과 공명(共鳴)하기 위해 텍스트를 천착하는 공감의 비평은 자신이 판 땅굴에 갇히기 쉽다. 따라서 공감의 비평은 작가의 의식과 랑데부하는 지점에서 텍스트의 바깥, 즉 현실로 나오는 통로를 찾아야 한다. 정과리의 비평이 텍스트의 동굴 안에서 벽화를 그리는 네안데르탈인에서 텍스트의 안팎으로 뚫린 철길을 따라 움직이는 지하철을 탄‘호모 크리티쿠스’로 진화해나가길 기대한다. 그래서 그의 비평이 작가의 (무)의식과의 교감을 넘어 텍스트가 씌어진 시대를 성찰하는 차원으로 확장되었으면 좋겠다. 비평이란 궁극적으로 작품의 미적-윤리적-정치적 가치를 평가하는 일이 아닌가. 비평의 요람은 텍스트이다. 동시에 “비평이 본래 있어야 할 곳은 원근법적 조망과 전체적 조망이 중요한 세계”(발터 벤야민 「세놓음」)이다. 현미와 망원, 분석과 인식의 접붙임이 비평의 관건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