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조명
『빛의 호위』를 보는 다섯개의 초점
조해진의 카메라 옵스큐라
신미나 申美奈
1978년 충남 청양 출생. 200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싱고,라고 불렀다』가 있음. shinminari@naver.com
조해진 趙海珍
197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04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천사들의 도시』 『목요일에 만나요』 『빛의 호위』, 장편소설 『한없이 멋진 꿈에』 『로기완을 만났다』 『아무도 보지 못한 숲』 『여름을 지나가다』 등이 있다.
1. ‘타자’라는 피사체, ‘진심’이라는 자세
어떤 문장은 단 하나의 이미지를 위해 반딧불이처럼 모여든다. 부유하는 빛들은 산란하고 분산되며 교차한다. 무수한 빛의 이합집산을 따라가다보면 어느 순간 목도하게 된다. 어둠상자(camera obscura)의 한 면에 뚫어놓은 바늘구멍 틈새로 펼쳐지는 빛의 파노라마를.
조해진 소설 속의 타자들은 “셔터를 누를 때 카메라 안에서 휙 지나가는 빛”(「빛의 호위」 19면)이며,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비(非)존재들이다. 탈북자 ‘로기완’(『로기완을 만났다』, 창비 2011)이나, 여섯살 때 철로에 버려진 ‘문주’(「문주」), 재일교포 유학생 간첩조작 사건에 연루된 ‘서군’과 ‘고모’(「사물과의 작별」)가 그렇다. ‘부재’의 빈자리만이 존재를 증명하는 등장인물들은 그녀의 ‘호명’을 받고 깨어난다.
조해진을 ‘타자(他者)의 작가’라 부르는 것은 이미 우리에게 익숙할 터이다. 그러나 그녀는 ‘타자’라는 질문에 연민이나 동정 같은 손쉬운 해답을 허락하지 않는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생성되는 감정이 ‘거짓 없는 진심’이 되기 위해 타자에 대한 이해를 최대한 유예한다.
2004년 등단 이후 그녀가 성실하게 천착해온 디아스포라의 운명과, 사회로부터 배제된 타자에 관한 이야기는 네권의 장편소설과 두권의 소설집에서도 여일하게 드러난다. 지난해 조해진은 경제적 위기에 처한 지식인의 소외와 불안의 문제를 섬세하게 그려낸 「산책자의 행복」으로 이효석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다. 이후 2013년부터 2016년까지 발표한 9편의 단편을 묶은 소설집 『빛의 호위』를 출간할 즈음 그녀와 만났다.
다른 인터뷰에서 “독자들에게 어떤 작가로 기억되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다른 건 몰라도 글 하나는 정말 진실하게 쓴 소설가라고. 단 한톨의 거짓 없이, 진실하게 쓴 작가라고. 욕심이 아닌 진실을 쓴 소설가”(『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2016』, 생각정거장)라고 답했는데 좀더 자세한 이야기가 궁금했다.
수상소감 인터뷰에서 언급했던 “진실하게”라는 표현이 무겁긴 하죠. 소설의 내용뿐 아니라 소설을 쓸 때의 태도에까지 진심을 담고 싶다는 표현이었습니다. 세상에 완벽한 소설은 없다고 생각해요. 완벽하진 않더라도, 단어 하나도 허투루 낭비되지 않도록 고심하여 쓰겠다는 의지에 가까운 말이었죠.
서두르지 않고 신중하게 단어를 고르는 듯한 머뭇거림이 인상적이다. 그녀의 답변은 조용하고도 담대한 단언으로 들린다. ‘진심’이라는 말은 추를 달아 무게를 재볼 수도, 실물로 만질 수도 없는 무형의 것이다. 진심이라고 정의했을 때 어쩌면 우리는 그저 진심이라는 단어의 근사치에 겨우 다가갈 뿐인지도 모른다. 진심이라는 말의 ‘참값’에 이르기 위해 내부에 소용돌이치는 오차의 한계를 어떻게 견딜 것인가.
타자의 고통 앞에서 우리는 어떤 자세를 선택하기도 한다. 타자라는 피사체로부터 한걸음 떨어져 원경에 머무를 것인지, 타자의 고통에 밀착하여 공감하고 연대할 것인지. 진정성에 대한 검증을 요구받는 이는 후자 쪽이다.
좋은 작가가 그렇듯이 그녀도 ‘정답’을 내놓는 것이 아니라 독자에게 스스로 ‘질문’하도록 만든다. 타자의 고통을 온전히 흡수하는 것은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자신의 진심을 애써 피력하지 않는다. 다만, 진심이라는 질문을 끝까지 손에 쥐고 놓지 않을 뿐이다. 조해진 소설 속의 주체들에게 천칭의 저울이 있다면, 그들은 진심과 가식 사이를 부단히 오가며 흔들리는 추와 같은 사람들이다. 소설 곳곳에서 엄격하게 자기검열을 하기도 하고 진심이라 불릴 만한 것에 이르기를 열망하는 목소리를 만날 수 있는데, 이를 필자의 자의식이 투영된 결과로 읽어도 좋은 것일까?
타인의 고통에 민감하려면, 일단 섣부른 연민이나 동정을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타인의 고통에 준하는 자기성찰의 과정을 저 역시 통과하곤 했고 그런 과정을 특정 인물에게 투사하기도 했는데, 그게 자의식일 수 있겠죠. 수전 손택(Susan Sontag)이 “작가는 의견을 내놓는 기계가 되어서는 안 된다”(『문학은 자유다』, 이후 2007, 206면)라고 했죠. 작가는 자신의 진정성을 끊이없이 의심해야 한다는 뜻일 텐데요, 저 역시 그 말에 공감하며 계속 ‘흔들리는 주체’로 남고 싶어요.
2. 에코(Echo): ‘타자’를 향한 호명
언급했듯이 소설 속 주체들은 『로기완을 만났다』의 탈북자처럼 처음엔 “그저 이니셜 L에 지나지 않”는 존재이거나 급박한 실존의 위기에 처한 이들이다. 언제 일자리를 잃을지 모른다는 불안 속에서 살아가는 『여름을 지나가다』(문예중앙 2015)의 연주, 대학 통폐합으로 인해 일자리를 잃고 파산한 철학과 강사 홍미영(「산책자의 행복」), 여성 이민자로서 결핍과 불안을 안고 사는 제인(「시간의 거절」), 자신의 이름으로부터 정체성을 찾아가는 입양아 문주 등 하나같이 세상에 안착하지 못한다.
유령과 같은 존재들이 유일한 존재로 거듭나도록 조해진이 부여한 방식 중의 하나는 호명이다. 소설 속의 주체들은 대부분 ‘호명되기’보다 ‘호명하는’ 위치에 있다. 본디 호명이란 상대방의 반응을 기대하거나 응답을 듣기 위한 행위인데, 대답이 없을 것을 알면서도 타자의 이름을 부른다는 점에서 그들의 호명은 ‘에코’에 가깝다.
가령 「산책자의 행복」은 이렇게 끝맺는다. “저는 살아 있습니다./살아 있고, 살아 있다는 감각에 집중하고 있습니다./그리고 오늘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 다예요, 라오슈……”(142면) 홍미영의 제자인 중국인 유학생 메이린은 답장이 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수년에 걸쳐 홍미영에게 이메일을 보낸다. 비슷한 장면은 「문주」에서도 볼 수 있다. 노파와 아무런 연고도 없는 문주는 병실에서 죽어가는 복희식당 노파에게 “어디 있어요, 복희?”(217면)라고 외친다. 미국에서 죽은 언니를 향해 “그곳에서 혹시, 저를 부르지는 않았나요”(「잘 가, 언니」 160면)라고 부르는 ‘나’도 마찬가지다.
어둠상자의 벽에 부딪혀 되돌아오는 소리는 결국 자신의 목소리이기 때문에 절절하기도 하지만 ‘눈앞에서 한 세계가 문을 닫아버리는 듯한’ 갑갑함을 주기도 한다. 타인의 이해나 공감을 얻기 위해서 소설 속 주체들의 환경이 가혹한 현실에 붙들려 있어야 하는지 궁금했다.
인물들을 일부러 가혹한 현실에 처하게 한 것은 아니고요.(웃음) 자기 몫의 확실한 목소리가 없거나 실존적으로 불안한 사람들을 주로 쓰다보니 처한 상황이 불우해 보일 수는 있겠지만, 저는 이런 인물이야말로 보편적이며 소설이 조명해야 할 또다른 우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는 인물들의 단절보다는 ‘빛의 호위’를 받는 순간, 그러니까 서로에게서 결핍을 알아보고 나아가 온기를 공유하는 장면까지 쓰려고 했어요. 물론 독자가 저의 의도를 알아주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소설이 하나의 방식으로만 읽히면 따분하잖아요. 절망을 보든 희망을 찾든, 감상적이라는 평가도 절제되었다는 의견도, 저는 어떤 반응이든 좋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친한 친구였던 이선의 죽음을 겪은 메이린의 고통은 “단순한 미안함이 아니라 살과 뼈를 녹이는 절망의 미안함, 환부 없는 통증”(142면)으로 묘사된다. 이 문장에서도 볼 수 있듯이 등장인물들이 자신의 실존을 실감하는 감각은 ‘행복’이라기보다 ‘통각’에 가까운 것 아닐까?
「산책자의 행복」에서 인물들이 찾는 행복은 살아 있다는 감각으로 수렴되죠. 그 감각에는 통각도 포함되고요.
희미하게 떠도는 타자들의 목소리를 선명하게 모사하기 위해 그녀가 선택한 또다른 방법은 바로 ‘타자’들의 행적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탈북자인 로기완의 존재는 그의 궤적을 따라가는 윤주로 인해 비로소 ‘로기완’이라는 상(像)으로 또렷하게 맺힌다. 또한 메이린은 홍미영에게 실수로 ‘선생님’이 아닌 자신의 모국어 ‘라오슈(老帥)’라는 호칭을 썼는데 홍미영에게 “노래하는 소리 ‘라’와 바람소리 ‘슈’가 결합된 그 단어는 가만히 듣고만 있어도 마음의 밑바닥에서 붕 떠오르는 듯한 착각을 불러”(123면)일으키는 고유한 이름이 된다.
문주는 입양아인 자신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제작하려는 서영에게 묻는다. “왜 떠돌이의 이름 같은 것에 관심을 갖게 됐느냐고”. 서영은 답한다. “이름은 우리의 정체성이랄지 존재감이 거주하는 집이라고”(202면). 타자의 삶에 대한 관심과 집요한 추적의 방식을 통해 그녀는 비(非)존재들을 입체적으로 일으켜 세운다. 이것이 타자들의 ‘호명’에 답하는 조해진의 응답이다.
3. 암순응: 잃어버린 나의 ‘반쪽’을 찾아서
밝은 곳에서 어두운 곳으로 들어갔을 때 우리가 첫번째로 마주하는 감각은 빛이 아니라 어둠이다. 처음에는 보이지 않지만 망막이 어둠에 적응하면서 차차 주변이 보이게 되듯이 소설 속 주체들도 암실과 같은 현실에서 자신과 닮은 상처를 가진 이를 ‘알아보는’ 과정을 거친다.
그들이 ‘타자’와 접점을 이루는 과정을 범박하게나마 묶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상처를 받은 주체가 있다. ② 자신과 비슷한 상처를 지닌 타자를 발견한다. ③ 자신의 상처를 타자에게 투영하면서 위로를 받는다(혹은 위로를 한다).
이때 소설 속 주체들은 서로를 반사하는 거울이 되어 짝을 이룬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아리스토파네스의 신화를 떠올리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원래 한쌍이었던 인간이 둘로 잘려 자신의 반쪽을 찾아다녔듯이, 그들은 타자에게서 자신과 닮은 반쪽을 찾아 동질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선의 죽음으로 죄책감과 미안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메이린에게 “살아 있다는 감각에 집중”(127면)하라는 조언을 해주는 ‘라오슈’와 그저 이웃일 뿐이지만 죽어가는 복희식당 노파를 지키고 있는 문주, 차별에 익숙한 이민자 제인에게 “사람을 이용하여 얻은 기회”(193면)를 저버릴 ‘용기’를 대여해준 석희, 언어의 장벽으로 인해 타국에서 열쇠 하나 마련할 수 없는 ‘나’에게 호의를 베푸는 안젤라(「번역의 시작」) 등은 ‘나’와의 겹침, 또는 포개기를 통해 ‘나’와 ‘타자’ 사이에 교집합을 이루고 그 공동의 자리에서 결속력을 얻는다.
이처럼 조해진 소설의 주체들은 대부분 약자의 위치에 서 있다. 자신의 ‘반쪽’을 알아보고 위로를 받기도 하지만, 불합리한 상황을 전복하거나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바뀌는 반전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등장인물의 캐릭터가 선량하고 이상적인 인물로 설정된 것은 아닌가.
현실에서도 약자는 전복할 힘이 없고 가해자가 되기 어렵죠. 제가 살아온 세계가 그러한데 섣부르게 전복과 반전을 담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모든 소설에서 선량하고 이상적인 인물만을 그릴 생각은 없어요. 지금까지 그런 인물이 도드라졌다면 그건 저의 한계겠죠. 저는 사실 생의 이면을 일깨우는 날카로운 소설에 관심이 많고 그렇게 쓰려고 시도한 적도 있습니다. 앞으로 그런 감수성이 더 열리길 바라고 있어요.
또한 조해진 특유의 서사 기법이 빛나는 작품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시간의 순서에 구애받지 않고 과거와 현재가 혼재하는가 하면, 이중구조의 얼개를 짜임새 있게 교직하여 정체성에 대한 혼란과 그 깊은 고민의 과정을 낭비 없이 보여준다. 예컨대 식료품점 지하창고에서 은신하며 ‘소리 없는 연주’를 하는 유대인 여성 알마 마이어와, 재개발로 폐허가 되어가는 동네의 외진 방에서 사진을 찍으며 노는 열세살의 권은(「빛의 호위」), 31세의 나이에 건물관리인에게 살해당한 차학경과, 미국으로 이민 간 뒤 유골이 되어 돌아온 언니 정희(「잘 가, 언니」)는 서로 다르지만 유사한 고통을 안고 살았던 인물이다. 두 인물의 삶을 포개어 트레이싱지에 대고 베껴보는 듯한 서사구조가 인상적이다.
이번 소설집에는 시대와 지역을 초월한 소통과 유대를 중점적으로 담다보니 두 인물이 비슷한 과정을 겪는 이야기가 많았어요. 다시 말해 타인의 고통 앞에서 한발 물러서는 것이 아니라 인물들끼리 서로 ‘거울’이 되어 그 진심에 가닿는 설정이었죠. 그래서 대부분의 작품이 두 인물의 서사가 교차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교차점에 편지와 원고, 다큐멘터리 같은 소재나 시간의 굴절 같은 장치를 두어 관습적인 글쓰기에서 벗어나려고 했습니다. 저는 사실 작품을 쓸 때 플롯에 대한 고민을 오래 하는 편이에요. 심리묘사가 많은 편이긴 하지만 제 소설은 사건 중심이죠. 소설을 쓰기 전에 사건을 미리 배치하고, 인물과 인물이 언제 만나고 헤어지는 지점은 어디인지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4. ‘사물’에서 ‘공간’으로: 빛의 이동통로
‘사물’의 역할은 무엇인가. “때로는 사소해 보이는 소품 하나가 되돌릴 수 없는 비극을 불러오기도”(사물과의 작별」 71면) 하고 “불확실한 언어보다 형체가 뚜렷한 사물이 그 순간의 감정을 더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게(「번역의 시작」 57면) 하며, “사진의 접힌 부분”처럼 “펴본 뒤에야 중요한 단서였다는 걸 알게”(「문주」 213면) 해준다.
앞서 소설 속 주체들이 ‘반쪽’들의 겹침 혹은 포개기를 통해 공통분모와 결속력을 가진다고 말한 바 있다. 조해진의 소설 속에서 사물은 어둠상자에 뚫린 바늘구멍과 같다. 외부의 풍경이 바늘구멍을 통해서 빛을 타고 들어오듯이 그녀는 타자와 나를 이어주는 중간 통로로 사물을 배치해두는 것을 잊지 않는다.
알마 마이어가 식료품 지하창고에 숨어 지낼 때 ‘장’이 바구니 밑바닥에 한장씩 깔아주던 악보나, 권은에게 ‘나’가 준 후지카메라, 서군이 고모에게 건넨 원고뭉치, 아버지가 ‘나’에게 그림으로 남긴 회색 공책(「번역의 시작」) 등이 그 역할을 수행한다. 그것은 “내일을 꿈꿀 수 있게 하는 빛”(23면)이 되고, “단순히 사진을 찍는 기계장치가 아니라 다른 세계로 이어”(「빛의 호위」 26면)져 고립된 주체들을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하거나 정체성을 찾도록 돕는다.
전작 『여름을 지나가다』에서도 세상으로부터 단절된 인물들의 고독을 드러내는 장치로 소설적 공간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매물로 나온 가구점이나 옥상, 공인중개사에서 보조원으로 근무하는 ‘민’이 잠시 들어가보는 타인의 방을 예로 들 수 있다. 「사물과의 작별」에서도 ‘유실물센터’라는 공간을 상정했는데, 이것이 내포한 의미는 무엇일까? 또한 소설적 공간이 주는 분위기가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려지기도 하는데, 소설을 구상할 때 회화적으로 염두에 두는 이미지나 장소가 있는 걸까.
「사물과의 작별」에서 유실물센터는 고모와 서군이 유실물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함의하는 공간이에요. 유실물센터라는 공간이 매력적이어서 한번은 꼭 써보고 싶기도 했고요. 제게 소설은 구체적인 테마나 인물의 성격이 아니라 장면으로 다가올 때가 많아요. 예를 들어 빈방에서 스노우볼을 보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라든가, 기차에 앉은 여자가 차창을 통해 테라스에서 울먹이는 또다른 여자를 바라보는 장면에서 이야기가 시작되곤 해요. 그래서인지 공간을 따로 떼어내 설정하기보다는 인물의 성향이나 생애와 어우러진 공간을 고민하죠. 개인적으로 타인의 방이나 빈 상점 같은 공간에 관심이 많아서 인물이 그런 곳에 몰래 숨어드는 소설을 여러편 쓰기도 했어요.
초기작인 『천사들의 도시』(민음사 2008)부터 『여름을 지나가다』에 이르기까지 폭력적인 사회구조 속에서 배척당한 개인에 관한 이야기는 꾸준히 다뤄왔지만, 근작에 이르면 ‘사회성’과 ‘윤리성’에 관한 문제가 서사의 주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동쪽 伯의 숲」은 1967년 7월 8일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공안사건을 소재로 쓴 소설이고, 「사물과의 작별」에서는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 조작사건을 다뤘다. 사회적 사건들을 소재로 가져올 때의 동인은 무엇인지, 이들을 소재로 다룰 때 심적인 부담은 어떻게 극복하지를 물었다.
이번 소설집에는 의도하지 않았고 잘못이 없는데도 역사적 사건이나 사회적 상황 때문에 되돌릴 수 없는 고통에 휘말리는 인물들이 많이 등장해서 이전보다 더 참여적이란 느낌이 들 것 같아요. 단순한 반영은 지양하지만, 앞으로도 제 능력의 범위 안에서 최대한 역사적·사회적 소재를 가져와서 소설을 쓰고 싶어요. 나중에 역량이 된다면 장편으로도 쓰고 싶고요.
심적 부담은, 정확함에 대한 걱정을 뺀다면, 전혀 없어요. 저의 초기작에 대해서 자폐적이고 답답하다는 말씀을 해주시는 분이 많았는데 저도 동의합니다. 그때는 그렇게 살았고, 또 그런 촘촘한 소설이 소설답다고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소설을 쓰는 기간이 길어지고 저 역시 나이를 먹다보니 세상을 넓게 보고 싶기도 하고, 인물이 자신을 깨트리고 나와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자의식에 갇힌 소설이 아니라 새로운 감성을 환기해주는 소설을 쓰고 싶었다고 해야 할까요. 오히려 지금의 방식이 저는 좋아요.
5. 당신이 나를 알아보는 ‘결정적 순간’
수록작 「산책자의 행복」의 제목은 내용을 배반한다. 통상적인 의미의 ‘산책’이 주는 휴식이나 성찰적 태도가 아니라 실존의 위기에 처한 사람의 어쩔 수 없는 정처 없음, 혹은 배회에 가깝게 여겨진다. 제목에서 말하는 ‘산책’과 ‘행복’의 의미는 무엇일까.
산책이란 인생의 축약이고, 산책하며 걷는 길은 펼쳐진 생애와 같다고 생각하며 「산책자의 행복」을 썼어요. 그러니 실존적 위기에 처한 인물에게는 산책이 더더욱 정처 없는 배회로 여겨질 테지요. 진정한 행복은 “오늘을 견디게 하는”(137면) 고요라고 썼는데, 풀어 쓴다면 현실을 견디게 해주는 감각적인 순간들을 의심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홍미영 강사는 그 순간을 의심하며 추상적인 행복만을 추구해왔는데 경제적인 위기를 겪고 나서야 행복뿐 아니라 불행과 죽음, 살아 있음을 구체적으로 느끼게 되죠. 그럼 현재 그녀가 행복한가,라고 묻는다면 그 해답은 독자 각자가 찾아야 할 것 같네요.
그렇다면 “실패와 좌절은 또다른 가능성에 가닿는 사다리가 되지 못하고 나락으로 떨어지는 직선의 통로가 되”(122면)는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공감하고 ‘행복’을 의심하지 않을 수 있을까?
교차하고 겹쳐지는 순간의 행복에 대해 이전보다 훨씬 더 자주 생각합니다. 고립된 자기만족은 덧없지 않나요? 소설을 쓸 때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독자일 때 좋았던 순간을 제 소설을 읽는 독자도 많이 누리면 좋겠다는 소망이 커져가요. 소설을 읽을 때 인물에 투사되어 함께 웃고 말하고 생각하는 그 순간을요. 물론 강요는 아니에요. 소설가는 아무것도 강요할 수 없죠. 그래도 우리의 삶에는 ‘빛의 호위’를 받는 순간이 생각보다 많이 있다는 걸 저는 언제까지고 기억하고 싶습니다.
소설 속 주체들은 여전히 어둠상자 속에 있지만, 나와 닮은 상처를 가진 이가 나를 ‘알아보는’ 순간이 올 때, 그때가 바로 망막이 빛을 받아들이는 암순응의 시간이다. 그녀는 말한다. ‘행복’이란 관념이 아니라 이토록 눈부신 실존의 감각이며 바로 ‘살아 있음에 집중’하는 순간이라고.
“사진을 찍을 때마다 다른 세계를 잠시 다녀오는 것 같은 황홀”(32면)을 경험했던 권은이나, 정처 없이 청계천을 걸어가다가 음반사 앞에서 아름다운 선율을 듣고 멈춰 섰던 서군처럼 행복이란 세계와 타자를 향해 감각이 열리면서 빛의 날개가 확 펼쳐지는 순간의 환희일지도 모른다.
이를 ‘결정적 순간’이라 불러도 된다면, 그 순간이 이 비루하고 고통스러운 세상을 견디게 하는 빛의 통로가 되기도 한다고. 그러니 이토록 아름답고 통렬한 생의 감각을 잊지 말라고. 이것을 그녀가 건네는 뜨겁고도 담담한 위로로 받아들여도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