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초점
비평이 시작되는 곳을 지시하는 비평
정홍수 평론집 『소설의 고독』
김형중 金亨中
문학평론가. 평론집 『켄타우로스의 비평』 『변장한 유토피아』 등이 있다. unabomber5@hanmail.net
천기누설이랄 것도 없이 직업상 비밀 한가지를 털어놓자면, 어떤 평론가가 평문 한가운데에 써넣은‘아프다’같은 말들, 곧이곧대로 믿을 바 아니다. 평문에 기록된 평론가의 감정이란, 때로는 평문의 완결성을 위해, 때로는 수사적인 이유로, 가장이거나 과장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 어떤 평론가가 정홍수(鄭弘樹)라면 사정이 다르다. 가령 정홍수가 전성태의 단편 「늑대」를 두고 “서늘하다”(48면)라고 말했다면, 그는 정말로 책을 읽다가 몸에 소름이 돋고 등줄기가 오싹했던 것이다. 그가 이혜경의 「틈새」 말미, 죽음과 삶 사이에서 갈 곳 몰라하는 주인공을 두고 “아프다”(54면)라고 말했다면, 그는 정말로 왼쪽 가슴 어딘가에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꼈던 것이고, 김인숙의 「조동옥, 파비안느」를 읽으며 “잠시 숨을 멈추고 소설화자의‘말이 되지 못한 아픔’을 생각하고 살펴야 하는 순간들이 있”(55면)었다고 말한다면, 그는 정말로 몇순간 책읽기를 멈추고 화자의 아픔을 살핀 적이 있는 것이다. 십수년 만에 첫 평론집을 낼 만큼 과작(寡作)이었던데다 어디 지면에서건 큰 목소리 한번 낸 적이 없었으니 그와 술 한잔 마셔보지 않은 독자들로서는 도대체 그의 인품을 알 리 없겠으나, 문단에서는 알 만한 사람 다 아는 사실이다. 장담하건대, 그는 작품에 관한 한 거짓말하지 않는 사람이다. 심지어 그가 자신이 읽은 작품들에 대해 고언보다는 거의 경배에 가까운 찬사만을 늘어놓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의 진심이다. 그는 진심으로 작품 앞에 “엎어지는”(「책머리에」) 비평가다.
이번 책 『소설의 고독』(창비 2008)의 「책머리에」에서 그는 이렇게 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으리라는 착각은 지금도 좋은 소설과 문학 앞으로 나를 이끄는 뿌리치기 힘든 미망이다.”(5면) 이런! 믿을 수 없게도, 그는 여태 소설을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 속에서 읽는단다. 그러니까 그에게 소설을 읽고 평론을 쓰는 행위는 평론가라는 직업의식의 발로도 아니고, 많이들 감추고 다니는 지적 과시욕이나 인정욕망의 산물도 아니다. 그에게 소설 읽기는 자기수양이고, 더 나은 인간성에 대한 탐구다. 그런 그가 작품 앞에‘엎어지는’것을 두고 탓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악인이다.
실제로 그의 평문들을 읽다 보면 자주 뱀을 연상하게 되는데, 엎어진 자세 그대로, 신체 대부분을 대지와 맞대고 살아가는 그것의 생태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의 글은 마치 뱀 같아서, 내가 아는 한 그 어떤 평문보다 텍스트와의 접면을 가장 넓게 유지한다. 그의 문장들은 텍스트와 가능한 한 틈없이 밀착하고, 그 속으로 들어가고, 그것과 섞이고, 그러다 어느 순간 허리를 곧추세운 채로 그것에서 빠져나온다. 그럴 때, 나처럼 의심도 많고 그와는 사뭇 다른 취향을 가진 독자라 할지라도 그 진정성 앞에 고개를 주억거리지 않기는 힘들어진다.
그러나 생경한 이론이나 개념과는 거리를 두고 행해지는 그의‘공감의 비평’이 항상 읽기 쉬운 문장들만 생산한다고 믿어서는 곤란하다. 의외로 그의 문장들은 예리할 뿐만 아니라 읽기 위해 많은 노력이 필요할 때가 많다. 글이 어려워서가 아니다. 글의 밀도가 높고 많은 사전지식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김훈의 소설세계를 “소설적 탐험의 여지를 스스로 제한하면서 언어의 밀도만으로 소설의 영토를 밀어붙이는 예외적인 글쓰기”(61면)라고 명료하게 정의할 때, 혹은 윤성희의 소설세계를 “독아론적‘나’를 지우고 그 빈 공간에 복수의‘나들’을 끊임없이 드나들게 하는 수다스런 고독”(63면)이라고 단박에 요약할 때, 그의 문장들은 벨 것처럼 날카롭고 압축적이다. 물론 그의 글이 지닌 이와같은 밀도는 그가 작가와 작품들에 가진 애정에 비례한다. 김남일의 주인공들이 처한 암중모색의 상황을 작가 자신의 상황으로 치환한 후 “김남일 소설이 기어코 찾아낸 작은 연대와 그 위에 세워놓은 삶의 이유가 참으로 아름답고 눈물겹다. 아마도, 다시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147면)라며 미래를 함께 걱정해줄 때, 혹은 마치 연애라도 걸듯이 “지난 삶의 가혹한 운명을 지우고 싶어하는 한 사람의 공선옥과, 그럼에도 그 가혹한 운명을 껴안고 그 안에서 글쓰기를 밀고 가려는 또 하나의 공선옥, 이 둘의 수다스러운 싸움을 사랑한다. 안타까운 싸움의 도정에서‘따순’손바닥의 긍정에 이른 그 씩씩한 마음을 사랑한다”(159~60면)고 고백할 때, 그는 비평가란 차가운 논리의 소유자이기 이전에 우선 작가의 가장 가까운 동료여야 한다는 평범한, 그러나 자주 잊어버리는 진실을 거듭 상기시킨다. 그리고 바로 그 한없는 애정과 공감 속에서 느리고 꼼꼼하게 의미를 해석하고, 인물들의 심리를 추리하고, 작품의 공과를 따지고, 미세한 변화의 지점들을 포착해낸다. 요컨대 정홍수가 다루는 작가와 작품에 대해 그만큼의 애정과 공감을 갖지 않고서는 그 더딜 만큼 집요한 문장들의 진행을 이겨내기 힘들어진다. 그러나 그래야 하는 것 아닐까? 정홍수의 말대로 “한 사람의 작가를 갖게 된다는 것은 그를 통해 하나의 세계를 얻는 일”이고 “그가 아니었으면 표현에 이르지 못했을 인간 진실의 새로운 광학을 발견하는 일”(163면)일진대, 그만한 노력과 인내 없이 소설을 읽어서는 곤란한 것 아닐까?
그의 글을 읽기 위해서는 많은 사전지식이 필요하다는 말도 예서 그리 멀지 않다. 이청준이나 김원일, 김성동 같은 노장들부터 이혜경, 구효서, 윤대녕, 공선옥, 김인숙, 김소진 같은 90년대 작가들과 강영숙, 조경란, 조선희, 윤성희, 전성태, 편혜영 등 최근 작가들에 이르기까지 그가 읽어낸 작품들의 수는 헤아리기 힘들다. 게다가 그는 한 작품을 그 작품만 고립시켜 읽는 법이 없다. 이전 작품들과 꼼꼼히 비교하며 아주 미세한 변화까지 놓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그의 글을 읽는 독자들은 그의 논지를 따라가기 위해서라도 대상 작가들의 작품을 통시적으로, 그것도 공감과 애정을 가지고 꼼꼼하게 읽어야 하는 행복한 부담을 떠안는다. 그래야만 그가 소설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 이론이나 개념으로는 도달하기 힘든 생의 신산과 아이러니, 인간 내면의 오묘함과 역설, 소설의 오래된 고독과 힘 같은 것들에 동의할 수 있다.
그러한 것들에 일단 동의하고 나서야, 독자들은 이제 그에게 던져야 할 질문들을 던질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될 것이다. 아마도 그 질문들은 대개‘작품에 대한 미시물리학적 분석은 여기 있는데 거시적인 분석, 가령 21세기 한국문학의 가능한 지형도 같은 것들은 어디로 갔습니까?’따위가 되겠지만, 설사 그 답이 이 사람 좋은 평론가 정홍수의 손에 아직 쥐어져 있지 않다 한들 별반 문제될 것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누구나 잘하는 것과 상대적으로 마다하는 일이 있게 마련이다. 정홍수는 지금 그대로, 험담하고 쪼고 조망하고 끌어다 쓰는 것 이전에 비평이 시작되는 최초의 자리를 지시하는 평론가로 남았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