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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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야만의 그림자 속에서 희망을 드러내기 위하여

정희성 시집 『돌아다보면 문득』

 

 

이성혁 李城赫

문학평론가. 저서로 『불꽃과 트임』이 있음. redland21@hanmail.net

 

 

창비시선291_정희성

정희성(鄭喜成), 하면 30년 전에 그가 쓴 “나는 자유를 위해/증오할 것을 증오한다”(「이 곳에 살기 위하여」)라는 격렬한 구절을 생각하게 된다. 내가 이 구절을 읽은 것은 20여년 전이었다. 이제 막 시를 기웃거리기 시작했던 나에게, 시대가 시대인만큼, 이 구절은 아프게 박혔다. 시가 세상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것만은 아니고 독자의 윤리적 결단을 거세게 촉구하기도 하는 것임을, 이 구절을 읽고 알았다. 그때부터 나에게 정희성 시인은 형무소 앞 담벼락에 기대어 이 구절을 낮게 그리고 굳게 다짐하는 이미지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이 구절은 나의 마음 한구석에서 검은 짐승처럼 지금도 살고 있다.

물론 시대는 변했고, 정희성의 시세계도 당연히 변모했다. 막 간행된 『돌아다보면 문득』(창비 2008)과 앞의 구절이 적힌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사이엔 30년의 세월이 놓여 있다. 2001년에 펴낸 『詩를 찾아서』에서, 이미 시인은 “이제 내 시에 쓰인/봄이니 겨울이니 하는 말로/시대 상황을 연상치 마라/내 이미 세월을 잊은 지 오래/세상은 망해가는데/나는 사랑을 시작했네”(「봄소식」)라고 쓴 바 있다. 이번 새 시집은, 이렇듯 시대에 대한 비유의 언어를 벗어던지고, 세계에 직접적으로 접근하여 그 세계를 사랑하려는 시인의 시적 시도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가령, “날 좋다 햇빛 알갱이 다 보이네/하늘에서 해가 내려 알을 슬어놓은 듯/볕 바랜 이불호청 해 냄새 난다/꺄르르 가시나들 웃음소리에/울밑에 봉선화도 발돋움하겠네”(「봄날」) 같은 눈부신 시가 그러하다. 투명한 대기 속에서 햇빛 알갱이를 볼 수 있는 시인의 시력은 세계에 대한 사랑의 힘에서 나오는 것일 게다. 그 사랑의 힘은 세계 속에 관통되고 있는 사랑과 욕망으로부터 충전된다.‘가시나들 웃음소리’에 저기 봉선화는‘발돋움’하려고 하지 않는가.

시인의 세계에 대한 시선은 이렇듯 따스하고 품이 넓어졌다. 하지만 나의 기억에 찍혀 있는 정희성에 대한 이미지 때문인지, 방금 인용한 「봄소식」에서 내 눈에 내내 들어와 있는 구절은 “세상은 망해가는데”라는 대담한 진술이다. 이 대담함이 예전 정희성 시의 단호함을 상기시킨 것이리라. 그런데 이 진술은 「봄소식」이 단순하게 해석될 수 없음을 말해준다. 그 시가 이야기하려는 바는, 시대상황에 대한 은유에 시를 종속시키지 않겠다는 무슨 전향의 의지보다는, 망해가는 세상에서 시인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어떻게 세계를 사랑할 것인가에 대해서다. 망해가는 세상과 막 시작한 사랑 사이에 일어나는 스파크가 「봄소식」을 아득하고 의미 깊게 만든다. 세상이 망해가고 있다는 시인의 인식은 이번 시집에서 더욱 짙고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시집 마지막에 실린 시 「새로운 세기의 노래」에서 시인은 “새로운 세기가 밝아오는 대지 위에/야만의 그림자가 서성이고 있”다고 말하는데, 망해가는 세상과 이‘야만의 그림자’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예의 시에서 정희성이 “이제 세상도 새롭게 바뀌어야지요”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그의 시세계의 변모를 시적 전향 같은 것으로 생각할 수 없다. 세상을 바꾸려면 여전히 증오할 것은 증오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증오의 대상은 바뀌었다. 예전에 증오할 것-적은 친구를 죽인 독재자 및 그 하수인들이었지만, 지금 증오의 대상은‘야만의 그림자’같은 비인격적인 무엇이다. 그 그림자가‘햇빛 알갱이’들이나‘가시나들 웃음소리’같은 사랑스러운 세계를 파괴할 것이기에 증오할 것이 된다. 증오할 것의 도래를 막기 위해서는 「봄날」이 묘사한 대로 미소를 띠게 만드는 이 세계의 사랑스러움을 더욱 드러내야 할 것이다. 정희성의 시세계가 예전에 비해 밝아진 면이 있다면,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어느 자매님 젓이 제일 맛있냐고/신부님이 뒤통수를 긁으며/글쎄 내가 자매님들 젓을 다 먹어봤겠느냐고”(「새우젓 사러 광천에 가서」) 같은 정희성답지 않은(?) 유머러스한 시도 우리네 언어생활의 빈틈에서 간간이 발견되는 삶의 사랑스러움을 드러내려는 의도에서 씌어졌을 것이다.

그래서 여전히 정희성은 희망을 말한다. 질문이 쏟아질 수 있겠다. 웬 희망? 지금 이 시대에? 웬 구닥다리? 지금이 절망의 시대란 말인가? 하지만 시인의 판단에 따르면, 세계에는 현재 야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다. 다만 세상이 망해가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잘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그렇기에 지금 세상이 어두워지고 있다는 진실을 말하는 것은 정희성에게 여전히 시인의 임무일 것이다. 시인이 여행지에서 망국의 흔적을 찾아다니거나 해골을 바라보는 것은 이 때문이리라. 폐허가 된 따 프롬 사원 뜨락에서 작은 종을 팔고 있는 노인(「성자」)이나 앙꼬르톰의 “물이 말라가는 못에서 연꽃 한 송이를 꺾어” 드는 소년(「소년」), 타지마할 건너편 빈민들의 거처에서 “나를 향해 서 있었지만 나를 보고 있지는 않”은 릭샤꾼(「늙은 릭샤꾼」)은 암흑 속에 떠 있는 별처럼 희미하게 빛나면서 망한 역사를 되비추며 시간의 연속성을 뒤흔든다. 시인이 「해골」에서 “이를 악물고/세상을 내다보고 있”는 저 “캄캄한 눈구멍”에서 한때는 빛났을 별을 발견하듯이, 그는 이들이 드러내는 죽은 역사의 쓸쓸한 별빛을 찾아내고 있다.

노을이 지고 있을 뿐인 세상을 건너다보는 릭샤꾼처럼, 정희성은 왜 페허에서 그 쓸쓸하고 희미한 별빛을 찾고 있는 것일까? 지금 여기 망해가는 세상에서 별빛을, 희망을 찾기 위해서다. 희망을 말하기 위해서는 꼭 절망을 극복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시인이 「희망공부」에서 말하듯이 “어두운 밤하늘에 별이 빛나듯/희망은 절망 속에 싹트는” 것이기에 “절망의 반대가 희망은 아니”기 때문이다. 희망을 말하기 위해선, 그래서 “빛 안에” 감추어져 있는 “어둠이 그 모습을 드러”내도록 시인은 전등을 끌 수 있어야 하며, 그리하여 쓸쓸하게 “세상 밖에 나앉아”(「어둠 속에서」) 있을 수 있어야 한다. 그 “어둠 속에서 조용히/자기를 들여다볼 줄” 알 때, 별은 “모습을 드러”(「희망」)낼 것이다. 희망이 모습을 드러내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렇듯 시인은 세상의 어둠을 자신의 실존적 어둠으로 전화시켜야 할 것이다. 정희성이 이 시집에서 쓸쓸함과 외로움을 자주 토로하는 것은, 그가 희망을 드러내기 위하여 세상의 어둠을 감지하고 그 어둠을 자신의 삶 속으로 스며들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의 외로움은, “내가 더 망가지기 전에/세상이 바뀔 것이라는/희망을 버리지 않”(「나도 내가 많이 망가졌다는 것을 안다」)았기 때문인 것이다.

이성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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