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리얼리티 탐구의 문학적 형식들
우리 시대 한국문학의 두 촉
한강과 권여선
최원식 崔元植
문학평론가, 인하대 명예교수. 저서로 『민족문학의 논리』 『한국근대소설사론』 『생산적 대화를 위하여』 『문학의 귀환』 『제국 이후의 동아시아』 등이 있음. ps919@hanmail.net
1. 생각들
글을 쓰기 겁나는 시절이다. 전에는 전언(傳言)이 설령 흐릿하달지라도 써지는 도중에 명확해지는 경우가 왕왕이라 일단 시작하고 보는 편이었다. 사실 글쓰기란 원래 무슨 해답이 미리 주어져서가 아니라 출발하던 때에는 예상 못한 지점으로 우리를 데려가기도 하는 발견여행의 성격으로 쓰는 자들을 매료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요즘 같은 때는 일찍이 없었다. 그들의 사이비-쿠데타를 중지시킨 지난 총선 이후에도 지지부진을 면치 못하더니 기어코 박근혜식 막무가내 행진이 파탄에 이르렀다. 그거야 자작지얼이라 하릴없다손 쳐도 정치가 귀환하는 걸음이 크게 들리지 않으니 곤혹한 일이다.
문학은 어디에 있을까? 탁함을 빈틈없이 뒤집어쓴 사람일지라도 진지한 상호교육 과정을 통해 변할 수도 있다는 믿음이야말로 문학의 원점일 터인데, 이 근본이 흔들린다. 교육 없는 욕망이 문제다. 성진(性眞)처럼 화려한 꿈을 꾸거나(『구운몽』), 조신(調信)처럼 악몽을 꾸거나(「조신몽」) 간에, 일단 한점의 욕(欲)이 불쑥 일어나면 그 욕망의 연기(緣起) 따라 세상들을 구을러야 깨달음 근처에 드는 것인가? 수구정권 10년에 온 한국사회가 꿈을 잃어버린 탓이 크지만 이제 대증(對症)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복잡계에 벌써 들어섰나보다.
나는 요즘, 일본은 물론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을 격동한 카와까미 하지메(河上肇, 1879~1946)의 『빈곤론』(1916)을 지각독서하고 있다. “1950년대 중반, 청계천의 고서점에서 (…) 자장면 한 그릇 값을 주고 산 이 책을 밤새워 읽고 난 뒤 눈앞에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는 것을 느꼈”1)다는 신경림(申庚林) 시인의 추천사가 새롭거니와, “놀랍게도 오늘날 문명국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이 가난하다”(31면)는 문장으로 기필(起筆)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가난한가,(상편) 왜 많은 사람들이 가난한가,(중편) 어떻게 해야 가난을 근본적으로 퇴치할 수 있는가(하편)”2)라는 세개의 큰 질문을 축으로 가난을 집중적으로 사유한 부르주아 경제학자, 하지만 곧 독창적 맑스주의자로 진화할 카와까미의 논술은 상기도 압도적이다. 이 책은 오늘의 한국사회로 직핍하는데, “자본가의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일으킨 명분 없는 전쟁”(225면)이라고 보어전쟁을 맹렬히 반대한 영국의 정치가 로이드조지(David Lloyd George, 1863~1945)를 새로 알게 된 것도 고맙다. 그가 1909년 재무장관 시절 제안한 증세안에 대한 의회 연설의 마무리를 잠깐 인용하자.
이것은 하나의 전쟁 예산입니다. 가난과 가차없는 전쟁을 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예산입니다. 저는 우리가 살고 있는 동안 사회가 커다란 약진을 하여 가난과 불행, 그리고 반드시 이에 수반되어 생기는 인간의 타락이, 일찍이 숲에 살던 늑대가 쫓겨나듯이, 완전히 이 나라의 국민으로부터 추방되는 경사스러운 날을 맞이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믿고 있습니다.(217~18면에서 재인용)
이 연설에 카와까미는 다음과 같이 주석했다. “그는 영국의 해안을 바깥으로부터 위협하는 독일의 무시무시함을 알았고, 동시에 국가를 내부로부터 부식시키는 빈곤이 더욱 무서운 적이라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218면) 이 점에서 『빈곤론』은 로이드조지의 연설을 조술(祖述)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거니와, 나는 백년 전의 책을 읽으며 가난의 문제가 1920년대 신문학운동 이후, 특히 1970년대 민족문학/민중문학의 원천이었음을 화들짝 깨닫고, 그사이 우리가 얼마나 이로부터 유리되었는지 다시금 놀라던 것이다.
정말 하비(David Harvey)처럼 말해야 할 때지 싶다. “네, 복잡한 것은 나도 압니다. 그렇지만 ‘왜’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답해야만 합니다.”3) 물론 복잡성은 존중되어 마땅하다, 우리를 다른 곳으로 이끌 뜻밖의 손님이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런데 그 손님을 단박에 알아채기 위해서도 그 ‘왜’를 성성(醒醒)히 또 적적(寂寂)히 눈여김 하지 않으면 안 될 터이다.
엉뚱하지만 우리 현대문학의 원천인 가난 문제를 원경(遠景)에 걸어두고 당대문학의 첨병일 한강(韓江)의 연작소설집 『채식주의자』(2007)와 장편 『소년이 온다』(2014), 그리고 권여선(權汝宣)의 단편집 『안녕 주정뱅이』(2016)를 중심으로 최근 우리 소설의 예민한 촉에 감응하고 싶다. 두 작가는 1990년대에 등단했으나 2000년대 들어 더욱 드러난 경우이거니와, 저 ‘불의 80년대’를 제가끔 독특하게 통과했다. 1980년대의 격렬한 학생운동 경험을 깊숙이 지닌 채 90년대 중반에 등단한 권여선은 크게 보면 후일담이되 작게 보면 후일담이 아닌 좀 까다로운 작업을 고되게 밀어오고 있다. 이에 비해 20대 초에 일찌감치 등단한 한강은 얼핏 ‘문학주의’로 보였던 게 사실이다, 『소년이 온다』를 출간하기 전까지는. 이 장편에 나는 괄목(刮目)했다. 그동안 한강을 덜 본 데 대해 자책하면서 비로소 그녀가 어린 시절 광주(光州), 그 항쟁, 그 학살의 날들로 그예 돌아간 애옥함이 아처롭다고 속으로 위로했다. 그 위로는 정말 대단한 일을 해냈다는 경의의 다른 이름임은 물론이겠다.
2. 견인주의의 끝: 『채식주의자』4)
세편의 중편 「채식주의자」(2004), 「몽고반점」(2004), 「나무 불꽃」(2005)으로 구성된 이 연작집의 운명은 재미있다. 올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수상이 가리키듯 서양에서 더 주목된 터인데, 일본에서도 작은 규모지만 비슷한 일이 발생했다. 토오꾜오의 한국문학 전문출판사 쿠온이 ‘새로운 한국문학시리즈’를 2010년 『채식주의자』로 시작한바, “시리즈 중에서 가장 많이 팔렸다”(한겨레 2016.8.1)는 것이다. 물론 국내 시장에서도 반짝 눈길을 끈 적은 있다. 소설집으로 출간되기 전, 연작 가운데 두번째에 해당할 「몽고반점」이 2005년 이상문학상 수상작으로 뽑혔고, 『채식주의자』 출간 2년 뒤에는 임우성(林雨成) 감독에 의해 영화화, 2009년 부산국제영화제에 진출했다. 더욱이 2010년 썬댄스영화제에 초청되기까지 하였으니, 맨부커상 이전에 이미 영화로 서양에 들린 것이다. 영화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이 연작이 발표되기 시작한 2004년은 한국영화가 서양에서 새로이 주목된 시절로, 특히 박찬욱(朴贊郁) 감독의 「올드보이」(2003)가 대표적이다. 이듬해 깐에서 상을 탄 것도 탄 것이지만 국내 관객수도 3백만을 상회했다. 서양에서 더 통하던 포스트모던이 이로써 한국에서도 중요한 경향으로 자리잡게 되었으니, 「취화선(醉畵仙)」(임권택 연출, 2002)식 향토주의로 서구를 두드린 기존의 흐름과 날카로운 비연속을 이룬 터다. 멀쩡하게 잘 살던 소시민 주부 영혜가 갑자기 육식을 거부하고 이윽고 단식으로 빈사(瀕死)에 이르는 이야기를 묶은 『채식주의자』에 서양이나 일본의 독자들이 매혹된 데에는 김기덕(金基德)·홍상수(洪常秀)·박찬욱 감독의 영화들이 앞서 길을 다져놓은 덕도 없지 않을 터인데, 그렇다고 이 연작이 영화의 일방적 영향 아래 있었다는 것은 아니다. 『채식주의자』는 작가가 밝혔듯이 단편 「내 여자의 열매」(1997)가 종자다.5) 이미 90년대에 이처럼 기이한 이야기를 구성했으니 당대 영화와 동행이다. 다만 「내 여자의 열매」에 비해 『채식주의자』는 한결 독해져서 이행 과정에 김기덕 감독류(流)의 잔혹이 더해진 듯도 싶다.
이 연작은 생물처럼 진화한다. 모호한 「채식주의자」에서 선정적인 「몽고반점」을 거쳐 「나무 불꽃」에 이르러 연작 전체의 뜻이 명확해진다. 작가가 작품을 이끄는 작가주의가 아니라, 이야기가 이야기를 머금는 연속/비연속의 흐름에 작가 자신을 싣는 탈작가주의를 실험한바, 편을 거듭하면서 이야기의 핵심에 가까워진 게다. 이야기의 비일상성과 동행한 형식실험이 나라 바깥에서 먹힌 것인데, 그 바람에 작품의 핵심이 덜 드러나기도 한 터다.
좀 거칠게 요약한다면 이 연작의 핵은 여주인공 영혜의 끈질긴 자기폭력이다.6) 그녀는 평화의 채식주의자가 아니다. 악몽을 오독한 바람에 채식으로 들어섰다가 급기야 나무가 되겠다는 일념에 단식으로 거의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서사한 이 중편연작집은 변신담을 빌린 점진적 자살담이다. 단식은 약자가 막다른 골목에서 취할 최후의 저항 형식이매, 영혜의 내향적 폭력은 실상 항거다. 한편 이 연작에 정작 ‘영혜’는 없다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1인칭 남편(「채식주의자」), 3인칭 형부(「몽고반점」), 그리고 3인칭 언니(「나무 불꽃」)의 눈으로 관찰된 또는 분할된 ‘영혜들’이 존재할 뿐이다. 과연 영혜는 누구인가?
“아내가 채식을 시작하기 전까지 나는 그녀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9면) 「내 여자의 열매」처럼 남편이 1인칭으로 서사하는 「채식주의자」의 이 인상적인 서두가 분명히 제시하듯, 영혜는 소시민의 삶에 최적화한 평범 그 자체였다. 집안 역시 그렇다. “소도시에서 목재소와 구멍가게를 하는 장인장모”(25면)에서 짐작되듯이 그들은 소시민이다. 그런 집에서 태어나 그렇게 자라 또 그렇게 결혼한 영혜가 갑자기 육식을 거부하면서 분란이 발생한다. 채식주의로 오해된 이 돌발행동은 무엇을 가리킬까? “월남전에 참전해 무공훈장까지 받은 것을 가장 큰 자랑으로 여기는” 영혜 아버지의 폭력성을 흔히들 부각하지만, 초점은 가부장적 폭력에 대한 거부라기보다는 지독하게 평범한 산문적 일상에 대한 거절이다. 가까스로 도달한 소시민적 질서로부터 이탈하려는 이 불온성에 가족들이 소스라쳐 영혜를 응징하려고 했던 것인데, 영혜는 자신의 손목을 그어 저항한다. 이에 남편은, 「몽고반점」 초반에 인혜의 입을 통해 밝혀지듯이, 단호하게 영혜와 이혼한다.(79면)
“아내와 다섯살 난 아들”(70면)을 둔 비디오아티스트 형부의 눈으로 처제를 관찰한 3인칭 서사 「몽고반점」은 복잡한 장치로 현란하지만 핵심은 형부에 의한 처제의 성적 착취다.7) 물론 처음부터 영혜를 그리 여긴 것은 아니다. “교육자와 의사가 대부분인 (…) 집안”(「나무 불꽃」 193면) 출신의 형부는 서울의 정통 중산층이다. 안정된 중산층의 틀에서 이탈하여 예술가로 떠도는 자체가 일종의 반란인데, 한창때는 “강직한 성직자 이미지”(135면)의 진지한 예술가였던 그가 영혜의 저항에 동병상련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느새 “삶이 넌더리”(83면)난 “중년의 남자”(71면)로 돌아선바, 이 위기에서 몽고반점을 욕망한다. 몽고반점은 무엇인가? “태고의 것, 진화 전의 것, 혹은 광합성의 흔적 같은 것”(101면), 다시 말하면 자본에 길든 소시민적 틀 속에서 닳아 없어진 원초적 생명의 불꽃일 터에, 처제는 놀랍게도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유년의 푸른 반점을 선명히 지녔던 것이다. 형부는 일종의 유사-파우스트다. ‘회색 이론’의 서재에서 탈주하여 ‘황금나무의 푸른 삶’에서 새로운 구원을 찾으려 한 파우스트처럼 예술을 빙자하여 “가지를 치지 않은 야생의 나무 같은”(78면) 영혜를 욕망한다. 처제와의 불륜은 소시민적 틀을 위기에 빠트리는 제도다. 긴급조치를 발동하여 그들을 정신병원에 가두는 것으로 위기를 수습하는 이 마무리에 이르러 인혜가 연작 전체를 지배하는 ‘인물의 초점’임이 뚜렷이 드러난다.
연작을 총괄할 「나무 불꽃」은 3인칭 인혜의 시각이다. 영혜가 저항하자 바로 냉정하게 그녀 곁을 떠난, 꿈이 작은 소시민 정서방(「채식주의자」)과, 처제를 동정하는 듯 착취한 교양속물 형부(「몽고반점」)에 이어, 영혜와 가장 깊이 맺어진 인혜는 이 일탈자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열아홉살에 집을 떠난 뒤 누구의 힘도 빌지 않고 서울생활을 헤쳐나온”(161면), 지금은 “대학가에서 화장품가게를 운영”(「몽고반점」 77면)하며 예술가 남편을 보호하는 ‘21세기 허생의 처’ 인혜는 무섭다. “집안 분위기”(193면)에 끌려 비디오아티스트와 결혼한 것도 서울의 중산층으로 편입되기 위한 그녀의 길고 지루한 노고의 일환이었으니, “그녀는 살아본 적이 없었다. 기억할 수 있는 오래전의 어린 시절부터, 다만 견뎌왔을 뿐이었다.”(197면) 말하자면 인혜는 애써 구축한 소시민의 지위를 위협하는 안팎의 요인들을 감시하는 작은 규모의 ‘빅 브라더’다. 그럼에도 무자비한 권력자는 아니다. 인혜는 사실 영혜의 일탈을 속 깊이 이해하고 있다. “기껏 해칠 수 있는 건 네 몸이지. 네 뜻대로 할 수 있는 유일한 게 그거지. 그런데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지.”(214면) 소시민적 삶의 찌르는 듯한 무의미를 누구보다 깊이 실감하고 있기에 영혜의 저항을 온몸으로 이해하면서도 그녀의 종언을 재촉하는 인혜, 이 견인주의자(堅忍主義者)야말로 이 연작의 진정한 주인공이다.
이 작품집 속에 집중적으로 조명되는 인물이지만 영혜는 주체가 아니라 대상이다. 사실 그녀의 저항이란 저항이 아니다. 자살테러에도 한참 못 미치는 자기폭력이란 한없는 수동성, 즉 저항의 포기에 가깝다. 그나마도 영혜의 일탈은 특히 언니에 의해 간단없이 저지당한바, 이 산문적 자본주의 도시의 주변부에 포박된 소시민의 삶으로부터의 찬란한 탈주를 꿈꾸지만 이미 세상은 견고해 ‘보바리 부인’의 바람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영혜의 기괴한 자기폭력이란 보바리즘(Bovarysme)의 종말적 형태일지도 모르거니와, 인혜는 영혜의 낭만주의가 어떻게 불가능한 것인가를 꼼꼼히 기억함으로써 이 지옥 바깥은 없다는 점, 그래서 그 지옥을 견딜 수밖에 없다고 스스로를 달래던 것이다.
그런데 「나무 불꽃」의 마지막 문장이 반항한다. 죽어가는 영혜를 싣고 달리는 앰뷸런스 안에서 창밖 나무들을 보던 인혜의 모습을 ‘내포저자’는 요약한다. “대답을 기다리듯, 아니, 무엇인가에 항의하듯 그녀의 눈길은 어둡고 끈질기다.”(221면) 이는 지금까지 그녀가 견지하던 견인주의자의 눈길이 아니다. 인혜가 영혜에게 튜브식(食)을 강제하던 의사의 행위를 거세게 중지시키면서 발생한 미묘한 변화가 암시하듯이, 인혜는 뜻밖에도 그녀가 그토록 경계하던 영혜와 닮아 있다. 가난의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 않음으로써 상대적으로 가난한 소시민의 삶 역시 황폐할 수밖에 없음을 반어적으로 드러낸 이 연작의 자리가 종요롭다. 『채식주의자』의 견인주의와 『소년이 온다』의 탈견인주의 사이에 깊은 단절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되지만, 「나무 불꽃」에 이르러 『소년이 온다』로 가는 길이 이미 움직이고 있음을 간과해서도 안 될 터이다.
3. 오지 않은 현재: 『소년이 온다』
광주항쟁(1980)을 다룬 이 장편은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고 아직도 배 안에 갇혀 있던 희생자들에 대한 민간잠수사들의 목숨을 건 수습이 진행되던 2014년 5월 19일에 발간되었다.”8) 1980년 5월 18일 광주항쟁과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침몰의 이 공교로운 겹침은 이 작품의 4장 ‘쇠와 피’, 그리고 5장 ‘밤의 눈동자’와도 만나니, 전자는 중편 「순이삼촌」(1978)으로 4·3항쟁(1948)이라는 지옥의 문을 연 현기영(玄基榮)의 또다른 명편 「쇠와 살」(1992)에, 후자는 6·25전쟁 무렵 낙동강전선 안쪽 대진읍을 무대로 한 보도연맹원 학살을 침통히 추적한 조갑상(曺甲相)의 장편 『밤의 눈』(2012)에 대한 오마주다. 요컨대 한국 또는 세계 도처에서 지금도 “수없이 되태어나 살해되”9)고 있는 광주는 현재다. 이 장편의 제목 ‘소년이 온다’가 관건적이다. 그 ‘온다’는 유예된 과거의 귀환도 아니고 먼저 온 미래는 더욱 아니다. ‘소년’으로 상징되는 가장 순수한 시간이 스스로 빛을 발하며 찰나 찰나 떠오르는 생생한 현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현재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세월의 복수가 아직 미숙한 탓으로 소년 또는 현재는 드물게 그것도 간절한 이들에게만 아주 잠깐 현현하기 때문이다.
이 복합적 시간의 좌표 속에서 작가의 서사전술은 가히 ‘형식의 앙가주망’이라고 칭해도 모자라지 않을 만큼 복잡하고 정교하다.10) 잠깐 개관해보자. 항쟁의 현장으로 훅 들어간 1장 ‘어린 새’는 2인칭으로, ‘너’는 소년 동호, 당시 중3이다. 끝내 ‘내포저자’로 짐작되는 1인칭 ‘나’가 드러나지 않는 1장에 반해, 2장 ‘검은 숨’은 처음부터 ‘나’를 노출한 1인칭이다. ‘나’는 시위 중에 이미 죽은 동호의 친구 정대다. 그러다 중간에 슬그머니 ‘너’(49면)가 등장해 2인칭인가 싶지만, 정대의 독백 속에서 동호를 ‘너’로 호명한 것이매 전체적으로는 정대의 1인칭이다. 항쟁 이후 살아남은 자의 간난을 서사한 3장 ‘일곱개의 뺨’은 1980년대 중반, 서울의 출판사 직원으로 생애하는 은숙, 3인칭 제한시점이다. 은숙은 항쟁 당시 여고 3년생이었다. 그런데 이 장에서도 ‘너’(89면)가 불쑥 끼어든다. ‘너’는 물론 동호다. 이 역시 2인칭으로 보기보다는 ‘자유간접화법’ 또는 ‘내적 독백’에 가까울 것이다. 1990년대 광주를 배경으로 한 4장 ‘쇠와 피’ 또한 도청에서 살아남은 대학생들의 후일담이다. 도청 소회의실 조장이었던 ‘나’가 조원 진수의 황폐한 삶을 알려주는데, 이 장에도 동호가 “중학생”(111면)으로 반짝 등장한다. 또다른 살아남은 자를 보여주는 5장 ‘밤의 눈동자’는 1장처럼 ‘나’가 드러나지 않는 2인칭으로 복귀했다. ‘당신’은 『채식주의자』의 인혜를 연상시킬 만큼 엄격한 견인주의를 실천하는 노동자 출신 선주다. 왜 ‘너’ 대신 ‘당신’일까? 2000년대 서울의 시민단체에서 중독된 기계처럼 일하는 그녀는 이미 “만 사십삼세”(146면), 동호와 달리 어른이라는 점뿐 아니라, 찢겨진 성자처럼 살아가는 여성노동자에 대한 경의 또한 내포되었지 싶다. 처음으로 노동자의 세계가 집중적으로 포착된 5장에서 노조와 소시민의 꿈 사이에서 갈등하던 정대의 누나 정미의 숨은 면모가 드러남과 함께 동호가 또 ‘너’(172면)로 등장한다. 6장 ‘꽃 핀 쪽으로’는 동호의 모친 1인칭이다. 이미 30년이 지난 광주, 처음으로 사투리가 지배한다. 동호가 2인칭으로 첫대목부터 등장함(178면)은 물론이다. 작품제작기라고 할 에필로그 ‘눈 덮인 램프’의 ‘나’는 작가 한강이라고 보아도 좋을 만큼 민얼굴이지만 그래도 소설가란 완전히 믿기는 어려운 이야기꾼인지라, ‘내포저자’로 여기는 게 일관적이겠다. 역시 동호가 중심 대상이다.
이상에서 보듯, 에필로그까지 포함한 모든 장에 학살된 소년 동호가 등장한다. 『채식주의자』가 영혜를 추적한다면 『소년이 온다』는 동호를 추구한다. 그렇다면 동호가 ‘인물의 초점’인가? 동호는 리얼리즘 소설의 ‘문제아적 주인공’이 아니다. 주인공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각 장 또는 다른 인물들을 매개하는 플랫폼에 가까워, 결과적으로는 광주항쟁의 작은 집합적 초상이 구축되던 것이다. 물론 ‘집단적 주인공’의 사회주의리얼리즘 소설 또한 아니다. 노동자의 세계도 핍진하게 그려냈지만 실제로 존재한/존재하는 어떤 사회주의와도 거의 무관하거니와, 단일성이야말로 이 소설이 배제한 첫번째 적이다. 그렇다면 『소년이 온다』는 동호라는 플랫폼에서 여러 인물들 속으로 흩어지는 포스트모던 소설인가? 진실의 다중성을 빙자하여 ‘개와 늑대의 시간’을 농하는 포스트모던 또한 아니다. 한강은 이미 『채식주의자』로 포스트모던을 졸업했다. 진실들에 이르기 위한 다중적 접근을 허락하되 진리의 형이상학에 굴복하지 않는 데 둥지를 튼, 그리하여 1인 주인공 소설과 집단적 주인공 소설을 가로지른 이 소설의 자리는 묘하다.
조금 더 톺아보자. 1장의 시간은 “지난 일주일이 실감되지 않는”(24면)다는 데 유의하건대, 5월 25일 무렵이다. 5월 21일 계엄군이 철수한 이후, 5월 27일 도청이 함락되기 이전이니까 시민자치가 한창인 때다. 작은형이 삼수생이고 큰형은 “서울에서 9급 공무원으로 일”(30면)한다는 데서 짐작되듯 평범한 소시민 가정 출신의 중학생 동호는 왜 상무관에서 학살된 시체들을 보살피는 일을 돕게 되었나? “학년에서 제일 작은”(51면) 친구 정대와 “스무살 (…) 키가 작”은 방직공장 여공(37면)인 그의 누나 정미, 이 ‘작은 신의 아이들’은 동호 집에서 자취한다. “일요일(5월 18일—인용자)부터 안 들어”(14면)오는 정미를 찾으러 정대와 거리에 나갔다 시위에 합류한 동호는 총격에 “모로 넘어진 정대를 뒤로하고”(31면) 도망친 ‘죄의식’에 정대를 찾으러 상무관에 왔다가 은숙(수피아여고 3학년)과 한 조로 일하는 선주(충장로 양장점 미싱사)의 권유로 상무관 일을 돕던 것인데, 그곳에서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다 휴교령 때문에 내려”(16면)온 대학 신입생 진수도 만난 것이다. 동호가 플랫폼이듯 이후 각 장으로 독립될 주요인물들이 거의 다 등장하는 1장도 일종의 플랫폼이다.
2장에서 5장까지는 1장에 등장한 인물들의 각 편으로, 죽은 정대가 화자로 나오는 2장은 1장의 짝이다. 정대는 정미와 동호의 죽음을 강력히 암시한다. “누나는 죽었어”(50면), 그리고 5월 27일 도청의 새벽, “그때 너(동호—인용자)는 죽었어.”(64면) 3장에서 5장까지는 도청 진압 이후 살아남은 은숙 진수 선주의 후일담으로 그들의 기억 속에 흩어진 동호, 그 죽음에 이르는 도정이 퍼즐처럼 맞추어지던 것이다. 3장의 주인공 은숙 또한 투사가 아니다. 마지막 밤 진수의 호위 아래 도청을 빠져나오다가 “좁은 어깨에 총을 메고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89면) 동호를 발견하고 그녀는 경악한다. 그러나 “데리고 가려 하자 너는 계단으로 날쌔게 달아났다.”(92면) 4장은 진수의 이야기다. 그의 이야기를 항쟁 당시 교대 복학생 ‘나’가 들려주는데, 끝내 ‘나’의 이름은 익명이다. “초등학교 교사가 되는 게 인생의 목표였던”(112면) ‘나’나, “아직 뺨에 솜털이 나 있”는(109면) 대학 신입생 진수 또한 투사가 아니었다. 그리고 동호의 끔찍한 최후가 마침내 드러난다. “씨팔, 내가 월남 갔다 온 사람이야”(133면)라고 야비하게 외치던 한 장교가 두 손 들고 내려오는 동호를 비롯한 어린 학생들을 총격으로 학살한 것이다. 결국 진수는 자살로 폐허의 삶을 마감한다.
미싱사 선주의 이야기를 풀어낸 5장은 각별하다. 그녀는 원래 서울과 인천에서 두번 해고된 여성노동자다. “성희 언니의 옥탑방”에서 열리던 “노조 소모임”(136면)에 막내로 참여함으로써 1970년대의 치열한 여성노동운동에 입문한 그녀는 복직투쟁 대신 귀향하여 양장점 미싱사로 새출발했는데, 그러는 사이 성희와 연락이 끊어진 상태였다. 그런 그녀가, “양장점 주인이 대학생 아들을 데리고 영암의 동생네로 내려가버린 화창한 봄날”(158면), 하릴없이 거리를 걷다가 전남방직 여공을 가득 태운 버스가 눈에 들어, 그녀들이 부르는 투쟁가, “그 노래를 따라, 당신은 홀린 듯”(159면) 시위에 합류한다. 냉담자의 전환이다. 도청 마지막 밤의 가두방송에 나선 후 그녀가 겪은 지옥은 “몸을 증오하게 되었다”(167면)라는 말로 요약되거니와, 출옥 후 금남로에서 맞닥뜨린 동호의 주검 사진에서 그녀는 “고통의 힘, 분노의 힘으로”(173면) 삽시간에 부활한다. 그럼에도 이후 재회한, 노동운동가로 진화한 성희와 뜨악하다. “희생자가 되어선 안 돼,라고 성희 언니는 말했다. 우리들을 희생자라고 부르도록 놔둬선 안 돼.”(175면) 도청을 지킬 이들을 희생자라고 명명한 성희에 대해 선주는 온몸으로 저항한다. ‘희생’이라고 발화하는 순간 위계제에 포박되는 딱딱한 기제 대신에 그녀는 “끝까지 남겠다고 가만히 손을 들었던 마지막 밤”(175면)의 무서운 우정을 옹호한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의 삶은 가엽다. 중학교 졸업 한학기를 앞두고 일에 뛰어든 이후 교도소 1년을 제외하곤 40대에 이르기까지 “노동을 멈춘 적이 없”(154면)는 선주는 위태롭다. “죽지 말아요.”(177면) 5장을 마감하는 선주의 이 외침은 성희와의 화해를 위한 전언이지만 한편 자신에게 던지는 외마디이기도 한 것이니, 가난을 파악해가는 작가의 눈매가 깊다. 노동자, 특히 여성노동자들이야말로 “최소한의 생계비”, 곧 빈곤선(poverty line) 아래에 해당하는 가난한 사람의 핵심11)이기 때문이다.
6장과 에필로그는 일종의 부록으로 묶을 수도 있겠다. 우선 어조가 밝아졌다. 동호 어머니의 전라도 사투리 때문만은 아니다. 조임을 풀 때도 됐지만, 이미 5장에 예각적으로 드러난, 도청을 지킨 사람들의 뜻을 뭉뚱그려 헤아리는 매듭이 환해진 까닭이다.
패배할 것을 알면서 왜 남았느냐는 질문에, 살아남은 증언자들은 모두 비슷하게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들이 희생자라고 생각했던 것은 내 오해였다. 그들은 희생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 남았다.(212~13면)
마지막 밤을 함께한 것은 뜻밖에도 마음이다. 교대 복학생의 말 그대로 “그 양심의 보석을 죽음과 맞바꿔도 좋다고 판단”(116면)한 그 무서운 밤은 결단의 참여라기보다는 노예선에 동승한 사람들의 남을 사람들에 대한 측은지심(惻隱之心), 그 자리를 빠져나갈 때 엄습할 수오지심(羞惡之心)일지도 모른다. 항쟁 중 학살당한 자도, 학살에서 살아남아 죽은 자보다 더 깊은 지옥에 빠진 자도, 그 고갱이는, 그 어떤 훼손에도 저항하는, 아니 훼손 속에서도 훼손될 수 없는 고갱이는 사람됨(humanitas)의 끝〔端〕이었다. 그런데 그냥 그렇게 함께 있음을 실행한 자들은 지배와 피지배, 또는 위계에서 배제된 소수자들, 동호, 정대, 정미, 은숙, 진수, 선주 들이었다. “진정한 행동은 그 어느 것이나 이 세상에서 또 이 세상의 도래를 위해 익명으로 성취된다.”(들뢰즈)12)
이 장편은 내포저자의 망월동 참배로 끝난다. “기도하지 않았다. 눈을 감고 묵념하지도 않았다.”(215면) 문득 올해 작가회의 회원들과 망월동을 찾았을 때 눈 감고 묵념하고 기도한 일이 부끄러워졌다. 한편 비(非)총체성을 지독한 고투로 성취한 이 특이한 장편이, 사실은 『채식주의자』도 그 때문에 시적인지라, 소설적 육체가 수척한 점이 걸린다. 시간의 복수가 현재의 눈부신 귀환으로 성숙할 한강의 이후 작업을 고대한다.
4. 서둘지 말라: 『안녕 주정뱅이』
워낙 구성이나 문체가 조밀해서 평론가들이 골탕 먹기 십상인 게 권여선의 단편들이다. 최근작 7편을 모은 『안녕 주정뱅이』 또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데, “잔혹한 농담을 하는 인생의 입”13)들을 보물찾기하듯 짚어낸 신형철(申亨澈)의 해설 「‘호모 파티엔스’(homo patience)에게 바치는 경의」가 미쁘다. 마침 읽은 이경재(李京在)의 서평도 유익했다. ‘그날’ 이후의 삶에 스민 퇴폐에 고뇌하는 권여선 문학의 과거 피구속성(被拘束性)이 이 단편집에서 미묘하게 변화하고 있음을 지적14)한바, 새 국면의 임박성을 머금은 한 국면의 종언을 가리킬 제목 ‘안녕 주정뱅이’가 이미 강력한 암시다.
이 단편집에도 과거는 열쇳말의 핵이기는 하다. 특히 규와 주란 부부의 이별여행에 낀 훈, 세 친구의 동행을 서사한 「삼인행」은 전형적이다. 규가 원주의 만종분기점을 지날 때면 “항상 박종철 열사가 생각난다는 뜬금없는 소리”(49면)를 하는 데서 짐작되듯, 그들은 1980년대 학생운동에 직간접적으로 연계된 인물들이기 십상이다. 훈이 파탄에 이른 이 부부를 “가엾고 기괴한 잔여물”(62면)이라고 내심 한탄하고, 그날 밤 셋이 한데 엉켜 말다툼하다 드디어 “너도 독재, 나도 독재, 주란도 독재. 알고 보면 우리 다 독재다”(67면)라고 폭발할 때, 이 작품의 후일담적 성격은 남김없이 드러난다. 그리고 겉으로는 너무나 평온한 다음날 아침의 해장, 이 마무리를 신형철은 “어떤 체념적 평온함”(258면)으로 명명했거니와, 안으로 고요히 부패하는 삶의 편재(遍在)를 우리 시대의 묵시록적 풍경으로 가라앉힌 권여선의 눈매가 불상(不祥)하다. 이 단편의 제목은 『논어(論語)』 삼인장(三人章)의 패러디다. “세 사람이 가는 데에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나니, 그 착한 자를(것을) 가려서 따르고, 그 착하지 못한 자는(것은) 고치느니라.”15) 이상국가의 건설을 위해 천하를 철환(轍環)하던 시절, 그 고난의 행로에서 공자(孔子)가 길어 올린 지혜의 낙관주의를 작가는 “눈 내리는 창백한 회색 풍경”(73면)으로 전복한다.
「역광」은 과거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신인소설가 ‘그녀’를 주인공으로 한 단편임에도 「삼인행」 못지않게 잿빛이다. 그 설계 또한 복잡해서 위현이라는 인물이 그녀의 환상이라는 점이 밝혀졌을 때는 권여선마저 믿을 수 없는 화자인가, 하는 약간의 배신감마저 들던 것인데 이 복잡한 기계를 신형철과 이경재는 정말 잘 분해했다. 특히 ‘그녀’를 “자기를 속이느라 타인들을 잃어버린 인간”(255면)이라고 정리한 신형철의 분석이 그럴듯했다. 그런데 나는 이 단편의 공간, ‘예술인 레지던스’에 주목한다. 도시에서 떨어진 산마을, 그 입구에서 다시 “1킬로미터 넘게 걷는”(140면) 곳에 자리잡은 이 외딴 숙소에는 별난 예술가들이 우글거리는바, 이는 사실 현대의 낯선 풍경이다. “그날은 며칠 새 기온이 급속히 올라 모든 꽃들이 서수적 시간에 항거하듯 일시에 꽃망울을 터뜨린 날이었다.”(161면) 이 숙소에 스스로 갇혀 종작없이 꽃망울을 터뜨리는 예술가들만큼 자본주의 예술시장체제를 환유하는 존재들도 드물거니와, 사육된 문학이 이르게 될 자기소외의 도정에 대한 작가의 알아챔이 무의식적이기도 한지라 이처럼 기괴한 단편이 생산된 것이다.
과거에 묶였든(「삼인행」), 과거로부터 자유롭든(「역광」), 자본의 포섭이 강화되는 우리들의 시대, 그 묵시록의 풍경을 귀신같이 그려냈는데, 신분 또는 계급에 대한 은밀한 촉이 움직이는 작품들 또한 새롭다. “가난하고 못 배우고 생각 없는 사람들이 미워요”(133면)라는 대담한 발언이 등장하는 「카메라」도 흥미롭지만, 결이 다른 여성들의 우정을 분석한 「실내화 한켤레」와 비대칭의 연애를 다룬 「층」이 맞춤이다. 14년 만에 재회한 강남의 여고 동창생, 혜련 선미 경안 사이에는 ‘실내화 한켤레’라는 선(線)이 가로놓였다. 혜련과 선미가 경안을 돌려놓고 둘이서만 춤추러 간 때, 그 학교 현관에 놓였던 경안의 실내화는 비단 노는 애와 공부하는 애 사이의 분리만은 아닐 터이다. 예쁨과 끼로 한패처럼 보이던 혜련과 선미 사이에도 숨은 선이 존재한다. 선미는 강남 본바닥 애가 아니었던 것이다. 드디어 선미는 혜련의 치명적 섹스를 방치함으로써 오랜 짝패 혜련조차 선 밖으로 내몬다. 실은 고교 때 경안을 혜련으로부터 떼어놓은 주동자도 선미니, 그녀야말로 사람들 사이를 가르는 선긋기의 대행자였다. 그런데 진짜 선은 이 한심한 강남아줌마들과 경안 사이에 존재한다는 반전이 통렬하다. 좋은 대학 나와서 시나리오 작가로 행세하는 경안이야말로 그렇고 그런 혜련과 선미가 범할 수 없는 너머에서 그녀들의 딱한 삶을 내려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예민한 문제가 「층」에서는 남녀 사이로 이동한다. 뼈다귀만 추리면 서울 중산층의 딸로 박사과정을 마치고 대학강사 노릇을 하는 예연과 헬스트레이너였다가 이자까야를 했다가 지금은 초밥집을 연 인태 사이의 연애 전말기(顚末記)다. ‘층’이 다른 남녀의 연애라는 주제에 관한 한 이미 고전이라 할 황석영(黃晳暎)의 「섬섬옥수」(1973)처럼 노골적인 것은 아니지만,16) 「층」에서도 연애는 실패한다. “끝까지 시치미를 떼다 뒤통수를 치는” “예연은 개년이다”(230면)라고 욕하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인태도 그렇지만, “거칠고 팍팍했을 것이 분명한 그의 삶이 무섭게 느껴졌다”(237면)고 발을 빼면서도 어떤 속물성에 괴로워하는 예연도 아처롭다. 그녀가 속한 세상도 교수·강사 모임 장면에서 폭로되었듯이 인태 쪽에 비해 나을 게 없음에도 그로부터 후퇴하는 그녀를 나는 솔직히 비난만 할 수 없다. 상대적 가난이든 절대적 가난이든 이 근본문제가 유예된 현실에서는 계급이 가장 날카롭게 교차하는 연애 또는 결혼이라는 장의 불건강성이 치유될 단초조차 찾아지기 어렵다는 것을 여성의 눈으로 「섬섬옥수」를 되감아 반추한 이 단편은 다시금 일깨우던 것이다.
두루 회자되듯이 이 단편집의 백미는 「봄밤」과 「이모」다. “과거가 아닌 현재에 충실한 인간들이 등장하기 시작한”17) 징후로 주목받은 전자는 과연 후일담이 아니다. 요양원에서 ‘알류커플’로 애칭되는 알코올중독자 영경과 류머티즘 환자 수환의 죽음에 이르는 연애담인데, 사실 둘 사이에도 선이 있다. 영경은 국어교사 출신이고 수환은 쇳일로 생애한 자인데, 그야말로 과거로 대변되는 모든 제도를 넘어 그들은 12년 전 “일주일 만에 수환이 옥탑방을 정리하고 영경의 아파트로 들어오면서”(10면) 전광석화처럼 결합한다. 둘 다 결혼에 실패한 전력을 공유한 중년이라는 점도 작용이야 했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무엇이 있다. 앞에서 연애담이라고 했지만 둘의 관계는 연애이면서 연애가 아니다. 이윽고 수환도 죽고 의식불명인 채 요양원으로 실려온 영경도 죽는다. 술 마시러 나간 바람에 수환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영경에게 요양원 사람들이 지녔던 적의는, 몸이 좀 회복된 뒤 수환의 기억을 잃은 채로 온 병실을 헤매는 영경의 모습에서 눈 녹듯 사라진다. “영경의 온전치 못한 정신이 수환을 보낼 때까지 죽을힘을 다해 견뎠다는 것을, 그리고 수환이 떠난 후에야 비로소 안심하고 죽어버렸다는 것을, 늙은 그들은 본능적으로 알았다.”(39면) 그 성스럽기까지 한 유대는 연애니 사랑 따위는 가비얍게 초과하는, 빛나는 정치적 우애가 아닐까.
「삼인행」과 「층」을 전복한 것이 「봄밤」이라면, 「실내화 한켤레」를 뒤집은 것이 「이모」다. ‘나’의 시이모 윤경호의 짧지만 개결한 만년을 인상적으로 부조한 「이모」 또한 후일담이 아니다. 대학 1학년 때 아비가 술에 취해 급사하는 바람에 가장 역할을 떠맡아 일생을 독신으로 친정 뒷바라지에 골몰한 그녀는 현대판 심청이다. 심청이 심봉사를 버리고 인당수에 빠지듯 윤경호도 “쉰다섯살에 홀연 사라”(87면)진다. 어린 심청에게 열린 가능성은 이미 노년을 코앞에 둔 윤경호에겐 부재한다. 그럼에도 그녀의 자발적 실종은 아름답다. 비록 암으로 겨우 2년밖에 허용되지 않았을지언정 수녀처럼 조찰한 삶을 살아간 윤경호는 온 세상에 편만한 비천함을 견디라고 속삭이는 견인주의를 마침내 거절한 조용한 반역의 아이콘인저. 자칫 지워질 그녀의 고결한 만년이 글 쓰는 ‘나’에 의해 드러났으니, ‘나’와 이모 사이의 세대를 넘어선, 우정보다 깊은 자매애가 기룹다.
권여선의 문학에 우애와 자매애가 봉긋한 현재의 촉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론 불치병으로 뒤틀린 현재이거나(「봄밤」), 겨우 2년의 현재이거나(「이모」), 아직은 궁핍하지만, 그게 뭐 대수랴. “이제 시작일 뿐이라고, 서둘지 말자고 스스로를 타”이르며(33면), 죽음들을 예감한 영경이 나직이 읊조린 김수영(金洙暎)의 시 「봄밤」(1957)이 스승이다.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赫赫한 業績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行路와 비슷한 廻轉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人生이여
災殃과 不幸과 格鬪와 靑春과 千萬人의 生活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節制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靈感이여18)
얼핏 전란에 황폐한 시인의 삶에 바치는 노성한 위로인가 싶지만, 아니다, 뜻밖에 어조는 나직이 단호하다. 의용군과 거제도포로수용소 사이에서 격렬하게 요철한 뒤 마침내 새로 둥지를 튼 한강변 구수동(舊水洞) 집, 시인에게 찾아온 어떤 위로를 알아챈 작가의 눈이 미쁘다. 실상 이 단편집 전체가 김수영에 대한 오마주다. 전후의 폐허에 바친 김수영의 위로를 권여선은 다시 우리들의 시대, 그 비천함 속에서도 간신히 은은한 우애에 헌정한 것인데, 우애는 이미 정치다. 우애가 ‘층’ 저쪽, 가난한 사람들에게까지 어찌 확장될지는 까다로운 문제지만, 정말 ‘주정뱅이’는 ‘안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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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와카미 하지메 『빈곤론〔貧乏物語〕』, 송태욱 옮김, 꾸리에북스 2009, 7면. 이하 이 책의 인용은 본문에 면수만 표시함.
2) 나로서는 유가적 교양과 서양식 논리학이 긴밀히 협동한 상편이 가장 감동적이었다. 중·하편은 꼭 맑스주의 이전이기 때문만은 아니지만, 반(反)인간주의가 너무나 결여된 윤리주의의 과잉으로 논술도 덜 주밀한 느낌이다.
3) 데이비드 하비 「실현의 위기와 일상생활의 변모」, 백영경 옮김, 『창작과비평』 2016년 가을호 69면.
4) 이 장은 졸고 「시적 탈주와 산문적 수락 사이: 한강의 『채식주의자』」(『푸른 연금술사』 2016년 7·8월호 22~25면)에 기반한 것이다. 지난 글이 해설적이었다면 이번 글은 주관적이다.
5) 한강 「작가의 말」, 『채식주의자』, 창비 2007, 245면. 이하 이 책의 인용은 본문에 면수만 표시함.
6) 나는 물론 영혜에게 가해지는 여러 종류의 폭력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대응이 밖이 아니라 ‘나’로 내파하는 경향을 더 중시한 것이다.
7) 물론 그 과정에 영혜가 뜻밖에도 적극적으로 협력했고 순간적으로는 해방적 성격도 없지 않았다. 그럼에도 기본적으로는 성적 욕망을 예술(나는 솔직히 그게 예술인지도 모르겠다)로 자기기만하는 형부에 의한 성폭력인 점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8) 김명인 「기억과 애도의 문학, 혹은 정치학: 한강의 『소년이 온다』」, 『작가들』 2016년 가을호(인천작가회의) 207면.
9) 한강 『소년이 온다』, 창비 2014, 207면. 이하 이 작품의 인용은 본문에 면수만 표시함.
10) 이 작품에도 티가 있다. 참고로 밝혀둔다. 서울시청에 마련된 검열과에 출판사 직원 은숙이 직접 출두하여 검열을 받는 장면(76~79면)이 생생한데, 이시영에 의하면 이 살벌한 풍경은 1981년 1월 24일 계엄이 해제될 때까지다. 고3이던 1980년에 광주를 겪은 은숙이 재수해 대학에 들어간 게 4년 전(76면)으로 설정된바, 이 장면은 그러매 1980년대 중반쯤으로 될 것이다.
11) 카와까미 하지메는 가난한 사람을 첫째, 부자에 비해 가난한 사람, 둘째, 구휼을 받는 사람, 셋째, 빈곤선 아래 있는 경제학적 의미의 가난한 사람으로 나누고 셋째를 중심으로 삼았다. 『빈곤론』 32~40면.
12) 진은영 「출구 찾기 혹은 새로운 탈영토화: 카프카의 단편소설(2)」, 『들뢰즈와 문학—기계』, 소명출판 2002, 399면에서 재인용.
13) 권여선 『안녕 주정뱅이』, 창비 2016, 248면. 이하 이 책의 인용은 본문에 면수만 표시함.
14) 이경재 「기억의 형질변환: 권여선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 『문학의오늘』 2016년 가을호 285~92면.
15) 정요일 『논어강의』 天, 새문사 2009, 533면. 참고로 원문을 들어둔다. “子曰 三人行 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 여기서 ‘고친다’는 물론 내성(內省)이다.
16) 부르주아 출신 여대생 미리와 배관공 상수의 연애 전말을 그린 「섬섬옥수」에서 여주인공은 처음부터 상수를 시골집 잡종견처럼 여겼고, 상수 또한 미리를 통쾌하게 거절하는 것으로 마무리한 점에서 「층」에 비해서는 결이 덜 복잡하다고 하겠다.
17) 이경재, 앞의 글 291면.
18) 김수영 『달나라의 장난』, 춘조사 1959, 50~5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