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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김홍중 『마음의 사회학』, 문학동네 2009

비평의 파노라마, 사회학의 지평

 

 

김항 金杭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ssanai73@hotmail.com

 

 

마음의-사회학

“시인은 나무 속에서 잠드는 어떤 존재로 화하는 스스로의 한 생을 언어 속으로 저축한다.”(402면) 시인 오규원(吳圭原)이 운명하기 직전에 제자 손바닥에 썼다는 “한적한 오후다/불타는 오후다/더 잃을 것이 없는 오후다/나는 나무 속에서 자본다”라는 싯구에 대한 평문이다. 이런 문장을 구사하는 이가 사회학자라는 사실에 적지않은 시기심을 느꼈다는 고백으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물론 그 까닭은 한국어의 지평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이런 평문 때문만이 아니다. “‘인간’은 실체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개념과 현실의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 속에서 벌어지는 갈등, 모순, 변동, 의문의 파노라마이다”(75면)라는 철학적 성찰, “마음의 레짐은 (…) 주체를 만들어내는 담론적 혹은 비담론적 요소들의 네트워크이자 (…) 특정 시대에 특정한 방식의 인식과 실천의 주체들을 걸러내고, 빚어내고, 결절시키는 구조를 가리키는 일종의 ‘장치’(dispositif)”라는(24면) 사회학적 분석모델의 적출, “한국사회가 87년체제에서 97년체제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진정성 에토스가 해체되고 포스트-진정성의 에토스가 새로이 등장했다면 이 새로운 시대의 세계상을 구성하는 중요한 축이 바로 스놉(snob)이라는 주체의 형식이다”(82면)라는 당대 현실에 대한 분석적 해부, 그리고 “전통의 ‘아버지’와 일본이라는 ‘아버지’ 사이에 이상(李箱)은 기호학적인 지중해를 건축하고, 그 바다를 끝없이 유랑하는 까마귀가 되어 스스로 초월적인 ‘눈동자’ 하나를 형식적으로 창출한다”(356면)는 대목에서 등장하는 한국 모더니티의 원풍경에 대한 알레고리적 조망 등, 『마음의 사회학』에 흩뿌려진 다기한 통찰과 치밀한 논증은 읽는 사람을 자극하고 설득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분야와 시대를 종횡무진하다보면 읽는이로 하여금 현기증을 느끼게도 할 법하지만 『마음의 사회학』은 육중한 안정감을 구비하고 있기도 하다. 물론 흔들림 없는 문체와 2부에서 전개된 사상사·문예사에 대한 성실하고 치밀한 해석에 힘입은 바 크지만, 그 까닭은 무엇보다도 분석과 논증의 토대를 이루는 저자 김홍중(金洪中)의 진중한 사회학적 시선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시선은 개인적인 것으로 여겨지기 십상인 ‘마음’을 “뒤르켐이 말하는 ‘사회적 사실’”(43면)로 파악하고, “사회적 현실에 물질적으로 육화되어 있으며, 구조화되어 개체에 선재(先在)하는 비합리적이고 시대적인 감응의 양식이자 도덕적 판단의 체계로서, 주체를 그 마음의 주파수에 조정하게 하는 사회적 강제력”(44면)을 갖는 것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그래서 이 ‘마음’은 고전 사회학의 고유한 문제의식에 충실한 개념이다. 그것은 바로 ‘사회’란 주체의 눈앞에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주체와 타자, 객체, 외부세계가 서로 구분되어 교차하는 ‘장’(champ)이며, 따라서 관찰자의 시선과 사색자의 고뇌로써 구성되어야 할 대상이라는 문제의식이다. 바꿔 말하자면 뒤르켐, 베버, 짐멜, 맑스, 프로이트 등 사회학의 여러 태두들은 결국 자신이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사회가 언술적으로 구성되어야만 존재론적 지위를 획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날카롭고 치열하게 고민했던 이들인 셈이다.

『마음의 사회학』에서 등장하는 ‘마음’은 바로 이 고민을 공유한 결과물이며, 이러한 사회학적 시선이 책에 무게감을 더해주고 있다. 이 고민은 필연적으로 성찰적이고 규범적인 자각을 내포한다. 그도 그럴 것이 자기가 그 안에 살고 있는 사회를 언술적으로 구성하는 것은 자기언급적인 작업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집 안에 살면서 집을 지어야 하는 패러독스와 같다. “크리스토프는 그리스도를/그리스도는 전세계를 짊어졌다/그럼 말해보라, 크리스토프는 그때/어디에 발을 딛고 있었을까?”(265면) 근대적 성찰성을 논하는 부분에 등장하는 이 인용문은 이 책의 사회학적 시선이 가닿는 소실점이라 할 수 있다. 세계를 짊어진 크리스토프의 발판은 인간과 사회가 구성되는 장인 ‘마음’이 거처하는 발판이기도 하다. 이 발판은 존재론적으로 ‘실재’할 수도 없고, 논리학적으로 ‘증명’될 수도 없다. 세계 안에 살면서 그리스도-세계를 짊어진 크리스토프가 스스로의 처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이제까지 통용되던 인식과 소통의 질서를 배반해야 하는 것처럼, 인간과 사회 안에 있으면서도 인간과 사회를 구성한다는 마음을 분석하는 일은 기존의 감각과 언어를 끊임없는 불안과 공포에 빠뜨리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것이 패러독스라는 사실이 아니다. 중요한 점은 이 패러독스야말로 근대의 성찰적이고 규범적인 앎이 견뎌내야 하는 ‘허무’라는 사실이다. 『마음의 사회학』은 이 허무를 견뎌내기 위해 ‘풍경의 사유’라는 전략을 제시한다. “풍경의 사유, 이것은 바로 불가능을 사유함이며, 불가능의 전제 위에서 실패를 내포한 사유의 모험이다. 과연 사회학은 계몽주의 이래 자신에게 주어진 초월적 발화주체의 권좌를 포기하고, 지식의 원론적인 도전, 즉 느부갓네살의 꿈을 말하는 제시의 문법을 실험할 수 있는가?”(173면) ‘느부갓네살의 꿈이 말하는 제시의 문법’이란 바빌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자신의 꿈을 해몽하라고 명령하면서 “너희는 내가 꾼 꿈을 말하고 해몽하라”고 한 주문을 말한다. 즉 이 문법은 설명과 대상이 동시에 구성되는 자기언급적 실험의 알레고리인 셈이다. 너무나 오랫동안 현대 사회(과)학은 고전 사회학에 고유했던 이 실험을 방기해왔다. 그 오랜 에움길을 일일이 따지는 일은 불가능하지만, 어느샌가 사회학의 시선은 자기언급적인 이 허무를 망각한 채 주어진 대상에 대한 과학적 지식을 산출하는 ‘공학적 기술’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해온 것은 아닐까? 『마음의 사회학』은 이에 대한 강력한 이의제기이자, 사회학이 꿈틀거리며 기지개를 펴던 그 문제의 장으로 되돌아가자는 호소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사회학의 지평이 어디인지를 모색하는 시도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지평이 반드시 비평과 맞짝을 이룬다는 것이 이 책의 확신이기도 하다. 근대사회의 성찰이 필연적 허무와 맞서야 한다면, 그것은 도처에서 입을 벌리고 있는 항시적 위기(crisis)의 징후를 간파하는 작업이어야 하며, 비평(critic)이란 바로 이 위기를 읽어내는 언어적 투쟁일 터이기에 그렇다. 따라서 3부에 엮인 문학비평들은 사회학적 이론을 문학에 적용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서로가 서로를 만들어낸 문학 텍스트와 시대의 ‘마음’이 서로 식별불가능하게 섞여드는 장을 풍경으로 제시하려 한 시도이다. 사회학의 지평은 바로 비평이 보여주는 파노라마 속에서 드러나는 성좌라 할 수 있다. 그 성좌를 쉼없이 그려보는 일, 과연 우리네 앎은 이 사회학자가 제기한 과제를 계속 짊어지고 나갈 수 있을까?

그 가능성은 이 책의 한가지 단점을 지적함으로써 어렴풋이 보일지 모르겠다. 그것은 이 책에서 현대의 허무가 너무나도 매끄럽고 남김없이 논증되고 분석된다는 점이다. 바꿔 말하면 『마음의 사회학』은 존재론적으로나 인식론적으로나 논리학적으로 이해 가능한 형태로 크리스토프의 발판을 그려 보인다고 할 수 있다. ‘포스트 진정성’ ‘스놉’ ‘동물’ 같은 키워드는 매혹적이지만 과연 이 언어들이 이상의 까마귀나 김수영의 리좀-전통이라는 사유-이미지가 제시한 바 있는 공포나 허무의 심연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일까? 혹시 이 키워드들은 너무나 포스트-헤겔적 허무에 젖은 나머지 역설적으로 ‘포스트〓이후’라는 매우 강력한 ‘역사도식’에 갇혀 있는 것 아닐까? 그래서 오히려 여전히 살아남은 허무와 새롭게 삶을 옥죄는 공포가 공존하는 그로테스크한 ‘마음’을 조감하는 까마귀의 눈이 요청되어야 하며, 그랬을 때 비로소 탈-헤겔적 역사의 파노라마를 그려내는 일이 가능해지는 것 아닐까? 물론 이는 이 책이 홀로 감당해야 할 몫은 아니다. 이 책이 제기한 과제를 함께 짊어지겠다는 연대의 인사로 두서없는 평을 마무리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