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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페미니즘으로 김수영의 시를 읽을 때
여성주의 언어와 감성적 혁명의 모색
김영희 金伶熙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불온한 미(美)와 다른 현실: 정한아 김성규 서대경의 시」 등이 있음.
yhorizon@naver.com
1. 은폐된 것과 물어야 할 것
‘여성혐오’는 여전히 현재 한국사회의 일면을 가장 날카롭게 관통하는 말 중 하나이다. 이는 ‘혐오의 시대’를 가장 앞서 반영하는 증상으로서, 여성에 대한 근대의 억압적인 구조를 드러내는 말인 동시에 신자유주의 경쟁체제의 경제적・문화적 임계를 표출하는 말이기도 하다. 여성혐오의 대척점에 있는 것은 흔히 예상하는 바와 달리, 남성중심적 권력의 위기이며 헤게모니적 남성성의 몰락이다. 온라인상의 여성혐오 표현은 주로 성과 결혼의 문제를 중심으로 공전하고 있는데, 이것은 역설적으로 이제 한국사회에서 남성들의 데이트, 섹스, 결혼이 그만큼 어려워졌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1
‘N포세대’나 ‘흙수저’론이 반영하고 있는 현실이 이와 무관하지 않을 텐데, 이들 담론 속에 담겨 있는 청년세대의 불안과 분노는 젊은 남성들 사이에서 더욱 노골적으로 여성혐오가 발화되는 현상으로도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논의를 세대에 한정짓지 않고 확장해보면, 현재의 여성혐오와 젠더갈등의 이면에는 IMF 이후 신자유주의 경쟁체제의 불모 속에서 남성성이 ‘양극화’되는 한편,2 여성과도 경쟁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남성들의 위기감과 열등감이 매설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혐오의 메커니즘은 빈곤, 불안, 폭력의 인과적 연쇄라고 할 수 있으며, 이는 근본적으로 신자유주의의 모순과 분리해서 생각하기 어렵다. 하지만 혐오의 전략은 주체를 혐오 이면의 역사적 맥락과 정치적・경제적 구조에 무관심하게 만들며, 주체로 하여금 혐오를 배태시킨 실제적인 삶의 문제를 회피하도록 한다. 혐오가 재생산될수록 혐오를 생산하는 근본 구조는 오히려 은폐되는 것이다.3
‘양성평등’은 2017년 현재 한국사회의 일면을 가장 효과적으로 특징짓는 말 중 하나이다. 문재인정부 출범 이후, 성평등 및 젠더 문제 등에 대한 정책에 거는 기대감이 어느 때보다 높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평등에 대한 논의가 주로 여성의 사회 진출, 특히 소수 여성의 고위직 진출에 집중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유리 천장 깨뜨리기’로 손쉽게 비유되는 이같은 현상은 문화, 비즈니스, 정치의 영역에서 이미 다양한 형태의 자본을 소유하고 있는 엘리트 여성을 대상으로, 그들을 방해하는 장애물을 제거한다는 의미를 지니곤 한다. ‘신자유주의적 페미니즘’이라고 불리는 이같은 여성운동의 수혜자는 주로 고등교육을 받은 특권층 여성으로 한정된다.4
양성평등 논의와 관련하여 정희진(鄭喜鎭)은 성역할, 젠더 언어에서 작용하는 남녀 간의 위계 문제나 비정규직 비율, 임금 격차에서 드러나는 ‘빈곤의 여성화’ 문제 등, “젠더가 작동하는 근본 구조는 변함이 없는 상태에서 자유주의 차원의 평등은 남성에게는 오해와 반발만을, 여성에게는 허울뿐인 평등을 약속할 뿐”이라고 지적한다. 특히 한국사회에서 가사노동의 분담 같은 ‘사적 영역’의 변화 없이는 평등의 구현으로 ‘오해되는’ 여성의 사회 진출은 오히려 여성에게 부과되는 ‘이중노동’일 뿐이라고 비판한다.5 흔히 여성의 지위 향상이라고 인식되는 평등주의의 이면에는 여성이 처한 과도한 노동 상황이 효과적으로 은폐되어 있는 것이다.
혐오는 극복해야 할 대상이고 평등은 지향해야 할 가치임에도, 여성을 둘러싼 혐오의 재생산은 현재 통용되는 차원의 평등주의를 통해 해소되거나 봉합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결국 젠더 문제는 경제위기와 경쟁체제가 완화된다거나 사적 영역에서 성역할의 차별성이 개선된다고 해서, 다시 말해 두 영역 중 한편의 해결만으로는 극복 가능한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는 무엇보다 ‘이가적(二價的) 집단’ 양식이라는 젠더의 특성과 관련이 있다.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에 따르면, 젠더는 ‘정치경제적’ 측면과 ‘문화평가의’ 측면을 동시에 포함하는 집단 양식이다. 젠더를 중심으로 한 부정의는, 부불노동이나 핑크칼라가 지시하는 ‘경제적 불평등’과, 성차별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문화 규범에 내장돼 있는 ‘차이의 불인정’이라는 두 차원에서 동시에 작동한다.6
지금까지 한국사회의 여성혐오와 양성평등의 이슈들과 이들이 은폐하고 있는 것, 젠더라는 집단 양식의 특수성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는 페미니즘 비평이 어떠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해야 하는지를 비교적 명확하게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우리는 젠더에 대해 말할 때, 혹은 페미니즘 비평과 여성주의운동에 대해 논의할 때, 평등과 정체성, 계급과 섹슈얼리티를 동시에 사유해야 한다. 그렇다면 문학의 현장에서 젠더 프레임은 어떻게 작동하고 있으며, 젠더를 둘러싼 복합적인 모순을 넘어 여성주의 언어는 어떻게 구현될 수 있을까. 그를 위해 페미니즘 비평은 어떻게 씌어져야 하는 것일까. 이같은 질문과 함께 이 글을 시작해보려 한다.
2. 여성주의 언어와 부조리한 문장
“프랑스 여자도 프랑스인인가?” 이같은 질문은 부조리하거나 터무니없어 보인다. 랑시에르(J. Rancière)에 따르면, 19세기 프랑스 페미니스트들은 이러한 질문을 통해 역설적으로 성의 불평등성에 대해 폭로하고 대항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이 문장은, 프랑스 여성은 “헌법이 법 앞에 평등하다고 선언하는 그 프랑스인들의 집합에 속하는가 속하지 않는가?”를 질문함으로써 그렇지 못한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7 낯설고도 역설적인 이 문장은 우리의 일상적인 감각체계에 파문을 일으킨다. 이러한 류의 ‘부조리한 문장’은 사회적 불평등의 책략들을 폭로하고, 그 제도와 인식에 논리적인 균열을 일으키며, 그 균열은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예비한다. 이 문장 속에서 평등은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가치로 고정되어 있기보다는 일종의 담론으로서, 실천으로서 ‘실행된다’.8
문학의 언어가 세계의 불평등을 목도하고 있을 때 새로운 사회에 대한 상상과 말의 정치적 실효성은 중요한 문제가 될 텐데, 부조리한 문장은 이에 대한 하나의 ‘실행방식’이 될 수 있다. 예컨대 한 시인이 “나는 알았다. 나는 창녀지만, 내가 창녀가 아니란 걸 그가 이해한 것처럼.”(서대경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여름」, 『백치는 대기를 느낀다』, 문학동네 2012)이라고 썼을 때, 그러니까 우리가 한 사회의 시스템이 부여한 이름과 그 이름에 부과된 정체성을 거부할 때, ‘나’에게 부여된 “창녀”라는 이름과 그에 고착된 관념과 역할에 저항할 때, 그렇게 부조리한 이해와 선언들이 늘어갈 때, 그 역설적인 말은 현실의 비밀스러운 질병을 폭로하고 현실의 상투적인 의미체계에 균열을 만든다.9
섹슈얼리티와 언어의 관계는 페미니즘 운동에서 매우 결정적인 것이다. 성별과 관련된 수많은 모순과 부조리가 언어 속에 응축되어 있고, 언어를 통해 유전되고 재생산된다. 예를 들어 misogyny는 ‘여성혐오’로 번역되었고, gender equality는 ‘양성평등’으로 번역되었다. 전자의 경우, 근대 자본주의와 이성애 중심주의 및 공적 영역에서의 남성 유대와 같은 미소지니의 역사적이고 구조적인 측면을 포함하지 못하는 면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여성혐오를 개인의 문제이며 감정의 문제로 치부해버리는 면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대다수의 남성들은 이 말 앞에서 자신은 여성을 혐오하지 않는다거나 여성혐오를 저지른 적이 없다는 식의, 말이 양산한 오해 속으로 빠져나가버린다. 후자의 경우, 성별‘들’ 간의 평등이거나 성별 제도로 인한 차별 시정이라는 gender equality의 본래 의미보다는 양성 간의 평등으로 의미가 제한된다. 이러한 맥락의 평등은 기본적으로 남녀 간 성역할의 위계를 비판하지 않은 상태에서 남성을 기준으로 한 논리라는 문제도 있지만,10 무엇보다 이같은 성적 구분이 다른 소수자를 소외시킨다는 측면에서 진정한 의미의 평등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여성혐오와 양성평등을 둘러싼 “번역어의 운명”11은 우리 사회가 여전한 남성중심사회라는 것을 반증한다고 할 수 있다.
관습적이고 차별적인 명명의 체계와 그에 부착된 지배규칙들을 교란하고, 그 규칙들에 예외를 만드는 낯설고도 부조리한 말들을 상상하고 실행하는 것. 이것은 무엇보다 문학과 정치의 문제이다. 랑시에르는 “문학이 세계에 참여(engagement)한다는 의미에서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문학이 사물들에 다시 이름을 붙이고, 단어들과 사물들 사이의 틈을 만들고, 단어들과 정체성 사이의 틈을 만듦으로써” 주체로 하여금 어떤 조건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해방의 가능성을 연다는 의미에서 정치적인 것이라고 말한다.12 예를 들어, ‘여자다움’이라는 말과 이 말이 여성에게 부과하는 특유의 정체성 사이에 틈을 만드는 것, 그리하여 이 말이 지닌 지배적이고 상투적인 의미체계와 효과 위에 끊임없이 새로운 의미를 겹쳐놓는 것이다. 지배질서가 고정시킨 특유의 정체성으로부터 이탈하는 언어행위를 통해 우리는 비로소 그 차별의 조건으로부터 벗어날 가능성을 마련하게 되는 것이다.
2000년대에 가장 논쟁적이었던 비평 의제는 ‘시와 정치’였다. 논의의 핵심은 문학의 자율성과 윤리성 혹은 시의 서정성과 정치성을 둘러싼 다양한 역학 및 결합방식에 관한 것이었다. 이는 현실정치의 가시적인 ‘퇴행’에 대하여, 현실에 개입하고 변화를 추동하고자 하는 문학언어의 (불)가능성에 대한 논의이기도 했다. 혐오 현상을 둘러싼 다양한 분석과 논의가 가능하겠지만, 혐오 현상이 증명하는 것은 한마디로 ‘정치의 붕괴’일 것이다. 혐오는 한 사회 내부의 모순과 상처를 타자의 형상에 투사하여 타자를 증오와 배제의 대상으로 삼는 현상이다. 이는 중심과 주변, 강자와 약자 사이의 차별과 배제라는 정치의 문제를 전도된 증오를 통해 발산하는 행위이다.13 그러므로 혐오의 시대에 우리가 목도하게 되는 것은 정치의 붕괴이고 도처에서 넘쳐나는 히스테릭한 대결들이다. 타자(론)가 사라진 혐오의 시대, 문학과 정치가 만나야 할 현장이 이곳이며, 여성주의 언어와 부조리한 문장은 다름 아닌 시와 정치의 문제가 된다.
3. 혐오의 아이러니와 피 흘리는 아내
문학사 연구에서 김수영(金洙暎)은 ‘반여성주의’라는 관점에서 논란이 된 바 있으며 최근에는 여성혐오의 시선까지 겹쳐졌다. 이를 달리 생각하면 김수영의 텍스트는 우리에게 문학(사)과 여성혐오에 대해 좀더 진지하게 사유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고 볼 수 있다. 김수영 시의 남성성이 반여성주의를 토대로 구성되었다는 관점은, “여편네”라는 호칭을 포함한 여성비하의 시어들, 아내에 대한 폭력의 묘사, 여성을 자본주의적 욕망에 사로잡힌 속물적인 존재로 바라보는 시선, 근대적 남성성 추구와 성장주의의 신화 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14 이때 논의는 주로 ‘일상성’ 연구와 겹쳐지는데, 일상과 가족을 소재로 한 시에서 시인이 느끼는 생활의 비애, 가장으로서의 무능력과 무기력은 아내의 경제적 민첩성, 세속적인 욕망과 적극적으로 대비된다. 아내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는 주로 이 과정에서 나타난다.15 김수영 시에서 돈, 성, 일상, 여성이라는 사적 영역은 시인의 왜소함과 비겁함을 드러내는 범주이며 “여성은 고정적 진리를 추구해야 할 규범적 남성성을 방해하거나 훼손하는 비진리의 영역으로 설정되기 때문에” 혐오와 폭력의 대상이 된다는 시각 또한 여기에 해당한다.16
김수영 시가 오히려 가부장적 남성성을 해체하고 있다는 대립되는 관점도 존재한다. 이는 김수영 시에서 남성과 여성의 관습적인 정체성은 전도되어 있으며, 더욱이 아내에 대한 공격성이 드러내는 것은 남성성에 대한 비판이자 지독한 자기풍자이며 자기혐오라고 본다. 아내에 대한 적의는 다름 아닌 시인 자신의 속물성 내지는 기만과 허위의 자의식에 대한 부끄러움과 자학을 의미하며, 시인이 공격하는 대상은 아내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다.17 이때 김수영은 일체의 ‘윤리적 태도를 삭제한 언어’를 통해 자신의 부정성을 폭로한다.18 이렇게 볼 때 김수영 시의 여성비판적 언술은 일종의 위악이 되며 시적 계기(“문학의 악의 언턱거리”)로 작동한다.19 김수영에게는 자본주의적 근대 및 국가주의가 내장한 남성성에 대한 환멸이 자리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반성과 성찰로서 여성(성)을 시적인 것, 혁명적인 것으로 전유한다는 해석 또한 남성성 해체의 관점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20 결국 반여성주의를 둘러싼 논의의 핵심을 요약하면 여성혐오와 자기혐오의 충돌이 된다. 「죄와 벌」은 이러한 논의에서 단골로 소환되는 시다.
남에게 희생을 당할 만한
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
살인을 한다
그러나 우산대로
여편네를 때려눕혔을 때
우리들의 옆에서는
어린 놈이 울었고
비 오는 거리에는
사십명가량의 취객들이
모여들었고
집에 돌아와서
제일 마음에 꺼리는 것이
아는 사람이
이 캄캄한 범행의 현장을
보았는가 하는 일이었다
—아니 그보다도 먼저
아까운 것이
지우산을 현장에 버리고 온 일이었다
—「죄와 벌」 전문(원문의 한자는 한글로 표기)
어떤 면에 집중해 읽는가에 따라 해석의 방향은 달라질 수 있겠지만 어떻게 읽더라도 이 시는 한편의 ‘아이러니’ 연극으로 읽힌다. 시는 사건에 대한 묘사와 논평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화자는 거리에서 아내를 “우산대로” “때려눕혔”다. 옆에서는 아이가 울었고 “취객들이/모여들었”다. 이 사건에 대해 화자는 아는 사람이 “범행의 현장”을 보았을까봐 꺼림칙하며 무엇보다도 “지우산을 현장에 버리고 온” 것이 무척 아깝다고 말한다. 이같은 장면과 자기의식은 가부장적인 남성의 신경증적 폭행과 여성혐오의 무도한 목소리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런데 시의 처음과 마지막을 구성하는 아포리즘적 서술과 위악적인 어조는 이 시가 일종의 자기처벌의 서사임을 보여준다. 처벌을 각오한 사람만이 죄를 저지른다는 서두의 문장은, 화자의 행위가 최소한의 범죄의 동기도 그에 대한 처벌의 각오도 지니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전제한다. 더욱이 지인의 목격과 지우산을 걱정하는 위악적인 사후 진술은, 오히려 시인이 타인의 시선을 내면화하여 자신을 풍자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시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사건과 논평을 통해 드러나는 ‘자신에 대한 화자의 태도’이다. 자신의 윤리적 타락에 대한 자기폭로, 즉 “죄와 벌”의 메커니즘이 보여주는 것은 표면의 잔혹하고 무도한 목소리와 이면의 소심하고 자학적인 목소리 사이에서 발생하는 아이러니,21 그 과정에서 작동하는 중층의 혐오이다.
그러므로 문학사와 페미니즘의 논의는 작품을 통해 혐오 문제에 대해 좀더 진지하게 사유해보거나 대상 텍스트를 더욱 섬세하게 독해하는 방식이 되어야 할 것이다. 특정한 시와 문장을 토대로 여성혐오를 성급하게 재단하거나 여성의 대상화와 자기혐오를 기계적으로 절충하는 논의는 그다지 생산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여성혐오라는 틀을 적용하여 김수영 시를 읽고자 할 때, 우리는 ‘누구를/무엇을 혐오하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시인의 자기혐오와 아내라는 알레고리를 동시에 숙고해야 한다. 김수영의 「반시론」은 문학은 숙명적으로 “곡예사적 일면”이 있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는 곡예사라는 말이 품고 있는 위태로움뿐 아니라 부단한 자기갱신이 야기하는 신명과 피로를 동시에 표현할 테지만, 시인의 말에 따르면 문학이 불러오는 “무시무시한 자기혐오”를 의미한다.(404면) 이 숙명을 이해하지 않고는 김수영 시의 본질에 다가서기 어렵듯, 지독한 자기혐오를 삭제한 채로 타인에 대한 혐오만을 조명하기는 어렵다.
김수영 시에서 공격의 대상이 되는 아내는 무엇보다 자본주의적 욕망을 체화한 물신과 타락의 알레고리로서의 여성이다. 김수영은 현대성의 본질이 상품과 소비를 통한 “쾌락의 추구”이며 이것이 바로 인간을 ‘자유를 위한 정신의 투쟁’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고 보았다.22 예컨대 날마다 새로운 세간들이 집 안을 채워갈 때 시인은 “그만큼 손쉽게/내 몸과 내 노래는 타락했다”(「금성라디오」)고 고백한다. 이를 아내에 대한 자신의 윤리적 우월성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해석하기보다는 오히려 상품과 자본에 예속된 삶과 문학에 대한 대항이자 단속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니 김수영의 시를 여성주의 관점에서 읽기 위해서는 얼마간 기계적인 의미에서의 혐오 진단에서 벗어나 조금은 다른 접근 방법을 마련할 필요도 있어 보인다. 흔히 반여성주의에 대해 말할 때, “여성적인 것이나 전형적인 여성성으로 코드화된 것들에 대한 광범위한 평가절하와 비방”이 문제가 된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여성성을 과도하게 이상화하거나 신비화하는 “보수적인 전형” 또한 혐오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23 이를테면 여성을 성녀와 창녀로 이분화하는 구조를 포함하여, 여성을 뮤즈・여신・구원자의 이미지 속에 가두어 현실과 유리시키거나, 여성의 미와 헌신을 전형화하고 이상화하여 유포하는 다양한 방식 또한 여성의 대상화・타자화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내린 결단이 이렇게 좋군
나하고 별거를 하기로 작정한 이틀째 되는 날
당신은 나와의 이혼을 결정하고
내 친구의 미망인의 빚보를 선 것을
물어주기로 한 것이 이렇게 좋군
집문서를 넣고 육부 이자로 십만원을
물어주기로 한 것이 이렇게 좋군
(…)
그러다가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 대학에 다니는
나이 어린 친구한테서 편지를 받았지
그 편지 안에 적힌 블레이크의 시를 감동을 하고
읽었지 “Sooner murder an infant in its
cradle than nurse unacted desire” 이것이
무슨 뜻인지 알았지 그러나 완성하진 못했지
이것을 지금 완성했다 아내여 우리는 이겼다
우리는 블레이크의 시를 완성했다 우리는
이제 차디찬 사람들을 경멸할 수 있다
어제 국회의장 공관의 칵테일파티에 참석한
천사 같은 여류작가의 냉철한 지성적인
눈동자는 거짓말이다
그 눈동자는 피를 흘리고 있지 않다
선이 아닌 모든 것은 악이다 신의 지대(地帶)에는
중립이 없다
아내여 화해하자 그대가 흘리는 피에 나도
참가하게 해다오 그러기 위해서만
이혼을 취소하자
* 주: 영문으로 쓴 블레이크의 시를 나는 이렇게 서투르게 의역했다. <상대방이 원수같이 보일 때 비로소 자신이 선(善)의 입구에 와 있는 줄 알아라.>(원주)
* 주의 주: 상대방은 곧 미망인이다.(원주)
—「이혼 취소」 부분
「이혼 취소」는 아내의 존재에 집중해서 읽어보는 것이 좋겠다. 화자는 “친구 미망인의 빚보”를 섰고 아내는 집문서를 담보로 돈을 빌려서 갚아주기로 하면서 “나와의 이혼을 결정”했다. 화자는 블레이크(W. Blake)의 시를 이러한 상황과 연결하여 해석해본다. “Sooner murder an infant in its cradle than nurse unacted desire”는 ‘행할 수 없는 욕망을 키우기보다는 갓난아이를 요람에서 죽이는 것이 낫다’라고 해석할 수 있을 텐데, ‘나’는 이를 “상대방이 원수같이 보일 때 비로소 선(善)의 입구에 와 있는 줄 알아라”라고 의역한다. 미망인을 원수로 여기고 이 상황에 분노하는 것이 오히려 선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나’가 경계하고 있는 것은 위선이며, 시인은 정직한 욕망과 분노가 오히려 선에 가깝다고 본다.
시 속에서 아내는 위선을 덜어낸 채 욕망에 충실한 존재이고, 현실적이고도 세속적인 고통에 “피” 흘리는 존재이다. 아내의 욕망이나 고통에는 모두 경제적인 계기가 작동하고 있으나 이에 대한 아내의 자세에는 위선이나 기만이 없다. 아내의 대척점에는 소심하고 세속적인 계산을 하면서도 적당히 선의를 가장하고 있는 ‘나’가 있고, 생활 속에서의 피와 고통을 경험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악’을 알지 못하는 “천사” 같고 “지성적인” “여류작가”가 있다. 화자는 피 흘림을 모르는 이들의 (위)선은 모두 거짓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시인과 아내가 “블레이크의 시를 완성했다”고 할 때 완성의 의미는 복합적이다. 그 속에는 거짓과 위선으로부터 벗어난 세속적인 인간성이 승인되어 있으며, 돈을 둘러싼 곤궁하고 비루한 체험과 고통이 투영되어 있다.
1960년대 여성을 묘사하는 당시 서정시의 문법을 고려해볼 때, 김수영 시의 여성이 현실과 일상이라는 구체적인 삶의 공간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오히려 새삼스러운 면이 있다. 김수영이 아내의 육체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거기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24은 김수영의 텍스트에서 여성이 현실을 초월해 이상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생활과 현실이라는 계기를 중심에 두고 볼 때 아내에 대한 시인의 ‘혐오’와 ‘이해’는 동시에 조명될 수 있을 것이다.
4. 형들의 사랑, 그녀의 노래
한 사회에서 작동하는 젠더 프레임이 결정적으로 문제가 되는 이유는, 그것이 섹슈얼리티와 관련된 이분법적이고 위계적인 정체성들을 마치 생물학적인 진리이며 보편적인 규범인 것처럼 생산하고 유포하기 때문이다. 이 절에서는 정체성에 균열을 일으키고 예외를 만드는 언어의 운동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정체성으로부터의 이탈이 본질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그것을 생산해낸 시스템을 바꾸는 일이다. 그러므로 정체성을 해체하는 여성주의 언어 운동이 궁극적으로 제안하는 것은 바로 다른 사회에 대한 상상이며 다른 현실로의 이행이 된다. 이를테면 여성적인 것과 남성적인 것을 ‘그렇게’ 감각하도록 하는 사회의 감성체계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부드럽고 아주 친절한 스밈
그래서 빨리기 바빴던
수많은 유방들의 속사정
아프다
몹시 문란하지 않으면
가족은 탄생할 수 없다
(…)
곯은 참외처럼
음식물 쓰레기통에나 처박힐 운명
부리로 여자를 잘게 쪼겠지
아프다
몹시 문란하지 않으면
이해는 탄생할 수 없다
—김민정 「밤에 뜨는 여인들」(『아름답고 쓸모없기를』, 문학동네 2016) 부분
김민정(金敃廷)의 「밤에 뜨는 여인들」은 13면에 달하는 장시이다. 거리의 “레이스 잠옷을 입은 한 소녀”부터 영정사진 속의 “구순이 다 된 노인”까지 출연하는, 밤과 여인들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다. 신체와 언어는 이들의 여성성을 설명해주는 중요한 요소가 되는데, 여기에서 몸은 남성(성)에 의해 ‘훼손된 신체’로 묘사되며, 이들의 말은 ‘무언의 언어’로 표현된다. “빨리기 바빴던/수많은 유방들”과 “말하고 싶은데/말할 수 없음”이 바로 여성의 몸과 말의 존재 형식이다. 그러나 이들 여성(성)에 대한, 특히 이들의 몸에 대한 남근주의의 시선은 ‘문란하다’라는 한마디로 요약된다. 기묘하고 환상적인 사건과 이미지 이면에 존재하는 강력한 무의식은 바로 ‘문란하다’는 남근주의의 명명에 대한 저항과 균열이다.
시인은 각 에피소드마다 ‘문란하다’와 “엄마 같은 그림자”를 동시에 배치하여, 창녀와 성녀라는 억압적인 이분법을 해체한다. 또한 “몹시 문란하지 않으면/가족은 탄생할 수 없다”와 같이, 문란함과 “가족” “사랑” “이해”의 탄생을 인과적으로 연결시켜, 이 말에 담겨 있는 이중적이고 기만적인 의미에 타격을 가한다. 그리하여 “밤에 뜨는 여인들”이라는 표현 속에 내장된 문란, 훼손, 희생, 약자의 이미지는 오히려 비행과 횡단의 의미로 역전된다. 이렇게 말과 그 말이 지시하는 음험한 이데올로기에 틈을 만들 때, 문란이라는 말은 더이상 여성의 신체에 대한 부조리한 공격성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그들의 인생이 또한
자식새끼 키워봤자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속 깊은 것이기 때문이지요
하느님
형들의 사랑을 보세요
점심에 하기 싫으면 저녁 먹고 하자
당신에게 말하고 노래하며
살구를 씻었습니다
기다려 내 몸을 둘러싼 안개 헤치고
투명한 모습으로 네 앞에 설 때까지
살구를 깨물고
상자 속에서 튀어나온 아내라는 시를 윤문하였습니다
여름비 잠시 멈춤
어제 본 아내의 내면은 주먹과 보자기
아내는 미나릿과에 속하는 얼굴로 창가에 앉아 담배를 피웠습니다
살구씨를 한쪽에 모아놓고
그들은 과연 하였습니다
밤마다 꿈속으로 가는 아내의
관자놀이에 거머리 여러마리를 놓아 꿈을 빨게 하였습니다
(…)
그들은 서로를 사회합니다
겨울은 촛불잔치
영혼의 대자보는 떨어져나가도
없는 자식인 셈 치고
시간을 설득합니다
안개를 헤치고 먹고사는 노부모처럼
또한 그들의 투쟁이
살구 한알에서부터 시작되고요
하느님
형들의 사랑을 보세요
허나
형들의 사랑을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지 말아요
—김현 「형들의 사랑」(『문학3』 2017년 1호) 부분
“형들의 사랑”은 형들의 관계에 어떤 이름을 붙이는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 겨울이면 “눈싸움”을 하고 이제는 “자식새끼” 푸념도 늘어놓으며 “그들의 인생”은 어느 형들의 그것처럼 흘러왔다. “그들의 인생” 뒤에서 한사코 “또한”이라는 부사가 반복되는 것은 이러한 동질성의 확인이다. 하지만 “형들의 인생” 사이에 배치된 성적 은유들은 이들의 동성애 감수성을 언뜻 언뜻 드러낸다. “형들의 사랑”에는 얼마간 복합적인 맥락이 얽혀 있기는 하지만 그 사랑의 가장 핵심적인 일면이 바로 게이 감수성일 것이다. 예컨대 “살구를 씻”고 “살구를 깨물고” “살구씨를 한쪽에 모아놓”는 일련의 시간 사이에도 모종의 성적인 은유가 담겨 있다. 시인은 이제는 점점 “배가 나오고” “머리가 빠지는” 형들에게, 일상이 “살아남기”가 되고, 산다는 것이 곧 “투쟁”이 되는 형들에게, 그 팍팍한 삶 위에 동성애의 코드를 겹쳐놓았다.
그리하여 “형들의 사랑”은 이제 “하느님”을 비롯하여, 타인의 “시간을 설득”해야 하는 무게를 지니게 되었는데, 이때 시간이란 일상뿐 아니라 역사의 시간까지를 모두 포함하는 것이다. 김현(金炫)은 “형들의 사랑을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지 말아요”라는 문장 속에 동성애 감수성과 “노부모”의 형상을 이중으로 배치해두고, 이들의 ‘동질성’을 통해 결과적으로 ‘차이’에 대한 사회의 감수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시인이 “그들은 서로를 사회합니다”라고 쓸 때, 이 부조리한 문장 속에서 “형들”의 존재는 확장되어 “그들”의 일부를 이루고 다시 한 사회의 일부를 구성한다. “겨울” “광화문” “촛불”은 이 순간에 그 의미를 획득하며, 이는 한 사회의 배제되고 소외된 존재들의 정체성을 인정해가는 과정, 바로 “생활사”에서 “역사”가 실현되는 과정과 동일한 맥락을 형성한다. 그러니 “형들의 사랑”은 곧 “그들의 투쟁”과 동의어가 되고, 그 사랑과 투쟁은 그렇게 이어지며 확장될 것이다. “형들의 사랑”의 의미가 특정한 사랑으로 한정되지 않고 의미를 무한히 확대해나가는 것도 이 순간이다. 다른 삶에 대한 상상과 다른 현실에 대한 이행은 이렇게 추진되고 실현되는 것이 아닐까. 한 사회가 ‘그렇게’ 감각하도록 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여성주의 언어와 감성적 혁명은 이곳에서 시작된다.
5. 에필로그
새로운 시와 정치 혹은 새로운 정치시를 위하여 고민되었던 방식은 ‘문학 텍스트와 삶-정치 현장의 끊임없는 접합’(진은영)이었다. 그리고 문학언어의 새로움은 삶-정치에서의 실천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이는 ‘시(시 자체의 정치)는 어떻게 실제의 삶-정치와 만나는가?’(이장욱)라는 좀더 구체적인 물음을 통해, 시(의 실험)와 삶-정치(의 실험)의 일치의 방법론을 모색하는 방식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논의 과정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었던 시인은 김수영이었다. 김수영은 시를 바꾸기 위해서는 자신의 삶을 바꿀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25 그는 “거지가 돼야 한다. 거지가 안 되고는 청소부의 심정도 행인들의 표정도 밑바닥까지 꿰뚫어볼 수는 없다”(「반시론」)라고 썼다. 그리고 우리는 다음과 같은 60년대의 어느 밤을 떠올릴 수 있다. 시인의 집이 세간의 풍요를 전시하고 있을 때, ‘의자가 많아서 테이블이 많아서’ 걸릴 때, 만취한 시인은 돌을 메고 들어와 그것들을 찍어버리겠다고 달려들었다.26 그러고는 거지가 되고 싶다고, “이 땅에서는 거지도 마음대로 될 수가 없다”고 외치는 것이다. 시만 쓰고 시만 생각하고 죽게 해달라고 외치는 것이다. 그러면 작은놈은 부스스 일어나 “아버지, 나는 거지가 싫다”고 우는 것이다.27 누군가는 이 장면에서 폭력과 혐오를 읽을 수도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이 장면에서 양심과 실천을 생각하려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장면에서 시인의 절규와 아내의 피 흘림과 아이의 울음을 모두 읽을 수밖에 없다. 이를 두고 지금의 관점에서 ‘60년대 진보’의 한계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혐오의 시대를 관통하고 있는 2017년의 지금도 그 한계는 여전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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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신현경 「미소지니를 넘어서기 위해 더 물어야 할 질문들」, 『말과활』 2016년 가을 혁신호 117면. 이는 근대 자본주의 재생산 구조의 남성중심성이라는 역사적인 맥락에서도 해석 가능하다. 김신현경은 여성혐오가 결혼을 통해 여성의 재생산노동, 즉 가사노동, 감정노동, 성노동을 소유할 수 없는 남성들의 ‘소유권 박탈’과 연관된 감정이라고 설명한다.(같은 글 121면)↩
- 앞에서 남성성의 위기와 몰락으로 표현하기는 했지만, 실제로 남성성은 단일하다기보다는 양극화·복수화되어 있고, 이 구도에서 헤게모니를 획득하지 못한 남성들의 열등감과 위기감이 여성혐오로 표출된다는 설명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엄진 「전략적 여성혐오와 그 모순」, 『미디어, 젠더&문화』 31권 2호, 2016, 6면)↩
- 여성혐오와 신자유주의의 관계에 대한 논의와 그 한계에 관해서는 『창작과비평』 2017년 여름호 특집 ‘페미니즘으로 문학을 읽는다는 것’에 실린 백지연의 글을 참고할 수 있다. 백지연은 「페미니즘 비평과 ‘혐오’를 읽는 방식」에서 페미니즘 비평의 역사와 여성혐오를 둘러싼 담론들을 검토하면서, 신자유주의 담론과 여성혐오 담론이 결합한 논의들을 살펴보고 문제점을 지적한다. 특히 페미니즘 논의에서 신자유주의 경쟁체제에서의 자기계발주체, 왜소해진 남성성 등에 대한 문화론적 분석이 지니는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페미니즘 운동이 ‘문화정치’ 담론에 집중함으로써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와 분리되는 지점이 신자유주의체제가 의도한 것이라는 낸시 프레이저의 지적을 되새겨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 낸시 프레이저는 신자유주의와 페미니즘의 위험한 관계(“제2물결 페미니즘과 신자유주의가 동시에 번창한 것은 단지 우연의 일치였을까?”)를 적시하면서, 현실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페미니즘 운동을 비판하고 대안을 모색한다.(『전진하는 페미니즘』, 임옥희 옮김, 돌베개 2017, 302면) 이에 근거하여 본 글에서 사용하는 신자유주의적 페미니즘의 극복이라는 표현은 소수 엘리트 여성의 이익에 집중하는 종류의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 양성평등 논의가 가지고 있는 한계 등에 주목한 것이다. 그리고 이는 “모든 여성과 가난한 여성과 흑인 여성들과 노동자계급 여성 등등을 위한 페미니즘” 운동을 지향하는 말인 동시에 젠더를 둘러싼 사회 메커니즘의 변화와 다른 현실로의 이행을 강조하는 말이다.(낸시 프레이저 「신자유주의적 페미니즘의 도래」, 문순표 옮김, 『말과활』 2016년 가을 혁신호 175면)↩
- 정희진 「양성평등에 반대한다」, 정희진 엮음 『양성평등에 반대한다』, 교양인 2017, 50~53면.↩
- 낸시 프레이저 「재분배에서 인정으로?」, 케빈 올슨 엮음 『불평등과 모욕을 넘어』, 문현아 외 옮김, 그린비 2016, 42~45면.↩
- 자크 랑시에르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양창렬 옮김, 길 2008, 139면.↩
- 같은 책 138~39면.↩
- 졸고 「불온한 미(美)와 다른 현실」, 『창작과비평』 2013년 가을호 370면 참조.↩
- 정희진, 앞의 글 51~52면.↩
- 황현산 「‘여성혐오’라는 말의 번역론」, 한겨레 2016.9.8.↩
- 역사적으로 볼 때 19세기 부르주아들이 노동자들을 ‘글쓰기의 위험’으로부터 떼어놓으려고 했던 것은, 글쓰기가 프롤레타리아로 하여금 그들의 조건에서 벗어나게 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자크 랑시에르 인터뷰 「‘문학성’에서 ‘문학의 정치’까지」, 『문학과사회』 2009년 봄호 448면) 19세기 초 노동자가 밤 시간을 새롭게 전유하여, 그러니까 밤에는 잠을 자고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상식 세계에서 이탈하여 글을 쓰고 토론을 하게 되면서 해방의 물꼬를 텄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자크 랑시에르, 앞의 책 119면 참고) 그런데 이 노동자가 여성이라면 어떨까. 여성 노동자는 가부장적인 젠더 질서와 자본주의 착취 양식에 이중으로 억압된 존재이다. 문학과 정치라는 측면에서, 여성 노동자의 글쓰기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여성 노동자의 자전적 수기에서, 여공은 단지 재현의 대상이 아니라 쓰기의 주체라는 면에서 해방적인 의미를 지닌다. 또한 여성(성)에 대한 사회의 지배적인 규범과 ‘여자다움’의 정체성들, 그리고 그것을 근거로 여공을 ‘무성적’인 존재로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인식과 저항에서도 유사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루스 배러클러프 『여공 문학』, 김원·노지승 옮김, 후마니타스 2017, 271~72면 참고.↩
- 자크 랑시에르, 앞의 책 147면.↩
- 홍용희 「김수영 시에 나타난 분열된 남성 의식」, 『한국시학연구』 4호, 2001; 김정석 「김수영의 아비투스에 관한 연구」, 숭실대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9 참고.↩
- 김수영 문학에서 여성이란 주로 아내, 누이, 식모 등 가족의 범주로 한정되며 그중에서도 아내에 집중되어 있다. 김수영 문학의 반(反)여성 논의는 무엇보다 아내에 대한 묘사 및 태도와 관련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편네”라는 말은 「생활」(1959)이라는 시에 처음 등장하는데, 이는 일상을 소재로 한 시에서 아내에 대한 부정성이 두드러진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 임지연 「여성혐오(misogyny) 시의 가능성과 불가능성」, 『서정시학』 2017년 봄호 29면.↩
- 조영복 「김수영, 반여성주의에서 반반의 미학으로」, 『여성문학연구』 6권, 2001 참고.↩
- 김문주 「김수영 시의 성(性)의 정치학」, 『우리어문연구』 45권, 2013, 379면.↩
- 김수영은 자신의 속물성에 대해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시에서 욕을 하는 것이 정말 욕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하여간 문학의 악의 언턱거리로 여편네를 이용한다는 것은 좀 졸렬한 것 같은 감이 없지 않다.” (「시작 노트 4」, 『김수영 전집 2: 산문』, 민음사 2003, 440면) 앞으로 김수영의 산문은 이 책에서 인용하고, 제목과 면수만 밝힌다.↩
- 박지영 「혁명, 시, 여성(성): 1960년대 참여시에 나타난 여성」, 『여성문학연구』 23권, 2010.↩
- 김수영 시의 연극적 구조와 아이러니에 대한 설명은 졸고 「김수영 시의 비종결성과 대화의 시학: 연극성과 알레고리를 중심으로」, 고려대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6, 60~63면 참고.↩
- 이는 특히 라이오넬 트릴링의 「쾌락의 운명」이라는 글과 연결지어 설명할 수 있을 텐데, 이 글에 대한 번역과 그에 따른 현대시, 현대성, 쾌락원칙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은 「연극 하다가 시로 전향」, 336~37면 참조.↩
- 낸시 프레이저, 앞의 책 43면.↩
- 「원죄」, 440면.↩
- 김인환 「한 정직한 인간의 성숙과정」, 황동규 엮음 『김수영의 문학: 김수영 전집 별권』, 민음사 1983, 217면.↩
- 최정희 「거목 같은 사나이」, 같은 책 49~50면.↩
- 김현경 『김수영의 연인』, 책읽는오두막 2013, 13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