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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이 계절에 주목할 신간들

 

 

손택수 孫宅洙

시인. 시집 『호랑이 발자국』 『목련 전차』 『나무의 수사학』 『떠도는 먼지들이 빛난다』 등이 있음. ststo700@hanmail.net

 

윤성희 尹成姬

소설가. 소설집 『레고로 만든 집』 『거기, 당신?』 『감기』 『웃는 동안』 『베개를 베다』, 장편소설 『구경꾼들』 등이 있음. hitchike@hanmail.net

 

정주아 鄭珠娥

문학평론가. 저서로 『서북문학과 로컬리티』 등이 있음. jjua@kangwon.ac.kr

 

다같이

왼쪽부터 손택수, 윤성희, 정주아.

 

 

정주아 『창작과비평』 2017년 여름호 문학초점 좌담을 시작하겠습니다. 이번에는 윤성희 소설가를 게스트로 모셨습니다. 손택수 시인도 봄호에 이어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손택수 네, 지난 봄호의 좌담에 관해 동료 작가들로부터 이런저런 응원과 고언을 함께 들었는데요, 여름호도 많은 관심이 있길 기대합니다.

 

윤성희 안녕하세요. 두분 모두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늘 저는 두 선생님의 이야기를 경청한다는 마음으로 왔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인휘 『건너간다』(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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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아 첫번째로 살펴볼 이인휘(李仁徽)의 『건너간다』는 작년 『폐허를 보다』(실천문학사 2016) 이후 출간된 자전적 장편소설이죠. 시기상 나중에 출간되긴 했지만, 『폐허를 보다』 집필 전후의 상황 등이 담겨 있어 내용상으로는 앞섰다고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인휘는 소설가이자 노동운동가로, 이번 작품에는 특히 90년대 이후 노동운동 환경의 변화를 바라보는 작가의 심경이 녹아 있습니다. 독특한 점이라면, 가수 정태춘이 작중에서 하태산이라는 인물로 등장하는데, 그의 노래들이 중간중간 서사의 틈을 메운다는 것입니다.

 

손택수 읽으면서 많이 아팠습니다. 이렇게 한 시대를 통과해온 세대가 있구나, 하는 생각에 저릿저릿했어요. 동시에 1980년대 노동소설 문법에 익숙하지 않은 젊은 세대가 이 소설을 어떻게 읽을지 참 궁금했어요. 그래서 학생들과 함께 읽어봤는데 굉장히 새롭게 받아들이는 지점들이 있었습니다. 마치 김남주를 모르는 세대가 송경동을 읽으면서 노동시에 관심을 갖게 되고, 이후에 김남주를 만나는 경우랄까요. 젊은 독자들이 노동소설과 닿기 쉽지 않은데, 익숙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흐릿해져버린 렌즈를 통해 당대 현실을 다시 바라보는 감각을 벼리는 계기가 되겠다 싶었습니다. 실제 인물과 허구적 인물이 뒤섞여서인지 작가의 생애를 직접 듣는 것 같았어요. 특히 고문 장면은 제가 직접 당하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날카로운 성찰력 때문이겠지만 당위적인 목소리, 웅변조나 논설조의 진술마저 계몽에 포획된 태도만으로 보이지는 않았어요. 경험이 그저 나열된다는 느낌이 덜한 것도 작가의 진정성, 그리고 자전적 소설이라는 형식이 가진 힘 때문 아닌가 싶었고요. 또 한편으로는 이러한 소설이 너무나도 희귀해져버린 저간의 사정과도 관계가 있겠죠.

 

윤성희 최근에 저는 장편소설을 단번에 읽은 적이 거의 없어요. 읽다 자주 쉬게 되더라고요. 도중에 멈춘 적도 많고요. 그런데 『건너간다』는 그렇지 않았어요. 굉장히 몰입도 있는 소설이더라고요. 역시 장편은 이렇게 밀고 나가는 힘이 있어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다시 한번 했습니다. 읽으면서 이런 반성도 했습니다. 만약 이번 좌담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이건 내 취향이 아니야’ 하며 읽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는. 언제부터인가 저는 취향이라는 이름으로 책을 선별하고, 또 게으른 독서를 하고 있더라고요. 저는 이 소설에서 예전에 읽었던 노동소설과는 다른 결을 느꼈습니다. 물론 그렇게 판단할 만큼 노동소설을 많이 읽은 것은 아니라 함부로 말하기는 조심스럽지만요. 자기 연대기에 대한 리얼한 재현을 넘어서는 지점을 느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이 이야기를 쓸 수밖에 없었구나’ 하고 수긍하게 되는 곳이 많았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술에 취하면 분노에 사로잡힌다고 자기고백을 하는 장면에서 저는 이상하게 마음이 아파오더라고요. 소소한 재미도 많았습니다. 호떡공장 이야기는 참 재미있었습니다. 호떡공장의 풍경과 공장 아주머니들의 대화가 정말 생생했어요. 그런데 사실 경험한다고 생생하게 쓸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경험과 상상을 동반하는 사람만이 쓸 수 있는 문장이 이 소설에는 잘 담겨 있어요. 그런 점이 좋았고 독서의 즐거움을 주었습니다. 반면 마지막 촛불집회 장면은 그렇게 큰 울림으로 다가오지는 않았습니다. 그게 왜일까 생각해봤어요. 그 장면에서 하태산이 노래를 부를 때 감정이 터져야 하는데 그 전에 소설 안에서 충분히 감정이 폭발했다가 정리된 느낌이 들었거든요. 오히려 마지막 장면이 소설의 일부가 아니라 작가의 말처럼 들렸습니다. 작가가 이 말을 꼭 하고 싶었구나, 그런 느낌이랄까요. ‘이 장면이 꼭 들어갔어야 했을까’ 싶어 아쉽다가도, 또 한편으로는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야’ 하며 이내 수긍하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손택수 유년시절 극장에서 상하이 트위스트에 맞춰 춤을 추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주 흥이 넘치는 소년의 모습이 그려져요. 그 흥이 교육제도, 노동현장, 월남전, 광주항쟁, 이런 국가기구의 폭력에 의해 사라졌다가 다시 노동운동을 하면서 되살아납니다. 그 점이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노동운동도 축제 같은 측면이 있구나 하고요. 이런 면이 좀더 강조됐다면 읽는 재미가 훨씬 탄력적이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가령 노동문화운동 현장에 있었을 법한 신명이라든가, 소설의 한 축인 호떡공장 노동자들과 나누는 신명 같은 것 말이죠. 이런 장치가 전혀 없지는 않지만 요약적이거나 조금 표피적인 느낌이었어요. 분노하고 저항하고 싸우면서도 유머와 해학과 신명이 넘쳐나는 노동소설을 찾아 읽고 싶어지는 대목이었습니다.

 

정주아 어린 학생들이 이 소설을 잘 받아들였다는 게 의미심장합니다. 『건너간다』는 이인휘 본인의 경험을 썼음에도 한국 노동소설이 걸어온 궤적이나 같죠. 작가의 자전적 이력이 한국 노동문학의 역사가 된다고나 할까요. 이 소설에는 『전태일평전』이 어떤 식으로 충격을 줬는지, 1980년대 구로공단에서 노동운동이 어떻게 벌어졌는지, 당시 신동엽이나 김지하의 시가 노동현장의 문학청년들에게 어떤 영향을 줬는지 등이 잘 기록돼 있어 사료로서의 가치도 높다는 생각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 독자가 노동문학에 다가갈 매개로 삼을 만하다는 건, 작가가 서사에서 힘을 많이 뺐다는 뜻일 것 같습니다. 윤성희 소설가 말씀처럼 이 소설을 쓰게 한 힘은 내면의 분노일 텐데, 저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분노보다는 슬픔을 더 많이 느꼈어요. 특히나 하태산의 노래가 왜 군데군데 들어가야만 했을까, 왜 글이 아니라 노래라는 장치가 필요했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기존 노동소설의 문법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이 사적 감정을 드러내는 것 아닐까 싶어요. 대의에서 나오는 분노나 결기가 아니라 본인 안의 공허를 표현하길 꺼린다는 뜻입니다. 『건너간다』에는 이인휘 본인의 삶을 향한 회한이나 대중의 무관심에 대한 원망이 담겨 있어요. 그리고 그간 돌보지 못한 가족에 대한 미안함도 있죠. 이런 사적 감정을 어떻게 표현할까 고민한 결과가 하태산의 노래 아닐까 싶었어요. 저는 이런 노동소설이 늘어나면 좋겠습니다. 패배의식의 발현에서가 아니라, 자신이 살아온 삶의 궤적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차원에서 본인의 감정으로 채워진 작품이 많아지길 기대합니다.

 

정주아

정주아

손택수 분노가 서사를 밀어가는 역할을 맡고, 비애의 정서가 감성적인 부분을 맡은 것 같습니다. 이 덕분에 개인뿐만 아니라 시대를 성찰하는 방향으로 소설이 나아간다고 봅니다.

 

정주아 작중에서는 노동현장에서 지치고 무기력해진 작가가 다시 소설을 쓰면서 그간의 무의미한 삶에서 활기를 되찾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렇게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기쁨은 시간이 지나며 엄청난 고통을 몰고 옵니다. 소설을 쓰면서 바라본 세계가 여전히 끔찍했기에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죠. 그러니 이 작가에게는 소설을 쓰는 것도, 쓰지 않는 것도 결국 고통이라는 딜레마가 있습니다. 소설을 쓰지 않을 때의 무력함, 차라리 소설을 안 쓰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할 정도의 분노, 우문이겠지만 그 복잡한 심경 사이에서도 결국 글쓰기를 택하는 것은 어떤 심정이라 할 수 있을까요?

 

윤성희 저에게도 그런 감정이 있는지 질문을 던져봤는데, 부끄럽게도 아직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어렴풋하게 어떤 마음인지는 알겠지만, 그 불면의 밤까지 전부 이해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해한다고 함부로 말할 수 있는 영역도 아니고요. 소설가에게 가장 힘든 순간은 언어의 불완전함을 받아들여야 하는 때가 아닐까 싶어요. 현실을 전달하기에 언어는 너무 미흡한 것이죠. 세계가 지옥 같은데, 언어는 너무 무기력한 데서 오는 절망이요. 그렇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는 계속 있을 테고요. 그런 면에서 주인공이 울면서 시작하는 이 작품의 도입부가 참 좋았습니다. 눈물을 터뜨리면서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가족에게 미안하면서도 ‘좋은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정주아 평론가께서 말씀하신 대로 저도 자신 안에 들어찬 공허를 표현하는 지점에서 이 소설의 아름다움이 나온다고 보았습니다.

 

정주아 글쓰기의 고통은 세계와 만나는 과정에서 나오는 고통이겠죠. 여기에는 세계의 고통과 자신의 고통을 분리해서는 안 된다는 조건이 걸려 있고요. 이러한 고통은 오늘 살펴볼 모든 작가들에게 공통되는 지점일 수 있겠습니다.

 

임철우 『연대기, 괴물』(문학과지성사)

 

정주아 이어서 임철우(林哲右)의 『연대기, 괴물』을 살펴보죠. 이 책에는 2007년부터 2014년까지 발표한 일곱편의 중단편이 실려 있습니다. 시간상 넓은 스펙트럼을 담은 작품집이죠. 가장 최근의 장편 『백년여관』(한겨레출판 2004)에는 작가가 ‘넌 늘 왜 그런 것만 쓰느냐, 5월이나 6·25 이야기 말고 멋진 소설을 좀 써보라’며 타박을 듣는 장면이 나옵니다. 앞서 살핀 『건너간다』에서도 ‘또 노동소설이냐’고 비슷한 타박을 받죠. 이런 세간의 시선에 대한 임철우의 입장은 단호합니다. ‘삶의 굴레가 되어버린 고통스런 기억에는 유효기간이 없다. 그런 고통은 늘 현재형이고, 그 지옥의 시간에 결박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는 것이 작가로서 내가 지닌 책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연대기, 괴물』에서도 임철우는 여전히 ‘기억의 작가’이고, 여전히 한스러운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다만 예전부터 써온 역사적인 사건에서 나오는 죽음, 공적으로 기록하고 싶은 죽음에 대한 이야기 외에 단순 노화에서 오는 사적인 죽음의 사례가 많아진 것이 눈에 띄는데, 두분은 어떻게 읽으셨는지요.

 

176_409이번 소설에 나오는 죽음에서 흥미로웠던 것은 민속적인 시간이라고 할까요, 근대로 오며 패배하거나 삭제되거나 유령이 되어버린 삶들을 설화적 문맥 속으로 옮겨놓아서 위무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죽음을 환기하는 물의 원형도 많이 등장하는데, 작가가 세이렌의 후예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지속적입니다. 가령 마지막 작품인 「물 위의 생」에서는 주인공이 새들과 교감하며 점을 치는데, 반녀반조인 세이렌을 연상케 합니다. 세이렌이 오디세우스를 위협하듯이 아우라지 강물은 뱃사공들을 위협하는 거죠. “결코 움켜쥘 수 없는 물, 그리고 오직 끝없는 흐름으로서만 존재하는 강과 같은 시간”(357면)에 대한 매혹과 공포에 일생을 바친 사내들의 이야기가 근대 문명의 흐름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타고난 이야기꾼 ‘단추눈 아짐’이 나오는 「이야기 집」도 재미있게 읽힙니다. 이 소설에는 민속적인 징소리가 많이 나오는데, 구술문화 세계의 흔적 아닌가 싶어요. 그러한 민속적 세계의 종말에 대한 기록이면서 동시에 이야기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 있습니다. 임철우에게 소설은 구술적 세계의 넋을 위무하는 근대세계의 굿 같은 것 아닐까요.

 

윤성희 임철우의 단편을 오랜만에 읽어서 반가웠습니다. 임철우는 『봄날』(문학과지성사 1997)이나 『백년여관』같이 훌륭한 책을 많이 썼지만, 저에게는 『아버지의 땅』(문학과지성사 1984)이 가장 강렬해요. 아마 그게 임철우 작가에 대한 첫 기억이기 때문이겠지요. 저는 지금도 초기작품 중 하나인 「사평역」이라는 단편을 종종 읽는데요, 그때마다 감탄하곤 합니다. 참, 저는 작가에게 ‘왜 당신은 늘 그 이야기만 하느냐?’고 묻는 것은 폭력이라고 봐요.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제 일도 아닌데 마치 제가 공격을 받은 것처럼 화가 나기도 합니다. 하나의 주제, 하나의 질문, 하나의 의문, 그런 것들이 작가와 함께 성장하는 것이겠죠. 저는 작가에게 중요한 것은 변신이 아니라 궤적이라고 봐요. 십년, 이십년, 삼십년, 그렇게 쌓여가는 작품들이 만든 궤적을 봐주었으면 합니다.

 

정주아 네, 마치 누군가에게 ‘넌 왜 그렇게 생겼어’라고 묻는 것이나 마찬가지죠.

 

윤성희

윤성희

윤성희 그렇죠. ‘작가의 말’에 “주인공들 역시 나와 함께 나이를 먹어가는 것”(380면) 같다는 이야기가 나와요. 소박하지만 죽음과 기억에 관한 사유가 잘 드러납니다. 주인공이 작가와 함께 늙어간다는 태도 때문인지 이 소설 주인공들은 유난히 회고를 많이 해요. 그 회고가 어떤 때는 설화적으로 느껴지기도 하고, 어떤 때는 엄마가 옆에서 들려주는 것 같기도 해요. 저는 소설을 쓸 때 회고가 서사를 지루하게 만들까봐 두려워하는 편이에요. 소설을 쓸 때 제가 가장 힘들어하는 부분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이번 소설집을 읽으면서 다른 생각을 하게 됐어요. 제 소설은 사진으로 치자면 스냅사진 한 컷, 그 정도의 찰나에 머물렀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그게 단편소설의 미학이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마음 한편에는 솔직히 주인공의 삶 전체를 들여다보는 일이 두려웠던 것도 사실이에요. 이번 소설집에 실린 단편들을 읽으니 저는 아직 어린 작가구나 싶더라고요.

 

정주아 말씀을 들으니 소설에 나오는 여러 노인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뗏사공, 옹기장이 같은 인물들 말이죠. 어떤 분야의 ‘장인’만큼 시간의 폭을 잘 보여주는 인물이 없지요. 그 장인의 삶에 작가 자신의 삶도 투영되는 것 같고요. 『연대기, 괴물』 속 주인공들이 자기 삶을 되돌아보면서 갖는 주된 정서는 후회라고 생각합니다. 이루지 못한 사랑이라든가 누군가를 향한 사과이기도 하지요. 「남생이」에는 또래들로부터 소외되었던 한 소녀와 그녀의 비밀을 지켜주지 못했던 한 소년이 등장합니다. 소년은 자라서 소설가가 되는데, 어느날 그 소녀가 아주 불행해진 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해묵은 죄의식이 갑자기 눈앞에 출현한 것이지요. 소설가는 어쩔 줄을 모릅니다. 저는 이 대책 없는 당혹스러움이 흥미로웠습니다. 보통 임철우 소설은 표제작인 「연대기, 괴물」이 그렇듯이, 역사적 폭력을 정면으로 기록하면서 죄의식을 표면으로 드러내거든요. 그러나 「남생이」는 어떤 역사적 맥락조차 얻지 못할, 일상적이지만 치명적인 죄의식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세상의 모든 저녁」도 같은 계열의 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죽음 이후에 남겨질 내 몸뚱이의 모습’에 대한 고민에서 나왔습니다. 작가는 주인공이 가장 두려워했던 모습, 어쩌면 그 이상의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하도록 만들고, 부패해가는 시신을 유령의 시선으로 지켜보게 만듭니다. 제겐 이 장면이 이번 소설집에서 가장 압도적인 부분이었습니다. 너무나 참혹해서 읽을 수 없을 정도였고요. 저는 작가가 왜 이렇게까지 죽음을 가혹하게 그렸는지 생각해보았습니다. 인간적인 존엄을 지킬 수 없는 비극적인 죽음을 그리는 작업과는 별도로, 제게는 노화나 죽음을 두려워하고 사후에 남겨질 몸뚱이의 운명까지도 집착하는 인간을 향한, 여기에는 물론 작가 자신도 포함됩니다만, 자기 일신의 문제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을 향한 가학적인 시선이 느껴졌습니다. 공적인 소명의식을 뚫고 불쑥 올라오는, 노화와 죽음이라는 아주 인간적이고 치명적인 두려움에 대한 단죄적 태도라고 할까요.

 

손택수 「세상의 모든 저녁」의 마지막 장면은 저도 충격적이었습니다. 냄비에 코를 박고 죽는 노인은 사실 유년기에 우물을 들여다보던 소년이었죠. 이 장면은 어떤 의미에서는 가학적이지만 당대 삶의 한 면을 드러내는 보편성을 확보한 것 같아요. 요즘 고독사가 많기도 하니까요. 「연대기, 괴물」은 우리 모두가 괴물일 수도 있음을 마지막 장면에서 드러내는데 여기에서는 악의 평범성에 대한 사유를 불러옵니다. 개인의 상처가 시대의 아픔과 연결될 때 상처 속에 있는 나도 공범이 될 수 있다는 성찰과 이어져서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다만 아쉬운 게 있다면 「물 위의 생」에 등장하는 장인을 비롯하여 여러 소설에서 반복되는 수공업적 영역의 정신적 분위기는 이청준의 「매잡이」 같은 전사(前事)와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윤성희 「물 위의 생」은 잘못하면 도식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구조죠. 죽은 연인이 남긴 무엇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누군가를 만나고, 그 누군가에게 과거 이야기를 듣는 방식이 ‘올드’하게 읽힐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특히 폭력적인 남성과 한 여자를 멀리서 바라보는 지고지순한 남성의 대비도 그렇고요. 하지만 도식적인 소설이 감동적이라는 것은 작가의 굉장한 능력 아닐까 싶습니다.

 

정주아 소설의 형태는 전형적이라고 할 만큼 단정한데 거기서 오는 정서의 울림이 매우 큽니다. 임철우의 소설을 서정시에 비유하는 평들이 달리 나온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윤성희 저는 「이야기 집」이 재미있었는데, 독자인 저도 그렇지만 작가도 쓰면서 즐거운 마음이 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길도에 작가의 작업실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래서인지 어느 정도 자전적인 부분이 있는 소설처럼 읽혔습니다. 단추눈 아짐이라는 인물이 참 좋더라고요. 「연대기, 괴물」에 대해서는 더 이야기해봐야 할 것 같아요. 아까 『건너간다』의 마지막 촛불집회 장면이 큰 울림으로 다가오지 않았다고 했는데요, 「연대기, 괴물」에서는 주인공이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난 후에 광주로 내려가 세탁소 주인이 불구가 된 것을 보는 장면이 꼭 나와야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주인공은 태생부터 이미 역사의 비극을 품고 있어서 그렇게 느꼈는지 모르겠습니다. 주인공의 운명이 이미 가혹해서, 그 주인공이 한국 현대사의 모든 궤적을 함께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그렇지만 책을 덮고 곰곰 생각해보면 한편으로는 그럴 수도 있으리라고 인정하게 됩니다. 제가 읽은 방식이 지나치게 서사론적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한 인간의 운명은, 그리고 더 나아가 대한민국의 역사는, 서사의 개연성을 압도하거든요.

 

정영문 『오리무중에 이르다』(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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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아 이제 정영문(鄭泳文)의 『오리무중에 이르다』로 넘어가보겠습니다. 『어떤 작위의 세계』(문학과지성사 2011) 이후 써낸 네편의 중단편소설을 묶었습니다. 여전히 정영문의 스타일이 잘 유지되고 있는데요, 특별한 줄거리가 없고, 사건이나 인물이 뚜렷하지 않으며 작가가 곧 화자가 되죠. 문장도 만연체로 사유의 흐름이 이어집니다. 이번 소설집에서는 분위기가 조금씩 어두워진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어린아이의 낙천적인 명랑함이 정영문 소설의 주조였다면, 이번 『오리무중에 이르다』는 우울함의 정서가 그 자리를 대신했네요.

 

손택수 이인휘가 노동현장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임철우가 구술 전통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정영문은 글쓰기의 죽음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작가가 일종의 한계체험을 하는 것 같아요. 이 한계에서 절체절명의 극지까지 자신의 언어를 밀어붙이는 모습입니다. 이 지점에서 새로운 언어가 탄생할 수도 있고, 혹은 우울과 함께 좌절할 수도 있죠. 두가지 측면을 모두 보여주는 자기반영적 흐름 속에 있는 소설집이었습니다. 절망의 바닥에서 솟아오르는 작가 특유의 블랙유머가 소설을 읽는 맛을 주는데, 글쓰기의 신경증이 고문으로만 다가오지 않은 이유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윤성희 언젠가부터 정영문의 소설은 중얼거리면서 읽게 되는 것 같아요. 랩하는 것처럼 몸을 출렁거리면서요. 특히 『어떤 작위의 세계』부터 극명해진 것 같습니다. 정영문의 소설은 재미있지만 서사가 없기 때문에 잠깐 정신을 놓치면 지루해지기도 하거든요. 어떤 소설은 이야기를 따라 읽다보면 집중하지 않아도 읽게 되는 페이지가 있어요. 하지만 정영문 소설은 예민함을 유지해야 되더라고요. 안 그러면 독서가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다는 뜻이에요. 게다가 독서를 중간에 멈추게 되면 가끔 어디까지 읽었는지 못 찾기도 해요. 그럴 때 랩이라고 생각하니 좋더라고요. 이 소설집의 가장 큰 생명력은 리듬감 같아요. ‘작가의 말’도 없고 ‘해설’도 없는데, 그건 소설들 자체가 작가의 말이고 해설이기 때문인 듯합니다. “오류투성이의 문장들로 이루어진 글을 쓰고 싶다는, 오래된 생각을 또다시 했다, 계산된 오류로 이루어진 글을. 의도적으로 실수를 저지를 수는 없지만 오류는 저지를 수 있었다.”(249~50면) 이 글이 이 소설집에 대한 해설 같았어요. 중요한 건 이 오류가 ‘계산되었다’는 것입니다. 습작생들이 비서사적인 소설을 쓸 때 실패하는 이유도 이와 관련이 있어요. 그냥 문장을 따라하면 아류가 되니까 자신만의 리듬을 찾아야 하는데, 리듬을 찾더라도 이 계산된 논리가 없다면 그냥 횡설수설이 되는 거예요. 다른 비서사적인 소설과 비교했을 때 정영문이 압도적인 이유는 이런 점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손택수 ‘계산된 오류’는 「어떤 불능 상태」에 나오는 말이죠. 오리무중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것은 오류다’라고 명명하는 질서에 대한 거부가 나름 치밀하게 깔려 있습니다. 「오리무중에 이르다」에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흐지부지와 흐물흐물이라는 단어들 속에는 약을 먹은 쥐들이 쓰러져 경련을 일으키며 마비되어가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297면) 이런 방법적 오류와 고통의 이미지는 주목할 만합니다. 저는 반복되는 ‘알코올’과 ‘불’ 의 이미지를 주목했는데, 글쓰기의 무기력이 소설에서 물의 이미지로 변주되고 마지막에는 익사에 대한 암시가 등장합니다. 하지만 물의 우울증은 불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익사의 황홀이 됩니다. 글쓰기의 죽음이 황홀인 것도 이 때문이죠.

 

윤성희 소설이 점점 어두워지는 건, 그게 전작과 달리 글쓰기의 어려움을 더 많이 고백하기 때문 아닐까 싶어요. 특히 3인칭 소설을 쓰는 게 어렵다고 말합니다. 앞서 다룬 『건너간다』는 자전적 소설이지만 그럼에도 픽션의 ‘나’가 개입했음이 느껴지죠. 다른 인물도 백퍼센트 실존하지는 않았을 것 같고요. 그러고 보면 모든 소설은 1인칭이어도 3인칭이 될 수밖에 없는데, 정영문 스스로 3인칭을 쓰는 게 어려워졌다고 말하는 것은 ‘소설 쓰기의 어려움’과는 훨씬 다른 차원의 고백 같았어요. 3인칭 소설이 어려운 이유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은 소설 속에 어떤 다른 인물을 내세워 그의 이야기를 하거나, 그로 하여금 이야기하게 하는 것이 누군가를 사칭해 이야기하거나, 다른 누군가의 행세를 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인데, 그 점과 관련해 어떤 결벽증이 내 안에서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어떤 불능 상태」 247면). 저는 이 고백이 작가에게 어떤 전환점이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느꼈습니다. 다음 소설에서 그 점을 볼 수도 있겠고요. 암튼 지금 정영문은 철저하게 ‘나’를 쪼개가면서 쓰고 있으니까 소설이 어두워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합니다. 사람이 ‘나는 뭐지’ ‘나는 왜 살지’를 하루에 백번씩 자문하면 당연히 우울증에 빠지잖아요. 소설가라면 ‘그 사람은 왜 그러지?’라고 질문하는 게 보통이거든요. 저는 서사란 주인공의 삶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다 실패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정영문 소설의 실패는 다른 지점에서 나와요.

 

정주아 네, 정영문의 문장은 조직적이고 치밀하게 계산된 ‘의도적 오류’들이죠. 마치 바둑기사가 여러 수 앞을 내다보듯이 정영문도 사유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앞을 내다보면서 완결성을 확보하고 있어요. 이렇게 긴 글을 사유 속에서 완성할 수 있다는 점이 놀랍죠. 그래서인지 제게는 작가가 자신의 주머니에서 소설 단상을 적은 메모를 꺼내 보곤 하는 장면이 유독 눈에 띄더군요. 이 단상이 과연 소설이 될지 불안해하면서도 항상 메모를 갖고 다니죠. 어쩌면 이 작가에게는 사는 것과 소설을 쓰는 것, 즉 삶과 창작이 분리되지 않은 층위에 있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나는 진지한 게 싫다’는 메시지를 진지하게 전달하는 역설입니다. 가령 「어떤 불능 상태」에는 너무 열심히 노래를 하는 청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죠.

 

윤성희 정말 재미있어서 그 장면에서 여러번 웃었어요.(웃음)

 

정주아 새든 인간이든 노래를 너무 열심히 부르니까 “사람들도 새들도 노래를 하지 않고 살 수는 없겠지만, 좀 덜 노래하고, 노래를 하더라도 좀 덜 악착같이 노래할 수는 없는 것인가?”(232면)라는 말에 저도 한참 웃었어요. 사실 그건 노래에 대한 이야기도 되지만, 우리의 삶이라든가 소설 쓰기에 대한 이야기도 되잖아요. 진지한 소설, 감동적인 소설에 대한 열망을 두고 왜 저렇게 열심히, 치열하게, 간절하게 써야만 하는가를 되묻는 거죠. 하지만 역설적으로 정영문은 진지해지지 않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말하자면 전혀 상반된 진지함이죠. 한국소설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태도입니다.

 

손택수 진지함에 대한 반성에서 나오는 새로운 진지함이 저는 낯설지는 않았어요. 가령 「유형지 ×에서」를 보면 ‘턴스핏’이라는 멸종된 개 이야기가 나오는데, 턴스핏을 쳇바퀴 일상, 관습적 글쓰기를 못 벗어나는 소설들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을 수 있어요. 기존의 서사에 대한 반성과 전복으로서 다른 파편적 서사를 찾아가는 과정이, 뭐랄까 좀 강박적이다 싶고, 그래서 유연하기보단 턴스핏처럼 정해진 질서를 따르는 획일성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말하자면 작가의 ‘계산된 오류’가 너무 계산된 나머지 충분히 예측 가능한 흐름 속에 있다는 것이죠.

 

정주아 정영문의 독특함은 다만 진지함에 대한 역설적 반성에만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기이한 사유가 대부분인 글을 쓰면서도, 어느 한순간에도 자의식에 매몰되지 않고 냉소적 시선을 변함없이 유지하는 데에서 특유의 진지함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작가 자신을 회의와 냉소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희극적인 진지함이 생겨난다는 의미로요. 저는 작가가 자신의 소설을 ‘함정소설’이라 명명하는 대목이 정말 재미있었어요. 주인공이 서사의 반복성에 함몰되어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소설, 그런데 이미 “내가 쓴 대부분의 소설들도 함정소설”(「오리무중에 이르다」 280면)이라는 평에 많이 웃었습니다.

 

윤성희 정영문의 소설에는, 어떤 행위를 하고 나서 ‘나는 왜 그랬을까’ 하고 후회하는 지점이 별로 없습니다. 서사가 없으니 당연한 말이겠지만요. 그러니 ‘나’는 회고하지 않습니다. 단지 ‘문득’ 떠올릴 뿐이지요. 제가 정영문의 글에서 재미를 느낄 때는 생각이 생각으로 징검다리 건너듯 건너갈 때의 리듬입니다. 그리고, 그런데, 그래서, 이런 접속사의 배열이 그 리듬감을 더해주죠.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할 때면 귀를 접었다 폈다 할 수도 있을 그 개가 없는 것이 아쉬웠는데, 그 개가 지금 내 옆에 있어 개의 귀를 접었다 폈다 하다보면 어느새 나도 모르게 잠이 들 수 있을 것 같았고, 그래서 그 개를 유괴해 오지 않은 게 약간 후회되었다.”(「개의 귀」 103면) 저는 정영문의 글을 읽다가 자주 웃는데, 주로 ‘그런데’ ‘그래서’ 이런 접속사 이후에 나오는 문장을 읽을 때였어요. ‘~인데’ ‘~였고’ ‘~였지만’ 식으로 문장을 길게 끌고 가다가 마지막에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라는 식으로 끝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이 지점이 늘 재미있어요. 상상을 벗어나는 문장일 때가 많거든요. 접속사를 사이에 두고 이야기가 점프하거나 논리가 묘하게 어긋나는 느낌을 받아요. 문장의 리드미컬함도 어쩌면 이런 식의 어긋남에서 나오는 것 아닐는지요. 저는 이번 소설집에서 이렇게, 그러니까 정영문식으로, 문장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과정을 지켜보는 게 즐거웠습니다. 오늘 다룬 세권은 결이 다른 소설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모두 같은 질문이 들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작가가, 그 이야기를, 오직 그 방식으로밖에 말할 수 없는 것. 그 지점을 오래 되새기게 될 것 같습니다.

 

임솔아 시집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문학과지성사)

 

정주아 이번에 다룰 책은 임솔아(林率兒)의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입니다. 첫 시집이지만 임작가는 2015년 『최선의 삶』(문학동네)이라는 장편소설을 먼저 발표한 바 있습니다. 저는 임솔아의 시보다 소설을 먼저 읽었는데요. 소설은 자전적인 ‘나’와 두 친구가 보낸 중학 시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단순한 사춘기의 방황 정도가 아니라 가출, 따돌림, 집단폭력, 성매매 등 사회적 약자인 어린 여학생을 둘러싸고 벌어질 수 있는 모든 폭력적 상황이 지독하게 그려진다고 보시면 됩니다. 소설서사에서는 사춘기 청소년의 내면에서 움직이는 통제 불능의 광기와 반항심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편인데, 상대적으로 시집은 상당히 감정이 절제되어 있어, 마치 다른 사람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손택수 매혹적인 작가라는 말이네요, 양면을 다 갖고 있으니. 어느 장르에서 작가의 장기가 더 드러날지 앞으로 지켜봐야겠습니다.

 

윤성희 저도 그런 측면에서 읽기 전부터 흥미로웠습니다. 기대도 많이 되었고요. 『최선의 삶』을 읽고 이 시집의 제목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을 봤을 때는 소설의 톤과 비슷할 것 같다는 추측이 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임솔아의 소설과 시는 느낌이 다르더라고요. 시는 읽고 나니 좋은 방식으로 절제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시를 쓸 때와 소설을 쓸 때 나오는 두가지 에너지를 다른 방식으로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인가 싶어 흥미로웠습니다.

 

176_420세탁소” “임대문의 종이” “텅 빈 상가” 같은 현실을 새로운 액자로 해서 “액자를/다시 바다에 건다”는 식으로 전복시키고 있어요. “티슈를 뽑아 입을 닦았다. 새 티슈가 또 버젓이 나와 있었다. 꿈에서 깨어나는 꿈으로부터”(「가장 남쪽」)의 티슈처럼 자동화된 언어, 자동화된 관습들, 제도들을 찢어서 국화를 접는 것이 임솔아 시의 틀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방식이 두분 말씀대로 절제되고 정제되어 있는데, 저는 이런 틀보다는 이 시인의 현실감각에 더 호감이 갔습니다. 「룸메이트」였던가요? “너는 입김을 동그랗게 뭉친다. 윗목의 더 위쪽에서 발을 비빈다./입김 속에서 포도처럼 수많은 알들이 터져 나온다./크리스마스처럼 창틀에 물방울들이 켜진다.” 겨울 냉방에서 자신의 체온으로 입김을 뭉쳐서 크리스마스트리 불빛으로 만드는 이 장면은 정지용의 「유리창」 이후 만나는 또 하나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유리창 이미지가 아닌가 해요. 우리 시대 청년들의 현실과 꿈이 아롱진 구절로 다가왔습니다.

 

정주아 저는 삶의 명암을 동시에 포착한다는 점, 그러면서도 어둡고 끈끈한 어휘들이 일상에 아무렇지 않게 담담히 흡수되는 점이 좋았습니다. 「어째서」의 후반부 대목은 인상적입니다. “엄마도 나처럼 주걱을 잡았을 것이다./눈을 뜨자마자 엄마는 매일 주걱부터 찾아야 했을 것이다.//밥맛은 어째서 잊힌 적이 없는지/꽃들의 모가지가 일제히/햇빛을 향해 비틀리고 있는지/경이로움은 어째서 징그러운지.” 아름다움과 추함, 삶의 경이로움과 비루함은 언제나 동시에 있다는 점을 한번에 보여주죠. 「보일러실」에는, 죽은 개의 유골함 옆에 개가 좋아하던 닭뼈 쓰레기가 나란히 놓여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삶의 아이러니랄 수도 있겠고 어찌 보면 잔혹하기도 한 장면이지만 시인의 어조에는 별 감정이 없습니다. 삶의 비루함과 경이로움이 공존하는 순간을 표현하되, 감정을 폭발시키기보다는 담담하게 거리를 두는 절제미를 보여줍니다.

 

윤성희 그런 절제미의 측면에서 봤을 때 「비극」에 나오는 이런 대목이 좋았습니다. “늙으면 엄마가 더 열심히 씻을게. 왜, 엄마. 네가 노인 냄새를 싫어하니까, 가까이 가지도 않으니까. 노인 냄새를 싫어한 게 아니야, 엄마. 나를 사랑해준 노인을 만나본 적이 없었던 거야.” 개인적 서사를 냉철하게 바라보는데 또 거기에는 서정적인 데가 있거든요. 담백하면서도 차갑고, 그러면서도 마지막에는 마음을 흔들어요. 저는 좋게 읽은 시가 「모래」 「아름다움」 등인데, 성장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손택수 성장시 같은 느낌이 드는 시편이 많이 있죠.

 

윤성희 네, 그런 시가 많았어요. 「모형」에서 “기린에 기린이 없어서/지구에 지구가 없어서/사람에 사람이 없어서/좋다.” 이런 부분도 간결하면서도 좋더라고요. 소설가 입장에서 저는 시를 읽을 때 시집의 완결성을 떠나서, 문장의 리듬이랄까 그런 것을 느낄 때가 소중하기도 해요. 저는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라 그런지, 고요하게 시집을 읽고 나면 내가 쓸 수 있는 문장이 사라지는 혹은 쪼그라드는 느낌을 받아요. 그런 느낌을 받기 위해 시집을 읽을 때가 많습니다. 이번 시집에서 예를 들면, “아기 냄새가 나는 날씨여서/문을 열어두었다. 사그락사그락 흘러들어왔다./눈이 마주쳤다.”(「살의를 느꼈나요?」)라는 부분을 읽을 때 그래요. 다른 시들에 비해 강렬한 문장은 아닌데도 이 구절이 배열된 방식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눈으로 봐도 좋은 거예요. 읽는 재미가 있었어요.

 

손택수 성장서사를 드러내기 위해 환유적인 틀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는 것 같아요. 환유적으로 세계를 향해서 시를 열어젖히니까 당대의 후면, 실재들과 감각적으로 만날 수 있게 되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언뜻 산만해 보이는 일상, 파편들이 들어오게 되는 거죠. 그런데 이 확산력이 은유나 알레고리의 응축력에 의해서 긴장을 놓치지 않고 있어요. 내용을 보면 분산적이지만 제목이나 비유 체계, 알레고리를 통해서 결속을 시켜줍니다. 환유적으로 끝없이 미끄러지면서 동시에 은유적 결속을 주는 힘. 저를 바짝 긴장케 한 지점입니다.

 

정주아 성장이라는 주제로 본다면 저도 「모래」라는 시가 좋더군요. “난간 아래 악착같이 매달려 있는/물방울을 끝까지 지켜보았다./떨어지라고 응원해주었다.” 악착같이 붙어 있는 상태에 응원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떨어지는 용기에 대해 응원을 보내고 있어요. 임솔아가 지향하는 성장의 지점은, 기성세대들과 동일해지는 건 스스로 자신을 버리는 길이라고 믿는 데에 있는 것 같아요. 자기 설 자리를 스스로 마련해가고 이로써 사고와 행동의 외연을 넓히면서 성장하려는 작가의 지향이 곳곳에서 확인되지 않나 싶습니다. 기존 사회의 통념에서 보면 반(反)성장이라 할지라도 말이지요.

 

한인준 시집 『아름다운 그런데』(창비)

 

정주아 마지막으로 『아름다운 그런데』로 넘어가볼까요. 한인준(韓仁埈)의 첫 시집인데, 개인적으로 가장 읽기 어려운 유형의 시집입니다.(웃음)

 

손택수 저도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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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양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언어가 정치적 지배의 도구로 이용됨에 따라 언어 훼손에 대한 반성이 일어납니다. 훼손된 언어로부터 글자 그 자체의 물성, 글자 그 자체의 가치로 돌아가자는 흐름이 구체시라는 시 장르를 만들어내기도 했죠. 곰링거(E. Gomringer) 같은 시인은 매체 사용에 있어서 의미보다 질료 자체를 강조하면서, ‘배열은 그 자체가 리얼리티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죠. 한인준의 시도 언어라는 질료 자체에 집중시키는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또 새로운 배열방식을 통해서 리얼리티를 확보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는 생각도 들고요. 그런 맥락에서 한인준은 한국시로 치면 일종의 재난이에요.(웃음) 재난이라는 건 저처럼 시업에만 종사하고 있는 사람도 쩔쩔매게 하는 요령부득의 해괴한 텍스트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재난은 재난인데 매우 즐거운 재난입니다. 무엇보다 그의 시는 데면데면한 일상들을 송두리째 뒤집고 언어관습 자체를 발본 사유케 하는 힘이 있어요. 그러면서도 희한하게 마음의 물기가 있습니다. 왜 이런 게 이제 나왔을까, 이건 내가 했어야 하는 작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어요.(웃음)

 

윤성희 저도 두분이 어떻게 얘기할까 궁금해하면서 왔어요. 저는 이런 식으로 읽었어요. 천천히 한번 읽고 빨리 한번 읽고. 그러면 뭔가 느낌이 다를 것 같았어요. 문법을 쪼갰다는 게 천천히 읽을수록 힘들더라고요. 이를테면 정영문의 소설을 읽듯이 읽어보기도 했거든요. 재미있는 경험이었어요. 특히 ‘종언’ 시리즈를 읽을 때는 뭐라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는 힘든데 아름다운 연애시 같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실패한 문장으로 쓴 시, 그러니까 의도적으로 깨진 문장으로 썼는데 아름답게 읽히다니요. 그러자 사랑이라는 것이 애당초 이렇게 요령부득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어요. 혼자 이상하게 생각한 것일 수도 있는데 암튼 그런 느낌이 흥미로웠습니다. 특히 「종언: 할 말 잃어버리기」를 보면 “대문 앞에서 나는 무릎과 무릎이라는 이미지로 쪼그려 앉는다. 이것은 나를 안아줄 수도 있는//둥글다” “말없이를 올려다볼 것인가” 이런 파면화된 문장들이 슬프고 아름답게 다가왔습니다.

 

정주아 확실히 이 시집에서 가장 돋보이는 건 ‘종언’ 연작이고, 작가로서도 공을 기울인 작품들이 아닌가 싶은데요. “숲과 속을 나누어 생각하려고 숲속에 들어가는 한 남자에 대해”(「종언: 하늘 위에 별이 있는 것이 아니라」)라는 구절을 보며 결국 이 구절이 시인에 대한 얘기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언어 속에서 만들어보는 언어의 해체 실험이랄까요. 저로서는 빨리 읽어도 천천히 읽어도 또렷하게 이해되지가 않아서, 눈앞의 대상을 이해하려는 시도 자체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가를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러다 문득 고통스러운 독서 끝에 희한하게도 가슴 아픈 사랑과 이별의 잔상이 남기에, 이런 파편적인 언어로도 어떤 감정의 전달이 가능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도 윤성희 소설가와 비슷한 체험을 한 것 같네요.

 

손택수 유사성 장애, 인접성 장애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일종의 실어증이 주는 고통과 슬픔이 있습니다. 야콥슨(R. Jakobson)이 실어증 환자를 연구하면서 자신의 언어학을 개진하잖아요. 이런 장애를 방법적으로 활용했는데 이 실어증은 결국 고통을 수반합니다. 이 고통이 결국은 무엇인가에 닿고자 하는, 고통이 소통의 열망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저는 「묘사」라는 작품을 보면서 이런 방식으로 도대체 뭘 묘사하려고 하나 싶었는데요, “붙잡은 손을 떨어뜨릴 때마다”, 이게 연애시의 정조를 암시합니다. “붙잡은 손을 떨어뜨릴 때마다 손은 손의 위치로 되돌아가니까”라는 구절은 말과 말의 결속, 언어와 언어의 결속을 의식적으로 떨어뜨리는 행위를 암시합니다. 원래 손의 자리로 돌아오면서 손을 잡기 이전의 떨림을 간직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걸 토대로 해서 “가만히 두 팔을 벌린다”의 열림이 가능해지는 거죠. 한인준의 시에서 여백이 과잉되는 것, 한 행이 한 연을 대신하는 방식도 이런 맥락에서 읽을 수 있지 않을까요. 이런 방식을 통해서 기호의 각질은 벗겨지고 싱싱한 미완의 속살이 드러납니다. 미완은 정상의 결여가 아니고 정상이 닿을 수 없는 궁극의 지향점이 되는 거죠. 알 수 없는 것을 향한 모험 속에서 시는 지도 속의 경계선들을 뒤흔들고 그 떨림을 간직한 채로 경계선 자체를 새로 그려가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우리 시의 미지(未知)가 아닌가 싶습니다.

 

손택수

정주아 네, 언어의 해체가 도리어 각각의 언어가 온전하게 가지고 있는 새로운 미지의 가능성을 찾아보게 한다는 말씀이시죠. 저는 대부분의 시가 읽기 힘들다보니 간혹 중간에 실린 정확한 문법으로 된 문장들이 얼마나 반가웠는지요.(웃음) 「유적」 같은 시들. 나는 이미 “이곳에 도착했는데” 자꾸 “멀리서 ‘내’가 오고 있었다”. 아니면 「기대」 같은 시들. “오늘은 달이 많이 떴네//떠 있는 건 별들인데//별을 달이라고 잘못 부른 너에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럴 수도 있으니까” 같은 평범한 문장들이 감동으로 다가왔어요.

 

윤성희 저도 비슷한데, 한편으로 ‘종언’ 시리즈와 언어를 해체하지 않는 시들 모두 공통된 정조가 있어요. 만약 이 시집 전체가 해체된 언어로만 이루어진 ‘종언’ 시리즈였다면 잘못하면 치기 어린 실험으로 끝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그 사이사이에 다른 시들이 이 시집을 그렇게만 흘러가게 두지 않는 것 같아요. 「끝날 때까지 기다려」나 「그런 날」 같은 시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여백에도 많은 스토리가 있는 시인이에요. 그런 부분이 아주 좋더라고요. 언어를 해체했다는 것에만 주목할 게 아니라 행간과 행간 사이에서 이 작가가 숨겨놓은 수많은 이야기들과 이미지들에 더 주목해주었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이런 부분에도 장점이 있다고요.

 

손택수 반복되는 건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윤성희 잘 알고 있으니까 그런 시들은 다 ‘종언’ 시리즈에 넣은 게 아닌가 싶어요.

 

손택수 대상의 개념화에 대한 저항은 서구시사에서도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지만 우리의 경우에도 김춘수 선생의 무의미 시로부터 이승훈의 비대상, 오규원의 날이미지, 박상순이나 이수명 같은 언어파의 흐름 속에서 하나의 계보를 형성하고 있거든요. 제가 하고픈 말은 시를 입시 공부하듯이 두뇌로만 작동시킬 때 위험해질 수 있다는 거예요. 말이 안 됨에도 불구하고 매혹을 느끼는 지점, 마음의 힘인데, 그 지점을 시인이 유심히 되새김질하면 어떨까 합니다.

 

정주아 마음으로 쓴 글이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은 모든 명작의 전제조건이기도 하고, 동시에 모든 글쟁이를 좌절시키는 지점이기도 하지요. 오늘은 모두 다섯권의 소설과 시를 살펴보았습니다. 우연히도 소설은 중견작가의 작품이, 시집은 신인작가의 첫 시집이 선택되었고요. 세분의 중견작가에게서는 만만치 않은 장인의 내공을 봤고, 신인들에게서는 역량과 가능성을 가늠하는 시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손택수 시집은 첫 시집, 소설은 중견작가들의 작품이었다는 점에서 우리 문학의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엿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윤성희 저는 어릴 때부터 책 읽는 것을 좋아했지만 읽은 소감을 말하는 것은 늘 어려워했어요. 작가가 되어서는 그런 부분이 늘 부끄럽게 여겨졌죠. 읽고 난 후 직감적으로 좋다는 느낌이 먼저 들고, 그게 왜 좋은지는 오래 고민해야 알 수 있어요. 사실 알지 못할 때도 많아요. 제가 다섯권을 읽으면서 내린 결론은 이렇습니다. ‘아! 이 작가가 이 이야기를 이런 식으로 말하고 싶었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순간을 만나는 것, 그 순간이 행복한 독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하기 방식에 조금 더 주목하게 되었고, 그런 의미로 행복한 독서였습니다.

 

정주아 독서는 처음에는 작고 외로운 상상의 세계를 만드는 작업일지 몰라도, 서로 감상을 공유하기 시작하면 작던 세계가 무한하게 커지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게 해줍니다. 시각의 차이가 그 세계를 키우는 동력이랄 수 있겠고요. 특히 윤성희 작가가 창작자의 입장에서 여러 이야기를 해주신 덕에 오늘 좌담이 더 풍성해진 느낌입니다. 오랜 시간 수고하셨습니다. (2017.4.28. 창비서교빌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