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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지그문트 바우만 『액체근대』, 강 2009

후기근대를 통찰하는 비판이론의 대서사

 

 

김현미 金賢美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hmkim2@yonsei.ac.kr

 

 

액체근대최근 <강심장>이라는 TV 토크쇼가 인기를 끌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더 세고, 솔직하고, 내밀한’ 발언을 유도하는 연예인들의 일종의 고백 경연장이다. TV와 인터넷 등 각종 매체를 휩쓸고 있는 사사로운 감정의 토로, 폭로성 서사와 이미지들은 근접할 수 없었던 스타나 정치인들의 이야기를 가십거리로 즐기게 해준다. 강도가 점점 높아지는 사적인 고백에 빠져들며 미디어 소비자들은 공적 인물의 고통, 불행, 실수, 연애 등의 개인적 서사를 낱낱이 즐길 수 있게 됐다. 이에 비해 용산참사, 세종시 논란, 노조법 개정 등은 ‘다수의 문제’지만 시공간적으로 ‘나’와 분리된 다른 누군가의 이슈다. 제도권 정치는 너무 딱딱하고 고집 세고 느려서 외면하고 싶다. 오락거리화된 개인의 서사들이 우리 일상을 장악하면서 공동적 시민의식에 기초한 정치가 곤경에 처해 있는가? 아고라는 텅 비어버렸는가? 이런 질문을 던지는 바우만(Z. Bauman)의 『액체근대』(Liquid Modernity, 이일수 옮김)는 ‘공적인 것들’이 ‘사적인 것들’에 의해 식민화되는 후기근대의 사회학적 비판이론이다.

이 책은 2000년 출간된 그의 ‘액체근대’ 씨리즈의 첫번째 저작이다. “‘견고한 것들을 녹이는 것’이 줄곧 근대의 가장 주요한 소일거리이자 으뜸가는 성취가 아니었던가?”(9면)라는 그의 말을 통해 근대의 심화는 곧 ‘액체화’로 이해된다. 액체는 쉽게 이동하고 장애물 없이는 멈추지 않으며 부지불식간에 목표물을 점유하고 점령한다. 일단 그것에 적셔지면 추슬러 빠져나오기 힘들다. 액체는 적/동지, 적대/연대 등의 경계의 기반이던 고체적 존재들을 함락시켜 한데 뭉뚱그린다. 바우만의 『액체근대』는 자유롭게 유동하여 온 지구를 적시는 자본의 힘과 우리의 정체성 변화에 관한 사회학적 대서사다. 그는 액체근대라는 개념틀을 사용해 해방, 개인성, 시/공간, 일, 공동체의 의미 변화를 해석한다.

바우만에게 근대는 ‘고체근대’와 ‘액체근대’로 구분된다. 과거의 고체 근대성은 포드주의적 공장과 관료제로 상징된다. 이 체제는 우연성, 불명확성, 다양성을 공공연한 적으로 삼고 전체주의적 획일화와 단일화의 충동에 따라 사회를 ‘철창’으로 만들어놨다. 따라서 근대의 비판이론들은 어떻게 이 철창에서 인간의 자율성과 개인성을 해방시킬 수 있는가에 골몰했다. 그러나 액체근대에서 비판이론의 임무는 사라져가는 또는 비어가는 공적 공간을 정비하여 사람을 채워넣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액체근대는 모든 결속에서 벗어난 개인화로 특징지어진다. 법적인 자율성을 획득한 근대의 개인은 자신을 사회공간에 유일하게 적법한 임자라고 주장하면서 “더이상 얽매이지 말자”고 외치며 자기계발의 주체가 된다. 액체근대에서 자본은 감원, 규제 철폐, 유연화, 재정과 부동산 및 노동시장의 자유화를 위해 국가, 민족, 지역, 성별, 계급적 정체성의 벽을 뚫고 개인들을 적시며 말랑말랑하고 가벼운 소비자로 변형시킨다. 결국 지도자와 추종자 간, 자본과 노동 간 결속과 상호의존이 종말을 맞게 됨으로써, 엘리뜨들은 ‘도망가고 미끄러지는 기술들’을 통해 모든 사회적 책임으로부터 해방되었다.

마찬가지로 소비자로서 상품 선택의 다양성을 자유의 확장으로 인식하게 된 개인들은 꼬드김, 욕망, 일시적 바람에 요동치지만 대문자 정치에는 자유방임적 태도를 갖게 된다. 글로벌 자본의 질서는 불안정성과 불확정성, 불안감이라는 거대한 구조를 일상화시키지만 사회적 모순과 위험을 해결할 의무와 필요는 개인적 차원의 문제로 남긴다. 그리하여 공적 공간은 신뢰와 참여, 헌신 대신 도피와 무관심만 넘쳐나는 빈공간이 되어간다. 소비자로서의 자유와 인간으로서의 삶의 불안 사이의 깊어가는 부조화에 대한 반응으로 개인은 확실성과 안전을 갈망한다. 돈 많은 소수는 삼엄한 경비로 보호되는 ‘요새주택’에 안주하는 길을 택하고 대다수는 전형적인 공동체주의로 회귀하게 된다. 바우만은 공동체주의의 대표 격인 민족주의가 내부의 갈등을 무화시키고 동질성의 신화를 만들기 위해 외부의 희생양을 필요로 하는 폭력을 수반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최근에 일어난 인종학살이나 전쟁이 바로 민족주의의 결과물이며, 액체근대가 ‘화약고 사회’를 배태한 근대임을 주장한다.

이 책은 이런 의미에서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계승하면서 “세상과 정치적 다리 놓기”(75면)를 추구한다. 그러나 근대성의 ‘녹이는 힘’에 대항하여 어떻게 진정한 정치적 자유를 획득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대한 구체적인 해답을 얻기는 쉽지 않다. 바우만은 액체근대의 개인이 망명자 같은 태도로 “흡수 통합되기를 거부하며” “정신적 이동성을 지향하는” 삶의 전략을 지녀야 한다고 주장한다. 거리를 두고 사유하는 힘을 통해 숙명론에서 벗어나 책임있는 선택을 하는 것이 사회적 개인의 역할이며, 그것을 유도하는 사회분석이 사회학의 몫이다. 이 책 전반에는 그런 통찰이 가득하지만, 현란하고 반복적인 수사학에 무기력해지거나 지루해진 독자는 바우만이 어떤 식으로든 땅에 발을 딛고 제안하는 행동강령을 기대할지 모르겠다. 문제는 바우만의 저작들이 현상을 꿰뚫어보지만 ‘보편적이고 글로벌한’ 지식인의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현실적 참조대상’을 그리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보편은 특수와, 이론은 사례와 구별된다. 그런 점에서 바우만은 특정한 현장에서 시시콜콜 관여하며 행동사례를 제안하는 지역사회학자와는 다른 위치에 서 있다. 『액체근대』에는 가까이 하기엔 수사학이 넘친다.

신자유주의라는 폭력적인 물결이 사회적 안전판들을 무너뜨리며 정처없는 난민을 양산하는 상황이다. 최근 자주 일어나는 쓰나미나 지진 등의 거대한 자연재해들도 벌채나 개발, 빈곤화, 공공투자의 후퇴 등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의 결과물이 아니던가. 지금 액체근대를 살아가는 개인들은 자연재해가 더이상 자연적인 것이 아니며 또한 예측할 수 없는 것도 아님을 깨닫고 이에 대한 인간적이고 문명적인 해결책을 요구하고 있다. 바우만의 말대로 지난날의 부재지주(不在地主)처럼 권력을 갖되 대중의 삶에 예속되지 않는 전지구적 엘리뜨들을 세계시민의 이름으로 소환하여 사회적 책무를 지우는 일이 필요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