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초점
서로를 삼키고 비추는, 기이한 평화의 세계
나희덕 시집 『야생사과』
이성혁 李城赫
문학평론가. 평론집 『불꽃과 트임』이 있음. redland21@hanmail.net
나희덕(羅喜德) 시인은 서정적 주체의 반성과 성찰, 절망과 희망을 섬세하고 정교하게 드러내왔다. 그녀의 좋은 서정시들은 색채가 선명하고 윤곽이 뚜렷하며 문장들이 부드럽게 연결되어 있어서 비교적 쉽게 읽히는 편이었다. 그림으로 치면 구상화였던 셈이다. 하지만 새로 펴낸 시집 『야생사과』(창비 2009)에는, 모던한 회화를 볼 때 느끼게 되는 당혹감을 주는 시들이 적지 않다. 이는 시인이 예전과는 차별적인 시작(詩作) 방향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쇠라의 점묘화」가 바로 그 방향을 암시해준다. 이 시에서 시적 화자는 “선을 빻고 또 빻”는 작업을 통해 “서로를 삼키고 비추는 점들의 환영, 그 한 폭의 기이한 평화”를 만들어낸다. 시인이 굳이 점묘화법에 대한 시를 쓴 것은 그 그림에서 창작자로서의 어떤 공감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점묘화법을 시작법에 그대로 대입할 수는 없을 테지만, 시인은 점묘화의 “서로를 삼키고 비추는” 세계를 시에서도 창출해보려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시집 앞자리에 놓인 시들을 읽어보면 그러한 짐작이 근거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시작 방향의 변화는 어떤 사유의 전환을 바탕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간략하게나마, 그 사유의 도정을 나름대로 재구성해보고 싶다.
점묘화에서 마치 지워지고 있는 듯한 형상이 창출되는 것은, 빛을 머금은 분쇄된 선의 가루들, 즉 점들의 무리 때문이다. 이 시집에서는 안개가 그 점들과 유사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 「심장 속의 두 방」에서 안개는, 지움이 없으면 채움도 없다는 듯이, 심장의 두 방을 넘나들면서 한편으로는‘나’를 지워주고 다른 한편으로는‘나’를 채워주는 무엇으로 등장한다. 그래서 안개는 스스로 “나는 가로등이다/어둠이 내리기 전/그는 내 배경이 되어줄 수 없다고 한다”(「안개」)고 말하는 것일 게다. 가로등은 어둠이 있어야 비로소 켜진다. 그러한 안개에 싸인‘나’의 모습은 가로등 밑에 서 있는 형상처럼 윤곽선이 흐릿할 텐데, 한편으로 보면‘나’자신이 안개를 내뿜는 것처럼 보일 수 있겠다. 사실 안개는 사물이 말라가면서(증발되면서) 생기는 것 아닌가. 나희덕 시인에게서 말라간다는 것은 삶을 이루는 구체적인 기억이, 더 나아가 삶 자체가 증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안개의 입자인 물방울은, 시인에 따르면 울고 있는 아이, 죽은 빨간 금붕어, 깨진 그릇, 싸락눈, 익은 사과, 노랫소리 등을 품고 있는 “내 심장”(「물방울들」) 자체이기에 그렇다. 즉 말라간다는 것은 죽어가는 일이다. 그것은 “안개가 우리를 완전히 지워줄 때까지” “그것이 삶과 죽음의 경계인 줄도 모른 채” “낙엽처럼 떠”도는 일이다(「우리는 낙엽처럼」).
하지만 그 죽음은 다른 삶을 새로이 낳는 것이기도 하다. “검은 눈동자처럼 타들어가던” “활활 타오르는/불의 우물”이 “물의 出口”(「물의 출구」)라고 시인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타들어가는(말라가는) 삶은 삶을 구성하는 물을 다른 출구로 나아가도록 만든다. 그 출구는 구름 되기에 있다. “구름이 강물의 죽음”(「빗방울에 대하여」)이라고 할 때, 저 불타는 우물 역시 죽으면서(증발하면서) 구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름은 다시 죽어서 빗방울이 된다. 이 시를 더 읽어보면, 그 빗방울은 “구름의 기억을 버리고 이 숲에” 오고는, “빗방울의 기억을 털”면서 쓰러진 오래된 “나무의 맨발을” “천천히 씻”기며 사라지는 것이다. 허나 그 빗방울의 죽음으로 “풀은 다시 돋아날 것”이며, 땅에 스며든 빗방울은 다시 안개를 만들며 증발될 것이고, 다시 구름이 될 것임은 물론이다. 즉 삶은 지워짐을 통해 새로 생성되고, 그 생성된 삶은 다른 삶을 낳기 위해 사라진다. 이때 죽음과 삶을 이으며 순환하고 있는 이 빗방울은, 동시에 모든 존재자들을 엮기도 한다. 물방울과 마찬가지로 둥근‘야생사과’처럼 말이다. 「야생사과」에서 시적 화자는 “새가 쪼아먹은 자리마다/개미들이 오글거리며 단물을 빨고 있”는 야생사과를 “한입 베어”문다. 그럼으로써 야생사과를 매개로 하여 새와 개미와‘나’는 어떤 관계를 맺는다.
이 시에 등장하는 붉은 절벽, 영혼, 새, 개미, 내 등 뒤의 나 같은 모든 형상들은 서로 관계를 맺으며 존재하기 때문에 단독적으로 투명하게 의미화될 수 없다. 그것들은 저 점묘화에서처럼 “서로를 삼키고 비추”면서, 원환 속에서 관계맺고 있는 것이다. 그것들의 관계가 그려낸 원환은 접시나 사과, 사과씨, 심장처럼 “둘레를 가진 것”과 같은 모양일 터, 그‘둘레’안에는, 심장도, 야생사과도, 물방울도 “하루에도 몇번씩” 삼켜지듯 “담겼다 비워”(「새는 날아가고」)진다. 그 둘레의 둥근 모양은, 마찬가지로 둥근 빗방울이나 야생사과 등이 삶과 죽음 및 사물들의 경계를 지우며 운전해가는, 우주 운행의 궤적이다. 우주의 운행 속에서 생명은 새로운 탄생을 거듭하며 거대하게 흐른다. 그 흐름에 승차할 때, “기억의 되새김질보다는 생성의 순간에 몸을 맡”(「시인의 말」)길 수 있게 될 것이며, 그리하여 “내 등 뒤에 서 있는”(「야생사과」) 또다른 나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 승차를 위해서는, “수십 마일 이상 날아가 고요히 내려앉”(「결정적 순간」)는‘낙법’을 익혀야 할 터, 나희덕 시인의 낙법은 말라가면서 시 쓰기일 것이다.
이렇게 읽어보니, 이 시집은 삶에 대한 우주적 차원의 사유로 우리를 안내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 사유에 도달하면서, 시인은 예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시를 쓰고자 마음먹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유를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시인은 말할 듯싶다. 자신이 당도한 그 세계는 “빗방울들이 멀리서도 길을 찾아올 수 있도록”(「빗방울에 대하여」) 동물의 형상으로 무덤을 짓는 인디언의 순박한 지혜가 가르쳐준 것일 뿐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 순박하고 우주적인 지혜는, 아직은 추상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인디언의 삶에서 추상과 구체는 분리되어 있지 않았을 테니, 그들에게서 그 지혜는 추상이자 구체였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한국 자본주의 사회처럼 복잡하고 갈등이 심한 세계에서 그 지혜는 삶의 구체성과 접촉하지 못한다면 추상의 영역에만 머물게 될 수도 있다. 인디언의 그림이 현대인에게 모던한 추상화처럼 받아들여지듯이 말이다. 이 시집을 읽으며 느꼈던 어떤 당혹감도 그 추상성 때문일지 모르겠다. 추상이 나쁘다거나 불필요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앎과 삶의 생성을 위해서는‘추상 기계’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추상에서 구체로’내려오는 과정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하강운동이‘추상 기계’의 잠재성을 현행성(actuality)으로 전화시킬 수 있기에 그렇다. 그러나 그 전화의 길을 찾아내어 또다른‘생성의 순간’을 창출하는 작업에 시인이 이미 착수했을지도 모르는 일, 마땅히 그녀의 새 작품을 기대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