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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탈북인의 자리를 돌아보다

 

 

고경빈 高景彬  평화재단 이사. 하나원장, 통일부 정책홍보본부장 등 역임.

 

이향규 李向珪  한양대 에리카캠퍼스 글로벌 다문화연구원 연구교수. 공저 『나는 조선노동당원이오: 비 전향장기수 김석형 구술기록』, 『북한교육 60년: 형성과 발전 전망』 등이 있음.

 

설송아 데일리NK 기자. 평안남도 출생. 2008년 탈북.

 

한기욱 韓基煜   문학평론가, 인제대 영문과 교수. 저서 『문학의 새로움은 어디서 오는가』, 역서 『필경사 바틀비』 『미국 패권의 몰락』 등이 있음.

 

ⓒ 김준연

ⓒ 김준연

 

한기욱(사회) 작년부터 부쩍 우리 사회에서 탈북자의 존재 및 발언이 부각돼왔습니다. 일부 탈북자단체의 대북전단 살포 사건이 남북관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탈북자들의 증언으로 북한인권 문제가 국제사회의 중요 현안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사회는 정작 탈북자의 실제적인 삶이나 그들의 곤경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채 탈북자를 우리 일원으로 배려하기보다 편견과 차별로 대한 건 아닌지 반성하게 됩니다. 이런 단순치 않은 문제들을 객관적이고 종합적으로 살펴보는 일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판단해서 이번 좌담을 마련했습니다. 아울러 그간 창비가 제시한 분단체제의 개념이 이 문제를 이해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될지 짚어봤으면 합니다. 전문적인 이야기보다 주로 시민적 관심사를 중심으로 하면서 탈북자 문제와 동시에 탈북자를 대하는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함께 돌아보려 합니다. 저는 이 분야의 전문가는 아니지만 문학평론가로서 우리 사회에서 특별한 자리를 점하고 있는 탈북자의 존재와 삶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오늘 모신 분들은 모두 이 분야에서 오랫동안 경험을 쌓아오셨는데 우선 자기소개 겸 주된 활동, 근황을 말씀하시면서 시작해볼까 합니다.

 

고경빈 반갑습니다. 저는 통일부 관료 출신으로 하나원(탈북자의 사회정착을 지원하는 통일부 소속기관) 원장을 역임했습니다. 지금은 평화재단에서 북한인권, 환경 문제 등을 연구하면서 활동을 돕고 있습니다.

 

이향규 저는 한양대 글로벌다문화연구원에 있고, 전에는 무지개청소년센터, 한국교육개발원 탈북청소년교육지원센터 등에서 이주청소년, 탈북청소년에 대한 교육지원, 연구, 실천 등을 해왔습니다.

 

설송아 저는 평안남도 출신이고요, 2008년에 탈북해서 2011년에 한국에 입국했습니다. 그동안 혼자 시행착오와 고비를 겪다가 현재는 북한에 대한 기사를 발췌하는 기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반갑습니다.

 

한기욱 본격적인 대화에 앞서 몇가지 개념과 상황에 대해 공유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탈북자를 지칭하는 용어와 탈북의 동기, 탈북자 현황 같은 기본적인 내용을 고경빈 이사께서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탈북자’는 누구인가

 

高 景 彬 평화재단 이사. 하나원장, 통 일부 정책홍보본부장 등 역임.

高景彬

고경빈 탈북자라고 통칭되지만 법률에서 사용하는 공식용어는 ‘북한이탈주민’입니다. 새터민, 이주민 등 나머지는 다양한 사회적 요구나 맥락에 따라 쓰이는 사회적 용어들입니다.

탈북 동기와 관련해서는, 냉전시대에는 남북 간 체제경쟁과 그로 인한 정치적 동기를 중심으로 전방 군인과 자수간첩 위주로 나타났습니다. 매년 10명 안팎의 소규모였죠. 그러다가 90년대말 이후에 남북의 국력경쟁이 종식되고 북한이 식량난과 경제난을 겪으면서 탈북자가 대량으로 발생했습니다. 그리고 2000년대 중반 이후에는 가족재결합 차원의 탈북이 늘어나는 추세라 보고되고 있습니다. 이들은 중국과 러시아를 1차 경유지로 해서 동남아시아나 몽골, 유럽 등 여러 곳에서 한국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탈북 이후 한국행까지는 사정에 따라 짧게는 수개월 길게는 수년이 걸리기도 합니다. 최근에는 한국이 아니라 제3국에 난민신청을 하는 사례도 늘고 있고, 한국 여권을 가진 상태에서 위장망명 신청 대열에 끼어드는 사례도 많습니다. 더러는 북한으로 재입국하는 사례도 10여건 보고됐습니다.

국내로 입국하는 탈북자는 최근에 증가율이 다소 감소했습니다만 매월 100여명에 이르고 누적규모는 조만간 3만명에 근접할 전망입니다. 대량탈북 가능성은 현재로서는 없지만 정국에 따라 그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기욱 탈북 문제를 다룬 소설을 보면 기획입국 가운데 인신매매와 관련된 경우가 꽤 많습니다. 정도상(鄭道相)의 『찔레꽃』(창비 2008)이나 이향규 박사님이 추천해주신 김유경(필명, 탈북작가)의 『청춘연가』(웅진지식하우스 2012)도 그렇습니다. 그런 이야기가 지금은 꽤 줄어들었는데, 실제로는 어떤가요?

 

李 向 珪 한양대 에리카캠퍼스 글로벌 다문화연구원 연구교수. 공저 『나는 조선노동당원이오: 비 전향장기수 김석형 구술기록』 『북한교육 60년: 형성과 발전 전망』 등이 있음.

李向珪

 

 

이향규 어디까지 인신매매라 규정할지 애매한 면이 있습니다. 오히려 안전을 위해 자발적으로 선택한 경우도 있을 것 같고요. 고경빈 이사님이 말씀하신 용어 문제만 해도 복잡합니다. 예를 들어 탈북청소년이라고 하면 북한에 있다가 탈출한 청소년을 말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 정부가 집계한 탈북청소년의 절반 이상은 중국에서 태어난, 북한여성의 자녀예요. 북한에 적()을 두지도, 북에 대한 기억이 있지도 않은 친구들입니다. 그냥 ‘탈북여성의 자녀’라고 부르는 게 맞는 셈인데, 이들을 어떻게 부를 건지, 과연 이들을 부르는 말이 필요하긴 한 건지 애매하죠. 물론 정책적인 용어로서 가령 지원대상을 정하기 위해서라면 필요할 수는 있어요. 그런데 이들을 부르는 정책용어가 일상용어가 되면 어떻게든 이들을 구별짓게 되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이들을 부르는 새로운 말을 자꾸 만들게 아니라 아예 특별한 용어로 구별해 부르지 말 것을 주장해야 되는 게 아닌가 생각하게 돼요. 이제 한국에서 오래 살아가야 하는데 늘 탈북이라는 정체성을 못박아두는 이름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더는 탈북이나 북에 대한 기억을 굳이 갖지 않는 상태에서도 여전히 탈북주민이라고 불리는 현실이 이들을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 만들기 어렵게 하는 게 아닌가도 싶습니다. 그 와중에 재미있는 건, 중국인 아버지와 북한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청소년들은 자신을 북한사람은 물론 한국사람으로도 여기지 않아요. 중국사람으로 여기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중국의 힘이 강하다고 생각하니까요.

 

 

한기욱 그런 경우에도 우리 사회에 오면 탈북청소년이라고 부릅니까?

 

이향규 그렇죠. 교육부에서 그렇게 집계하고 있습니다.

 

한기욱 그건 무리가 있는 것 같은데요.

 

이향규 지원을 폭넓게 한다는 의미는 있지요. 이들이 겪는 어려움이 탈북주민이 일반적으로 겪는 어려움과 비슷하다는 면에서 교육적인 지원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한기욱 그런데 북한을 실제로 이탈한 사람을 탈북자라고 부르는 것에는 양면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 명칭으로 부름으로써 그 사람이 어떻게 변하든 그 정체성에 계속 고정시켜놓는 부정적인 효과가 있지만 탈북자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해서 정체성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는 않아요. 이 명칭의 존재 자체가 지금의 현실을 반영하는 면이 있기도 하죠. 탈북자라는 정체성을 부여하는 명칭을 일률적으로 없애면 행정관리상의 문제도 있지만 그 사람이 정체성을 새로 찾아나가는 데도 꼭 바람직하지만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향규 정체성은 내가 나를 어떻게 규정하는가와 타인이 나를 어떻게 규정하는가가 맞물려서 생긴다고 봅니다. 그런데 탈북자라고 자꾸 부를 경우 전자보다는 후자가 강하게 작용합니다. 타인에 의해서 탈북자라는 사실을 계속 확인받는다는 거죠. 본인이 그렇게 불리기를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요.

 

설 송 아 데일리NK 기자. 평안남도 출 생. 2008년 탈북.

설송아

설송아 탈북자 입장에서 저나 제 주변 사람들을 보면 북한이탈주민이든 탈북자든 명칭은 별로 문제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기획탈북이라는 건 북한 내에서도 이루어지지만 여기서도 그렇게 합니다. 남한에 온 사람이 브로커를 시켜서 강제나 합의로 가족을 탈북시키기도 하는데요, 해외소식을 다 들으면서 이삼년 기획하는 거죠. 고이사님 말씀처럼 김일성정권 때는 아주 특별한 사람만 탈북을 했다면 90년대에는 굶어 죽지 않기 위해서, 생존권을 위해서 인신매매까지 포함해 여러가지 방법을 통해서 했고요, 최근에는 좀더 잘살아보자 하면서 오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이 다 기획적인 탈북으로 이어져요. 탈북자의 현황에 대해 다른 각도로 말씀드리면, 한국사회에서 보수와 진보가 갈라져서 싸우는 것처럼 탈북자도 그렇습니다. 제가 2012년 대통령선거 때 깜짝 놀랐어요. 고향친구들이랑 술 마시는 자리에서 관련 대화를 하다가 이런 건 야당 후보쪽이 옳다고 했더니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탈북자 2만명 중에 문재인 좋아하는 건 너 하나다, 네가 잘못됐다’ 그러더라고요. 참 가슴 아픈 일이지요.

 

한기욱 대체로 양분되나요, 아니면 한쪽에 치우치나요?

 

설송아 치우치죠. 95퍼센트는 보수, 새누리당 쪽으로 쏠립니다. 물론 그럴 만한 게, 북한에 ‘고양이는 쓸어주는 대로 간다’는 말도 있습니다만 이쪽이 혜택을 많이 주니까 당연한 결과기도 하죠. 그렇다 하더라도 탈북자들이 자신과 사회에 대해 좀더 객관적으로 봤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습니다.

 

 

이념적 구속과 자본주의적 유혹 사이에서

 

韓 基 煜 문학평론가, 인제대 영문과 교수. 저서 『문학의 새로움은 어디서 오는가』, 역서 『필경 사 바틀비』 『미국 패권의 몰 락』 등이 있음.

韓基煜

한기욱 탈북자가 남한사회에서 겪는 어려움은 여러 종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우선 경제적인 어려움, 특히 구직의 어려움, 그리고 북한에 두고 온 가족에 송금을 하는 데 따르는 어려움이 있겠지요. 그리고 탈북자에게는 반공·반북의 이념적 ‘구속’과 ‘유혹’이 보통 시민들보다 훨씬 클 듯해요. 또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에 적응하는 것 자체가 만만찮은데 거기에 남한사회의 광범위한 편견과 차별까지 견뎌야 하는 것이 큰 시련일 듯싶습니다. 박정범 감독의 영화 「무산일기」(2010)는 이런 어려움들을 실감나게 보여주는데, 탈북자의 고난과 존재론적 외로움이 깊숙이 느껴져요. 청소년의 경우 한국교육의 살벌한 경쟁체제에 어떻게 적응하는가도 빠뜨릴 수 없는 문제일 것 같고요. 먼저 당사자로서 설기자님께서 말씀해주실까요?

 

설송아 제 경험 위주가 될 테니 객관적으로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남쪽으로 넘어와서는 우선 먹고살려면 돈을 벌어야 되니까 신문 같은 데서 알바 자리 찾아서 무조건 전화해봐요. 우리는 말투가 특이하잖아요. 듣고 바로 끊어버려요. 그 스트레스가 말도 못합니다. 이렇게 말투 때문에 취업을 못하는 상황이 상당히 오래 지속돼요. ‘취업성공패키지’ 프로그램에 들어가면 정부에서 장려금을 준다기에 공부 열심히 했어요. 근데 문제는 같은 고졸이라 하더라도 북한의 평균 교육수준이 낮다는 데 있습니다. 단순직이라도 취직했다가 한달 만에 쫓겨나요, 따로 더 공부하기 전에는. 한마디로 취직에 있어서 어려움을 많이 겪습니다. 둘째는 시스템 문제입니다. 자본주의 시스템을 너무 모르잖아요. 예를 들면 대출보증이 어떤 것인지 모르다보니까 막 사인해준단 말이에요. 가령 한국 남자친구한테. 따뜻하게 대해주지 않아도 한국 남자들의 말투 한마디에 녹는 게 탈북자예요. 정말로요. 한국 남자들에겐 아주 평범한, 가방 들어주는 매너에 40년 동안 살아온 여자가 한순간에 녹아버립니다.(웃음)

 

한기욱 앞서 언급한 소설 『청춘연가』에도 그런 대목이 나오더군요.

 

설송아 그렇게 대출보증 서명, 수입자동차 구입 사인을 아무렇지 않게 하고 나면 다 뒤집어쓰는 거예요. 그뿐 아니라 탈북자들이 자유에 대한 개념을 잘 모르는 데서도 문제가 생깁니다. 자유가 방종으로 간다고 할까요. 물론 어려운 취업과도 관계 있어요. 상대적으로 누구는 잘나가는데 나는 안되고…… 그러면서 쉽게 돈 버는 방법을 찾는데, 딱 두가지에요. 통일·안보 강의와 노래방 아가씨. 완전히 극과 극인데 다 문제가 있죠. 사상적인 면에서 어려움도 있어요. 저희 옆집 할머니가 저희 집에 자주 놀러 오셨거든요. 기독교 전도하려고. 한번은 북한이 다들 굶어 죽고, 때려 죽이고 싶은 나라라길래 ‘북한이라고 다 나쁘지 않다, 잘사는 사람도 있고 못 사는 사람도 있으니 양쪽을 다 봐 달라, 뉴스에서도 북한을 제대로 봐야 한다’고 했더니 그 순간 그분이 완전 나를 무슨 간첩 하나 잡은 것처럼……(웃음) 지금은 그분하고는 대화 안해요. 이렇게 사람들이 북한에 대해 편견을 가지니까 이웃관계에서부터 조심스럽죠.

그다음에, 저희 아들이 작년 하반기에 한국에 들어와서 하나원에 있다가 지금 두달째 같이 지내는데요, 아들을 보면서 교육문제에서도 느낀 점이 있어요. 탈북학생들이 대체로 신체가 작거든요, 실력도 낮고. 이게 우선 정착에 걸림돌이 되더라고요. 저희 아들은 비교적 신체도 좋고 공부도 잘하는 아이인데도 다른 애들 농담조차 못 알아듣겠대요. 새 신발을 신고 나갔는데, 장난삼아 새 신발을 밟는 한국 아이들 또래문화가 있던 걸 몰라서 자기를 천시하는 줄 알았대요. 물론 이런 건 쉽게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이겠지만요. 하다못해 말투가 다르면 장볼 때 사천원 하는 걸 만오천원 부르거든요. 저도 이런 바가지 너무 많이 썼고 지금도 당해요. 그게 나 혼자 당할 땐 모르겠는데 아들한테 그런 일이 생기는 건 정말 참지 못하겠더라고요.

 

 

한국사회 적응과 정착의 어려움

 

고경빈 탈북자의 한국사회 정착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죠. 탈북자 중 절반 이상이 국내에 입국한 지 5년 미만입니다. 우리도 과거 1960년대에 무작정 상경했을 때 5년 만에 자리잡는 게 참 힘겨운 일이었듯이 이들은 특히나 체제가 다른 상황에 적응해야 돼서 지금 말씀하신 어려움이 빠른 시일 내에 해소되긴 어려운데,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표상으로 보면 생활은 좀 나아지고 있습니다. 탈북자 실업률을 보면 2007년에는 22.9%였는데 2010년에 9.2%, 작년에는 6.2%까지 낮아졌습니다. 물론 이것도 아직은 일반 국민의 두배 수치이긴 합니다. 아이들의 경우 초··고 학업중단 비율이 20077.1%에서 작년 2.5%로 낮아졌습니다. 다만 이 역시 일반 학생의 두세배에 달하는 형편이죠.

 

한기욱 정책적인 차원과 다르게, 하나원장으로 재직하시면서 사회에 합류하기 전인 탈북자를 많이 접하셨을 텐데 이들이 하나원 과정을 마치고 사회에 적응하는 단계에서 특히 힘들어하거나 괴로움을 느끼는 요인은 어떤 거라고 보십니까?

 

고경빈 심리적인 요인이 가장 크다고 봅니다. 고향을 떠나 많은 장벽에 부딪치면서 이들이 느끼는 불안감과 고향을 버렸다는 죄책감은 경제적으로 성공한다 하더라도 평생 따라다닐 겁니다. 그런 것들이 사회활동이나 가정생활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죠. 그래서 탈북자가 우리 사회에 정착할 때 긴요한 것은 가족결합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족과 같이 사는 탈북자와 달리 혼자 지내거나 중국, 북한 등지로 이산되어 생사조차 알 수 없는 가족이 있는 경우에는 아무리 남쪽에서 환경이 갖춰지더라도 제대로 정착하기 어렵습니다.

 

이향규 한 학생을 5년간 계속 추적 인터뷰하는 ‘탈북 청소년 종단 연구’를 제가 5년째 하고 있는데요. 5년 정도 지나면 많은 경우에는 결국 정착하는 것 같아요. 청소년들은 훨씬 더 그렇죠. 일단 남한 말이 되니까요. 그런데 이 아이들을 최종적으로 잡고 있는 걸림돌이 바로 어머니의 건강이더라고요. 어머니가 정신적으로든 신체적으로든 온전하지 않으면 가족 자체가 흔들리는 경우가 많아요. 어머니가 건강하지 못한 이유엔 여러가지가 있죠. 가족이 흩어진 탓에, 여기 오는 과정에서 겪은 온갖 트라우마적인 사건에…… 1세대의 건강 문제가 2세대의 정착에 결정적인 어려움을 가져오는 만큼 이에 대한 우리 사회의 지원과 관심이 많이 필요합니다.

 

한기욱 설기자님도 심리적인 어려움을 경험하셨을 법한데요.

 

설송아 그렇죠. 제가 처음에는 정착하는 게 본인의 의지에 달렸지 가족이 무슨 문제냐 그랬는데 아니었어요. 저희 아들이 오기 전에는 먹을 게 하나 생겨도 안 넘어갔거든요. 칼로 찢기는 듯한 마음 있잖아요. 그래서 솔직히 이걸 해소하기 위해 누군가를 사귀다가 실패도 했고요. 그랬는데 이제 아들이 옆에 있으니까 세상이 다르게 보여요. 전에는 가족이 있는 탈북자가 더 정착을 잘한다는 말을 들으면 내가 얼마나 정착 잘하나 두고봐라 했는데 그 말이 이거였구나 싶죠.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상한 길로 빠지기 쉬운 것 같아요. 또 누가 그러더라고요. 5년 딱 지나니까 개구리가 막을 벗듯 한국이 보인다고. 제가 4년 됐는데 이제 조금 보이기 시작해요. 예를 들면 그동안 의료보험을 모르고 살았거든요. 병원에서 치료받을 때도 그냥 다 제값 내고 했어요. 이런 식으로 시스템이 이제야 보이기 시작해요. 그런데 탈북자들이 이렇게 한국사회를 알게 되면서 착실하게 일할 생각을 안하고 이걸 역이용하기도 해요. 이혼 위자료라든지 보험금이라든지.

 

 

정체성의 혼란과 심리적 압박감

 

한기욱 탈북자들이 느끼는 불안에는 아까 고이사님 말씀처럼 고향, 조국을 배신했다는 심리적인 요인도 작용했을 겁니다. 이런 것은 보통의 심리적인 문제와는 달리 정체성에 영향을 주는 트리우마적인 경험일 수 있습니다. 탈북자는 하나의 뚜렷한 정체성을 갖지 못하고 북한사람, 남한사람, 난민 등 여러 정체성에 걸쳐 있는 존재랄 수 있는데, 한국사회는 그런 탈북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비정상적인 존재로 따돌리기 일쑤지요. 비단 탈북자뿐 아니라 이주노동자나 성소수자에 대해 그러듯이 우리 주류사회는 정체성 문제에서 대단히 배타적이죠. 요컨대 탈북자의 다중 정체성이 우리 사회의 단일 정체성 지향과 맞닥뜨리면서 다중 정체성을 가진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지 못하는 한국사회의 문제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것 같아요. 이런 면을 이향규 박사님이 짚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이향규 사실 한국에서 살아온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아요. 정치적 성향만 모든 면에서 보수적이거나 진보적인 게 아닌데, 다들 누군가를 하나의 카테고리로 설명하고 정체성을 규정하고 싶어하잖아요. 누군가를 규정하고 자신도 그렇게 규정받으면서 사는 사회인 만큼 거기 들어온 탈북자를 더 힘들게 만들죠. 아까 기자님이 말씀하신 옆집 할머니는 기자님을 좋아할 때가 있고 좋아하지 않을 때가 있을 것 같아요. 좋아할 때는 기자님이 탈북민다울 때예요. 북한에 대해 좋은 얘기를 하는 건 탈북민답지 않은 일이죠. 굳건하게 정착해가서 남한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상태가 되는 것이야말로 탈북민답지 않은 모습이겠고요. 탈북민다울 때 돕겠다고 하는 주류사회의 생각은 대단히 큰 문제입니다. 우리가 주로 한국에 있는 탈북자를 얘기하지만 제가 인터뷰한 사례 중에 캐나다에 위장망명했다가 들어온 청년이 있어요. 그가 말하길 캐나다 한인사회에서 처음에는 탈북민을 많이 도와준대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한인사회 어른들이 영어도 그렇게 잘하지 못하고 캐나다 시스템도 잘 모르는 것 같더래요. 나중에 자기가 한인사회의 한계를 넘어서 캐나다 사회로 들어갈 수 있게 됐을 때 한인사회를 떠났어요. 그러자 바로 배은망덕한 놈이 된 거죠. 사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인데요, 우리는 이들이 도움받을 위치에 있도록 요구하고, 그것을 넘어서면 불편해하거나 아니면 여전히 도움이 필요한데도 도와주려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제가 만난 사람들은 주로 청소년이기 때문에 성인과는 조금 다를 순 있을 거예요. 이 아이들은 사실 공부 못하고 키 작고 그래서 열등감을 갖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오히려 한국 아이들이 자기에 비해서 철이 없다고 생각하는 마음도 갖고 있어요. 그건 이들이 경계를 넘어서는 성장의 경험을 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여요. 국경이든 사회적·문화적 장벽이든 경계를 넘어서본 사람들은 어떤 힘을 갖게 되는 것 같아요. 이 아이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배우고 성장해가는데, 이들을 탈북자로만 규정하고 자꾸 탈북 초기의 어려움에만 주목하는 것이 이들을 과거에 속박시켜놓을 뿐 다른 면에 대해 별로 관심 갖지 않게 하는 것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이런 태도는 이들이 뭔가 부족한 것이 많고 도움이 필요한 존재라 한국인이 도와줘서 여기 적응하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에 기반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해요. 그런데 흥미로운 일은, 제가 인터뷰한 어떤 학생의 어머니가 처음에는 자식이 한국 애처럼 됐으면 좋겠다고 하다가 5년쯤 지나서는 한국 애가 다 되어간다고 걱정을 하는 거예요.(웃음) 북에서 철 다 들어서 ‘한국물’ 안 들을 만할 때 데려왔으면 좋았겠다고 하면서요. 철없는 한국 애처럼 행동하는 아들이 한심해 보인 거죠. 그러고 보면 사실 이들이 다 한국사람이 되려는 열망을 갖고 있다고 보기도 어려운 것 같아요. 그렇다면 한국사회가 만들어놓은 한국인의 모습이 과연 어떤 것인가에 대해 우리가 성찰해볼 필요가 있겠죠.

 

한기욱 저도 문학평론하고 미국문학 공부하면서 정체성 문제를 많이 생각하게 되는데 참 단순치 않습니다. 남한에 온 탈북자의 경우 같은 민족이라는 하나의 포괄적인 정체성이 없지는 않지만 현실적으로는 북한사람, 남한사람, 혹은 난민의 다중적인 정체성이 두드러져요. 또 소수자이자 이주자고요. 우리 사회에서 이주자는 대부분 소수자 신세가 되지요. 우리 사회에서 소수자는 외국인 노동자, 해외 입양아, 성소수자 등 상당히 다양해지고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탈북자는 그들 중 하나일 뿐인지, 아니면 좀 다른 특징이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설송아 저로서는 이게 참 중요한 질문입니다. 우리도 그런 생각 많이 하거든요. 말만 한민족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대하느냐 하는.(웃음) 우선 제가 겪은 일을 말씀드리면, 경찰이 ‘안보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정착수기를 내는데 북한에서 고위급을 지내다 탈북한 분이 거기 실릴 자기 이야기를 저한테 글로 써달라 부탁하길래 인터뷰를 거쳐 써줬어요. 그런데 북에서 아예 못 먹고 못살았던 걸로 해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사실 그대로 해라, 거기서도 잘나갔지만 한국에 오니까 뭐가 좋더라는 식으로 비교해야지 북한이 아무리 못살아도 고위급 간부가 죽이나 먹고 살진 않는 걸 내가 뻔히 안다고 했더니, 경찰이 그걸 요구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그렇게 못하겠다고, 그거 써서 몇십만원 타겠다고 계속 거짓말 하겠느냐고, 진실을 얘기하라고 했어요.

다중 정체성과 관련한 또다른 경험은, 지난해 인천아시안게임 여자축구 첫 시합인 북한과 베트남 경기를 탈북자들끼리 모여서 봤거든요. 그런데 다들 베트남을 응원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래도 우리 고향 아니냐, 잘못된 건 바로잡기 위해 투쟁하지만 고향에 대한 사랑을 버리면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정체성이 없는 거라고 했더니, 누가 저한테 네가 잘못 생각한 거다, 이게 바로 종북이다 이러는 거예요.(일동 웃음) 제가, 저기서 네 동생이 공을 차고 있어도 저쪽을 응원할 거냐 물었더니 북한 응원하는 대신 동생을 당장 끌어다가 한국에 데리고 오겠대요. 더 말했다가는 싸움 벌어지겠구나 싶어서 그쯤에서 말았어요. 그때 제가 뭘 느꼈느냐면 나는 내 정체성을 모르겠다는 거예요. 탈북자들 열명 만나면 다 북한을 주먹질하는데, 사실 저도 분명 비판을 하거든요. 하지만 너무 사랑해요. 그러면 이게 뭐냐, 말하자면 이중사상파인 건가 싶어요. 누구한테 물어봐도 안타까워할 뿐 답을 못해주는데요, 이렇게 되면 더구나 글쓴다는 사람이 머리에 따라서 글이 달라지잖아요. 이런 정체성의 문제가 한국사회의 문제인지 내 문제인지 다른 탈북자들의 문제인지 모르겠습니다.

 

한기욱 저는 기자님이 주위 사람들보다 정체성 문제에 대해서 훨씬 잘 대처하고 있다고 봅니다. 말씀하신 다른 탈북자들의 모습은 북한이라는 국가와 북한주민을 구별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보니 벌어지는 현상이죠. 북한체제에 반대하더라도 북한주민을 생각한다면 그들이 뛰는 경기를 응원 못할 이유가 없잖아요.

 

 

너는 누구 편이냐고 묻는 한국사회

 

고경빈 제가 하나원에 있을 때 남아공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이 있었어요. 모처럼 남북한이 경기를 하니까 다 같이 모여서 공동응원을 하기로 했습니다. 당직선생 혼자 남아서 교육생들이랑 티비를 봤는데 경기가 시작될 무렵 어느 쪽을 응원해야 될지 교육생들이 눈치를 보더랍니다. 그러다가 교육생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아지니까 일방적으로 북한 응원이 시작됐고요. 경기는 남한이 1:0으로 이겼습니다. 골이 들어가는 순간 당직선생 혼자 ‘골인!’을 외치고 주위는 잠잠했대요.(웃음) 하나원 안에서는 이게 가능한데 밖에 나가면 말씀하신 것처럼 북한 응원 안하고 오히려 상대방을 응원하게 되는 것이, 내가 이 땅에서 살려면 이런 식으로 여기에 맞는 정체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거거든요. 그건 탈북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문제지요.

우리 사회에 있는 외국인 등 소수자들과 탈북자가 뭐가 다르냐는 질문에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외국인 이주자는 우리 사회에서 미래에도 소수자로 남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탈북자 집단은 비록 지금 수는 외국인보다 훨씬 적지만 통일된 이후에는 주류사회에서 같이 살아갈 사람들이거든요. 이런 사람들한테 소수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지라고 하는 것은 장래를 봐서도 맞지 않을 것 같습니다. 과거에 삼국통일을 했을 때도 신라가 통일을 한 다음에 백제, 고구려적인 요소나 문화를 완전히 말살했다면 삼국통일의 의미가 뭐가 남았겠습니까. 그런데 그걸 방해하는 요소가 우리 사회에 많이 남아 있습니다.

 

한기욱 탈북자 문제가 아니고 우리 사회의 문제라고 하셨는데 책임 소재를 가리자면 그렇지만 저는 양쪽이 연동되어 있다고 봅니다. 일단 남한사회에서 탈북자를 이미지화해서 역할을 부여하기가 쉬워요. 가장 대표적인 것이 북한을 비난하게 하는 역할이지요. 분단체제론으로 보면 남북 양쪽이 서로 대결을 하는 양상이지만 실은 그렇게 분단이 유지되면서 기득권 세력은 양쪽 다 잘살아요. 문제는 국민이나 인민이 그 아래에서 희생을 치르게 되는 구조인데 탈북자에게는 남북대결을 조장함으로써 그런 분단체제를 앞장서서 수호하는 역할이 부여된다고 할까요. 그리고 우리 사회가 소수자를 잘 조명해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탈북자 경우에는 종편(종합편성채널)에서 조명하고, 삐라 사건에 대해서도 대대적으로 보도해요. 가시성을 주는 건데 이 가시성은 그 자체로도 진정한 정체성에 기반한 것이 아닐뿐더러 조명받지 못하는 다수 탈북자의 삶을 왜곡할 우려가 있어요. 요컨대 불가시성과 아울러 오도된 가시성을 부여받고 있는 게 탈북자 아닌가 합니다. 그래서 탈북자가 정체성 문제에서 이중으로 힘든 면이 있는 것 같아요. 한반도 주민으로서는 옛날에는 한민족 동포라고 얘기했지만 요즘에는 민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의심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질뿐더러, 일단 만났는데 서로 정치체제가 다르니까 눈치 보면서 남한의 주류사회 편에 서는 게 안전하다면서 그쪽으로 가는 거지요. 그 과정에서 정체성을 남한 주류사회로 정말 옮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숨기는 사람도 있겠고요. 그런데 혹시 젊은 세대는 당당하게 자기는 이렇다고 말하기도 합니까?

 

이향규 그렇지도 않습니다. 초··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탈북학생의 65퍼센트가량이 자기가 북에서 왔다는 얘기조차 하지 않는다는 조사가 있습니다. 말해도 득 될 게 없으니까요. 다만 탈북해서 한국에서만 지낸 경우와, 영국이나 캐나다, 미국 등을 거쳐온 경우는 좀 다릅니다. 후자는 비교적 한국사회에서 자신의 위치를 상대화할 줄 압니다. 밖에 나가보니까 자신이 탈북자가 아니라 코리언 혹은 아시안처럼 더 큰 집단에 속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다른 한편에서는 집단이 중요한 게 아니라 개인이 중요하더라 하는 시야를 갖게 되는 것 같아요.

 

한기욱 밖에 나가면 코리언이라는 정체성이 의지할 수 있는 것이 되는데 여기서는 편을 가르는 거죠. 주류사회와 약간 어긋나면 종북 딱지를 붙이고요.

 

이향규 『청춘연가』에서 “그 세상으로 절대 가고 싶지 않지 않지만, 그 시절로는 돌아가고 싶다”라는 표현을 인상적으로 읽었습니다. 우리는 그걸 인정해주지 않는 것 같아요. 시절이라는 게 한 사람의 역사인데 그것까지 부정해야 우리 편이라고 생각하지요.

 

고경빈 탈북자는 북한에서 여러 어려움을 겪다가 떠났기 때문에 북한 당국에 대해 원망이나 거부감을 갖게 됩니다. 북한이 싫다고 얘기하는 것도 정상적인 반응입니다. 우려할 점은 남한사람도 북한이 좋으냐 싫으냐 할 때 자기 선호가 있듯이 탈북자도 그 선호가 분명히 있음에도 탈북자에게는 좀더 특별한 사회적인 질문이 되는 겁니다. 너는 북한 편이냐 남한 편이냐는 거죠. 이것을 버텨내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한국에 들어오는 순간 북한과 관련된 것은 다 버려야 되고 남한에 관련된 것은 모두 무비판적으로 합리화해버립니다. 그래서 아까 설기자님 말씀대로 유흥업소 같은 데 취업을 해도, 자본주의사회에서는 돈 벌기 위해서 이런 일도 할 수 있는 거라고 자기합리화를 쉽게 합니다. 그렇게 사회에 무비판적으로 되는데 이것은 결국 정상적인 정착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정부와 민간의 지원은 적절한가

 

한기욱 탈북자에 대한 지원 문제에 대해서도 얘기 나눠볼까 합니다. 당국 차원의 지원이 있고 시민사회와 종교단체 등도 지원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여러 지원이 적절히 잘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겠지만 어떤 후유증이나 문제점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탈북자 지원의 현 단계를 짚고 앞으로 어떤 식으로 나가면 좋을지 방향성을 논해보고자 합니다. 초기의 지원은 적응과 정착 면에 많이 힘을 쏟았는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쪽으로 근래의 논의가 모아지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문화라든지 통합이라든지 하는 개념도 생기고 또 그 이상의 논의가 있는 것 같습니다.

 

고경빈 정부 차원의 탈북자 지원정책은 지금까지 시대환경 변화에 따라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휴전 이후 냉전시기에는 귀순자를 체제경쟁 차원에서 영웅으로 대접했습니다. 그래서 업무도 원호처, 지금의 국가보훈처가 담당했고 보상금이 엄청나게 높았죠. 그러다가 90년대초 북한 식량난으로 대량탈북이 발생하고 탈북자 입국 규모가 늘어나면서 탈북자를 난민으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때 업무가 보건복지부로 옮겨졌습니다.

그런데 보건복지부에서 저소득층이나 취약계층으로 탈북자를 바라보고 시행한 정책이 현실적으로 문제가 많았습니다. 탈북자와 우리 사회 저소득층 내지는 취약계층의 근본적인 차이는, 탈북자는 더 나은 삶에 대한 의지가 대단하다는 거죠. 탈북자의 특성을 감안해서 보니까 과거에 영웅으로 보던 관점이나 난민으로 보던 관점이 국가재정의 입장에서 공통점이 있는 거예요. 둘 다 남한사회에 와서 일하지 않아도 국가가 다 뒷받침을 해주는 거죠. 그래서 새로운 정책방향은 이들의 의지를 살려서 자활여건을 만들어주자는 겁니다. 보상금을 주는 대신에 아이한테는 학교에서 공부 잘할 수 있도록 취학지원을 해주고 어른한테는 우리 사회에서 자립할 수 있도록 취업지원을 해주는 방식으로 바뀐 거죠. 작은 통일의 실험장이라는 생각에서 통일부가 이 업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탈북자의 정착지표가 조금씩 나아지면서 새로운 관점이 제시되고 또 한번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요구가 많습니다. 지금까지는 정착지원이 탈북자 개인의 복지 차원에 머물렀다면 이제는 정부가 막대한 재정을 들여서 지원을 하는 만큼 탈북자 호주머니로만 들어갈 게 아니라 우리 사회의 전체적인 역량으로 남아야 한다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 사회의 포용성 등 뭔가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이 탈북자 정착지원의 궁극적인 목표가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것이 진정한 통일준비가 아니겠느냐 하는 시각입니다.

또 최근에 눈에 띄는 현상은 탈북자가 지역사회에 정착하면서 지방정부의 관심이 많이 늘어났다는 겁니다. 바람직한 모습이죠. 중앙정부가 탈북자 정착지원 업무를 맡음으로써 탈북자 업무가 과잉 정치화되는 면도 있었는데 지방정부가 맡음으로써 지역주민의 일원으로 보고 민생 내지는 생활 위주로 정책을 펼칠 것으로 기대됩니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역할을 분담하면서 궁극적으로는 민간과 지방정부가 정착지원을 맡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향규 탈북자의 자활의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있습니다. 강서구의 한 중학교인데요, 전교생 500명 중 탈북학생이 25명, 5퍼센트 정도예요. 교육부로부터 교육복지 우선지원사업이라고 해서 취약계층에 대한 지원을 받는 학교였어요. 2010년도였나, 그 지원을 받는 학생들 중에서 1년 동안 성적이 가장 많이 오른 학생 10명을 뽑은 분석보고서를 봤는데 5퍼센트밖에 안되는 탈북학생이 명단의 10명 중 7명을 차지했어요. 멘토링이든 기초학습지원이든 교사가 도와줬을 때 이 아이들은 한국의 학업부진 청소년보다 훨씬 더 성장한다는 거예요. 탈북학생에 대한 지원이 한국학생에 대한 역차별 아니냐는 반문에 대해서 담당교사는 ‘그렇게 볼 수 있다, 그런데 효과가 있다, 그에 비해 한국학생들은 훨씬 더 어렵다’고 해요. 이것은 아까 한선생님 말씀대로 이들이 소수자이지만 정책적인 조명을 받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겠지요. 한국의 취약계층보다 훨씬 많은 기회를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고요.

교육 분야에서 쟁점이 되는 부분은 특례입학입니다. 탈북학생들은 대학에 갈 때 재외국민특별전형 적용을 받아 정원 외로 들어가니까요. 한동안은 ‘좋은 대학’을 많이 가기도 했고요. 한국 아이들처럼 열심히 공부해서 가는 것과 다른 경로로 대학을 가니까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거나, 좋은 학교를 나와도 직업을 얻는 데는 실패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렇다보니 취업에 대해서도 쿼터를 요구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리고 탈북학생들은 등록금도 면제됩니다. 알바해서 등록금을 마련하고 있는 일반 학생들과 다른 삶을 갖게 되는 건데 자신이 노력해서 얻은 게 아니기 때문에 역시 문제가 생기죠. 초등학교 때 한국에 들어와서 여기서 학교를 계속 다녔어도 받는 혜택이라 이것이 이들의 정착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목소리도 큽니다. 영웅으로 받들었던 귀순자 시절부터의 정책이 이제는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아요.

 

한기욱 다른 저소득계층과 비교해봤을 때 지원이 더 가고 지원한 만큼 효과도 있긴 한데 고등학교까지는 그러더라도 대학까지 특례입학과 등록금 전액 면제면 상대적인 위화감이 생길 수 있겠습니다. 이 문제를 어떤 식으로 접근하면 좋을지 설기자님께서 한말씀 해주시죠. 아드님은 그 혜택을 받을 수 있죠?

 

설송아 저희 입장에서는 참 고마운 부분이죠. 그런데 조금 멀리 보면 위험한 구석도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실제로 접해본 경우인데, 혜택을 받아서 서울대 들어가고 석사학위까지 땄는데 문제는 실력이 없다는 거예요. 나가면 경쟁에서 지죠. 이렇게 되는 데는 구조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탈북자가 대학에 가서 여태 못 배운 데 대한 공백을 채우고 심리적인 치유를 얻는 것은 참 좋아요. 그런데 본인이 노력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이런 한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이겨내지 못하면 오히려 정착이 어려워진다는 한계점이 있어요. 탈북자가 받는 취업자금이 있는데, 전에는 그냥 다 줬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일을 해야 주거든요. 1년 일하면 500만원, 3년 일하면 1800만원. 이 취업자금 타기 위해 열심히 일한다는 사람이 제 생각에 30퍼센트는 되는 것 같아요. 정착으로 이끄는 참 좋은 정책이죠. 그런데 문제도 있어요. 그걸 타려는 목표로 열심히 일하다가 돈을 다 받으면 일할 의욕을 잃고 기초생활수급자로 살아갈 빈틈을 찾습니다. 또다른 문제는 제도적 차원인데, 제가 받는 월급이 130만원이에요. 저희 아들까지 왔는데도 기초생활보장, 한부모가족지원 같은 복지혜택을 하나도 못 받아요. 내가 일한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요. 이게 제가 불만입니다. 일하는 사람이 오히려 혜택을 못 받는 게 뭔가 싶어요. 저도 사직하면 이거 다 탈 수 있어요. 기초생활수급비 86만원, 한부모가족지원 25만원에다가 교회 한두군데만 다니면 40만원 들어오거든요. 그러면 벌써 지금 월급보다 많잖아요.

 

한기욱 그런데 교회에서 나오는 돈은 어떻게 받는 거예요? 무슨 역할이 있나요? 일종의 증언 내지 간증을 하기도 한다던데요.

 

설송아 4회만 나가면 25만원, 30만원 그냥 줍니다. 무슨 증언을 하면 또 한 30만원 주고요. 보통은 그냥 나가서 앉아 있으면 되는 거예요. 탈북자를 얼마나 모았는지가 교회에서는 일종의 실적이랍니다. 아무튼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저처럼 130만원 이외에는 복지혜택을 아예 못 받는다고요. 참 고마운 제도도 있지만 이렇게 빈 구멍이 있습니다. 솔직히 저도 요즘 많이 흔들려요. 퇴직하고 내일 당장 그런 지원금에, 교회에……

 

한기욱 그렇지만 일하면서 돈 버는 게 훨씬 떳떳하지 않습니까?

 

설송아 맞아요. 그래서 하루에 열두번씩도 생각이 바뀌는데 내일 당장 퇴직해야지 하다가, 아니다, 그러면 사는 맛이 있겠나, 멀리 보자 이렇게 다잡아요. 전에는 몰랐는데 제가 일하는 게 아들이 정착하는 데도 힘이 되더라고요. 우리 엄마는 나가서 이런 일 해, 이런 식으로.

 

이향규 몇년만 지나면 지금의 몇십만원 차이는 아무것도 아니게 될 거예요.

 

설송아 알겠습니다. 힘 받아서 퇴직 안하겠습니다.(웃음)

 

 

반북정서 조장 활동에 동원되는 이유

 

한기욱 다음으로 탈북자의 정치적 활동과 관련한 이야기로 넘어가겠습니다. 탈북자단체 주도의 대북전단 살포 문제나 북한혐오증을 확산하는 종편방송 출연 같은 문제가 있습니다. 각종 반북강연에 동원되기도 하죠. 이 가운데 특히 작년부터 삐라 사건이 우리 사회의 문제로 대두되었습니다. 남북화해의 새로운 계기마다 그것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고 있어요. 대표적으로 작년 인천아시안게임에 북에서 서열이 상당히 높은 세 고위급 관료가 전격 방문해서 잠깐 화해분위기가 조성됐는데, 다른 요인도 물론 있었겠지만, 거기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 삐라 사건이었습니다. 대북전단 살포는 더구나 휴전선 인근 주민의 생명과 재산을 위협하는 행동이라서 주민들이 반대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박근혜정부는 이것이 표현의 자유에 속하기 때문에 막을 법적 근거가 없다는 입장입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봐야 할까요? 찬반이 있겠지만 이 문제도 그렇게 단순치는 않은 것 같습니다.

 

고경빈 대북전단 살포를 막을 법적 근거가 없다는 말은 맞습니다. 그렇지만 다음 두가지 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첫째, 휴전선은 남북의 중무장 군사력이 대치 중인 아주 민감한 지역이죠. 그래서 군사작전에 지장을 주는 행동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반인의 전방 출입을 통제하는 민통선이 존재하는 겁니다. 이 지역에서는 사소한 사건도 무력충돌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니까 안전장치 마련이 필수입니다. 둘째, 이렇게 우발적인 무력충돌이 발생하거나 발생할 우려가 있는 상황에서는 휴전선 인근 주민의 피해가 예상되죠. 역시 이들의 인명을 보호하고 재산상의 손실을 보장한다는 담보가 필요합니다. 대북전단 살포가 남북관계의 악화나 왜곡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은 논외로 치더라도 이러한 안전장치 없이 수수방관하거나 쩔쩔매는 행태는 책임있는 정부의 자세가 아니라고 봅니다. 아울러 우리는 북한에 의한 간접 침략행위에 대처하기 위해서, 즉 안보를 위해서 국가보안법으로 국민의 자유 일부, 특히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제한을 감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삐라 살포의 자유를 위해서 남북 간의 우발적 군사충돌을 감수해야 한다는 논리는 보안법의 입법 취지와도 모순됩니다.

 

이향규 안전장치가 필요하다는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런데 삐라 살포를 탈북단체들이 나서서 하고 있긴 하지만 사실 시장의 지원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거잖아요. 종편이 있고 그들을 지원하는 돈이 있죠. 그래서 사실 탈북단체가 이 일을 하는 걸 문제 삼기 이전에 그것을 가능케 하는 시장의 문제에 주목을 하면 탈북주민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주민은 마치 씨앗 같아서 어떤 토양에 떨어지느냐에 따라 달라지거든요. 우리 사회라는 토양 자체가 이들이 이런 행동을 하도록 만드는 거니 그렇게 발아된 탈북주민을 비난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해요. 고향에 대한 죄의식이든 뭐든 자신의 감정에서 이 일을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고요. 결국 분단체제가 만들어낸 토양이 이 문제에 훨씬 책임이 큽니다.

 

설송아 저는 열아홉살 때 황해도 연안에 갔다가 삐라를 처음 봤어요. 보통 사람은 보지 못하게 하고 조직책임자들이 삐라 모으는 일을 하는데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몰래 봤죠. 김일성은 독재자라고 쓰면서, 우리가 화요학습이나 토요학습이라고 하는 사상교육을 받는 모습을 포승줄에 묶인 사람으로 표현해 만화로 보여주는데, 그 순간에 제 의식이 확 계몽됐어요. 지금도 그게 제가 세계를 합리적으로 보는 데 기여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삐라가 북한주민의 암흑을 밝히는 데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긍정적으로 봐요. 그런데 문제는, 일단 삐라가 제대로 가지도 못한다는 겁니다. 그전에는 정부가 뿌렸는데 지금은 민간단체가 하니까 한계가 있겠죠. 아주 보수적인 단체에 있는 사람들도 이 점은 비판합니다. 일종의 쇼라는 거죠. 둘째는, 탈북자가 이용당한다는 점이에요. 저는 삐라를 북한사람들한테 보내는 것까지는 좋은데 마치 북한체제에서 김정은을 당장 교체할 거라는 식으로 현실을 왜곡하는 데는 반대합니다.

좀 다른 얘기지만 종편의 <이제 만나러 갑니다>(‘남북 소통 버라이어티’를 표방하는 채널A의 프로그램으로, 탈북자와 연예인 들이 출연해 북한에 대해 이야기하는 토크쇼편집자)를 딱 두번 보다가 티비를 꺼버렸어요. 저만 그런 줄 알았는데 입만 열면 북한 욕하는 탈북자들도 저건 잘못됐다고 그래요. 있는 그대로 말해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아요. 가령 병원에 북데기(돼지우리에 까는 볏짚을 가리키는 말편집자)를 깐다는 거예요. 북한의 상황을 아주 안 좋게 표현해야 관심을 끄니까 이상한 발언을 늘어놓죠. 저는 그런 것에 분노해요. 북한의 구조적인 문제들은 비판해야죠. 병원이 한심해서 담벽이 무너지고 벌레가 나오고 환자에게 약이 잘 안 돌아가는 것은 그럴 수 있다고 인정해요.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북데기는 없거든요. 이런 사람들이 쉽게 돈 벌려고 어디 방송 출연할 데 없나 기웃거려요. 제가 예전에 강연을 나가서 북한 시장경제에 대해 설명했더니 질문이 딱 들어와요. 너 거기서 그렇게 밥 먹고 살았으면 여기 왜 넘어왔느냐, 그렇게 북한이 좋으면 여기 왜 왔느냐는 거예요. 그때 얼굴이 달아올랐던 거 생각하면…… 저는 좋다고 말한 게 아니고 이런 상황도 있다, 진짜 죽도 못 먹는 사람도 있고 성공한 사람도 있다는 걸 알리려던 건데요. 그다음부터 요만큼도 그런 말 안해요.

 

한기욱 그러면 강연 초청 못 받으실 것 같아요.

 

설송아 다 잘렸어요. 사람들이 어떤 강연을 좋아하나 봤더니 ‘저는 집도 없었고 해진 옷도 못 입고 어머니와 동생은 굶어 죽고……’ 그러더라고요. 아, 저렇게 말해야겠구나 싶은데 저는 그게 잘 안돼요. 안타깝습니다.(웃음)

 

한기욱 그게 손쉽게 돈을 버는 방법이지만 그렇게만 하면 탈북자로서 정체성 문제도 전혀 해결되지 않고 인간적으로 점점 더 피폐해지겠지요. 이향규 박사님이 개인의 문제로 탓할 수는 없다고 하셨는데, 물론 구조적인 문제를 도외시한 채 삐라를 뿌리거나 종편에 나가는 사람들을 비난할 건 아니지만 어떻든 그 사람들이 원래 분단체제의 희생자인데 분단체제에 계속 이용당하는 건 엄연한 사실 같아요. 그래서 설기자님처럼 거절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보(一步)라고 생각합니다.

 

고경빈 저도 요새 탈북자가 출연하는 종편방송을 흥미롭게 보고 있습니다. 잘못이 많다고 여겨지지만, 원칙적으로 이걸 문제로 삼을 수 있겠나 싶어요. 정부가 보도지침을 내려서 통제할 것도 아니고 탈북자의 증언을 검증할 수단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그런 면에서 본다면 이건 탈북자의 문제가 아니라 언론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시청률을 무한경쟁하는 상업종편방송의 문제 말이지요. 현재 탈북자 출연 방송은 사실보도 프로그램이 아니라 거의 예능, 오락에 가까운 실정입니다. 선정성, 말초적 흥미 위주로 시청자를 끌어들이는데 북한의 실상과 남북관계의 현실이 왜곡될 소지가 다분히 있습니다. 이게 해결되려면 새로운 방송 거리가 필요합니다. 북한에 특파원이 가서 직접 취재할 수 있는 상황이 와서 신뢰할 수 있는 새로운 보도 거리가 생길 때 이런 문제점이 자연적으로 해소될 수 있다고 봅니다.

 

한기욱 그건 획기적인 해결책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상황에서 근본적으로 이런 방송들을 막을 방법은 없다 해도 개선하거나 변화시킬 여지는 있어요. 종편의 보도에 허무맹랑한 부분이 있다면 그것에 대해 시청자나 다른 언론이 계속 지적해야죠. 탈북자 자신들도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좋겠어요. 탈북자의 경우는 그런 것이 개인적인 불이익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쉽게 기대할 수는 없지만요. 아무튼 언론개혁 문제와 결부되어야 하고, 궁극적으로는 남북관계가 좀 트이면서 북쪽에 가서 직접 보도를 하거나 왕래가 이루어지면 많은 부분이 해소될 것 같습니다.

 

고경빈 그런데 저만 하더라도 그런 종편 프로그램을 보면 이건 터무니없는 얘기라고 느껴지지만 동시에 묘한 중독성이 있어요.

 

한기욱 원래 나쁜 짓은 다 중독성이 있지 않습니까.(웃음) 북한을 정당하게 비판한다면 좋은데 희화화하면서 웃음거리, 오락거리로 만들죠.

 

 

북한인권, 당국과 주민을 분별해서 보자

 

한기욱 탈북자의 정치적 활동과 더불어 최근 몇년 사이에 크게 쟁점화된 것이 북한인권 문제입니다. 탈북자들의 증언으로 북한인권의 열악함이 폭넓게 드러나면서 남한의 보수세력은 물론 UN 같은 국제사회의 현안이 된 상태입니다. 그간 남한의 진보진영은 북한인권 문제에 대체로 미온적이었어요. 무엇보다 남북화해와 평화통일을 함께 도모해야 할 상대방에게 심각한 인권문제를 들춰내기가 껄끄러웠던 점이 작용했다고 봅니다. 그러나 인권은 화해와 통일의 상대방이라고 해서 봐주거나 할 문제는 아니죠. 진보진영의 이런 태도는 문제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박근혜정부의 행태를 보면 보편적인 인권의 문제를 상당히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모습이 엿보입니다. 북한인권을 실제로 개선하려 하기보다 북한정권의 야만성과 실패를 부각시키는 데 초점이 가 있다고 할까요. 그 와중에 북한인권의 참상을 고발하는 탈북자의 증언 가운데 확실하지 않거나 부풀려진 것, 심지어 순전한 거짓말도 많다고 해요. 대표적인 북한인권 활동가인 신동혁(申東赫)씨가 자신의 증언에 오류가 있었음을 인정하기도 했지요. 이런 문제에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그리고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북한인권법안들을 포함해서 북한인권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져야 할지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참고로 북한인권 전문가인 서보혁(徐輔赫) 박사가 북한인권을 별개의 것으로 보지 말고 ‘코리아인권’의 문제로 보자고 한 바 있는데(「진보진영은 북한인권 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창작과비평』 2014년 봄호), 이에 대해서도 의견을 주시면 좋겠습니다.

 

고경빈 코리아인권 개념은 매우 참신하고, 북한인권 문제와 관련된 우리 사회의 왜곡된 논란을 바로잡을 수 있는 좋은 착상이라고 봅니다만, 북한인권 문제를 남한의 모든 것과 연계시킨다는, 이른바 물타기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저는 북한인권이 매우 열악한 상태니만큼 지금같이 소리만 요란하고 피상적인 차원이 아니라 한층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하고, 또 우리에게 가능한 수단과 방법을 모두 동원해서 북한인권 개선을 촉구하고 지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국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북한인권법에는 몇가지 고려할 사항이 있습니다. 첫째, 법의 규율대상이 법적으로 북한이 아니라 우리 국민과 정부라는 점입니다. 국내법이지요. 남북 합의도 아니고 조약도 아닙니다. 국회가 북한을 대상으로 인권개선을 촉구하려면 법률안이 아니라 결의안의 형태가 정상적인 방법입니다. 둘째로 북한인권 개선 촉구활동은 최대한 우리 헌법의 여러가지 자유권에 따라 보장하되 안보상의 이유로 휴전선에서의 삐라 살포행위에 제한을 두어야 할 필요를 인정한다면 명문화된 법률 근거가 필요합니다. 현재 정부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걸 규제할 법률이 없다고 하니 북한인권법이 만들어진다면 북한인권 개선활동에 대한 지원근거와 함께 최소한의 규제근거도 마련해야 하는데 여기에 대한 논의가 없는 것 같습니다. 셋째는 민간활동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데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남북한이 7·4공동성명(1972) 이래 남북기본합의서(1991), 6·15공동선언(2000), 10·4선언(2007) 등 여러번에 걸쳐 상호존중과 비방·중상 금지를 약속했습니다만 이것들은 당국 간의 약속으로서 우리 국민을 직접 구속하지는 못합니다. 따라서 최근 북한이 남북대화에서 우리 민간단체의 대북전단 살포행위 등에 불만을 터뜨리면 우리 당국으로서는 자유민주주의의 특성상 어쩔 수 없다고 대응해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만일 민간의 삐라 살포를 정부가 재정으로 지원한다면 북한은 이를 명백한 남북합의 위반이라 주장할 것이고 이에 우리 정부가 대응하기는 퍽 궁색해질 것입니다. 물론 애초에 정정당당한 태도도 아니고요.

마지막으로 남북관계에 있어서 법률, 즉 국내법이 어떤 역할을 하느냐 하는 점입니다. 분단 60여년 동안 남북관계를 규율하는 국내법은 상당기간 국가보안법 하나뿐이었습니다. 이 법은 모든 종류의 남북 교류와 접촉을 일반적으로 금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노태우 대통령 때인 19887·7선언 이후에 남북 교류·협력을 법적으로 뒷받침할 필요성이 제기돼 정부가 민간의 남북왕래와 교류를 허가하는 절차를 마련한 것이 1990년의 남북교류협력법입니다. 그리고 그후 2005년에는 남북 교류·협력이 활성화되고 실제로 대북투자가 실현되면서 남북 간 합의를 믿고 대북사업에 뛰어든 국민의 권리를 보호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그 결과 국회의 비준동의 절차를 거친 남북합의서에 한해 법률적 효력을 부여하고 우리 법원에서 권리구제의 근거로 인용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현재 이 절차에 따라서 13개의 남북합의서가 국내법적 효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즉 우리 국민의 권리와 의무를 직접 규율하는 효력을 갖는 것이죠. 만약에 남북 간 비방·중상 금지 내용을 담은 과거의 중요한 남북합의서들에 대해 국회 비준동의 절차를 거치거나 일부 중요사항을 발췌해서 이행법률안 형태로 국내법적 효력을 부여할 수 있다면, 정치적인 환경에서 남북 간의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갈등을 줄이는 방안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들을 감안해서 북한인권법 논의가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한기욱 지금 국회에 계류 중인 북한인권법안은 여러개라고 들었습니다. 말씀처럼 법안에서 기본합의서와 어긋나는 조항을 삭제하고, 삐라 살포를 일삼는 단체를 지원하지 못하도록 하는 게 필요한데 법안에 따라 큰 차이가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언론에서 북한인권법안들을 비교하면서 어떤 법안이 무슨 문제가 있다는 것을 자상하게 알려주면 좋겠어요. 그다음에 신동혁씨 사례도 있습니다만, 서구에선 북한인권 상황에 대한 인식이 매우 부정적이기 때문에 탈북자가 증언하면 웬만하면 믿어주는 분위기가 있거든요. 그게 악용되면서 이후의 증언이 신뢰성을 잃을 수 있다는 점은 탈북자 스스로가 경계해야겠죠.

 

이향규 저는 이른바 진보진영이 북한인권에 대해 침묵하면 할수록 자신의 정당성을 인정받기 어렵다는 점에서 북한의 인권문제는 단호하게 비판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서보혁 박사 글처럼 자정적인 성찰이 이루어지는 것은 좋은 현상이라 생각하고요. 인권의 문제는 정치와 타협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적극적인 대응방향을 견지할수록 진보가 종북이라는 탈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아요. 침묵하는 것이 곧 편을 드는 것 같은 느낌을 주니까요. 한때 남북관계에서 ‘퍼주기’ 논란이 있었을 때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우리도 먹고살기 힘든데 북한에 주는 게 웬말이냐고 했죠. 그럴 때 진보진영이 ‘조건 없는 인권보장을 위해 북에도 인도적 지원을 하지만 동시에 한국의 저소득층에 돌아갈 몫도 늘려야 한다’는 목소리를 냈어야 했다는 생각입니다. 그렇게 분단체제의 양쪽에서 고통받고 있는 많은 사람을 존중하는 시스템을 만들어나가는 것으로 관점을 바꾸어갔으면 해요.

 

고경빈 많은 탈북자들이 북한 인권상황을 꾸며내거나 과장할 수 있습니다. 탈북자에게 100퍼센트 진실만 얘기하라는 요구나 기대는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도 고위공직자 청문회 보면 거짓말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탈북자가 북한에서 입은 피해가 너무 억울한데 바깥에선 관심들이 없으니까 과장할 수 있다고 봐요. 그런데 이런 경우 역풍을 맞을 수 있는 것이 신동혁씨같이 유엔 인권보고서에 중요한 증언을 한 사람이 그 일부를 취소함으로써 전체 보고서가 훼손될 가능성이 있죠. 과거엔 증언을 과장할 필요가 있었다 하더라도 지금은 피상적인 수준이나마 북한인권이 열악하다는 것은 만천하가 아는 사실이잖아요. 이제는 실질적으로 북한인권을 어떻게 개선해야 하느냐에 초점을 맞춰야지, 증언에 대해 아무도 검증할 수 없는 환경에서 저 사람의 말이 진실이냐 아니냐를 따지려는 것은 비생산적인 논의라고 생각해요. 실제로 북한주민의 인권을 개선하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증언의 진실성도 가려낼 기회가 나온다고 봅니다.

 

설송아 북한사람들이 일상적으로 하는 말이 있어요. 전쟁이나 콱 일어나라. 저도 북한에서 비슷한 생각을 품어본 적이 있어요. 전쟁만 일어나면 보안원들 다 쏴 죽이겠다고요. 보안원에게서 걸핏하면 입밖에 옮길 수도 없는 상스러운 말을 들을 때면 앞에서야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하지만 속으로는 ‘내가 뭘 잘못했는데? 먹고살려고 돈 좀 벌어보려는 게 무슨 잘못인데?’ 하면서 너무 분했어요. 게다가 여자들은 사람취급 못 받아요. 이런 게 지금 생각해보면 인권문제였던 거죠. 하물며 내가 이렇게 분한데 감옥에 갔던 사람들은 얼마나 고생을 했겠어요. 그런 사람들의 심정을 헤아릴 때 국제사회에 증언해서 북한인권이 나아진다면 그렇게 하는 데 적극 찬성해요. 다만 토끼 한마리 잡겠다고 핵을 쏜다는 북한 말처럼, 인권 개선한답시고 온갖 정치전이 크게 벌어지는 식으로는 안됐으면 좋겠습니다.

 

 

인권개선과 분단체제극복 노력 병행해야

 

한기욱 북한인권이 열악한 만큼 비판하는 것은 당연한데, 그게 한국인권은 양호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져서는 안될 것 같아요. 사실 「무산일기」에서 탈북자가 경험하는 한국사회는 인권존중과는 거리가 멀어요. 또 하나, 북한인권을 비판할 때 남북한 당국과 국민 혹은 인민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령 북한의 정권과 북한의 인민 상황을 구별해서 북한인권의 열악함이 정권의 탓인 만큼 거기 조준을 해서 가차없이 비판을 해야지요. 비판을 하는 쪽도 마찬가지 역할 구분이 필요해요. 우리 당국자의 경우엔 정면으로 비판하기 힘들겠지만 국민은 그럴 수 있잖아요. 시민단체를 포함한 민간의 경우는 그런 데 구애됨 없이 비판할 권리가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합니다. 다만 비판이라는 것이 어느정도 신뢰성을 가질 때라야 역풍을 안 받고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겠죠. 말씀들 하신 것처럼 요란하게 정치적으로 쇼를 하는 식이 아니라 아픈 부분을 지적하되 실제적인 논의를 통해 개선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만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당국끼리는 통일과 교류를 위해 협력해야 할 파트너십이 있기 때문에 예의를 지켜야 하는 부분이 분명히 있어요. 그러나 당국끼리도 우리 민간에서 북한의 인권상황에 대해서 이렇게 적나라한 비판이 있는데 개선해야 되지 않느냐 하는 말은 할 수 있지요.

 

고경빈 지적해야죠. 북한의 인권을 실질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꼭 북한인권 상황에 대한 비판 수위를 낮출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비판과 개선촉구 압박은 하되 문제는 북한에 대한 적대적이고 위협적인 환경과 병행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거죠.

 

한기욱 소용없는 정도가 아니고 그럴 경우에는 사실 분단체제를 강화하는 거죠. 적대성을 강조하면 인권에 대한 논의가 갑자기 정치적인 논의로 둔갑하면서 오히려 인권에 위해가 되는 상황으로 변질돼버리니까요. 삐라 사건이 그렇게 될 가능성이 크고요. 살포행위를 하는 사람들이야 북한인권의 실상, 북한의 가려진 진실을 알리겠다는 일념이 있겠지만 그런 좋은 의도와 상관없이 안전상의 위해를 부를 수도 있고, 위협적이고 적대적인 태도도 인권을 비인권적인 방법으로 처리하려고 하는 느낌을 많이 줍니다.

 

고경빈 과거 군사독재정부 시절에 국민들이 정부나 지도자를 비판하거나, 자유를 억압하는 데 반발했을 때 정부는 북한의 위협을 구실로 삼아 그걸 다 막았습니다. 북한 역시 비슷한 상황에서 주민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는 거죠. 체제를 붕괴시키려는 외부의 위협에 맞서서 인내해야 한다고 북한주민을 구슬리고 있는데 우리가 거기에 구실을 대줄 필요는 없다고 봐요. 나라를 전복시키거나 지도자를 교체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순수하게 우리는 인권개선, 주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관심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는 이런 적대적이고 위협적인 외부환경을 완화시킬 필요가 있어요.

 

설송아 조금 다른 얘기이긴 한데 지나친 정치적 비화가 가져오는 안타까운 일상의 사례가 있어요. 한국사람과 탈북자가 결혼한 부부들이 정치적인 이야기로 부부싸움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가령 천안함사건 얘기가 나왔을 때 한국사람이 북한소행이라는 정부 발표와는 좀 다르게 봐야 된다고 말하는 순간 그렇게 싸움을 했대요. 탈북자 쪽에서 북한을 두둔하는 거냐, 당신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식으로 나와서요. 또 어떤 부부는 한국인 남편이 북한에 쌀 보내줘야 된다고 해서 싸웠대요. 누구 좋으라고 쌀을 보내느냐고 탈북자 부인이 화를 낸 거죠. 아예 갈라설 정도로 큰 싸움도 된다는데, 가슴 아픈 일이에요.

 

이향규 천안함사건 때 탈북학생들이 학교를 많이 그만뒀어요. 마치 자기가 천안함을 폭파시킨 것처럼 한국학생들한테 공격을 받아서요. 우리는 말로는 탈북주민이 한국사회에 잘 정착하길 바란다고 하지만 남북관계가 경색될수록 이들은 한국에서 자기 자리를 발견하기가 어려워요. 탈북자가 아무리 보수적으로 된다 하더라도 바깥에서는 어느 순간 친북적인 인사로 규정해버리고, ‘우리’가 아닌 ‘그들’로 밀어버리는 경향이 있어요. 아까 한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국가와 개인을 구별하는 능력을 사실 누구보다 우리 아이들이 배워야 합니다. 분단체제라는 게 네 편과 내 편을 나누어 어느 편에 설 것인가 하는 정서를 만들어냈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는 탈북주민 스스로 정체성이 혼란스러울 뿐 아니라 외부 강압에 의해 어느 때는 포섭됐다가 어느 때는 배제되는 상황이 이들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죠. 그래서 편을 가르는 잣대와 장벽이 높지 않은 사회를 만드는 것이 통일을 준비하는 중요한 운동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한기욱 천안함사건은 여러모로 심각한 후유증을 남기네요. 진상규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는데도 마치 사상적 검증의 잣대로 작동하니까요. 과학적으로 이견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정치적인 신념의 문제로 몰아가면서, 천안함사건이 북한의 소행이 아닐 수 있다고 말하는 순간 너는 종북이라는 식으로 규정해버리니까 탈북청소년의 경우처럼 가슴 아픈 일이 벌어집니다. 이런 ‘이념적인’ 정답을 강요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고 또 야당 대표 같은 책임있는 자리에 있는 분이 그런 부당한 요구에 굴복하면 안되지요.

 

 

당당하고 건강한 한반도 주민으로 살아가기

 

한기욱 마지막으로 ‘탈북자의 다른 가능한 삶을 찾아서’라는 소주제로 대화를 마무리할까 합니다. 제가 보기에 탈북자는 분단체제가 지속되는 이상 가장 간섭받기 쉽고 다치기 쉬운 자리에 있다고 봅니다. 천안함사건만 해도 상대적으로 일반 시민의 경우는 여론조사에서 47.2%가 정부발표 못 믿겠다고 나오거든요(뉴스타파 2015.3.25). 그런데 탈북자가 이런 부분에 대해서 대답을 강요받는 것 자체가—사실 이런 식의 ‘사상검증’은 심각한 인권유린이지요—자기답게 자유롭게 살기 어려운 이유가 됩니다. 탈북자가 정부당국과 사회의 이데올로기적인 요구에서 벗어나서 자기 뜻대로 살아갈 길을 어떻게 모색하면 좋을까요?

 

설송아 탈북자 입장에서는 본인의 자세가 기본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극단적으로 말하면 차라리 정착금을 하나도 안 주는 게 나을지도 몰라요. 중국에서 언제 잡힐지 모르는 공포 속에서 살았던 걸 생각하면 여긴 정말 낙원이거든요. 그런데 정착금을 받으면 상당히 힘이 되는 반면에 그걸 역이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오히려 열심히 자립하려는 사람들이 기가 죽는 상황입니다. 탈북자도 자기계발을 하면 좋겠어요. 다음에는 역시 이념적인 목적으로 탈북자가 이용되지 않았으면 해요. 안보강연만 하더라도 북한의 실상을 전하는 사람은 잘리고 북한정권을 타도하자고 막나가는 사람만 계속 써주는 게 현실인데 정말 안타까운 부분입니다. 탈북자가 맹목적으로 돈만 벌지 않고 자기 땅을 위해서, 여우도 죽으면 자기 굴로 간다는데, 돈을 벌더라도 하나라도 뭔가 뜻을 갖고 하면 좋겠어요. 이것도 역시 탈북자 문제가 되겠네요. 종교단체에서도 탈북자를 너무 계획적으로 끌어당기지 말았으면 해요. 어찌보면 교회도 탈북자의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당하는 거예요.

 

한기욱 상호이용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설송아 그렇죠. 신앙이라는 건 마음의 안정을 얻기 위해서 찾는 거잖아요. 아무튼 지금까지는 신앙도 정착도 자기 정체성도 다 제대로 일구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여러가지 문제를 탈북자 스스로의 노력과 더불어서 시스템을 합리적으로 만드는 것으로 해결해갈 수 있길 바랍니다.

 

이향규 탈북자 문제는 정치가 과잉되어 있는 영역인데 개인의 삶에 대한 존중으로 나아갔으면 해요. 탈북해서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는 학생이 있는데 북한에서 꽃제비 생활까지 했어요. 어느날 구걸을 하러 다니다 돌아왔더니 짚으로 된 집을 누가 땔감으로 쓰려고 다 뜯어가서 하루아침에 집이 없어졌대요. 형이랑 누나랑 역전에서 노숙생활을 하다가 중국에 와서 어느 집에 삼사년 숨어 살았고요. 제가 이 친구에게 네 삶을 이미지로 표현하면 어떤 것이냐고 물어봤거든요. 북한에서는 자기가 들판을 날아다니는 새 같았대요. 아침에 일어나서 떨어진 곡식 낟알이라도 주워 먹으려 찾아다니고 저녁에 둥지에 와서 자다가 다음날 다시 들판에 나가는 삶이었다는 거죠. 중국에서는 닭장 속의 병아리 같았대요. 자기가 날 수는 있을지, 밖에 나갈 수는 있을지,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 건지 몰랐다고요. 그리고 한국에 와서는 쳇바퀴를 도는 햄스터 같대요. 열심히 뛰고는 있는데 왜 뛰는지 모르겠고 언제 끝날지도 모르겠는데 옆에 있는 애들은 다 뛰고 있고…… 어디가 더 행복한지 잘 모르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제 생각엔 이들이 여기 왔기 때문에 더 심하게 겪는 고통이 있는 것 같아요. 한국이 편 가르는 사회, 정치가 과잉된 사회, 고립된 사회이기 때문에요. 또다른 친구는 아버지가 북한에서는 늘 대문 열어놓고 이웃들이 집에 와서 술 마시다 가고 그랬는데, 여기서는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으니까 어느날 아버지가 우두커니 혼자 있다가, 도둑이라도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래요. 어느 공간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사회, 그렇다고 한공간에 있는 사람들조차도 서로 돌아보지 않는 사회에 왔기 때문에 이들이 겪는 고통이 무척 큰 것 같아요. 그렇다면 탈북자의 문제는 사실 우리 한국사회의 문제인 면이 많은 거죠. 결국 통일이 들판의 새도 아니고 햄스터도 아닌 사람들이 사는 사회를 만들자고 하는 것일 텐데 그러면 이들이 한국사회를 어떻게 보는지 귀기울이고 고칠 부분은 같이 고쳐나가면서 좀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잘났으니 너희가 적응해야 된다는 태도로는 그러기가 어렵죠. 이들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태도가 꼭 필요합니다.

 

고경빈 동의합니다. 탈북자를 개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를 더 나은 사회로 만드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탈북자 문제를 그들 집단의 특이한 성향이나 도덕의 문제로 바라봐서는 안돼죠. 그런 것들을 만드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반성해야 하고요. 역지사지로, 내가 남한사회에 와서 정착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데 어느날 갑자기 나한테 북한인권투사라며 감투 씌워주고 돈도 주고 영웅으로 떠받는 환경과 마주하면 그걸 거부할 수 있을까요? 또 일 안해도 교회 가면 돈을 준다는데 그걸 거부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 제일 중요한 게 정부의 역할인 것 같습니다. 탈북자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모든 사람들한테 종북이냐 반북이냐를 강요하는 질서 속에 있거든요. 이럴 때 5년마다 들어서는 새 정권이 성향에 따라 우왕좌왕해서는 안됩니다. 정부라면 최소한 남북관계와 관련해서는 초당적인 기반을 마련해서 정책을 펴야죠. 단기적으로는 안보를 위해 어떤 길이 바람직한지, 그리고 장기적인 측면에서는 평화적으로 통일을 이룩하는 데 어떤 길이 필요한지를 두고 이 문제에 접근해야 된다고 봅니다.

 

한기욱 탈북자의 문제가 곧 우리 사회의 문제라는 데 동의하면서도 저는 사회의 노력과 함께 탈북자도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분단체제에 이용당하면서 금전적 댓가를 받는 사람을 개인적으로 비난하는 게 해결책은 아니지만, 그걸 거부하는 사람에 대해서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를 알아주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봐요. 사회구조적인 문제를 정책적으로 푸느냐 아니면 개인들의 노력과 결단으로 푸느냐 이 두가지가 상호접근해야 한다고 할 때 개인이 내딛는 한걸음이 정책의 근거가 된다고 봅니다. 달리 말하면 탈북자가 삶다운 삶을 누리려면 자신의 몸을 남북한 국가의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기제 혹은 장치에 내어주지 않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이겠지요. 그런데 따져보면 이것은 탈북자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분단체제 아래 사는 주민 전체가 남북한 당국으로부터 발상과 입장을 강요받는 부분이 있거든요. 그것에 대해 ‘그렇게 안하고 싶다’고 할 수 있어야겠죠. 그런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민주주의의 핵심이고요. 탈북자는 한반도에서 가장 특수한 존재라고 이야기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오히려 가장 보편적인 존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분단체제의 재생산 과정에서 이용당하지 않고 싸워야 하는 보편성의 문제를 먼저 정면으로 감당하기를 요구받는 존재인데, 다른 사람들도 지금 표나게 재촉받지 않을 뿐이지 결국은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탈북자든 탈북자가 아니든 분단체제로 말미암은 남북한의 병폐에 대해서 같이 싸워야 탈북자 문제도, 우리 사회의 문제도 해결되리라 봅니다. 제가 너무 거창하게 말했나요?(웃음)

 

고경빈 제가 앞서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로 봐야 한다고 한 것은 어쩌면 그게 제일 쉬운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필요하지만 더 어려운 것이 탈북자의 노력이지요. 목숨 걸고 이 땅에 왔고 여기서도 힘든 일을 겪고 있는데 오히려 남북 간의 적대감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맡기 쉬워요. 남북이 긴 시간 서로 적대하고 있는 환경에서 화해하고 용서하고 평화롭게 통일할 수 있는 역할을 용기있게 개척하시는 분들을 저도 몇분 알고 있습니다. 맹목적인 반북활동이 정체성을 확립하는 길이 아니고 민족사적으로 이 땅에 와서 할 일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에요. 그런 분들에게서 희망을 봅니다. 그런 노력은 노력대로 해나가면서 정부가 중심을 잡고 나아가야 합니다.

 

이향규 저는 탈북자에게 민족과 역사의 사명을 부여하는 게 너무 과한 것 같아요. 실제로 민족의 화해를 위해서 한국으로 온 사람들도 아니고요. 건강한 시민, 건강한 개인으로 살아주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너무 무거운 짐을 지우지는 않았으면 해요. 게다가 건강한 개인으로 사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요. 북한에 있을 때 그렇게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니까요. 한국에 와서도 아무데서도 민주주의를 가르쳐주지 않기 때문에 그런 교육을 갈망하는 청년들도 많이 봤어요. 건강한 개인으로 살려고 하는 이들을 도와줄 수 있는 교육과 훈련의 기회가 더 마련되었으면 해요.

 

고경빈 전적으로 동감하면서 제 얘기를 취소하겠습니다.(일동 웃음) 사실 건강한 시민으로 사는 게 화해의 도구가 되는 거죠.

 

한기욱 건강한 개인, 건강한 시민 다 중요합니다. 건강한 개인이 좀더 근본적인 문제일 텐데 거기에 건강한 시민이 내포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건강한 시민이라고 하는 것은 남북 간에 적대적인 대결을 조장하기보다는 그걸 줄이는 노력을 하는 존재가 아닐까 하고요. 개인적으로 너무 역사적인 중압감을 줄 필요는 없지만 실제로 그런 이들이 통일의 자산이 되겠죠.

 

설송아 제가 혼자서 이런 질문을 엉뚱하게 하곤 하거든요. 한국사람이 지금의 북한에 가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 현재 여기서 탈북자가 처하는 정착과정에서의 문제점들이 나타날 것인가. 꼭 이런 식이 아니더라도 한국 국민과 정부, 탈북자 자신까지 여러가지로 성찰해간다면 좀더 좋은 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한기욱 저는 탈남(脫南)할 생각은 없습니다.(웃음)

 

이향규 여담처럼 말씀드리면 저도 북한에 가서 살고 싶지 않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북한에 가서 살고 싶게끔 북한을 만들고 동시에 북한사람이 한국에 와서 살고 싶게끔 한국을 만드는 과정이 곧 통일을 준비하는 과정이 아닐까 싶어요.

 

한기욱 장시간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이걸로 좌담을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2015.4.24. 세교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