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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이 계절에 주목할 신간들
손택수 孫宅洙
시인. 시집 『호랑이 발자국』 『목련 전차』 『나무의 수사학』 『떠도는 먼지들이 빛난다』 등이 있음. ststo700@hanmail.net
정주아 鄭珠娥
문학평론가. 저서로 『서북문학과 로컬리티』 등이 있음. jjua@kangwon.ac.kr
김 언 金 言
시인. 시집 『숨쉬는 무덤』 『거인』 『소설을 쓰자』 『모두가 움직인다』 등이 있음. kimun73@daum.net
손택수 『창작과비평』 2017년 봄호 문학초점 좌담에서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정주아 평론가가 저와 함께 봄호와 여름호 좌담을 진행하실 예정인데요, 이번 초대손님으로는 김언 시인을 모셨습니다.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두분 인사를 듣고 싶습니다.
정주아 반갑습니다. 모두 비슷하시겠지만, 날마다 쏟아지는 시국 관련 뉴스를 따라잡느라 무언가를 읽고 쓰기가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요, 오늘은 두분 말씀에 집중해보겠습니다.
김언 오랜만에 듬뿍 한국문학을 읽어볼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창작하는 입장이든 창작에 대해 평하는 입장이든 일단은 읽는 시간이 필요한데요, 생활에 쫓겨서 독서가 부족하던 와중에 모처럼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할 수 있는 자리에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손택수 붓글씨를 쓸 때 글씨 획이 불거지면 그다음 획으로 불거진 획을 커버해야 한다고 합니다. 행과 행의 조화를 그렇게 모색해 완성된 한장의 서도(書圖)처럼 서로 기대고 도와서 이뤄내는 높은 조화의 공간이 이 좌담을 통해 만들어지길 희망합니다.
기준영 『이상한 정열』(창비)
정주아 기준영(奇俊英)의 두번째 소설집 『이상한 정열』부터 시작해볼까요. 2013년에 나온 첫 소설집 『연애소설』(문학동네)부터 이 작가의 주요 과제는 끈끈한 관계들, 가족이나 연인 같은 관계에 따르는 ‘앎’의 환상을 해체하는 작업이었습니다. 시종일관 작가는 타인의 삶을 온전하게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전반적으로는 시니컬하고 냉소적인 메시지랄 수 있겠는데, 그런 냉소가 오히려 독자들에게는 따뜻한 위로로 전달된다는 것이 기준영 소설의 매력입니다. 감정 앞에 담담한 문장이 도리어 삶에 대한 사색의 여백을 열어준다고 할까요. 이번 소설집도 마찬가지입니다.
손택수 삶이 설명이나 이해의 영역으로만 개념화돼 있다면 이상할 것이 별로 없을지도 모릅니다. 개념화되지 않고 설명되지 않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영토들에 대한 탐색이라는 점에서 굉장히 시적이라고 느꼈습니다. 폴 비릴리오(Paul Virilio)가 의식의 흐름이 끊어짐과 동시에 시간의 선형적 흐름이 깨진, 그런 기억의 부재 상태를 피크노렙시(pyknolepsy)라는 말로 설명하지 않습니까. 아직까지 불가사의한 병으로 남아 있는 간질 현상에서 나온 개념인데, 지각되지 않는 일상 속의 미세한 경련과 발작까지 아우르지요. 비릴리오에 따르면 우리는 그런 무의식적 지향을 통해서 다른 시간대를 경험하게 되죠. 이 소설집에서 피크노렙시는 주로 공연장이나 극장 같은 공간 혹은 여행 모티브로 표출됩니다. 가령 「불안과 열망」에는 여행지에서 안네조피 무터의 연주회 정보가 나오고요, 「여행자들」에는 여행지와 영화가, 「조이」에는 여행과 극장이 나옵니다. 「조이」에서는 “자매는 마치 눈 내리는 밤을 배경으로 한 영화 속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그 외침과 동시에 우뚝 멈춰 섰다. 세상의 시간이 마법에라도 걸린 듯 일시에 정지한 것처럼 느껴졌다”(222면)처럼 문장화되어 나타나기도 합니다. 일상과 비일상 사이의 경련과 발작은 「이상한 정열」의 열병이나 「여행자들」에 나오는 기침 같은 신체적 징후와도 연결돼 있습니다. 이런 설정들이 모성 결핍이나 모성의 부재와 관련있는 것도 인상적입니다. 이런 도식을 「4번 게이트」에 나오는 한 문장으로 갈무리해봤습니다. “정돈해놓은 것들, 깨끗이 닦아놓은 것들 사이로 몸을 웅크리고 데굴데굴 굴러보았다. 내 몸이 그렇게 구체적으로 어딘가 닿았다 떨어졌다 하는 느낌에 집중했다.”(85면) 결국 정돈된 개념, 확고부동하게 정돈된 일상의 시공간대에서 생겨나는 ‘이상한 정열’로서의 피크노렙시는 자기 실존에 대한 감각이면서 동시에 부재하는 모성과 점점 희박해져가는 타자에 대한 지향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해하게 됩니다.
김언 소설 평론을 하셔도 될 것 같은데요.(웃음) 저는 오늘 좌담에서 다룰 작품들을 제목 중심으로 먼저 봤는데, ‘이상한 정열’을 찾아보니 동명의 다른 소설과 영화가 있더군요. 제목은 같지만 기준영의 소설은 해석이 달라요. 다른 작품들이 ‘이상한’에 방점을 찍는다면 기준영의 것은 ‘정열’에 더 무게를 둔달까요. 한없이 이상하지만 결국에는 이것 때문에 살고 있는 정열. 각 단편의 줄거리는 한 문장으로 요약될 정도로 단순해요. 단순한 줄거리를 복잡미묘한 심리묘사로 채우고 있는데요, 그러다보니 섬세한 시선과 언어가 필연적으로 들어가지요. 줄거리만 놓고 보자면, 가령 「불안과 열망」은 결혼을 앞둔 여자의 어떤 복잡다단한 심경과 그에 따른 선택이 될 것이고, 「누가 내 문을 두드리는가」는 서른살 가까이 어린 여자의 어떤 면에 낚이듯이 걸려든 남자의 어떤 심경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떤’이라는 말입니다. 이 ‘어떤’의 여러 국면을 하나하나 섬세하게 짚어가면서 풀어내는 시선과 언어가 이 작가의 독특한 지점을 이룹니다. 「이상한 정열」은 상대적으로 다채로운 사건이 전개됨에도 역시나 이도 저도 아닌 심리 상태, 로맨스도 아니고 불륜도 아닌 안개 같은 심리 상태를 동반합니다. 감정상으로 일종의 점이지대라고 할까요. 그러고 보면 이번 소설집에선 불안과 열망, 이상과 정열, 친애와 정념 같은 상이한 감정들이 짝을 이루면서 양극단에 서는 걸 자주 볼 수 있는데, 단순히 극단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들어차 있는 끝없는 안개 같은 심리가 상당 부분을 차지해요. 어쩌면 극단의 짝을 이루는 감정들이 단순히 대립의 차원을 넘어 은밀하게 이어지거나 어울리는 것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가령 정열이 있기 때문에 이상한 지점이 생기고, 이상하기 때문에 정열이 더 도드라지는 식으로요.
정주아 감정이나 심리를 섬세하게 다루는 데 이 작가의 장기가 있다는 것은 분명해요. 그런데 주요 인물들의 심리를 따라가다보면, 감정의 증폭이나 절제를 좌우하는 중요한 전제를 하나 발견하게 됩니다. 작중 구절로 말하자면 “노력의 대답이 아닌 시간”(77면)에 대한 의식이라고 할까요, 의붓오빠를 짝사랑하는 여주인공을 등장시킨 「4번 게이트」에 나옵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노력만큼의 대답, 보상을 보장받을 수 없는 시간이 삶이라는 것, 즉 관계는 등가교환처럼 성립하는 게 아니라는 뜻이겠지요. 이 예측 불가능성을 만들어내는 것이 타인의 영역이겠고요.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든 부부, 연인의 관계든 이렇게 겉보기에는 견고하지만 실은 막막한 시간을 견디는 것이 우리 삶의 대부분이라 해도 좋을 듯합니다. 이런 막막함을 힘겹다거나 권태롭다고 느낄 때, 기준영 소설의 인물들은 낯선 이를 만나고 새로운 관계를 시작합니다. 타인의 세계를 향한 마음의 동요를 ‘이상한 정열’이라 할 수 있겠는데, 어차피 관계는 등가교환과 다르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에 타인의 세계에 깊이 간섭하지도 않습니다.
손택수 그러면 작품별로 얘기를 더 해볼까요.
정주아 저는 「4번 게이트」 「이상한 정열」 「여행자들」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번 소설집은 작품들의 소재만 놓고 보면 자극적인 데가 있습니다. 약혼자를 둔 여인이 여행지에서 낯선 남자를 사귄다거나, 의붓오빠를 사랑한다거나, 중년 남성이 어린 여성에게 집착한다거나 하죠. 작품을 대충 훑어본 독자라면 소위 아침드라마와 다를 것이 없다고 오해할 법도 해요. 그런데 저는 이런 통속적인 소재가 왜 제게는 별로 거부감을 주지 않았는지 거꾸로 고민해봤거든요. 만일 텔레비전 드라마였다면 벌써 채널을 돌렸을 거예요. 그렇다면 자극적인 소재의 선정성이라는 건 어떤 지점에서 발생하는 것일까, 소재 자체의 문제는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김언 반대로 다 읽고 나서 실망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아요. 소재가 꽤 자극적인데 막상 큰일은 안 벌어지거든요. 진짜 막장을 원했던 사람들에게는 실망스러울 수도 있어요. 사건 자체는 별게 없으니까요. 근데 어쩌면 그게 더 정확한 현실 인식인지도 모르겠어요. 세상에는 온갖 일이 다 벌어지는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다 고만고만한 일의 연속인 경우가 많으니까요.
정주아 네, 이야기의 초점이 자극적인 소재를 비껴간다는 점이 중요해 보여요. 통속적인 소재를 놓고 ‘나는 그렇지 않은데 저들은 그렇다’는 식으로 호들갑을 떨면서 타인의 삶을 관음증적으로 대상화하기 시작하면 선정적인 얘기가 됩니다. 「이상한 정열」에서 주인공은 텔레비전 통속극을 보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놀라는 척하지만 실은 그다지 놀라지는 않고 남들의 생은 어떠한지 쳐다보게 되는 그런 민낯의 이야기들”(139면)이라 평합니다. ‘실은 그다지 놀라지 않는다’는 구절이 핵심이겠지요. 제겐 자기 내면의 감정과 결핍에 솔직한 태도가 곧 타인의 삶을 대하는 예의라는 메시지로 읽히더군요. 타인을 향한 이해도는 결국 자기 이해도에 비례한다는 시선을 보여주기 때문에, 소재에 상관없이 깊은 울림을 주는 것이 아닐까요.
손택수 제겐, 패턴화된 소설 문법이 익숙하게 다가옵니다. 반면에 이 패턴화된 서사의 맞은편에 어떤 잉여들이 있어요. 작가가 파고드는 지점은 여기인데 그것이 뜻밖에 낯설게 다가옵니다. 「네 맞은편 사람」은 일종의 창작 방법론을 밝힌 소설이에요. ‘고해’라는 장이었던가요? “같은 곳에 네번 이상은 가지 않는다”(224~25면)라고 했던. 여기도 극장이 나오죠. ‘이 희극이 비극으로 끝난다는 것을 나도 알고 독자들도 알고 있다. 그런데 이 정해진 극이 놓치고 있는, 즉 정형화된 극 앞에 서 있는 아직 뭐라 규정되지 않는 일상의 모습들이 나에게는 또 하나의 극이다’라고 말하는 듯한 고백이 흥미로웠습니다.
김언 희극은 아닌데 그렇다고 비극도 아니에요. 기준영은 희극적이든 비극적이든 어울리지 않는 상황을 서로 맞붙여놔요. 가령 「네 맞은편 사람」에서 “레이저랑 레이저가 만나면 어떻게 돼요?”처럼 어린애 같은 질문으로 가상의 상황을 한번 만들어보는 것 같아요. 서로 만나질 것 같지 않은 상황들을 던져보는 거죠. 그 상황에 대해서, 이 소설의 결어에 해당하는 말처럼, “조금만, 조금만 더 깊숙이, 내 앞의 빛과 어둠 속을 가로질러 가보”(235면)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싶네요.
정주아 작품에서 배어나오는 작가의 담담한 목소리, 인물들의 자기고백 같은 목소리로 독자를 끌어당기는 힘이 있지요. 그렇지만 작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 자기 의견을 관철하려고 하거나, 감정적으로 흔들어놓으려 하지도 않아요.
김언 타인에 대해 단정하지 않는 것 같아요. 저 사람은 저렇다는 확정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어요.
손택수 그래도 불만이 있어요. 「누가 내 문을 두드리는가」를 보면 ‘자신의 모든 생을 걸어서 그 한 사람과 타인의 얼굴을 마주 서지 못했던 것에 대한 반성’을 이끌어내잖아요. 비슷한 예가 꽤 있어요. 가령 「4번 게이트」에도 뭐라고 정리할 수 없는 관계의 어둠과 심연을 그 자체로 인정하면서 의붓오빠를 수용하는 모습이 나오죠. 일종의 성찰 강박이라고나 할까…… 제가 조금 걱정되는 건 이런 흐름들이 자명하다는 거죠.
김언 저는 한 작가가 말하는 방식, 화법, 문체, 세계까지를 한권이지만 다 알아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면 그뒤로는 더이상 집어들지를 않는데요, 기준영의 소설에는 해소가 다 안 되는 지점이 있어요. 그래서 오히려 그의 작품들을 좀더 읽고 싶고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손택수 같은 작품을 놓고 입장이 나뉘는 게 흥미롭습니다. 독자들에게 논의를 열어놓는 차원에서 다음 작품으로 넘어가보지요.
장강명 장편소설 『우리의 소원은 전쟁』(예담)
정주아 『우리의 소원은 전쟁』은 북한 정권의 붕괴 후 통일은 됐지만 남북이 경제적인 분단 상태는 유지한다는 상황을 가정한 장편소설입니다. 장강명(張江明) 작가는 2011년 등단한 이후 한해에 한권, 많을 때는 두권씩 장편을 발표하고 있죠. 정말 에너지가 대단하다는 말밖에는 안 나옵니다. 시장에서 가치를 평가받겠다, 철저히 독자들의 재미를 의식하면서 소설을 쓰겠다는 목표가 뚜렷한 작가인데, 이번에도 그런 의도가 잘 구현된 듯합니다. 인터넷 여론조작을 다룬 『댓글부대』(은행나무 2015)나, 젊은 세대의 자살 문제를 포착한 『표백』(한겨레출판 2011) 등 그간 사회적으로 화제성이 풍부한 주제들을 주목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경제적인 관점에서 통일 이후 한반도에 접근하는 시사적인 감각이 돋보인다고 하겠고요.
김언 한국문학에서 오랜만에 만나는 이야기꾼이자 대담한 재담가입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 정도로 몰입력 하나는 정말 높게 쳐줄 만합니다. 서사의 힘이 무엇인지를 만끽했달까요. 기준영 소설과는 정반대로 사건 중심의 전개인데, 이 역시 한줄로 요약하자면 통일 이후 북조선 마약조직을 소탕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단순한 줄거리를 수많은 사건과 사건의 연쇄로 풍성하게 채워놓았지요.
손택수 액션스릴러라고 할 수 있겠죠. 여기 나오는 장리철이라는 캐릭터가 리 차일드(Lee Child)의 ‘잭 리처’ 시리즈에서 영감을 받은 거라는 작가 인터뷰를 봤는데요, 저도 띄엄띄엄 읽기는 했지만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어요. 그런데 희한하게도 지루했습니다. 무엇 때문일까 생각해보니 대중스릴러로서의 재미와 카타르시스에 정말 충실했는가 하는 의문이 들더라고요. 잔인한 액션이 수시로 나오는데, 마치 잘 꾸며진 세트장에서 움직이는 듯해서 실감이 잘 나지 않아요. 그리고 신뢰를 주고자 인용하는 자료들에 짓눌려 자료 속 상상공간에 갇힌 건 아닌가 싶습니다.
김언 사실 영상이라면 가장 박진감 넘치게 진행될 대목이 바로 액션 장면인데, 소설에서는 그걸 문자로 보면서 머릿속에 그려야 하는 난점이 생기지요. 리얼하게 묘사된 액션 장면인데도 정작 읽는 입장에서는 머릿속에 영상을 그리느라 벅찰 때가 있었습니다.
손택수 소설가는 허구를 믿게 하는 능력으로 현실에 질문하는 힘을 보여준다고 생각해요. 이 개연성이라는 것은 결국 신뢰할 수 없는 상상력에 맞서는 일종의 신념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장강명의 액션스릴러는 누아르 영화를 연상시키는 장면이나 전개가 독자의 집중을 방해하는 면이 있어요. 나는 읽는 느낌에 충실하고 싶은데 작가는 저만치서 영화 스크린을 돌리고 있어요. 그리고 캐릭터들의 비실감이 결정적입니다. 특히 강민준이나 장리철은 설득력이 떨어지는 캐릭터예요. 강민준이 부끄러움 때문에 수류탄을 몸으로 막는 장면이 나오는데 심리묘사가 거의 생략되다보니 작위적으로 느껴져요. 살인기계인 장리철이 오로지 자신을 위해 마약조직으로 전락한 북한 특수부대를 추적하다가 공동선을 향해 열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거의 요약적 설명에 가깝죠. 여간 억지스러운 게 아닙니다.
김언 저도 장리철이 회심하는 대목은 살짝 갸우뚱했어요. 그리고 정말로 액션신답게 실감나게 연출하는 것이 목표였다면 마지막에 장리철과 계용묵이 칼싸움을 할 때 그렇게 많은 대사가 필요했을까 싶네요. 마치 뮤지컬처럼, 칼 한번 휘두르고 한참 얘기하고 방어 한번 하고 또 한참 얘기하고.
손택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지닌 시사성과 고민거리들은 의미가 깊다고 생각합니다. 자연을 바라보는 시선 중에 이런 게 있죠. 저 숲에서 인류의 생존과 직결되는 의약품의 원료가 언젠가 발견될지도 모르니까 숲을 보호하자는 논리 말입니다. 언뜻 생명윤리를 내세우는 것 같지만 실은 철저한 자본의 논리죠. 인간에게 이익이 될지도 모르는 자원을 효율적으로 관리하자는 생각 속에 이윤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위험사회가 예고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장강명 소설은 그런 현실의 알레고리일 수도 있죠. 소설 중 헌병대장이 프로포폴을 맞고 비극적으로 죽는 장면이 나오는데 ‘통일대박’ 운운하던 지금 이 나라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김언 하필 프로포폴이네요. 어느 순간 거대서사가 들어가는 소설들이 우리 문학현장에서 자취를 감췄죠. 다소 거칠더라도 거대서사를 감당하는 소설들이 좀더 많이 나왔으면 해요. 거대서사를 감당할 자신이 없거나 감당하기 싫거나 회의가 들기 때문에 다 밀쳐두고 내면의 심리로만 파고들어가는 건 아닌지 묻고 싶기도 합니다.
정주아 이 소설이 현실에 대한 알레고리나 거대서사로서 의의가 있다는 말씀에 저도 동의합니다. 다만 장르소설 스타일로 사회적 주제를 다루기 때문에 좀더 섬세하게 생각해볼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이 작가에겐 독자의 재미가 최우선이지요. 그래서 통일 이후의 경제적 전망을 액션영화 같은 경쾌한 마약조직 소탕 이야기로 돌려놓은 것이고요. 그래도 통일과 민족이라는 주제 자체에 대한 언급을 피할 수는 없을 텐데, 이때 작가가 보여주는 태도가 흥미로웠어요. 사회적 현안은 대개 갈등이 뒤엉켜 있죠. 거대서사는 이 갈등의 폭과 깊이를 추적하고요. 그런데 장강명은 갈등이 충돌하는 대목에 이르면 작가로서의 중립적인 위치를 고집하는 경향이 있어요. 가령 전작 『댓글부대』는 인터넷 페미니즘 커뮤니티라든가 여성에 대한 묘사를 보면 불편한 장면이 많아요. 이번 소설도 제목부터 매우 도발적입니다. 위험하고 빈곤한 북한을 옆에 두고 고생하느니 차라리 섬멸하자고 주장하는 남한 젊은이들도 있다는 논지거든요. 이런 의견이 실재하느냐에 상관없이 분명 불편한 문제제기인데, 이 대목에서 작가는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무엇도 지지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웁니다.
손택수 상당히 위험할 수 있죠.
정주아 네, 저로서는 장르문학의 감각이 기존의 정통 리얼리즘 서사와 섞이는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이 아닐까 합니다. 창작 스타일이 다양하고 감정 이입의 폭이 넓다는 것은 작가로선 무기가 많은 것과도 같아요. 플라톤은 작가들이란 영혼을 그때그때 쉽게 바꾸는 부류라 해서 싫어했다죠. 플라톤의 눈으로 보자면, 장강명은 목소리를 담아내는 매개가 될 뿐 자기 목소리를 내려 들지 않는 작가라 할 수 있습니다. 허구의 영역에서는 만능의 재담꾼이 되었다가, 그 밖의 세계로 나가면 중립적인 눈과 입만 제공하는 격이랄까요. 작가의 중립적인 태도가 오히려 주제와 스토리가 서로 녹아들지 못하도록 한계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반도 문제를 다루지만 시공간의 입체성이 잘 느껴지지 않아서 중심 사건인 마약조직 이야기는 마치 인공적인 세트장에서 벌어지는 사건처럼 느껴지거든요.
김언 오랜만에 만나는 흥미진진한 거대서사인지라 반가웠고, 말 그대로 시의적절하게 나온 소설을 시의적절하게 재밌게 읽었는데, 한편으로 과연 시간의 마모를 얼마나 견딜 수 있을지는 의문이 들었어요. 시의적절하다는 것 자체가 양면성을 지니지요. 지금은 잘 읽히지만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묻혀버리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손택수 소설 중 말레이시아 대위 롱이 이런 질문을 합니다. ‘말레이시아는 싱가포르를 분리시키고 나서 양쪽 다 잘됐는데 너희는 왜 굳이 통일을 하려고 하느냐. 북한에 투자하느니 기초과학에 그만한 투자를 해도 막대한 경제효과가 있을 텐데.’ 그러자 강민준은 반박을 못합니다. 받아들이는 거죠. 그런데 소설의 끝부분에서 강민준이 통일의 정당성을 이렇게 얘기합니다.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역사를 공유하면서 훨씬 부유하게 사는 사람들이 바로 자기 옆에 있는 못사는 사람들을 외면하는 것은 창피한 일이 아닌가.’ 최소한의 윤리감이 필요하다는 방식으로 마무리하는데 너무 손쉬운 처리라 독자들이 잘 설득되지 않을 것 같아요.
김언 말씀하신 부분은 작가의 사유가 녹아든 발언이기도 한데, 롱 대위의 말에 비해서 받아치는 논리가 조금 빈약해 보이는 건 사실입니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장강명의 소설은 앞서 얘기한 기준영 소설집과는 여러모로 대비가 됩니다. 장편소설 대 단편소설집이기도 하지만 서사 대 심리로 볼 수도 있습니다. 총알처럼 분명한 세계와 안개처럼 모호한 세계로 나눠볼 수도 있고요.
손택수 두 작품의 대비가 흥미롭네요. 장강명 작가의 다음 소설도 기다려보겠습니다.
안태운 시집 『감은 눈이 내 얼굴을』(민음사)
김언 안태운 시집은 지난해 김수영문학상을 받았는데, 언어실험을 행한 기존의 시들과 비교해보면 살짝 기시감이 든다는 의견이 심사과정에서 있었어요. 그렇지만 그런 점을 덮고도 남을 만큼 고집스럽게 이루어낸 안태운만의 화법과 세계가 있고, 실험정신이 돋보인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처음 다 읽고 난 인상은 뚝뚝 분절되면서 흐르는 이상한 물 같다는 거였어요. 시집 곳곳에서 굴절되는 문장이나 특이한 장면 전환이 보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시를 어렵게 만드는 요소이면서 정반대로 안태운 시의 매력이 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반면에 몇몇 시들은 단순히 장면의 나열과 평면적 진술에만 그쳐 아쉬움이 남기도 했어요. 거칠게 정리하자면 이번 시집에서 안태운 시의 성패를 가르는 지점은 문장이 액체성을 지니느냐 아니냐라고 봅니다. 물처럼 흐르면서 꿈틀거리는 문장, 역동적인 발화이자 유동하는 액체의 세계가 엿보이는 시들은 상당히 매력적으로 읽힙니다. 반면에 일부이긴 하지만, 단순한 나열이나 평면적 진술에 그치면서 단조롭게 읽히는, 그래서 딱딱한 고체처럼 보이는 시편들에선 그 매력이 반감되기도 했어요.
손택수 기시감이 든다는 지적에 동감합니다. 언어의 지시성과 재현, 반영에 대한 의심이 토대에 깔려 있는데 그런 건 백년 전 이야기 아닌가요. 가령 「그것에 누가 냄새를 지었나」를 보면 “나무를 베어 내며 나무라고 발음한다”라거나 “너는 각별해진다/너는 이름을 모른다” 같은 구절이 나오는데 제도화된 언어의 부정이라는 언어관을 세습 유산으로 물려받은 거죠. 그 방법론으로서 자동적인 의미 맥락의 흐름을 깨뜨리는 행위들, 번역투들, 비문들, 다성적 화자 등이 동원됩니다. 재현이 아니라 재배치 전략입니다. 세계가 그대로여도 주체인 나의 위치와 행위를 재배치함으로써 세계를 재구성한다는 논리죠. 역시, 기시감이 드는 방법론입니다.
정주아 이번 좌담을 위해 읽은 책 중 가장 어렵고 힘들었습니다.(웃음) 시인의 관념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뚝심이 느껴졌고요. 하지만 독자 입장에서는 시인의 추상적인 관념을 따라갈 만한 실마리가 없으면 고통스러운 독서가 되기 쉬운데요. 저는 「탕으로」라는 시에서 단서를 얻었습니다. 첫 구절이 “고인 물은 멈추지 않고 있다”인데, 뒤로 가면 “모든 물은 넘쳐흐르고 옷자락은 몸을 휘감고 형태는 마모되어 갔다”로 이어져요. 보통 ‘고인 물’의 의미는 평온함, 정지, 혹은 부패 등인데, 이 시인은 ‘고인 물이 멈추지 않고 있다’고 하거든요. 표면으로 보기엔 정적(靜的)이더라도 그 속에서 벌어지는 격렬한 움직임에 대해 얘기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마치 탈수 중인 세탁조 안에서 빠른 속도로 도는 빨랫감처럼. 그렇다면 이 시인이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사유의 운동과 속도에 관련된 게 아닐까 싶었어요. 독자들도 의미를 해독하려 들기보다는 시어의 배치가 보여주는 운동과 속도를 즐긴다면 안태운의 시세계가 좀더 쉽게 친숙해지지 않을까요.
손택수 물의 이미지가 많이 나오는데 김언 시인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김언 「탕으로」를 예로 들어주셨는데, 첫 문장이 단순하지만 뜯어보면 이상해요. “고인 물은 멈추지 않고 있다.” 언뜻 정지한 것처럼 보이는 물조차 끝없이 운동성을 갖고 있다는 거죠. 중간쯤 “탕을 점유하고 있었다” 다음에 “물은 멈추지 않고 있었고 탕은 그런 물을 보존하고 있었다. 그러자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다.” 이 대목에서 첫 문장이 비슷하게 반복되죠. 물은 결국 움직이고 멈추지 않는 것인데 탕은 그런 물을 가두는 동시에 거두는 존재로 나오지요. 그런데 다시 시간은 그와 무관하게 흘러가요. 여기서 물로 대변되는 언어의 두 속성, 즉 유동하는 성질과 고정되는 성질이 다 드러납니다. 그런 점에서 끝없이 멈추지 않는 물의 세계를 따라가면서 동시에 그걸 잡아채려는 것이 안태운의 화법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고 보면 액체와 고체, 유동과 나열이 모두 이 시집에 등장하는 시어들이기도 합니다. 역동적이냐 평면적이냐, 이러한 양극단을 길항시키면서 탄생하는 것이 어쩌면 안태운의 시가 아닐까, 막연히 액체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액체를 지향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가로막는 것이 언어 자체의 고정성이거든요. 고체성이죠. 반대로 아무리 고정된 의미에 붙잡아두려 해도 달아나는 것이 언어의 유동성이자 액체성이기 때문에 언어의 두 속성, 고정성과 유동성을 함께 사유한 시집으로도 읽힙니다. 「어딘지 흐르고 붉은」에도 유동이나 나열 같은 단어가 나오는데, “내게 선을 긋는다면 나의 유동은 무엇의 나열입니까”처럼 끝없이 유동하듯이 나아가야 하는 것이 마치 뚝뚝 끊어지듯이 나열되는 것, 이것은 의미를 구획하고 나눴을 때 생기는 현상이죠. 마지막 부분 “나의 유동이//너의 나열이라면 누가 피부를 긁고 있습니까 흠집은 고체로 엉기기 시작한다 너는 나의 유동에 물을 얹는다”까지 읽어보면 이 시는 결국 두 세계를 같이 더듬으며 얘기하는 것 같아요. 언어의 유동성과 나열성, 액체적인 지점과 고체적인 지점. 안태운의 시를 실험시라고 둔다면 모든 실험시가 최종적으로, 아니면 적어도 한번은 봉착해야 하는 지점에 바로 언어의 문제가 놓여 있다는 걸 새삼 증명하고 있습니다. 언어를 실험하는 시의 도구가 결국엔 언어이기 때문이지요. 욕심을 내자면, 그러한 실험이 지치지 말고 더 극단으로 갔으면 합니다.
손택수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김언 물론 극단으로 가는 게 꼭 더 어려워져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극단의 관계어는 ‘난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숙성’이기도 하거든요. 더 극단으로 가면서도 더 숙성되는 시의 길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전에 손쉬운 타협이 아니라 최대치의 방황과 모색을 하는 시간이 계속 따라붙을 겁니다.
손택수 좋은 시인들은 분명히 언어에 대한 명상으로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송찬호의 첫 시집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민음사 1989)를 생각해보세요. 그때 그 사각형, 고체로서의 사각형과 그 사각형을 넘어서려고 하는 흙. 수십년을 격하고 안태운의 시집에서 다시 반복된다고 할 수 있겠는데, 저는 외려 이 시인이 그다지 열정을 쏟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시편들에서 가능성을 봤어요. 「누에」 같은 시를 보면 문장과 문장을 지연시키면서 독자를 불편하게 만들면서도 지하에 내려간 불우한 여성을 다루었는데, 이는 우리 삶과 연결되는 지점이 있죠. 시인이 누에고치 같은 존재로 구체적 삶과 대화하면서 언어를 풀어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데 거기에 더 집중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김언 한편으로 제가 이 시인에게 신뢰가 갔던 건 잘 안 읽히는 지점 때문이었어요. 저도 젊은 편이지만, 최근의 젊은 시인들을 보면 시가 너무 잘 짜맞춰져 나온다는 인상을 받아요. 어떻게 하면 더 세련되게 뽑혀서 나오는지, 어떻게 하면 시적인 문맥이 살아나는지를, 마치 수위 조절하듯이 잘 안다는 데서 꽤 염증을 느끼고 있었거든요.
손택수 제 말은 새로움도 사회적 구성물이라는 거죠. 새로움이 단순히 새롭기만 해서는 새로움이 될 수가 없고, 그 새로움이 극단에서 익는 과정을 통해 보편적 영토를 넓혀갈 때 새로움으로 추인되는 거잖아요. 좋은 언어감각과 사유를 가지고 있으니 바깥을 향해서 열어놓는다면 자기의 영토가 독자적으로 열리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기시감’이라는 꼬리표도 자연스럽게 떼버릴 수 있겠죠. 사실, 송찬호 시인도 그렇지만 김춘수의 「꽃」을 풍자한 황지우 시인의 「게눈 속의 연꽃」 같은 작품이 지닌 도저한 부정정신도 어떤 식으로든 시대현실과 치열하게 연동되었기 때문에 지지를 받은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안태운뿐만 아니라 우리 젊은 시의 언어탐구가 가진 가능성을 거기서 찾고 싶습니다.
정주아 삶과 현실로 확장되면 좋겠다는 의견에도 공감하지만, 저는 액체적인 흐름이나 속도감의 구현 외에 좀더 다양한 운동 형태를 실험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거든요. 앞서 살펴봤던 ‘고인 물’이 정지되어 있으면서도 휘도는 이미지였다면, 「동공」에서는 “감지되는 나와 지향하는 나는 한 몸에서 서로를 시늉하고 있습니다”라고 하거든요. 휘돌고 있는 물과는 또 다르게, 분열된 의식의 긴장 상태가 팽팽하게 서로 겨누면서 정지 상태를 빚어내요. ‘감은 눈이 내 얼굴을’이라는 표제도 재미있고요. 의식의 중첩 상태나 긴장 상태가 갖는 운동성을 포함해서 의식의 다양한 운동성을 좀더 보여주었으면 합니다.
김언 다음 시집이 참 궁금해요. 어떻게 튀어나갈지 기대됩니다.
이설야 『우리는 좀더 어두워지기로 했네』(창비)
손택수 빅데이터 분석가들에 따르면 구글 검색엔진에 “나는 ◯◯을 좋아한다”와 “나는 ◯◯을 사랑한다”를 넣어 비교해보니 ‘사랑한다’보다 ‘좋아한다’가 세배 많았다고 합니다.
김언 사랑이라는 말 자체를 부담스러워한다는 뜻이네요.
손택수 그렇죠. ◯◯에는 다양한 기호, 취미가 들어갈 수 있을 텐데, 신기하게도 이 자리에 시를 넣어보니 결과가 정반대로 나왔다고 합니다. ‘좋아한다’보다 ‘사랑한다’가 두배 이상 많았다고 해요. 시는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대체할 수 없는 필생의 장르라는 인식이 깔려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제게는 이설야(李雪夜)의 시집이 그렇게 다가왔습니다. 무엇보다 성장소설만 아니라 성장시도 있다는 걸 보여준 게 좋았어요. 「눈 내리는, 양키시장」의 표현을 빌리자면 “더이상 키가 자라지 않”는 소녀의 눈을 통해서 산업사회의 그늘을 그린 반성장의 서사입니다. 타락한 어른들의 세계에 맞서 성장을 멈춘, 귄터 그라스(G. Grass)의 『양철북』에 나오는 오스카 같은 존재인 거죠. 오스카가 저항의 방식으로 양철북을 두드리고 소리를 지르면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저는 이설야의 시집에서도 그런 고통의 신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정주아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테마가 조금씩 다릅니다. 1부는 유년기와 공간에 대한 시고, 2부는 시인의 내면에 집중합니다. 3부는 이웃들에 대한 시, 4부는 이국 체류의 경험과 타자들, 한국사회의 현안에 대한 시들이 주로 나오지요. 유년기의 기억을 다룬 「동일방직에 다니던 그애는」의 배경이 1980년대 중반쯤이니까, 이 시집 한권에 거의 30년 가까운 시간의 스펙트럼이 압축돼 있는 셈입니다. 어떤 성장의 기록, 그렇지만 최초의 고통에서 한걸음도 나가지 못한 반성장의 기록을 담은 시집을 읽자니 가슴이 뭉클하더군요.
김언 이 시집도 제목에 많은 것이 들어 있습니다. 어두웠던 삶의 그늘을 잊지 않고 껴안고 보듬어내려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첫 시집답게 1부는 가족이나 고향을 중심으로 한 유년 서사가 주를 이루는데, 사실상 부와 상관없이 대부분의 시편이 기억 또는 과거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동화적인 상상과 화법이 곁들여진 게 묘해요. 동화적인 상상이기 때문에 당연히 의인화된 표현이 자주 나옵니다. 첫 시 「성냥팔이 소녀가 마지막 성냥을 그었을 때」를 보면 성냥 한개비로 밝히는 것이 결국 지나온 생의 한순간들이에요. 지금은 잊혔지만 잊어서는 안 되는 삶의 단면들이 성냥 한개비의 불을 밝히듯이 밝혀져요. 누추한 생의 한때를 성냥 한개비로 탁 하고 불러내는 솜씨가 참 좋았어요. 「못, 자국」이라는 시에서도 못은 빠져도 못자국은 남는데, 마치 못자국처럼 남은 기억을 잊지 않고 되살리는 솜씨가 있습니다. 이 환상과 현실의 묘한 결합을 보면 기억이 동화적으로 처리되었다고 할까요. 환상이 곧 동화예요, 이 시인에게는.
손택수 자라지 않는 소녀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이 기괴하게 일그러져 있고 참혹한 가난의 풍경 속에서도 이상하게 따뜻한 비애의 정조가 드러납니다. 김해자 시인이 추천사에서 “동화적 리얼리즘”이라고 재치있게 명명한 지점인데, 우리 리얼리즘 시사에서는 낯선 화자가 등장한 것입니다. 발레리(P. Valery)가 “사자의 몸뚱이는 양을 먹고 이룩된 것이다”라고 했는데 양을 먹지 않고도 사자가 되는 소화능력, 그런 내장기관을 가진 시인이 출현한 것이죠. 이설야에게 리얼리즘은 사물을 지시하거나 반영하는 재현이나 핍진성 같은 것이 아니고 삶의 존재방식에 대한 진실성인 것 같아요. 장르 명칭이 아닌 기원으로서의 리얼리즘에 대한 탐색이자 삶이 어떻게 진실하게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각성을 우리에게 제공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이 지점에서 시는 망각의 면도날을 씹고 있는 거죠. 현기영의 용어를 빌리자면 ‘기억의 자살행위 혹은 기억의 타살행위에 저항’하고 있는 겁니다. 특히 「동일방직에 다니던 그애는」 같은 시는 공적 노동언어에서 배제되고 생략되고 은폐된 여공들의 삶을 보여줍니다. 한국 민중시사나 노동시사에 극히 희귀한 사례입니다.
정주아 저는 과거와 현재를 꿰뚫어 묶어내는 시인의 시선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시집의 주요 공간인 인천은 근대 산업화와 도시화를 급격하게 겪은 대표적인 지역이지요. 「못, 자국」을 보면 “비석 같은 아파트”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죽은 물고기와 젖은 나무 위에 세워진 아파트를 비석에 비유한 것인데, 사실 신도시에는 철거나 폐업, 매립 같은 사건들 그리고 근거지에서 추방당한 존재의 그림자들이 있게 마련이죠. 이 시집은 산업화 단계에서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헌사와도 같습니다. 시인에게는 그런 희생으로 이루어진 땅을 밟고 살아가는 자의 죄의식이 있어요. 희생당한 이들을 향한 죄의식과 여전히 희생만을 요구하는 세상에 대한 분노가 합쳐진 것이 이 시집이 말하는 ‘어둠’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건 어둠 자체가 아니라, ‘어두워지기로 했다’는 표현에 담긴 의지입니다. 죄의식과 분노를 계속해서 되새기려는 시인의 의지가 들어가 있지요.
김언 조금 다른 지점에서 좋게 본 시가 「플라스틱 아일랜드」와 「벽 속의 나무」 그리고 「어떤 대화 1」입니다. 가령 「어떤 대화 1」은, “K형이 오늘 달빛이 푸르다고 했다/C언니는 달빛은 항상 푸르다고 했다/H는 달빛이 꼭 푸른 것만도 아니라고 했다/나는 푸른 건 달빛만도 아니라고 했다/그래서 우리는 헤어졌다//해가 핏물을 다 빼먹고/달의 어둠 가운데로 이동하는 중이었다//그날 우리는 모두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가 시의 전문인데요, 서로 다른 말인데도 사실상 같은 말이라는 전언이 인상적입니다. 서로 말이 다르다고 해서 우리가 과연 다른 장면을 경험한 것일까, 혹은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라는 생각도 듭니다. 어쩌면 우리는 같거나 다르거나 상관없는 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다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거기 함께 있었다는 사실이 아닐까. 시간과 장소를 공유했다는 사실, 그것에 대해 서로 다른 말을 하며 사이가 틀어질 수도 있고 만나질 수도 있지만, 시간, 공간, 기억을 함께한 자체는 변함없이 소중하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습니다. 이어서 한가지 아쉬운 지점도 짚고 싶네요. 비유가 잘 발휘된 시들이 있는가 하면, 3부 초반부의 몇몇 시, 「심장공장」 「마태수난곡」 「배꼽」 등은 비유가 너무 승해서 시에서 선명하게 제시되어야 할 이미지가 불필요하게 가려지는 것 같습니다. 비유 없이 스트레이트로 보여줬어도 충분히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손택수 비유가 승해서 주체의 경직된 해석이 나타나는 거죠.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 여지를 추방하는 모습일 수 있겠습니다. 비유의 확고함이 지니는 문제일 텐데, 그런 지점도 저는 이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유년 화자의 아우라가 상쇄해주는 면이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각각의 시편을 보면 김언 시인 말에 분명히 설득력이 있죠. 시집 전체로 놓고 볼 것이냐, 한편씩 떨어뜨려 볼 것이냐에 따라서 독법이 달라지는 지점도 있겠습니다.
정주아 저는 현재 우리 사회와 공명하는 문제의식을 표현한 시들도 좋았습니다. “꽃을 사면서부터 꽃을 잃어버렸다”라거나 “일개미들이 우는 집을 끌고 다닌다”라는 구절(「해바라기꽃들의 방문을 열자」), “사랑 때문에 무덤이 된 집이, 가라앉는다”(「그 숲의 해설가들」) 같은 구절의 울림이 컸어요. 사람들이 공분하는 지점을 정확히 건드린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우리에게 왜 사랑은, 그 자체로는 무고하기 짝이 없는데도, 언제나 미래에 감당해야 할 생계와 부양 의무를 섬뜩하게 경고하는 조짐으로 감지되어야만 할까 하는. 우리 사회의 피로와 상대적 박탈감을 잘 보여줍니다.
김언 시집을 읽으면서 의문점이 몇가지 있었는데, 두분 말씀으로 많이 해소가 됐습니다. 하나만 덧붙이자면, 저는 이 시인의 시집을 덮으면서 새삼스럽게 시단의 초점이 비교적 어린 나이에 등단한 친구들에게 쏠리는 경향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상대적으로 나이가 어린 시인에게 관심이 먼저 가는 건 어쩔 수 없겠지만, 시단의 관심이 모조리 그들에게만 쏠리는 건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다소 늦은 나이에 데뷔하고 첫 시집을 내더라도 이설야처럼 묵묵히 자기 세계를 일궈나가는 시인들에게도 좀더 적극적인 관심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물론 늦은 나이라는 핸디캡을 극복하면서 자기 세계를 어떻게 확고하게 다져나갈지에 대한 고민이 시인 자신에게 먼저 있어야겠지만요.
황인숙 시집 『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문학과지성사)
손택수 문학제도 속의 새것에 대한 지나친 쏠림에 대해 이야기해주셨는데요, 문학은 제도로서도 존재하지만 제도 너머에도 분명히 존재하잖아요. 그 너머를 향한 동경과 지향이 늘 우리를 새롭게 하고 시대나 형식 속에 갇힐 수 있는 문학을 말랑말랑한 반죽물의 상태로 만드는 게 아닌가 싶은데, 그런 상태를 늘 유지하려 애쓰는 분이 황인숙(黃仁淑) 시인입니다.
김언 ‘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라는 제목에 시집의 성격이 어느정도 반영된 것 같아요. 사랑〓용기〓생명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그걸 놓치지 않으려는 심경이 곳곳에서 엿보입니다. 가볍고 경쾌한 호흡인데도 중간중간 아프게 찔러오는 시들이 있습니다. 내가 저버린 생명 혹은 존재들에 대한 헌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촌스러운 표현이지만, 마음을 다하는 시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다고 함부로 청승을 떠는 목소리도 아니지요. 질척거리는 감정과는 거리가 먼, 마치 고양이처럼 명랑과 우수가 함께 걸어가는 듯한 시를 보여줍니다. 그러면서도 주체할 수 없이 감정의 진폭이 크지는 않습니다. 「걸음의 패턴」이라는 시에도 나오듯이, “서로 조금 떨어진 두 사람”처럼 살짝 감정의 거리를 두고서 발화하기 때문일 텐데요, 적절히 거리를 두고 있으니 슬퍼해도 진창으로 슬퍼하는 것이 아니고, 분노해도 분기탱천하는 곳이 없습니다. 삶의 아픈 구석에 대해 조용히 슬퍼하고, 비정한 인간들에 대해서도 조용히 분노하지요. 통장 잔고 ‘영원’(「영원」)이라는 지극한 가난도 가볍게 위트로 처리할 만큼 어떤 극한 상황에 처해지더라도 시적인 여유를 두고 있어요.
손택수 고양이는 인간의 접근을 완전히 거부하지도 허용하지도 않는데 이런 모습이 시인의 초상과 닮아 있습니다. 경계가 가르는 선이 아닌 면이나 공간이라면 경계인은 0과 1 사이에 무수히 많은 점들, 가치들을 끌어안은 정신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이것이나 저것을 선택하기 좋아하는 사회에선 비극의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마 이 시인에게 우울은 그런 것과 관련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비극의 주인공은 0과 1 사이의 무한을 여행하는 축복을 또 누리기도 합니다. 경쾌함은 여기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0과 1만 선택한 사람들은 살 수 없는 무한을 살 수 있다는 것, 그래서 비애마저 경쾌한 거죠. 이번 시집엔 특히 고양이의 정지와 약동을 잇는 사뿐사뿐한 산책의 이미지가 많이 나오는데, 특징적으로 소멸의 감각이 도드라져요. 시인의 생애 주기와도 연결된다고 생각됩니다만, 이 소멸의 감각이 이전의 시들과 다르게 훨씬 더 적극적으로 희박하게 살고 있는, 겨우 존재하는, 사회적으로 소멸되어가는 주변부 삶들에 대한 산책, 그 산책을 통한 교감으로 확장되고 있다는 거죠. 이 시집은 또 하나의 텍스트 속으로 흘러들어오는 상이한 목소리들이 수렴되는 순간들을 아주 기민하게 포착해서 보여줍니다. 고통받는 고양이와 비둘기와 이방인들과 타자들의 곁을 떠나지 않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정주아 두분의 말씀처럼 명랑함에 동반된 우수, 삶에 대한 거리두기가 ‘고양이적인 것’의 정체가 되겠죠. 황인숙의 이번 시집은 ‘고양이적인 것’을 유념하면서 싸우는 대상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추적해보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젊은 날의 시인에게는 세속적인 것과의 싸움이 고양이적인 삶이 필요한 이유였어요. 그렇다면 이제 장년이 된 시인은 무엇과 싸우고 있을까 살펴보는 거지요. 이 시집에는 일종의 위기의식을 보여주는 시들이 있어요. 그중 「장마에 들다」는 매우 인상적이었는데요. “천장이 새누나, 드디어 첫 한 방울/버텨낼 수 있었던 마지막 한 방울을/막 넘긴 천장에 대해 묵념하는데”라는 구절입니다. 천장에 맺힌 물이 어느 순간 임계치를 넘겨 떨어지는 찰나를 표현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시인 자신에게도 그런 임계지점에 대한 위기의식이 계속 느껴진다는 것이겠죠. 삶의 긴장이나 평정을 놓칠 수도 있겠고, 아니면 젊음의 감각을 놓칠 수도 있겠고요. 그럴 때 시인은 스스로를 다스리는 방식으로서 고양이처럼 살겠다는 의식을 되새깁니다. 고양이적인 삶이란, 임계지점에 대한 위기의식조차도 무화시켜서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초월하자는 자기암시와도 같습니다.
손택수 「장마에 들다」에 이런 구절도 있죠. “맹렬히 칫솔질을 한다/하이얀 치약 거품 입에 물고”.
김언 그 장면 재미있지 않아요?
손택수 희극적이면서도 슬퍼요.
김언 코너에 몰리더라도 결코 거기에 함몰되는 타입이 아니에요. 오히려 위트로 처리해버리는데, 이 또한 고양이 감성이라고 할 수 있지요. 어딘가에 푹 빠져서 강아지처럼 한 주인만 모시겠다고 하는 것과 거리가 멀죠. 심연에 빠지는 감정이 아닌 것 같아요. 어느정도 내려가서는 더 내려가지 않아요.
정주아 좀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면, 황인숙 시인은 가난한 골목길 풍경, 자정 무렵 지하철역 풍경 등 사회의 어두운 단면에 대해서 얘기하긴 하지만 시인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동정이나 공감의 포즈를 취하려 하지는 않아요. 섣부르게 타인의 삶에 개입하지 않고 그들에게는 그들만의 세계가 있다는 걸 조심스럽고 담담하게 인정한 상태에서 지켜보지요. 이런 시선이 곧 거리두기의 감각, 즉 고양이의 눈이랄 수 있을 것 같아요. 물론 타인의 세계도 시적 화자의 감정이나 시세계를 흔들지는 못하고요. 이런 균형감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손택수 「새로운 이웃」 같은 작품을 보면 그런 지점들이 분명히 드러나죠. 해석하지 않고 개입하지 않고 보여주는 데 그친 것 같지만 사실 어떤 해석이나 개입보다 가슴을 울려요.
김언 「세입자들」을 보면 비슷한 맥락이 있어요. 지붕에 사는 비둘기들이 시끄럽게 구는데, 비둘기들이나 그 밑에 사는 나나 다 같은 세입자들 아닌가. 저버리지 않고 같이 사는 삶에 대한 얘기를 하는데 그렇다고 질척대며 엉겨붙는 삶이 아니라 담백하게 거리를 두고 인정하는 삶인 것 같아요. 이번 시집에서 가장 슬픈 시는 제목 그대로 「애가(哀歌)」인데 유일하게 애달픈 감정이 주를 이룹니다. 그럼에도 헤어날 수 없는 심연에 빠지지는 않습니다. 일정한 수심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 슬픔이지요.
정주아 명랑한 슬픔을 보여준 시라면 저는 「따끈따끈 지끈지끈」을 꼽겠습니다. 썩어가는 사과를 쳐다보면서 시인이 “신나게 썩어간다”고 얘기하거든요. “나,나나,나/신나게 썩어간다 부단히 썩어간다 따끈따끈 썩어간다”라고 노래해요. 시인의 천진난만함이 얼마나 냉혹할 수 있는지 보여준 것 같아요. 전반적으로 명랑하고 경쾌한 시집이지만 한편으로는 삶에 대한 우울함과 그걸 냉정하게 들여다보는 눈까지도 겸비했다고 생각합니다.
손택수 그늘과 자기 그림자에 대한 탐색이 경쾌한 어법을 더 경쾌하게 만드는 지점이기도 하죠. 그리고 황인숙의 의성어, 의태어는 음성상징어 역할도 합니다. 상징적 맥락에서 나오는, 의미에 포박되지 않는 소리의 흐름이죠. 그 소리의 흐름이 고양이의 문법을 가지고 있고.
김언 필연성을 가진 의성어이기 때문에 빼버리면 안 되죠.
손택수 맞습니다. 이쯤에서 오늘 자리를 마무리할까 하는데 마지막으로 소회를 밝혀주시죠.
정주아 우연일지는 모르겠지만 서로 완전히 색깔이 다른 작품들을 읽고 이야기하게 되어서 정말 즐거웠어요. 우리 문단의 촉수들이 어떤 모양으로, 어떤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 들여다보는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합니다.
김언 시든 소설이든 장르와 상관없이 문학은 결국 하나의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저마다 장르를, 성격을, 목소리를 달리하지만 하나의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점에서 다섯권 모두 매력적이었습니다. 어떤 작품을 만나든 저로서는 그 작가만의 육성이 들리는 것이 중요한데요, 어쩌면 그 육성을 듣기 위해서 아직도 많은 분들이 문학을 하는지도 모르겠어요. 이번에 새삼 느꼈습니다.
손택수 김언 시인이 인용했던 이설야의 「어떤 대화 1」처럼 오늘 우리의 대화도 저마다 다른 말을 한 것 같지만 같은 말의 토대 속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긴 시간 이야기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2017.1.17. 창비서교빌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