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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황수영 『근현대 프랑스철학의 뿌리들』, 갈무리 2021

‘조연들’을 보면 서사의 흐름이 잡힌다

 

 

황정아 黃靜雅

문학평론가 jhwang61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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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분야를 공부하는 사람에게 철학은 발을 걸어 넘어지게 하는 돌부리 같을 때가 많다. 근처에 얼씬하지 않으면 될 일이 아닌가 싶지만, 일례로 문학에만 해도 ‘이론’이라는 짐짓 만만한 외양을 덮어쓴 채 철학이 거세게 범람해 들어온 지 오래다. 어쩔 수 없이 들추어보면 이내 그 분야가 강고한 ‘자기 참조’ 체제로 구축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하이데거와 니체만 잠시 읽어보려다가는 플라톤으로 돌아가시오,라는 표지판을 만나게 되고, 탈구조주의를 들여다볼까 하면 데까르뜨까지는 거슬러가야 한다고 압박을 받는 식이다. 그런 느긋한 독서의 짬을 내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어디까지나 문학을 하는 입장의 이야기지만, 철학의 언어에 일정 이상 노출되면 언어 감각에 어떤 훼손이 야기될 것만 같은 주관적 위험도 감지되곤 한다. 그러니 계보에 대한 무지를 텍스트에 대한 집중으로 어떻게든 메꾸면서 선택적인 읽기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그 때문에 좋은 길잡이를 만날 때 안도와 반가움은 커진다. ‘원전’을 읽으려다 극도로 피로해진 상태에서 펼친 안내서가 원전의 ‘해괴한’ 언어를 별 차이 없이 반복하는 듯 보이면 자칫 부당할 정도의 격앙된 감정이 생기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근현대 프랑스철학의 뿌리들: 지성, 의지, 생명, 지속의 파노라마』의 저자가 좋은 안내자임은 사실 책을 펼치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근래 일각에서 제기한 ‘물질적 전환’ 또는 ‘존재론적 전환’을 검토하는 모임에서 저자의 강연을 듣고 모종의 신선함을 경험했던 것이다. 그때의 신선함이란 독창적 해석에서 나왔다기보다(독창성 여부를 판단할 수준이 아니었으므로), 철학이 상식의 차원에서, 다시 말해 비전문가의 기를 꺾지 않고도 전달될 수 있구나, 하는 느낌에 가까웠다. 이는 저자의 언어가 철학이라는 시스템의 내적 회로를 뱅글뱅글 도는 대신 바깥의 감각과 접속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책 역시 독자들이 당연히 품을 만한 질문을 예상하면서 설명의 어떤 단계도 지나치는 일 없이 진행되는 저자의 ‘확실히 이해하기에 쉽게 이해시키는’ 설명법이 가장 인상적이다.

프랑스철학은 주로 라깡, 푸꼬, 데리다, 들뢰즈 같은 이름들을 앞세워 탈구조주의의 유행을 주도하면서 독일철학과는 다른 방식으로 우리의 두뇌를 괴롭힌 바 있다. 출간 강연회에서 저자는 이 책이 “주연급 인물들을 배경으로 밀어넣고 조연들을 전경에 배치”한다고 소개하는데, 여기서 ‘조연’이라는 표현의 의미는 두 겹이다. 우선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 그리고 그 종합 시도로서의 칸트 식으로 정리되는 통상의 계보에서 밀려난 프랑스 철학전통 자체를 말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조연인 프랑스 전통에서도 데까르뜨가 ‘범유럽적’ 아우라로 도드라질 뿐 이후 20세기에 이르기까지 공백처럼 보이는 공간에 존재한 인물들, 곧 책 제목의 ‘뿌리들’을 가리킨다. 구체적으로는 데까르뜨 전통의 기계론적 우주론을 비판한 꽁디약, 멘드비랑, 라베송에서 베르그송으로 이어지는 ‘유심론’(spiritualisme)의 계보가 그런 조연 중의 조연들이다. 출발점인 데까르뜨부터 치면 대략 3세기에 걸친 프랑스철학사의 면면이 조명되는 셈이다.

철학을 전문으로 하지 않는 독자로서는 주연급을 파악하기도 버거운 마당에 조연들까지 무슨 여력으로, 하는 생각이 앞서고, 의식 내적 경험을 중시한다는 ‘유심론’이라는 범주도 그다지 매력적으로 들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책의 독서경험은 여러 층위에서 그런 즉각적인 인상을 넘어선다. 데까르뜨 비판 자체는 이제 거의 상투적으로 들릴 지경이지만, 여기서는 극도로 세련되고 정교한 후대의 해체 방식이 아니라 그의 전통이 살아 있는 실세로서 지성적 삶을 좌우하던 시대에 이러저러하게 교정을 도모한 시도들을 접하게 된다. 설사 그 시도들이 어느정도는 여전히 데까르뜨적이라 해도,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데까르뜨의 극복이라는 과제가 훨씬 구체적이고 생생한 서사로 다가온다. 의지나 습관, 노력, 운동, 그리고 물질, 생명, 시간 같은 개념들, 철학 바깥의 일상에 더 가깝게 들리지만 철학 안에서라면 어딘지 조연 같은 인상의 개념들이 어떤 문맥 속에서 등장하는지도 흥미롭게 지켜볼 수 있다. 다양하게 아는 것이 이해를 심화시키고, 조연을 아는 것이 주연의 파악을 돕는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베르그송은 조연으로 분류되기는 다소 애매하고, 그를 다룬 5장에 소개되다시피 들뢰즈의 재해석을 통해 한층 부각된 바 있다. 비전문가의 시선에 간간이 비친 베르그송의 유명한 ‘지속’(durée)은 일견 너무 당연한 주장을 담고 있어 어째서 철학적 주제인지가 도리어 의아했는데, 이 책을 통해 ‘지속’ 개념 자체가 ‘뿌리들’의 ‘지속’ 속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문제였음을 알게 된다. 저자가 ‘자기지시성’에 착안하여 지속의 논리를 설명하는 대목, 가령 “그것을 이루는 요소적 작용들이 잇따르면서 전진하는 가운데 서로를 지시하고 소환하여 소급적으로 자기동일성을 구성”(315면)한다는 설명은 특히 흥미롭다. 여기서의 전체란 매번 새롭게 구성되는 것이며 자기동일성 역시 스스로를 운동하게 함으로써만 성립할 수 있다. 의식과 생명뿐 아니라 물질의 존재방식인 이 자기지시적 과정이 가동되는 데 ‘타자성’이 필요하다는 점, 곧 물질적 외부에 열려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자기지시성 일반에 관한 논평으로도 읽을 수 있다.

프랑스철학의 이 계보는 ‘의식’에서 출발하고 의식의 존재적 ‘모범성’을 강조한 면에서 유심론이지만,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면 그 이름에 갇히지 않은 유물론적 충동이 더 생생하게 감지된다. ‘유심론’에서의 ‘심’부터가 “신체와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는 의식”(17면)을 말하며, 신체적 정념(정동)과 경험, 물질, 나아가 생명이 의식에 대한 설명의 구체적 근거를 이룬다. 이처럼 의식에 대한 강조가 신체에 대한 강조와 함께 가는 것, 정신에 관한 설명이 어느새 경험에 관한 설명으로 넘어가는 것 자체가 인상적이다. 들뢰즈가 이 전통에 적극적으로 접속하는 근거도 그로부터 비롯하겠지만, 들뢰즈의 베르그송 해석에 유심론적 측면이 배제되었다는 저자의 지적과는 별도로, 어쩌면 ‘유심론’적인 것과 ‘유물론’적인 것 사이의 긴장을 해소해버린 점이 들뢰즈의 논의를 더 추상적으로 만드는 게 아닌가 하는 의혹도 얻게 된다. 이 부분은 현재의 반(反)인간중심주의나 신유물론과 관련해서도 더 생각할 여지를 남긴다.

다른 한편, 프랑스철학의 이 계보가 제시한 변화와 생성, 잠재성과 창조에 관한 ‘긍정적인’ 언어들은 분명 매력적이지만, 그럼에도 이 전통에 의해 불가능한 것으로 치부되는 ‘구조’의 엄연함에 대한 실감이 옅어지지는 않는다. 의식과 생명의 복합적이고도 생동하는 움직임을 긍정하면서도 여전히 ‘이미 그러한’ 생성만으로 돌파되지 않는 구조를 함께 사유할 수 있어야 하지 싶은 것이다. 그런 사유가 존재와 생성, 내지 구조와 탈구조 사이의 또 한번의 철학적 교체를 통해서가 아니라 어쩌면 더 ‘문학적인’ 언어에 담길 것 같은 느낌을 말한다면 철학에 걸려 넘어진 이의 분풀이로 보일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으며 철학의 숨겨진 욕망은 역시 문학이라는 (매우 주관적인) 심증이 굳어지는데, 그 또한 저자의 상식적이고도 명료한 설명에 힘입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