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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상상된 기억, 감정의 맛
권여선 소설집 『내 정원의 붉은 열매』
소영현 蘇榮炫
문학평론가. 저서로 『분열하는 감각들』 『문학청년의 탄생』 『부랑청년 전성시대』 등이 있음. yhso70@hanmail.net
권여선(權汝宣)의 소설은 예민한 감각의 보고(寶庫)다. 날선 가위로 오려낸 종이공예처럼 정교하면서도 섬세한 감정의 윤곽이 소설 곳곳에 드러나 있다. 대개 ‘짧고 추하거나’ ‘예쁜 편은 아닌’ 여자들로, ‘쿨하지 못하거나 고지식하기 일쑤인’ 그들의 내면의 흔들림이 대단히 예민하게 포착된다.
그 감정은 누군가에 대한 기대와 사랑이 동량의 실망과 증오로, 자신에 대한 분노나 절망으로 바뀌는 연쇄이자 감정의 주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작용/반작용의 결과물이다. 감정의 선이자 이리저리로 흘러가는 물질적 변성작용의 미묘한 움직임을 섬세하게 짚어내면서, 작가는 찰나의 떨림에 가까울 감정들이 결코 ‘흐르는 대로 그냥 놔둬야 하는’ 인간 본연의, 본래적인 성정의 발현이 아님을 강조해두고자 한다. 권여선식으로 말하자면 감정은 만들어지는 것이고 외부로부터 규정되는 것이자, 주고받으며 움직이는 것이다.
전작들에서와 마찬가지로 감정이란 언제나 관계의 산물이라는 사실에서 출발하는 『내 정원의 붉은 열매』(문학동네 2010) 속 작품들은 마치 홍상수의 영화처럼 무심히 들여다본 일상을 스케치한다. 그러나 그 일상은 사건이 아니라 감정의 연쇄로서의 일상이며, 얼룩이 그대로 남겨지는 덧그린 수채화처럼 우리 앞에 부려진다. 물론 그 감정선의 흐름을 추적하는 일에 권여선의 소설은 지나칠 만큼 집요하다. 시간이 흐르면서 매번 다른 형상으로 변모하는 수만 가지의 감정이 그녀의 인물들에 의해 날카롭게 추적되고 반추된다. 곱씹어진 감정들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가히 엇갈린 연애 삼부작이라고 해도 좋을(「빈 찻잔 놓기」 「사랑을 믿다」 「내 정원의 붉은 열매」) 노골적인 연애담과 함께 이 책에 실린 소설들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온 엇갈린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된다.
남자의 성적 취향을 몰랐기에 감정의 엇갈림 속에서 불신과 의혹과 피해의식에 사로잡히게 된 여자(「빈 찻잔 놓기」)와, ‘서툴고 겁이 많으며 감정에 인색한’ 성격으로 낮은 음역의 희미한 사랑의 멜로디를 감지할 수 없었던 3년 전의 나 혹은 오지 않을 미래의 그녀(「사랑을 믿다」)가 있다. 무엇인가를 “완전히 잃고, 잃었다는 것마저 완전히 잊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우연히 그 언저리를 헛짚는 순간”(118면)에 첫사랑이 완성되고 지나가버렸음을 알게 되는 여자(「내 정원의 붉은 열매」)와, 사랑하는 여인이 아니라 그녀를 사로잡은 남편의 매력에 골몰하느라 자신을 향하고 있던 여인의 감정을 알아채지 못한 남자(「웬 아이가 보았네」)가 있다. 이들을 두고 권여선은 사랑을 말한다.
“가망 없는 감정의 소모”(40면)를 끝내고, 미묘한 흔들림이 완전히 소진된 후에 오는 어떤 깨달음, 알지도 못한 채 지나간 짧은 순간을 곱씹으며 반죽처럼 주물러서 원하는 뭔가를 만들려는 감정 행위, 그 무한반복하는 기억 행위를 작가는 사랑이라 부른다. 돌아보는 되새김질 속에서 사랑이 되는 감정들, 그리하여 더이상 사랑이라 하기에도 보잘것없어진 그런 방식으로만 오는 사랑들, 뒤늦게 도착한 연애편지처럼 이미 흘러가버려 후회나 죄의식과 결합되지 않고는 결코 확인될 수 없는 엇갈리고 비틀린 관계들, 여기에 권여선이 말하는 사랑이 있다.
작가는 엇갈릴 수밖에 없었던 그때의 사정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그 감정의 실체가 파악되고 엇갈린 감정들이 온전히 전달된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모든 상상이 사실이었다 해도’, 기억이라는 이름의 헤아릴 수 없는 후회를 아무리 되짚어보아도 달라지는 건 없음을 반복적으로 상기시킨다. 작용과 반작용을 통해 이질적 내용을 갖게 되는 감정의 연쇄를 추적한 끝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 감정의 실체가 아님을 말한다. 오히려 숨겨진 무의식의 그늘에서 미묘한 흔들림으로부터 지켜내고자 했던 것이 각자의 자아였음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도스또옙스끼의 『지하생활자의 수기』와 마찬가지로 권여선의 소설은 상처의 기록이자 문명의 세계에서 온전히 지켜낼 수 없는 자아에 대한 망상의 기록물인 것이다.
권여선의 인물들이 미래의 시간을 후회와 반추에 따른 망상으로 채울 수밖에 없는 것은 그들의 성정 탓이 아니다. 「K가의 사람들」에서 좀더 상세하게 나타나듯, 그들은 타인과의 관계뿐 아니라 가족관계와 거기 녹아 있는 사회역사적 위계의 힘에 사로잡혀 자아를 망각한(/할 수밖에 없었던) 존재들이다. 그렇기에 작가는 미묘한 감정의 변화에 흔들리고 매번 다시 그 감정으로 되돌아가는 반추의 소중함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권여선은, 결과적으로는 상상력이라고 불러야 할 기억 행위, 그것이 형체도 없이 사라지는 자아를 붙들기 위한 우리의 서글픈 발버둥임을, 그것 없이는 우리 삶이 어떤 내용도 담을 수 없음을 역설한다. 『내 정원의 붉은 열매』는 현대인의 초라한 자화상을 감정이라는 맛에 실어 우리에게 띄워보낸 권여선식 위로 편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