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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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조명

 

단무지와 베이컨의 사랑스럽고 유구한 가계(家系)

 

 

김수이 金壽伊

문학평론가,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평론집 『환각의 칼날』 『풍경 속의 빈 곳』 『서정은 진화한다』 『쓸 수 있거나 쓸 수 없는』 등이 있음.

whitesnow1@hanmail.net

 

 

김승희 시인을 만난 건 맑고 추운 1월의 어느날이었다. 전날 내린 폭설이 겨울의 빛나는 태양에 녹아내리고 있었다. 햇살에 눈을 깜빡인 순간, 간선도로에서 나가는 출구를 놓치고 말았다. 잠깐 사이에 자유로였고, 지각이었다. 눈부신 태양 아래 자유 없이 자유로를 달리는 아이러니. “어떻게 밖으로 나갈까……” 김승희 시인의 시 속을 달리는 기분이었다. 삶의 질문이 농축된 쓰라린 농담, 혹은 경쾌하지만 잊을 수 없는 진담의 일부가 된 느낌. 준비해둔 생각과 말들이 전날의 눈처럼 사라졌다. 그녀가 얼마 전 펴낸 『단무지와 베이컨의 진실한 사람』(창비 2021)에서 급히 힌트를 얻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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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친절한 것도 진실한 것도 아닌, 너무 투명한 진심도 잦은 변심도 아닌, 변심이 없는 것은 더욱더 아닌. 가득한 진심이 문득 텅 빈 허심임을 깨달으며 저 깊고 어두운 본심은 살짝 내비치는 정도로만.

순수한 “온몸”의 “조용한 진심”에 도달할 수 없거나 순간적으로만 도달할 수 있다. 이를 가르쳐주고 배운 사이인 우리는, 서로의 시차를 한껏 존중하기로 약속한 사람들처럼 만났다. 타인과 한 공간에서 얼굴을 맞대는 일이 하나의 특별한 사건이 된 시대. 사회적 거리두기의 피로 속에 존재의 미묘한 거리를 공유하는 마음은 “복잡하고 입체적”(「단무지와 베이컨의 진실한 사람」, 이하 「단무지와 베이컨」)인 것이어서, 진심과 본심의 정확히 나뉠 수 없는 경계를 흘러다녔고, 간단히 정리되지 않았다.

 

단무지와 베이컨이란 말은 사실 이 시집에서 정치적인 알레고리로 쓰였어요. 서초동에서 촛불이 타오르던 날이었는데…… 그동안 내가 좋아했던 사람들이 왜 이렇게 표리부동한가, 환멸과 충격이 컸어요. 진실은 사라지고 진영과 진영의 싸움만 남았는데, 아무리 탈진실의 시대라고 해도 그러한 대결이 외치는 것에는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말이 없어요. 새로운 생각과 말이 없는 곳에는 자유가 없지요. 질식감이 목을 졸랐어요. 시인은 새로운 말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존재잖아요. 그러던 어느날 냉장고에서 단무지와 베이컨을 꺼내다가 단무지와 베이컨은 앞뒤가 똑같다는 것을 발견했지요. 표리부동에 상심하다가 표리상동의 사물을 만난 거예요. 하지만 단무지는 소금물과 식초에 쓰라리게 절여져야 하고 베이컨은 눌리고 짓이겨지고 저며져서 자신의 표리상동을 얻었을 텐데, 그렇다면 단무지와 베이컨의 표리상동이 존재의 꿈이 될 수 있는가? 표리부동을 좋아할 수는 없지만 단무지와 베이컨의 표리상동은 존재의 종말이자 비극적 디스토피아죠. 또 본심과 진심은 다르고요. 그 지점에서 본심은 프로이트의 리비도로 들끓고 있는 것이고 권력, 욕망, 충동을 품고 있는 것인데, 그렇게 많은 인간의 원초적 본심이 쏟아져 나오면 두려워요. 인간의 리비도를 정화시키는 필터가 없어진 느낌이었고 단무지와 베이컨의 헐벗은 진실이 아프게 다가왔어요.

 

인간 내부의 윤리적 장치와 인과법칙이 고장 난 듯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떻게 ‘진실하게’ 살 수 있을까? 열한번째 시집에서 김승희 시인은 이렇게 묻고 있다. 초기시부터 그녀는 “이 새장만한 닭장”(「짜라투스트라」, 『달걀 속의 생』, 문학사상사 1989)의 세상과 획일적이고 자동화된 “당연의 제국”(「솟구쳐 오르기 3」,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 세계사 1995, 이하 『세상』)에 끈질기게 저항해왔다. 새로움과 자유가 금지된 “금 안”(「제도」, 『세상』)의 세계는 탈주하기에 알맞았고, 존재와 삶의 바깥들을 향해 계속 나아가는 역설적인 추진력이 되었다. 마비된 세계에서 사랑하는 이들을 믿으며 깨어 있는 일은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차라리, 어쩌면 오히려 은혜로웠다. 그리고 ‘혁명’의 시간을 거쳐 다다른 지금 이곳은, 많은 사람의 진심을 뚫고 나온 본심으로 흉물스럽다. 누군가의 진심과 진실이 못내 불편해진 것은 우리가 이 낯설고도 전혀 새롭지 않은 현실을 살아내느라 입은 내상일지도 모른다.

단무지와 베이컨의 상징성은 의외로 단순하지 않다. 김승희는 단무지와 베이컨의 앞뒤 없는 동일성과 일체성을 부러워하면서도 아파한다. 표리부동의 인간을 풍자하는 표리상동의 사물이, 다시 삶의 고통과 이 시대의 고통받는 인간 군상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단무지와 베이컨이 앞뒤로 뼛속까지 똑같아진 것은 “내장과 자궁을 발라내고”(「단무지와 베이컨」) 나서였다. 내부가 제거된 존재는 ‘자기상실-해방’과 ‘자기상실-박탈’의 양극단 사이에 위치한다. 김승희 시에서 이 둘은 혼재되어 운동하고 있다.

먼저, 전자의 관점에서 표리상동의 단무지와 베이컨-되기는 인간이 실패하면서 추구해야 할 (불)가능한 꿈이다. 이때 표리상동은 표리부동한 인간을 비판하는 준거이지 궁극의 목적이 아니다. “차라리 빨리 나는 단무지나 베이컨이 되고 싶다”(「단무지와 베이컨」)는 소망은 발랄하지만 씁쓸한 유머일 수밖에 없는데, 그 실현의 불가능성과 헛됨을 분명히 알고 하는 자의 말이기 때문이다. 진실로 인간은 단무지나 베이컨이 될 수 없다. 인간의 원초적 본성을 제거하면 남는 것은 진심이 아니라, 단무지나 베이컨 즉 ‘인간 아닌 무엇’이다. 단무지와 베이컨은 자기를 상실함으로써 해방에 이른 경지를 가장 부정적인 형태로 보여주는 상징이다. 자기상실-해방의 마이너스 상징. 자기상실-박탈과 어느새 같아졌다. 단무지나 베이컨이 되고 싶은 우스꽝스럽고도 통렬한 꿈은 파렴치한 인간에 대한 환멸과 윤리적 인간에 대한 소망을 동시에 표출한다.

후자의 관점에서 단무지와 베이컨이 겪는 수난은 인간이 겪는 삶의 고통이자, 도처에서 자신을 부정당하는 이 시대 보통 사람들의 처절한 실존을 가리킨다. 이때 표리상동은 삶과 현실의 억압을 내면화한 결과로, 인간의 단무지와 베이컨-되기는 이미 진행 중인 현실이다. 절여지고 눌리고 짓이겨져 자신을 잃고 “무심한 멸치, 무심한 짜장면 옆에 무심한 단무지”가 늘어서 있는 이 시대의 끔찍한 실존의 형상. “가슴이 다른 가슴에 얹혀 있는 것처럼” “단무지 위에 다른 단무지가 얹혀 있”는 “이 망할 놈의 세상”(「단무지는 단무지 사바나는 사바나 단무지는 사바나」). 물질문명과 팬데믹, 최근 한국의 정치상황 등에 따른 개인의 왜소화와 고립의 풍경이 연달아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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겹겹의 내면을 지닌 존재인 인간은 복잡하고 모호하며 계속 변화한다. 김승희는 표리부동과 표리상동의 이분법이 아닌, 양자를 적절히 운용하는 인간의 윤리를 말하고자 한다. 인간이 행해야 할 것은 본심을 스스로 제어하며 표리상동에 근접하는 윤리적인 표리부동이며, 현실의 폭력 속에서도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지키는 인간적인 표리상동이다. 따라서 인간의 진실을 구하는 인간-되기의 길은 요원한 꿈(자기해방)과 현실적 고통(자기박탈)을 함께 살아내는 모순의 길이며, 그 모순을 삶의 에너지로 쓰는 변환과 재창조의 길이다. 그의 시가 견고한 이분법과 하나의 결론을 부정하며 계속 나아가는 이유다.

 

삶과 세계는 참 모순적인 것이라고 느껴요. 그래서 제 시에도 늘 해결하지 못한 모순, 애매한 이중성 같은 게 남아요. 인생은 모순을 지닌 희비극적인 표정을 하고 있고 또 정신의 자유를 찾기 위해선 이분법을 지양해야 한다고 봐요.

 

 

2

 

저는 생각보다 부자유하고 스스로 늘 부족하다는 생각에 억압받고 있는 것 같아요. 1990년 소월문학상을 받은 「떠도는 환유 5」에서 “나 비슷한 것들아/(…)/죽음 비슷한 生생이 있어/살지도 죽지도 못하고/엄마 비슷한/아내 비슷한/자식 비슷한/교수 비슷한/시인 비슷한 것들을”라고도 쓴 적이 있어요. 실패감을 많이 느껴요. 내가 다하지 못한 ‘나보다 더 큰 역할’들이 지금도 회한을 주고 있어요. 여성이어서 실패감이 더 큰지도 모르겠어요. 빚 중의 빚은 사랑의 빚이라는데…… 여전히 늘 빚에 쫓기는 느낌이고, 빚 때문에 마음에 자유와 평화가 없어요. 우울증은 침몰하는 것이니까 탈중력해야 하는데, 빚이 발을 꽉 잡고 있어서 그 중력을 벗어날 수 있는가, 그것이 저의 화두예요. 이제 쉼보르스카(W. Szymborska)의 마지막 시집 제목처럼 ‘충분하다’라고 말하고 싶어요. 칠순이 되었으니 마지막 반성문을 잘 써보자는 생각입니다.

 

니체(F. Nietzsche)는 인간은 전적으로 몸의 존재이며, 영혼도 몸에 속한 무언가로 보았다. 그는 몸속의 내장을 “불가해한 존재의 내장” 혹은 “존재의 배”1라고 불렀다. 인간은 몸이 있기에 짐승과 초인 사이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극복하며 ‘넘어서는/건너가는 자’(초인)로 살 수 있다. 초인이란, ‘중력의 영’(the Spirit of Heaviness)에 맞서 지상의 삶에서 매순간 걷고 달리고 춤추며 날아오르는 자다. 무거운 ‘중력의 영’이 모든 것을 날지 못하고 땅에 떨어지게 만들며,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에 대한 사랑을 가장 늦게 배우게 하고 자신의 보물 동굴을 가장 늦게 발굴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2 김승희는 인간의 모순과 여성에 대한 억압, 시대와 사회의 중력 등에 맞서 ‘나를 넘어서는 나’로 살기 위해 분투해왔다. 그 싸움은 늘 그녀의 ‘존재의 내장’에서 시작되었고 그곳으로 회귀했다.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을 벌여온 김승희는 자주 상처와 실패의 몸-존재였으나, 동시에 『빗자루를 타고 달리는 웃음』(민음사 2000, 이하 『빗자루』) 후기에서 밝히듯 “달리는 말을 잡아탄 듯한 원시적인 용솟음, 그 벅찬 혼란과 희열의 리듬감”에 폭발하는 웃음의 몸-존재이기도 했다. “중력의 악마를 뿌리 채 뽑아내려는 듯/질질 끌고 가다가/(…)/잇달아 파고들며 웃고 달려가는/(…)//그 웃음의 산맥을 타고 달려가는 꿈틀대는 웃는 웃음”(「빗자루를 타고 달리는 웃음」, 『빗자루』).

김승희가 집중해온 인간의 비극적 현실은 ‘내장과 자궁’의 생물학적이고 정치적이면서 존재론적인 문제로 집약된다. 김승희는 현실의 중력이 인간 몸-존재의 ‘내장과 자궁’을 훼손하는 현장들을 고통스럽게 직시하고 살아냈다. 이는 김승희 자신의 문제였고, 그녀와 분리될 수 없는 타자들의 문제였다. 사실 현실의 중력은 그에 순응하기만 하면 편안한 삶의 기반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김승희는 매일의 일상에서 현실의 무거움을 치열하게 각성하는 쪽을 택했다. 그녀의 시는 한 개인에게 가해지는 현실의 중력이 압축된 폭발 직전의 상태에서 쓰였고, 또한 늘 그 이상의 높이와 너머를 꿈꾸었다.

김승희가 평생 꿈꾸어온 탈중력은 현실 밖으로 초월하는 것이 아닌, 현실 초월의 꿈을 에너지로 하여 현실을 새롭게 살아가는 모험이다. 초인의 길 역시 ‘나’ 아닌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내장)를 도약대로 삼아 나 이상의 ‘나’ 자신이 되는 싸움이다. 현실에 압착당하지 않고 살기 위해서는 현실의 중력을 거슬러 계속 솟구쳐 올라야 하며, 온전한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서는 삶에 짓눌린 자신보다 계속 높이 뛰어올라야 한다. 시작과 도착 지점이 같지만, 솟구친 이후는 그 이전과 결코 같을 수 없다. 탈중력하는 초인은 같은-다른 자리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도약하는 자다. 김승희에게 탈중력은 현실과 팽팽한 대결을 벌이는 가운데 확보하는 자유로운 삶의 방법을 뜻하며, 초인은 자신의 존재 의미를 스스로 만들어가는 불굴의 삶의 자세를 의미한다.

우울과 침몰을 강요하는 ‘중력의 영’은 김승희가 특히 여성으로서 겪는 매일의 일상에 무겁게 드리워 있었다. 그녀가 자신을 남김없이 쏟아부은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은 일상적인 너무나 일상적인 싸움이었고, 여성의 절박한 (무)의식이 투영된 싸움이었다.

 

19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에 고정희, 최승자 같은 분들이 여성주의적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현실 속의 가부장제, 남성중심주의를 발견하고 공격, 비판했었고, 시적 언어가 위반과 전복(顚覆)의 아방가르드적 언어로 되어가면서 강렬한 힘을 가지게 되었어요. 저도 「제도」나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 2-당연의 세계」 「한국식 죽음」 등 여성주의 시를 많이 썼지요. 몇년 전 이집트 카이로 문학축제에서 제 시세계를 발표하려고 정리를 하다보니까 제 시의 소재가 굉장히 여성 일상과 밀접하다는 데 스스로도 놀랐어요. 배꼽, 달걀, 냉장고, 세탁기, 냄비, 빗자루, 빨랫줄, 도마, 이번에는 단무지와 베이컨까지! 일상 속에 있는 사소한 사물들을 통해서 여성적 실존의 위기를 그리려고 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어느날 김승희의 냉장고 속에서 발견되어 이번 시집의 주인공이 된 단무지와 베이컨은, 엉뚱해 보이지만 내력이 깊다. 김승희의 시에서 일상과 여성의 경험이 결합한 사물들은 세계의 부조리를 드러내고 해체하기 위한 상징이 된다. 그녀는 ‘여성적 실존의 위기’가 여성만의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나’의 고통은 타인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고, 현실의 폭력은 다른 세계가 아닌 ‘나’와 이웃들의 일상에서 일어난다. 김승희에게 개인은 사회와 역사를 관통하는 각각의 다른 구심점들이며, 일상은 사소하고 개인적인 일들을 통해 세계의 구조와 실상이 펼쳐지는 표면이다. 이런 맥락에서 “한 인간의 역사와 영토는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크다”. 심지어 한 사람의 죽음은 “한 왕조의 멸망”보다 훨씬 거대한 사건이다. “한 사람이 죽는 것은/자기 속의 아버지를 어머니를 남편을 아내를 딸을 아들을 오빠를 언니를 누나를 고모를 이모를 삼촌을, 한국사와 세계사를,/국문학사를 문예창작론을 철학을 신학을 비교문학을 현대시학을 국제비교한국학을/다 이끌고 멸망하는 것이 된다”(「페르난도 보테로의 「낮잠」을 보고 나오는 사람」). 김승희의 시들은 대체로 그녀 자신인 ‘나’의 일상적 삶을 쓰지만, 이 한 사람의 ‘나’는 수많은 사람과 사물과 사건과 역사를 이끄는 거대한 스케일을 지닌다. 김승희 시에 그려진 사건들을 모으면, 지난 50년간의 한국사를 간략히 재구성할 수 있을 정도다. 김승희의 시가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페미니즘 등을 아우르면서도 어느 하나에 속하지 않는 이유도 이렇게 설명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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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시를 쓸 때 고통 감수성이 높은 것 같아요. 거의 모든 다른 이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더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기지촌에서 미군에게 맞고 음부에 콜라병이 꽂힌 채 죽은 윤금이씨 이야기나 장자연씨에 대한 시를 쓰기도 했어요. 공격적이거나 불안을 일으키는 시들이 많다보니 후배 문인이나 독자들 중엔 나를 무섭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더라고요.(웃음) 하지만 저는 시인과 시적 화자를 분리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어요. 저도 현실에선 고통에 무딜 때도 있고, 이렇게 분열적인 존재가 인간이구나, 생각합니다. “너답지 않게 왜 그러니” 같은 말을 싫어하는데 ‘답다’라는 것은 고정된 것이니까요.

 

이번 시집에서도 김승희는 타의에 의해 ‘내장과 자궁이 발라내진’ 무고한 희생자들에 주목한다. 자신의 존재를 참혹하게 부정당한 이들은 언제든지 ‘나’로 바뀔 수 있는 우리의 이웃이다. 우선, 일상에서 타인의 폭력에 유린당한 무고한 ‘피해자들’이 있다. 김승희는 죄 없는 피해자의 억울함을, “피해자가 되는 죄를 지”은 것이 피해자의 죄라는 어불성설의 아이러니로 간신히 서술한다. 2차 가해, 혐오, 무관심 등의 형태로 피해자의 비극은 계속된다. “이 피로 물든 방에서 어떻게 나갈 수 있을까? (…) 피해자는 피해자가 되는 죄를 지었기에 남은 것은 영원히 피로 물든 방밖에 없”다(「피로 물든 방의 론도 카프리치오소」).

또한 “더 모욕당하고 소비당하고 학대당하고 폐광이 되어/외설의 인형으로 버려진 여자들/허벅지를 양쪽으로 잡아당겨 입 벌린 자궁 속에/죽은 태아가 보이는 여자들”이 있다. 사진작가 신디 셔먼(Cindy Sherman)은 “자기 얼굴로 그 모든 여자들의 얼굴을 연출한 사진”으로 이 지독한 “현대의 야만”에 항거한다(「신디 셔먼의 여자들」). ‘나는 내가 되고 싶은 모든 여자들이 될 수 있다.’ 신디 셔먼의 창작방법론이자 존재론인 이 말은 김승희의 시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예컨대 그녀는 “너무나 비참하기에 문화가 음소거를 시킨” 출산하는 여성들의 사진을 보며, “생사의 선을 넘은 듯 탈진한 몸으로” 그 “이천명의 여인들과 함께” 딸을 낳은 심정이 된다(「분만에 대하여」).

한편, 또다른 방식으로 버림받고 ‘실패’한 여성이 있다. 신경이 마비되는 병에 걸려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Daniel Barenboim)에게 버림받았으나, 끝까지 그를 사랑한 첼리스트 재클린 뒤프레(Jacqueline M. du Pré)의 이야기다. 재클린은 “창자와 자궁을 다 긁어”내어 존재의 심연까지 박탈당한 텅 빈 ‘영혼의 몸통’으로 순간 속에 “일분일초의 영원”을 실어 나르며 삶의 환희를 연주한다(「나이아가라폭포」). 절망을 환희로, 자기상실을 자기해방으로 바꾼 사람만이 연주할 수 있는 이 음악은 현실 속에서 현실을 넘어서는 존재의 탈중력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목도하게 한다.

 

 

3

 

이 모두가 결국 하나이고

잠시의 영원

 

이 모든 것을 품고 넘어야 사람은 사람이 되나

사람을 넘는 사람

미안하게도 사랑을 부수어야 사랑이 되나

뜨거운 매미 울음 끓어넘치는 이 더운 미친 여름에

무엇이 되기 위하여 자기를 부수는 나

이렇게 말하면서 무엇을 말하는 자

—「나를 부수는 나에게」 부분

 

‘나를 부수는 나’란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넘어서는 초인의 다른 표현이다. 이 시는 김승희가 평생 붙들어온 삶과 시의 화두를 질문과 여운의 화법으로 제시한다. 사람을 부수는 사람, 사랑을 부수는 사랑, 나를 부수는 나. 원리는 모두 같다. 매 순간 자기 자신 이상(以上)이 될 때 가까스로, 비로소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역설. 김승희 시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형성하면서 그녀의 시에 자주 활용되는 반복과 변주는 이 과정을 세밀히 보여준다. 그녀의 많은 시들이 과녁에 정확히 꽂히는 화살처럼 강한 타격과 함께 읽히는 것도 이와 관련된다. 그러나 반복과 변주를 따라가는 동안 그녀의 시는 빠르게 읽히면서도 쉽게 읽히지는 않는다. 읽는 이의 가슴에 꽂힌 강렬한 메시지가 “무엇을 말하는”지 계속 생각하게 만든다.

외형상 반복과 변주를 구사하지 않을 때도 김승희의 시는 ‘넘어서는/부수는’이라는 단 하나의 방법론을 한결같이 관철해왔다. 방법론과 목적이 따로 구별되지 않은 셈이다. 그녀의 시에 보이는 이상과 김수영의 모습, 라깡(J. Lacan)과 크리스떼바(J. Kristeva) 등의 정신분석학 이론의 흔적은 이를 뒷받침해준다. 우리 시사(詩史)에서 이상과 김수영만큼 자신을 넘어 현실과 세계를 새롭게 하는 일에 몰두한 시인은 많지 않았다. 라깡과 크리스떼바의 요지 역시 거칠게 말하면, 인간 주체는 본질이 따로 없으며 계속 부수(어지)고 재구성해야 할 확정 불가능한 무엇이라는 데 있다. 자기를 벗어나 자기해방에 이르는 끝없는 여정은 김승희 시에 스며 있는 종교적 특성과도 맞물려 있다. 그녀는 샤머니즘과 천주교를 혼융한 첫 시집 『태양미사』(고려원 1979, 복간 문학동네 2021)의 제목에서부터 이를 암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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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자아의 문학을 해왔지만 탈자아, 탈인칭을 지향하는 것 같아요. 기독교에서 성령이 너를 가득 채우고 네가 무아(無我)가 될 때 자유를 얻는다고 하듯이 시도 자아를 표현하지만 자아를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것이 종교와 지향점이 같지 않은가 생각해요. 저는 시를 통해 자신을 치유해왔고 그렇기 때문에 본질주의적 자아는 없다고 생각하면서 자아의 다원적 흩어짐 속에 해방감을 느끼곤 했어요. 수렴하는 자아가 아니라 흩어지는 자아. 그를 통해 해방과 자유와 무아를 꿈꾸는 것 같아요.

 

첫 시집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못 받은, 전혀 대중적이지 못한 시집이에요.(웃음) 좋은 시는 1인칭을 넘어가는 보편성을 지녀야 되는데 그것에 도달하지 못했어요. 제가 등단했을 무렵 정치적 상황은 참 무시무시했어요. 72년 11월에 유신헌법이 국민투표 91퍼센트 찬성으로 통과했고요, 독재의 시대가 열린 바로 그 시점이었죠. 그런 시국에 「그림 속의 물」 같은 시를 써서 등단했으니 별 호감을 못 받았던 게 당연하지요. ‘잠꼬대’ ‘환상적인 시’라고 비판받았는데, 박두진, 전봉건, 김춘수 선생님은 제 시를 좋게 보셨어요. 당시에 제가 아는 한국 시는 김소월, 이상 정도였는데 대학 3학년 때 처음 써본 시로 당선이 되었으니 좀 생뚱했지요. 그러고 73년도에 나온 신경림 시인의 『농무』를 읽으면서 한국 시는 이렇게 써야 하는구나, 하고 충격을 받았어요. 우리의 현실에 뿌리를 박고 1인칭이 1인칭을 넘어서 타자와 만나는 이야기, 보편성에 도달해야 좋은 시구나, 그런 깨달음을 주었지요.

 

영문학도였던 김승희는 자유로운 아웃사이더의 정체성을 갖고 한국문학에 진입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경로는 1인칭/자아와 보편성/타자에 대한 그녀의 고민에 반영되었다. 그녀가 말하는 “보편성”과 “1인칭을 넘어서 타자와 만나는” 1인칭은 1인칭의 부정이 아닌 재탄생을 뜻한다. 알다시피 2인칭, 3인칭, 비인칭 등의 타자와 1인칭의 ‘나’는 우열관계에 있지 않다. 일찍이 김승희는 모든 인칭의 허구적 경계를 넘어선 자리를 ‘4인칭’으로 명명하며 이 문제를 통찰한 바 있다. “이름을 아 알지 못하는 4인칭의 바닷속” “얼굴들을 다 용해시키는 4인칭의 즐거운 바다, 그 그런 날……”(「사랑 13」, 『빗자루』)을 상상할 때 ‘4인칭’의 다른 이름은 ‘사랑’이다.

뜨거운 태양으로 작열하던 첫 시집에서 김승희가 노래한 것도 ‘사랑’이었다. 그녀에게 사랑은 생명의 근원이었고, 생명 또한 사랑의 근원이었다. 스물일곱살 청춘의 시인이 펴낸 첫 시집은, 누구보다 “강한 태양욕(太陽欲)”으로 “생명의 둥근 햇빛과 마주치려고”(「천진한 태양제」) “추운 싸움의 길 떠나”(「사랑을 위한 노래」)는 ‘나’의 ‘사랑’의 노래를 그린다. 태양은 흔히 남성성의 대명사로 이해되지만, 모든 생명을 낳는 원천인 태양의 빛은 여성성을 내포하고 있다.3

 

어릴 때 고향 광주에서 본 태양이 원체험으로 강하게 남아 있어요. 아침에 학교 갈 때면 무등산 위로 태양이 화려하게 떠오르는데 태양 쪽으로 새떼가 엄청난 힘으로 날아 올라가요. 집에 돌아올 때는 태양이 화려하게 지는데 그 일몰의 노을 속으로 까만 까마귀떼가 날아가는 것이 보이고요. 장엄하고 강렬했어요. 불멸이란 단어를 생각했죠. 또 하나는 당시 남도에 가뭄이 심해서 너무 메마르고 물도 안 나왔는데, 어머니가 아침에 일어나면 집 꽃밭과 토마토밭에 꼭 오줌 누어라, 했던 기억도 있어요. 아무리 마중물을 부어도 펌프 물도 잘 안 나오고, 한낮에 뜬 해가 그렇게 뜨거웠어요. 이글거리고 잔혹하고, 희랍신화 속의 신처럼요. 그렇게 태양은 두 얼굴을 가지고 저에게 다가왔어요. 불멸의 생명과 가혹한 고난 같은 것으로요.

 

“불멸의 생명과 가혹한 고난”의 두 얼굴을 지닌 태양의 속성은 그대로 ‘사랑’의 속성이기도 하다. 이번 시집에서 김승희는 사랑의 다양한 형태와 역할을 그리는데, ‘포스트잇’은 그 대표적인 제재다. 한 예로, “뜨거운 화상 입은 손가락으로/벽을 움켜쥐고 벌벌 떨고 있는/노란 포스트잇/노란 물결”(「작별의 포스트잇」)은 태양의 변주이자 사랑=생명의 씨앗이다. 김승희는 일상의 여기저기에 붙어 있는 포스트잇에서 시차와 물리적 거리를 넘어선 (짝)사랑의 “격한 호흡”을 느낀다. 포스트잇은 다른 인칭들이 “꿈틀거리며 얽혀”드는 사랑의 장소이며 존재 변환의 통로이다. 사랑과 생명의 징표인 포스트잇이 나뉠 수 없는 인칭의 문제와 연결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포스트잇에 글씨를 쓰네

격한 호흡

달려오는 이인칭

작고 사소한 우리의 약속, 다급한 처방전,

숨찬 짝사랑의 흘려 쓴 기록

 

(…)

혼자 있는 게 아니야, 포스트잇을 쓸 때면

순간 둘이 있어, 일인칭과 이인칭이 꿈틀거리며 얽혀들고,

잠깐 손을 맞잡을 두개의 물방울 같은 포스트잇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구나,

—「절벽의 포스트잇」 부분

 

이 포스트잇들은 이름이 무수히 많거나 없다. 「절벽의 포스트잇」 「작별의 포스트잇」 「이름의 포스트잇」 「카이로의 포스트잇」, 말기 환자들이 병원 희망의 벽에 붙인 포스트잇(「백합꽃과 포스트잇」)과 “유서 비슷한” 「‘연탄불 꺼트리지 마라’ 포스트잇」 그리고 이름 붙일 수 없는 포스트잇들. 김승희에 의하면, 포스트잇은 현실의 중력에서 솟구쳐 오르려는 사람들이 자신과 다른 사람, 신(神) 등에 보내는 ‘사랑의 외마디 말’이다. 너와 ‘나’가 만나고, 모르는 사람들이 연대하는 정치적·사회적 장인 포스트잇은 실제로 현실의 중력을 얼마쯤 무력하게 하며 그 위로 솟구쳐 있다.

 

포스트잇은 일상의 비망록, 순간의 영원, 열망의 연애편지, 애도의 쪽지죠. 매우 현대적인데 또 연약하고 허무하기도 하고요. 임시적·찰나적·돌발적 연결이자 사랑의 외마디 말이에요. 사회적 추모의 기능을 하기도 하고요. 강남역 화장실 살인사건 때 마침 강남역 10번 출구 앞을 지나가다가 노란 추모의 포스트잇을 가까이에서 읽었어요. 특히 눈에 띈 문장이 ‘이제 고통 없는 세상에서 편히 쉬시라’는 것이었는데 지금-여기의 현실이 너무도 고통스럽다는 젊은 여성들의 비명이었죠. 그때 우리 사회가 그 애도의 문장에 꼭 진실한 대답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노회찬 의원 사망 때도 마찬가지로 노란 포스트잇이 애도의 글자를 담고 힘찬 나비의 군상(群像)처럼 펄럭이는 것을 보고 무수한 사랑과 그리움을 읽었고 그렇게 포스트잇에 대해 몇편의 시를 썼어요.

 

 

4

 

김승희는 인간 존재의 ‘내장과 자궁을 발라내온’ 세계의 폭력에, 자신의 열한번째 시집의 끝에서 “창자가 끊어지게 사랑이 하는 일”을 맞세운다.

 

삶의 폭력과 파괴에 젖어서

저녁마다 나쁜 뉴스에 휩쓸리며

살처분한 돼지며 닭들

치마 아래에 돌아버린 문명의 황폐한 쓰레기를 품고

열린 창문 앞에서 빨래를 탈탈 털어 보푸라기나 실밥을 뜯으며

다면화된 몸을 조합하여 추스르며

조용히 빨래를 개키는 한 여인이 있다

뜨거운 다리미 같은 여인의 손은 쓸쓸한 노동의 손이 아니라

창자가 끊어지게 사랑이 하는 일

—「빨래 개키는 여자」 부분

 

매일 같은 삶의 폭력과 문명의 횡포 속에서도 “조용히 빨래를 개키는 한 여인”을 묘사한 이 시는 문법을 살짝 어그러뜨리며 그 주체를 ‘사랑’으로 바꾼다. 폭력과 죽음이 어지러운 세상에서 여인이 “면면으로 뜯어지는 얼굴을 막으며 빨래를 개키”는 행위는 “사랑이 하는 일”이다. 이는 물론 여성의 전유물이 아니다. 사랑이 하는 일은 몸에서 시작하고 몸으로 계승된다. “창자가 끊어지”고 “얼굴이 썩어 들어가면서도 보랏빛 꽃과 푸른 덩굴을 피워 올리는/고구마 속처럼 으리으리한” “사랑의 낭떠러지 전당”(「사랑의 전당」)은 바로 ‘사랑하는 나/너/그/그녀’의 몸이다. 이 ‘사랑의 낭떠러지 전당’은 대부분 삶과 현실의 중력이 최대화된 높고 위험한 곳에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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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을 때는 사랑이 엄청나게 으리으리한 것 같았지만 사실 사랑은 위험한 것이잖아요. 또 현실 속에서는 누추한 것, 가난하고 결핍된 것, 힘든 중노동이고요. 에로스는 생명 본능이지만, 사랑 속에는 죽음 충동도 들어 있어요. 저 아래 절벽을 보면서도 그리로 갈 수밖에 없는 타나토스의 마음이 있는 거예요. 영원한 결핍인 사랑이 죽음 충동을 긍정적으로 승화시키는 것은 썩은 고구마처럼 자신의 살을 다 파먹으면서 꽃을 피울 때 같아요. 내가 썩어야 ‘사랑의 전당’을 이룬다는 것이 사랑의 진실이라고 생각해요.

 

세계가 “다 함께 비참과 진혼의 다리를 건너”가는 지금, 김승희는 “인류의 어느 사과밭에”서 맹렬하게 자라고 있을 “이름 모르는 빨간 사과에 이름 모르는 사랑을 걸고”(「진혼의 다리를 건너는 봄에 빨간 사과의 이름을 부르다」) 있다. 시가 깨진 물동이의 물을 주워 담는 불가능을 실현하는 권능을 지녔다고 믿는 까닭이다.

 

최근 시가 많이 부드러워졌다는 평을 받아요. 제가, 말하자면 물동이가 깨졌을 때 물을 주워 담을 수 있는 것은 서정적 존재밖에 없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어서 그런가봐요.

 

이 믿음은 “마지막 희망의 벽은 희망의 문”(「백합꽃과 포스트잇」)이라는, 김승희가 평생에 걸쳐 갈고닦아온 삶의 기율과 통한다. 파탄과 절망을 사랑으로 돌이킬 수 있기에 우리는 다시 비참한 세계를 끌어안고, 최선을 다해 지금 여기를 살아갈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만이 지금을 안다/우리의 나아갈 길은 지금뿐임을/비로소 안다”(「‘비로소’라는 말」, 『희망이 외롭다』, 문학동네 2012).

 

희망은 산소와 같은 것인데 희망이 극단적인 절망이 될 때도 있어요. 도스또옙스끼 『악령』의 끼릴로프가 했던, ‘신만 없다면 자유다, 자살도 할 수 있다’라는 허망한 생각처럼, 한때 저는 희망만 없다면 자유인데 희망 때문에 너무 힘들다,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희망은 종신형이다”(「희망이 외롭다 1」, 『희망이 외롭다』)라고 쓰기도 했고요. 그래도 ‘그래도’라는 섬에서 사랑을 부둥켜안고 ‘살아내야’ 하지요. 희망만 남아 있는 판도라의 상자를 계속 어깨에 메고 가야 하나봅니다.(웃음)

 

김승희가 평생 시를 통해 해온 일, 그리고 시가 김승희를 통해 해온 일들은 세시간의 짧은 이야기 끝에 이렇게 이해되었다. “무엇보다도 나는 서고 걷고 달리고 뛰어오르고 기어오르고 춤추는 것을 배웠다.”4 김승희의 시를 통해 우리가 지나온 시간도 사뭇 그러하였음을 생각하며, 그녀가 활짝 열어둔 희망의 벽-문을 함께 통과하는 꿈을 꾸기로 한다. “꿈틀거리”(「꿈틀거리다」)며 썩고 다시 피어나는 사랑의 꿈을.

 

기억해야 할 것은, ‘위’와 ‘밖’을 향한 김승희의 끝없는 솟구침이 ‘안’의 무너짐과 같이 이루어져왔다는 사실이다. 무거운 현실과 나 자신으로부터 그래도, 어쨌든, 하물며, 이미, 아랑곳없이, 홀연5 탈중력하는 초인의 내부에서는 늘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 “내 속에 내가 내 속에 내가 내 속에 내가/바둥거리며 두 다리를 흔들며 두 발을 차며/볼링 핀처럼 우르르 쏟아”(「내 속에 내가 마트료시카」, 『도미는 도마 위에서』, 난다 2017)진다. 단무지와 베이컨은 김승희 시의 유구한 가계(家系)에서 탄생한 후예이며, 그 새롭고도 사랑스러운 시적 결정체이다. 시집 『단무지와 베이컨의 진실한 사람』은 지난해 만해문학상과 청마문학상, 고산문학대상을 받으며 김승희 시의 저력과 새로움을 또 한번 입증했다. 이 시집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지금 우리의 삶을 파괴하고 재구성하는 거의 모든 것의 아프게 부서진 내부다. 더불어, 이 무거운 지상의 삶에서 계속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용기와 유머이며 희망이자 사랑이다. 김승희는 이번 시집에서 다시금 새로운 언어와 시적 발굴을 통해 우리에게 모순과 역설과 반전이 뒤섞인 삶의 시간을 선사한다. 아직 이름이 없는.

 

 

  1.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진우 역, 휴머니스트 2020, 20면 및 53면.
  2. 같은 책 75, 346~50면 참조.
  3. 가령, 독일어에서 ‘달’(Mond)은 남성 명사이고, ‘태양’(Sonne)은 여성 명사다. 태양을 ‘그녀’로 지칭하는 짜라투스트라의 헌사의 한 대목은 ‘태양의 사제’를 자임한 김승희의 출현에 대한 프롤로그처럼 읽히기도 한다. “벌써 그녀가, 저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자가 왔기 때문이다. 대지를 향한 태양의 사랑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순진무구와 창조자의 열망이 모든 태양의 사랑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앞의 책 229면. 강조는 원문.
  4. 프리드리히 니체, 앞의 책 351면.
  5. 『희망이 외롭다』에 실린 시들의 제목에서 가져온 부사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