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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이경재 李京在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네이션과 2000년대 한국소설」 「말할 수 없는 것, 말하지 않는 것, 말하지 못하는 것」 등이 있음.

 

 

종언과 비평의 진정성

복도훈 평론집 『눈먼 자의 초상』

 

 

3245복도훈(卜道勳)은 비평적 사유를 진지전과 유격전으로 나눈 바 있다. 이런 구분에 따를 때, 그는 개념과 이론을 통해 텍스트의 예민한 모서리를 재빨리 치고 나가는 유격전에서 더 많은 전과를 올린다. 복도훈의 평론은 작품이나 작가의 의미를 따지고, 그로부터 가치를 찾아내 문학사에 자리매김하는 것 같은 고전적 이상에 머무르지 않는다. 부분적으로는 작가론, 작품론으로서의 성격을 지니면서도 그 모두를 합친 것 이상의 사고실험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론에 대한 박람강기는 평론가 복도훈의 장점은 될지언정, 서구 이론에의 편향이라는 레떼르를 붙여 비판할 대상은 아니다. 문학작품만의 고유한 가치와 의미라는 것은 상상적 실체에 불과하며, 비평은 작품을 매개로 하여 수많은 텍스트들을 교차시켜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론의 정확한 이해와 그것이 창출해내는 담론 효과의 유효성이다.

『눈먼 자의 초상』(문학동네 2010)은 첫 평론집이 갖게 마련인 각오와 결기를 뛰어넘는 비장한 파토스를 곳곳에서 내뿜고 있다. 이러한 비장함은 여기 실린 글들이 죽음과의 대면 속에서 씌어졌기 때문이다. 죽음보다 사람을 비장하게 만드는 것은 흔치 않다. “나는 끝에서 시작했다”(5면)는 선언으로 시작되는 이 평론집에는 끝, 종언, 종말, 죽음 등의 단어가 씨처럼 곳곳에 박혀 있다. 이러한 종언을 대표하는 문학적 형상으로 ‘언데드(undead)’가 있다. 언데드는 “자신이 속한 〔현실의〕 총체에 포함될 수 없고 자신이 이미 포함된 집합에 소속될 수 없는 예외의 형상”(119면)이다. 이것은 국민의 한계는 물론이고 휴머니티의 한계형상을 나타내기도 한다. 나아가 오늘의 문학과 시대의 본질을 드러내는 기표로서도 존재한다. 언데드는 ‘문학 없는 문학’ ‘허구를 해체하는 허구’ ‘인간이기를 포기한 인간’ ‘언어가 아닌 목소리’ 등의 어구를 통해 그 적용범위가 더욱 넓어진다. 이러한 형용모순적인 어구들은 해체와 생성의 두가지 의미작용을 동시에 지향한다. 신세계를 먼저 본 자의 확신으로, 저자는 우선 그동안의 문학, 인간, 현실을 뒤집고 부수고 조각낸다. 새로운 생성과 관련해 그는 조곤조곤한 보여줌보다는 우레와 같은 말하기를 선택하고 있다. 지금의 현실 역시 절망의 극한이기는 마찬가지인데, 비상사태가 예외가 아닌 상례가 되었다는 인식은 그의 평론의 기본전제다.

그가 상대하는 첫번째 죽음의 대상은 문학이다. 지금의 한국문학은 “이른바 뱀파이어나 좀비 같은 것은 혹시 아닐까”라는 의문을 불러일으키며 “죽었으나 되살아나고, 살아 있는 것 같지만 죽어 있”는(5면) 존재다. ‘문학의 죽음’이라는 테제에 대한 성찰과 대응은 복도훈 비평의 핵심이다. 그는 문학의 종언론에 맞서 지금의 한국문학이 충분히 다양한 성과와 문학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관점을 고수한다. 이를 위해 복도훈은 ‘이전 문학과 다른 2000년대 문학의 변별성 정립—동시대 문학에 대한 옹호—근대문학의 종언 테제에 대한 비판’이라는 비평적 전략을 보여준다.

동시대 문학에 대한 애정이 낳은 커다란 성과(650페이지라는 분량이 증명하듯)에도 불구하고, 이전 문학과의 변별성 찾기라는 신념이 가끔 과도하게 드러나는 경우가 있다. 일례로 축생, 시체, 자동인형, 즉 “인간이 헐벗은 상태로, 부정성의 원초적 형태로 되돌아갔을 때의 주체에 대한 고유한 형상들”(252면)이 지금의 한국문학을 이전 시기와 변별짓는 중핵인지는 의문이다. 조금만 생각해보아도, 비인(非人)을 깃발처럼 흔들던 장용학, 자신의 문학을 목석(木石)의 노래이자 울음이며 절규라고 말했던 손창섭 등이 대표하는 전후(戰後)세대의 문학을 오래전에 지나왔기 때문이다. 또한 복도훈은 “지금 누가 그백민석—인용자와 그의 소설을 기억하고 있는가!”(8면)라고 한탄하며, 백민석 문학이 자신의 중요한 비평적 거점임을 자신있게 밝히고 있다. 하지만 90년대와 2000년대 초의 비평담론에서 백민석만큼 많이 발화된 작가도 흔치 않다. 또한 백민석이 보이는 과잉의 열정은 ‘권력에 대한 병리적 저항’의 양식으로 이전에도 충분히 의미부여되지 않았던가? 또한 저자가 카라따니 코오진(柄谷行人)의 종언론을 꼼꼼하게 따진 후, 새로운 문학의 미래가 지난날의 문학에 대한 우울증적 집착이나 문학과의 결별선언이 아니라 “문학의 덧없음과 사소함, 우연성을 끝까지 긍정하는 일”(115면)이라고 할 때도, 90년대 비평담론과의 차이점은 뚜렷하게 찾기 힘들다.

복도훈은 때로 카라따니가 종언을 선언한 근대문학의 ‘인식적 도덕적 가능성’을 지금의 한국문학에서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오락이 아닌 인식론과 윤리학의 짐을 감당하는 문학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탈국가적 상상력, 이산, 환대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는 김연수 최인석 전성태의 소설들이, 여전히 “미학적인 만큼이나 윤리적인 것을, 판단력만큼이나 실천이성을”(177면) 담지하고 있는 예다. 소통과 연대를 위한 윤리와 관련해, 저자는 매우 정치하고 의미있는 논의를 펼친다. 치밀한 이론적 검토를 거친 후, “동정이 공포와 같아지는 순간, 그리고 공포가 동정으로 반전되는 그 순간”이 바로 “문학이 윤리적일 수 있는 순간”(261면)이라는 것이다. 공포와 동정을 포개놓는 새로운 공감의 방식은 무조건적인 환대나 맹목적인 공감에 바탕한 윤리보다 한단계 진전된 논의임이 분명하다.

복도훈이 스스로와 이 시대의 문학을 “자신의 두 눈을 찌른 후 어둠 속을 응시하면서 정처 없는 방랑을 떠나게 된 오이디푸스”(7면)라 칭하는 것은 근대문학과 구별되는 근대 이후의 문학적 성격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눈먼 자’는 눈이 멀었기에 오히려 근대를 상징하는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그 종말의 징후적 실체를 볼 수 있는 자이기도 하다. 육신의 눈을 감은 결과 그는 근대가 만들어놓은 여러 개념과 의미들을 해체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응시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언어가 아닌 목소리, 인간이 아닌 축생·시체·자동인형, 문학이 아닌 문학 등이 그것이다.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열정과 예리한 지성을 통해 이러한 형상과 개념들이 지금의 세상 ‘너머’에 있음을 이 역작은 성공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쯤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새로운 형상들이 지금의 ‘이전’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눈으로 세상 보기에 절망한 자’가 선택한 눈멈이 아니라 ‘한번도 눈떠본 적 없는 자’의 눈멈이라면 그것은 여간 낭패가 아니다. 복도훈은 이러한 우려가 하나의 우스개에 불과함을 증명해낼, 종언의 시대를 살아가는 비평의 진정성과 가능성의 상징임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