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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사랑의 역사는 치욕으로 오고

도종환 허수경 최승자의 시와 ‘아픈 몸’의 윤리

 

 

김영희 金伶熙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라일락과 장미향기처럼 결합하는: 진은영 시의 ‘감성’과 ‘정치’」 등이 있음. yhorizon@naver.com

 

 

아픈 몸

 

‘시작(詩作)은 몸으로 하는 것’(여, 침을 뱉어라)이라는 선언은 ‘시인은 무엇으로 시를 쓰는가’라는 오래된 물음에 대한 김수영(金洙暎)의 대답이었다. 몸으로 시를 쓴다는 것은 우리의 머리와 심장으로 현상한 기왕의 사변과 정념을 모조리 파산시키는 것. 그리하여 혼돈 속에서, 폐허 위에서 시작하는 것을 말한다. 김수영에게 몸이란 항상 새롭게 사유하고 새롭게 감각하는 몸이었다. ‘그림자에조차 의지하지 않는’ 몸은 기성의 것들을 파산시킨 자리에서 발생하는 혼란과 자유를 신뢰했다. 김수영의 타전은 시의 내용과 형식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오래도록 절실한 메시지로 수신되었으나 이 명제에서 시인의 몸은 ‘아픈’이라는 말을 괄호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아픈 몸이란 무엇인가. 예컨대 “먼 곳에서부터/먼 곳으로/다시 몸이 아프다”(김수영 「먼 곳에서부터」)라고 고백할 때, 아픈 몸은 시인이 사물과 언어적으로 접촉하고 그것을 자신의 몸에 내면화하여 사물의 사물성을 새롭게 현상하는 데 복무하는 근원적인 시인의 몸이다. 이때 고통은 논리적 사변이 아닌 몸의 사유를 통해 사물의 본래성을 개방하려는 시인에게 수반되는 필연적인 감각이다. 그러니까 아픔은 몸이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이라 할 수 있을 텐데, 철학자의 말을 빌리자면 고통이란 ‘몸이 사유하는 양태’(김상환)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언어를 통해 사물과 세계를 새롭게 개시하려는, 혹은 자신을 시적 대상으로 정직하게 임상(臨)하려는 시인에게 고통은 필연적이다. 그러니 아픈 몸이란 시인의 존재론적이고 시적인 신체를 표상한다고 하겠다.

그런데 시인은 여기에 더하여 “아픈 몸이/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자”라고 스스로를 추인한다. 이때에 아픈 몸은 다름아닌 시대의 상처가 기입되는 장소이다. 시인은 자신의 몸에 “해묵은/1961개의/곰팡내를 풍겨 넣라”(「아픈 몸이」)고 주문한다. 실패한 혁명이 풍기는 역사의 곰팡내를 자처하는 시인의 몸은 시대의 폐허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시인은 패배한 역사를 몸으로 실감한다. 그리하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다시 몸이 아프다. 여기서 시인의 몸을 상상계적 신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시대의 아픔을 몸의 아픔으로 경험하는 철저하고 절실한 감각에서 시인의 정치가 발원하는 것임을 김수영은 자신의 아픈 몸으로 실증하고 있다. 그러니 아픈 몸이란 시인의 역사적이고 윤리적인 신체를 표상한다고 하겠다.

우리는 김수영의 아픈 몸에서 사물의 본래성을 개시하고 역사의 곰팡내를 기입하는 장소로서의 시적이고 역사적인 신체를 대면하게 된다. 그렇다면 아픈 몸이라는 사유와 감각 속에 시인의 존재론이 있고 윤리학이 있는 것은 아닐까. 김수영의 아픈 몸은 사물과 언어, 역사와 현실에 대해 ‘동시에’ 감각하고 사유하는 몸의 형상을 보여준다. 존재론적이고 역사적인 신체란 개별적 정체성을 지닌 몸들의 결합이 아니라, 존재론의 편에서 하나의 시 작품은 자신의 전부가 되고 윤리학의 편에서도 하나의 시 작품은 자신의 전부가 되는 그리하여 이들은 두 몸의 결합이 아니라 이 둘의 긴장 위에서 발생하는 ‘한몸’임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렇게 물어보자. 김수영의 아픈 몸은 여전한가. 지금 이곳의 현대시에서 김수영의 아픈 몸은 어떠한 모습으로 유전되고 있는가. 우리 시대의 무서운 사랑을 앓고 있는 도종환(都鍾煥), 허수경(許秀卿), 최승자(崔勝子)의 시를 통해 아픈 몸들의 가계도를 살펴본다.1)

 

 

알몸과 사색의 노래

 

도종환이 고() 박영근(朴永根) 시인에게 바치는 시 「못난 꽃」에 보면 “문학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목숨과 맞바꾸는 못난 꽃”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서정과 현실의 아픔이 만나는 이 문장은 한편 부조리하게 읽힌다. 대단치도 않은 일에 자신의 목숨을 거는 시인의 부조리한 존재론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문장이 끝내 회의하는 것은 시인의 비참이 아니라 “노동으로도 살 수 없고 시로도 살 수 없는” 세계의 비참이기 때문이다. 자본의 교환가치는 노동과 문학의 시간을 ‘착취’의 형식으로만 가치평가 해왔으며, 시는 자본의 먹이사슬에서도 가장 하위에 위치해왔다. 시인의 노동과 시의 가치가 좀처럼 자본화되지 않는 이 시대에, ‘문학’과 ‘목숨’이 동의어가 되는 기이한 역설은 우리의 자본주의적 가치체계에서 얼마간의 파열음을 낸다. 시인의 부조리한 문장은 이처럼 사회의 지배적인 감각체계와 그것이 내장한 불평등의 책략들에 대하여 심리적인 균열을 일으킨다. 부조리한 문장을 통해 시는 지배규칙에 대한 예외로 작동하고 나아가 문학은 지배질서와 불화하는 방식으로 현실의 모순에 틈을 만든다.

 

그 긴 복도를 다 지나가야 했다 복도 끝에 수도가 있었고 세숫대야에 퍼서 끼얹어주는 수돗물을 한번이라도 더 받으려고 아우성치는 죄수들과 발가벗고 복도를 달려갔다 이삼분 정도나 될까 서너차례 물세례를 받으면 행운이었다 미리 칠하고 간 비눗물이 다리 사이로 채 미끄러지기도 전에 다음 사람들에게 자리를 비켜주어야 했다 그것도 목욕이라고 수건으로 짐승 같은 시간의 방울방울을 털어내며 돌아서다 준이를 만났다

나보다 더 털이 숭숭한 준이는 내가 담임한 아이였다 (…)

그 긴 복도를 다 지나와야 했다 다른 감방 사람들이 물기 맛본 살을 이리저리 비틀며 지나가는 몸들을 쳐다보았다 해바라기가 노랗게 피어 있는 여름이었다 감옥 밖으로 나와서도 나는 자주 알몸으로 긴 복도를 지나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무슨 소리인가 창 안에서 주고받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복도」 부분

 

“떳떳한 교사”가 되겠다던 의지와 실천이 결국은 시인을 “짐승 같은 시간” 속으로 이끌었다. 죄수들의 목욕이란 그런 것이다. 감옥 안에서 ‘나’는 짐승처럼 발가벗고 달려야 했으며 제 영역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아우성치며 버둥거려야 했다. 짐승 같은 몸의 시간과 떳떳한 교사의 시간은 언뜻 불일치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불일치가 아프고 민망한 몸들을 침묵하게 했을 것이다. 아비규환 같은 목욕을 끝내고 돌아서다 시인은 자신이 담임했던 아이 ‘준이’를 만났다. 그들은 긴 복도에 서서 그렇게 서로의 알몸을 바라보다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인의 알몸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 몸에는 떳떳한 교사가 되고자 했던 존재의 의지와, 그 실천을 짐승 같은 시간 속에 가두어버린 역사의 횡포가 동시에 기입되어 있다. 우리는 시인의 알몸에서 역사적 개인의 몸과 그곳에 매설되어 있는 치욕의 시대를 흔적처럼 읽는다. 준이의 알몸에도 비정한 현실의 그림자는 드리워져 있다. 어린 나이에 사람을 찌르고 감옥에 온 준이의 폭력을 어찌 한 개인의 악행과 불행 탓으로만 돌릴 수 있겠는가. 그 순간 시인은 알몸의 비애와 모멸을 견디며 긴 복도를 지나와야 했다. 감옥 밖으로 나와서도 알몸과 복도를 벗어나지 못했다. 스스로를 회의하는 ‘나’의 시선과 ‘나’를 회의하는 타인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알몸을 어쩔 수 없었다 한다. 시인은 자신의 언어에 민망해지지 않기 위해서 존재의 모멸감과 시대의 불모성을 알몸으로 견디며 세월의 복도를 고독하게 지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여름은 가을로 아슬아슬하게 넘어갔다

구름도 흑백사진의 한 귀퉁이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어이없이 쫓겨난 채 집의

허울을 붙들고 있는 이들에게도

전기도 수돗물도 끊긴 가을은 왔고

탐욕이라고 불러도 좋고

환멸이란 수식어를 붙여도 좋을

폭력적인 한 시대가 긴 그림자로

골목을 둘러싸고 있었다

팔 한짝을 잃어버린 옷소매처럼 마음

허공으로 풀풀 날려다녔지만

비루함과 무기력의 껍질을 벗고

귀뚜라미처럼 더듬이를 허공에 올린 채

이 터질 것 같은 순간에 대해 타전하고 싶었다

—「환절기」 부분

 

감옥 밖의 한 시대는 온갖 죽음의 몸들로 가득하다. 삶의 벼랑으로 내몰린 자들이 망루에 오르다 불에 타 죽고, 전직 대통령은 자신의 깨진 몸으로 인간의 존엄을 증언했으며(「그해 여름」), 위안부 할머니는 “집회와 소송과 모멸”의 “대답 없는 한 시대”를 무참히 흘러가셨고(「강」), 젊은이는 징벌적 통보와 차등 대우의 대학제도 하에서 “수직으로 떨어져내렸다”(「카이스트」). 사색(死色)의 현상이란 인간의 영토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어서, 대지는 “죽은 짐승의 몸과 피로” 비명을 지르고(「천변지이(天變地異)」), 강은 “발기한 중장비들”에 의해 자신의 “어린 몸”과 순한 살을 찢긴 채 곡을 하며 흐른다(「강」). 그렇게 계절은 ‘아프게’ 넘어간다. 자본과 독재의 폭력적인 한 시대가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가난한 이들에게도 “전기도 수돗물도 끊긴 가을”은 왔다. 이렇게 넘어가는 사색의 시대에 시인의 몸은 비루함과 무기력이라는 환절기를 앓는다. 그것은 때로 “밥그릇을 발로 차고 문을 뛰쳐나가고 싶은 날”(「개」)들의 한스러운 몸부림으로 전화되기도 하는데 도종환에게 이같은 몸부림은 시대의 것이기도, 존재의 것이기도 하다.

비루함과 무기력이 첨단의 능력과 위장된 활력을 강요하는 위악(爲惡)한 자본주의를 살아내는 역설적인 윤리가 될 수도 있을 테지만, 시인의 몸은 그 속에 머무르지 않는다. 도종환은 자신의 몸을 언어의 더듬이로 개방하여 이 사색의 순간을 타전하는 것으로 알몸의 윤리를 수행하고자 한다. 죽은 몸들은 “넘쳐났으나/잘못했다고 말하는 이는 없는”(「그해 여름」) 시대, 이 “터질 것 같은 순간”의 답답한 열망을 시인은 자신의 아픈 몸의 말들로 타전한다.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는 단정하고 조화로운 서정으로 미만(彌滿)하지만 그 세계는 이처럼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자본주의가 폭주하는 시대를 예민하게 감각하는 시인의 신음으로 역사와 불화하고 있다. 그리하여 도종환의 세계는 제 몸 벌레 먹히고도 “자줏빛 꽃 곱게 피우”는 “과꽃”의 서정(「발치(拔齒)」)과 “저물 날만 남았어도” 세상을 저토록 환히 비추는 하현의 풍경(「하현」)으로 아름답지만 그곳은 동시에 차벽(車壁) 앞에서 몸부림치는 숲과 “스크럼을 짜고 우는 나무들”(「그해 여름」)의 현실로 서글프다. 그에게 서정은 현실의 아픔에 눈감지 않는 가운데 비로소 제 몸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에 대해 시인이 알몸으로 타전하는 사색(死色)의 현실이 우리를 사색(思索)의 서정으로 이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이렇게 타전하는 말들, 서정과 현실이 만나는 문장이 도종환의 ‘민중시의 문법’을 구성한다. 이 문법 속에서 시인의 삶과 시의 언어는 좀처럼 분리되지 않는다. 물론 시인의 정치와 시의 미학은 각기 다른 영역의 것이며 미학적인 측면에서라면 도종환의 시를 ‘보수적’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언어에 대한 자의식 없이 시인의 사유를 편안한 문장으로 손쉽게 보여준다거나 삶의 지혜를 교훈적인 맥락에서 전하려는 시 중에는 독자들에게 별다른 사유의 공간을 허락하지 않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문장은 자신의 언어를 몸으로 살아낸 자의 육성을 통해 시에 새로운 사유의 공간을 마련하기도 하며, 어떤 시는 그 편안하고 투명한 문장으로 결코 편안하지도 투명하지도 않은 세계의 진실을 향해 나아가기도 한다. 자신의 시에 민망해지지 않기 위해 알몸으로 현실의 폐허를 걸어가는 피로와 긴장이 그곳에 있으니, 이 문법 속에서 분열과 회의는 말과 말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인과 현실 사이에 있다.

어쩌면 도종환의 시는 아픈 몸으로 부르는 오래된 노래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꿈은 언제나 꿈의 크기보다 아름답게/손에 쥐어졌다 사라지는 것”(「일몰」)이라고 했다. 그는 우리의 손에 아름답게 쥐어졌던 그것, 이루어지진 않았으나 그것대로 아름다운 꿈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것은 폐허와 황홀이 한몸이 되고 아픔과 아름다움이 한몸이 되는 오래된 이야기이다. 시인은 꿈에 대해 말할 때 항상 ‘우리’라는 주어를 잊지 않는다. 그에게 꿈의 본연이란 우리가 그것을 손에 쥐고 함께 걸어왔다는 사실 자체에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꿈이 우리를 얼마나 비참하게 만들었는지/얼마나 가혹한 형벌이었는지”(「싹」) 자신의 아픈 몸으로 터득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모든 몸이 제자리를 찾아 돌아가는 꿈”(「몸에 대한 블라지미르 쏘로킨의 발제」)을 꾼다. 역사 속에서 모든 몸이 제자리를 찾는 꿈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인지 알 수 없지만, 우리는 그것이 시인의 알몸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역사의 알몸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수행하는 사랑의 연습을 통해 가능하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우는 몸과 절망에 대한 공감각

 

아픈 몸의 가계도에서 허수경의 ‘우는 몸’을 빼놓을 수 없다. ‘울다’라는 몸의 작용과 그것의 반복으로서의 ‘울지 마’라는 주문(呪文)은 허수경 시의 근원적인 바탕을 이룬다. ‘어쩔 수 없이’ 우는 몸, 울음에 대한 그 어쩔 수 없음의 태도가 허수경에게는 가장 철저한 윤리이고 절실한 자유가 아닐까. 그것은 욕망도 당위도 연민도 아닌, 그 자체로 ‘울지 않을 수 없는’ 몸의 의지며 감각이다. 울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도시들이 울고, 아이들이 울고, 시인들이 울고, 문장들이 운다. 그것이 학살이 벌어지고 있는 세계의 자화상이다. ‘아픈 몸이 더이상 아프지 않은 세상’은 우리의 무의식에서나 간신히 존재할 뿐이다. 그에 대해 ‘울지 마 울지 마’라고 시인이 주술적인 리듬을 흘릴 때 그것은 긴 인류의 갈림길에서 “언제나 틀린 결정만 해온 존재”(「여기는 이국의 수도」)에 대한 위무기도 하겠지만 그 이전에 그들에 대한 동일시며 그들과 행하는 어떤 실존의 나눔이라고 할 수 있다. 허수경에게 우는 몸은 자신과 연인에게 그리고 사물과 세계에 개방되어 있으며 이들에 대한 ‘뜨거운 심장’의 작용이 울음의 근원이 된다. 하지만 존재는 분열되어 있고 세계는 파괴되어 있으니 심장이 수행하는 사랑은 오히려 악몽과 동의어가 된다. “아주 오래된 미래를 향한 모든 꿈은 악몽”(「1982년 바다를 떠나며」)이었고 그렇게 꾸었던 꿈 때문에 시인은 이렇게, 오래된 노래를 부른다.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조금 잠을 자면서 얻어맞는 곰처럼 울었네”

 

이름 없는 섬들에 살던 많은 짐승들이 죽어가는 세월이에요

 

이름 없는 것들이지요?

 

말을 못 알아들으니 죽여도 좋다고 말하던

어는 백인 장교의 명령 같지 않나요

이름 없는 세월을 나는 이렇게 정의해요

 

아님, 말 못하는 것들이라 영혼이 없다고 말하던

근대 입구의 세월 속에

당신, 아직도 울고 있나요?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부분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에서 울음의 기원은 다름아닌 ‘당신’이다. 허수경의 당신에 대해서라면 우리는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다”(「혼자 가는 먼 집」, 혼자 가는 먼 집, 문학과지성사 1992)로 시작하는 오래된 고백을 여전히 잊지 않고 있다. 허수경이 부르는 당신의 노래는 한결같이 아프고 아름다워서 우리는 많은 순간 그 이름 앞에서 울곤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당신의 맥락은 더욱 풍요로워져 지금 시인에게 당신이란 ‘나’와 연인과 세계가 만나는 일종의 장소와 같다. 그리하여 당신은 “그날 기찻길에 놓여 있던 시체”이고, “고대왕국의 무너진 성벽을 보러 가던 문화시민”이며, “무심한 소나무”이고, “절벽에서 뛰어내린 실업의 세월”(「기차역에 서서」)이다. 당신은 생과 사, 사람과 사물,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이름이다. 이렇게 도처에서 느껴지는 당신은 무엇보다 ‘내가 사랑하던’ 대상으로서의 당신이며 이제 “나라고 불러도 될 거 같은”(「여기는 그림자 속」) 존재로서의 당신이다. 허수경에게 ‘당신’이라는 말과 ‘사랑’이라는 말은 마치 동의어처럼 사용되며 당신이라는 장소에서 ‘나’와 너는 한몸으로 겹쳐져 시인은 이렇게 “당신은/나는”(기차역에 서서)이라고 연이어 불러보기도 한다.

당신에 대하여 시인은 결정적으로 “이름 없는 것들”이라고 말한다. 당신은 이름이 없기 때문에 당신이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이름이 없기 때문에 당신이라는 보편성을 얻었는지도 모른다. 이름이 없다는 것은 타인에게 보장받을 자신의 고유성이 없다는 것, 즉 그 사회의 정체성으로부터 배제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한에서 이들은 그 세계의 잉여적 존재다. 이들에게는 또한 ‘언어’가 없다. 이들은 자신의 말을 할 수 없으며 타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다. 타인은 오로지 백인의 언어로만 말하기 때문이다. 백인에게 이들의 말은 짐승의 울음과 같아서 소통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백인 장교는 이름 없는 것들에 대해 “말 못하는 것들이라 영혼이 없다”고 그들의 정체성을 규정하고는 “말을 못 알아들으니 죽여도 좋다”는 명령을 내린다. 그 명령이 수행된 자리에 새로운 도시가 세워졌다.

시인은 이에 대해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의 이야기”라는 이름을 붙인다. 자신의 고유성을 보증받을 수 없는 이들이 살아간 “이름 없는 세월”의 이야기, 인간 생태계 가장 아래쪽에 위치한 이들이 살아낸 빌어먹을 역사. 이것이 바로 근대, 백인, 전쟁으로 요약되는 긴 세기의 이야기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이야기를 ‘이름 없는 것들의 울음’으로 감지한다. 그리고 물을 것이다. “당신, 아직 울고 있나요?”

 

비행장을 떠나면서 나는 울었고 너도 울었지

비행장을 떠나면서 사람들은 커피를 마시며 우울한 신문들을 읽었고

참한 소설 속을 걸어다니며 수음을 했지

사랑이 떠나갔다는 걸 알았을 때 사람들의 가슴에서는 사막이 튀어나왔는데

사막에 저리도 붉은 꽃이 핀다는 건 아무도 몰라서 꽃은 외로웠지

 

비행장을 떠나면서 사람들은 테러리스트들을 향해 인사를 했고

비행장을 떠나면서 지상에 쌓아놓은 모든 신문들에게 불안한 악수를 청했어

울지 마,라고 누군가 희망을 말을 하면

웃기지 마,라고 누군가 침을 뱉었어

 

21세기의 새들은 대륙을 건너다가 선술집에 들러 한잔했지

21세기의 모래들은 대륙과 대륙에 새 집을 짓다가 스시집에 들러

차가운 생선의 심장을 먹었어

 

21세기의 꽃게들은 21세기의 모기들은 21세기의 은행나무들은

인사를 하지 않는 시간을 위해 오랫동안 제사를 지냈지

21세기의 남자들은 21세기의 여자들은 아이들은 소년과 소녀들은

 

비행장을 떠나면서 사랑이 오래전에 떠난 사막에 핀 붉은 꽃을 기어이

보지 못했지, 입술을 파르르 떨며 꽃이 질 때

비행장을 떠나면서 우리들은 새 여행에 가슴이 부풀어

헌 여행을 잊어버렸지, 지겨운 연인을 지상의 거리, 어딘가에 세워두고

비행장을 떠나면서 우리들은 슬프면서도 즐거웠지

—「비행장을 떠나면서」 전문

 

비행장을 떠나면서 바라보니 한 세기의 우울한 풍경이 그곳에 있다. 우울한 신문들은 사람들에게 전쟁의 소식을 전달하고 불안을 전파한다. 테러와 불안은 21세기 안에 깊숙이 들어와 있으니 사람들이 우울한 악수를 나눈 그는 다름아닌 어제의 테러리스트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모두 병들었으나 아무도 아프지 않았던 그날처럼 사람들은 커피를 마셨고 수음을 했다. 비행장을 떠나며 그들은 새 여행에 가슴이 부풀었으나 또한 ‘어쩔 수 없이’ 슬펐다. ‘울지 마’라는 희망의 말에 침을 뱉으며 “나는 울었고 너도 울었”다.

비행장의 풍경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비행장을 떠나면서 우리가 정말 떠나온 것은 무엇일까. 어쩌면 당신이라는 ‘지겨운 역사’가 아니었을까. 그것을 근대와 백인과 전쟁의 역사라고, 달리 20세기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전부였을까. 비행장을 떠나며 우리가 정말 떠나온 것은 바로 당신이라는 ‘지겨운 연인’이었는지도 모른다. 비행장을 떠나며 사람들이 비로소 알게 된 것은 이곳이 “사랑이 오래전에 떠난 사막”이라는 것이고, 비행장을 떠나며 사람들이 끝내 몰랐던 것은 그곳에 “붉은 꽃”이 피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사랑이 불화하는 시대, 사랑이 젖어버린 시대(「나의 도시」), 사랑이 오래전에 떠난 사막에 대하여 알 것 같다. 그리고 사막의 가슴에 핀 붉은 꽃의 사연, 바로 심장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당신, 지겨운 연인이란 곧 사랑과 세계가 숨쉬는 장소이며 이곳에는 또한 울고 있는 ‘너’가 있고 ‘나’가 있다. 우리는 당신을 잊어버렸다고 믿었지만 지겨운 연인은 “지상의 거리” 어딘가에 있게 마련이다. 당신이 지상의 어느 곳에서 눈물을 흘릴 때 시인은 우는 몸으로 그들을 만난다. 허수경에게 울음이란 무엇보다 심장의 작용이고, 심장의 움직임은 다름아닌 사랑에 의해 추인된다. 학살과 테러의 세계, 우울과 불안의 세계적 전이를 통해, 곧 사랑의 불화와 차가운 심장의 이야기를 통해 허수경이 끝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이렇게 ‘치욕처럼 쳐들어오는 사랑의 역사’(「내가 쓰고 싶었던 시 제목, 의자」)에 관한 것이 아니었을까. 타인의 고통 앞에서 흔들리는 시인의 감수성, 당신의 슬픔에 대한, 때론 당신의 기쁨에 대한 ‘나’의 몸의 울림, 허수경은 우는 몸을 통해 관념이 아니라 몸의 차원에서 당신의 고통을 함께 느낀다.

비행장을 떠나면서 우리는 21세기의 우울에 대해 깊이 절망하게 되겠지만, 이에 대해 시인은 그 누구도 ‘기어이’ 보지 못했던 사막에 핀 붉은 꽃의 외로움을 함께 느끼는 자세를 우리에게 일러준다. 허수경은 당신의 몸과 ‘나’의 몸이 공동으로 감지하는 절망의 영역을 언어로 현상하고 그 속에서 운다. 세계의 외로움과 타인의 고통을 ‘느끼지 못함’ 속에 한 세기의 우울이 있고, 이를 ‘함께-느낌’(co-sensation) 속에 시인의 윤리가 있는 것 아닐까. 절망에 대한 공감각, 이것이 바로 허수경의 우는 몸이 수행하는 아픈 몸의 윤리이다.

 

 

폐허의 몸과 무위(無爲)의 잠

 

최승자의 몸은 폐허다. 그의 몸은 아프고, 그의 몸은 가볍다. 그 가벼움에 주의하여 최승자의 아픈 몸을 ‘빈 몸’이라고 말해볼 수도 있겠다. 최근 그의 시에는 유독 ‘빈’이나 ‘먼’이라는 형용사가 자주 쓰인다. 이에 대해 그가 빈 몸으로 먼 세계를 보았다고, 무수한 화폐의 욕망 너머, 역사와 문명과 시간의 무덤 너머 존재하는 시원(始原)의 세계를 보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육체를 빈 몸, 먼 몸으로 해제(解題)하고, 자신의 이름을 “짧은 흐느낌”(「물 위에 씌어진 3」)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읽으며, 자신의 육체를 고독한 “ 덩어리”(「Godji가 말하길」)로 본다. 그의 허허(虛虛)한 몸은 그러니까 욕망과 이데올로기와 언어의 무거움으로부터 벗어난 빈 몸의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최승자의 몸에 대해 말할 때 몸의 감각이라는 감성론이 아니라 존재의 형식이라는 존재론의 차원에서 접근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폐허로 오시라 나의 아씨들이여”(「58세 내 고독의 構圖」). 최승자는 폐허의 몸으로 자신의 시를 불러들인다. 그렇게 그는 가장 가벼운 육체로 우리 시대의 가장 투명한 말의 거울을 만들었다. 한 평론가의 바람대로 우리의 입김으로 거울을 흐려놓지 않으려면 우리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천천히 최승자의 시를 읽어야 한다.2)

 

하늘은 늘 파아란 해변

 

한 인간은 누구에게나 하나의 먼 풍경

 

이 식은 한사발 속에

나는 무엇을 쓰고 싶은 걸까

 

역사와 낙서

구름 공장들

민주주의라는 겉멋에 관한

민주주의라는 속맛에 관한 속살거림들

—「가고 갑니다」 부분

 

그는 “왜 세계는/삭을 대로 삭아야/세계일까요”(「왜 세계는」)라고 묻는다. 이러한 물음은 아이의 말인 듯 투명하고 폐인의 말인 듯 아프다. 먼 세계를 통과해 다시 돌아온 최승자가 바라보는 이 세계의 본질은 폐허다. 삭아서 무너져내리는 한 세계. 폐허의 비밀은 ‘위대한’ 자본에 있을 것이다. 그는 “기이하게 눈을 깜박거리며 미소 짓는”(「한없이 여린」) 현대의 얼굴과 그 얼굴 위로 흐르는 화폐의 권력을 보았다. 거대한 물화체계 앞에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이 자신의 고유성을 상실한 채 물신의 지배 아래 내던져진 사태와 체계의 확대재생산을 위해 소모되는 현실을 무상하게 보았을 것이다. 기술문명의 본질이 존재자의 의미상실이라는 것, 최승자는 존재자 전체가 처해 있는 어두운 공허의 운명을, 그렇게 “쓸쓸히 무너져내리는 한 세계”(「나의 natural chart에서」)를 보고 있는 것이다. 그가 본 현대의 얼굴이란 다름아닌 ‘세계의 폐허’와 ‘존재의 공허’이다.

역사와 진보의 운명 또한 마찬가지다. 시인은 “역사라는 시간의 공책 위에서/개미 한마리가 기어지나가는/꿈을”(「eine grüne Nacht/eine blaue Nacht」) 꾼다. 개미 한마리의 상징은 따로 숙고될 필요가 있겠으나 여기서 주의해 볼 것은 역사를 ‘허전하고 텅 빈 꿈’으로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이다. “개 같은 전쟁들”(「문명의 겨울」)이라고 독기를 품어보고 “참 유구한 역사”(「어디선가 문득 문득 툭 툭」)라는 냉소를 흘려보기도 하지만, 독기도 슬픔도 결국은 허전한 꿈과 같은 역사의 구멍 속으로 모두 흘러가고 있다. 역사란 결국 과거의 공포와 치욕을 현재 위에 돌무덤처럼 쌓아올리며 새로운 형식의 불평등과 부조리를 생산하는 것 아니었던가. 인류는 다만 그 속에서 역사의 권태와 문명의 소외를 ‘새롭게’ 경험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역사와 문명의 무덤 앞에 머물다 가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분노도 연민도 아닌 그저 바람이고 구름이어야 할지 모른다.

최승자의 최근 시집에서 우리는 세계와 문명과 역사를 바라보는 시인의 ‘멀고 쓸쓸한 시선’과 자주 마주치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그 어떤 교훈이나 위로의 포즈와도 무관하며 단지 시인이 살아낸 삶과 유관하다. 최승자는 무덤을 감각하던 긴 고통의 시간을 건너 이곳에 왔고, 공포의 시대와 모멸의 역사를 통과해 이곳에 있다. 그의 폐허의 몸에 존재의 서글픔과 역사의 아픔이 동시에 기입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아픈 몸, 쓸쓸한 시선, 투명한 언어로 “식은 한사발” 속에 시인은 무엇을 쓰고 싶었던 것일까. 그것은 역사고, 낙서며, 풍경이었다. 역사에 민주주주의라는 다리 하나를 걸쳐놓고 (정작 그 다리를 통해 어디로 갈 것인지는 알지 못한 채) 으쓱거리는 겉멋에 관한 이야기(「다리를 건너는 한 풍경」), 그것이 풍기는 허무한 시간의 맛, “무겁고 후덥지근한”(하늘 너머) 역사의 맛에 관한 낙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낙서로서의 시는 말의 무게를 벗어낸 말로 부르는 ‘실제’의 노래이며, 의식이 뒷걸음치는 육체로 쓰는 ‘실재’의 시이다.3)

그 노래 속에서 “한 인간은 누구에게나 하나의 먼 풍경”으로 흐른다. 이는 무슨 뜻인가. 인간이 상징세계의 질서와 서서히 무관해진다는 것, 어쩌면 시인은 인간이 언어와 이데올로기의 세계를 서서히 벗어난다는 것에 대해 상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시인은 “(사람이 사람을 초월하면/자연이 된다)”(「서서히 말들이 없어진다」)고 썼다. 이는 “서서히 말들이 없어진다”는 고백을 전재(前載)하고 있어 더욱 진지하게 다가온다. 사람이 언어와 관념을 초월할 때, 인간은 ‘하나의 먼 풍경’처럼 존재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러한 ‘초월’ 속에 최승자의 진리가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에게 진리는 오로지 ‘시간’이 아닐까. 이 모든 것이 근본적으로는 흘러간다는 사실, 진리가 있다면 그것은 “가고 갑니다”라는 절대적인 흐름 속에서만 간신히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잠들었네

너는 흔들리는 코스모스의 잠

나는 흩어지는 연기의 잠

 

한 세기가 끝날 무렵에도

너는 코스모스의 잠

나는 연기의 잠

 

그동안에 제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 뭐라 뭐라 하는

 

그러나 우리 두사람에겐

흔들리는 코스모스의 잠과

흩어지는 연기의 잠뿐이었네

—「그리하여 우리들은 잠들었네」 전문

 

최승자의 근작 시에서 주체를 설명하는 술어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말은 ‘흔들리다’일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역사나 문명에 대해서는 ‘흐르다’라는 표현이 자주 쓰인다. 세계가 무상하게 흘러가는 것이라면 그 세계에 내던져진 ‘나’가 존재하는 방식이란 이렇게 코스모스처럼 흔들리거나 연기처럼 흩어지는 것이다. 그 움직임에는 무엇을 위해 존재한다는 식의 일체의 인위가 없다. 이러한 흩어짐과 흔들림을 한 인간이 존재하는 ‘최소의’ 형식이라고 부를 수 있을 텐데, 이를 허허(虛虛)한 몸이 폐허의 세계와 허무의 역사를 살아내는 방식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여기에 존재의 ‘잠’이 더해지면 그 의미는 더욱 분명해진다. 잠이야말로 주체가 최소의 형식으로 세계에 머무르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서서히 말은 사라지고 ‘나’는 점점 흐려진다. 흩어지고 흐려지는 기미(幾微)의 존재론으로 ‘나’는 “(세상이 잠이었으면/세월이 잠이었으면)”(시간 속을 아득히)으로 시작되는 아픈 몸의 노래를 부른다. 오랫동안 우리 곁을 떠났던 시인에겐 어쩌면 시간 자체가 ‘잠’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잠들었네”라는 시인의 목소리는 그리하여 우리에게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는 고백처럼 들린다. 그렇게 시인은 잠 속에서 시간을 살았고 잠과 같은 시간을 살았다. 이러한 잠이 비록 비루한 역사의 시간을 벗어난 시간이라고 해도, 시인은 결코 잠이 된 세상, 세상이 된 잠 속에서 행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흔들리고 흩어지는 잠은 역사의 시간으로부터 비껴 있는 시간이기도 했지만, 고스란히 긴 아픔의 시간이기도 했다는 것이 우리들의 잠이 지닌 아이러니다. 우리에게는 “흔들리는 코스모스의 잠과/흩어지는 연기의 잠뿐이었”는데도 말이다.

거대한 폐허의 역사 속에서 코스모스의 잠으로 흔들리고 연기의 잠으로 흩어지는 우리의 풍경은 어떠한 희망의 가능성도 갖지 않은 채 고독하다. 그 풍경이 내장하고 있는 아픔의 시간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는 어떤 아름다움 또한 담겨 있다. 그것이 물론 “존재의 서글픈 아름다움”(「most famous blue raincoat」)과 같은 것이라 해도 거기에는 어떤 윤리가 매설되어 있다. 이것을 최소 존재가 수행하는 무위(無爲)의 윤리라고 부를 수 있겠다. 이는 한 사회가 요구하는 공동의 단일성에서 비껴나 있는 자들의 윤리이다. 그리고 이는 사회적으로 결정된 자기의식으로부터 벗어나 ‘나’라는 자연성에 스스로를 내맡기는 행위기도 하다. 코스모스의 잠과 연기의 잠은 ‘너’와 ‘나’가 사회적 자아로부터 벗어나 자연적 ‘우리’로 존재하는 방식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무위의 윤리에서는 감각의 활용 또한 최소한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이 바로 ‘그저 바라봄’의 감각이다. 앞서 살펴본 시인의 멀고 쓸쓸한 시선과 그저 바라봄의 감각은 이같은 맥락에서 서로 동심원을 이룬다. 그는 “왜 세계는/삭을 대로 삭아야/세계일까요”라는 자문에 대해 “누군가 보고 또 보았을 세계를/어쩔 수가 없어서/나도 그냥 바라만 보고 있습니다”(「왜 세계는」)라고 답한다. 여기에 어떠한 설명을 덧붙일 수 있을까. 어쩔 수 없음이 감당하고 있는 그 깊은 피로와 열망을 우리는 쉽사리 짐작하기 어렵다. 그 어떤 설명도 ‘어쩔 수 없음’과 ‘그저 바라봄’에 담긴 사유와 감각과 궤적을 다 헤아릴 수는 없을 것이다. “죽음을 정히 영수한”(「저기 갑 을 병 정이」) 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는 지금 죽음의 경험을 통해 자신을 맑게 씻은 몸으로 “쓸쓸히 무너져 내리는 한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

 

 

금이 간 너의 얼굴

 

김수영의 「사랑」(1961)이라는 시를 기억하는가. 그 시를 통해 ‘사랑의 얼굴’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사랑」은 혁명의 실패 후 시인이 침잠했던 시기에 씌어졌고, ‘아픈 몸’이라는 표현이 그의 시에 등장한 것도 비슷한 시기다. 김수영은 ‘너’로 인해 “사랑을 배웠다”고 했으나 너의 얼굴은 순간적으로 밤하늘을 가르는 “번개”처럼, “찰나”의 시간에 “금이 간” 형태로 존재한다. 여기에서 너를 역사로도 연인으로도 볼 수 있다. ‘나’에게 사랑을 일깨워준 대상이니, 너를 이상적인 연인이나 역사의 이상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너의 얼굴이란 이들이 현실적으로 드러난 실상(實像)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시인은 이에 대해 ‘번개처럼 금이 간 얼굴’이라고 한다. 시인에게 사랑과 역사가 존재하는 방식은 ‘찰나’이며 ‘균열’이다. 사랑과 역사의 실상이란 그만큼 불안한 것이다.

우리가 아픈 몸의 가계도에서 확인한 것은 사랑이란, 역사란 그러니까 이들에게 시란 결국 ‘금이 간 얼굴’의 운명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픈 몸을 통해 시인과 세계 사이에서 불화하는 사랑을 보았다. 시인의 내면에서, 역사의 현장에서 사랑이 번개처럼 금가는 순간들을 보았다. 이같은 불화와 균열 속에서 이들의 ‘시적이고 역사적인 신체’가 겪는 아픔은 어쩌면 필연적인 것이다. 세계를 폐허라고 증언하는 이들의 아픈 몸은 윤리적이다. 이들의 몸은 자신의 아픔 앞에 정직하게 무너지는 것이 부끄러움이 아니라 일종의 윤리라는 것을 보여준다.

세 시인의 아픈 몸이 수행하는 타전과 공감각과 무위의 윤리는 ‘해야만 하기 때문에’가 아니라 ‘하지 않을 수 없어서’ 이행되는 윤리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알몸의 복도를 고독하게 걸으며 사색(死色)의 시대를 타전해야 했고, 차가운 심장의 시대를 뜨겁게 절망하며 울어야 했으며, 자신을 최소의 존재로 기각한 채 무위의 시선으로 세계를 응시해야 했다. 이는 윤리적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그렇게 할 수밖에 없어서 수행되는 가장 자연적이고 급진적인 윤리이다. 그리하여 시인의 몸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픈 것이다. 그들의 시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실현된 사랑과 세계의 금이 간 얼굴이 담겨 있다. 그들은 이 시대의 무서운 사랑을 여전히 앓고 있는 것일까. 사랑의 역사는 치욕으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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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글에서 다루는 시집은 도종환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창비 2011), 허수경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문학동네 2011), 최승자 『쓸쓸해서 머나먼』(문학과지성사 2010) 『물 위에 씌어진』(천년의시작 2011)이다. 작품을 인용할 때 작품명만 표시한다.

2) 황현산 「말과 감각의 경제학」, 『물 위에 씌어진』 해설.

3) 이는 말이 지닌 욕망과 관념이 흐려진 말, 서서히 말이 없어진 이후에 남는 말이다. 최승자의 시는 있는 그대로의 사물 세계를 언어화하는 한편 언어화되지 않은 언어의 이면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드러나는 것은 존재의 심연과 세계의 실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