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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2000년대 한국문학이 읽은 시대적 징후

 

성(性)을 사유하는 윤리적 방식

최근 한국문학에 나타난 성·사랑·가족에 대한 단상들

 

 

김형중 金亨中

문학평론가. 주요 저서로 『소설과 정신분석』 『켄타우로스의 비평』 『변장한 유토피아』 등이 있음. unabomber5@hanmail.net

 

 

불경을 지고 가던 우리집 늙은 암소

 

이견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김훈(金薰)의 「언니의 폐경」(『강산무진』, 문학동네 2006)은 그 자체로는 흠잡을 데 없는 텍스트이다. 김훈 단편 특유의 구성력과 미문은 이 작품에서도 여지없이 빛을 발한다.

언니의 등 뒤로는 매번 곱게 늙은 노을이 지고, 그 노을 속으로 물고기를 닮은 비행기가 뜨고 내리기를 반복한다. 붉게 물든 하늘 아래로는 강이 흐르고, 그“강의 흐름이 두 번 뒤집히면 하루가”(262면) 간다. 달이 그 강의 흐름을 주관한다. 물론 언니의 몸도 주관하는데, 침대 시트를 생리혈로 더럽힌 정월 대보름 밤, 언니는 말한다. “얘, 커튼을 닫자. 달 때문이야.”(233면) 침대 시트는 마른풀 서걱거리는 소리가 날 정도로 정갈하게 풀 먹인 옥양목, 주로 채식만 즐기는 언니가 그 위에서 잔다. 기도(氣道)에 ‘카이바시라’가 걸려 숨을 못 쉬는 손자를 살려내는 이도 언니고, 낙오한 조류(鳥類)와도 같은 인상의 ‘그이’를 품어 사랑하는 이도 언니다. 언니는 소설 말미에서 원효의 제자인 사복(蛇福)의 어머니와 동일시되는데, 사복은 자신의 어머니가 죽자 이렇게 말했단다. “불경을 싣고 가던 우리집 늙은 암소가 이제 죽었다.”(274면) 월경(月經)의 ‘經’과 불경(佛經)의 ‘經’이 같은 글자이니, 사복의 어머니처럼 언니도 부처의 풍모를 부여받는 셈이다.

언니 주변엔 몇사람의 남성이 있다. 그들은 모두(수컷들의 경쟁에서 낙오한 ‘그이’를 제외하고) 차갑고 단단한 금속성의 이미지들에 둘러싸여 있고, 위압적이고 무거운 검은색을 선호하며, 혈족주의와 배금주의의 신도들로 그려진다. 비행기사고로 죽은 형부는 일 중독자였고, 제철회사 인사관리부서에서 일했다. 모든 가부장들이 그렇듯이 가문의 대소사에 아내를 대동해 체면 차리기를 즐기는 ‘나’의 남편은 고향에 내려갈 때마다 8기통 검은색 승용차를 즐겨 탄다. 아마도 그 차는 항상 차갑고 빛나게 손질되어 있을 것이다. 그 역시 인사관리부서에서 일했는데 낙오한 조류를 닮은 ‘그이’를 퇴출시킨 이가 바로 남편이다. 조카와 언니의 시댁 남자들은 형부가 남기고 간 20억을 두고 드잡이를 마다하지 않으며, 연방“이래서 여자들한테 집안일을 맡길 수 없다니깐”(270면) 따위의 말들을 남발한다.

이전의 단편들에서 그랬듯 김훈은 이 작품에서도 비행기의 상승과 하강, 물의 들고 남, 달의 차고 이지러짐 등 적절한 신화소(神話素)와 상징, 이미지와 리듬을 긴밀하게 상호 조응시키면서 여성의 몸에 잠재된 삶과 죽음의 이중성이란 테마를 관념의 노출 없이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언니는 여성성의 화신이다. 반면, 남성인물들 주위에는 언니의 이미지와 대조적으로 차갑고 위압적인 이미지들이 계열을 이루면서 ‘남성성/여성성’의 차이를 선명하게 부각시킨다.

「언니의 폐경」은 ‘잘 빚어진 항아리’다.

 

 

여성은 남성이다

 

그러나, 정말 여성은 꽃이거나 젖일까? 우물이거나 달일까? 꽃처럼 곱고, 우물처럼 깊고, 달처럼 풍요롭고, 대지처럼 넉넉한 여성, 그러나 그토록 우주화된 여성은 남성이다.1 아도르노는 말한다. “본능에 근거한다는 모든 유의 여성성이란 항상 모든 여성이 폭력적으로 강요당해야만 했던 것이다. 여성은 남성이다.”2 여성성이란 여성의 본능으로부터, 여성의 생물학적 특징으로부터 파생된 것이 아니다. 여성성이란 최종심에서는 남성중심적인 사회의 이러저러한 담론들이 여성에게 강요한 자질이다. 여성성에 대한 사유가 지극한 회의와 자성이 동반되지 않는 한(동반된다 하더라도), 거의 자동적으로 남성적일 수밖에 없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심지어 여성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인데, 성차에 대한 지배담론은 여성을 여성주체로 호출하는 데 일조한다. 여성 또한 그렇게 남성이 된다.

여성이라는“성별은 항상 헤게모니적인 규범들의 반복으로서 산출된다.”3 물론 헤게모니는 남성중심사회의 것이다. 여성이 꽃이고 밥이고 달이거나 물일 때, 남성들은 꽃을 꺾고, 밥을 먹고, 달빛을 거닐고 오래오래 양수 속을 유영한다. 여성성은 남성들의 실현되지 못한 꿈이다.

김훈만을 두고 하는 얘기가 아니다. 금홍이는 이상(「날개」)의, 안지야는 장용학(『원형의 전설』)의, 은혜는 최인훈(『광장』)의, 심청은 황석영(『심청』)의, 정희남은 김성동(『꿈』)의, 리엔은 방현석(「랍스터를 먹는 시간」)의 실현되지 못한 꿈이다. 물론 신경숙을 필두로 여성성의 이상화에 편승했던 90년대의 많은 여성작가들 또한 (비록 그들이 구부린 남성적 막대의 경사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런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타자와 이방인

 

여성은 이를테면 성기의 ‘두 음순’으로부터 나오는 확산된 성욕과, 남근중심적 담론과 같이 동일성만을 요구하는 가설 내에서는 이해도 표현도 될 수 없는 리비도적 에너지의 다중성(多重性)을 경험한다는 것이다.4

 

다소 생물학주의적인 냄새가 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A.R.존스의 이 말은 남성으로서 글을 쓰는 이들에겐 가히 치명적이고 절망적이다. 여성성이란 남근중심적 동일성 담론으로는 애초에 이해도 표현도 불가능하다. 남성들의 언어체계 안에(그리고 어쩌면 여성들의 언어 안에도) 여성을 위한 자리는 없다. ‘여성은 없다.’ 그런 판에 여성성을 말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남성작가가 자신이 기반하고 있는 사유의 틀 자체에 대한 회의 없이 여성을 말할 때는 더욱더 그렇다. 그것은 거의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비윤리적이기도 하다.

카라따니 코오진(柄谷行人)의 어법을 빌리자면, ‘비윤리적’이란 말은 ‘윤리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의미에 가깝다. 그렇다면 윤리는 언제 발생하는가? 타자의 외부성을 용인할 때 발생한다. 말하자면 타자를 연민과 동정의 대상, 혹은 질시와 모멸의 대상으로 ‘이방인화’하지 않을 때 윤리가 발생한다. 코오진의 말이다.

 

여기서 ‘타자’의 개념에 대해 확실히해둘 필요가 있다. 인류학자나 문화기호론자는 공동체 바깥에 있는 타자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 이방인〔異者〕은 공동체의 동일성·자기활성화를 위해 요구되는 존재이므로, 공동체의 장치 내부에 있다. 공동체는 그 이방인을 희생양으로서 배제하거나 ‘성스러운’자로서 영입한다. 실상 공동체의 외부로 보이는 이방인은 공동체의 구조에 속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의미의 타자는 그 어떤 타자성도 지니지 않는다.5

 

롤랑 바르뜨와 삐까소에 의해 일본이, 매스미디어와 하리수에 의해 트랜스젠더가, TV프로그램 「느낌표」에 의해 이주노동자들이 타자성을 박탈당한 채 동정이나 동경의 대상이 된다. 일본은 성스러워지고, 소수자들에겐 온정의 손길이 넘치지만, 타자와의 교통은 발생하지 않는다. 동일자는 결코 스스로는 타자화하지 않은 채, ‘이방인’을 맞아들이거나 배제한다. 여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남성중심 사회와 언어가 여성을 성스러운 자로서 영입한다고 해서 여성이 타자의 지위를 벗고, 정당하게 복원되거나 평등한 지위를 확보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그런 행위는 동일자에 의한 타자의 포섭에 가까울 텐데, 그럴 때 타자는 ‘이방인’이 된다. 타자란 근본적으로 동일자의 언어 밖에 있는 자, 절대적 외부성을 용인하지 않는 한 항상 이방인으로 배척받거나 과장되게 이상화되어버리고 마는 자이다. 여성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여성성을 언어화하려는 순간, 여성을 이상화하고 신화화하는 순간, 여성은 윤리와 교통의 대상으로서의 타자가 아닌, 구원자나 희생양이 된다. 받아들여진, 혹은 배제당한 이방인이 된다.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어도

 

그런 맥락에서 읽을 때, 김연수(金衍洙)는 남성작가들 중 유독 윤리적이다. 죽음을 불사하고,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어도, 김연수의 주인공은 ‘동녀국(東女國)’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는 자신이 읽고 있는 『왕오천축국전』의 저자 혜초 역시, 여자가 왕인 이 나라에 가보지 못했음을 안다. 그러나 그걸 알면서도 김연수의 주인공은 다시 한달을 간다. 설산 너머를 꿈꾼다. 그는 꿈에 보았던 여자친구의 오아시스에 대해서도 종내 기억해내는 것이 없다.

 

여자친구는 차근차근 오아시스에 대해 설명했다. 둘이서 함께 가본 적이 있는 그 이상한 나라에 대해. 누이와 결혼하고 어머니를 아내로 삼는 나라에 대해. 함께 갔었잖아. 여자친구가 말했다. 우리가 언제 그런 곳까지 갔었어? 아무리 기억해도 그는 그런 나라에 가본 일이 없었다. 우리가 사랑하는 동안에. 우리가 사랑하는 동안에? 하지만 그는 기억할 수 없었다. 꿈속이었지만, 그 사실이 무척이나 괴로웠다.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창비 2005, 131면

 

“누이와 결혼하고 어머니를 아내로 삼는 나라.”덜 자란 남성들(남성성이란 항상 유아성의 다른 이름 아닐까?)의 천국인 그 나라에 김연수의 주인공은 결코 가본 적이 없다. 가본 적이 없으므로, 그는 그 나라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 나라에 도달할 수 없음을 안타까워한다. 그러나 그 나라에 다다르려는 노력을 포기하지는 않는데, 오로지 여자친구의 죽음을 이해하기 위해 그는 사력을 다해 그녀에 대한 소설을 쓰고(그 소설의 첫 문장은 이렇다. “패배는 내 안에서 온다. 여기에 패배는 없다”), 사력을 다해 그녀가 마지막으로 읽은 『왕오천축국전』의 나라 동녀국으로 떠난다. 도달 불가능성을 알면서도 굴하지 않고 행해지는 그의 ‘등반(登攀)’은, 자주 그의 소설쓰기, 곧 ‘등단(登壇)’과 교차된다. 소설쓰기는 그에겐 동녀국이 있다고 적혀 있는 낭가파르바트 너머에 대한 탐사와 등가이다. 그리고 죽은 여자친구의 진실, 곧 여성성에 도달하려는 노력과도 등가이다. 등반과 글쓰기는 몇줄의 이해할 수 없는 문장을 남기고 자살해버린 여자친구를 이해하는 과정 자체이다. 그에게 여성성은 항상 저 설산 너머 도달하지 못할 외부, 언어의 외부에 있다.

아마도 타자에 대한 윤리는 이렇게 발생할 것이다. 우선 타자의 절대적 외부성에 대해 인정해야 한다. 그리하여 언어로도 등정으로도 도달할 수 없는 곳이 바로 타자의 처소란 사실을 용인해야 한다. 그러면 내가 속한 처소, 내가 속한 관습과 문법과 에피스테메가 어느 순간 회의의 대상이 되고 상대화된다. 그렇게 나 또한 타자성을 획득한다. 타자가 나에게 완벽한 외부이듯이, 나는 타자에게 완벽한 외부이다. 나는 타자의 타자가 됨으로써 타자와 동등해지고, 동등해진 두 타자간의 목숨을 건 교통 시도가 윤리를 낳는다. 김연수의 연애담들(『사랑이라니, 선영아』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은 농담」 「뿌넝숴」 「연애인 것을 깨닫자마자」 등)이 다 그렇지만, 그렇게 읽을 때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은 그중에서도 유독 윤리적이다.

 

 

어떤 모성은 잔인한 과대망상이다

 

시인들, 특히 이즈음의 젊은 여성시인들이 요구하는 것이 바로 그런 윤리다. 그들은 남성의 언어로 자신이 말해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스스로가 남성의 관찰대상이 되어 그들의 시선 앞에 주눅들게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들은 타자성을 요구한다.

 

감탄부호를 앞지르는 그녀들//지느러미가 하느작거리는/어느새 꼬리를 보이며 등 돌리는//아가미를 따라 할딱거리다/Accelerator를 밟고 만다 전신이 퉁겨지는//순간,//부레가 떠오르고 그는 매어달린다/필사적으로//비웃듯 물방울로 흩어지는/그녀들,//결코 따라잡을 수 없다.

—진수미 「자정의 젖은 십자로」

(『달의 코르크 마개가 열릴 때까지』, 문학동네 2005) 부분

 

참 아름답군요 딱 한번 스쳤을 뿐인데 양파 같은 눈이 보기 좋군요 끝없이 즙을 짜는 세월의 물컹한 살점이 도려내기 좋군요 당신은 안경을 벗고 나는 창문을 벗어요 당신은 바지를 끄르고 나는 계단을 끌러요 당신은 가랑이를 벌리고 나는 활주로를 벌려요 당신은 혀를 내밀고 나는 비행기를 내밀어요 당신은 내 몸을 올라타고 나는 구름숲을 올라타요

—이민하 「안경을 벗은 당신,」(『환상수족』, 열림원 2005) 부분

 

진수미(陳秀美)의 시나 이민하의 시 모두 여성 특유의 성체험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두 시 모두 일종의 조롱의 어조를 취하고 있다. 절정의 순간 ‘그’는 필사적으로 매달리지만, A.R. 존스의 말 그대로 그녀들은“비웃듯 물방울로 흩어”진다. 그들의 언어와 시선은 그녀들을 결코 따라잡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녀들은 그들과 언어가 다르고 지각방식이 다른 타자이기 때문이다. 고작해야 그들의 눈은“끝없이 즙을 짜는 세월의 물컹한 살점”(남근이 아닌가!)에 불과해서 그가 안경을 벗는 순간 나는 창문을 벗어난다는 사실, 그가 바지를 내리는 순간 나는 계단을 내려간다는 사실, 그가 가랑이를 벌리는 순간 나는 이미 활주로를 달리고, 그가 혀를 내미는 순간 나는 이미 비행기를 타고 구름숲에 오른다는 사실을 보지 못한다. 그들의 구심력과 그녀들의 원심력은 서로에게 애초부터 절대적 외부이다. 그 사실을 용인하지 않는 한 그들의 시선과 언어는 결코 윤리를 발생시키지 못한다.

남성중심적인 사회의 시선을 벗어난 그녀들에 의해 모성·여성성의 신화는 파괴된다. 여성은 더이상 밥이나 꽃이나 물이나 강이 아니다. 자궁은 물론 생명의 시원도 돌아갈 안식처도 아니다. 김이듬은 말한다. “어떤 모성은 잔인한 과대망상이다.”(김이듬 「거리의 기타리스트—돌아오지 마라, 엄마」, 『별 모양의 얼룩』, 천년의시작 2005) 김민정(金뗀廷)은 분노와 조롱이 가득 섞인 목소리로 여성성이란 모성이고 모성이란 잉태와 생명의 생산에 있다는 종래의 관념을 폭파한다. “내 꿈은 지상 모든 꽃모종에 껌을 씹어 붙이는 일/내 꿈은 세상 모든 인큐베이터에 사제폭탄을 장착하는 일/설사 내 자궁에서 근종 덩어리 하나 자라고 있다 한들.”(김민정 「가위눌리다 도망 나온 새벽」,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 열림원 2005) 근종은 물론 태아일 것이니 시적 화자는 잉태에 대해 이물감 외에 어떠한 자부심도 느끼지 않는다. 게다가 종종 그녀들은 ‘남성/여성’의 이분법적 성차를 부인하기도 한다.

 

유리창 밖으로 붉은 눈발 날린다/커다란 칼을 들고 다정한 눈망울로 바라보는 수소를 힘껏 내리치던/때가 있었지, 요즘엔 아무 일도 없다/냉기로 달아오르는 난로 옆에서 그녀는 중얼거린다/천장에 오래 켜놓은 형광등이 깜박인다, 칼은 녹슬었고//오늘밤에는 들판에 나가야겠다/풀 먹인 하얀 앞치마에 가득히 떨어지는 별을 받으러./장미성운에서 온 것들이 쇠 다듬는 데 최고라니까/그녀는 왼쪽 유방의 부드러운 뚜껑을 열고/하얀 재를 한 움큼 쥐어본다

—진은영 「정육점 여주인」(『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문학과지성사 2003) 부분

 

커다란 칼로 숫소를 내리치던 여자가 오늘밤에는 들판에 나가 앞치마에 별을 받는다. 태몽은 아니다. 장미성운에서 온 그 별들로 그녀는 칼을 갈 테니(“쇠 다듬는 데 최고라니까”). 칼을 휘두르는 여성성은 모성과 무관하다. 유방엔 하얀 재만 담겼으니 수유도 불가하다. 칼을 휘두르고 짐승을 잡는 자는 고래로 남성이었다. 그렇다면 이 여성은 남성인가, 여성인가, 아니면 양성구유적 존재인가, 남/여 성차의 이분법을 교란하는 자인가.

천운영(千雲寧)의 거의 모든 단편들이 이렇게 씌어진다. 천운영의 단편에서 여성 주인공들은 모두 꽃도 밥도 우물도 대지도 아니다. 그녀들이 가진 것이 자궁이 맞다면, 그것은 씹어먹는 자궁, 이빨 달린 요니(Vagina Dentata)다. 자신을 육식동물인 늑대의 일족으로 상상하는 주체(「늑대가 왔다」, 『명랑』, 문학과지성사 2004)를 고래의 어법에 따라 여성이라 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한 북두갈고리 같은 손으로 남편을 구타하고(「행복고물상」, 『바늘』, 창작과비평사 2001), 무릎이 시큰거릴 때는 우족이나 스지를, 속이 불편할 때는 된장을 풀어 끓인 내장탕을, 심한 감기를 앓은 후에는 소의 허파를(「숨」, 같은 책) 탐하는 육체를 꽃이나 우물에 비유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요컨대 그들은 전통적인 성 구분법에 따르자면 양성구유적 존재들이다. 그들에게는 자궁이 있으나 그 자궁에는 이빨이 달렸다. 그것에 대한 탁월한 메타포가 여기 있다.

 

나는 그의 가슴에 새끼손가락만한 바늘을 하나 그려주었다. 티타늄으로 그린 바늘은 어찌 보면 작은 틈새 같았다. 어린 여자아이의 성기 같은 얇은 틈새. 그 틈으로 우주가 빨려들어갈 것 같다.

그는 이제 세상에서 가장 강한 무기를 가슴에 품고 있다. 가장 얇으면서 가장 강하고 부드러운 바늘.

—「바늘」, 같은 책 33면

 

옆집 남자의 가슴에 새겨준 바늘 문신, 그것은 남성 상징이면서 여성 상징이다. 그것은 작중화자가 전쟁박물관에서 보았던 미사일이나 기관총처럼 남근을 상기시키는 무기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여리고 얇은 여자아이의 성기이기도 하다. 생김새도 그렇지만, 바늘이란 항상 조각난 것들을 온전하게 꿰매고 치유하는 여성적 도구 아니던가? 그러므로 이 바늘은 천운영이야말로 신화소 차원에 이르기까지 ‘남/여’성차에 관한 이분법을 교란하는 급진적 성정치학자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도구이다.

요약컨대, 우리 시대의 젊은 문학은 더이상 우물 안에 있지 않다. 우물 밖으로 나온 여성주체들이 신화화된 여성성과 모성의 벽을 허물면서 타자의 윤리를 요구한다.

 

 

시코쿠

 

말을 갖지 못한 타자, 그래서 ‘남/여’의 이분대당(二分對當)에 기반한 사회에 윤리를 요구해야 할 주체들이 여성들만은 아닐 것이다. 남자 아니면 여자(이 역시 남자일 텐데)의 자명한 성차 구분법은 제2, 제3, 아니 무수한 복수 젠더들을 용인하지 않는다. 정상성은 항상 비정상성을 생산하고, 역으로 비정상성을 통해서만 자신의 정상성을 재생산한다. 이분대당 너머엔 항상 이방인들이 산다.

반갑게도 우리는 이즈음 그 이분대당을 넘어선 성적 주체들을 종종 만난다. 황병승(黃炳承)의 몇몇 작품들은 성적 소수자 문제를 정면에서 다룬 흔치 않은 예에 해당한다. 가령 「커밍아웃」의 동성애자 화자는 독자에게 제안한다. “저처럼 부끄러운 동물을/호주머니 속에 서랍 깊숙이/당신도 잔뜩 가지고 있지요”(『여장남자 시코쿠』, 랜덤하우스중앙 2005. 이하 같은 책에서 인용). 이 말은 지극히 정상적이다. 단일한 하나의 젠더로 고정되기 전에 우리는 남성도 여성도 아니었을 터이니, 우리 모두 다소간은 게이이거나 레즈비언일 것이다. 아니 더 정확히는 꼬리표 붙이기식의 젠더 구분 너머에서 우리 모두는 서랍 깊숙이 정상성으로부터 이반(離叛)하고픈 욕망을 간직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사람은 모두 성적으로 단일하지 않다. 엄밀하게는 남성도 여성도 아닌, 아니 남성이면서 여성일 뿐 아니라 그 외에 다른 무수한 성적 취향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고유명사가 바로 우리들이다. 황병승의 시코쿠가 요구하는 윤리가 그것이다. 남성적이거나 여성적인 兒슈얼리티는 없다. 다만 개별자들의 수만큼 많은 성적 정체성이 존재할 따름이다.

윤리란 그런 것이다. 타자에게 나의 관습에 따라 정체성을 부여하고 그로써 낯익은 존재를 만들어 동일자에 포섭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절대적 외부성을 용인한 채로 나 또한 그에게 타자가 될 때만 윤리는 발생한다. 그럴 때 우리는 외형상 ‘남성’이라 지칭되는 어떤 주체가“열두살, 그때 이미 나는 남성을 찢고 나온 위대한 여성/미래를 점치기 위해 쥐의 습성을 지닌 또래의 사내아이들에게/날마다 보내던 연애편지들”(「여장남자 시코쿠」)이라고 말하거나, 분명 처남임에 틀림없는 이가 친구들을 누나라 불러도 좋겠냐고 묻거나(「불쌍한 처남들의 세계」), 이제 갓 스물이 된 청년이 거울에 비친 자신의 영상에게“괜찮아요 매니큐어를 처음 바를 땐 누구나 어색하죠 여자들도 그런걸요”(「셀프 포트레이트_스물」)라며 말을 걸 때도 하등의 민망함과 혐오 없이, 그것을 흔하디흔한 ‘차이들’중 하나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럴 때 고민할 것은 그들을 어떻게 나의 언어로 정의할 것인가가 아니다. 정작 고민할 것은 그들과 함께 윤리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가이다. 새로운 주거공간이 필요한 것이다.

 

 

비합리적인 주거공간

 

받아들임이나 배제를 통해 타자들을 이방인화하지 않고, 그들과 윤리적으로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위해 문학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상식과 달리 문학은 세상을 크게 바꿔놓지 못한다. 재빨리 바꾸는 것은 더더욱 못한다. 건강한 영혼을 가진 작가가 현실의 모순을 찾아 투명한 언어를 통해 총체적이고 정확하게 반영한 후(물론 대안을 제시하면서), 그것을 역시 건강한 영혼을 가진 독자가 읽고 공감하고, 그러고 나서 현실의 변혁에 나선다는 식의 선형적 영향모델은 너무도 순진한 계몽주의의 산물이다. 문학은 일차적으로 세상이 아니라 문학을, 그리고 문장을 변혁한다.

만약 문학이 타자에 대해 윤리적이고자 한다면, 스스로 삭제해야 할 것들이 많다. 타자를 이방인으로 만들고야 마는 완고한 배제의 논리는 문장 수준에서도 작동된다. 가령 민족은 언어를 지배한다. 국적도 언어를 지배한다. 게다가 우리는 문장에도 성별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러나 예외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배수아(裵琇亞)의 문장이다. 배수아의 소설 문장에는 국적의 흔적도 민족의 흔적도 성차의 흔적도 존재하지 않는다. 가령 다음 구절은 이성애자들의 사랑 장면인가, 동성애자들의 사랑 장면인가?

 

젊은 커플이 살고 있었던 적도 있다. 그들은 보조간호사와 쇼핑쎈터 모자 코너의 여종업원이었다. 좀 독특한 형태이기는 했으나 그들은 서로 사랑했고 그것이 오래 지속되리라 생각했다. 서로 고유한 이름을 갖고 있기는 했으나 그들은 서로에게 새로운 이름을 선물했고 같이 있는 동안 서로를 그것으로만 불렀다. 이곳은 그들의 첫 보금자리였다. 보조간호사는 소심하고 내성적이면서 고독한 성격이었고 쇼핑쎈터의 여종업원은 그 반대의 성향이었다. 그들은 서로의 발가락을 간질이기도 하고 작은 침대 속에서 소리내어 책을 읽어주거나 텔레비전의 쇼핑 채널을 보면서 밤을 보냈다. 보조간호사는 새로운 형식의 머리 쎄팅롤을 갖고 싶어했고 쇼핑센터의 여종업원은 좀 비싸지만 히말라야의 여행상품권을 탐냈다. 그들은 잡지의 사교란에 실린 광고를 통해서 서로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만나자마자 함께 살게 되었다.

—「마짠 방향으로」, 『훌』, 문학동네 2006, 139〜40면

 

물론 배수아는 소설이 끝날 때까지 이들을 두고 ‘동성애자’란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것이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사랑했다란 말이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떤 성별들간의 사랑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배수아는 사실 이런 작업을 오래전부터 해왔는데, 문장 단위에서부터 각인되는 관습적인 성차가 그녀의 소설에서는 맥을 못 춘 지 오래다. 『동물원 킨트』의 화자는 무성 아니면 중성이다. 『이바나』의 K는 생물학적으로는 여성이지만 젠더는 남성으로 읽힌다. 『독학자』의 두 남성은 다분히 동성애적이다. 그리고 『에세이스트의 책상』의 주인공 M의 성별을 두고 벌어진 몇번의 논란6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성별만이 아니다. 인물들은 자주 국적이 불분명하고(「양곤에서 온 편지」 「양의 첫눈」), 배경 또한 한국인지 독일인지 확인하기 힘든 경우가 잦다. 문장은 종종 한국어 문법을 벗어난다. 외국어로 씌어진 소설의 번역이라 해도 무방할 만큼 무국적적이다. 시제 또한 미래인지 과거인지 밝히기 힘들다.(「회색 時」) 시점은 어떤 경우 비인칭의 건물이 된다.(「마짠 방향으로」) 물론 배수아의 이런 특징은 단점이 아니다. 오히려 윤리적이라 할 만한데, 그 문장들 속에서는 그 어떤 주인공도 성별과 국적과 혈통 때문에 배제당하거나 동정받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유일무이한 단독자들일 뿐, 이성애자라서 떳떳하고, 동성애자라서 부끄럽고, 소수민족이라서 이방인 취급을 당하지 않는다. 내가 아는 한, 배수아의 문장들은 타자들이 거주하기에 가장 적합한 ‘비합리적인 주거공간’(김이듬 「공사의뢰인」)이다.

 

 

하이브리드 가족

 

“오늘도 쥐약 먹은 개처럼 날뛰”(「그러나 죽음은 定時가 되어야 문을 연다」)던 아버지가 죽자, 김민정의 시적 화자는 아버지의 관에 못을 박으며 이렇게 말한다. “下官은 이제 끝났어요, 아버지 그만 아가리 닥치고 잠이나 퍼 자요.”(「마지막 舌戰」) 아버지에 대해서만 그렇게 쓰는 것이 아니다. 진수미는 어머니에 대해 이렇게 쓴다. “생시의 엄마는 모두 계모야/죽은 엄마가 진짜지.”(「거대한 오프너」) 나아가 그들의 분노는 가족 전체에 이른다. 진은영은 가족에 대해 이렇게 쓴다. “밖에선/그토록 빛나고 아름다운 것/집에만 가져가면/꽃들이/화분이//다 죽었다”(「가족」),“집이 아니야 짐이야/그 짐 속에는 아버지가 주무시고/어머니가 손톱을 깎으신다/동생은 수학 문제를 풀고/아버지 돌아가셨으면 좋겠어요/어머니 외출하셨으면 좋겠어요”.(「달팽이」)

왜일까? 우리 시대의 젊은 시인들이 가족에 대해 이토록 공분(公憤)하는 것은. 그러나 곰곰 생각해보면, 어려울 것도 없다. 한국의 ‘가족’처럼 비윤리적인 주거공간이 또 있을까?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와 혈통주의와 성역할의 이데올로기가 가족을 통해 견고해지고 확장된다. 가족은 작은 민족이고, 국가이며, ‘우리’안에 우리를 가두는 법을 가르치는 곳이자, 여성성과 모성을 학습시키는 장소다. 새로 등장한 (비)주체들이 이 공간을 견뎌낼 리는 만무하다. 성도 젠더도 남성인 일부(一夫)와, 성도 젠더도 여성인(이라고 믿는) 일처(一妻)가, 훈육과 도덕으로 계급과 주체를 재생산하는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가 가족이다. 이 고상(약)한 공간은 모든 법의 종료지점으로부터 자신만의 법을 다시 세우고자 하는 다양한 복수 젠더들과 단독자들에겐 최악의 주거공간이다. 이즈음 우리 시에 몰아친 반가족주의 열풍은 그렇게 해석된다.

그렇다면 좀더 윤리적인 가족은 존재할 수 없을까? 타자들이 함께 기거할 수 있는 비합리적인 주거공간으로서의 가족 말이다. 우선은 윤성희(尹成姬)의 의사가족(pseudo-family)이 있다. 윤성희 소설의 가족들이 의사가족인 것은 혈연이나 성차가 가족 구성의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감기」(『문예중앙』 2005년 봄호)의 세 남성 가족을 보라. 한 여자를 사랑한 두 남자와 그중 한 남자의 아들로 이루어진 가족을 우리는 그간 상상이라도 해본 적이 있던가? 그 역이라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잘산다. 그때 문제가 되는 것은 혈연이나 兒스가 아니라 동성들간의 우애이다. 다른 예로 「유턴지점에 보물지도를 묻다」(『거기, 당신?』 문학동네 2004)가 있다. 가족을 모두 잃고, 다니던 여행사도 그만둔 ‘나’는 부산행 새마을호(아버지가 죽었던 좌석)를 탄다. 그렇게 서울—부산을 일곱 차례 왕복하다 만난 사람이 Q다. 그는 지하철 기관사였다. 사고로 여자를 치고 기관사를 그만둔 그의 손을 ‘나’가 잡아주자 둘은 가족이 된다. 둘은 중국집 주방에서 같이 일한다. 그러던 어느날 목욕탕에 갔다가 우연히 발을 밟아 친해진 이가 W다. 존재감이 없어 항상 ‘유령’으로 불리던 W도 가족이 된다. 이번엔 셋이서 찜질방엘 갔다가 고스톱을 치던 와중, 여고생 하나가 그들 사이에 끼여든다. 역시 가족이 된다. 넷으로 불어난 가족이 보물지도를 찾으러 가고, 실패하고, 그러다 일하던 중국집 주방장이 도망가는 바람에 음식점을 떠맡고, ‘미친 쫄면’을 개발해 불티나게 판다. 종종 일찍 죽은 쌍둥이 언니를 추억하며,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혼자 어묵 국물을 마시는 버릇이 있긴 하지만, ‘나’는 이 혈연도 없고, 兒스도 없고,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아무런 억압도 되지 않는 가족들과 잘산다. 어떠한 인연도 없던 네 사람이 우연히 만나 우애를 나누고 가족이 되어 살아가는 이 모습은 관습적인 의미의 가족이 아니다. 차라리 일종의 타자들의 연대집단이라고 해야 맞을 듯싶다.

강영숙(姜英淑)이 『리나』(『문예중앙』 2005년 여름호부터 연재중)에서 그려낸 가족은 이보다 한발 더 나아간다. 탈북자로 보이는 ‘리나’가 국적불명의 나라와 도시 들을 가수로, 노동자로, 여급으로 유랑하면서 만난 이들과 가족을 이룬다. 그중 ‘삐’는 남자다. 이국청년 삐는 처음엔 리나에게 동생이었다가, 연인이었다가, 남편이 되기도 하고 동료가 되기도 한다. 함께 탈출한 방직공장 언니도 가족의 성원이 되는데, 그녀와 리나는 동료이자 자매이자 동성애 연인이다. 잉태와 양육의 경험이 없는 늙은 이국가수 할머니와 그녀를 사랑하는 철없는 할아버지도, 한국소설에 등장하는 노인들답지 않게 들큰한 사랑을 나누고, 또 리나와 한가족을 이룬다. 외국사내와 사랑에 빠진 방직공장 언니가 아이를 낳자 농아인 그 아이 역시 가족의 일원이 된다. 성과 양육과 생계를 공유하고 한 주거공간에 사는 이들은 분명 가족임에 틀림없다. 심지어 지극히 윤리적인 가족이기도 한데, 국적과 성차와 나이와 장애는 이들이 가족으로서 연대감을 형성하는 데 하등의 고려사항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 가족 내에 이방인은 없다. 비정상도 없다. 그들이 공유하는 단 한가지 유일한 것, 그것은 그들이 모두 가난한 노동자라는 사실뿐이다. 비록 어떠한 전망이나 대안도 없이 나날의 비참한 일상을 겪느라 여념이 없긴 하지만, 나는 현재 한국문학이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집단적 주체’도 이들보다 진보적일 수는 없을 거라고 믿는 편이다.

 

 

타자들의 문장

 

어떻게든 한국사회도 (내부에서 배제되었건 외부로부터 유입되었건) 타자들과 함께 살고 있고, 또 앞으로 점점 그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높아질 것이다. 그럴 때 문학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거주할 문장을 만들고, 윤리적으로 그들과 기거할 수 있는 방식을 미리 보여주는 것 외에는 없다. “하위주체는 말할 수 있는가?”라는 스피박(Spivak)의 본원적이고도 결정적인 질문에 대한 답은 그후에 생각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타자들은 우리의 언어 밖에 있기 때문에 타자다. 그런 이유로, 그들은 어쩌면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는 영원히 발화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발화가능성을 전제하고, 우리의 언어가 그들의 언어에 대해 절대적 외부에 있다는 사실을 용인함으로써 우리의 언어를 상대화할 수 있을때 윤리는 발생한다. 물론 그것은 사력을 다해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는 것’보다도 고역일 테지만, 그렇다고 미리 절망할 필요도 없는 것이, 우리 문학은 벌써 그들을 위한 몇개의 문장을 준비해두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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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990년대 이후 한국소설과 비평에 나타난 ‘여성성’에 대한 이와 같은 비판은 심진경 「새로운 여성성의 미학을 찾아서」, 『문예중앙』 2005년 겨울호 참조.
  2. T.W.아도르노 『한줌의 도덕』, 최문규 옮김, 솔 1995, 136면.
  3. J.버틀러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 김윤상 옮김, 인간사랑 2003, 203면.
  4. A.R.존스 「몸으로 글쓰기」,『여성해방문학의 논리』,한국여성연구회편역, 창작과비평사 1990, 176면
  5. 카라따니 코오진 「교통공간에 대한 노트」, 『유머로서의 유물론』, 이경훈 옮김, 문화과학사 2002, 34면.
  6. 졸고 「민족문학의 결여, 리얼리즘의 결여」, 『창작과비평』 2004년 겨울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