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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소스타인 베블런 『미국의 고등교육』, 길 2014
대학에 대한 한 경제학자의 질문
윤지관 尹志寬
덕성여대 영문과 교수 jkyoon@duksung.ac.kr
미국 제도학파의 창시자로 알려진 20세기초 경제학자 소스타인 베블런(Thorstein Veblen)이 당시 미국대학의 기업화를 비판하고 대학의 의미를 고찰한 『미국의 고등교육』(The Higher Learning in America, 1918)이 번역 출간(홍훈·박종현 옮김)되었다. 경제학자가 고등교육에 대한 책을 쓴 것 자체가 주목되거니와 당대 미국대학의 현실을 토대로 한 이 책이 오늘날 우리 대학의 문제와 직결되어 읽힌다는 점도 매우 흥미롭다.
가령 금전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사업적 성격을 대학이 가지게 되면, 그런 성향의 인간들의 비교우위에 의해서 “어떤 현실적 유용성을 확실히 입증하지 못하는 과학적 또는 학문적 작업에 대해서는 용납하지 못하는 습성을 필연적으로 지니게 마련”이며, “대학의 힘의 무게중심을 세속사에 관심을 갖지 않는 순수 학문이나 과학으로부터 구체적인 공리주의적(utilitarian) 목표들 쪽으로 옮길 가능성이 높다”(53면)라는 대목은 오늘날의 한국대학에 그대로 적용해도 될 만한 지적이다. 또 대학 이사회가 그 방향으로 움직이면서 “경상지출 용도로 할당된 자금을 (…) ‘실용적’이거나 또는 실용적에 가까운 교육노선 및 학술적 선전 등에 우선적으로 배분함으로써 신뢰할 만한 공공성을 훼손하는 경향을 불가피하게 띠게 된다”(101면)라는 관찰도 신자유주의적 행태가 만연한 오늘날 우리 대학의 초상에 대한 뜻하지 않은 예언이 되고 있다. 세계적으로나 한국의 상황에서나 대학의 기업화가 촉진·심화되는 현실을 생각하면, 이 책의 현재성은 뚜렷하다.
베블런이 이 책을 쓴 때는 미국이 세기 전환기를 맞아 도시의 팽창과 산업화가 급속도로 진전되면서 농촌을 기반으로 하던 공동체적 전통이 무너지고 배금주의가 팽배하던 시기였다. 『유한계급론』(1899)에서 금전을 중심으로 한 관습과 제도를 통해 상업주의로 치달은 자본주의를 비판한 베블런은 『미국의 고등교육』을 통해 이같은 흐름이 어떻게 대학이라는 제도를 변질시키고 있는가, 대학의 본령이라고 할 사심없는 학문연구의 영역을 어떻게 훼손시키고 있는가를 고찰한다.
그에게 있어 근대의 대학은 사실적 지식에 대한 탐구를 목적으로 하는 사회적 제도이며, 여기에는 근대문명이 이같은 지적능력에 대한 존중을 관습화하고 있다는 전제가 있다. 그런데 이러한 습관에 토대를 둔 고등학문의 지식체계도 이 시대의 지배적인 사고습관, 즉 산업기술을 움직이는 금전적인 활동의 영향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 결국 이 두 상충하는 습관으로 인해 과학 및 학문의 요구와 사업상의 원리 및 금전적 이득의 요구 사이에 갈등이 생겨나고, 대학운영은 결국 이 두 요구 사이의 조정과 화해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베블런은 경제학자답게 이 과정을 결산하면서 사업의 원리가 순수한 학문의 영역을 침해함으로써 대학의 기능에 손실을 끼치고 있다고 결론짓는다.
이상과 같은 베블런의 근대대학에 대한 생각은, 경제학자가 좁은 의미의 경제논리가 아니라 오히려 교육에 대한 공리주의적 접근을 비판하고 공평무사한 연구의 사회적 가치를 주장한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렇지만 그의 주장은 몇가지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질문을 야기하기도 한다.
우선 베블런은 근대대학의 기본을 한가한 호기심에서 비롯하는 과학적 지식에 대한 탐구본능에 두고 있으며, 여기에는 이해관계에 무관한 사심없는 객관적 연구가 대학의 영역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그런데 이 과학적 지식은 “감정에 치우치지 않으며 공평무사하다는 특징”(32면)을 가지지만 다른 한편으로 감성적·정신적 덕목을 희생하고 얻어지는 것이며, 베블런 스스로도 근대기술은 유례없을 정도로 비인격적·사무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말하는 대학의 연구는 객관적 사실을 규명하는 차원의 지식체계에 한정된다. 이러한 실증주의적 과학관 자체가 공리주의와 결합된 이데올로기일 수 있는데 그 지식체계의 근거에 대해서는 단지 본능이자 관습임을 거론할 뿐 더 묻지 않는다.
그 결과 베블런이 말하는 대학의 본령으로서의 학문연구에는 인문학은 물론 사회과학까지도 빠져 있다. 베블런이 보기에 사회과학 일반은 삶의 근거가 되는 관습이나 사회제도를 연구하는 분야이므로 이 분야의 과학자들은 “그의 과학이 속해 있는 삶의 용인된 체계 속의 요소들에 관한 당대의 신념을 수용하고 순응하는 것에 의해서만 (…) 과학적 역량을 인정받기”(198면) 때문에 객관적일 수가 없다. 결국 사회과학은 유사과학으로서, 지식의 창달보다는 기존 견해를 인정하는 데 머문다는 것이다. 인문학은 더구나 그의 대학 구상에 자리를 얻지 못한다. 그에게 있어 인문교육이 지향하는 교양이나 소양 교육은 대학이 아니라 중등학교의 목적이며, 이 분야가 대학 내부에 존재하는 것은 마치 직업교육이 그런 것처럼 오히려 대학의 본령을 약화시키는 것이 된다.
베블런의 이같은 관점은 근대대학의 이념이 대학을 민족문화와 시민적인 교양 형성의 공간으로 보는 독일 관념론자들의 사고에 크게 빚지고 있다는 점을 고려치 않은 것이다. 대학 수준의 교양교육은 비판적 사고력과 창의력, 즉 기성 관습의 한계를 넘어서는 정신적 역량을 길러내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근대대학의 중요한 기능을 이룬다. 물론 제도로서의 대학이 기성 관념을 재생하는 면도 있지만, 인문학교육은 지배적인 관습으로서의 배금주의나 과시적 소비 등 베블런이 비판하는 사회적 문제에 대한 인식을 길러주고, 그렇게 양성한 민주시민이 결국 기성 질서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사회적 변화를 추동하는 힘이 된다. 베블런의 고등교육론이 주로 이사회, 총장 등 제도에 대한 비판에 머무름으로써 국가와 대학의 관계나 이데올로기 기구로서의 대학의 입지에 대한 시야가 결핍되어 있는 것도 이와 유관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이 쓰인 시기는 현재 미국대학의 중추를 이루는 주립대학 체제가 자리를 잡기 이전이고, 더구나 1960년대 이후 냉전이 본격화되면서 미 연방정부가 대학에 대한 집중적인 재정투입을 통해 대학의 연구중심적인 기능을 극대화하는 동시에 그것을 국가적 목적에 종속시킨 변화가 일어나기 이전이었다. 미국대학이 80년대 이후 세계화 국면에서 급속도로 기업화되어간 현실을 상기하면 20세기초 베블런의 미국대학론은 자본주의 시대 대학의 본질과 곤경에 대한 통찰로 여전한 유효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