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조명
어느 ‘직업 소설가’의 고민
정주아 鄭珠娥
문학평론가, 강원대 교수. 저서 『서북문학과 로컬리티』, 주요 평론으로 「육체성의 형식과 리얼리티」 「계모찾기, 버림받은 세대와 냉혹한 모성의 세계」 등이 있음. jjua@kangwon.ac.kr
이기호 李起昊
1972년 강원 원주 출생. 1999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소설집 『최순덕 성령충만기』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김 박사는 누구인가?』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 장편소설 『사과는 잘해요』 『차남들의 세계사』 『목양면 방화 사건 전말기』 등이 있음. 이효석문학상, 김승옥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동인문학상 등 수상.
내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는 없지만 자체적으로 완결된 체계를 이룬 대상을 일컬어 ‘블랙박스’라 부르곤 한다. 블랙박스를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산출된 결과를 놓고 거꾸로 기원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며 해석을 끼워 맞추는 일 정도가 최선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세계가 어떤 논리에 맞추어 움직인 적은 결코 없으니, 우리가 속한 사회부터 인간의 마음에 이르기까지 블랙박스가 아닌 것이 없겠다. 무심한 블랙박스 앞에서 언제나 간절한 쪽은, 사후에 구성해낸 논리가 과연 맞는지 불안해하는 해석자들이다.
좀 난데없어 보일지는 몰라도, 작가 이기호와의 인터뷰를 설명하는 데 ‘블랙박스 앞에 선 해석자의 불안’처럼 적절한 말도 없다. 우선은 그가 요즘 타자를 이해하는 일의 불가능성을 그려내는 데 몰두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는 최근 네번째 소설집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문학동네 2018, 이하 『누구에게나』)와 세번째 장편소설 『목양면 방화 사건 전말기—욥기 43장』(현대문학 2018, 이하 『목양면』)을 잇달아 펴냈다. 이 소설들은 말한다, 타자를 이해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일이 얼마나 오만한지를. 한편, 블랙박스 앞에 선 해석자의 불안은 인터뷰를 진행할 필자에게도 해당된다. 타자를 이해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말하는 작가를 이해하려는 작업을 해야 하니 말이다.
하긴 바로 이런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 작가 이기호 특유의 아이러니가 작동하는 방식이기는 하다. 나름 진지하지만 정색하고 따져보기에는 좀 멋쩍은 상황. 입장이 거부된 문을 열어줄 누군가를 평생 기다렸더니 실은 나에게만 열린 문이었더라는 카프카의 진지함, 세상에 황금률 따위란 없다는 것이 바로 황금률이라는 버나드 쇼의 재기발랄함 사이 어디쯤이라 할 수 있을지. 그는 짐짓 웃는 얼굴로 일상사를 시시콜콜 풀어놓지만, 어느 사이 우리는 작가의 이야기에서 우리 자신의 모순을 발견하고 허둥거리게 된다. 물론 그때부터는 그의 재담을 듣는다 해도 마음 놓고 웃을 수 없다.
행복할 수 없어 행복하지 않은
그는 광주에서 기차를 타고 도착한 참이라고 했다. 광주의 한 대학에 취직해서 작가지망생들을 지도한 지 올해로 십년쯤 되었다. 곧 등단 이십년 차가 되고, 소품 모음을 제외하더라도 올해까지 네편의 소설집과 세편의 장편소설을 냈다. 작품량이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꾸준한 글쓰기를 해왔다. 독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소설가 이기호는 때로는 익숙해서 좋은 소설을, 때로는 낯설더라도 생각해볼 만하기에 좋은 소설을 써내는 작가이다. 두번째 소설집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문학동네 2006), 짧은 소설 모음집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마음산책 2016) 에서는 그 특유의 유머와 위트로 독자들을 즐겁게 했고, 두번째 장편소설 『차남들의 세계사』(민음사 2014) 로는 정치권력이 평범한 인간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정면으로 보여주어 독자들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이기호의 소설을 읽어본 독자라면 알겠지만, 그의 글에서는 창작 조건의 면에서든 경제적인 면에서든 중견작가의 여유로움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그는 소설을 통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많이 털어놓는 작가다. 이런 경향은 점점 강해져서, 급기야 네번째 소설집 『누구에게나』를 읽고 난 후에 필자는 인터뷰하기 전부터 이미 그를 다 아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교수실 책상 앞에서 그는 취업률과 전임교원 강의 담당 비율을 표로 정리하느라 바쁘다(「권순찬과 착한 사람들」). 세 아이의 아빠로서 은행대출금을 걱정해야 하고, 가뜩이나 골치가 아픈데 초등학교 삼학년짜리 둘째아이는 아빠 노트북을 망가뜨리고도 해맑기만 하다(「최미진은 어디로」). 소설을 통해 만나는 ‘이기호’는 직장 업무와 육아, 은행대출 이자에 시달리는 평범한 사십대 가장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물론 인터뷰를 위해 마주 앉은 소설가 이기호 또한 소설에 등장하는 ‘이기호’와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광주에서 좀더 내려가 나주시 남평읍이라는 시골에 작은 아파트를 얻어 작업실로 쓰고 있어요. 광주에 정착할 때는 작업에 좀더 몰입해 다작(多作)을 하려고 했는데 다산(多産)을 하고 말았어요. 아이가 셋이나 있어요. 아이도 있고, 학교에서 해야 하는 일들도 많아서 글 쓰는 모드로 전환하기가 쉽지 않아요. 예전에는 운전을 하면서 모드 전환을 했어요. 만약 여자 대학생이 주인공이면 그 감정을 익히려고 많이 노력을 하고, 그 상태에서 캐릭터를 만들거든요. 나 자신이 여학생이라는 감정이 들 때까지 계속 운전을 하는 거예요. 그게 될 때까지 운전을 하다가 한번은 광주에서 천안까지 간 적도 있어요. 그런데 운전은 너무 시간이 오래 걸려서, 요즘은 잠을 자는 걸로 바꿨어요. 그런데 너무 많이 자서……
여학생 캐릭터를 완성하려고 애쓰다보니 ‘광주에서 천안까지’ 차를 몰았다는 이 작가의 에피소드 어느 지점에 창작의 자유나 즐거움을 끼워 넣을 것인가. 그저 어쩌다보니 소설쓰기가 직업이지만 소설만 쓸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고, 그래도 글을 쓰자니 뭐라도 시도해야 하는 짠한 일상이 그대로 묻어난다. 고향 마을 원주에서 박경리 선생 댁 초인종을 누르고 도망가던 청년(「원주통신」,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은 어느 사이 글쓰기를 업으로 삼는 작가이자 일가족을 거느린 가장이 되어 광주에 정착했다.
남평읍의 낡은 아파트는 「권순찬과 착한 사람들」의 배경이 되기도 했지요. 작은 동네라서 사람들이 늘 한눈에 들어오는 공간이에요. 사람들 간의 관계도 마찬가지고요. 본래 소도시 출신이어서 그런가, 이런 공간이 편해요. 작은 도시의 아파트라 그런지 동네 아이들이 학원에 안 다녀요. 늘 같이 놀고. 어제도 고만고만한 아이 여섯이 다 같이 밥을 먹었어요. 사람들과의 관계가 서로 다 자연스럽게 엮이는 공간이에요. 그런 공간은 소설에도 영향을 줘요.
고로 작가적 신비주의란 이기호의 사전에는 없는 말이다. 유명한 작가라 할지라도 일상적으로는 고된 면이 없지 않을 터이고, 오히려 별것 아닌 신비주의보다야 훨씬 인간적이고 푸근한 느낌이다. 그런데 작은 의구심이 생겨난다. 그는 왜 행복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는 걸까?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소시민다운 작은 행복에 자족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이른바 ‘소확행’, 소소하지만 확실한 일상의 행복을 발견하는 것이 요즘 추세 아니던가. 아니, 소확행을 부르짖는 젊은 세대에 비한다면 그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 하긴 이것은 합리적인 의구심이라 할 수 있다. 직장인이자 가장으로서 느끼는 현실적 피로감과는 별도로, 그의 최근작들은 ‘마음 편히 살아서는 안 된다, 행복하면 안 된다’는 강력한 자기암시로 가득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기호식의 아이러니를 패러디하여 말하자면, 행복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행복하지 않은 것은 아닐는지.
‘소설 속’ 이기호와 ‘소설가’ 이기호
『누구에게나』에는 모두 일곱편의 소설이 실렸지만, 소설집 말미에 실린 「이기호의 말」은 독립된 작품이라 봐도 좋을 정도의 서사성을 갖추고 있다. 어차피 그의 소설은 허구와 실재의 경계가 들쑥날쑥하므로, 이 글까지 포함해서 수록작이 여덟편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이다. 작가는 소설 교정작업을 쉽사리 끝낼 수 없었던 심경을 최근에 겪었던 자동차 사고와 병치해 서술한다. 눈이 쌓여 시야가 잘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보행 신호가 꺼진 뒤에 횡단보도에 진입한 남자를 차로 치고 말았다. 그래도 ‘인간된 도리’에서 녹색 신호에 길을 건넜다는 남자의 주장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러나 보험금 인상 정도로 짐작했던 일이 커져 형사합의가 필요한 상황이 되어버렸고, 그로서는 ‘직업이 교수라는 사실을 숨기고 완전 백수 콘셉트로 가야 한다’는 지인의 조언을 묵과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문득 이 대목에서 그는 “소설에 등장하는 ‘이기호’와 소설을 쓰는 ‘이기호’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벽”(308면) 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다.
소설 속 화자와 실제 작가는 분리해서 바라봐야 한다고, 그걸 구분해서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아마추어라고, 우리는 배웠다네. 하지만 실제론 그러지 않는다는 것을 자네도, 나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아마추어든 숙련된 독자든, 은근슬쩍 그 벽 너머를 보려고 애쓰는 사람들이지. 작가 또한 일부러 그 벽에 숭숭 구멍을 뚫어 살짝살짝 보여주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못 본 척, 서로 속고 속이고 눈감아주고 작품 볼 줄 안다, 상찬을 늘어놓는 거라네. 그것이 소설을 읽는 우리의 윤리적인 태도라네. 나는 그 태도가 싫었다네. 소설이, 작가가 뭐 대단한 거라고…… 나는 ‘작품’이라는 말도 싫어했다네. 그 ‘ㅁ’ 자 받침으로 끝맺는 단어 속에 어쩐지, 무언가를 구분 짓고자 하는 이상한 태도가 엿보였기 때문이라네. 그래서 나는 아예 그 태도를 무너뜨리려는 마음으로 글을 썼다네. 주인공 이름도 대놓고 ‘이기호’라고 짓고, 이게 소설인지 에세이인지, 장르 구분조차 무의미하게, 그렇게 애쓰면서 글을 썼다네.(「이기호의 말」 309면)
인터뷰를 하는 동안 몇번인가, 그는 최근 슬럼프에 시달렸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슬럼프가 어떤 증상을 동반했는지 궁금하다면, ‘관절 없는 고무인형’처럼 컴퓨터 앞에서 무력하게 늘어져 있는 작가의 모습이 묘사된 「권순찬과 착한 사람들」을 읽으면 된다. ‘정권 교체기’에 찾아온 슬럼프, 그는 그 슬럼프가 ‘변화에 대한 강박관념’과 연결되어 있다고 말했다. 어느 순간부터 그가 사랑하는 시공간들이 그에게 말을 건네지 않은 것은 생활에 지친 탓에 ‘모드 전환’이 더뎌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소설이, 작가가 뭐 대단한 거라고……” 새 소설집을 내는 마당에 그는 작가로서의 소회를 적는 지면을 빌려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다. 이 중얼거림에는 작가를 변화에 대한 강박으로 몰아가는 불만스럽고 불편한 감정이 묻어난다. 요컨대 작가나 소설에 따라붙곤 하는 그 어떤 시선 혹은 태도에 ‘못 견딜 만한 무엇’이 있으며, 그것은 작가의 표현에 따르자면 소설 속 ‘이기호’와 소설가 ‘이기호’ 사이에 존재하는 일종의 벽이다. 작중에 불쑥 나타나 사실인지 허구인지 모를 이야기들을 풀어놓으며 작품과 현실을 들락거린 것은 그 벽을 향한 모종의 시위라는 것이다. 그가 행복할 수 없는 이유는 아무래도 불만스러운 ‘벽’과 관련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소설이, 작가가 뭐 대단한 거라고……”라는 중얼거림은 마치 터널 같았던 긴 시간이 끝난 후에 나온 후유증과도 같다. 아마 우연이겠지만, 이기호의 세번째 소설집 『김박사는 누구인가』(문학과지성사 2013)는 이명박정권이 끝나던 해에 출간되었다. 직장 때문에 내려간 광주에서 오년 남짓한 시간 동안 써낸 소설들을 묶었다. 이번 네번째 소설집은 박근혜정권이 끝난 이후에 출간되었다. 본래 작년에 내려던 것인데 조금 늦어졌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슬럼프에 빠져 교정지조차 보기 싫은 상태가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왜 정권의 흥망과 같은 주기를 그리며 소설집을 내는 것일까. 이런 우연의 일치를 그는 알고 있을까. 아무튼 결과적으로 두 소설집은 소위 ‘잃어버린 구년’이라 불리는 시간의 흔적을, 그 시간을 채우던 근심, 분노, 막막함 같은 감정의 결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십년 전에 광주에 내려간 것은 어떻게 보면 많은 생산력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춘 셈이었죠. 소설에 몰입할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지방에 있으면 아무래도 활동에 제약을 받아요. 서울에 오게 되면 실천적인 행동에 참여할 수 있을 텐데, 광주에 산다는 것만으로도, 그러니까 그 도시의 상징 때문에 생겨나는 정치적 안온함이 있어요. 편안함과 안온함이라 할 만한. 그러면서도 소설에서는 고통받는 타인을 그린다는 것 자체가 괴리감이 든다고 할까요. 도대체 그런 타자에 대해 얼마나 알 수 있나. 가장 정직해지려면 그것을 쓰려 하는 작가를, 모순적이고 소시민적이며 광주에 사는 작가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그 정념을 노출하는 것이 최선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했어요.
글쓰기를 가로막는 것은 기계적인 회의라든가 은행대출 같은 피로한 일상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 편안하게 잘 산다는 것, 그것도 ‘광주’라는 지역적 상징을 핑계 삼아 그 그늘이 주는 ‘정치적 안온함’ 뒤에 숨어서 평범한 소시민으로서 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주는 부끄러움이다. 이러한 부끄러움은 작가로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이어지는 것이겠다. 하지만, 그 전에 어떤 ‘벽’을 만난 것이 더 큰 문제다. 과연 이런 소시민적인 안온함 속에서 타자를, 또 그들의 고통을 이해한다고 말해도 되는지, 그러면서도 소설가 ‘이기호’로서는 누군가의 고통에 대해 말해야만 한다는 난관에 봉착한 것이다.
교회에 가지 않는 ‘교회 오빠’
「한정희와 나」는 타자를 이해하고 온전히 수용하는 일의 불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다. 작가인 ‘나’는 가족이나 다름없는 은인들로부터 열두살 난 소녀 정희를 잠시 돌보아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할 수 있는 만큼의 호의를 다해서, 낯선 곳에 적응해야 하는 아이의 마음을 헤아려 보살폈건만 정희는 반 친구를 집단 따돌림한 주모자로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에 회부된다. 친구를 그렇게 혹독하게 괴롭히고도 정희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른다. 반성의 기미라고는 없는 괴물 같은 아이 앞에서 ‘나’는 절망에 빠진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 혹은 누군가를 무조건 환대한다는 것은 과연 가능한 일인가.’
「한정희와 나」는 제목이 전부인 소설이에요. 한정희를 ‘나’라고 바라보다가 실패한 이야기죠. 작중에 ‘환대’에 대한 이야기를 썼어요. 절대적 환대라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죄를 지은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만약 가능하다면, 그건 그냥 상대를 용서하기로 자기가 마음을 먹는 것이겠죠. 자아와 타자가 명쾌하게 구분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절대적 환대란 불가능한 것 같아요. 타인을 환대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자신을 환대하고 있는 것이죠. 신이 없는 시대에, 이해나 용서는 온전히 인간의 책임이 되어버렸어요. 신이 맡았던 책임이 인간에게 돌려진 셈인데, 인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버거운 문제들이 많은 것 같아요.
그는 당초 신학대학에 진학하고 싶었다고 한다. 불교를 믿는 집안에서 하필 신학을 전공하겠다는 용감한 주장은 결국 지지를 얻지 못해 좌절되고 말았고, 교회에 드나들며 많이 방황했다고 한다. 한번 몸속에 들어왔던 신은 나가지 않는다면서 그는 웃었다. 지금도 그에게는 글이 잘 나가지 않으면 성경을 읽는 습관이 있다. 이후 문예창작학과에 진학하면서 신학과는 멀어졌지만, 신에게서 구해야 할 답을 문학에서 구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 되었다. 첫 소설집의 표제작이기도 했던 「최순덕 성령충만기」는 오로지 신을 향한 믿음으로 무장한 채 좌절할 줄 모르는 여인 최순덕에 대한 이야기다. 주변 사람들의 눈에 최순덕의 사고방식은 생경하기 짝이 없다. 쉽게 보자면 이 이야기는 맹목적인 믿음에 대한 풍자다. 신이 있다면 왜 인간의 고통을 방관만 하고 있겠는가. 풍자는 이렇듯 세상의 고통을 방관하는 신을 향한 불만과 그럼에도 신을 찾는 인간을 향한 이성적인 냉소에서 나온다.
그러나 늘 그렇듯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남기 마련이다. 적어도 이기호가 써낸 신과 인간에 대한 이야기들은 경외와 의심이라는, 언뜻 보아 서로 어울리지 않는 두가지 태도의 교차점에서 나온다. 경외란 물론 ‘오늘날에도 어떤 믿음이란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대한 놀라움을 뜻한다. 최근작 『목양면』의 주인공은 불행한 사고로 자식을 잃은 후에도 신을 원망하기는커녕 자신의 믿음이 시험받는 중이라 여긴다. 자식을 잃은 고통을 신을 향한 믿음으로 덮어버리는 아버지의 에피소드는 분명 욥기의 번외편이라 할 만하다.
코엔 형제의 영화를 좋아해요. 그들이 만든 「시리어스 맨」(A Serious Man, 2009)이라는 영화가 있어요. 거기 현대판 욥 같은 친구가 나오거든요. 삶의 고통을 겪으면서 랍비들에게 조언을 구하는. 영화를 보고 났는데 저로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더라고요. 예전부터 성경의 욥이란 인물이 항상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그도 아버지거든요. 자식을 잃고 어떻게 그리할 수 있을까. 영화를 본 후부터 계속 욥에 대해 생각했어요. 그러다 쓰기 시작한 거죠.
‘왜 하필 욥이라는 인물이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욥은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하다보면 결국 커다란 물음표로 남게 되는 인물이다. 현실적인 고통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초월하도록 만드는 믿음이란 대체 어떤 경지인가. 삶에 허덕이는 인간이라면 당연히 경외를 품을 만하다. 아들 이삭을 주저 없이 신에게 내놓은 아브라함에게 키르케고르(S. Kierkegaard)도 같은 질문을 던졌었다. 키르케고르의 결론은, 신에 대한 믿음을 상실하고 운명의 불안을 짊어진 인간으로서는 결코 아브라함처럼 ‘도약’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이기호처럼 의심을 품는 탕아가 생겨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혹시 그 절대적 믿음이란 신을 향한 믿음이 아니라 나 자신을 향한 믿음은 아닌가’ 하는 불온한 의심. 타자에 대한 이해든 환대든, 결국은 신을 빙자하여 ‘나’가 만들어낸 거대한 믿음의 체계에 함몰된 결과는 아닌가. 이른바 ‘일인칭의 세계’라 할 방어기제 속에서 겉으로는 이해와 환대를 말하면서도 실은 자기위안과 합리화를 찾고자 하는 것은 아닌가.
학생들에게도 그렇게 이야기해요. 일인칭의 세계를 빠져나와서 일인칭을 삼인칭처럼 쓸 수 있어야 한다고. 공간감각을 익혀서 자각을 할 수 있어야 가능하지요. 늘 거리감과 공간감각을 익히려고 애를 쓰는 편이에요.
일인칭의 세계 속에서 설명되지 않는 대상은 없다. ‘일인칭을 삼인칭처럼 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단일한 시선 속에 머무르지 않겠다는 다짐이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존재론에 주목하는 한 질문은 신학적으로 소급될 수밖에 없으되, 소설가인 이상 그 답은 산문적으로 서술되어야 한다. 그가 진짜 ‘교회 오빠’가 되지 못했던 것은 그 시선이 소설가의 그것과 상충했기 때문이다. “소설가는 산문을 쓰는 사람들이고 사물의 정확한 핵심에 도달하고자 하지만, 종교는 사물을 쉽게 자기와 동일시하면서 가려버리는 힘이 있어서”라고 말할 때, 그의 어조는 단호하고 또렷해졌다. 요컨대 거대한 일인칭의 세계를 그대로 믿고 따르기에 그는 너무 의심이 많은데다 ‘시리어스’한 것이다. 하여, 다시 한번 이기호식의 아이러니를 패러디하자면, 그는 신을 믿지 않는 태도로 신의 주변에 머무는 영원한 신자이다. 비록 교회에 나가지는 않지만 신을 떠날 수 없는 영원한 ‘교회 오빠’다.
일인칭 세계 밖의 공포
일인칭의 세계에 함몰되지 않은 채 타인의 고통을 말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나정만씨의 살짝 아래로 굽은 붐」은 2009년 1월 강제철거를 위해 무리하게 공권력을 투입하면서 여섯명의 사망자를 냈던 용산참사에 관한 이야기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특공대원을 태운 컨테이너를 건물 옥상으로 올려보내는 역할을 맡았지만 그 현장에 나타나지 않았던 크레인 기사에 관한 이야기이다. 특별한 이유는 아니고 다만 ‘과적 단속’에 걸려서 현장에 가지 못했다는 기사의 대답에, 소설 취재차 인터뷰를 진행하던 작가는 당혹스러워한다. 그는 기사에게 왜 당일 현장에 나타나지 않았는지, 크레인이 도착하지 않아 본래의 진압 작전이 수정되면서 더 많은 사상자를 냈다는 보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본 참이었다.
아, 물론 돌아가신 분들은 안타깝게 생각하죠…… 하지만 제가 뭘요? 저는 그분들하고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에요. 제가 뭐 그쪽에 땅이 있습니까, 건물이 있습니까? 전 그냥 사장 말 잘 듣고, 처자식 굶기지 않으려고 해 뜨면 현장에 나가고, 해 지면 퇴근하는, 뭐 그런 평범한 사람인데…… 내가 그 사람들한테 뭔 잘못을 해요……(56면)
난 그게 진짜 이상하다는 거예요…… 거기 있었던 사람들을 만났어야지, 거기에 갔던 크레인 기사를 만났어야지, 왜 나를 찾아왔냐…… 나는 그게 진짜 궁금한 거예요…… 그게 정상 아니에요? (…)
말해봐요…… 아, 왜 자꾸 사람 말을 듣고도 눈만 감고 있어요? 내 말이 틀렸어요? 형씨도…… 그러니까 형씨도 나랑 비슷한 거 아니냐구요. 안타까운 건 안타까운 거고, 무서운 건 무서운 거 아니냐구요. 네? 내 말이 틀렸어요?(66~ 67면)
이 소설을 쓰면서 그는 애를 많이 먹었다고 했다. 자료를 수집하느라 힘들기도 했지만, 서술이 마음먹은 대로 나아가지 않았다. 결국 크레인 기사를 구체적인 상황 속에 삼인칭으로 등장시키는 서술을 포기하고, 인물의 육성을 그대로 전달하는 방식으로 바꿔서 겨우 소설을 써나갔다.
어떤 이야기냐에 따라 쓰는 방식도 다르죠. 물론 그 이야기에 맞는 화법과 시선들을 제때 파악하거나 판단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어요. 원래는 틀리든 맞든 일단 확고하게 밀어붙이는 스타일이에요. 그런데 요즈음은 자꾸 흔들리는 느낌이 들어요. 다음 소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어떤 의심을 스스로에게 많이 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이 소설도 그렇고, 『목양면』도 단행본으로 내면서 전면적으로 수정을 가한 거예요. 일물일어(一物一語)를 믿지는 않지만, 그래도 가장 근접한 것을 찾고 싶어요. 내가 독자의 위치에 있다면 어떻게 다가올까 생각하기도 하고요.
노파심에 말해두지만 그는 이십년 차 중견작가다. 소설작법을 의식하며 소설쓰기를 고심하기에는 글쓰기에 바쳐온 시간이 정말 길다. 그런 그가 시점도 화법도 어쩌지 못한 채로 ‘자꾸 흔들리는 느낌’ 속에 글을 써나가며 쩔쩔맸다는 이야기다. 제재가 너무 버거웠던 걸까. 그러나 우리는 그가, 미문화원 방화사건의 관련자로 우연히 지목된 평범한 택시운전사를 주인공으로 삼아 국가 폭력이 개인을 파괴하는 과정을 탁월하게 써냈음을 알고 있다(『차남들의 세계사』). 그러니 결국 그 이유는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거기에 갔던 크레인 기사를 만났어야지, 왜 나를 찾아왔냐”는 등장인물의 질문에, 떳떳하게 대답할 만한 이유가 애초부터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고.
소설의 형식은 당연하게도 소설의 주제와 공명한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 어떻게 말할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그가 만들어낸 플롯은 ‘평범한 사람’인 주인공에 의해서 모두 거부당한다. 크레인 기사는 별다른 도덕적 동기가 있어서 현장에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 아니었고, 혹시나 자신이 가지 않았기 때문에 참사가 벌어진 것은 아닐까 하는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그가 만든 캐릭터와 플롯임에도 그것은 마치 작가를 조롱하듯 정해진 궤적을 비껴나간다. 작가로서는 등골이 서늘한 악몽의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심지어 그를 향해 묻는다. “형씨도 나랑 비슷한 거 아니냐”고, “안타까운 건 안타까운 거고, 무서운 건 무서운 거 아니냐”고, 요약하자면 작가인 너 역시 나와 다를 바 없이 평범한 ‘그저 그런’ 사람이 아니냐고 말이다.
자네, 윤리를 책으로, 소설로,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나?
책으로, 소설로, 함께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나?
내가 보기엔 그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네.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 그것이 우리가 소설이나 책을 통해 배울 수 있는 유일한 진실이라네.
이 말을 하려고 여기까지 왔다네.
진실이 눈앞에 도착했을 때, 자네는 얼마나 뻔하지 않게 행동할 수 있는가?
나는 아직 멀었다네.(「이기호의 말」 313~ 14면)
『누구에게나』에는 일인칭의 세계 안에서 만들어진 플롯을 거부하는 타인들과 그런 예외적 상황에 당혹해하는 소설 속 ‘이기호’의 모습으로 가득하다. ‘소설 속’ 이기호와 ‘소설가’ 이기호 사이의 벽을 부수려 할수록 ‘인간’ 이기호가 떠안아야 하는 공포는 심해질 것이다. 작가의 관점에서 만들어낸 ‘뻔한’ 플롯과 일치할 리가 없는 현실의 예외성이 주는 공포가 한 축에 있다면, 작가적 관점의 당위성을 벗어버리고 맨몸으로 마주 선 세계에서 바라본 ‘나’에 대한 공포가 또다른 한 축에 버티고 있다. 이 공포는 ‘나’도 별수 없이 ‘뻔한 인간’일 수밖에 없다는 환멸을 동반하기에 더욱 두려운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소설이, 작가가 뭐 대단한 거라고……”라는 중얼거림에서 축약되어버린 말줄임표의 정체를 비로소 알아차리게 된다.
“진실이 눈앞에 도착했을 때, 자네는 얼마나 뻔하지 않게 행동할 수 있는가?”
별수 없이, 그는 일인칭의 세계로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일인칭의 세계를 벗어나려 애쓰는 과정과 그 때문에 마주해야 했던 공포를 그대로 쓰는 일만이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형식이었다는 의미이다. 앞서 그는 타자를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가장 정직해지려면 그것을 쓰려 하는 작가를, 모순적이고 소시민적이며 광주에 사는 작가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그 정념을 노출하는 것이 최선”이라 대답했었다. 그 결과 이해할 수 없는 타자라는 거울 앞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자신의 맨얼굴과 그에 대한 환멸을 담은 이야기들이 소설집을 채우게 되었다. 유달리 작가가 등장하는 이야기가 많다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나 자신을 문제 삼는 형식은 이 소설집으로 그쳤으면 좋겠어요. 네번째 소설집은 그런 시기를 거쳤으니 다음 소설에서는 다른 세계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아직은 고민 중인 단계예요.
별것 아닌 별것
그는 분명 새로운 형식을 찾아내겠지만, 쉽지는 않을 것이다. “소설이, 작가가 뭐 대단한 거라고……”라는 중얼거림은 소설의 산문성이라든가, 시점의 확장이라든가, ‘절대적 환대’라는 주제의 형상화라든가 하는 문학적 수준의 고민들과는 별로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오늘날 ‘소설’ 그 자체의 존재 방식과 의의, 다시 말해 과연 ‘오늘날의 문학은 작가나 작품이라는 문학적 존재 방식을 통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자문(自問)이 걸려 있다. 작은 중얼거림에서 시작된 방황의 과정은 한권의 소설집으로 묶였으나, 현실을 대하는 ‘윤리적 태도’라는 요원한 과제 앞에서 우리는 불행히도 ‘뻔한’ 인간일 수밖에 없다는 환멸은 어찌할 것인가.
이때 ‘뻔한’이라는 수사는, 누군가의 고통 앞에서 진심으로 분노하고 슬퍼하더라도, 정작 자신의 가족과 생계를 위해서는 실리를 따지고 침묵을 지키는 소시민의 일상적 이중성이라 풀이할 수 있겠다. 이렇듯 ‘심정적 유대’ 밖으로 한발자국만 떼면 무너지기 마련인 이중성 속에서 타자에게 건네는 이해와 사랑의 말들은 무의미하기 짝이 없다. 이러한 자기모순은 ‘소설가’이자 ‘소시민’으로 살면서, ‘작품’이자 ‘상품’을 써내야 하는 ‘직업 작가’의 윤리의식 안에서 증폭된다. 사실 그의 고민은, ‘문학’의 이데올로기적 권위가 주던 후광을 잃고 이제 ‘문화산업’의 하위 범주라는 민낯으로 대중과 소통해야 하는 오늘날 우리 문학의 존재론적 고민과도 상통한다. 장차 그의 행보가 주목되는 이유다.
물론 그가 당면한 문학적 위기가 마냥 비관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적어도 그에게는 비극적 절망 속에서도 희극적 웃음을 찾아내 거대한 아이러니로 묶어내는 균형감각이 있지 않은가.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혹 웃음에 대한 철학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유머의 기원은 인물들의 위치를 낮추거나 낮은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보도록 하는 데 있죠. 작가의 위치도 그들과 동일하고요. 유머는 오만한 태도에서는 나오지 않아요. 결국 우리는 유한한 존재라는 데에서 시작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언젠가는 죽을 존재의 시선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별것 아니더군’ 하는 태도, ‘뭐 별거라고 그렇게 진지하게들 굴고 그러나’ 하는 태도요.
대단히 지루할 것이 분명한 필자의 글을 위기에서 살려낼 재미있는 대답을 기대했건만, 그는 끝까지 진지하기만 하다. 앞서 이야기했던 영화 「시리어스 맨」은 다음과 같은 주제를 전면에 내세웠다. ‘Receive with simplicity everything that happens to you.’ 너무 진지하게 굴 것 없이, 세상만사는 그저 단순하게 받아들이면 된다는 의미겠다. 유머는 ‘별것 아니더군’ 하는 초탈한 태도에서 나온다고 말하는 작가 이기호 역시 코엔 형제와 같은 의견인 듯하다. 그러나 그는 사실 처음부터 끝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시리어스 맨’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신이 ‘별것이 있다’면서 진지하게 구는 부류에 속한다는 사실을 알지만, ‘별것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사람이다. 삶의 문제란 별것 아니라 할지라도 결국은 별것일 수밖에 없기에, 이런 간절한 웃음의 도움을 받아야 겨우 이야기해볼 만한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