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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임화의 해방 전후

분단은 어떻게 한 시인의 삶을 무너뜨렸나

 

 

염무웅 廉武雄

학평론가, 영남대 명예교수. 저서로 『한국문학의 반성』 『민중시대의 문학』 『혼돈의 시대에 구상하는 문학의 논리』 『문학과 시대현실』 『자유의 역설』 『살아 있는 과거』 등이 있음. mwyom@ynu.ac.kr

 

* 이 글은 2015년 10월 24일 일본 토오꾜오의 무사시대학(武藏大學) 에꼬다(江古田) 캠퍼스에서 한국의 임화문학연구회와 일본의 조선문학 연구자들이 합동으로 개최한 ‘임화와 식민지 조선의 프롤레타리아문학’ 제하의 제8회 임화문학심포지엄에서 기조강연으로 발표한 논문을 수정 보완한 것이다.

 

  

여전히 문제로 남아 있는 임화의 비극

 

주지하듯 남한에서 월북·납북·재북 문인들은 오랫동안 공식석상에서 사라진 존재였다. 반공-냉전체제 하의 정치적 금지가 주된 원인이었으므로 해금(1988)을 계기로 그들에 대한 출판과 연구가 활성화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임화(林和) 연구가 한때 활기를 띠었던 것도 그 일환이었다. 그러나 현실사회주의의 몰락과 신자유주의의 진전에 따라 최근 20여년의 상황은 이런 흐름에 분명한 명암을 드러내고 있다고 여겨진다. 정지용(鄭芝溶)·이태준(李泰俊)·박태원(朴泰遠)·백석(白石)·오장환(吳章煥)처럼 작품 자체의 완성도가 높고 이념적 강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작가들은 지속적 평가를 통해 ‘한국문학사’1) 안에 자리잡아가고 있는 반면, 과거 카프계열의 작가와 평론가들은 대체로 일반 독자뿐 아니라 연구자들의 관심에서도 점차 멀어지는 양상이다. 생각건대 임화의 경우에는 위의 양면이 교차하고 있는 듯하다.

많은 논자들이 인정하듯 임화는 1920년대 말경부터 20년 동안 우리 문단의 핵심에서 활동했다. 특히 문학평론과 문학사연구 작업을 통한 그의 발걸음 하나하나는 그 시대의 우리 문학이 당면했던 이론적 과제의 가장 첨예한 부분에 대한 가장 치열한 사유의 결과물이어서, 그가 거둔 성과와 문제점은 그대로 우리 문학사 자체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는 시인으로서도 상당한 역량을 발휘했다. 카프계 시인들 대부분이 상투적인 구호시를 남발하는 데 그쳐 독자를 잃어버린 것과 달리 임화만은 오늘날에도 한 시대의 고뇌를 그 나름의 독창적 언어로 노래한 시인으로서 우리에게 살아남았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의 이런 문학적 행로는 8·15해방을 계기로 어찌할 수 없는 격동에 휘말려 비극적인 파산에 이르고 말았다. 어디서부터 어긋났고 무엇이 잘못되었던가. 해방 후 우리 민족이 통일민주국가의 수립에 실패했고 그 결과 끔찍한 전쟁마저 치름으로써 오늘까지 불행이 이어지고 있는데, 이 과정에 임화 같은 사람은 어떤 연관이 있고 또 어떤 점이 그를 비극적 결말로 끌로 갔는가. 이 글은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임화 비극의 내적 구조와 해방전후사를 꿰뚫는 맥락의 일단을 들여다보는 데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 임화의 시와 문학이론이 해방 전후 어떤 변화의 굴곡을 겪었고 어떻게 일관성을 지켰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나는 큰소리로 우는 시인이다’

 

1935년은 우리 문학사에서 그렇듯 임화의 생애에서도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한때 위세를 떨치던 카프가 10년의 공적 생애를 마감하고 그해에 간판을 내렸기 때문이다.2) 하지만 이 무렵의 시와 산문을 읽어보면 카프 해체는 적어도 임화에게는 돌발적인 것이 아니라 예고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카프시단의 총아로 떠오르던 1920년대말부터 카프의 지도권을 장악한 1930년대초에 걸친 시기에 그는 김팔봉(金八峰)의 ‘대중화론’뿐 아니라 자기 자신의 시에 대해서도 가차 없는 비판을 가하면서 문학의 볼셰비키화를 주장했는데, 그의 그런 급진주의적 관점에 점차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3) 필자가 보기에 임화의 이런 점진적인 입장변화와 카프 해체를 가져온 식민지 당국의 정치적 압박은 긴밀히 연관된 현상이다. 말하자면 그는 객관현실의 압박을 더 유연하면서도 더 체계적인 이론의 모색으로 돌파하고자 시도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의 이런 변화는 창작과 이론(즉 시와 비평)에서 조금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는 것 같다. 우선 시의 경우를 살펴보자.

1930년대 중반 임화는 카프 해체라는 객관적 사태 이외에도 개인적인 면에서 폐결핵으로 병원을 전전하고 첫 부인 이귀례(李禮)와 헤어지는 등 심한 곤경에 처하게 된다. 카프 헤게모니 장악과정에서 한때 문단을 향해 무책임할 만큼 강경한 목소리를 발했으나, 변화된 조건 속에서, 더구나 시인으로서 그런 강경자세를 유지하는 것은 비현실적일뿐더러 공허한 자기기만에 지나지 않음이 분명해진 것이다. 이 무렵의 많은 시들은 그런 성찰의 반영이라고 여겨지는데, 그 가운데 「나는 못 믿겠노라」와 「옛 책」이라는 작품에서 한 토막씩 읽어보자.

 

정말로 가시덤불은 무성하여 좁은 앞길을 덮고

깊은 밤 날씨는 언짢아, 두터운 암흑이

그 위에 자욱 누르고 있다

이미

자네는 부상한 채 사로잡히고, 나는 병들어 누워,

벌써 몇 사람의 진실로 존귀한 목숨이

고난에 찬 그 험한 길 위에 넘어졌는가?

이제 우리들의 긴 대오는 허물어지고 ‘전선’은 어지럽다

「나는 못 믿겠노라」 부분4)

 

지금

우리들 청년의 세대의 괴롭고 긴 역사의 밤,

검은 구름이 비바람 몰고 노한 물결은 산더미 되어,

비극의 검은 바다 위를 달리는 오늘

그 미덥던 너도 돛을 버리고 닻줄을 끊어,

오직 하늘과 땅으로 소리도 없는 절망의 슬픈 노래를 뜯어,

가만히 내 귓전을 울린다.

 

오오, 이것이 청년인 내 죽음의 자장가인가?

「옛 책」 부분5)

 

이 무렵의 사회적 분위기와 시인의 절망감이 격류가 되어 처연하게 서술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앞의 시에서 ‘무성한 가시덤불’ ‘좁은 앞길’ ‘두터운 암흑’ 같은 단순한 비유도 그렇거니와, “자네는 부상한 채 사로잡히고, 나는 병들어 누워” “이제 우리들의 긴 대오는 허물어지고 ‘전선’은 어지럽다” 같은 구절도 임화와 동지들이 부딪친 암울한 상황을 직설적으로 전하고 있다. 이 시들에는 초기 임화 작품의 ‘연극적 강경발언’에서 찾아볼 수 없는 그 나름의 진실의 울림이 살아 있다.

뒤의 시에서 ‘옛 책’은 레닌의 저서 『1905년의 의의』이다. 시인은 지난날 이 책을 읽으며 ‘이곳저곳에 굵게’ 붉은 줄을 긋기도 하고 ‘서투른 글씨로 틈틈이 빈 곳에’ 메모를 적기도 하면서 열중했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누추한 병상에 힘없이 누워 지난날의 찬란했던 기억을 반추할 뿐이다. 1905년의 러시아가 다가올 혁명의 가능성에 대한 벅찬 예감으로 빛났다면 오늘 식민지 조선에 ‘검은 구름은 비바람을 몰아오고’ ‘노한 물결은 산더미가 되어’ 덮치고 있다. 오직 ‘절망의 슬픈 노래’만이 소리도 없이 귓전을 울려 시인의 비극적 시대감정을 증언한다. 임화 개인의 서정적 자아인 동시에 임화 세대의 시적 표상으로서 (임화의 시적 주인공으로 자주 호명되는) ‘청년’이 여기 등장하는 것도 눈여겨볼 일이다.

그러나 임화는 이런 비극적 감상 속으로 한없이 빠져들지는 않았다. 객관적 상황의 압박에 눌려 어쩔 수 없는 절망감을 토로하면서도 그는 서정적 주체의 도전정신을 서서히 회복한다. 이 무렵 그의 시에 ‘희망’이란 낱말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의미심장한 현상인데, 그것은 스스로에게 건네는 분발의 촉구에 다름 아닐 것이다.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더욱이 옳은 희망을 실천한다는 것은……

그러나 희망을 버린다는 것은 일층 더 어려운 일이다

비록 죽음이 일체를 무덤 속에 파묻는 때라도……

斷章」 첫 연6)

 

분노란 청년의 명예가 아니냐

보복이란 생명의 표적이 아니냐

 

무엇 때문에

통곡하는 마음이 있느냐

한숨에 어린 가슴 위에

 

흙더미가 내려앉을 때

통곡하는 마음은

그 위에 피는

한 떨기 아네모네리라

 

어떤 놈이

통곡을

매장의 노래라

비웃느냐

나는 슬플 때마다

개구리처럼 아우성치며

울어대는 반도인의 자손이다

나는 우러나오는

제 소리를

감추지 못하는

 

큰소리로

우는 시인이다

「통곡」 끝부분7)

 

시 「통곡」이 언제 어떤 지면에 처음 발표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시집 『찬가』(백양당 1947)에 처음 수록되었으나, 작품의 성격으로 보아 「안개」 「달밤」 「별들이 합창하는 밤」 「밤의 찬가」 등과 더불어 1930년대 후반에 씌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이 「통곡」은 대표적 프롤레타리아 시인으로 인정되어온 임화의 사상적 변모를 공지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주목해야 할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통곡하는 마음’의 상징으로 ‘한 떨기 아네모네’를 내놓은 것은 시적으로 설득력이 약하다. ‘아네모네’의 이미지는 ‘한숨 어린 가슴 위에 내려앉는 흙더미’와 ‘통곡하는 마음’의 처절성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곱고 여리다. ‘어떤 놈이’ ‘개구리처럼 아우성치며’ 같은 구절도 더 예민한 또는 더 섬세한 표현으로 승화되어야 했다. 이런 세부적인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통곡」은 일제 파시즘의 진군나팔이 바야흐로 식민지 조선의 최소한의 정체성마저 유린하기 시작하는 시대에 드물게도 “나는 아우성치며 울어대는 반도인의 자손이다” “나는 제 소리를 감추지 못하는 큰소리로 우는 시인이다”라고 선언함으로써 한 계급의 전위시인에서 민족 전체를 대변하는 시인으로의 전신(轉身)을 만인 앞에 공표하고 있다. ‘제 소리를 감추지 못하고’ ‘큰소리로 우는’ 것을 시인의 사명으로 규정한 것은 임화 시학에 있어서 드물게 중대한 결단이었다.

 

 

‘역사적 필연의 문학적 체현’을 위해

 

1930년대 후반 일제 전시체제의 강화와 이에 따른 카프 해체는 임화의 시에 한때나마 감상적 동요와 정서적 침통함을 부여했지만, 이와 달리 이론작업의 측면에서는 오히려 그를 본격적인 역사적 사유의 길로 향하게 했다. 박영희(朴英熙)·김팔봉 등 프로문학 초기 개척자들이 잇따라 전향하고 해외문학파와 구인회 같은 카프 반대진영이 일취월장 세를 키워가는 등 문단의 분위기가 일변하는 가운데 임화는 문학사적 기로에 섰음을 심각하게 자각했다. 안팎으로 죄어오는 이 위기 앞에서 그는 신문학 20년의 전개과정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고 프로문학 10년의 공과를 냉정히 반성함으로써 새로운 방향정립을 모색하게 된 것이었다. 카프 해체 이후 처음 발표한 평론 「조선적 비평의 정신」과 「역사적 반성에의 요망」은 그의 모색이 어디에서 시작되어 장차 어디로 향할지 예고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조선적 비평의 정신」8)에서 임화는 먼저 그동안 우리 비평이 문단 내부와 외부로부터 상반된 평가를 받아왔음을 지적하는 것으로 논의를 시작한다. 즉 작가들은 대체로 비평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는 반면 일반 사회인들 쪽에서는 오히려 지지를 보내왔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마디로 문학에 대한 미학적 요구와 사회적 요구가 분리되어 있음을 말해주는데, 특히 카프 비평은 늘 과도한 ‘정론적 사회적인 조급성’에 지배됨으로써 창작자들로부터 ‘심미적 배려의 부족’이라는 비난을 받아왔다는 것이다.9) 이 논문은 이러한 현상에 관해 이처럼 의미있는 문제제기를 하고는 있으나, 그에 대한 심층적 분석으로까지 나아가지는 않고 있다. 그럼에도 한두가지 중요한 사실이 지적되고 있으니, 가령 당대의 생활현실 자체가 처한 절박성은 생활의 반영인 문학으로 하여금 사회적 성격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만들고 따라서 비평도 정론성(政論性)을 띨 수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조선적 비평정신의 진실한 건설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산 현실의 객관적 과학적 인식 위에 선 유물론적 미학과 문예과학의 확립의 전제 위에’ 서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 강조되는 것이다.10) 요약해서 말하면 1930년대 중반의 새로운 상황이 그로 하여금 문학의 심미적 측면에 관심을 돌리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박영희의 경우와 같은 심미주의로의 후퇴가 아니었다. 임화의 경우 그것은 오히려 유물론적 미학에의 전진을 통한 예술적 요구와 사회적 요구의 통합의 시도였다.

이어서 발표한 「역사적 반성에의 요망」11)은 제목에서 드러나듯 신문학이 오늘의 상황까지 걸어온 과정을 역사적으로 개괄한 논문이다. 카프 해체라는 당면현실에 이론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준비로서 씌어진 글임은 물론이다. 먼저 그는 1930년대 중반의 조선 문단에 ‘조선적’ 또는 ‘민족적’이라는 간판을 내건 복고주의의 유령이 배회하고 있다고 강력히 비판한다. 그러면서 그는 1920년대 염상섭(廉想涉)·최서해(崔曙海)·이기영(李箕永)의 자연주의 소설과 김석송(金石松)·주요한(朱耀翰)·이상화(李相和)의 낭만주의 시가 그 시대에 요구되는 나름의 ‘예술적 달성의 고처(高處)’에 이르렀음을 높이 평가하고, 프로문학이야말로 바로 1920년대 자연주의와 낭만주의의 예술적 성취를 더 높은 단계로 계승하고자 한 노력이었다고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프로문학은 단순히 20년대의 신문학이 하다 버린 것을 다시 줍거나 그 모두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서 그들이 하려고 하다 못한 모든 것을 계승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부정적인 것과 상쟁(相爭)하면서 높은 형태로 그것을 조직화하고 발전시키려던 것이다. 그리고 이 임무는 조선의 생활적 현실의 발전해나가는 역사적 필연의 문학적 체현(體現)으로서, 그들에게 허락된 무한의 능력 위에 명확히 자각된 방법을 가지고 수행하려고 하였다.12)

 

이 문장에는 임화가 구상하는 신문학사의 기본구도가 이미 얼마간 드러난 셈인데, 이후 그는 「조선 신문학사론 서설」(1935.10~11), 「개설 신문학사」(1939.9~1941.4) 등의 본격연구에서 이 구도를 더 구체화하고 작가와 작품에 대한 세부적 평가들을 그 구도 안에 채워넣음으로써 이 방면에 개척자적인 업적을 이룩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목표가 단지 역사적 해석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에게 더 중요한 것은 조선현실의 진실한 표현으로서의 위대한 ‘예술문학’의 창조였고 그 창조의 주체가 다름 아닌 프로문학이라는 점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런 뜻에서 그의 비평과 문학사연구 즉 이론작업의 목표는 언제나 현실을 향하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밝히고 있다.

 

우리는 지금 단순한 감상적 회고가 아니라 과학적인 문학사·예술학을 가지고 일체의 복고주의적 유령과 그 환상을 파괴하고 20년에 가까운 ‘신문학’의 예술적 발전과 그 도달의 수준을 밝히고, 진실로 명일의 위대한 예술문학 건설에 공헌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내가 지금 요망하는 문학사적 반성의 가장 큰 이유이다.13)

 

거듭되는 얘기지만 그의 가슴을 압박하는 것은 무엇보다 카프 해체라는 현실의 위기였다. 임화의 뛰어난 점은 위기를 ‘반성’의 계기로 삼아 그것을 새로운 도약의 발판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시에서는 감상과 동요의 흔적을 적잖이 남긴 것과 달리, 이론의 영역에서 그는 전선으로부터의 이탈을 막아선 강인한 지도비평의 역량을 발휘했다. “과학적 비평의 안광(眼光)을 가지고 조선문예의 현대적 성격을 밝히어 자기 자신의 금일의 자태를 관찰하고 그 역사적 지위를 살려봄에 있어 금일은 한개 문학 이외의 요인의 우리 문학 위에 가한 좋은 역사적 반성의 시기인가 한다.”14) 여기 지적된 바와 같이 문학에 가해진 ‘문학 이외의 요인’의 압박은 임화에게는 도리어 ‘좋은 역사적 반성’의 계기로 전용된 것이었다. 그런 사명감을 거듭 확인하면서 그는 구한말 이인직(李人稙) 시대부터 이광수(李光洙)를 거쳐 1920년대 염상섭·현진건(玄鎭健)·나도향(羅稻香)·이상화에 이르는 ‘조선문학의 진실한 성장사(成長史)’를 정력적으로 밝혀나가는 동시에 식민지 조선문학이 당면한 여러 이론적 문제들에 대해 다양한 처방과 깊이있는 논리를 체계적으로 구축한다. 이로써 임화는 1930년대 중후반 동안 최재서(崔載瑞)·백철(白鐵)·김기림(金起林)·김문집(金文輯)·김환태(金煥泰)·안함광(安含光)·이원조(李源朝)·한효(韓曉) 등 다수의 동년배 비평가들과 함께 한국의 근대비평의 가장 활기찬 한 시대를 열었고, 그와 더불어 거의 독창적인 안목을 가지고 우리 근대문학사 서술의 최초의 골격을 구성했다.

 

 

해방의 광장에서

 

다들 알듯이 식민지 조선문학은 1940년을 경계로 ‘암흑기’에 들어선다. 중일전쟁(1937), 유럽전쟁(1939), 태평양전쟁(1941) 등 전 세계가 사상 유례없는 대규모 전쟁에 돌입하는 엄중한 정세 속에서 우리말 사용의 공식적 금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의 강제폐간(1940), 문예지 『문장』과 『인문평론』의 폐간(1941) 등 한국어문학은 공적 존립의 기반을 박탈당했던 것이다. 이 압제의 시대에 일부 문인들은 전시체제에 자발적으로 협력했으나, 다수 문인들은 마지못해 관제행사에 동원되거나 어용단체에 이름을 걸었고, 일부는 아예 붓을 꺾고 은둔을 택했다. 임화는 협력과 저항 사이에서 불안하게 고뇌한 소극적 다수들 중의 하나였다. 짐작건대 일제말의 이 떳떳치 못한 경력은 해방 후 임화의 행동과 사고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1945815일 정오 일왕의 항복방송이 있었을 때 대부분의 조선인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고 뒤늦게 소식을 접한 사람들도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여운형(呂運亨) 등 일부 인사들은 일제의 패망과정을 비교적 정확히 인지하면서 이에 대비한 나름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임화는 이 역사적 사변에 어떻게 대처했던가. 그가 여운형 주변인사들처럼 사태의 추이를 깊숙이 알고 있었다는 증거는 찾을 수 없다. 그럼에도 그는 널리 알려진 대로 816일 새벽부터 동료문인들을 찾아다니며 설득하여 17일에는 30여명이 모인 자리에서 ‘조선문학건설본부’를 결성했고, 이틀 뒤에는 미술·음악·연극 등 다른 장르들과 함께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문건)를 조직하였다. 그런데 필자가 위상복(魏尙復) 교수의 저서를 통해 뒤늦게 안 사실은 역시 816일에 홍명희(洪命憙)·백남운(白南雲)·윤일선(尹日善)·김양하(金良瑕)17명을 설립준비위원으로 한 ‘조선학술원’이 발족되고 93일에는 규장(奎章)이 확정되면서 인문과학과 자연과학을 통괄하는 학술단체로 성립되었다는 것이었다.15) 조선학술원은 백남운을 위원장으로 하고 이병도(李丙燾)·김계숙(金桂淑)·신남철(申南徹)·박종홍(朴鍾鴻)·최호진(崔虎鎭)·전석담(全錫淡)·박치우(朴致祐) 등 좌우를 망라한 학자들을 위원으로 받아들여, 이듬해 8월에는 논문집도 발간하고 이어서 대중적인 학술강좌도 개최했다고 한다.

문건의 주동자가 임화·김남천(金南天)·이원조·이태준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해방 직후 임화가 이념적으로 좌우통합의 민족문학을 지향했던 것도 어느정도 알려진 사실이다. 그것은 조선학술원이 사상의 차이를 넘어 좌우합작 노선을 지향했던 것과 상통하는 점이다. 그렇다면 문건과 학술원 양자의 똑같이 신속한 결성 및 통합적 이념을 매개한 보이지 않는 손이 배후에 있었던 것인가. 혹시 여운형 중심의 민족연합전선 조직인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와 기맥을 통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 의문을 풀어줄 만한 자료를 필자는 발견하지 못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여운형의 건준도, 임화의 문건과 조선문학가동맹도, 또 백남운의 조선학술원도 해방시기 미·소 점령하의 정치상황 속에서 좌우통합 내지 민족연합이라는 애초의 입장을 끝내 관철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중도통합노선의 좌절, 즉 분단국가의 성립은 알다시피 수많은 애국자와 지식인에게 고통스런 삶과 참혹한 죽음을 선사하였다. 우리 민중이 겪는 오늘까지의 말 못할 고난도 이때 형성된 분단에 뿌리를 두고 있음은 물론이다.

일찍이 필자는 해방 직후 행동의 측면에서는 조직을 주도하고 민족문학의 이념을 제시하는 등 기민성·포용성을 발휘한 임화가 시에서는 조선공산당 가두시위를 소재로 한 작품 「912일」에 보이듯 자책과 회오(悔悟)의 감상적 태도를 나타냈다고 지적한 바 있다.16) 그런데 「912일」부터 불과 두어달 뒤의 논문 「현하의 정세와 문화운동의 당면임무」(『문화전선』 1945.11)에서 그는 ‘8월테제’로 알려진 박헌영(朴憲永) 혁명노선의 수용입장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그럼에도 거의 동시에 발표된 시 「길. 지금은 없는 전사 김치정(金致程) 동무에게」(『자유신문』 1945.11.15)에서는 논문에서와 달리 특정 정치노선에 입각한 혁명적 정서를 과시하기보다 여전히 “내면에 파고든 고독과 피로감, 영혼의 심층을 가로지르는 자아의 분열”을 암울한 어조로 읊조린다.17)

앞서 분석했듯이 임화는 카프 해체 직후에도 시와 논문에서 얼마간 다른 모습을 보인 바 있었다. 서정적 주체 내부의 솔직한 감정의 풍경과 이성적 통제의 영역에 속하는 논리의 세계가 한 인격 안에서 이처럼 자기분열의 양상을 나타내는 것은 어쩐 까닭인가. 감정과 이성의 일치가 무너질 수밖에 없는 무자비한 격동의 시기이기 때문인가. 어떻든 임화는 방금 말했듯이 ‘조선문학동맹’18) 결성을 앞두고 그 발기선언문에 해당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논문 「현하의 정세와 문화운동의 당면임무」에서 박헌영의 8월테제가 제시한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 단계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이제 이 논문이 임화 문학이론의 전개과정에서 갖는 의미를 살펴볼 차례가 되었다.

 

 

정치와 문학의 변증법이 요구하는 것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론이 임화 문학론에서 갖는 의미를 검토하기 전에 먼저 그가 지난 식민지시기에 문학과 현실정치의 관계를 어떻게 사유했는지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최근 10년간 문예비평의 주조와 변천」19) 같은 논문이 좋은 예라고 생각되는데, 왜냐하면 그가 이 글에서 1930년대 중반 이후의 상황에 직면하여 과거 카프비평의 과도한 정치주의를 반성적으로 회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임화에 의하면 카프시대 문학의 운동이론은 “문학의 일반이론이 아니라 문학권 내에 적용되는 정치방침”이었으므로 창작의 실제에 적용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창작을 통제하고 제작의 결과를 어떻게 운용하는가 하는 (…)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말하자면 문예정책에 관한 것”이었다.20) 프로비평의 과도한 정치주의는 그 결과였다. 따라서 그동안 ‘창작의 실제’를 소홀히 하고 문예정책에만 치중했던 것을 감안하면 프로비평계에 창작방법론이 제기되는 것은 불가피한 순서였다.

이 대목에서 임화의 중대한 발언이 나오는데, 그것은 문학의 사업에 있어 “근본적인 것은 역시 작품을 만드는 데 있다는 사실에 대한 반성의 표현”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런 측면과 관련하여 “문학이 그대로 정치 가운데 동화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었다”고 인정하기에 이른다.21) 그러나 이 발언에도 불구하고 그가 문학주의에 투항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창작방법론의 논의 자체가 이미 문학의 독자성에 대한 일정한 자각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함으로써 여전히 완강하게 문학의 정치적 연관을 옹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그때 경향문학을 말하는 사람이나 혹은 그뒤의 시대에 그때를 비판하는 사람이 정치문학의 시대라고 하나, 그실은 창작방법론이 등장한 시대는 정치만능의 후박한 운동이론 전성의 시대에 비하여 문학의 독자성에 대한 최초의 자각기라고 보아야 할 시대이나, 앞에 말한 것과 같이 최초의 정치주의는 문예정책 가운데 일체를 함축하려고 했던 운동이론 전성기에 표현되어 있었다.22)

 

따라서 임화의 정치주의는 결코 정치 속으로의 문학의 해소가 아니라 문학의 독자성 자체를 통한 올바른 정치의 획득이었다. 아마 이때 발자끄 작품에 대한 엥겔스의 리얼리즘적 해석은 정치와 문학의 관계에 대한 임화의 사유에 숨통을 틔워주었을 것이다.

 

위대한 리얼리스트는 꼭 똑바른 세계관만에 인도되지 아니할 때라도 상당한 정도로 현실의 예술적 파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결과 작가에게 철학을 가르칠 것이 아니라 현실을 똑바로 있는 대로 그리는 길을 지시하라는 결과로 되었다. 이것은 예술에 있어 사실주의적 방법의 우월이란 결론으로 나타났다.23)

 

그렇다면 해방시기 정치정세의 전면적 변화 속에서 임화는 정치와 문학(내지 문화)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했던가. 한가지 유의할 사실은 급박하게 전개되는 상황이 그를 단순한 문학평론가로 머물 수 없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시기 임화는 문학평론가라기보다 문예정책가이고 정치이론가였다. 따라서 그는 「현하의 정세와 문화운동의 당면임무」(1945.11), 「문학의 인민적 기초」(1945.12), 「조선 민족문학 건설의 기본과제에 관한 일반보고」(1946.6), 「조선에 있어 예술적 발전의 새로운 가능성에 관하여」(1946.7), 「민족문학의 이념과 문학운동의 사상적 통일을 위하여」(1947.4) 같은 논문을 통해서만, 그것도 원칙적이고 일반적인 이론의 수준에서만 자신의 견해를 피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보기에 해방 후 논문들에 나타난 임화의 입장은 1930년대 후반의 그것에서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이 아니다.24) 기조논문이라 할 「현하의 정세와 문화운동의 당면임무」를 중심으로 몇가지 쟁점만 검토해보자.

임화는 박헌영의 8월테제, 즉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론이 12월테제, 즉 1928년 코민테른 6차대회의 결정을 조선 현실로 옮겨온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에게 핵심적 문제는 혁명의 담당자가 누구냐 하는 것이었다. 그는 일찍이 1930년대부터 조선 부르주아계급의 미발달로 인해 시민혁명의 임무조차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어깨 위에 전가되었고 따라서 프롤레타리아계급이 시민혁명과 사회주의혁명의 이중과제를 안게 되었다고 설명한 바 있었다. 그리고 『백조』를 비롯한 1920년대 조선 낭만주의 문학의 허약성이 시민계급의 미발달과 그들의 대외의존성이라는 ‘황량한 토양’에서 생성된 것이라고 설명하였다.25) 이러한 인식은 해방시기의 사회적 조건 속에서 “조선의 부르주아혁명을 극히 소수의 진보적 부르주아지와 기타 주로 중간층·농민·노동자계급의 손으로 수행하지 아니할 수 없는 사태에 이르게 하였다”26)는 주장으로 자연스럽게 연장되었다. 한마디로 조선 현실의 후진적 특성은 계급연합론 내지 통일전선론의 역사적 필연성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관심을 가진 분야는(혹은 그에게 맡겨진 분야는) 문화였다. 정치와 문화의 관계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다.

 

문화운동이 바로 정치운동의 직접의 일환으로 의무를 지는 것은 아니다. 문화의 기능과 그 기능에 적응한 형태로 독자의 임무수행에 종사하는 것이 문화의 투쟁이다. 요컨대 문화 자체의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전체 문제해결에 기여하는 것이다.27)

 

즉 문화가 정치의 직접적 일부로서가 아니라 나름의 독자적 역할의 수행을 통해 전체 역사발전에 기여한다는 것인데, 그것은 해방 이전이나 이후의 임화의 일관된 주장이다. 물론 그는 해방 전후 어느 때나 문학(문화)의 독자성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전체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만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존재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해방을 계기로 새로운 현실이 조성되고 정치권력의 성격에도 근본적 변화가 일어났으므로 문학의 자세도 달라지지 않으면 안된다고 보았다. 즉 그는 이제 문화적 순수주의 내지 방관주의가 지양되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고 주장했다. 문화에 있어서의 사상적 무관심 또는 순수주의는 “일본의 강압 하에 있었을 때는 거기에 대한 정치적 무관심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전 민족이 완전해방과 국가독립을 위하여 투쟁하지 아니하면 아니 될 현재에 있어서는 반동적 역할을” 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그는 경고하는 것이다.28) 그러면서도 그는 강조하기를 잊지 않았다.

 

정치가 모든 생활관계의 집중적 표현이란 말이 지금처럼 사실화되어 나타날 시기라는 것은 극히 드물다. 그렇다고 문화를 곧 정치의 한 수단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면 왕년의 과오를 되풀이하는 것이다.29)

 

‘왕년의 과오’란 두말할 것 없이 카프시대의 교조적 정치주의를 가리킨다. 이 과도한 정치주의와 일제 말의 부득이했던 순수주의를 아울러 극복하는 동시에 해방된 조선에서의 새로운 역사적 단계에 적응하여 정립된 임화의 문학이념이 다름 아닌 ‘근대적인 의미의 민족문학’30)이었다. 정치적으로 본다면 그것은 좌우합작 민족연합의 통일국가 구상에 대응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당시의 현실적 조건 속에서 민족문학의 이념과 실천은 결국 좌절에 이르고 말았다.

 

 

이성이 몰수된 시대에

 

앞서 지적했듯이 임화는 논문 「현하의 정세와 문화운동의 당면임무」에서 박헌영 정치노선의 지지를 공개적으로 천명하였다. 그러나 그가 박헌영의 정치이념과 정치행보를 기계적으로 추종했던 것은 아니다. 박헌영은 19451212일 충칭(重慶)임시정부 측(즉 金 측)과의 합작협상이 실패하자 우익을 배제하고 좌익진영만으로 조직을 재구성하려고 했는데, “이는 사실상 민족통일전선을 폐기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31) 그러나 임화는 「민족문학의 이념과 문학운동의 사상적 통일을 위하여」(『문학』 3호, 1947.4)를 발표하는 순간에도 민족통일전선 노선에 대한 미련을 놓지 않고 있었다.32)

어떻든 박헌영 노선의 선택은 이후 임화의 행동과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박헌영의 삶과 사상은 아직 논란이 많고, 특히 1946년 미군정에 의한 조선공산당 불법화와 그의 월북 및 이후의 행적은 더욱 의문에 싸여 있다. 예컨대, 19469월의 월북사건만 하더라도 역사학자 김기협(金基協)은 흔히 알려진 것과 다른 시각에서 해석한다. 즉 공산당 전국조직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서울에 머물러 있어야 하지만 소련의 지원을 확보하여 김일성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평양으로 갈 수밖에 없었는데, 미군정의 체포령은 울고 싶은 아이 뺨 때려준 격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박헌영과 미군정 핵심부 사이에는 월북에 관한 어떤 교감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김기협의 의심 섞인 추론인데,33) 이것은 박헌영의 미제간첩혐의와 관련해서도 중대한 문제제기이다.

그러나 박헌영과 미군정 핵심부 사이에 설사 어떤 교감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간첩혐의의 증거로 단정할 수는 없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나라의 앞날을 이끌겠다는 정치지도자라면 모든 방면으로부터 정보를 얻고 조언을 들어 옳은 방향으로 정책을 결정할 의무가 있다. 그런 점에서 만약 박헌영이 해방시기에 공적이든 사적이든 미군정과 접촉 가지는 것을 기피했다면 그것이야말로 정치가로서 자격미달이다. 이승만이나 김일성도 미군정 또는 소군정과 허다한 교감을 나누었을 테지만, 그것을 간첩행위 차원에서 해석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물론 해방시기 박헌영의 정치적 오류와 실패는 간첩혐의와 무관하게 민족분단의 책임자 중의 한 사람이라는 점으로 엄중하게 추궁되어야 할 것이다. 어떻든 미군정의 반동적 정책과 좌파에 대한 탄압 및 이에 따른 친일파 득세에 실망한 많은 청년·지식인들이 이 무렵 북으로 넘어갔고, 그런 와중에 임화는 점점 더 과격한 행동주의자로 변모해갔다.

이제 임화에게는 이성적 사유에 기반을 둔 합리적 이론의 전개가 불가능한 시대로 접어들었다. 태평양전쟁 발발부터 8·15까지 그랬던 것처럼 1947년경부터 1953년 죽음까지의 기간은 그에게는 외부현실의 강제력에 의해 이성이 몰수된 시대였다. 오직 남은 것은 투쟁의 현장에서 비명처럼 내지르는 선전·선동시의 창작뿐이었다. 위로가 된다면 선동시의 면에서 그가 한국시의 역사상 전무후무하게 비상한 재능을 발휘했다는 것이었다. 해방 초기 그의 시에서는 잠시지만 정신적 소외와 육신의 피로에 지친 듯한 짙은 우울감과 자기연민의 괴로움이 배어나왔었다. 그러나 「발자욱」(『적성』 1946.3), 「헌시」(『건설』 1946.1), 「31일이 온다」(『자유신문』 1946.2.25), 「나의 눈은 핏발이 서서 감을 수가 없다」(『현대일보』 1946.5.1), 「깃발을 내리자」(『현대일보』 1946.5.19) 등의 작품으로 이어지면서 그의 시는 아연 다른 모습을 보인다 심장을 흔드는 격정적 리듬, 폐부를 찌르는 날카로운 비유, 선명하고 단호한 언어 등에 의해 선동시의 최고경지를 개척했던 것이다. 당시 남한의 수많은 청년·학생과 대중이 그의 시에 열광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날로 더 급박해져갔다. 194610월 대구를 중심으로 소위 인민항쟁이 발생하고 각처에서 파업투쟁이 전개되자 그의 시는 그 자체로서 벌거벗은 투쟁의 무기가 되었다. 시 「우리들의 전구(戰區)」는 철도파업 총본부인 용산 기관구에서 지원활동의 일환으로 쓴 작품이고, 「높은 산 봉우리마다」는 10월항쟁을 격려하려고 발표한 작품이었다. 그러나 그나마 합법적 신분의 유지가 어려워지자 그는 김남천과 함께 194711월 월북을 결행하였다. 이후 6·25전쟁을 거쳐 처형되기까지 임화의 나머지 일생은 문학 본연의 세계로부터 폭력과 살육의 지옥으로 추방되는, 몰락과 파멸의 과정이었다.

돌이켜보면 이 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불의의 죽음을 당했다. 지식인으로 범위를 한정해 보더라도 허다한 예가 있지만, 국문학자 김태준(金台俊)과 철학자 박치우는 북에 남을 수 있는 처지였음에도 굳이 월남하여 비운을 맞았고, 북으로 넘어간 임화·김남천·이원조도 터무니없는 혐의를 쓰고 처형되었다. 박영희·정지용·김기림은 북에도 남에도 기록이 없어 생사불명의 의문부호(?) 속으로 실종되었다. 박치우에 관해 최초의 두툼한 연구서를 출간한 위상복 교수는 그 책에서 “박치우의 생애를 되돌아볼 때 풀리지 않는 의문의 하나는 그가 왜 임화나 이원조처럼 북에 남지 않고 스스로 총을 들고 남하하여 유격투쟁에 뛰어들었을까 하는 점이다”라고 쓰고 있다.34) 박치우가 학자로서 제대로 재능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비명에 횡사한 데 대한 안타까움이 배어 있는 의문이다.

위상복 교수가 탄식했듯 김태준과 박치우가 임화나 이원조처럼 북에 남았다면 어찌 되었을까. 그것은 임화나 이원조가 남쪽에 남았다면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까를 묻는 것과 똑같이 괴로운 가정이다. 아마도 비극은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설사 처형을 피한다 하더라도 죽음보다 못한 모욕적인 삶이 그들 앞을 가로막았을 것이다. 이태준·백석·이용악의 말년이 보여주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적어도 이승만이나 김일성 같은 철두철미 권력지향적인 마키아벨리스트가 집권에 성공하는 조건에서는, 그리고 그 성공을 미국과 소련이 보장하는 한에서는 계급연합적 민족통합노선의 실패, 즉 통일자주국가의 좌절은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임화의 운명은 그 불가피 안에서 결정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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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문학사’에 따옴표를 붙인 까닭은 이 말이 한반도 전체의 문학을 가리키는 자명한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제식민지 시대에 사람들이 우리 문학을 ‘조선문학’이라고 불렀던 것이나 해방 이후 지금까지 북한에서 자신들 문학을 ‘조선문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한반도 전체의 현재의 문학 또는 중국이나 일본에서 활동하는 동포작가들의 과거 및 현재의 작품을 오늘 남한에서 무엇이라고 부를지 하는 것은 합의된 바가 없다. 이 문제에 관해서 필자는 재일작가 이회성(李恢成)과 서경식(徐京植)의 발언을 검토하면서 민족문학·한국문학·조선문학의 개념을 중심으로 약간의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평론집 『문학과 시대현실』, 창비 2010, 572~78면 및 산문집 『반걸음을 위한 현존의 요구』, 삶창 2015, 47~49면 참조). 이 글에서는 일제강점기와 해방시기의 우리 문학을 당시의 관행에 따라 주로 ‘조선문학’이라 부르되, 특정시기·특정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일반적으로 우리 문학을 지칭할 때는 관례대로 ‘한국문학’이라 부르겠다.

2)允植 『林和硏究』(문학사상사 1989, 542면)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카프의 해산은 1935년 5월 21일이다. 당시의 서기장 임화, 문학부의 명목상의 책임자 김팔봉, 실무자 김남천에 의해 1925년 8월 23일에 결성된 KAPF는 만 십년을 채 못 채우고 경기도 경찰부에 해산계를 제출하기에 이른다.” 한편, 『동아일보』(1935.6.5, 2면)는 ‘프로藝術總本營 카프 마침내 解體’라는 제하에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싣는다: “동대문경찰서 고등계에서는 富田 주임과 山內 형사가 지난 4월 초순부터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간부 林仁植(林〓인용자)씨를 여러차례 방문하고 그 해체를 권고하여왔으나, 동 예술동맹에서는 해체를 주저하고 그대로 붙들어왔었는데, 경찰 측의 해체 요구는 여전히 계속되어, 지난 4월 22일에는 맹원들이 집합하여 일대 논의를 거듭한 후 비장한 해체를 결의하게 되어 28일에는 대표 임인식씨의 명의로 解體屆出을 동대문서 고등계에 제출하였다 한다.” 그러나 1935년 4월에는 카프의 주요 구성원들이 이른바 ‘新建設사건’으로 全州 형무소에 갇혀 있어, 기사 가운데 ‘맹원들이 집합하여 일대 논의를 거듭했다’는 부분은 신뢰하기 어렵다.

3) 필자는 「33년을 통하여 본 현대 조선의 시문학」 「1933년의 조선문학의 제 경향과 전망」 등 평론을 중심으로 임화의 비평에서 관념적 미숙성과 도식주의적 과격성이 점차 극복되고 있음을 살펴본 바 있다. 『문학과 시대현실』 98~101면 및 평론집 『살아 있는 과거』, 창비 2015, 261~65면 참조.

4) 발표시기가 분명치 않으나 1935년경의 所作으로 보이며 시집 『현해탄』(동광당 1938)에 처음 수록됨. 『임화문학예술전집 1: 시』, 소명출판 2009, 105면. 이하 『시』로 약칭.

5) 『신동아』 1935.9; 『시』 110~11면.

6) 『낭만』 1936.11; 『시』 210면.

7) 『시』 233~34면.

8) 『조선중앙일보』 1935.6.25~29; 『임화문학예술전집 3: 문학의 논리』, 소명출판 2009 수록. 이하 『문학의 논리』로 약칭.

9) 『문학의 논리』 550면.

10) 같은 책 554면.

11) 『조선중앙일보』 1935.7.4~16; 『임화문학예술전집 2: 문학사』, 소명출판 2009 수록. 이하 『문학사』로 약칭.

12) 『문학사』 358면.

13) 같은 책 360~61면.

14) 같은 책 370면.

15) 김용섭(金容燮) 교수의 저서 『남북 학술원과 과학원의 발달』(지식산업사 2005)에 의거하여 기술된 위상복의 『불화 그리고 불온한 시대의 철학·박치우의 삶과 철학사상』(길 2012) 387~91면 참조.

16)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문학과 시대현실』 70~71면.

17) 같은 책 76면 참조.

18) 한설야·윤기정 등은 임화의 조선문학건설본부(문건)가 취한 민족통합노선에 불만을 가지고 따로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동맹)을 결성해 계급적 지향을 분명히했다. 하지만 조선공산당의 요구에 따라 문건과 동맹은 12월 6일 통합성명서를 냈고 일주일 뒤인 12월 13일에는 가칭 ‘조선문학동맹’ 결성식을 가졌다. 그리고 1946년 2월 8일부터 이틀간 열린 ‘전국문학자대회’에서 ‘조선문학가동맹’이라는 정식명칭으로 출범하였다.

19) 『비판』 1939.5~6; 『임화문학예술전집 5: 평론2』, 소명출판 2009, 114면. 이하 『평론2』로 약칭.

20) 『평론2』 114면.

21) 같은 책 114면.

22) 같은 책 114~15면.

23) 같은 책 117면.

24) 필자는 임화의 해방 전후를 비교 분석한 논문들을 많이 구해 보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장용경씨의 논문 「해방 전후 林政治優位論과 문학의 독자성」(『역사문제연구』 제24호, 2010)은 중요한 문제에 관해 설득력있는 논지를 전개하고 있어 큰 참고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해방을 전후한 임화 이론의 단절 내지 변화를 주목한 데 비해 필자는 그 연속성을 중시하는 편이어서, 입장이 상반되는 셈이다.

25) 이 점을 필자는 논문 「33년을 통하여 본 현대조선의 시문학」을 중심으로 논한 바 있다. 『살아 있는 과거』 264~66면 참조.

26) 『평론2』 359면.

27) 같은 책 361면.

28) 같은 책 366면.

29) 같은 책 368면.

30) 「조선 민족문학 건설의 기본과제에 관한 일반보고」(『건설기의 조선문학』, 조선문학가동맹 1946.6)에서 제시된 명제. 『평론2』 412면.

31) 조한성 『해방 후 3년』, 생각정원 2015, 77면.

32) 박헌영과 임화의 이념적 차이에 관해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박헌영이 김구와의 합작을 단념한 것은 그때그때의 정세변화에 따른 ‘정치적’ 결정이었을 터이므로 그것을 이념의 수준에서 평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반면에 문예운동가로서 임화는 일관되게 ‘민족문학’을 주장했다. 물론 임화의 민족문학은 ‘노동계급의 주도성’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분명하게 말한다. “우리는 결코 조직의 방편이나 운동의 수단으로서 민족문학의 구호를 내걸고 있는 것이 아니다. 민족문학의 외형 속에서 계급문학의 건설을 기도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민족문학의 이념과 문화운동의 사상적 통일을 위하여」, 『평론2』 471면) 그러나 김재용 교수는 이 무렵 “임화를 비롯한 좌파가 민중의 힘을 과도하게 믿고” 우익세력에 대해 지나친 비판을 가함으로써 좌우대립의 격화와 남북분단의 고착에 일조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지적하고 있다.(김재용 「해방직후 임화의 민족문학과 통일독립」, 『임화문학의 재인식』, 소명출판 2004, 315~8면 참조.)

33) 김기협 「『박헌영 트라우마』 서평에 대한 반론」, 『프레시안』 2013.5.24 참조.

34) 위상복, 앞의 책 47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