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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페미니즘으로 문학을 읽는다는 것

 

다시 새로운 부작용의 시간이다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의 시적 경로들

 

 

김수이 金壽伊

문학평론가. 평론집 『풍경 속의 빈 곳』 『서정은 진화한다』 『쓸 수 있거나 쓸 수 없는』 등이 있음. whitesnow1@hanmail.net

 

 

1. 미래로부터 시작하기

 

모든 국가에서 남성과 여성의 임금이 동일해지는 시점은 언제일까? 미래학자들이 예측하기로는 2065년이다. 남성과 여성이 단지 동일임금이라는 경제적 평등을 성취하기까지,1 인류는 자신보다 우월한 지능체를 창조해 진화의 역사를 새로 쓰고, 외계 행성으로 삶의 영토를 넓히며, 탄생과 죽음의 생물학적 결정조건들을 타파할 것이다.2 시인이 상상하기로는 이런 디테일. “당신 역시 공산품 로봇에 지나지 않아. (…) 인간이었을 때는 결코 알 수 없던 삶의 환희들이 밀려왔다. (…) 나는 새로운 세대를 위한 텐션 페니스사의 이중 분리 음경을 장착한 채 재생산됐다. 그리고 어딘가에 시리우스를 찾아 벌써 이곳, 13행성까지 오게 되었다.”3

인간과 삶의 전면 개조보다 후행하는 성평등의 미래는 기묘한 의문을 낳는다. 인간의 자연적 한계를 초월하는 것보다 성평등이 더 어려운 과업인가? 인공지능을 뇌에 심고 인공장기를 갈아 끼우며 사이보그화하는 인간, 성정체성과 성애의 다양화는 물론 로봇을 성애의 파트너나 삶의 동반자로 삼는 미래의 인간(?)이 여전히 과거의 젠더 트러블에 시달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상상적 질문의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현재 인류에게 젠더 문제가 그만큼 후순위에 있다는 것. ‘인간’의 경계가 재구성되고, 인류의 새로운 시간이 온 후에도 젠더의 관성—젠더가 본질적인 것이 아닌 구성적인 것이라는 증거로서—은 쉽게 약화되지 않는다는 것. 물론 미래학자들의 예측이 맞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런데 예측은 동의와 믿음에 의해 실현되는 수행성을 갖는다. 젠더의 다른 미래를 예측하는 일은 곧 현재를 바꾸는 일이다.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식으로 말하면, “미묘하고도 정치적인 방식으로 강제되는 수행성의 결과로서”4 수동적 행위인 젠더를, “성의 이분법이 부과한 이원적 한계를 뛰어넘어 증식”5하는 체제변혁의 능동적 행위로 전환해야 한다.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인공지능이 젠더 불평등을 데이터화해 인간에게 피드백하고,6 페이스북은 총 60개의 성별 옵션을 제공해 젠더프리(gender free), 젠더리스(genderless)의 세상을 열고 있다(페이스북의 한국 옵션은 남성, 여성, 사용자지정 등 총 세가지다). 올해 미국은 세계 최초로 여성 인공 생식기관인 ‘이바타’(Evatar, Eve+avatar)를 개발했는데 남성 인공 생식기관도 곧 개발할 예정에 있다.7

그리고 지금 여기, 한국사회에서 전개되는 사건들은 복합적으로 뒤얽혀 질적 변화의 특이점을 형성 중이다. 문학의 입장에서는 텍스트의 안과 밖을 실시간으로 종횡무진하며 활로를 찾아야 하는 유례없는 시간이 펼쳐지고 있다.

 

 

2. 경유해야 하는 현재들 1: ‘탈선’

 

‘다른 미래, 다른 삶, 다른 문학’에 대한 상상과 실천은 근래 한국사회와 문학을 강타한 중대 의제다. 이 의제에 불을 붙인 것은 조직적인 사회운동이나 문학작품의 탁월한 성취가 아니다. 세월호, 촛불과 박근혜 탄핵, 문단 내 성폭력 등 현실의 갑작스럽고 압도적인 사건들이었다. 의제는 복수의 발언자들에 의해 다양하게 표현되고 확산되었다. 푸꼬(M. Foucault)가 ‘비판’이라고 부르는, “이런 식으로, 이런 대가를 치르면서 통치받지 않으려는 의지”와 “자발적 불복종의 기술, 숙고된 불복종의 기술”8이 새로운 문화를 빚으며 속속 개발되었다.

푸꼬를 좀더 따라가면, ‘통치’9에 반해 진실을 문제삼는 ‘비판’은 통치술에 대립하는 ‘대항품행’을 창출한다. 전세계가 인정했듯이 촛불집회는 시민의 품행, 민주주의의 품행을 자유로운 개인들이 열린 공동체로서 차원 높게 개발한 사건이었다. 근대적 국가이성에 대립해 발전해온 대항품행에는 세 형식이 있는데, 그 내용은 최근 한국사회의 운동성에 대한 설명으로도 읽을 수 있다. 첫째, 시민사회가 국가보다 우위에 있다는 종말론. 즉 국가의 무제한적 통치성을 정지시키는 시민사회의 출현 및 국가권력의 회수/흡수. 둘째, 국가와의 복종적 연결고리를 모두 자르고 국가에 대항하는 권리로서 “혁명 자체의 권리”. 셋째, 사회의 진리, 국가의 진리, 국가이성 등의 보유자는 국가가 아닌 국민 전체여야 한다는 사고방식.10 용기있는 실천의 두가지 예를 보자.

 

우리가 원하는 것은 어쭙잖은 해명이 아닙니다. 진심입니다. 우리 국민, 주권자들은 이를 알아야 할 이유가 있고, 이를 알아야 할 권리 또한 있습니다. (…) 여러분 전 두렵습니다. (…) 이것이 마지막이 아닌 시작입니다. 이 길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우리 꼭 함께 손을 잡고 그 끝을 봅시다.

—대구 송현여고 2학년 조성해의 촛불집회 자유발언(2016.11.5) 중에서

 

그리고 깨달았다. 문단과 문인을 둘러싼 형체 없는 환상과, 그 관념을 기꺼이 소비해왔던 나를. 그 관념 속에 나의 목소리는 소거되어 있었다는 것을. 그들의 말에는, 기성의 가치를 기성의 방식으로 탈출해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개인은 기성에 대한 작용도 반작용도 아니다. 더 이상 우리는 우리가 써내려갈 문학의 이름을, 환경에 종속되고 부여받는 성질로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탈선 「게르니카를 회고하며」(『문학과사회』 2016년 겨울호 150면)

 

각기 박근혜게이트와 문단 내 성폭력 사건에 대한 두 발언은 문제의식과 태도에서 공통점이 뚜렷하다. 현실의 “잘못된 시간의 그릇된 명상”(김수영 「사랑의 변주곡」)을 끝내려는 결단, 자신과 세계를 혁명하려는 의지, 스스로 주권자로서 “진리의 보유자”가 되기 위한 행동의 시작. 두 발언자는 모두 부당한 현실과 지나온 삶에 ‘끝’을 선포함으로써 자신을 ‘주체’로 세운다. 이 글의 주제와 관련해 고양예고 문예창작과 졸업생 연대인 ‘탈선’의 발언을 세밀히 읽어보자. ‘탈선’이 끝을 선포하는 대상은 둘이다. 독자-학생-여성-시민을 대상화하면서 윤리를 모르는 국가와 다름없는 통치술을 구사해온 문단-문인, 그 “환상과 관념”의 문학적(?) 통치술을 “기꺼이 소비해왔던 나” 자신. “등기되지 않은 현실”(오규원 「하늘 가까운 곳」)의 증언자를 자처해온 문학의 일상에 파렴치한 미등기의 현실이 횡행해왔음을, 억압하는 현실의 바깥에서 억압하지 않는 공간을 자임해온 문학이 교활한 억압의 통로였음이 폭로되는 이 장면은 한국문학사상 가장 부끄러운 것에 속한다. 피해자가 미성년의 독자-학생-여성인 점에서 사태의 파행성은 더 두드러진다.

‘탈선’은 문단-문인의 혁신을 촉구함과 함께, 스스로 새로운 문학의 생산주체가 될 것을 공표한다. 강조점은 후자에 있으며, 이로써 ‘탈선’은 문학적 사건이 된다. ‘탈선’은 두가지 일을 한다. 첫째, ‘탈선’은 ‘탈선’으로 상징되는 이들이 문단-문인의 통치술에 침묵(당)하던 과거에도, 그로부터 탈출해 목소리를 내는 현재에도 ‘문학의 구성적 외부’가 아님을 역설한다. 문단-문인에 의해 구성적 외부를 할당받아 목소리를 내지 못하던/않던, 그러나 문학 자체에 의해서는 지배와 혐오의 대상이 된 적이 없는11 독자, 학생, 여성, 시민 들은 언제나-이미 문학의 내부에 있다. 더 정확히는, 문학의 구성적 외부는 없다. 구성적 외부의 ‘할당’만이 있을 뿐이다.12 문학의 구성적 외부를 상정하는 순간, 문학은 안-밖, 위-아래, 생산-소비, 지도-학습, 권력-복종의 가짜 위계로 분할된다. 할당만 있고 공유가 없는 일방적 나눔은 문학 자체와, 문학이 가동할 수 있는 최대의 역량, 예컨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타자들이 존재 자체를 나누는(분할-공유하는) ‘친구들의 공동체’13를 상상하고 맞이할 역량을 위협한다. ‘탈선’은 성폭력이라는 극단적 행위로 표출된 문단-문인의 통치술에 저항하면서 이를 일깨운다. 현실의 통치술에 반하는 대항품행을 개발해야 할 문단-문인이 오히려 그 통치술을 내면화함으로써 문학이라는 공동체, 혹은 이름 붙일 수 없는 공동체가 열리는 빈 공간으로서 문학을 분할하고 폐쇄한 사태. 따라서 피해자는 둘이다. 위계의 하부를 강요당한 구성적 외부(?)들과, 위계의 구조로 상상되고 유통된 문학 자체.

둘째, ‘탈선’은 문학의 새로운 주체 및 새로운 문학의 주체가 탄생하는 다른 방식을 작동시킨다. “우리는 피해자도, 가해자도, 방관자도 아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참상을 이해한다.”(「게르니카를 회고하며」) ‘탈선’은 “기성”의 매개를 통하지 않고 ‘문학’과 직접 만나 “우리가 써내려갈 문학의 이름”을 스스로 만들겠노라고 공언한다.14 ‘탈선’의 선언문은 인간과 삶의 혈액이 흐르는 문학작품이 아닐 수 없는데, 무엇보다 현재의 문학 속에 미래의 문학이 포함되는 빈 공간으로 역할하는 점에서 그렇다. 교육현장15에서 ‘문학’의 이름으로 행해진 폭력적 통치술에 맞서 ‘독자가 직접’ 열어젖힌 이 빈 공간은 지금까지 한국문학이 소유해온 공간들과는 많이 다른 것이다.

미래의 문학을 독자가 먼저, 주체적이고 독자적으로 모색하는 초유의 상황에 기성 문인들은 서둘러 응답하며, 근대 문학제도의 경직성과 문학 자체가 내장하고 있을지 모를 비윤리·반윤리의 잠재성을 고통스럽게 성찰하고 있다.16 2000년대의 미학적 시들과 ‘시와 정치’ 논쟁에 대한 반성도 속속 제출되고 있다. 시의 존립 근거와 창작의 윤리를 처음부터 다시 질문하는 시 쓰기, 비판의 칼을 자신에게 돌리는 비평의 새로운 돌파구 찾기17도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를 두고 차마 전화위복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한국문학의 심각한 내적 균열을 먼저 자각하고 그에 응답한 것은 작가와 비평가가 아니라, ‘독자’였기 때문이다. 즉 ‘탈선’하는 독자들의 대열 없이도 문인들이 자발적으로 이같은 자기부정에 이르렀을까 하는 의문은 영원히 봉인될 수 없는 것으로 남는다. 한국문학의 위기, 근대 문학제도의 위기, 문학 자체의 위기가 총체적으로 얽힌 난맥상은 뜻밖에도 ‘탈선’하는 독자-미래의 작가들의 목소리로 공언되었을 뿐 갑자기 발생한 것이 아니며, 여성혐오와 남성중심의 권력이 문학장에도 실재해왔음을 기성 문인들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참회가 문제라면, 폭력과 미필적 고의와 방관과 침묵과 무감각이 녹아 있는 문학과 삶에 대한 참회는 어떤 언어로 씌어야 할까. 한국문학의 더없이 참담하고 아름다운 성취가 참회의 발로였음을 기억해내는 것은 애틋한 자기격려일까, 윤리적 각성일까, 또다른 문학적 욕망일까. 불의한 세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삶 속에서 시가 쉽게 씌어진다는 이유만으로 부끄러워했던 한 시인이 전망한 미래는 참회의 끝이 아니라, 끝날 수 없는 참회였다.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윤동주 「참회록」)

 

 

3. 경유해야 하는 현재들 2: 2000년대의 새로운 시들과 체제

 

‘탈선’의 주체들, 즉 그간 억압된 문학주체-독자들의 말하기와 글쓰기는 근래 한국문학이 공들여온 기획을 무력화한다. 문학이 감각을 재분배하는 미학의 정치를 통해 현실의 구조를 미세하게 재배치하려는 것과 반대 방향에서, 현실의 사건과 목소리가 문학의 체제를 파열하는 역전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부터는 말이다 부작용의 시간인 것이다”(황병승 「주치의 h」), “나는 사방에서 자꾸만 태어났습니다”(황병승 「사성장군협주곡(四星將軍協奏曲)」). 인상적인 시적 슬로건들을 남긴 2000년대의 시들은 10년이 흐른 지금, 다른 독법에 둘러싸인다.

부작용(副作用)이란 원래의 작용에 따른 부수적인 잉여의 작용이다. 원래의 작용을 방해하고 중단하는 부작용(不作用)을 아우른다. 2000년대의 낯선 시들이 기존의 ‘낡은’ 미학체제에 맞선 전략은, ‘다른 것을 생산하는 부작용(/不作用)’이었다. 그런데 부작용의 생산자들은 정작 스스로의 부작용에 대해서는 둔감했다. 가령 수많은 타자로 분열하는 미정형의 장소부재의 존재-주체가 2000년대 낯선 시들의 미학적 생산물인 한편으로, 후기자본주의 사회가 유포하는 주체의 특성이기도 한 점은 면밀히 검토하지 않았다.18 텍스트에서 수행된 타자에 대한 많은 환대들이 현실의 인간에 대한 환대의 실감으로 이어지지 못한 것은 이와 관련있을 것이다. 한편, 2000년대 낯선 시들의 이론적 지지기반으로 채택된 랑시에르(J. Rancière)의 미학적-정치적 체제—랑시에르의 뜻과 달리 문학이 지향해야 할 단일체제로 오인되기도 한—지향이 유발한 부작용도 있다.19 새로운 미학의 정치적 역능이 강조되면서 변화하는 현재 속에 과거의 텍스트(특히 고전)가 새롭게 귀환할 가능성은 망각되었다.20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감정과 방향감각의 영원한 두 축”21이며, 새로운 미학-정치만이 더 나은 삶과 세계를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공리는 잠시 잊혔다.22 랑시에르를 따라 ‘(미학의) 정치’를 ‘윤리’보다 우월한 개념으로 전유함으로써 ‘윤리’를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규율로 취급하고, ‘윤리적 성찰’과 ‘미학적 실험’을 이분법적 대립구도로 인식하는 문제점도 나타났다. ‘성찰’로서의 문학에 대한 거부반응과, 미학적 자율성을 윤리로부터의 해방을 보장하는 알리바이로 착각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자신이 유발하는 부작용을 온전히 통제할 수 있는 존재나 체제는 없다. 언제나 ‘다른 것’과 ‘그 이상의 것’이 있다. 부작용은 다른 것과 그 이상의 것이 도래하는 방식이며 생산되는 통로다. 작용에 대립하는 반작용을 포함하지만, 쉽게 예측하고 통제할 수 없다는 점에서 더 근본적인 변화를 예비한다. 문학은 통치에 의해 제한된 삶과 현실에 대한 부작용이며, 부작용을 생산하는 장이다(문학의 ‘자율성’은 이 부작용을 내포한다). 삶과 현실은 문학이라는 부작용을 통해 자신이 아닌 것과 만나며, 자신 이상의 것이 될 가능성을 갖는다. 문학은 자신이 산출하는 부작용에 대해서도 개방적이다(‘의도의 오류’ 개념은 작품의 부작용에 대한 이론적 승인의 한 예다). 작품(의 무의식)이 진정으로 열망하는 것 또한 작용이 아니라 부작용일 것이다.

 

 

4. 부작용하는 사랑의 현재들

 

‘탈선’의 시점부터는 한국문학의 새로운 부작용의 시간이다. ‘탈선’은 기존의 현실과 문단-문인의 통치술에 대한 반작용을 넘어 부작용을 행한다. “개인은 기성에 대한 작용도 반작용도 아니다.” 부작용은 사실 여성에게는 깊이 체화된 존재와 삶의 방식이다.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사회에서 여성은 남성과 같은 작용 및 남성에 대한 반작용을 금지당하고, 부작용의 위상을 강요받는다. 이 점에서 초창기 페미니즘이 남성중심주의에 대한 반작용에 매진한 것은 이분법적인 사고의 소산만은 아니었다. 반작용을 이행하기 전에, 남성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여성을 구성하는 것 자체가 문제였기 때문이다.

부작용은 또한, 존재와 삶과 문학이, 이 셋의 같은 열망인 사랑이 내재하고 있는 운동성이다. 모든 것을 바쳐 ‘온몸’으로 밀고 나가도 삶은 자주 삶 아닌 것에 이르고, 문학은 문학 아닌 것에 이르며, 사랑은 사랑 아닌 것에 이른다(‘탈선’이 부딪친 것도 기대 배반의 부작용이었다). 문학은 그 반대 방향에서 삶 아닌 것이 삶에, 문학 아닌 것이 문학에, 사랑 아닌 것이 사랑에 이르는 생성의 역설을 강조해왔다. 우리는 그것을 미래의 전망이나 희망, 사랑이라고 불렀다. 이 역설은 실제로 존재하며, 위기의 시간들에 빛을 발한다. 그런데 현재 속에 미래의 지분을 내어주며 문학은/우리는, 현재를 직시하는 수고와 고통을 조금씩 덜어내온 것은 아니었을까. “슬프다//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모두 폐허다”(황지우 「뼈아픈 후회」).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기형도 「질투는 나의 힘」). 사랑 아닌 것에 도착한 사랑의 참담한 고해성사에 우리가 열광했을 때, 그 속에는 ‘희망’과 ‘사랑’의 문학적 기율(강박)이 무너지는 쾌감이 있었다. 사랑의 ‘미래’와 ‘대단원’을 미리 살아내는 동안, 사랑의 부작용과 부작용하는 사랑의 현재는 얼마쯤 희미해져 있었다.

부작용하는 사랑의 현재들. ‘사랑의 부작용’과 함께, ‘부작용으로서의 사랑’을 살아내고 써온 것은 대체로 여성 시인들이었다. 사랑을 하는 여성이 끝내 마주하는 것은 사랑에 비례하는 사랑의 부작용이며, 그 사랑을 말할 수 없는 언어의 부작용이다. 남성 중심의 언어가 지닌 편협성, 그 언어와 내내 어긋나는 재현 불가능한 여성(성), 이를 통치의 전략으로 삼는 근대 체제 속에서 여성에게 ‘사랑’은 열망과 달리 부작용하거나, 부작용의 방식으로만 작용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은 아마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라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과연, 여성인 나도 이 말을 할 수 있을까? 여성인 내가 어떻게, 무엇으로 너를 사랑한다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사랑’이란 말 속에 이미 근대의 기획이 무섭도록 내재해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나’는 어떤 방식으로 이 사랑의 대화 속에 거주해야 한단 말인가.

—김혜순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문학동네 2002, 5면)

 

2002년의 김혜순(金惠順)이 던진 질문은 십여년이 지나 ‘여성’을 넘어 다시 구성된다. “2000년대는 한국 시문학사에서 처음으로 여성의 이름이 과반을 차지하게 될 시대”23지만, 2000년대의 새로운 시들은 “정체성의 경계를 넘나드는 혼종적 작업에 몰두한 나머지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놓친”24 면이 있었다. 동시에 2000년대 시의 혼종성은 젠더 유연성을 촉진함으로써 페미니즘의 귀환에 결과적으로 기여한다. 일례로, “고양이도 없는데 빙글대는 웃음만 떠도는 쾌락의 세계”25에서 끊임없이 유동하는 젠더들을 현란하게 연기한 황병승의 ‘육체쇼’는, 우리 시에서 페미니즘이 여성을 넘어 모두를 위한 기획으로 재출현하는 통로가 되었다. 2000년대 시의 혼종성을 통과하며 페미니즘은, 남성과 이성애 중심주의의 파괴적인 작용에 맞서 생산적인 부작용을 도모하는 범(凡) 젠더 차원의 운동으로 재인식되고 있다. 최근 페미니즘 시 논의에서 여성 시인만을 다루는 관행이 사라진 것은 그 단적인 증거다.

‘모두를 위한, 모두의 페미니즘’에 대한 지향이 2010년대 시에 유입된 경로는 다양하다. 황병승을 비판적으로 계승한 『글로리홀』의 김현(金炫)은 “퀴어한 존재로서 자기 정체성에 대한 탐구”를 “메타픽션의 방법론”으로 전개26하면서 필연적으로 페미니즘에 도착해 있다. 『프로메테우스』(파란 2016)의 김승일이 밟은 경로는 출발과 달리 역설적인 것이었다. 김승일은 가부장제사회에서 권력-폭력에 유린당해온 남성의 서사를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가차없이 폭로하면서, 사랑의 부작용으로서 여성적인 것과 만난다.

 

나를 사랑하는 선생이 얼마나 될 것인가

나를 사랑하는 선생은 실로 많았다

나를 사랑하는 친구도 많았지

교무실에서 말 한마디에 죽었다는 걸 아는 선생이 얼마나 많은가

주먹질 한 번에 마음이 다 쓸려나가는 것을 친구가 왜 모르겠는가

더 넓은 세상을 향하여 더 완벽한 진도를 빼기 위하여

알면서

나갔으리라

—김승일 「우리, 미안하다고, 하자」(『문예중앙』 2016년 겨울호) 부분

 

나는 사랑을 향하여 사랑을 향하여 걸어간 수많은 이름을 떠올려본다

나는 사랑을 향하여 사랑을 향하여 신발을 고쳐 신지 않는다

 

(…)

 

도저히 바뀌지 않는 인류를 만난 새로운 인류가 우리라고 확신한다

 

모든 것이 다 망가진 채로 우리는 다른 이야기를 상상해야만 한다

이곳에 토착한 거대한 사실 쪽으로 우리의 이야기가 기울어간다

—김승일 「홍대에서는 참 많은 일들이 있었지」(『문예중앙』 2016년 겨울호) 부분

 

우리는 다 그런 저주에 묶여 있다가 퉁겨져 나온 희망이야? (…) 남자애 이름이 떠올라 공통적으로 목을 매단 남자애의 궤적이 덜렁덜렁 무서운 눈으로 하늘을 쳐다보는 걸 너와 나는 자꾸 상상한다 상상하여 옆 사람에게 더 옆 사람에게 전한다 자주 알고 있으라고 더 자주 환기시켜서 공기가 깨끗해지라고

—김승일 「우리, 미안하다고, 하자」27(『문예중앙』 2016년 겨울호) 부분

 

김승일의 ‘나’는 선생과 친구들의 사랑에 포위되어 “더 넓은 세상”과 “더 완벽한 진도”를 위해 희생당한다. 결국 ‘나’는 “도저히 바뀌지 않는 인류”에 의해 “모든 것이 다 망가진” 세계에 처한다. 그리하여 “나는 사랑을 향하여 사랑을 향하여 신발을 고쳐 신지 않는다”. 김승일의 ‘나’는 사랑의 ‘작용 정지’를 선택한다. 끝내 이곳에 부작용하는 사랑의 주체로, 사랑을 폭력으로 변질시키는 세계에 부작용을 가하는 사랑의 주체로 남기로 한다. 남아서, “모든 것이 다 망가진” 세계의 절망적인 공기를 “다른 이야기”에 대한 상상으로 환기(換氣)시키고, 그 상상을 옆 사람들에게 환기(喚起)하면서 계속 전달하기로 한다. ‘옆’으로 파급되는, 인류와 세계의 “다른 이야기”를 상상하고 전달하는 연쇄작용이, 망가진 세계에 부작용을 가하는 방식으로 작용하는 사랑의 행위임을 알아차리기는 어렵지 않다. 폭력에 희생되어 “공통적으로 목을 매단 남자애의 궤적”을 상상하고 전달하는 일 역시 마찬가지다. 이 세계와는 ‘다른 이야기’, 이 세계 속에 ‘억압된 이야기’를 자꾸 “상상하여 옆 사람에게 더 옆 사람에게 전하”는 일은, 사랑의 변주된 행위이자 알레고리다. 이는 공동체와 시(문학)의 윤리적인 작동방식에 관한 알레고리이기도 하다. ‘옆’으로 점차 확산되는 비대칭의 비동시적 연대를 통해 사랑은 문득 부재하던 형식을 얻고, 부작용 속에서 세계의 공기를 조금은 “깨끗”하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사랑의 응답은 끝내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 부작용하는 사랑은 사랑 없는 세계를 관통할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 작용하며, 그 행위를 계속 새롭게 개발해나가야 하지만, 더불어 응답의 부재와 실패를 있는 그대로의 현재형으로 부단히 살아내야 한다.

김승일의 시에서 ‘옆’은 사랑이 도래하는 장소이며 사랑의 윤리가 운동하는 방향이다. 남성 시인 김승일은, 앞서 김혜순의 질문에 압축된 20세기 후반 여성시(인)들의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사랑은 결코 지배와 강압에 기반한 관계에 뿌리내릴 수 없”으며, 사랑의 주체들은 “가부장제가 관계의 구조를 지키기 위해 고수하는 모든 것과 반대되는”28 입장에 설 수밖에 없다는 것. 이 입장의 이름은 페미니즘이다. 그렇다고 해서 김승일의 시가 주인공만 남성으로 바꾼 여성 서사의 거울상인 것은 아니다. 김승일은 폭력적인 위계의 가부장제 사회에서 부작용하는 사랑이, 부작용하는 존재와 삶이 여성만의 것일 수 없는 필연의 진실을 남성인 자신의 삶의 뿌리에서 건져 올린다. 그의 시에서 여성과 남성의 서사는 두개의 대립적이거나 닮은 서사가 아닌,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서사로 그려진다.

20세기 후반 여성시(인)들의 주어 ‘나’가 페미니즘이 우리 시에서 집단적인 목소리를 낸 초창기의 여건상 ‘여성(성)’을 상정한 것과 달리, 2010년대 김승일의 시는 모두가 공유하는 텅 빈 공간인 ‘나’의 자리에 ‘남성(성)’을 추가로 등록한다. 여성/남성의 구별이 굳이 필요없는 ‘나’는 젠더 정체성보다는, 지배와 폭력에 대한 체험적 저항으로 연대해 ‘우리’를 형성한다. 이 ‘나-우리’는 당분간 폭력적인 ‘그들’에 적대하는 ‘우리’(We)겠지만, 옆 사람들에게 계속 전파되어 공동체와 페미니즘의 진정한 주어인 ‘모두’로서의 ‘우리’(One)29로 무한 수렴될 우리(여야 한)다.

 

나는 육십 년간 죽어 있는 세계만 바라보았다

이젠 살아 있는 세계를 보고 싶다

사랑 찌개백반인 삶이여 세계여

—최승자 「나는 육십 년간」(『빈 배처럼 텅 비어』, 문학과지성사 2016) 부분

 

나는 이미 가고 또 간 자(者)여서

허한 의문들로 가득 차

기다리고 또 기다리네

그 기다림에는 끝이 있을 것이네

얇고 얇은 이 세계 너머의 그 세계도

이미 닳고 닳은 것인지 혹은……

—최승자 「세계는」(『빈 배처럼 텅 비어』) 부분

 

2010년대의 버전으로 매우 단순한 시적 지도를 작성하자면, 세계의 한쪽 끝에는 “모든 것이 다 망가진 채로” “다른 이야기를 상상”하는 김승일이 있고, 저 먼 다른 쪽 끝에는 “혁명은 인류의 낡은 꿈/이미 잊혔어야 할 꿈 (…) (나는 벽만 바라보고 있구나)(「나는 벽만 바라보고 있구나」)라고 중얼거리는 최승자(崔勝子)가 있다. 두 시인은 ‘세계의 끝’과 ‘끝으로서의 삶’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면서도 전혀 다른 방향성을 갖는다. 같은 공간에 거주하면서 다른 장소를 점유하고 있는 셈이다.

최승자는 죽은 세계와 세계의 죽음을 응시하는 데 삶을 바쳐왔으며, “얇고 얇은 이 세계 너머의 그 세계”에 대해서도 아무런 희망을 품지 않는다. 언젠가 올 ‘끝’을 기다리며 세계와 자신에 대해 무위하고 부작용할 뿐이다. 최승자의 평생은 자신의 존재와 삶이 온전히 ‘세계에 대한 부작용’으로 화하는 과정이자 그것을 응시하는 과정이었다. ‘세계의 끝’에서 살아가는 존재의 운명을 최승자는 세계의 종말을 향해 가는 인류 전체를 대신하듯 홀로 그리고 자발적으로 짊어져왔다. “마치 이 세계가 멸망한 다음날 아침 그 문명의 잔해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이 세상을 바라보고 있”30는 최승자의 ‘나’는, 평생의 부작용을 통해 젊은 시절의 박해받는 여성 ‘나’로부터 세계를 죽음에 이르게 한 인류를 대속하는 ‘나’(-인류 모두)로 확장되어 있다.

부작용하는 삶과 존재의 기원에는 부작용하는 사랑과 사랑의 주체-대상들이 있다. 일찍이 서른살의 최승자가,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 “영원한 루머”가 되게 한 범인으로 지목한 것은 바로 ‘사랑’의 구성원들이었다. “너당신그대, 행복/너, 당신, 그대, 사랑”.(「일찌기 나는」, 『이 시대의 사랑』, 문학과지성사 1981) 노년의 최승자는 ‘살아 있는 삶과 세계’를 “사랑 찌개백반”이라고 부르며 친근한 감각으로 갈망하지만, 그 실현의 가능성을 믿지는 않는다. “세계 전체가 한 병동”(「나의 생존 증명서는」, 『빈 배처럼 텅 비어』)인 세계에서 사랑은 지배와 폭력의 작용을 더 가속화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최승자가 “빈 배처럼 텅 비어” 도달해 있는 ‘나’와 ‘이곳’은 페미니즘이 현실적인 효력을 잃고 말소된 곳일까, 아니면 반대로 페미니즘이 최종적으로 추구하는 영적 해방—모든 형태의 지배와 억압에 대한 해방이 영적 탐사를 겸함으로써 억압받은 존재가 본래의 영성을 되찾고,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31—이 이루어지는 곳일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최승자가, 이 세계가 강요한 여성의 운명 속에서 인류 전체의 운명을 발견하고 살아내왔다는 점이다. 최승자의 시에서 젠더는 인류 공통의 실존 조건인 삶과 죽음의 부작용을 견디며 얼마쯤 휘발되었거나, 인간이 젠더에 갇힐 수 없는 젠더 이상의 존재라는 것을 확인하게 하는 한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5. 어떻게 계속 부작용할 것인가

 

어느 소설에서 과학자 트린 트라굴라는 균형감각을 가지라고 잔소리하는 부인을 괴롭히기 위해 가상현실 심리고문기계를 만든다. ‘모든 관점 보텍스’(Total Perspective Vortex)다. 기계에 들어가 모든 관점을 갖게 된 부인은 무한한 우주 전체와 티끌 속의 티끌보다 미미한 존재인 자신을 목도한 충격에 뇌가 파괴된다.(더글러스 애덤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책세상 2005)

민주주의는 복수형이며 페미니즘과 문학도 복수형이다. 그래야 한다. 최근 우리는 놀라운 사건들을 겪으면서 이 점을 재확인(해야)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모두를 위한 민주주의·페미니즘·문학을 다양한 형태로 상상하고 지향하는 것이지, 모든 관점을 가진 민주주의·페미니즘·문학을 단일한 형태로 규정하고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단 하나의 관점과 모든 관점은 불완전한 인간에게는 똑같이 폭력적이고 무용하다. 복수이며 복수일 수밖에 없는 인간(들)의 관점은 하나의 체제가 아닌 복수의 체제로 작동해야 한다. 문학도, 자율성과 미학 등 문학의 기본 개념들도 동일하다. 예컨대 자율성은 작가와 작품이 서로에게로 완전히 환원될 수 없음이 핵심으로, 전부 아니면 전무(all or nothing)로 결정해야 할 사안이 아니다. 작가나 작품의 자율성을 얼마나 인정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독자의 자율에 달린 문제다. 다른 시공간, 다른 맥락 속에서 계속 다르게 읽히는 작품을 붙박아둘 고정점은 존재하지 않는다. 복수의 독자들이 복수의 관점으로 인정하(지 않)는 자율성은 문학의 존립 근거이며, 문학이 투명한 멸균상태의 산물이 아니라는 보증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성폭력이라는 극단적인 비윤리적 행위를 지지하는 문학은 없다. 문학을 그렇게 전유하는 관점, 그렇게 착각하고 폭력적으로 살아내는 관점만이 있을 뿐이다. 이 부작용을, 문학은 자신을 축소하거나 제한하지 않고는 막을 수 없다(‘문학은 도덕적 수양의 결실이어야 한다’ 등). 이 한계(?)는 문학이, 문학의 이름으로 우리가 누리는 자유의 결코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는 잉여의 작용인 까닭이다.32

체감과는 다르게, 2000년대 이후의 시들에서 페미니즘은 약화되지 않았다. 오히려 ‘모두를 위한, 모두의 페미니즘’을 향해 여러 경로로 진화해왔다. 현재 우리 시에서 페미니즘적 사유는 체제의 통치술에 부작용하는 대항품행의 개발, 근대문학제도 및 한국 문단-문인의 통치술에 부작용하는 새로운 문학-주체들의 탄생, 문학의 기본 개념들의 부작용에 대한 검토 등을 가로지르는 강력한 동사로 떠오르고 있다. 이 현재형의 문제들에, 과학이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젠더의 근미래가 겹쳐지고 있다. 다시, 어떻게 부작용할 것인가. 질문은 계속 새롭게 구성되어야 하고, 문학의 미래와 페미니즘의 미래는 부작용하는 사랑과 삶의 복수형의 연대를 계속해야 한다. 모두를 위한 세계, 모두를 위한 혁명의 가능성을 품고 우리를 급습할 부작용을 언제든 환영할 준비를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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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년 현재 남녀 임금이 동등한 국가는 없다. 2016년 기준 성평등 지수 1위 국가인 아이슬란드에서도 남성의 평균임금이 여성보다 14% 많다. 아이슬란드는 ‘남녀 동등임금 인증제’를 2018년부터 시행할 예정이다. 「‘성평등’ 1위도 부족? 아이슬란드의 대담한 도전」, 오마이뉴스 2017.5.3.
  2. 몇가지 예들.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능을 능가하는 특이점(singularity)의 도래(2045), 부모의 주문대로 DNA를 조작하는 디자이너 베이비 출현(2053), 유전자 합성인간 탄생(2056), 인간의 화성 거주 시작(2059), 냉동인간을 되살리는 냉동보존술 완성(2060). 박영숙 외 『세계미래보고서 2045』, 교보문고 2015, 29~32면 참조.
  3. 김현 「어딘가에 시리우스」, 『글로리홀』, 문학과지성사 2014.
  4.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조현준 옮김, 문학동네 2008, 359면.
  5. 같은 책 295면.
  6. 미국의 영화배우 지나 데이비스가 2007년에 설립한 ‘지나 데이비스 미디어젠더연구소’는 인공지능을 활용해 영화 속 젠더 차별을 데이터화하고 있다. 「인공지능, 몰랐던 ‘영화 속 배역 성차별’도 콕 찍어낸다」, 한겨레 2017.3.20.
  7. 「세계최초 인공 여성생식기관 ‘이바타’ 개발」, 동아일보 2017.3.30.
  8. 미셸 푸코 『비판이란 무엇인가? 자기 수양』, 심세광 외 옮김, 동녘 2016, 47~48면 참조.
  9. 푸꼬의 ‘통치’는 넓게는, “인간들의 품행을 이끌어야 할, 정해진 기술이나 절차”를 뜻한다. 좁게는, 서구에서 18세기부터 견고해진, “제도·절차·분석·고찰·계측·전술의 총체”(통치성)에 의해 행사되는 “지극히 복잡하고 특수한 형태의 권력”을 의미한다. 통치는 저항의 대상이 되고 정지될 수는 있어도 폐지될 수는 없다. 통치 없는 삶도, 통치의 바깥에 거주하는 개인도 없다. 미셸 푸코 『안전, 영토, 인구』, 오트르망 외 옮김, 난장 2011, 142면, 162~63면, 528면 참조.
  10. 미셸 푸코 『안전, 영토, 인구』 481~83면 참조.
  11. 심진경이 지적했듯이 “실제 벌어진 성폭력과 성폭력에 대한 문학적 재현 모두를 여성혐오로 싸잡아서 비난할 수”는 없다.(고봉준·심진경·장은정·정한아 「2016년 한국문학의 표정」, 『21세기문학』 2016년 겨울호 267면) 개별 작품과 ‘문학 자체’ 역시 구별되어야 한다.
  12. 마찬가지로 세계의 구성적 외부로서 여성은 없다. 여성에 대한 구성적 외부의 ‘할당’만이 있을 뿐이다.
  13. ‘타자성의 공동체’의 다른 이름. 친구란 ‘이타성의 부름’으로, “특수성 속에서 특수성을 분열시키는 보편성, 특수성과 보편성의 겹침 속에서 특수성도 보편성도 아닌 이타성(alterity)을 지시”한다. 민승기 「친구라는 ‘부름’: 우정의 정치학」, 웹진 문장 2011년 6월호.
  14. 시집 『프로메테우스』의 시인 김승일도 폭력의 체제에 저항하는 방법을, 매개를 거부하는 삶의 직접성과 주체성에서 찾는다. “찾아보면 우리는 그들의 폭력적 유통 과정을 거치지 않고/우리의 행복을/우리의 권리를/나누어 가질 수 있다”. 김승일 ‘시작 노트’, 『문예중앙』 2016년 겨울호 267면.
  15. 예고의 문예창작과는 대학입시와 직결된 제도공간이다. 제도공간의 공적 기능은 폭력을 은폐하고 지탱하는 폐쇄성으로 변질되기도 한다. 이에 의존한 문인-교사의 성폭력에는 여성혐오와, 독자보다 우월하다고 자만하는 작가의 독자혐오가 뒤섞여 있다.
  16. 박상수 정한아 황인찬 장은정 등이 개진하고 있다. 이에 대한 논의는 다른 지면을 필요로 한다.
  17. 진정한 문학의 ‘끝’을 상정하며 “근본적인 반란”을 모색하는 ‘묵시적 비평’(박인성 「불가능한 비평의 공공성과, 묵시적 비평의 자리」, 『문학선』 2016년 겨울호), 근대성이 배제한 소수자, 약자, 난민들에 주목하며 문학(성)이라는 이념과 그 경계선들을 심문하는 ‘트랜스-문학’(이소연 「진정성이라는 환상」, 『문학과사회 하이픈』 2017년 봄호) 등이 제안되고 있다.
  18. 이에 대해서는 졸고 「자체제작 소리를 내는 상자들, 그리고: 2010년대 시로 나아가기 위하여」(『창작과비평』 2010년 겨울호)에서 논한 바 있다.
  19. 황규관은, ‘시와 정치’ 논쟁을 촉발한 “진은영은 보편성과 짝패를 이루는 ‘감각적인 것의 분배’라는 특이성에 대해 말했지만, 이후 논자들은 ‘모든 문학은 정치적이다’라는 일반성에 안주하고 말았”다고 진단한다. 황규관 「공공성 너머의 공공성」, 『문학선』 2016년 겨울호 63면.
  20. 이 부작용이 랑시에르의 이론에서 파생한 것인지, 이론과 실제 작품의 괴리에 따른 것인지, 랑시에르의 한국적 수용 과정에서 발생한 것인지 필자로서는 판단하기 어렵다.
  21. 수전 손택 『문학은 자유다』, 홍한별 옮김, 이후 2007, 266면.
  22. 현재, 오래된 것에 대한 재인식과 급선회의 우려가 공존한다. 정한아는 “보편적이면서 변하지 않는 가치”의 필요성을 확인하며(고봉준 외, 앞의 글 227면), 복도훈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문학으로”의 “재빠른 변신”을 우려한다(복도훈 「‘도래할 책’을 기다리는 ‘정신적 동물의 왕국’에 대한 비평적 소묘」, 『문학과사회 하이픈』 2017년 봄호 181면).
  23. 이자혜·황인찬 「〔인터뷰〕 미지×희지 Vol.1: 쩌는 세계」, 『문학과사회 하이픈』 2016년 가을호 151면.
  24. 박상수 「잘 닫히지 않는 상자」, 『21세기문학』 2017년 봄호 375~76면.
  25. 양성애자 에르뀔린 바르뱅의 경험에 대한 푸꼬의 진술. 이 웃음과 쾌락은 본질이 없고 자유롭게 떠도는 속성으로서, 본질화나 위계화의 문법으로 파악할 수 없는 젠더 경험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주디스 버틀러, 앞의 책 129면 참조.
  26. 박상수 「본격 퀴어 SF-메타픽션 극장」, 김현 『글로리홀』 해설, 문학과지성사 2014, 249면.
  27. 앞에 인용한 시와 제목은 같으나 다른 작품.
  28. 벨 훅스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이경아 옮김, 문학동네 2017, 235면.
  29. ‘모두’로서의 ‘우리’(Anonymous One)는 1인칭 ‘나’의 확장인 우리(We)나, ‘너희’의 대립 개념인 ‘우리’(We)와 구별된다. ‘나-너’로 쓸 수 있다. 동일성의 공동체 우리(We)가 동일성을 나누고, 다양성의 공동체 우리(We)가 교환 가능한 상호(주체)성을 나누는 반면, 타자성의 공동체 우리(One)는 존재 자체와 비대칭의 이타성(alterity)을 나눈다. 졸고 「공동체, 나눔, 글쓰기」, 『한국언어문화』 54집(2018. 8) 참조.
  30. 황현산 「말의 감각과 경제학」, 최승자 『물 위에 씌어진』 해설, 천년의시작 2011, 78면.
  31. 벨 훅스, 앞의 책 239, 263면 참조.
  32. 이런 맥락에서 이 글은 황병승을 의도적으로 호명하지도 배제하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