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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한국문학,‘닫힌 미래’와 싸우다
‘헬조선’에서 ‘탈조선’을 꿈꾼다는 것
신자유주의형 신인류의 역습
소영현 蘇榮炫
문학평론가, 연세대 국학연구원 HK연구교수. 저서 『프랑켄슈타인 프로젝트』 『분열하는 감각들』 『문학청년의 탄생』 등이 있음. yhso70@hanmail.net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거다.”
—오찬호 『진격의 대학교』(문학동네 2015)
“저도 안다고요, 충분히. 아저씨 세대에 비해서 제 세대가 훨씬 여유로운 거
저도 안다고요. 근데, 그래서요? 저보고 어떡하라고요? 그게 제 탓이에요?
말씀하셨잖아요, 제 탓이 아니라고. 그럼 저보고 어떡하라고요?”
—김사과 『천국에서』(창비 2013)
1. 한국사회 성찰론, ‘헬조선’이라는 마술부대
청년들이 이곳을 ‘헬조선’(hell+朝鮮)이라 부르며 한국사회의 퇴행적 면모에 대한 전면적 비판에 나섰다. 인터넷 싸이트 디씨인사이드(역사갤러리/주식갤러리)에서 조선시대를 비하하는 용어로 사용되다 2015년 중반 언론의 핫이슈가 된 헬조선은 국가와 사회에 대한 청년들의 극도의 혐오가 불러온 말이다. 헬조선론은 ‘견디면 암이고 못 견디면 자살’1)인 이 땅에서 입시, 취업, 결혼으로 대표되는 생애주기의 주요 계기마다 청년, 아니 우리 모두가 목숨을 건 경쟁을 펼쳐야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살고 있음을 비명처럼 전한다. 애초에 극심한 취업난에 내몰린 청년들에 의해 지펴졌지만, 헬조선론은 한국사회 비판에서 전방위적이다.2)
사실 대한민국을 헬조선이나 ‘망한민국’, ‘불지옥반도/지옥불반도’(지옥불이 치솟는 半島)로 명명하는 일이 전에 없는 낯선 일은 아니다. 표현은 달랐지만 이곳이 지옥이라는 절망적 인식과 이에 대한 전면적 비판은 적어도 근대 이후만 따져보아도 꽤 긴 연원을 갖는다. ‘미개한 국민성’과 ‘후진 시스템’에 대한 비판3)인 헬조선론은 다소간 과격하고 자극적인 표현이나 이미지가 동원되고 하위문화적 놀이 성격을 띠고 있음에도,4) 한국사회에 대한 전면적 반성과 사유를 요청하는 사회비판 담론의 계보 위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이전 시대의 사회비판 담론이 그러했듯 청년 주도의 청년론에 가깝지만 세대론으로 국한될 수 없는 것이다.
그간 한국사회의 갈등과 모순의 주적의 자리에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의 금융자본주의가 불려나왔다면, 이제는 그 자리를 헬조선이라는 신조어가 채우게 되었다. 헬조선론의 미덕은 한국사회 전반에 흩어져 있는 문제들을 서로 유관한 관계망 속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한 점이다. 신자유주의 통치술의 미시화 전략으로 파편적으로 인지되던 한국사회의 모순들, 노동, 교육, 주거 등 긴급한 해결이 요청되는 문제들이 헬조선의 이름으로 한자리에서 논의되기 시작했다. SNS(쏘셜네트워크서비스) 공간은 말할 것도 없고 일간지나 주간지, 사회비판적 계간지에서 ‘헬조선’론에 대한 관심이 뚜렷하다.5) 헬조선론을 통해 신자유주의라는 모호하고 실체가 불투명한 비판대상에 현실적 무게가 얹히면서 사회비판의 실질적 가능성이 좀더 뚜렷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헬조선론은 헬조선이라는 용어로 이 땅의 적체된 문제들을 한자루에 쓸어담아 그 자루만 버리고 나면 모든 문제가 단번에 해결될 수 있을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게 사실이다. 한국사회의 문제적 면모들에 대한 혐오와 조롱으로 채워진 채 그 대안으로 ‘탈조선’이 거론되고 탈조선이 한국사회에서의 이탈, 즉 이민의 문제로 한정되는 구조는 그러한 착각을 부추기는 헬조선론의 함정이기도 한데, 아이러니하게도 사회비판 담론의 계보 위에서 헬조선론의 차별적 면모는 이 논의구조에서 생겨난다. 헬조선론이 아직 몸체를 확인할 수 없는 시대변화의 징후로서 읽혀야 하는 것은 헬조선론이 보여주는 이 미묘한 면모 때문이다.
2. 헬조선론이 말한 것과 말하지 않은 것
노오력, 미개, 흙수저,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 노답, 벌레(충), 노예, 탈출, 인정 등 헬조선론에서 주로 활용되는 용어는 헬조선론이 근대정신의 중심을 이루었던 담론들, 입신출세주의, 노력론, 수양론, 교양론에 대한 조롱임을 말해준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쌔뮤얼 스마일스(Samuel Smiles)의 언술이 근대의 시대정신을 대변하는 격언이 된 것은 신분제가 해체된 세계에서는 개인이 균등한 기회를 부여받고 ‘노력’을 통해 자신의 기량을 발휘하면 누구에게나 ‘성공’의 가능성이 열린다는 신념이 널리 공유되었기 때문이다. 헬조선론은 한국의 성장체제를 지탱해온 이념적 동력인 근대정신에 대한 불신을 환기하고, ‘개천에서 용 나는’ 입신출세주의의 담론적 효용이 임계치에 달했음을 보여준다.
풍자와 조롱이 갖는 비판적 해부의 날카로운 면모와 무관하게 풍자와 조롱은 그 대상이 한정한 범주 너머를 상상하기 쉽지 않다. 헬조선론이 대안적 비판담론인가에 대한 판단은 유보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헬조선론을 채우는 풍자와 조롱이 그간 미봉적으로 봉합되었던 근대정신의 균열과 모순의 면모들로 향해 있으며 근대정신이 전면적으로 재고되어야 할 것으로 대상화된 것에 대해서는 좀더 숙고할 필요가 있다. 헬조선론은 근대정신의 정당성이나 옳고 그름이 아니라 그 시대적 유효성이 임계점에 이르렀음을 환기하는 한국사회의 자성적 거울론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근면하고 성실한 태도로 ‘노력’을 다해도 하류인생의 삶이 바뀔 가능성이 없으며 노동을 할수록 더 가난해지는 ‘워킹푸어’ 시대에 직면해서 헬조선론은 점차 계층을 가로지르는 신분상승이 어려워지고 상대적으로 세습신분이 강화되는 신(新)신분사회의 도래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을 담고 있다. 그런데 ‘미개한’ 사회를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태도의 무용함과 불가능성을 지적하고 그런 인식에 조롱을 가하고 있음에도 헬조선론에서 ‘이후(以後)’의 삶에 대한 관심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이를 두고 좌절과 포기의 무드를 읽어내고 헬조선론으로 표출하는 사회비판의 수동성과 무기력성을 비판하는 논의가 적지 않다. 근대적 의미의 성장과 발전 논리에 대한 신뢰를 거두지 못하고, 전면적인 비판—수행성을 마련하지 못하는 것이 헬조선론의 어정쩡한 위상 때문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가.
최근 한국사회에서 논의가 필요한 많은 문제가 순식간에 진영논리로 환원되어 편가르기 싸움이 되는 경향이 심해지고 있다. 사이비 진영논리일 뿐인 좌파와 우파, 보수와 진보의 대결구도 속으로 모든 논제가 휩쓸려들어가 어떤 문제도 이성적으로 검토되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헬조선론도 예외는 아니다. 헬조선론이 보여주는 혐오와 조롱의 면모는 그 동력의 기원에 대한 진지한 물음으로 이어지기 전에, 미래를 선취해야 할 청년에 대한 진영 간 입장차이로 환원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그간 헬조선론은 나라를 탓하고 부모를 탓하는 나약한 세대의 철없는 징징거림으로, 혹은 이제 막 시작된 각성된 청년들의 사회구조적 비판의 일환으로 이해되었다.
헬조선론을 전자의 관점으로 이해하는 논의가 압도적으로 많은 반면, 헬조선론에 대한 청년들 자신의 발화는 많지 않은 편이다. 청년들은 대개 ‘헬조선인’의 사례로서 호명되는 편이다. 헬조선론에 대한 비판들은 서로 입장이 다르면서도, 헬조선을 운운하는 이들이(이때 ‘운운하는’ 주체는 대체로 ‘청년’으로 상정된다) 이전에 비해 순응적이고 수동적이며 소극적인 존재라는 판단을 공유하며, 무엇보다 헬조선론은 현실을 타개할 실질적 행동력이 부족하다는 점을 공통적으로 지적한다.6)
진영논리에 휩쓸리면서 헬조선론은 ‘청년세대’를 단일한 범주로 호명할 수 있다는 착시를 불러오는데, 이 착시의 연쇄작용으로 헬조선론은 기성세대와 청년세대의 대결구도 속에 위치 지어진다. 실제로 청년의 입장에서 분노와 좌절, 조롱의 대상은 ‘86’으로 묶이는 이른바 ‘아저씨/아재’ 즉 성별, 나이, 지위, 학벌이 ‘힘’이라 믿는 이들, ‘어린 여자’와 ‘철없는 아들’에게 맘대로 훈계할 자격이 있다고 믿는 이들임이 강조되기도 한다.7) 헬조선론이 내세우는 용어 가운데 ‘죽창을 들자’라는 말에는 사회적 구조에 대한 분노가 담겨 있지만, 거기에는 기존 운동권의 이미지를 희화화하는 유머코드도 내재해 있다는 한 청년논객의 언급8)이 말해주듯, 헬조선론의 의미는 진영논리와는 다른 맥락을 담고 있다. 이 맥락을 따지기에 앞서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점은 헬조선론을 대상화하려는 작업이 반복될수록 헬조선론의 세대적 대결구도의 성격이 강화된다는 사실이다. 헬조선론이 ‘세대론’의 범주로 휩쓸려들어가는 것은 헬조선론의 착시 지점을 들여다볼 전환적 시선이 아직 마련되지 않았음을 역설적으로 말해준다.
3. 청년의 토폴로지
공동체의 미래를 위해 기성세대가 채택했던 삶의 원리에 대한 후속세대의 혐오와 비판은 한국소설에서 부모에 대한 책임 묻기의 형태로 등장한다. 우선 짚어둘 것은 이 혐오와 비판을 세대 간 대결구도로 보아서는 곤란하다는 점이다. 더이상 계급, 성별, 지역을 초월한 ‘청년세대’는 없다. IMF 구제금융사태의 여파가 뚜렷해지기 시작한 2000년대 중반 이후로, 중산층의 몰락에 따른 빈부격차의 심화는 청년‘세대’의 파탄을 야기하게 되는데, 이후로 청년‘세대’의 ‘동질성’은 청년‘세대’ ‘내부’의 계급적, 지역적 위계로 대치, 분화되기에 이른다. 현재 한국사회의 위계구조는 대학 내의 위계구도로 변환되고 청년‘세대’ ‘내부’에서 반복되고 있다. ‘49 대 51’의 비율로 가시화되는 한국사회의 대책없는 분열 양상과 1% 대 99%로 심화되는 차별적 신분의 위계화 양상이 청년‘세대’에 의해 재연되기 시작한 것이다.9)
한국사회에서 청년을 둘러싼 세대 간 경계는 계급 간 경계로, 그 위계구도에 서울과 지방의 위계구도가 겹쳐지는 형태로 사회 전체의 계급화를 반복한다. 김금희(金錦姬)의 소설10)이 포착한 지방 청년의 일상풍경은 동일한 학령기의 청년들이라 해도 그들 사이에 교차점 없는 시차가 존재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김금희의 소설은 서울 변두리에서의 삶조차 허용되지 않으며 애초에 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이 없는 이들이 부모세대의 가난을 물려받으면서 어떻게 희망 없음의 일상을 살고 있는지 엿보게 한다. 어릴 때 살던 아파트의 아이들 사이에서 혼자만 실업계 고등학교에 간 것에 대한 분풀이는 유년의 친구가 이끈 다단계회사에서 신기루 같은 희망에 들뜨는 방식으로나 시도될 뿐이다. 대학도 못 간 자기 인생에 대한 책임을 아버지에게 따져물었을 때, 아버지가 “침착하고 위엄을 강조한 목소리로” “나는 네가 상상할 수도 없는 나이부터 일을 해왔다”고 말하면서 “공장을 다니면서도 지각 한번 한 적이 없다. 공장에서도 성실로 따지면 내가 사장 해야 한다고 해. 사람은 그렇게 사는 거다. 그렇게 허황되게 사는 게 아니야”(「아이들」, 127~28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그들이 애초부터 어떤 가능성도 남겨져 있지 않은 시공간을 살아왔기 때문이라고 해야 한다.
김금희 소설에 등장하는 아버지와 같은 삶은 황정은(黃貞殷)의 「상류엔 맹금류」(2013)나 『계속해보겠습니다』(창비 2014)에서 확인되듯, 도덕적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빈곤과 무능이 가장 큰 죄가 된 지금 이곳에서는 책임을 추궁당하고 윤리적 정당성이 되물어지는 대상이 되었다. 그들의 거부 혹은 저항은 전면적인 형태를 띠지 않으며 오히려 소극적이고 방어적이며 다소 퇴행적 면모를 보이는 게 사실이지만, 그 질책은 국가폭력에 희생된 부모를 향해서도 멈추지 않는다(권여선 『토우의 집』, 자음과모음 2014). 물질적으로 혹은 심리적으로 방치되었던 아이들이 부모세대가 다하지 못한 책임을 추궁하기 시작한 것이다.
부모의 적이 되어 부모를 거부하는 아이가 등장하는 박민정의 소설 「옛날 옛적 미국에서」(『유령이 신체를 얻을 때』, 민음사 2014)가 되짚어보는 것은 IMF 구제금융사태로 인한 삶의 전락이 어른들에게 무엇을 용인하게 했으며 어떤 불의를 실행하게 했는지, 그 후속세대가 어떤 상처를 불치병처럼 삶의 내부로 받아들여 감내하는 삶을 살게 했는지에 관해서다.
민주적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러나 그건 허상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아시겠지요. 위급 상황에서 누구도 민주적일 수 없어요. 민주적인 방식이라는 게 결국 만들어내는 건 바보 같은 결과물일 뿐이고요. 독재가 왜 필요했는지 아버지는 아시잖아요. 저는 허울 좋은 민주적 방식을 외치던 공립학교의 교사들과는 너무나 다른 선생님의 방식에 항상 안도를 느끼고 행복을 느낍니다. 선생님께서는 결코 의견을 묻지 않으세요.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으시고, 저희 스스로 그걸 원하게끔 만들어주십니다. 선생님이 지시하신 모든 것은 놀랍게도 저희가 원하는 모든 것이 되어 있어요. 저희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에요.(131~32면)
그러나 어머니, 아버지, 모르시겠지요. 저는 큰아버지보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더욱 원망스러워요.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해서도 안되는 일이에요. 저는 고작 아홉살이었어요. 우리 가족이 큰아버지에게 받은 도움이 아무리 크다 한들, 저를 그런 식으로 내어주시면 안되는 것이지요. 어머니, 아버지가 큰아버지의 세탁소에서 일하는 동안 사촌오빠들이 제게 했던 짓을 생각하면 저는 아직도 몸서리가 쳐집니다. (…) 아직도 의혹은 풀리지 않았어요. 어떤 방식의 용인이었든 어머니, 아버지가 저에 대한 그들의 추행을 모른 척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 여름 한철의 짧은 여행일 뿐이었어요. 우리 가족의 미국 시절은. 덮어버린다고 없어지지 않아요. 어머니, 아버지가 저를 때리고 만진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합니다./이제라도 아셔야겠지요. 제가 전부 알고 있었다는 걸./우리의 대공황 시절이었어요.(137~38면)
생존을 위해 약자의 희생이 불가피하다는 사회적 합의하에 폭력을 사회적으로 용인하는 것은 정당한가.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불가피한 악으로 용인되어도 좋은가. 그것을 통해 공동체는 과연 살아남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한국사회는 정치적으로 퇴행하고 경제적으로 전락하는 시절을 살아내면서 청년들이 아이에서 단박에 ‘속 깊은/세상 물리에 트인/차가운 사회의 뜨거운 맛을 알게 된’ 과정, 즉 순식간에 아이를 숨겨버리고 어른인 척하는 아이들을 키워내는 데 집중해왔다. 그러나 시대윤리를 깊이 내면화한 청년들을 가시화하는 ‘시각화 정치’가 지속되는 동안, 그러한 삶 이외에 청년에게 어떤 삶이 허용되는지, 다른 선택을 한 청년들의 실제 삶이 어떠한지는 교묘하게 누락해왔는지 모른다. 그 아이들이 어떤 상처를 품고 살아왔는지에 대해, 어떤 경험을 통해 왜소하고 소극적이며 자학적인 청년이 되었는가에 대해, 살아남기 위해 용인되었던 폭력이 얼마나 위험한 결과를 예기하는가에 대해 우리가 아는 바는 많지 않은 것이다. 박민정의 소설은 그 상처를 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 합의’라는 이름으로 지키고 싶었던 ‘공동체의 어떤 면모’가 기성세대의 바람과 달리 지켜지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 상처의 봉합과 은폐 시도가 공동체 전체를 상상할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게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해도 좋을 듯하다. 이렇게 본다면 청년들의 상처는 공동체 전체의 상처이며 공동체 전체가 돌이켜 기억하고 반복해서 따져물어야 할 폭력의 최저선의 문제이고, 무엇보다 공동체의 미래를 가늠하게 하는 은폐된 흑점이라 해야 한다. 부모에 대한 책임을 묻는 이런 장면들을 퇴행적 문제 해결법으로 치부해서는 곤란하다. 그것은 후속세대가 한국사회에 보내는 강력한 위험신호로 번역되어야 한다.
4. 예상과는 다른, 코즈모폴리턴의 출현
헬조선론은 지금 이곳의 시스템과 그것을 마련한 기성세대, 운용동력인 권위주의를 전면적으로 조롱하지만 대안적 제안을 담고 있지 않다. ‘헬〓조선’에 대한 대안적 논의가 지옥 탈출, 즉 탈조선론으로만 채워진 것은 그래서다. 다른 자리에서 지적한바 ‘부정적 사회감정’의 흐름에 대한 적실한 반응인11) 장강명(張康明)의 소설 『한국이 싫어서』(민음사 2015)는 주인공 ‘계나’가 ‘헬조선’에서 ‘탈조선’을 감행하는 데에서 시작된다. 삶의 터를 바꾸는 다소간 무거운 국경 넘기 문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인지 파란만장 이민 성공기인 『한국이 싫어서』는 시종일관 경쾌하다. “두마디로 요약하면 ‘한국이 싫어서’” “세마디로 줄이면 ‘여기서는 못 살겠어서’”(10면) 떠밀리는 심정으로 한국을 떠났으나, 이후 ‘계나’는 다시 한번 내면에서 우러난 자발성으로 한국을 떠난다.
한국을 떠나 타국에서 영주권과 시민권을 얻는 일, 한국 국적을 포기하는 일, 타국의 국민이 되는 일이 간단하고 단순하게 처리될 일은 아닐 터, 유쾌한 블로그 글쓰기 형식을 취하고 있음에도 계나의 탈조선 감행이 직면하게 될 문제에 대해 『한국이 싫어서』는 비교적 균형감을 잃지 않는다. 전세계 어디든 사람이 사는 곳이 별다르지 않다는 것, 불편하고 위험하거나 부당한 일을 도처에서 맞닥뜨릴 수 있다는 것, 타국의 시민권을 획득하는 일은 상용 국어를 바꾸는 일이자 인종적 차별문화에 깊이 진입하는 일임을 담담하게 기술한다. ‘헬〓조선’ 탈출을 마냥 낭만적으로만 그리지는 않는 것이다.
국외자라는 게 참 서럽구나, 그런 생각을 했고, 나는 이곳에서는 평생 국외자겠구나, 그런 체념도 했지. 그런데 난 한국에서도 국외자였어.
나더러 왜 조국을 사랑하지 않느냐고 하던데, 조국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거든. 솔직히 나라는 존재에 무관심했잖아? 나라가 나를 먹여주고 입혀주고 지켜줬다고 하는데, 나도 법 지키고 교육받고 세금 내고 할 건 다 했어.
내 고국은 자기 자신을 사랑했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그 자체를. 그래서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줄 구성원을 아꼈지. 김연아라든가, 삼성전자라든가. 그리고 못난 사람들한테는 주로 ‘나라 망신’이라는 딱지를 붙여줬어. 내가 형편이 어려워서 사람 도리를 못하게 되면 나라가 나를 도와주는 게 아니라 내가 국가의 명예를 걱정해야 한다는 식이지.(170면)
한국을 떠나는 순간 영원한 ‘국외자’로서 살게 될 것임을 예견하면서 계나가 환기하는 것이 한국사회에 대한 혐오와 거부감이었음은 기억해둘 만한 사안이다. 그녀의 회한은 한국에서도 자신이 국외자였음을 확인한 데서 생겨난다. 국가를 대상화하는 듯한 이런 인식보다 흥미로운 것은 계나에게 호주(오스트레일리아)가 노후대책이나 실적이 큰 투자처로 인식된다는 사실이다.12) 그녀에게 한국에서 호주로의 이동은 국경을 넘는 일이기보다는 실업연금, 의료비, 주거비, 교육비를 지원받을 수 있는 복지권(영주권)의 획득 가능성에 가깝다. 국가 단위의 호주와 한국이 아니라 그녀 자신이 관심을 둔 행복조건이라는 기준에서 호주와 한국이 비교되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보여주는 국가관을 두고, 1990년대에 사실상 헬조선을 부르짖으며 탈조선을 시도했으나 민족과 인종에 대한 피해의식을 떨칠 수 없었던 세대, “황색인이라는 콤플렉스에 시달리면서, 백인을 저주하면서, 그러면서 코스모폴리탄이 되려고 했”던13) 세대를 뒤로한 채, 2015년의 한국에서 “신분이 오를 가능성이 있는 방향으로”(123면) 움직이기 위해 한국에서 호주로 훌쩍 떠날 수 있는 그런 세대의 등장을 말해도 좋은가. 계나는 ‘트랜스내셔널’ 시대에 맞춤한 코즈모폴리턴(cosmopolitan)임에 분명하지만, 우리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코즈모폴리턴이다. 계나는 “지금의 생활이 주는 안정감과 예측 가능성”(121면) 때문에 불편하고 괴로운 상황을 적극적으로 바꾸려 하지 않는 헬조선의 잔류인들을 비난하는 동시에 동생이 미래의 삶을 예측하기 어려운 인디밴드 연주자를 남자친구로 선택한 것에 대한 우려를 표명한다. 그녀는 호주 정착을 원하면서도 ‘노력’(예를 들어 영어공부)을 게을리하거나 불성실한 태도를 보이는 이들에게 비난의 시선을 던진다. 계나의 시선과 발언을 통해 『한국이 싫어서』는 약간의 모험심과 도전정신이 있다면 누구에게나 탈조선의 가능성이 열려 있음을 강변한다. 신자유주의 맞춤형 근대정신으로 무장한 계나가 실행한 탈조선은, 그러니까 장소를 이동한 헬조선의 이식에 다름 아니다.
이렇게 보면 헬조선을 벗어날 수 있는 해법처럼 제시된 이 이민 성공담은 에누리 없이 ‘개천에서 용 난’ 주인공들의 여느 ‘성공 스토리’와 다르지 않다. 『한국이 싫어서』는 미래 구상이 불가능한 한국의 절망적 현실을 포착하고 지금 이곳의 시대감정에 발빠르게 반응함으로써 시대와 소통하는 문학의 가능성을 보여주면서도, 결과적으로 ‘일베’이거나 ‘잉여’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 땅 청년들의 삶을 누락시킨다. 그로 인해 자기계발의 미덕을 홍보하고 신자유주의 통치술의 내면화를 권유하면서 호주를 배경으로 성공신화를 다시 씀으로써 결과적으로 근대정신의 여전한 유효성을 선언하게 된다. 무수히 많은 자기계발서 더미 위에 던져진, 또 한권의 소설 형식 자기계발서 매뉴얼이 된 것이다.
5. 신자유주의 통치술의 부수효과, 신인류의 역습
장강명의 『한국이 싫어서』가 근대정신을 유포하는 계몽서사의 변형태이자 역설적 의미에서 신자유주의 자기통치술의 교본임을 지적하는 일보다 우선되어야 할 것은 이 소설이 의도와 무관하게 시민권 혹은 국가와 국민이 취사선택될 수 있는 상품처럼 이해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사실일 것이다. 헬조선론은 사회의 모순과 한계를 가시화하는 통찰의 시선임에 분명하지만, 미래구상의 면모로 보아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회비판론인 것이다.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헬조선론의 어디에서도 미래구상을 발견할 수 없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는 게 아니라 미래에 대한 ‘구상’이 없다.14) ‘헬조선’론에 미래구상이 없다는 것은, 『한국이 싫어서』의 계나가 보여주듯, 시민권이 버리고 취할 수 있는 대상으로 인식되기 시작하면 이 땅에서의 미래를 구상할 특별한 이유가 사라진다는 것을 뜻한다. 이곳의 문제는 다른 시민권을 찾아 이곳을 떠나기만 하면 해결될 수 있는 것이 된다.
체제비판과 변혁적 투쟁의 의의가 시대변화에 따라 변질되거나 희미해졌고, 실천적 운동이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개인의 희생이라는 결과물만을 남겼음에도 비판담론의 계보가 새롭게 다시 구축될 수 있었던 것은 사회비판의 저변에 깔린 공동체의 미래에 대한 희망이 끝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금만 거슬러올라가봐도, 80년대 운동권이 90년대를 만나면서 보여준 ‘시대와의 시대착오적 불화’의 면모를 솔직하고 가식없이 기술한 공지영(孔枝泳)의 소설 『고등어』가 보여주듯, 수줍은 청년을 열사로 만들고 유쾌한 청년을 고문의 후유증에 시달리게 한 그 모진 시절을 두고 “자기만 위해서 살지 않을 수도 있는 거구나, 이토록 이타적인 공동체를 이룰 수도 있는 거구나.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라는 게 참 대단한 거구나”15)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었다. 상처와 환멸만을 남겼을 뿐임에도 ‘절망하지 않는 사람들, 잊지 않는 사람들, 죽어간 친구와 미쳐간 친구와 그런 사람들을 기억하는 이들’이 있으며 시대의 부채를 잊지 않은 이들이 이후의 시대를 이끌어갈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건…… 바로 인간에 대한 신뢰”16)였다. 헬조선/탈조선론에 미래구상이 없다면, 우선 그것은 인간에 대한 이 신뢰가 상실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보다 주목할 사실은, 태어나면서 주어진, 권리이자 의무의 원천인 국민이라는 이름을 싫어도 견뎌야 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이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국가와 개인의 관계에 대한 역진 불가능한 변화의 기미가 포착된다고 해야 하는데, 국가, 민족, 혹은 조직을 위한 개인의 희생을 무작정 강요하기는 어려운 시대가 되고 있는 것이다.
2015년 9월 JTBC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이 싫어서 다른 나라로의 이민을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2만1천명의 응답자 중 88%가 ‘그렇다’고 답했다. 2000년대 중반부터 감소추세이던 이민에 대한 관심이 다시 늘고 있으며 이민을 고려하는 연령대도 낮아지고 있다. 이민은 국내를 넘어 글로벌한 이슈 가운데 하나다. 전세계적으로 양질의 삶을 추구하는 이들이 국가를 취사선택하는 경향이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17) 탈조선이 이민의 형태로 실행될 수 있다면, 이는 자본과 기술, 언어 등 다른 시민권을 획득할 가능성이 열려 있는 계층에나 허용되는 것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제도적 탈주 여부나 탈조선을 누가 하느냐, 얼마나 현실성이 있느냐를 따지는 일은 탈조선론이 야기한 문제에 대한 적절한 대응이 아니라고 해야 한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는 폭력적 말로 제도와 사회에의 순응을, 자기계발을 통한 ‘정규적’ 삶의 포기를, 신자유주의가 꿈꾸었던 새로운 인간형으로의 재탄생을 강요당했던 이들의 반격이 탈조선의 이름으로 시작되고 있음을 감지할 필요가 있다. 헬조선/탈조선론으로 구현된 한국사회에 대한 전면적 비판은 미래구상 자체도 폐기할 수 있을 만큼 전혀 다른 담론적 지평을 열고 있는 것이다. 이를 두고 ‘살게 만들고 죽게 내버려두는’ 신자유주의 통치술이 일상을 미시적으로 장악해가면서 발생한 부수효과라 말해도 좋다. 공동체를 파괴하고 내부 구성원을 모두 개별화해서 자기책임의 족쇄로 순치시키려는 신자유주의 통치술은 이 땅에 사는 모든 이를 무한경쟁의 지옥에 밀어넣었고, ‘죽게 내버려둔’ 지옥을 통과하면서 ‘혼밥’(혼자 밥 먹기)을 즐기고 친구 없이도 자족하며 공동체의 소속감 없이도 자유로운 이들을 ‘살게’ 했다. 자기계발에 철저한 개별화된 존재의 발명에 집중한 신자유주의 통치술은 국가/국민, 시민을 취사선택의 사안으로 여기는 새로운 인종을 만들어내는 중인 것이다. 적어도 의식 차원에서라면 국경 넘기를 자유롭게 상상하는 전혀 다른 인간형이 출현했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한국사회의 ‘글로벌 스탠더드’로의 도약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역설되고 있었지만, 실상 신자유주의 통치술의 요청으로 등장한 신인류가 한국사회의 미래를 상상하는 자리에서 역설적으로 최대 위협이 되는 흥미로운 상황을 목도하게 된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시민권을 취사선택할 수 있는 신인류의 삶은 체제와 제도의 조율 및 단련에 유용한 자극이 될 노마드적 삶이나 새로운 공동체의 구상을 가능하게 할 협정적 삶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18) 이 땅에서 ‘노오력’을 거듭해도 ‘2등시민’인 이들이 국경 바깥으로 떠밀리듯 내쳐진다면, 결과적으로 남겨진 자들이야말로 끝없이 떠밀리는 자들이 아닐 수 없다. 실질적으로 시민권의 취사선택이 가능한 시대가 열리는가의 여부와는 무관하게, 근대 혹은 민족국가를 둘러싼 인식의 봉인이 깨지고 국가와 시민권에 대한 대상화가 시작된다는 것은, 지금 이곳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시도의 필요성이 현저하게 약화되는 것임을 의미한다. 애국심에 호소하면서 사회의 모순과 불합리한 면모 들을 임기응변식으로 봉합한 채 알면서도 속고 속이는 미봉책은 일시적 효과도 기대하기 어렵다. 공동체를 살리기 위한 비판적 실천운동의 동력을 마련하기도, 그것을 지속적으로 이어가기도 어려워지는 것이다.
국가와 개인의 관계에 대한 역전적 인식의 결과가 악몽인 것은, 그런 인식의 연쇄반응이 한국사회를 탈출구 없는 지옥으로 남기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자칫 민족국가 ‘이후’에 대한 상상이 가로막히게 될 수 있으며, 우리의 상상과는 전혀 다른 의미의 ‘트랜스내셔널’ 시대가 열리게 될지도 모른다. 공동체, 민족, 국가에 대한 전혀 다른 상상이 시작되지 않는다면, 김사과의 말처럼, 탈출구는 없고, 이제 탈출은 불가능하게 될지 모른다.19) 그러나 어쩌면 탈출 불가능성이라는 판단 혹은 그로부터 야기되는 전율과 공포는 신인류의 삶이 예측을 벗어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그 의미를 기성의 시선으로만 파악하는 데에서 오는 것인지 모른다. 어정쩡한 타협을 시도하는 것은 절망의 끝을 직시하는 자세보다 위험하다. 핀이 어긋난 접근법의 조정이 필요한 것이다. 전혀 다른 시각으로 헬조선/탈조선론이 울리는 경고의 메시지에 귀 기울이려는 노력이 절실히 요청되는 때다.
1) 조동주 「2030이 부르는 또다른 대한민국 ‘헬조선’」, 『동아일보』 2015.7.10; 곽아람 「망한민국·헬조선… 우리 청년들은 왜, 대한민국을 지옥으로 부르게 됐나」, 『조선일보』 2015.8.21.
2) 하지율 「지옥보다 못한 ‘헬조선’ “노오력은 해봤냐”는 꼰대들」, 『오마이뉴스』 2015.8.6; 이효상 「군대문화·갑질·여성혐오… 정치·조직·일상에 만연한 ‘미개’」, 『경향신문』 2016.3.21; 문강형준 「픽 미 업」, 『한겨레』 2016.2.26.
3) 박은하 「헬조선에 태어나 노오오오오오력이 필요해」, 『경향신문』 2015.9.4.
4) 헬조선론은 담론만으로 전모가 파악되지 않는다. 강고해지는 ‘금수저/흙수저’의 위계와 이로부터 야기되는 분노와 적대감, 좌절감이 ‘죽창 앞에선 모두가 평등하다’는 문구를 내세운 웹싸이트 개설(www.hellkorea.com)로, ‘흙수저 키우기’ ‘흙수저 빙고’ ‘내 꿈은 정규직’ 같은 인디게임 개발로도 이어졌다.
5) 『실천문학』 2015년 겨울호 특집 ‘미생에서 송곳으로’; 『세계의문학』 2015년 겨울호 특집 ‘헬조선, 왜 한국인은 한국을 싫어하는가’; 『황해문화』 2016년 봄호 특집 ‘헬조선 현상을 보는 눈’과 문화비평이 기획되었고, 『경향신문』에서 창사 70주년 기획 ‘부들부들청년’으로 20~34세 청년 103명을 다섯차례 만난 초점집단면접 결과 검토가 시리즈로 연재되었고(2016.1.2~3.25), SBS 스페셜 「헬조선과 게임의 법칙: 개천에서 용이 날까용?」(2016.5.8)이 방영되었다.
6) 김광일 「늙는다는 것은 벌(罰)이 아니다」, 『조선일보』 2015.9.22; 박노자 「‘헬조선’에서 민란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 「한겨레』 2015.9.29; 장하성 「‘헬조선’을 ‘헤븐 대한민국’으로」, 『중앙일보』 2016.1.12.
7) 문강형준 「‘아저씨’적인 폭력」, 『한겨레』 2015.9.25.
8) 노치원 「‘헬조선’이 그렇게 궁금하세요?」, 『중앙문화』 2015.12.7.
9)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오찬호, 개마고원 2013), 『진격의 대학교』 등 한국사회가 처한 난국에 대한 논의가 대학생과 대학으로 집중되는 것은 타당하다. 오해를 줄이기 위해 덧붙이자면, 대학과 대학생에 대한 논의가 대학 바깥이나 대학생이 아닌 존재들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고졸’청년 역시 학벌사회라는 인식틀 내에 위치하며 그 차별적 위계를 고스란히 경험하는 존재다.
10) 김금희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 창비 2014.
11) 장강명의 『한국이 싫어서』에 대해서는 「공공선을 위한 감정의 상상력: 차마 하지 못하게 하는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가」(『문학선』 2015년 겨울호)에서 두루 다룬 바 있다. 이 글에서는 『한국이 싫어서』에 도사린 탈조선론의 면모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12) “지명인 나더러 시민권을 딴 다음에 한국으로 돌아오라고 했어. (…) 호주 영주권을 우리 노후대책으로 삼자는 거였지. 호주 국민이 되면 놀고 있어도 실업연금 따박따박 나오고 큰 병 걸리면 병원비 다 지원되거든. 집 처음 살 때는 2만 달러쯤 돈이 나오고, 대학생 자녀 학비도 몇만 달러가 지원되고, 하여튼 좋아. 호주 영주권 가치가 한국 돈으로 10억원쯤 된대.”(142면)
13) 장정일 『아담이 눈뜰 때』, 미학사 1990, 57면.
14) 오해를 줄이기 위해 덧붙이자면 현실의 층위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이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공동체를 위한 개별자들의 노력이 실질적으로 사라졌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세월호참사의 현장인 팽목항을 지키고, 제주 강정 해군기지 건립이나 밀양 송전탑 건설을 반대하고, 위안부 소녀상을 지킨 청년들을 떠올려보더라도, 청년들에게 희망과 미래가 없다는 말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정반대의 경우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사히신문사에서 펴내는 월간지 『론자(論座)』 2007년 1월호에 31세 청년 아까기 토모히로(赤木智弘)가 「희망은 전쟁」이라는 글을 기고한 바 있다. 전쟁이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더이상 미래를 꿈꿀 수 없다는 이 글의 선언은 일본 지성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이 글은 다소간 종말론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겨누어야 할 대상이 잘못되었다고 해야 하지만(권혁태 『일본의 불안을 읽는다』, 교양인 2010, 357~62면), 분명한 점은 여기에도 다른 미래에 대한 열망이 드리워져 있었다는 것이다. ‘헬조선’론에서 미래구상에 대한 단서를 발견할 수 없음은 이러한 비교 맥락에서다.
15) 공지영 『고등어』, 웅진출판 1994, 130면.
16) 같은 책 131면.
17) 이향영·백선아 「‘헬조선’ 떠나려는 2030」, 『머니위크』 2016.2.26.
18) 지그문트 바우만 『이것은 일기가 아니다』, 이택광·박성훈 옮김, 자음과모음 2013, 57면.
19) 김사과 『0 이하의 날들』, 창비 2016, 10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