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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박철 朴哲
1960년 서울 출생. 『창비 1987』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시집『김포행 막차』『새의 전부』『너무 멀리 걸어왔다』『영진설비 돈 갖다주기』『험준한 사랑』등이 있음. bch2475@hanafos.com
참외향기
늙으신 어머니가 깎아온 참외 한 접시
늙으신 어머니 참외 한쪽 들어 내미네
맑은 속살 흰 눈섭 받아들고 머뭇거리자
늙으신 어머니 어서 먹으라 말하네
늙으신 어머니 이제 잊었나
아주 오래전 더위가 뼛속까지 번지던 날
장맛비로 쓸고 간 인간사 이후
나 참외를 먹지 못하네
그때 그랬지
논길을 걸어 들길을 걸어
가다 가다 쉬던 곳 땡볕 속의 푸른 참외밭
이별을 앞둔 두 사람
낮은 원두막에 앉아 참외옷을 벗겼지
더위를 끌고 코끝에 번지던 참외향
사랑은 훗날 달콤한 향기로 남고
나는 더이상 참외를 먹지 못하네
오늘도 다시 풋풋하게 살아오는 사람
며느리 삼으면 좋겠다던 그 여자를
늙으신 어머니는 벌써 잊으신 모양이네
어서 한점 들어봐라
늙으신 어머니 고운 손으로
그 여자 잊으라 참외 한쪽 코끝에 디미네
언젠가 내 가슴속을 떠나는 날
어머니도 늙고 나도 늙고 그 여자도 늙어
세상은 달콤한 참외향만 남겠네
세 시에 흰 눈이 내린다
눈이 내린다
마당 가득 흰 눈이 내린다
누군 히말라야에 가서 초라한 나를 발견하였다는데
네 시 약속을 위해 집을 나서는 길
차마 흰 눈 위에 발을 딛지 못하고
마당가에 섰다가 거대한 나를 보았다
함박꽃이 되어 내리는 올해의 첫눈
너를 찾든 나를 잃든 오늘은 비긴 날로 하자
그러니 우린 하나다
지금이라도 우연히 골목에서 만나면
함박꽃 한술 떠 서로 먹여주며
아프게 살아온 지난여름은 잊도록 하자
그래 그러라고
세 시가 지나는데
흰 눈이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