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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식물적 주체성과 공동체적 상상력

『채식주의자』에서 『소년이 온다』까지, 한강 소설의 궤적과 의의

 

 

신샛별

문학평론가. 최근 평론으로 「부모의 자리에 서서: 최근 소설이 ‘세월호’를 사유하는 방식」 등이 있음. venus860510@naver.com

 

 

1. 인간의 추락과 소설의 고통

 

‘짐승’이 인간에 대한 도덕적 판정의 표현으로 기능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짐승’은 함량 미달의 비열하고 저급한 인간을 에둘러 비난하는 욕설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모두가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살고자 하는 시대에, 벌 수만 있다면야 개가 된들 어떠냐고 생각하는 시대에, ‘짐승’은 그리 모욕적인 말로 들리지 않는다. 1970년대 후반 박완서(朴婉緖)는 『도시의 흉년』(1979)에서 한국전쟁 이후 물질적 만족에만 급급하게 된 한국인의 모습이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먹는다’는 말에 꼭 들어맞는다고 쓴 적이 있다. 기실 경제성장은 유사 이래 일관된 국가적 목표였고, 생존을 유일의 과제로 여기고 살아온 한국인의 정신을 잠식한 불안과 공포의 수준은 여전히 전시(戰時)에 육박한다. 아이러니하지만 한국인에게 ‘짐승’은 ‘인간답게’ 살기 위해 불가피하게 써야만 하는 가면이었다고 이해해볼 여지가 있는 셈이다. 그러나 제때에 벗지 못한 그 가면은 어느새 본연의 얼굴이 되었고, 최근 청년세대의 실감에 비추어 본다면 우리의 얼굴은 점점 더 흉측해지고 있는 듯하다. ‘개’처럼 성실히 일해볼 기회도 얻기 어려운 그들은 스스로를 짐승보다 못한 ‘벌레’로 취급하기에 이르렀다. 일베충, 사시(사법고시)충, 의전(의학전문대학원)충, 한남(한국남자)충, 노인충, 진지충 등 ‘충()’이라는 접미사를 붙여 서로를 명명하고 사회에 대한 반감을 표현하는 그들의 모습은 “오늘날 한국사회에서는 동물화를 넘어 더 하찮은 벌레화가 진행되고 있다”1)는 참혹한 진단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이같은 사회학적 징후(sign)의 진단은 병을 치료하는 데에는 요긴할지언정 예방하기에는 너무 늦은 것이다.2)

학문이 의사처럼 사회적 징후를 관찰하고 진단할 때, 문학은 환자로서 최선을 다해 사회를 ‘앓는다’. ‘다른 세상’을 상상하기에 앞서 ‘이 세상’을 가능한 한 넓고 깊게 경험해보려 애쓰는 문학은 경미하거나 부분적인 증상(symptom)으로만 파악되는 ‘다음 세상’을 먼저 앓아버린다.3) 그럴 때 문학은 글이 아니라 차라리 몸이고자 한다. 2008년 발표된 「벌레들」이라는 단편소설에서 김애란(金愛爛)은 가난한 신혼부부의 심리적 불안과 공포를 끝없이 출몰하는 벌레에 대한 혐오와 망상으로 상징화해 보여주었는데, 이 소설의 인상적인 마지막 장면에서 임신 중이던 화자는 거대한 쓰레기더미의 풀숲에서 재앙처럼 쏟아져나오는 벌레들 사이를 빠져나오지 못한 채 괴로워하며 출산의 순간을 맞는다. 요컨대 출산 직전인 그녀의 몸에는 벌레의 처지와 같은 누추한 삶의 조건에서 끝내 벗어날 수 없으리라는 비관적 결론에 다다른 청년세대의 절망과, 태어나면서부터 벌레의 행렬에 불가항력적으로 동참하게 될 미래 아이들의 비극적 운명이 포개져 있었던 것이다. 사회적 증상에 기민하게 반응해온 작가 특유의 예감으로 끝났다면 좋았겠으나, 2014년의 우리는 충분히 인간적으로 존중받지 못한 아이들의 생명이 스러져가는 것을 황망하게 지켜보았고, 2016년의 우리는 ‘벌레’라는 말로 타인을 비하하고 자신의 처지를 자학적으로 표현하는 청년들을 착잡한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우리는 분명 추락하고 있다. 인간에서 동물로, 동물에서 벌레로, 그리고 또 무언가로.

이토록 참담하게 추락해가는 와중에 한강(韓江)의 소설을 재독하는 것은 고통스럽지만 절실한 일이다. 이 글에서 중점적으로 다룰 『채식주의자』(창비 2007)와 『소년이 온다』(창비 2014)4)는 ‘인간’과 ‘비()인간’ 혹은 ‘반()인간’의 경계를 흐리면서 인간이 얼마나 끔찍한 차별과 배제, 폭력과 학살 위에 제 입지를 다져왔는가를 보여주는데, 그럼으로써 그의 소설은 ‘인간’이라는 개념의 의미와 ‘인간적’으로 산다는 것의 가치를 근원적인 차원에서 의문에 부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으로서 살다가 인간답게 죽는 것이 가능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다각도의 고민과 노력을 해왔고 또 그것이 어느정도 성공했다고 자부하는 휴머니스트들에게 한강의 소설은 일면 견디기 힘든 것이다. 그의 소설에서 인간은 종종 짐승이나 벌레, 심지어 괴물에 가까워지고 자유, 평화, 공존 같은 재래의 휴머니즘적 가치들은 실감 없이 부유하는 기표에 불과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강의 소설이 전달하는 고통은 앞에서의 표현을 빌리자면 ‘다음 세상의 증상을 미리 앓아본’ 결과로 생겨난 것들이다. 한강의 소설을 통해 앓아냈으므로 비로소 알게 된 것들과 더불어 우리는 추락 중인 인간을 구원할 특별한 상상력 하나를 얻게 된다.

 

 

2. 식물적 주체성의 몇가지 층위

 

한강의 소설들은 물리적인 강제와 압박뿐 아니라 언어, 시선, 인식, 사유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종류의 폭력을 느끼고 생각하고 보여주는 일에 심혈을 기울여왔다. 한강이 발견한 매우 ‘인간적인’ 세계에서 일어나는 가시적·비가시적 폭력의 현장들은 ‘인간성’에 대한 안일한 기대와 희망을 무력하게 만들고, 삶의 방식의 총체적 변화를 요청한다. 특히 『채식주의자』는 인간성 내부에 존재하는 동물성을 가부장적 가족제도, 육식문화, 정신병원 등과 같이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로부터 추출해냄으로써 ‘우리 안의 타자’의 존재를 문면에 드러내고 그들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데 성공한다. 이와 관련해 남성/여성, 서양/동양, 정신/신체, 정상/비정상 등의 이분법적 구도하에서 이성(理性) 중심의 인간 개념을 형성·발전시켜온 휴머니즘적 전통이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였고 그에 대한 철학적 검토와 대응이 이른바 ‘포스트휴머니즘’의 영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최근에 『채식주의자』가 세계적인 주목과 호평을 받은 것은 시사적이다. 포스트휴머니즘에서 말하듯이 인간의 이름으로 자행된 전쟁, 테러, 홀로코스트 등의 사건들은 은폐 또는 잠재돼 있던 인간 내부의 동물성이 외부로 표출된 극적 계기였고, 신자유주의적 질서의 급속한 확산과 함께 인간의 동물성은 숨기거나 부정할 것이 아니라 생존과 경쟁에 적합하고 필요한 가치 또는 목표로 조정되었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는 식의, 우리 시대에 넘쳐나는 자기계발의 논리들이 대개 동물적 주체성의 강화를 촉구하는 것은 이러한 시류의 반영일 것이다. 『채식주의자』가 내장하고 있는 인간학은 그 자체로도 탐구할 가치가 있지만, 동물적 주체성의 전면적 출현을 겪으면서 더 큰 주목을 받고 있는, 인간성과 동물성의 경계 자체를 재고하는 사유의 실험들5)에 견주어볼 만한 것이기도 하다.

연작소설 『채식주의자』와 그 출발점이 된 단편소설 「내 여자의 열매」에 강렬하게 기입돼 있는 ‘식물성’의 희구가 인간성에 내재된 동물성에 대한 폭로이자 저항이라는 점은 이미 여러 평자가 논한 바 있다.6) 기왕의 지적들대로 『채식주의자』는 일종의 ‘반()동물’소설로서, 육식으로 상징되는 남성성 위주의 근대성에 대한 비판을 품고 있다는 것을 다시 거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7) 다만 『채식주의자』를 읽으며 새롭게 주목할 점은 한강 소설의 형식 미학과 그것이 내용과 결합해 발휘하는 특정한 효과에 대해서다. 우선 한강의 소설에서 식물은 온갖 종류의 폭력을 감당해내고 마침내 다른 생으로의 길을 내는 존재로 자주 등장한다. 말하자면 생존에 몰두하는 동물의 세계가 이기, 탐욕, 분노, 경쟁, 살기 등으로 들끓는 동안, 식물의 세계는 죽음 너머에 고요하고 평온한 삶을 마련해두고 있는 것이다. 식물을 묘사하는 풍부하고 다채로운 이미지들이 자주 신화적 상상력에 의지하는 것은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신화 속에서 위험한 상황에 처하거나 폭력으로 희생된 존재는 상당수 식물로 변신한다. 아네모네가 된 아도니스, 히아신스가 된 히아킨토스, 월계수가 된 다프네처럼 식물로 변신한 신화 속 인물들은 그 변신 덕분에 죽음 이후에도 계속 살아갈 수 있게 된다. 동물적 세계의 정점 혹은 한계에서 식물을 떠올리는 한강의 상상력은 죽음으로 수렴되는 불가항력적인 인간 조건을 변신 모티프를 통해 상상적으로 극복해온 문학의 오랜 전통에 연접해 있다.

그러나 『채식주의자』에서 한강은 (신화에서 그러했듯) ‘생명을 지닌 비인간’의 형상 정도로 식물을 활용해온 문학적 관습에서 벗어나 더 급진적인 방식으로 ‘식물성’을 사유한다. 이 소설에서 식물과 인간은 자신의 경계를 지우고 서로의 영역을 침범해 ‘식물인간’으로서 나타나고 있다. 『채식주의자』 연작 중 두번째 작품인 「몽고반점」(2004)에서 ‘영혜’의 몸을 뒤덮은 화려한 꽃들과 몽고반점의 푸른 빛깔로 묘사되는 식물과 인간의 기이한 혼합은 이 소설이 식물성과 인간성이 과연 한데 섞일 수 있는가를 자문하고 실험하는 내용임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요컨대 식물성을 체현한(embodied) 인물을 발명함으로써 한강은 식물성이 동물성 못지않게 인간 내부에 존재하는 강력한 욕망의 한 흐름일 수 있음을 보였다. 이 설정은 『채식주의자』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차례로 시험에 빠뜨린다. 먼저 영혜가 ‘동물로서 살 것인가, 식물로서 살 것인가’라는 물음에 직면하고, 그녀의 가족들은 그 질문을 ‘영혜 곁을 떠날 것인가 남을 것인가’라는 형태로 이어받는다. 영혜가 식물로 살기 위해서 또 그런 영혜 곁에 가족들이 남기 위해서는 가부장제, 폭력, 육식의 속성을 띠는 동물적 삶의 방식을 통째로 폐기해야 한다. 영혜는 일단 육식을 거부하기로 결단하지만, 식욕이 그러하듯 자기 안에서 끊임없이 분출되는 동물성의 흔적과 외롭게 사투하는 일은 그녀가 죽기 직전까지 감당해야 할 몫이 된다.

이렇게만 요약하면 『채식주의자』의 함의를 제목의 범주 안에 갇혀서 파악하는 일이 되고 만다. 『채식주의자』는 ‘식물성’을 사유하는 소설이라고 했는데, 식물성의 핵심이 채식(육식 거부)에만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동물성과 식물성의 생물학적 규정뿐 아니라 그로 인해 파생되는 요소들도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으로 간주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종속영양생물인 동물은 먹이가 될 다른 생명체를 찾아 이동할 수밖에 없지만 독립영양생물인 식물은 제자리에 머무른다는 점도 인간학적으로 의미심장한 함의를 갖는다. 덧붙여 동물의 성장이 일정기간 동안 이루어지고 끝나는 데 반해 식물의 성장은 지속적인 자기갱신을 통해 그보다 훨씬 더 긴 기간 동안 가능하다는 점도 빠뜨릴 수 없는 차이다. 『채식주의자』에도 이러한 이동성(동물)과 부동성(식물)의 구도, 일시성(동물)과 항구성(식물)의 구도로 들여다봐야 할 요소들이 있다.

영혜가 과거의 자기 자신을 부정하면서 동물성을 거세해나가는 끝없는 자기갱신의 과정을 통해 존재론적 질문 앞에 내내 ‘머물러’ 있었던 것과 다르게, 그녀의 가족들은 그녀의 곁을 빠르게 ‘떠난다’. 표제작인 「채식주의자」(2004)는 영혜의 남편을 화자로 설정해 그가 아내의 곁을 떠나게 된 속내를 들려준다. 그는 육식 거부를 선언한 영혜의 결정을 처음부터 못마땅해한다. “그녀에게 저토록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인 구석이 있었다니. 저렇게 비이성적인 여자였다니.”(20면) 육식을 ‘평범한’ 것으로 여기는 그에게 채식은 ‘특별한, 과도한, 불편한’ 것이다. 동일성으로 회수되지 않는 낱낱의 차이들을 두려워하는 그는 “한번도 들어가본 적 없는 그녀의 머릿속이, 그 내부가, 까마득히 깊은 함정처럼 느껴졌다.”(33면) “까마득히 깊은 함정”이라는 강한 표현이 암시하듯, 통제할 수 있게 ‘점령’되지 않는 모든 것을 그는 질색한다. 과하다 싶을 정도로 자기확신에 차 있는 것으로 설정된 남편의 어조는 다분히 의도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의 시각에서 영혜의 결단은 이해해볼 여지가 없는 종류의 것이다. “구역질이 났다. 이 모든 상황이 징그러웠다. 현실이 아닌 것 같았다. 놀람이나 당혹감보다 강하게, 아내에 대한 혐오감을 느꼈다.”(55면) 기어이 아내를 보며 “나는 저 여자를 모른다”(64면)고 주저없이 고백하는 남편의 모습에서 우리는 타자화의 기본 도식을 본다. ‘점령되지 않은 것은 혐오스러운 것이다’. 그러므로 영혜와 남편의 갈등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우리 안의 타자’가 던지는 존재론적 질문 앞에서 인간은 머무르거나 떠날 수 있다. 머무른다는 것은 그 타자성과 대면하면서 부단한 자기갱신을 시도한다는 것이고, 떠난다는 것은 점령되지 않는 타자를 거부함으로써 기왕의 자기로 계속 존재하기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채식주의자』에서 이 두 방향성은 식물적인 것과 동물적인 것으로 계열화돼 있다.

그런데 여기서 이 머무름과 떠남의 결단이 펼쳐지는 영역을 ‘시간’이라고 생각해보면 또다른 의미가 파생된다. 특정한 시간에 머무른다는 것과 계속 다른 시간 속으로 흘러간다는 것은 무엇이며 그것은 왜 중요한가. 이런 맥락에서 보면 『채식주의자』 연작 중 마지막 작품인 「나무불꽃」(2005)에서 영혜의 언니가 보여주는 변화는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식물인간’으로 살게 된 영혜를 가족 중 유일하게 지켜봐주고 보호해주던 언니는 남편의 비디오아트 작품에서 남편과 동생의 정사 장면을 보게 된다. 큰 충격을 받은 그녀는 남편과 헤어지고 동생을 정신병원에 보낸 뒤 “시간과 함께 모든 것을 극복할 수”(169면) 있으리라 믿으며 일상을 꾸려간다. 그런데 음식섭취를 거부하고 숲에서 비를 맞으며 물구나무서기를 하는 등 영혜의 기행이 심해지자 병원에서는 치료를 포기하고 어쩔 수 없이 그녀는 동생에게 신경을 쏟게 된다. 병원의 시선에서 보자면 영혜의 상태는 그야말로 ‘악화’일 뿐이지만 영혜의 입장에서 그것은 ‘식물인간’에서 ‘인간’의 영역을 완전히 탈각시켜 온전한 ‘식물’ 그 자체에 이르고자 하는 지난한 투쟁이다. 그러나 언니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식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죽어가는 과정에 불과한데, 그녀는 죽음을 무릅쓰는 동생의 모습을 보면서 시간의 힘으로도 도저히 이길 수 없는 무언가가, 시간보다 강하게 삶을 장악하는 어떤 힘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는다. 어릴 적 아버지의 폭력을 피해 동생과 낯선 곳으로 달아났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보았던 ‘빛으로 불타는 나무’의 이미지로 상징화돼 있는 그 힘은 지금까지 그녀의 삶을 지휘해온 성실, 인내, 배려 같은 덕목들을 단박에 거슬러 ‘생존’이 아니라 ‘죽음’ 쪽으로 그녀를 몰아간다. 꼼짝없이 그녀는 습관이기를 넘어 이제는 관성이 돼버린 삶을 중단해야만 했다. “이 모든 것은 무의미하다. 더이상은 견딜 수 없다. 더 앞으로 갈 수 없다. 가고 싶지 않다.”(200면)

오직 시간의 흐름을 따라, 거기에 기대어 살아온 삶 속에 무의미라는 메울 수 없는 구멍이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린 그녀가 ‘거꾸로 돋아나기 위해’ 식물로 태어나야 한다고 말하는 동생을 받아들이는 『채식주의자』의 마지막 장면은 차라리 그녀 자신의 삶의 갱신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죽음을 앞두고 피를 토하는 영혜 곁에서 그녀는 숲을 거닐었던 어느 새벽과 그때 맨발을 적신 이슬을 떠올린다. “그녀는 눈물 따위 흘리지 않았다. (…) 너덜너덜한 몸뚱이를 적시는, 바싹 마른 혈관으로 퍼지는 그 차가운 물기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결코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이 다만 그녀의 몸속으로, 뼛속까지 스며들었을 뿐이다.”(220~21면) 끝내 이해할 수 없었지만, 몸속과 뼛속에 스며든 물기에 반응했던 그녀의 몸은 이미 식물성에 감염된 것이 아닌가. 식물성에 감염된 영혜의 언니는 동생이 몸에 난 상처와 대면하여 이후의 삶에 대해 어떤 결단을 내렸듯이, 삶에 난 구멍을 직시하고 그것이 던지는 존재론적 질문과 마주 서게 된다. 그녀는 시간의 흐름에 자신을 맡기는 망각의 회복력에 의존하지 않고, 삶의 갱신을 요청받는 바로 그 순간에 정직하게 멈춰선 것이다. 어쩌면 시간(Chronos)이라는 것 자체가 끊임없이 다른 생명체를 잡아먹으며 흘러가는, 이동과 점령을 본질로 하는 동물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런 시간동물과 싸우는 일 자체는 언제나 식물적인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 소설이 제시하는 식물성의 또다른 함의는 바로 특정한 시간에 머물러 있는 일, 그러니까 망각에 맞서는 기억 그 자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소설의 말미에서 그녀는 ‘시간 바깥의 삶’, 흡사 꿈과 같은 ‘식물적 삶’에 눈을 뜬다. 굶주린 동물처럼 만물을 집어삼키는 시간의 흐름에 저항하고, 시간에 ‘점령’당하지 않는 어떤 곳으로 가는 것, 그것이 바로 『채식주의자』의 궁극적 지향이 아니었을까.

이로써 『채식주의자』가 긍정하는 ‘식물적 주체성’의 함의는 단순한 육식 거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동’과 ‘점령’과 ‘망각’에 맞서는, ‘정주’와 ‘갱신’과 ‘기억’에 있음을 확인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소년이 온다』는 돌출적인 작품이 아니라 『채식주의자』로부터 10년 동안 숙성된, 그야말로 ‘식물형(植物形) 소설’에 가깝지 않은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3. 기억의 의식(儀式)과 탈신(脫身)의 감각

 

비유하자면 『소년이 온다』는 한그루의 나무다. 『채식주의자』에서 영혜의 몸이 그랬듯이 『소년이 온다』는 어떤 근원적 폭력을 거대한 줄기로 이야기의 중심에 품고 있다. 올해로 서른여섯개의 나이테를 가지게 된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서라면 더는 새롭게 밝혀질 사실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고 믿는 그 이야기들은 『소년이 온다』에서 새로운 표현을 얻어 총 일곱개의 장으로 가지처럼 뻗어나 있다. 그 가지마다에서,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학살과 유린의 이미지들은 인간의 존엄함이 고귀한 빛을 발하는 숭고한 순간으로 바뀌어 있으며, 참혹한 현장에 나뒹굴던 상처 입은 몸은 인간존엄의 확실한 물증으로 남아 있다. 이 소설에서 각 장에 등장하는 일곱명의 서로 다른 주인공들은 모두 ‘19805월 광주’라는 같은 시간을 살아간다. 그날의 죽음과 분리되지 못한 채 우울증적 상태를 살아가는 그들의 삶에서 시간은 모든 것을 잡아먹는 망각의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소설 속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이 소설 자체도 광주민주화운동을 과거의 것으로 확정하는 회고나 증언의 서사가 아니라 805월에 대한 장례를 지연시키는 만가(輓歌)가 되고자 한다.

앞에서 한강 소설이 제시하는 ‘식물적 주체성’의 대표적 특질로 거론된 것이 ‘정주’나 ‘기억’과 같은 부동(不動)의 역량이었거니와, 『소년이 온다』에서 이런 면모가 가장 인상적으로 나타나는 대목은 3(‘일곱개의 뺨’)일 것이다. 이 장의 주인공 ‘은숙’은 1980년에 고등학생이었다. 진압군이 도청을 점령하기 직전 그곳에서 빠져나와 살아남은 그녀는 어머니의 간곡한 바람대로 광주를 떠나 대학에 다녔고 출판사에 취직해 편집자로 일하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도청에서 함께 시신관리를 담당했던 소년 ‘동호’의 죽음을 잊어본 적이 없다. 『채식주의자』의 영혜가 꿈에서 본 살육의 장면을 80년 광주에서 직접 목격한 그녀는 그날 이후 영혜처럼 고기를 못 먹게 되었고, 무시로 찾아오는 죄책감 때문에 밥을 먹고 잠을 자는 최소한의 일상조차도 버텨내기가 힘겹다. 빨리 늙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치욕스러운 삶이 어서 끝장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녀가 생쌀을 씹어가며 살아가는 이유는 3장의 첫머리에 제시된 대로다. “그녀는 일곱대의 뺨을 맞았다. 수요일 오후 네시경이었다. 같은 자리를 연달아 세게 맞았기 때문에, 몇번째 따귀부터였는지 모르지만 오른쪽 광대뼈 위로 실핏줄이 터졌다. (…) 일곱대의 뺨을 그녀는 이제부터 잊을 것이다. 하루에 한대씩, 일주일 만에 잊을 것이다.”(65~66면) 그러니까 은숙의 일주일을 시간순으로 나열하는 이 장의 애초 목표는 ‘망각’이었다. ‘뺨 하나’에서 ‘뺨 여섯’까지, 소제목으로 나뉜 하루하루가 지날 때마다 은숙의 얼굴에 난 상처는 아물어간다. 그러나 엿새에 걸친 ‘망각의 의식(儀式)’을 치르는 와중에 그녀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80년 광주로 다가간다. 폭력을 잊기 위한 그녀의 내적 고투는 도리어 핏자국을 지우고 물을 뿜던 도청의 분수대, 사복경찰의 감시가 삼엄했던 대학의 풍경, 검열로 먹칠이 된 책의 페이지 등 80년 광주를 연상시키는 폭력의 장면들을 불러낼 뿐이다. ‘망각의 의식’은 실패하고 결과적으로 ‘기억의 의식’을 치른 셈이 된 엿새째에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내일이 되어 일곱번째 따귀를 잊을 필요는 없었다. 일곱번째 뺨을 잊을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98면) 피부의 상처는 지워졌어도 몸 안쪽에 각인된 폭력의 기억은 끝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러므로 기억의 의식은 언제까지나 반복돼야 한다는 것을 그녀는 받아들인다. 그렇게 일곱번째 날이 됐을 때, 드디어 다가온 기적 같은 순간에 대해 쓰면서 한강은 여기에 ‘뺨 일곱’이 아니라 ‘눈송이들’이라는 소제목을 붙였다.

 

그녀의 입술이 자신도 모르게 달싹인다. 배우들을 흉내 내듯 목구멍을 쓰지 않고 부른다.

 

동호야.

(…)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

네가 방수 모포에 싸여 청소차에 실려간 뒤에.

용서할 수 없는 물줄기가 번쩍이며 분수대에서 뿜어져나온 뒤에.

어디서나 사원의 불빛이 타고 있었다.

봄에 피는 꽃들 속에, 눈송이들 속에. 날마다 찾아오는 저녁들 속에. 다 쓴 음료수 병에 네가 꽂은 양초 불꽃들이.

 

뜨거운 고름 같은 눈물을 닦지 않은 채 그녀는 눈을 부릅뜬다. 소리 없이 입술을 움직이는 소년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한다.(101~103면)

 

기억의 의식을 치른 끝에 소리 없는 애도의 노래가 울려퍼지고 ‘소년이 온다’. 그야말로 시적 초혼(招魂)의 순간을 그리고 있는 ‘눈송이들’의 마지막 부분에서 느껴지는 전율을 짤막한 인용문에 옮겨오기란 불가능하다. 이 부분은 은숙이 연극을 관람하면서 한 무언의 독백을 활자화한 것이기도 하지만, 좀더 근본적으로 세속적(secular) 언어가 도달할 수 없는 경지를 보여주고자 하는 문학적 열정(passion)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몸의 수난(passion)을 되새김하는 7일의 의식을 거치고 열린 그 언어도단의 경지를 한강은 비스듬히 누워 있는 활자들로 가리켜 보이는데, 그것은 똑같이 이탤릭체로 표기된 ‘눈송이들’이라는 소제목이 암시하듯이 하늘에서 대지로 내려와 녹아 사라지는 어떤 성스러운 환영이다. 복기해보면 그간 한강의 소설에서 이탤릭체는 똑바로 서 있는 활자와 대비되는 신성한(sacred) 활자였다. 그것은 비밀을 폭로하고 진실을 드러내고 타자와 소통하는 극적인 순간에 잠깐씩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다. 이를테면 『채식주의자』에서 이탤릭체로 쓰인 영혜의 꿈은 가족들이 살아가는 세계에서는 일종의 방언에 해당하는 것이어서 누구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고 그 결과 영혜는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소년이 온다』에서도 한강은 서로 다른 두 차원의 언어를 상정하고 이를 다른 활자로 분별한 다음 그 사이를 왕래하며 서로에게 번역해준다. 살아 있는 동호의 이야기를 쓴 1(‘어린 새’)과 동호의 친구 ‘정대’를 화자로 삼은 2(‘검은 숨’)은 혼()의 목소리를 중계하는 한강의 샤먼적 역할과 그만의 특정한 언어운용 방식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이 소설의 그다음(4장에서 에필로그까지)은 3장 말미에 들려온 “소리 없이 입술을 움직이는 소년”(103면)의 육성(肉聲) 없는 말을 제대로 옮기기 위한 여정처럼 보인다. 소년이 죽음으로써만 할 수 있었던 말, 그렇기에 여태 음가(音價)를 가질 수 없었던 말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 질문은 80년 광주를 단지 기억하는 것을 넘어서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향해 있다. 이와 관련해 한강은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소회를 에필로그(‘눈 덮인 램프’)에 남겼다.

 

그들이 희생자라고 생각했던 것은 내 오해였다. 그들은 희생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 남았다. 그 도시의 열흘을 생각하면, 죽음에 가까운 린치를 당하던 사람이 힘을 다해 눈을 뜨는 순간이 떠오른다. 입안에 가득 찬 피와 이빨 조각들을 뱉으며,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밀어올려 상대를 마주 보는 순간. 자신의 얼굴과 목소리를, 전생의 것 같은 존엄을 기억해내는 순간. 그 순간을 짓부수며 학살이 온다, 고문이 온다, 강제진압이 온다, 밀어붙인다, 짓이긴다, 쓸어버린다. 하지만 지금, 눈을 뜨고 있는 한, 응시하고 있는 한 끝끝내 우리……(213면)

 

무언가를 말하는 소년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3장의 마지막 문장과 호응하면서, 이 대목은 80년 광주에 대해 한강이 취하고 있는 특별한 관점이 무엇인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그에 따르면 80년 광주는 우리가 알고 있었던 것처럼 권력욕에 미친 신군부세력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의 장소, 즉 민주화의 성지로만 기억돼서는 안된다. 그때 그곳은 인간의 존엄이 심문받는 법정이었고, 인간성의 가능성이 그 바닥부터 임계까지 실험된 장소였다. 그러므로 ‘인간’과 ‘비인간’ 그리고 ‘인간됨’에 대한 뜨거운 질문들이 한꺼번에 쏟아져나왔던 80년 광주와 더불어 이제 우리는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95면)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그것이 죽음의 형식을 빌려서 말하고자 했던 광주민주화운동의 뜻을 제대로 기억하는 길이기도 하다.

그 길의 초입에 해당하는 4장과 5장에서 한강은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는데, 특히 그들의 몸의 경험을 주의깊게 듣는다. 생존자들의 몸에 가해진 악랄한 고문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문장들, 진압군이 자행한 무자비한 폭력의 진상을 전하는 충격적인 문장들, 그리고 생존자들이 얼마나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렸는지를 말해주는 문장들이 일일이 예시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런 가운데 이례적인 것은 시민군이 죽음을 각오하면서 도청에 남게 된 경위를 설명하는 대목이다. 이것이 이례적인 것은 이제껏 5월의 상처와 고통을 몸을 매개로 묘파해오던 소설이 그 몸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던 특별한 순간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이상 두렵지 않다는 느낌, 지금 죽어도 좋다는 느낌, 수십만 사람들의 피가 모여 거대한 혈관을 이룬 것 같았던 생생한 느낌을 기억합니다.”(114면) “모든 사람이 기적처럼 자신의 껍데기 밖으로 걸어나와 연한 맨살을 맞댄 것 같던 그 순간들 사이로,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이, 부서져 피 흘렸던 그 심장이 다시 온전해져 맥박 치는 걸 느꼈습니다. 나를 사로잡은 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115~16면) 한강의 소설은 사실상 몸이 주인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달리 말하면 인간의 고통과 열락이 모두 몸을 매개로 한다는 뜻이고 그만큼 몸이라는 한계로부터 인간이 벗어나기 어렵다는 말이다. 그런데 인용한 대목에서 사람들은 몸으로부터 벗어난, 혹은 몸을 뛰어넘는 체험을 말하고 있지 않은가.

『채식주의자』로부터 이어져온, 몸을 향한 한강의 꾸준한 응시는 이제 그 반대편에 있는 어떤 탈신(脫身)의 경지를 투시하는 데까지 이어졌다. 푸꼬(M. Foucault) 식으로 말하면 신체는 권력이 새겨지는 장소다. 그러므로 권력에 저항하고자 하는 이들이나 기존 질서를 전복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몸은 싸움의 최전선이 된다. 푸꼬적인 것과 맥락은 다를지라도 한강의 소설에는 일종의 몸의 정치학이 있다. 몸을 통해서 몸을 벗어나는 이 도약은 『채식주의자』에서 그 단초를 보인 것이기도 하다. 두번째 연작 「몽고반점」의 화자는 “태고의 것, 진화 전의 것, 혹은 광합성의 흔적 같은 것을 연상”(101면)시키는 몽고반점을 지닌 처제, 영혜에게 강하게 끌린다. 그에게 영혜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 경계에 가 있는 사람”(86면)처럼 보였고, “어떤 성스러운 것, 사람이라고도, 그렇다고 짐승이라고도 할 수 없는, 식물이며 동물이며 인간, 혹은 그 중간쯤의 낯선 존재처럼”(107면) 느껴졌기 때문이다. 새삼 강조할 것은 그가 욕망한 것이 영혜의 ‘몸’이라는 점이다. 그에게 영혜의 ‘몸’과의 결합은 자신을 속박하는 모든 경계를 단번에 뛰어넘는 상징적 자살행위를 의미했다. 그는 금기를 넘어선 위반으로서만 얻을 수 있는 이미지가 있다는 것을 예술가로서 직감했고 그 이미지에 집착했다. 가진 모든 것을 잃게 되리라는 공포를 무릅쓰고서 마침내 대면한 그 이미지는 그가 수많은 비디오아트 속에 삽입해왔던 ‘날개’의 이미지가 불러일으키는 ‘자유’에 대한 실감을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수준에서 전달하기에 충분했다. 요컨대 그에게 에로티즘은 기왕의 삶에 혼란을 일으킬 탈선으로서 그가 발디딘 세계 쪽에서 보면 악한 것이기는 했지만 선/악의 피안에 있는 자유의 궁극, 순간적으로 도달하는 자유의 가장 먼 지점, 누구도 그보다 더 멀리 갈 수 없는 그곳에 이르는 통로였던 것이다.8) 그곳에서 그는 더이상 몸에 구속돼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이 아닐 수 있었다. 영원한 열락, 격렬한 환희, 시원적 정화가 그의 존재를 이제껏 추상적이기만 했던 ‘자유’의 실감으로 충만하게 했기 때문이다.

『소년이 온다』에 나타난 탈신의 경지는 『채식주의자』의 그것과는 다소 층위가 다르다. 어떤 측면에서는 그것을 뛰어넘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휴버트 드레이퍼스(Hubert L. Dreyfus)와 션 켈리(Sean D. Kelly)는 현대인의 허무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을 논의하는 중에 “육체와 그 한계가 다 녹아버려서 영원한 현재가 주는 생생한 행복감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 상태”9)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이것을 『채식주의자』에 등장하는 것과 같은 에로틱한 열락의 체험과 유사한 것으로 이해하려 하지 않고, 공동체가 경험하는 성스러운 순간으로, 즉 고대 그리스 시대의 퓌시스(physis)에 대한 체험과 유사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그들 논의의 독특함이다.10) 저자들은 이것의 현대적 사례를 스포츠 경기장이나 정치집회 현장에서 찾을 수 있다고 지적하는데, 그들이 놓친 것 중 하나는 바로 805월 광주와 같은 혁명적 꼬뮌의 사례다. 『소년이 온다』에서 5월 광주의 주체들이 개인적 한계를 뛰어넘어 시민군으로 참여할 때, 그들은 스스로의 가장 존엄한 순간을 체험한다. 말하자면 탈신의 경지를 공동체적 감각, 공동체적 체험에서 발견해내는 『소년이 온다』는 일종의 ‘정치적 퓌시스’를 포착한 셈이다. 이는 『채식주의자』에서 에로티즘을 통해 궁극의 자유를 체험하는 탈신의 경지를 개인의 차원에서 포착했던 것과 차별되는 지점이다. 요컨대 『소년이 온다』에 이르러 한강의 소설은 탈신의 경지가 ‘나’(개인)의 경계를 뛰어넘어 ‘우리’(공동체)의 몸으로 접속해 들어가는 한가지 방법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반복적 성찰과 올바른 지향이 부재하는 신성한 순간의 도래와 그 속에서 배양되는 군중의 일체감이라는 것은 언제든 위험한 것으로 변질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소외된 개인들의 허무주의와 냉소주의가 범람하는 우리 시대에 공동체적 상상력을 북돋우는 작업은 그 위험을 무릅쓸 만큼 긴요한 것이다. 특히 개인을 넘어서는 공동체적 사안으로서 청년세대의 문제를 사유하고 해결해야 하는 지금여기에서 그것은 더욱 다급해 보인다.

‘나’로부터 떨어져나와 ‘우리’에게로 가는 방법을 오래전에 잊었거나 배우지 못한 세대에게 한강 소설에 나타나는 탈신의 감각은 생소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이기적 욕망과 권력의 통치술이 뒤엉켜 작동하는 장소인 개인의 몸을 초월하고, 공동체적 신념과 정의가 펼쳐지는 가상의 공간을 상상하고 실현시키는 데에 필요한 어떤 내밀한 감각을 가리킨다. 『소년이 온다』에 따르면 그 감각이 활발히 반응할 때라야 개인은 공동체 안에서 일체감을 느낄 수 있고 ‘나’는 ‘우리’가 될 수 있다. 언젠가부터 자의반 타의반으로 동물적 주체성을 살아오면서 내 몸의 즉물적 만족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온 우리 사회가 무뎌진 탈신의 감각을 되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서 짐승으로 또 벌레로 추락하는 중인 우리를 구원하는 방법이 물질적이고 제도적인 층위에만 존재하며 그것만이 급진적이고 그외의 것들은 모두 대중을 미혹하는 관념론적 환술(幻術)이라고 몰아붙이는 태도에 한강은 동의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도 마찬가지다. 탈신의 감각은 어떤 성스러운 순간으로 우리를 이끌어, 세속적 가치의 위계를 심문하고 전복하는 역사적 행위를 재촉한다. 그 행위들의 누적 속에서만 우리는 다시 ‘인간’으로, 그러나 개인주의적 휴머니즘의 한계 안에 존재하는 그 ‘인간’과는 다른 종류의 ‘인간’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11)

 

 

4. 식물적 부동성의 정치학

 

탈신의 경지에서 이루어지는 공동체적 신체의 형성에 대해 생각하다보면 다시 이 생각에 단초를 제공한 식물적 주체성에 대한 사유로 돌아가게 된다. 『소년이 온다』에서 동호의 어머니가 죽은 아들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 마지막 장면에는 인간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희미하게 깃들어 있다. “나무 그늘이 햇빛을 가리는 것을 너는 싫어했제. 조그만 것이 힘도 시고 고집도 시어서, 힘껏 내 손목을 밝은 쪽으로 끌었제. (…) 기왕이면 햇빛 있는 데로. 못 이기는 척 나는 한없이 네 손에 끌려 걸어갔제. 엄마아, 저기 밝은 데는 꽃도 많이 폈네. 왜 캄캄한 데로 가아, 저쪽으로 가, 꽃 핀 쪽으로.”(192면) 최근 한국사회에서 벌어진, 인재(人災)에 가까운 참사들을 떠올리면, 감히 인간에게 신뢰를 보내는 것은 무모한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다시 한번 더 기대를 걸어보는 마음으로 위 인용문을 읽다보면 유독 눈길이 머무는 곳이 있다. 바로 아이가 이끄는 대로 끌려가는 어머니의 수동적 모습이다. 아이의 손에 진로를 맡긴 채 움직이는 어머니의 태도에서 우리는 역설적이게도 일종의 부동성을, 지금여기에 존재하는 세상의 부름(이동, 점령, 망각)에 응하지 않으려는 완고한 식물적 부동성을 엿볼 수 있다. 한 철학자는 세월호사건 이후 정치적 멜랑콜리에 빠져 있을 게 아니라 죽은 자들과 연대하여 새로운 모럴을 사유하는 ‘애도의 정치학’이 필요하다고 제안하면서, ‘죽은 자들에 대한 정의’를 요청한 바 있다.12) 그 요청에 이 글의 논지로 응답할 수는 없을까. 이동하고 점령하고 망각하는 동물적 주체성에 맞서서, 사건이 일어난 시공간에 머무르는 식물적 주체성이야말로 애도의 정치학을 위해 요구되는 주체성이라고. 그 식물적 주체성의 실례를 우리는 이미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동호의 어머니처럼 세월호의 아이들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는 중인 부모들을 떠올려본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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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한혜정·엄기호 외 『노오력의 배신』, 창비 2016, 116면.

2) 의학에서 징후와 증상은 엄밀히 구별되는 용어다. 징후는 어떤 병의 객관적으로 관찰 가능한 증거이고, 증상은 환자가 주관적으로 경험하고 호소하는 것이다.

3) 한기욱은 문학이 세가지 세상(이 세상, 다음 세상, 다른 세상)과 관련된다고 말하면서, 섬세하고 지적인 감수성으로 세가지 세상의 복합적 관계를 동시에 사유하는 종합예술로서 문학이 추구해야 할 본령과 임무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이 세상’의 개체와 시대의 진실을 드러내자면 ‘다른 세상’을 상상하는 작업을 통해 이미 ‘이 세상’에 들어와 있는 잠재적인 ‘다음 세상’의 성격을 감별해야 한다.”(「문학의 열린 길」, 『창작과비평』 2016년 봄호 77면)

4) 이하 두 책을 인용할 때는 괄호 안에 면수만 표기.

5) ‘동물’과 더불어 ‘인간’을 사유하는 사례들은 Peter Atterton and Matthew Calarco eds., Animal philosophy (Continuum International Publishing Group 2004)Giorgio Agamben, The Open: Man and Animal (trans. Kevin Attell,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4) 참조. 이러한 철학적 경향에 대한 스케치를 담은 글로 황정아 「동물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창작과비평』 2016년 봄호) 참조.

6) 이러한 논지가 담긴 대표적인 평문으로는 김미현 「페미니즘이 포스트페미니즘에게」(『젠더 프리즘』, 민음사 2008), 신수정 「미궁 속의 산책」(『푸줏간에 걸린 고기』, 문학동네 2003), 황도경 「짐승의 시간, 꿈꾸는 식물」(『내 여자의 열매』 해설, 창비 2000) 등이 있다.

7) ‘육식’과 ‘채식’의 문화적·문학적 함의와 페미니즘적 해석에 대해서는 캐럴 J. 아담스 『프랑켄슈타인은 고기를 먹지 않았다』(류현 옮김, 미토 2003) 참조.

8) Georges Bataille, Literature and Evil, trans. Marion Boyars, Penguin Books 2012, 61면. 국역본은 조르주 바타이유 『문학과 악』, 최윤정 옮김, 민음사 1995, 82면 참고.

9) 휴버트 드레이퍼스·숀 켈리 『모든 것은 빛난다』, 김동규 옮김, 사월의책 2013, 338면.

10) 저자들은 ‘퓌시스’란 본래 ‘실재’를 뜻하는 개념이지만 당시의 함축적 의미를 충분히 살린다면 ‘반짝임’이라는 번역어가 더 적합할 것이라고 말한다. “실재가 빛나는 순간”(345면)이 중요한 이유는 그 성스러운 순간이 거기 참여하는 주체들에게 공동체의 한 일원이 되는 결정적인 체험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퓌시스란 “실존의 가장 중요하고 의미심장한 순간들이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우리에게 제시하는가를 기술하는”(346면) 개념으로 전유될 수 있다.

11) 이와 관련해 사회학과 민중신학을 중심으로 “삶의 본원적 가치의 회복을 위해 공동체를 바르게 사랑하는 사회적 영성”(박명림 「공공성, 사회적 영성, 시민성」, 『한겨레』 2011.6.1)에 대한 관심이 생겨나고, 특히 세월호사건 이후 ‘사회적 영성’ 개념을 공공성 재고의 측면에서 새롭게 주목해보려는 시도(김진호 외 『사회적 영성』, 현암사 2014)가 이뤄지는 점은 주목된다.

12) 김진영 「정치적 애도가 본질이다」, 『나·들』 19호, 201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