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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신기섭 시집 『분홍색 흐느낌』, 문학동네 2006

언어의 자력

 

 

김기택 金基澤

시인 needleeye@kornet.net

 

 

분홍색 흐느낌

시가 보이지 않는 것들을 불러모을 때, 보이지 않는 것들이 비로소 제자리를 찾은 듯 사방에서 달려나올 때, 그것들이 시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을 때, 시는 언어를 버리고 언어는 기꺼이 몸으로 바뀐다. 그때 보이지 않는 것들은 분명하게 이목구비를 갖추고 만질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냄새 맡을 수 있는 실체를 얻게 된다. 허깨비인 이미지가 진정성을 얻게 되는 것은 바로 그 순간이다. 그때 시인이나 독자는 자신이 전혀 새로운 시간과 공간 안에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신기섭(申基燮)의 시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끌어당기는 강한 자력(磁力)을 지니고 있다. 그 자력은 피와 살에서 나온다. 그의 시는 발화하자마자 바로 기억을 깨우고 들어가 보이지 않는 것들의 피와 살을 재생시킨다. 보이지 않는 어머니와 할머니, 할아버지가 소통 가능한 실체가 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고 많은 시어를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族譜를 펼친다

 

투명한 발이 달린 눈물들이 기어나온다

 

눈물들의 작은 발소리 옷 속으로 스며든다

 

눈물이빨들이 살을 물어뜯는다 상처 주는 법,

 

아주 잘 아는 듯 물어뜯은 곳을 간지럽게 만져주기도 한다

 

족보에 없는 그녀가 가슴에서 살아난다

—「눈물」 부분

 

족보의 엄숙하고 딱딱한 글자들은 시적 화자의 시선이 닿는 순간, 시의 언어에 편입되는 순간, 그의 몸에 붙는다. 시어에 다닥다닥 달라붙은 기억과 추억도 와서 붙는다. 그리고 족보 깊이 묻혀 보이지 않던 어머니가 족보를 뚫고나온다. 그와 어머니를 붙이는 접착제는 눈물이다. 그것은 피와 살에서 짜낸 즙을 원료로 한다. 눈물의 자력은 “투명한 발”로 시적 화자의 옷에 스며들고 그의 살을 물어뜯고 쓰다듬는다. 그때 어머니라는 언어는 기표, 기의, 개념 따위의 기능과 역사성·사회성의 권력을 버리고 살아있는 어머니가 된다. 그 어머니는 “눈물손톱 눈물이빨 눈물더듬이를 가진 벌레 같은/작은 어머니들”이 되어 화자의 눈에서 쏟아지고 “얼굴을 뚫고” 나오기도 한다. 그것은 “귓속에서부터 발끝까지 울음의 시간을 전하러”(「울지 않으면 죽는다」) 화자에게 스며든다. 눈물의 자력은 제어하기 힘들 만큼 강력한 것이기에 화자는 오히려 그것을 억제하기 위하여 눈에서 나오는 어머니를 벌레처럼 꾹꾹 눌러 잡아야 할 지경이 된다.

할아버지가 “기저귀를 돌돌 말아 붓처럼 쥐고” 그린 벽화, 그 똥물이 “흘러내리는 그림” 속에서도 죽은 엄마를 발견하고, 그는 피와 살의 자력에 이끌린다.

 

우리 엄마라, 할아버지가 그린 엄마의 얼굴은

샛노랗게 터진 채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엄마가 되기 이전의 액체, 핏줄이 생기려는 듯

조금씩 핏빛이 드러나고 두근거렸지만

창밖은 폭설이 퍼붓는 어두운 빙하기, 엄마는 차가웠다

(…)

엄마는 따뜻했다, 품에 안겨 냄새를 맡아보면

상처의 냄새 봄의 냄새 사라지지 않았다

화상자국 같은 봄이 곳곳에 만발했다

—「할아버지가 그린 벽화 속의 풍경들 3」 부분

 

피와 살의 자력 속에는 끈적끈적한 접착성을 지닌 점액질 같은 액체가 있다. 그것은 마치 슬픔의 농축액 같다. 슬픔이란 말에서 모든 언어적 추상성을 제거하고 그것을 체온으로 졸여냈을 때 남는 걸쭉한 물질. 그의 시어에는 그런 비린 액체의 냄새가 난다. 그 액체는 어머니이기 이전의 몸에서 분비된 것이기도 하지만, 어머니라는 상처에서 분비된 것이기도 하다. 시적 화자의 몸은 그 두 몸을 지니고 있다. 표제작 「분홍색 흐느낌」에서 화자가 양철쓰레기통에서 할머니의 분홍색 외투를 태우며 “그해 겨울 용달차 가득 쌓여 있던 분홍색,/외투들이 똑같이 생긴 인형들처럼/분홍색 외투를 입은 수많은 할머니들이/나의 몸속에서 하늘을 향해 솟구친다/이제는 추억이 된 몸속의 흐느낌들이/검은 하늘 가득 분홍색을 죽죽 칠해나간다”고 진술할 때, 그 흐느낌은 바로 그 액체의 떨림이다. 추억도 그런 물질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의 시에 의하면 추억은 “지금 내 가슴 가득/흘러넘치더니 구석구석/번지더니 몸 바깥으로 터져나오는” 것이다.

 

봄날의 마당, 할머니의 화분 속 꽃을 본다.

꽃은, 산소호흡기 거두고 헐떡이던

할머니와 닮았다 마른 강바닥의 물고기처럼

파닥파닥 헐떡이는 몸의 소리

점점 크게 들려오더니 활짝

입이 벌어지더니 목숨을 터뜨린 꽃,

향기를 내지른다 할머니의 입속같이

하얀 꽃, 숨쉬지 않고 향기만으로 살아 있다.

내 콧속으로 밀려오는 향기, 귀신처럼

몸속으로 들어온다 추억이란 이런 것.

내 몸속을 떠도는 향기, 피가 돌고

뼈와 살이 붙는 향기, 할머니의 몸이

내 몸속에서 천천히 숨쉰다.

—「추억」 부분

 

시적 자아와 할머니가 떨어져 있을 때, 자력을 지닌 피와 살은 단지 끈적끈적하고 걸쭉한 물질일 뿐이었으나, 서로 결합되는 순간 그것들은 향기가 된다. 그 강력한 화학반응이 미적 체험의 순간이다. ‘피가 돌고 뼈와 살이 붙는 향기’가 내질러질 때, 현실의 시공간을 넘어 들숨 날숨으로 소통할 때, 그의 온몸을 휘감고 돌 때, 둘이었던 그와 할머니 또는 그와 어머니는 한몸이 되어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원래 하나였던 것이 강제로 분리된 것처럼, 서로 본래의 하나가 되려는 자력은 매우 강력하다.

신기섭 시인은 200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그해에 교통사고로 죽었다. 피와 살의 자력을 지닌 그의 영혼은 그의 시에 단단하게 들러붙어 있다. 체온이 남은 채로, 땀구멍과 주름 속에 든 채로 언어에 담겨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 그의 시를 읽는 이에게 달라붙는다. 핏물로 스며든다. 향기를 내지르려고 그와 섞인다. 억지로 그를 몸에서 떼어내려 하면 읽는이의 살점이 떨어질 것이다. 그것이 신기섭 시가 지닌 언어의 자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