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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2000년대 시의 유산과 그 상속자들

2010년대의 시를 읽는 하나의 시각

 

 

신형철 申亨澈

문학평론가. 평론집 『몰락의 에티카』, 산문집 『느낌의 공동체』가 있음. poetica7@hanmail.net

 

 

1. 2000년대 한국시의 어떤 유산: 감응과 딕션

 

2000년대의 한국시가 무엇이었는지를 알게 해주는 것은 결국 2010년대의 한국시다. 앞 세대가 남긴 유산 중에서 어떤 것은 상속되고 또 어떤 것은 거부되기 마련인데, 이 과정을 거치고 나면 앞 세대는 문학사에 입장할 때 그들 스스로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자리로 안내될 수 있다. 2000년대의 시들이 발표될 당시에 평론가들이 쏟아낸 말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선택’되고 ‘적자생존’하여 문학사 서술의 틀을 만드는 데 기여하게 되겠지만, 어쩌면 그들의 말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다음 세대의 냉정한 선택일 수 있다는 말이다. “하나의 새로운 예술작품이 창조될 때 일어나는 일은 그것에 앞서는 모든 예술 작품에도 동시에 일어난다. 현존하는 기념비들은 그들 사이에 어떤 이상적인 질서를 형성하고 있는데, 그 질서는, 어떤 새로운(진정으로 새로운) 예술작품이 그것들 사이에 도입되면서 수정된다.”(전통과 개인의 재능 1919) 인용하기도 새삼스러운 엘리엇(T.S. Eliot)의 이 말은 백년 전에 옳았듯이 지금도 옳다. 2010년대의 새로운 시인들의 첫 시집을 읽는 일이, 적어도 나에게는, 2000년대 시의 가장 결정적인 유산이 무엇인지를 되새기는 일이 되고 말았다.

 

우리에겐 특별한 날이잖아. 실용적인 주소록을 만들기로 해. 우린 모두 지쳤기 때문에 동의했어요. 무섭게 조용해졌는데, 전화벨이 울렸어요. 내가 모임에 빠진 거 애들이 아니? 이해해. 우린 너무 많아졌으니까. 나는 앰뷸런스에 실려 가는 중이야. 지옥행을 시도했거든. 

—김행숙 「친구들—사춘기 6」 부분

 

우히히, 정말 장난이 아니었어. 사람들은 귀신 들린다고들 하지만 사람에게 먹힌 귀신에 대해 들어봤니? 히히히, 그래서 늙은 귀신들은 사람을 피해서 다녔지만 내가 세상에 귀신으로 남은 이유는 순전히 사람을 피해서 우회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지. 재밌어, 어떤 나무나 어떤 오토바이 어떤 전봇대 ……에 비길 수 없이 사람을 그냥 통과할 때, 단숨에 어떤 一生이 한 줄로 정리될 때, 정말 이 된 기분이야. 얼레리꼴레리

—김행숙 「귀신 이야기 2」 부분

 

낮고 낮은 지붕 아래, 밤낮 가릴 것 없이

참 많은 죄 없는 사내들이 다녀갔네

풍만한 가슴의 여자들처럼 뼛속까지 미움을 받진 못했지만, 대야미의 소녀

침대가 주저앉을 정도로 톡톡히 미움을 받았죠, 즐거워라

즐거워서 노래를 다 불렀죠

 

(…)

 

키스해줘요 그곳에 불이 나도록

그곳이 못 쓰게 되도록 멍해지도록

내 뺨을 내 뺨을 갈겨봐요

당신이 쏘고 싶은 구멍에 대고

당신을 당신을 털어놔봐요

장전(裝塡)했나요? 장전했어요?

—황병승 「대야미의 소녀—황야의 트랜스젠더」 부분

 

언제나 당신들이 옳았다는 것을……

 

변기에 얼굴을 처박고 나는 생각했다

당신들의 비슷비슷한 외모 태도와 말솜씨

그런 것들은 오랜 시간이 흘러도

당신들의 주문이 옳았다는 것을 확신케 하고

될 수 있으면 나는 이런 식의 이야기들을

유니폼과 에이프런,

검은색과 흰색으로만 적고 싶었다

 

먹고 토하고 먹고 토하는 일에 대해

스탠드의 불빛이 흰 벽을 스치듯

식기와 찻잔을 나르는 일에 대해

수저를 주워 당신들의 테이블에 되돌려놓는

혼자만의 시간에 대해 

—황병승 「웨이트리스」 부분

 

이 두 사람의 시라면 어떤 것을 인용해도 좋을 것이다. 김행숙(金杏淑)이 아니었다면, 방금 자살을 기도해서 앰뷸런스에 실려 가는 한 소녀가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하는 말을, 살아 있는 인간들의 몸을 통과하는 일이 재미있어서 이승에 남기를 선택한 어느 귀신의 말을 우리가 들을 수 있었을까. 또 황병승(黃炳承)이 아니었다면, 남자로 살아가기보다는 학대를 받더라도 여자로 살기를 택한 어느 상처투성이 트랜스젠더의 고통스러운 반어의 말을, 조금 전에 변기에 얼굴을 처박고 토한 어느 지친 웨이트리스의 말을 들을 수 있었을까. 이런 시들이 더이상 새롭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김행숙과 황병승이 결국 승리했다는 뜻이다. 2000년대 중반부터 한국시를 읽기 시작한 독자는 이 시인들이 한국시의 영토를 어떻게 얼마나 넓혔는지 가늠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이제와 다시 보아도 결정적인 것은 역시 이것이다. 2000년대의 어떤 시인들 덕분에 한국시는 ‘시인(1인칭)의 내면 고백으로서의 시’라는 일면적이면서도 지배적인 통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졌다. 이제 시는 누구도 될 수 있고 무엇이건 말할 수 있다. 이런 시들로는 시인의 퍼스낼리티를 짐작하기 어렵다. 이것은 일종의 위조 신분증이다. 위조 신분증이 있으면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혼란이었겠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축제였을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이 ‘무에서 창조된 유’였던 것은 아니다. 당장 ‘극적 독백’(dramatic monologue)이라 불리는 저 오래된 기법을 떠올리는 이들도 있을 수 있다. 시인 자신과는 명백히 다른 어떤 화자가 모노드라마의 주인공처럼 어떤 특정한 상황 속에서 말을 한다. 그런데 이 말은 순전한 혼잣말이 아니라 어떤 청자를 염두에 두고 이루어지는 발화인데, 청자가 직접 시 속에 끼어들지는 않지만 화자의 말을 통해 청자의 반응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화자는 한명인데도 연극적인 대화의 공간이 생겨난다는 점이 이 기법의 묘미다. 그래서 독백이되 극적인 독백이다.1) 낭만주의 시기에 이미 이 기법의 맹아가 나타났다는 견해도 있지만, 대체로 빅토리아 시대(1837~1901)를 대표하는 두 시인인 테니슨(A. Tennyson)과 브라우닝(R. Browning)에 의해 (특히 후자에 의해) 창안되었다고 보는 것이 영문학계의 정설이다. 앞 세대인 낭만주의 시인들의 내면 고백에 싫증이 났다는 듯 빅토리아 시대의 시인들이 가공의 화자 뒤로 숨어버리자 시에서 아주 많은 것들이 가능해졌다.

 

그녀는—뭐랄까?—너무 쉽게 기뻐하고

너무 쉽게 감명받는 그런 마음을 갖고 있었다오. 그녀는

자신이 바라보는 무엇이든 간에 좋아했고, 그녀는 도처에

눈길을 돌렸다오. 선생, 모든 것이 같았단 말이오!

내가 선물로 준 그녀의 가슴에 다는 장식물이나,

서편으로 지는 저녁노을이나, 어떤 주제넘은 바보가

과수원에서 꺾어다가 그녀에게 바친 벚나무 가지나,

그녀가 타고 테라스 대지를 돌아다니던 하얀 망아지나—

이 모든 것이 각기 그녀로부터 똑같이 감탄을 자아내거나,

아니면 적어도 얼굴을 붉히게 했다오.

 

(…)

 

오, 선생, 물론 그녀는 내가 그녀 곁을 지나갈 때마다 미소를 지었다오.

하지만 그와 똑같은 미소를 받지 않고 그녀 곁을 지나간 사람이 누가 있었겠소?

이런 일이 점점 잦아졌다오. 그래서 나는 명령을 내렸다오. 그러자 모든

미소가 딱 멈춰 버렸다오. 그리고 저기에 그녀가 마치 살아 있는 듯이

서 있게 되었다오. 자, 일어나시겠소? 이제 아래층으로 가서

손님들을 만나야지요.

—브라우닝 「나의 전처 공작부인」(my last duchess) 부분2)

 

테니슨의 「율리시스」와 더불어 가장 많이 언급되는 이 작품은 앞에서 설명한 극적 독백 기법의 전형을 보여준다. 상세히 분석할 자리도 아니거니와, 그럴 필요도 없을 것이다.3) 이 시들이 없었다면 2000년대 한국시도 없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문학사적으로 온당한 시각이겠으나, 당연하게도 극적 독백이라는 개념으로 2000년대 중반에 일어난 일을 충분히 설명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김행숙과 황병승의 시에는 극적 공간을 창조하는 독백들이 나온다. 이 글의 도입부에 인용한 시들부터가 그렇다. (「웨이트리스」의 경우는 논의의 여지가 있을 수 있겠다.) 그러나 이들의 시에서 중요한 것은 시인과는 다른 누군가가 말한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지금 말하고 있는 이의 존재론적 가치다. 김행숙은 아직 성년이 아닌 존재(‘사춘기’ 연작)와 이젠 더이상 사람이 아닌 존재(‘귀신 이야기’ 연작)를 시 안에 데려왔고, 평균적인 성년 주체가 떠올릴 수도 말할 수도 없는 것들을 그들이 직접 말할 수 있게 했다. 황병승은 이 사회가 정상적이고 바람직하다 여기기 어려운 불운한/불온한 인물들을 초대했고, 그들을 통해 이 세계가 예외적으로 진실해지는 어떤 순간을 그들 자신이 직접 보여줄 수 있게 했다. 이전 시기에는 발언권을 거의 가져본 적이 없는 존재들이 입을 열었다는 사실, 그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첫째, 그런 존재들만이 도달하고 산출할 수 있는 인식과 정서가 한국어로 표현되기 시작했다. 예컨대 황병승의 어떤 사내가 “넌 항상 날 인정해줬지 / 넌 항상 인정했어 / 그것은 네가 날 속이고 있다는 감정을 갖게 해”(「조금만 더」)라고 말하면, 살아남기 위해서는 타인의 인정조차 의심하고 경계해야 하는 어떤 약자들의 인식과 정서가 전달된다. 또 김행숙의 어떤 소년이 “난 오토바이족을 동경하지도 않고 여자애를 엉덩이에 붙이고 싶지도 않아. 나는 무섭게 세상을 쏘아보지 않지. 그런 눈빛은 이제 아주 지겨워”(「오늘밤에도」)라고 말할 때, 이 말은 사춘기라는 시기조차도 이미 그 시기를 지난 이들에 의해 상투적인 이미지로 식민지화되었다는 사실을 예민하게 꿰뚫고 있는 한 소년의 인식과 정서를 전달한다. 이런 시들이 나오고 나서야 우리는 이전 시기의 시들이 재현했던 인식과 정서가 협소한 범위 안의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었고, 그 이후로 많은 시인들이 그 인식과 정서의 대륙에 잇달아 상륙했다. 그러니 이 새로운 화자들을 그저 화자(speaker)라고 불러서는 안될 것이다. 들뢰즈(G. Deleuze)는 철학자들이 자신의 책에서 ‘개념적 인물’을 창조하고 그를 통해 사유한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4) 김행숙과 황병승의 (혹은 2000년대의 몇몇 시인들의) 시에는, 이렇게 불러도 좋다면, 어떤 ‘감응적 인물’이 존재한다. 발화의 주체라는 점에서 일단은 화자지만, 시를 지배하고 있는 인식과 정서의 주체이기 때문에 단순한 화자 이상이다. 그들은 (스스로) 감응하면서 (독자를) 감응시킨다. 어쩌면 김행숙과 황병승이라는 이름은 그들이 창조한 감응적 인물들의 필명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5)

둘째, 감응적 인물들의 인식과 정서는 결국 그들 자신의 말을 통해 전달된다. 그 인물이 김행숙의 경우처럼 ‘아직 성년이 아닌 존재’이거나 ‘이젠 더이상 사람이 아닌 존재’이고, 황병승의 경우처럼 ‘이 사회가 정상적이고 바람직하다 여기기 어려운 불운한/불온한 인물’인데도, 그들의 인식과 정서가 그들이 아닌 우리에게도 전달되는 데 성공한 것은 저 뛰어난 시인들이 새로운 화법을 창안했기 때문이다. “너의 마음을 내가 이해해도 되겠니?”(황병승 「눈보라 속을 날아서(하)」) 같은 문장, 혹은 “나는 지나갔어요. 가장 슬픈 마음도 나를 붙잡지 못해요.”(김행숙 「세월」) 같은 문장들을 번역투라고 한다면 그것은 틀린 말이 아니지만, 이 번역이 저 감응적 인물들의 인식과 정서를 훼손됨 없이 전달하기 위한 배려라는 것까지 빼놓지 않고 말해야 옳은 말이 된다. 황현산(黃鉉産)이 정확히 지적한 대로, 이 시인들의 시쓰기는 본질적으로 번역의 과정이었던 것인지도 모른다.6) 그들 이후로, 그리고 그들의 동료와 후배들 덕분에, 한국시에서 이른바 ‘시적인’ 문장에 대한 통념적인 합의는 거의 무의미해졌다. 2000년대 시는 감응적 인물만이 아니라 그에 걸맞은 딕션(diction)7)도 함께 발명해야 했다. 다른 감응이 다른 딕션을 요구하고 다른 딕션이 다른 감응을 실현한다. 이 둘은 본질적으로 결합돼 있기 때문에 어느 하나만을 훔쳐낼 수가 없다.

 

 

2. 2000년대 시의 정치적 조건: 대의불충분성과 대의불가능성

 

이렇게 새로운 감응적 인물을 창조해 낯선 인식과 정서를 생산하고 또 그에 걸맞은 시적 딕션을 발명해내면서 2000년대 한국시는 아주 쓸모있는 위조 신분증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일단 이렇게 정리해놓고 이제는 물음의 층위를 바꿔보려고 한다. 왜 하필 2000년대인가? 2000년대 시가 무엇을 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해서는 우리가 지금까지 논의한 것과 유사하거나 상이한 관점에서 많은 얘기들이 오갔지만, 왜 하필 2000년대 중반에 이같은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지를 따져본 작업은 드물다. 혹시 예술체제에서의 이같은 변화는 정치체제에서의 어떤 변화와 연동돼 있는 것은 아닐까? 여기서 단서로 삼아봄직한 것은 현대 민주주의의 어쩔 수 없는 근간이 되고 있는 ‘대의’와 문학의 주도적 방법론 중 하나인 ‘재현’이 ‘리프리젠테이션’(representation)의 서로 다른 번역어라는 새삼스러운 사실이다. 이 두개의 리프리젠테이션은 별개의 개념사(槪念史)를 갖고 있지만, 특정한 역사적 국면 속에서는 관련을 맺을 것이라고 가정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앞에서 던진 질문을 더 구체화해서, 2000년대 한국시에 나타난 재현 층위에서의 변화는 2000년대 한국 민주주의의 대의 층위에서의 변화와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물음을 던져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빅토리아 시대를 향해 비슷한 질문을 던지고 조언을 구해보면 어떨까. 극적 독백은 왜 하필 빅토리아 시대에 성행했는가. 여러 접근이 가능하겠지만,8) 마침 우리가 앞에서 예고한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접근한 사례가 있다. “극적 독백은 낭만주의 시기인용자 자기함몰적 내면화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한다고 해야 하겠지만, 궁극적으로는 민주주의를 제도적으로 정착하는 과정에서 19세기 최대 관심사로 떠오른 재현・대의(representation) 문제와 불가분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9) 1832년의 1차 선거법 개정 이후 영국에서는 민주주의에 대한 욕구가 증폭되었고, 그 과정에서 민주주의가 과연 인민의 뜻을 제대로 대의/재현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고민이 심화되었다. 한편 동시대에 씌어지기 시작한 극적 독백의 시는 전적으로 화자의 말을 통해서만 청자의 반응을 짐작할 수 있는 구조를 갖는데, 이것은 화자가 청자의 뜻을 대의/재현하는 구조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은가. 여기서 서로 다른 두 영역은 대의와 재현이라는 층위에서 만난다. 저자는 과감하게도 극적 독백이 “민주화에 대한 고민이 배태한 장르”이고 “재현・대의를 주제로 삼은 장르”라는 결론으로까지 나아간다.10) 이 결론의 설득력을 평가할 처지는 못되지만, 적어도 한 시대의 정치적 대의구조와 예술적 재현구조를 함께 따져보는 작업의 선례로서는 참고할 만하다.

2000년대인가라는 물음으로 다시 돌아오자. ‘2000년대 시’로 통칭되는 작품들이 쓰이고 발표된 시기는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의 재임기간(19983월~ 20082월)과 거의 겹친다. (20083월에 이명박정부가 들어서면서 지난 10년의 역사가 구축해놓은 저 불완전한 민주주의마저 후퇴하기 시작하자 한국시를 둘러싼 담론의 중심 주제는 ‘시와 정치’가 되었다. 이 시점부터는 다른 논의가 필요하다. 한국시에서 ‘2000년대’는 20083월을 기점으로 끝났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1998~2007년은 어떤 시기였던가. 대선을 앞둔 200211월에 출간되어 널리 읽힌 책에서 정치학자 최장집(崔章集)은 이렇게 적었다. “이제 민주주의는 더이상 사람들의 기대와 열정을 만들어내는 단어가 아니다. 일반 국민은 물론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한 사람조차 한국 민주주의의 현 상황에 대해 무관심하고 냉담하며 비판적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민주주의를 통해 기대했던 것과 한국 민주주의가 실제로 가져온 결과 사이의 격차가 만들어낸 실망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더욱이 이같은 실망이 현실정치에 대한 환멸을 동반하면서 한국 민주주의를 위기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인 것이다.”11) 이 ‘실망’과 ‘위기’의 실체를 두가지 각도에서 살필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대의불충분성에 대하여. 최장집 자신에 의해 제기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론이 이를 주도했다. 19876월을 통해 인민의 뜻을 온전히 대의할 대표를 뽑을 수 있는 직선제를 쟁취했고 뒤이어 1998년에는 민주개혁세력이 마침내 집권에 성공했는데 어째서 한국의 민주주의는 인민의 냉소와 환멸의 대상이 되고 말았는가. 알려진 대로 최장집은 “정당체제의 대표성을 확대하고 그 사회적 기초를 튼튼히 해야 하는 것이 오늘날 한국 민주주의의 핵심 과제”12)라는 시각에서 이 문제에 접근한다. 그에 따르면 민주화 이후 이처럼 환멸과 냉소가 만연하게 된 것은 인민의 뜻을 제대로 대의하지 못하고 있는 왜곡된 정당구조에 그 원인이 있다. 특정 지역에 기반을 둔 보스 중심의 정당체제로는 인민의 다양한 뜻을 대의할 수 없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소위 ‘민주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이같은 구조는 개선되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었다. 이 와중에 정치에 대한 환멸이 극에 달하면서 많은 이들이 민주주의는 “모두가 주권자라는 점에서 아무도 개별적으로는 주권자가 아닌 체제”13)라는 사실을, 대의제 아래 인민 개개인은 1표로 환원되는 동질적인 개인이고 또 그만큼 동질적으로 무기력하다는 사실을 실감하기에 이른다.

둘째, 대의불가능성에 대하여. 사회학자 고병권(高秉權)은 한국사회에서 대의제가 충분히 발달하지 못한 것보다는 민주화 이후 대의제의 발달과 대의제로부터의 대중 추방이 동시에 일어난 것이 위기의 본질이라고 지적한다. 1990년대라는 시기가 그래서 중요하다. 한편으로 대의제 민주주의가 공고화된 때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이 본격화된 때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현행 대의민주주의 하에서는 사실상 자신들을 대의할 수 없게 애초부터 배제돼 있는 미성년자나 이주노동자에 더해서, 경제적으로 낙오된 탓에 정치적으로도 무기력한 상황에 내던져진 이들이 급속히 늘어났다. 그래서 지금은 대의제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할 시점이라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단지 대표가 자기 성원을 얼마나 충분히 대표하는가(대의불충분성의 문제) 이전에, 대표체제 바깥에 있는 자들을 대표들이 어떻게 다룰 수 있는가(대의불가능성의 문제)의 문제”14)가 추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민주주의=대의제’라는 도식으로부터 벗어나야 하고, 대의되지 못한 존재들의 직접 행동(‘난입과 점거’)의 정치적 의미를 숙고해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민주주의 자체를 근본적으로 다시 사유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나아간다.

요컨대 대의불충분성과 대의불가능성, 이것이 2000년대 한국의 정치적 조건이고 바로 그 무렵에 2000년대의 시들이 쓰이고 읽히기 시작했다. 물론 2000년대의 시인들이 이같은 정치적 조건을 의식하면서 의도적으로 시를 썼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들이 무언가를 의식했다면 그것은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미학적인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낭만주의의 내면 지향에 대한 반발로 빅토리아 시대의 극적 독백이 등장했다는 관행적인 논리와 유사하게, 1990년대 시의 내면 지향에 대한 미학적 피로감 때문에 이제는 다른 시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질문을 던져봐야 한다. 왜 그들은 (그리고 우리는)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1인칭 내면 고백의 시들이 갑자기 지겨워졌던 것일까. 어느 시기에 개개인의 취향이 집합적으로 변했다면 거기에는 정치적 조건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그러니까 정치적 조건이 어떤 (무)의식적인 매개를 거쳐 미학적 혁신을 낳았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문학사의 시각일 것이다. 이를테면 ‘나’라는 존재가 단지 1표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라는 환멸과 권태가 시에서 1인칭 ‘나’에 대한 탐구를 진부하게 만든 것은 아닌가. 또 그 1인칭의 빈자리에, 1표만큼의 권리조차도 행사하지 못하는 존재들의 좌절과 분노가 다양한 3인칭들의 형상으로 밀고 들어온 것은 아닌가.

이런 시각에서 보면 2000년대는 ‘김행숙적인 것’과 ‘황병승적인 것’을 요청했고 바로 그것이 김행숙과 황병승을 통해 현실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김행숙과 황병승이 없었더라도 다른 누군가가 그와 같은 시를 썼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2010년대적인 것’이라 할 만한 것은 또 필연적으로 그것을 현실화해줄 누군가를 요청할 것이다. 2010년대적인 것이란 무엇일까. 앞에서 2000년대의 시가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은 결국 2010년대의 시라고 적었다. 이제는 반대로 말해보려 한다. 2000년대 한국시를 바라보는 어떤 문학사적 관점을 확보하지 않고서는 2010년대의 시를 적절히 평가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그 관점이 무엇인지를 말해보려 했다. 그 관점은 이런 물음을 묻게 한다. 2010년대의 시인들은 지금까지는 본 적이 없는 종류의 감응적 인물을 창조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인물을 통해 낯선 인식과 정서를 창출해냈는가, 또 그 인식과 정서를 전달하는 데 적합한 딕션을 발명하고 있는가, 더 나아가 그를 통해 대의와 재현이라는 층위에서 어떤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는가. 이런 물음을 던질 때 특별히 흥미롭게 읽히는 것은 조인호(趙仁鎬)와 김승일(金昇一)의 시다.15)

 

 

3. 2010년대 시의 어떤 가능성과 두 사례: 조인호와 김승일의 경우

 

1981년생 시인 조인호의 첫 시집 방독면(문학동네 2011)은 그 규모와 밀도와 야심으로 보건대 황지우(黃芝雨)와 장정일(蔣正一)과 함성호(咸成浩)와 황병승의 첫 시집을 뛰어넘고 싶어한다. 이 시집은 전쟁터다. 19458월 히로시마 원폭 투하, 한국전쟁 이후 분단체제의 형성,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조지 W. 부시의 ‘악의 축’ 발언, 남한의 이라크 파병과 한미자유무역협정 체결, 그리고 상시적인 철거와 해고의 형태로 벌어지는 삶의 현장에서의 폭력 등에 이르기까지(지금 언급한 것들은 모두 이 시집에서 직간접적으로 다루어진다), 유사 이래 이 세계는 한번도 전쟁을 멈춘 적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곧 인간 병기(兵器)여야 하고 시쓰기는 ‘전쟁에 맞서는 전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 시인은, ‘방독면을 쓰고 쇠파이프를 든 소년’ 혹은 ‘철가면을 쓰고 철을 씹어먹는 불가사리 같은 사내’ 등의 인물들을 내세워, 절망적으로 저돌적인 시를 쓴다. 그렇게 쓰인 시에는 문명담론, 분단담론, 계급담론 등이 복잡하게 뒤엉켜 있고, 미래주의(futurism)의 이미저리와 재패니메이션(Japanimation)의 상상력까지 가세돼 있어서, 동시대의 여느 시(심지어 소설까지 포함해서)에서 보기 힘든 역동적인 시적 공간이 탄생했다.

 

재개발 지역 옥탑방에서

전기가 끊긴 방구석에서

납처럼 무거운 어둠 속에서

 

소년은 녹슨 면도날로 머리카락을 밀었고

소년의 입은 빨간 마스크로 침묵했고

소년의 한 손에 쇠파이프가 들려지던 순간

소년은 변형됐다

 

(…)

 

타워크레인 꼭대기 위 한 소년(少年)이 서 있다 

—「뉴 키즈 온 더 블록」 부분

 

보아라, 불발탄을 어깨에 짊어진 채 북()으로 행군하는 한 사나이가 있다

 

그는 스스로 재래식무기가 된 사나이다

그는 철과 화약을 먹고 회귀하는 사나이다

그는 외부의 충격에 분노하는 사나이다

 

그가 군사분계선(軍事分界線)을 넘어서자,

 

그곳엔 콘크리트의 대지가 무한궤도처럼 영원히 펼쳐져 있었고

 

밤하늘의 별빛은 가시철조망처럼 숭고했다 

—「스스로 재래식무기(在來式武器)가 된 사나이」 부분

 

개개 시편들이 하나같이 흥미진진한 서사를 품고 있고 또 그것들이 정교하게 맞물려서 큰 그림을 만들고 있는 시집이다. 이렇게 부분적인 인용으로는 각 시편들의 힘을 온전히 전달할 수가 없지만 아쉬운 대로 두 대목을 옮겼다. 이 시집이 벌이고 있는 전쟁의 가장 원형적인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 같아서다. 철거를 앞두고 전기마저 끊긴 재개발지역 옥탑방에서 스스로 전사가 될 수밖에 없는 소년은 쇠파이프를 들고 타워크레인으로 올라간다. 시스템이 저 높은 곳에서 인간을 철거하려 하자, 한 소년이 시스템을 철거하기 위해 그만큼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이 전쟁은 수직적이다. 한편 한 사내는 불발탄을 어깨에 짊어지고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으로 진군한다. 제국의 시스템이 그어놓은 선을 넘는 방식으로 제국과 싸우기 위해 ‘스스로 재래식무기가 된 사나이’가 벌이는 이 전쟁은 수평적이다. 이 소년과 사내의 형상은 다른 곳에서도(특히 1부와 2부에서) 수시로 나타나 이 시집을 이끄는 감응적 인물로 기능한다. 요컨대 그것은 전사(소년병에서 퇴역군인까지)의 감응이다. 그 감응은 이 세계의 모든 일이 다 거시적・미시적 시스템과의 전쟁이라는 인식을 산출하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그 전쟁을 지속할 따름이라는, 절망도 희망도 아닌 정서를 또한 낳는다.

그 과정에서 이 시집은, 전략이라고 부르면 이상하지만, 두가지 흥미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그 하나는 이 시집이 제국이 송출한 온갖 이데올로기적 표상들을 전유・해체하는 (탈식민주의적인 의미에서의) ‘되받아쓰기’(writing back)를 능란하게 구사한다는 점이다. 3부에 수록돼 있는 시들이 특히 그렇다. 그 되받아쓰기는 1945년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이름이자 로즈벨트의 별명이기도 한 ‘리틀보이’(little boy), 1차대전 당시 참전 독려 포스터에 등장한 바 있는 ‘엉클 쌤’(uncle Sam), 그리고 제국의 문화적・경제적・종교적 침략의 전령사들로 전락한 디즈니, 담배, 패스트푸드, 야훼와 십자군 등등에 이르는 다양한 대상을 아우른다. 다른 하나는 이 시집의 인물들을 바라보는 시인의 태도다. 그는 철의 문명과 싸우는 와중에 오히려 그것에 매혹된 듯한 모습을 보일 때가 있는데, 조금 과장하면, 이것은 마치 지난 세기 초 이딸리아의 미래주의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파시즘의 불길한 기운마저 풍긴다. 그러나 투명한 비판보다는 거부와 매혹 사이에 애매하게 걸쳐져 있는 이 태도가 오히려 이 시집을 1차원적인 정치적 발언으로 추락하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이 지적돼야 할 것이다. 시스템을 시스템 자신이 그렇게 하는 것보다 더 진지하게 대함으로써 그것의 효력을 중지시키는 ‘과잉동일시’(overidentification)16)의 양상이라고 해야 할까.

김승일의 에듀케이션(문학과지성사 2012)은 어떤가. 지젝이 여러 곳에서 말한 대로, 전체주의사회에서는 아무도 당의 말을 믿지 않으면서 마치 믿는 것처럼 연극을 하고 있을 뿐인데,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그 체제가 유지되게 한다. 전체주의사회만이 아니다. 오늘날 부모와 자식 혹은 스승과 제자 같은 일상적 관계망들도 비슷한 방식으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사랑과 존경이 빠져나간 자리를 우리가 흔히 ‘예의’라고 부르는 ‘연극’이 버텨주고 있지 않은가. 김승일의 시가 현존체제와 기성세대를 비판하기는커녕 냉소하는 데도 별 관심이 없는 것은 그것이 재미가 없을 뿐 아니라 무력한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민주주의건 전체주의건 간에 현대사회에서는 그 냉소적인 거리두기, 웃음, 아이러니가 말하자면 게임의 일부”17)이기 때문에, 김승일의 시는 특유의 무심함으로 최소한 자신이 게임의 일부가 되어버리는 사태를 피했다. 누구도 비난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비난은 비난의 대상이 되는 그것만 해결되면 모든 것이 순조로워질 것이라고 우리를 오도한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인식은, 이 세계가 개선될 여지가 없다는 인식일 것이다. 대신 그는 ‘벌거벗은 임금님’을 그냥 보여주기만 한다. 어떤 방식으로?

그는 그냥 묻는다. 엄마 아빠가 한꺼번에 죽어버렸는데 이제 화장실 청소는 누가 하지? “부모가 죽고 세달이 흐르자 형제는 화장실 청소를 할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방관) 부모의 죽음에 대해 쓰는 것이 아니라(임금님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누가 모르랴), 부모가 죽은 지 석달이나 지나고 나서, 화장실 때문에 쓴다. 또 묻는다. “삼총사라고 알려진 우리 네명은 (…) 어째서 이렇게 할 얘기가 없는 것일까?”(같은 과 친구들) ‘삼총사’인데도 ‘네 명’이라고 적은 이 트릭은 화자 자신을 포함한 세명 말고 이를 지켜보는 시선(물론 이 시선도 화자의 것이다)도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 시선은 우정이라 불리는 관계 안의 공허를 들여다본다. 그리고 또 묻는다. “거리의 어느 가게에도 주인은 없다 나라고 알 수 있나 그런데도 쇠가 조용히 넘치고 있는 이유를.”(우리 시대의 배후) 주인도 없이 쌓여 있는 이 ‘아시바’는 오늘날 이 세대가 처해 있는 상황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요컨대 부모는 죽었고, 친구들은 할 말이 없으며, 주인들은 자리를 비웠다. 누구의 잘못인가? “나라고 알 수 있나.” 이런 인식과 정서는 어떤 상황의 산물인가.

이 시집의 표제작인 「에듀케이션」에서 화자는 딸을 낳아 기르고 싶다고, 또 선생님과 멀어져버렸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그는 멀어져버린 선생님과 아직 태어나지 않은 딸 사이에 있다. 자신을 가르칠 사람도 없고 자신이 가르칠 사람도 없는 상태, 말하자면 ‘에듀케이션’의 공백 상태다. 기존체제와 기성세대가 의미있다고 주장해온 어떤 가치도 믿지 않지만, 그렇다고 어떤 다른 가치가 그 자리를 대신할 것이라고 믿지도 않는다. 그래서 새삼스럽게 비판할 것도 없고 그렇다고 목숨을 걸고 옹호할 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무심한 인물들, 그런 인물들이 생산해내는 인식과 정서가 이 시집을 이끈다.

 

미안하구나. 아버지는 그 말을 어디서 배웠어요. 짐은 본래 사과를 받는 사람. 짐의 무릎은 깨끗하단다. 그런데 왜 손바닥에서 삶은 달걀 냄새가 나죠?

화가 나면 방문을 잠가버리렴. 얼굴이 시뻘게진 네 앞에 그들이 무릎을 꿇고 기어온다면. 어쩐지 미안할거야.

 

(…)

 

짐은 팬티만 입은 것처럼 허전하구나. 아버지는 겁쟁이에요. 짐이 미안해. 사과하고 싶어서 아빠가 너를 낳았지. 필요하니까

너도 애를 낳으렴. 깨끗한 무릎을. 

—「미안의 제국」 부분

 

이 시집을 지배하는 인식과 정서가 가장 매력적인 결과를 낳은 시들 중 하나다. 이 시에는 ‘사과(謝過)의 정치학’이라고 할 만한 독특한 통찰이 담겨 있다.18) ‘사과하는 자’와 ‘사과받는 자’ 중에서 심리적으로 더 우위에 있는 사람은 후자일 것이라는 게 우리의 통념이다. 이 시는 바로 그 통념을 엎어버린다. 때로는 사과를 받는 사람이 더 미안해질 때도 있으며 그때 더 우월한 위치에 있는 것은 사과를 하는 사람 쪽일 것이다. 신하들의 사과를 받느라 넌더리가 난 왕이 그의 아들에게 사과를 하고, 자신은 사과를 하기 위해서 아들을 낳았으니, 너도 그러고 싶으면 아이를 낳으라고 말하는 장면은 그래서 통렬하다. 오늘날 기성세대는 젊은 세대에게 자주 ‘미안하다’라고 말하지만, 사과를 받는 쪽에서 보기에 그것은 기성세대가 그들 자신을 용서하기 위한 사과처럼 보일 수 있다. 다름아닌 아버지가 이런 종류의 차가운 진실을 가르친다는 설정은 기성세대의 ‘에듀케이션’의 효력이 중지된 상황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물론 김승일 시의 누구도 비판하거나 냉소하지 않으며 아무렇게나 마침표를 찍어버린 문장들로 상황을 그냥 보여줄 뿐이다. “내 방에, 방공호에 드러누워서. 나는 배웠습니다. 고요한 눈물. 기다렸습니다. 중요한 것을.”(에듀케이션) 어쩌면 이 시집은 ‘가르침 따위는 필요 없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건 제대로 배우고 싶으니 우리가 진정으로 믿을 만한 것을 가르쳐보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가르칠 것이 없는 시대/세대에 더 뼈아픈 말은 전자가 아니라 후자다.

조인호의 인물들은 전쟁 중이고 김승일의 인물들은 수업 중이다. 어떤 이는 상시적 전시체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전사가 되었고, 또 어떤 이는 기성의 가치를 수호하는 에듀케이션의 효력이 붕괴된 교실에서 무엇을 배워야할지 알 수 없는 학생처럼 앉아 있다. 그래서 전자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시를 쓰는 것은 오직 강해지기 위해서였다”(방독면, 시인의 말)라고 적었고, 후자는 “내 심장 속엔 선생님이 있다”(에듀케이션, 시인의 말)라고 적었다. 이 둘의 차이는 충분히 강조되어야 하겠지만, 이들이 2000년대 시의 유산을 창조적으로 상속한 이들이라는 공통점도 더불어 지적되어야 한다. 조인호는 황병승이 이 세계의 다수적인(major) 것들과 펼친 ‘무한전쟁’19)을 다른 층위와 규모로 이어가고 있고, 김승일은 김행숙이 우리에게 선사한 놀랍도록 신선한 감응을 떠올리게 하는 시들을 잇달아 써내고 있다. 그러면서 2010년대의 한국시는 이 사회에서 충분히 대의되지 못하고 있거나 아예 대의구조 바깥에 버려져 있는 감응의 구조들을 재현할 수 있는 문을 하나씩 열어나가게 될 것이다. 다음 문장도 근본적으로는 이와 다르지 않은 요청으로 읽힌다. “문학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규정하는 감성의 분할 속에 개입하는 어떤 방식, 세계가 우리에게 가시적인 것으로 되는 방식, 이 가시적인 것이 말해지는 방식, 이를 통해 표명되는 역량들과 무능들이다.”20) 근래 자주 인용된 랑씨에르(J. Rancière)의 문장이다. 이것이 2000년대의 시에 그러했듯이 2010년대의 시에도 적중하는 말이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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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M. H. Abrams, A Glossary of Literary Terms (8th ed.), Boston: Thomson Wadsworth 2005, 70~71면.

2) Dramatic Lyrics (1842)에 수록된 작품이다. 대체로 유려하게 읽히는 다음 번역을 따르되 인용한 대목 첫 부분의 주어를 원문대로 ‘그녀는’으로 고쳤다. 『로버트 브라우닝 시선』, 윤명옥 옮김, 지식을만드는지식 2012, 23~27면.

3) 인용한 부분은 화자인 공작이 자신의 집을 방문한 손님이 한 초상화에 관심을 갖자 그 그림의 모델이 자신의 전처이며 왜 그녀가 지금 여기에 없고 한점 그림으로 남게 됐는지를 설명하는 대목이다. “그래서 나는 명령을 내렸다오. 그러자 모든/미소가 딱 멈춰버렸다오.”(I gave commands;/Then all smiles stopped together) 물론 이 구절에는 공작이 전처를 죽였을 가능성이 암시되고 있다.

4)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철학이란 무엇인가』, 이정임・윤정임 옮김, 현대미학사 1995, 3장. 예컨대 플라톤에게는 소크라테스가, 니체에게는 디오니소스가, 키르케고르에게는 돈 후안이 바로 개념적 인물이다.

5) 앞의 책의 저자들은 “개념적 인물은 철학자의 대리자(representative)가 아니라 차라리 그 반대”이며 “철학자의 이름은 단지 그의 〔개념적〕 인물들의 필명일 따름”이라고 적었다. 앞의 책 95면.

6) 황현산은 하위문화와 주류문화 사이의 거리를 염두에 두고 이렇게 적었다. “문화적이거나 언어적인 접경지대의 위기에서 성립하는 황병승의 시는 많은 경우 번역 또는 의사번역의 형식을 드러낸다.” 「완전소중 시코쿠」, 『잘 표현된 불행』, 문예중앙 2012, 535면.

7) 이 단어는 발음, 발성, 말씨, 어법 등을 두루 의미하기 때문에 우리말로 번역하기 곤란한데, 이 다의성이 오히려 이 단어를 쓸모있게 만든다고 해야 할 것이다. 노래에서의 딕션, 배우의 딕션, 소설에서의 딕션 등에 대해서도 함께 논의하면 시에서의 딕션에 대해 더 잘 말할 수 있겠지만 이는 다음 기회로 미룬다.

8) 일례로 한 연구자는 극적 독백 기법이 화자가 자신의 말을 어느 정도로까지 진지하게 대하고 있는지를 불확실하게 만들기 때문에 심리학적 관심을 유발하는 측면이 있으며, 이는 당대에 본격화되기 시작한 인간의 마음에 대한 연구(예컨대 제임스 밀의 Analysis of the Phenomena of the Human Mind 〔1829〕 등의 사례)와 관련이 있다고 지적한다. Linda K. Hughes, The Cambridge Introduction to Victorian Poetry,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0, 1장.

9) 유명숙 「테니슨과 브라우닝」, 영미문학연구회 엮음 『영미문학의 길잡이 1: 영국문학』, 창작과비평사 2001, 413면.

10) 유명숙 같은 글 414~15면.

11) 최장집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후마니타스 2002, 6면.

12) 최장집・박찬표・박상훈 『어떤 민주주의인가』, 후마니타스 2007, 29면.

13) 고병권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그린비 2011, 68면.

14) 고병권, 같은 책 100면.

15) 2000년대 시의 유산 중 다른 것에 주목할 경우 여기에 언급될 시인도 달라질 것이다. 다른 판단은 얼마든지 가능할 텐데 그것은 다른 글에서 시도하면 될 것이다.

16) 슬라보예 지젝이 슬로베니아의 밴드 ‘라이바흐’(Laibach)의 전략을 지칭하기 위해 이 용어를 사용했다. 그들은 나치 복장을 하고 무대에 오르고 정치적으로 위험한 발언을 일삼으며 물의를 일으키고는 하는데, 이것을 파시즘에 대한 조롱이나 풍자로 손쉽게 해석될 수 없도록 진지한 제스처를 취함으로써 그들 자신을 어떤 급진적인 질문이 되도록 만든다. 이처럼 반()동일시가 아니라 과잉동일시가 오히려 대상의 효력을 중단시킬 수 있다는 것이 지젝의 요점이다. “이 경우에 라이바흐의 전략은 새로운 것으로 드러난다. 그것은 시스템(지배 이데올로기)을 ‘성가시게’ 한다. 그것이 시스템에 대한 아이러니한 모방일 때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과잉동일시일 때만 그렇다. 과잉동일시는 시스템의 저변에 있는 외설적인 초자아를 백일하에 드러냄으로써 그 시스템의 효력을 중단시킨다.” Slavoj Žižek, Metastases of Enjoyment, Verso 1994, 72면.

17) 슬라보예 지젝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이수련 옮김, 인간사랑 2002, 59면.

18) 다음 책에서 이미 언급한 적이 있다. 이남호・문혜원・신형철 엮음 『2010 현장 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시』, 현대문학 2010.

19) 이장욱 「체셔 캣의 붉은 웃음과 함께하는 무한전쟁(無限戰爭) 연대기」, 황병승 시집 『여장남자 시코쿠』, 랜덤하우스코리아 2005, 해설.

20) 자크 랑시에르 『문학의 정치』, 유재홍 옮김, 인간사랑 2009, 1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