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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비평

함돈균 평론집 『얼굴 없는 노래』

 

 

이경재 李京在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최근 한국소설에 숨겨진 소통의 가능성」 「2000년대 비평의 잉여와 결핍」 등이 있음. ssmart1@hanmail.net

 

 

우리시대와 우리시대 문학의 “근본 기분”인 니힐리즘은 함돈균(咸燉均)의 이번 평론집 『얼굴 없는 노래』(문학과지성사 2009)의 중핵이다. 함돈균은 우리 시가 나아갈 방향성을 “아이러니에 전제되어 있는 삶에 대한 모종의 불신감을 전면화하고 대문자 역사 자체를 유유히 폐기할 때, 그리고 어떤 종류의 유토피아니즘에도 의지하지 않으면서 삶의 모든 가능한 방향성을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니힐리즘의 층위”에서 사유하고 있다.‘2000년대 중후반의 문학과 혁명’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이 시대의 혁명, 이 시대의 니힐리즘」에서 그는 “지금 여기, 한국문학의 주변을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는‘니힐리즘’이 있다”고 단언한다. 지금의 시와 소설들은 니힐리즘을 “개인의 철학적 무기로 삼아‘신 없는 세계’에 자신의 법을 세우고, 길의 흔적이 사라진 사막 위에 자신만의 창조적 길을 냄으로써 삶을 긍정적으로 쇄신하려고 애쓴다”는 것이다. 니힐리즘을 2000년대 문학의 주조로 파악하는 것은 「모더니티와 니힐리즘의 시학」에서도 발견된다. 김수영(金洙暎) 이후는 “니힐리즘 미학의 도래라는 현상”으로 압축된다.

가장 최근에 씌어진 「사건적 진리로서의 혁명」에서도 저자는 시민적 공통감각과 무관한 채 불투명한 심연을 거느린 안티고네의 목소리에서 문학의 이상형을 찾는다. 안티고네의 목소리는 삶의 자리에서 비롯하여 문학으로 옮겨온 재현적인 말의 세계가 아니라, 도리어 그 목소리로써 삶의 자리에 부재하는 것들을 밝히고, 시민적 언어의 공허까지도 폭로하는 낯선 말의 세계라는 것이다. 새로운 윤리적-정치적 기획의 단초가 될 수도 있는 안티고네의 목소리가 부정과 폭로의 니힐리즘적 원천으로서 수용되고 있다. 그리하여 “모든 혁명은 궁극적으로 미래완료적”이며, 모든 혁명은 완결될 수 없는 운동의 도정에만 존재하게 된다.

현대철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눈치챘겠지만, 수많은 사상가와 이론가의 은하 속에서 함돈균이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이는 니체다. 그는 에필로그에서 니체를 머리로 배웠을 뿐만 아니라 몸으로 살아냈음을 고백하고 있다. 그는 허무의 근저에 개입함으로써 현실을 초극하려는 능동적 니힐리즘에 크게 기대고 있다. 현존하는 질서와 가치로부터 벗어나는 존재의 적극적인 창조원리가 될 때, 니힐리즘은 거대하고도 풍부한 활력을 삶과 세계에 방출한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러한 니힐리즘이 만성적인 환멸의 상태를 촉진해 정신적 활력을 쇠퇴시키고, 목적과 가치의 추구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소모적인 상태로 전화될 가능성 역시 크다는 점이다. 더군다나 오늘의 자본과 권력은 먹성은 물론이고 맷집까지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부정과 탈주는 지금 이 시대의 불온한 서자가 아니라 언제든지 자본과 권력이 길들일 수 있는 어엿한 적자들이다.

문학평론가 정홍수는 “70년대산 2000년대발” 비평가를 논하면서 “이들 세대는 한국문학이 비평의 역사를 쓴 이래 이론적으로 가장 단단히 무장한 세대가 될 준비를 하고 있었고, 그것이 이들 세대의 진정성이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러한 평가는 함돈균에게도 온전히 해당된다. 얼핏 보아도 맑스, 프로이트, 르페브르, 코오진, 김인환, 아감벤, 랑씨에르 등 경향과 시대를 뛰어넘는 70여명의 사상가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함돈균이 이론에만 전적으로 의존하는 기계적인 비평가는 아니다. 본격적인 작가론을 묶어놓은 3부에서는 텍스트의 속살을 차분하게 음미할 줄 아는 섬세한 감수성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얼굴 없는 노래』는 이론에 대한 관심 외에도 한국문학사를 일이관지하는 간단하지만 명료한 문학사적 시야를 바탕에 깔고 있다. 「우리의 포스트모던적 모던」에서 그는 임화와 이상의 문학이 모더니티 안에 머무른‘다른 모더니티’라고 본다. 임화가 맑스주의에 의해 모더니티에 포섭되었다면, 이상은 “수학/과학의 기호”를 통해 모더니티에 포섭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달리 김수영은‘시적 아이러니’를 방법론으로 삼아 모더니티에서 벗어날 가능성을 보여준 것으로 파악된다. 특히 방현석의 「겨울 미포만」에 나오는 “집단으로 행동하고 실천으로 검증하는 노동자의 집단주의”를 포함하여 맑스적 모더니티에 대한 함돈균의 비판은 자못 통렬하다. 또한 「역사와 계급의식, 리얼리즘의 깃발을 들고 일어서다」에서는 신채호의 「용과 용의 대격전」부터 방현석의 「새벽출정」까지를 다룸으로써, “역사와 계급의식을 바탕으로 진행되어온 한국 리얼리즘 소설사”가 오늘날에는 시효가 지난 담론임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목적론적 이성주의, 기술주의와 생산력 중심주의, 대문자 역사와 유토피아니즘, 인간주의” 같은 모더니티의 유산은 함돈균에게‘세금까지 치러가며 떠안아야 할’유산이 아니다.

함돈균의 경쾌하고 일목요연한 지도를 따라가다 보면 몇가지 의문이 계속 머리에 남는다. 첫번째는 한국의 맑스적 모더니티를 대표한다는 임화에 대한 평가다. 함돈균은 임화가 “지적 식민주의”에 빠졌다고 할 만큼 맑스적 모더니티라는 시대인식의 지도를 맹신했다고 본다. 그러나 임화가 1930년대 중후반과 해방 직후에 보여준 세계적 보편성을 포회한 민족적 특수성에 대한 인식은, 한국문학사에서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가장 심화된 주체적 사유의 하나라고 볼 수도 있다. 또한 맑스적 모더니티와 부르주아 모더니티가 많은 측면을 공유하지만, 두가지를 같은 층위에 놓고 사유할 수는 없다. 주지하다시피 지난 세기 전자는 후자에 대한 가장 설득력있는 현실적 대안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모더니티의 유산들을 폐기한 후의 세상은 무엇이며 과연 그 속에서 우리는 신명나게 춤출 수 있을지에 대하여 진지하게 묻지 않을 수 없다.

비평이 결국 분석과 해석으로 작품의 미적-윤리적-정치적 의의를 자리매김하는 것이라 할 때, 함돈균은 분석보다 해석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이론에 대한 박학은 텍스트에 대한 분석보다는 개별 텍스트를 여타의 지적 담론과 연결시키는 해석에 대한 열정으로 이끈다. 프롤로그에서부터 그는 비평은 텍스트에 대한 사후적 주석이 결코 아니며, “잠재태로 존재하는 텍스트의 가능성을 현실태로 바꾸는 해석학적 기투를 통해 이러한 일들에 개입하는‘사건’의 장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역설한다. 이처럼 그가 관심 갖는 것은 해석적 실천이며 세상에 대한 개입이다. 『얼굴 없는 노래』는 이론에 대한 천착, 비평적 자의식의 일관성, 텍스트에 대한 진득한 애정 등으로 “텍스트에 대한 주석으로서의 비평”이 아닌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비평”이 어떤 얼굴인지를 비교적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나는‘역사적 사건으로서의 비평’의 얼굴에 나타난 진지하고 아름다운 표정까지 볼 수 있기를 염치없게도 열망한다. 경쾌하지도 세련되지도 못한 표정을 지닌 그 얼굴에 2000년대 문학을 넘어선 새로운 가능성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