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 내가 사는 곳
웃을 일은 없지만 빙그레
정은정 鄭銀貞
농촌사회학자. 저서 『대한민국 치킨展』 『아스팔트 위에 씨앗을 뿌리다: 백남기 농민 투쟁기록』 『밥은 먹고 다니냐는 말』 『질적연구자 좌충우돌기』(공저)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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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리발 3번 버스의 종착지를 다들 ‘빙그레’라 했다. 초행길인 사람들이 “여기가 빙그레예요?”라 물으면 “네, 빙그레예요”라고 답해야 했던 곳이다. 누구 하나 웃지도 않으면서 ‘빙그레’라 했다. 50여년 전 1973년에 양주군 미금면 도농리에 빙그레 공장이 들어서 지금까지 이르렀다. 이 일대에는 젖소를 길러 상봉동 서울우유조합이나 빙그레에 젖을 내는 농가들이 많았다. 성장에 목말랐던 시대, 왜소한 몸은 우유와 고기로 채워 기골이 장대해지길 바랐고 땅에서 기르는 농사보다는 가축을 길러 고기와 젖을 내는 축산업을 한수 위로 쳤던 때였다.
빙그레 종점에 내려 20분 정도 걸어 들어가면 우리 집 밭이 있었다. 따지고 들자면 우리 집 밭이 아니라 빌린 밭이었다. 택지든 상업지구든 느긋하게 개발을 기다리는 부재지주들의 땅이었고, 우리는 그들의 이름도 성도 몰랐다. 자기 농사를 지으면서, 종종 농지 임대차 중개를 해 약간의 소개비를 챙기는 ‘마름’도 있었다. 그렇게 마름을 통해 밭을 얻고, 계약서 없이 당해 연도 쌀값을 기준으로 몇가마니 치 값을 도지로 무는 임차농이자 소작농들이 많았다. 사회과부도에 ‘근교농업지대’라 이름 붙은 곳에서 부모님은 푸성귀를 길러 팔았다. 회전율은 좋지만 유통비용이 높아 농가 수취율이 낮은 엽근채류와 수취율이 조금이나마 높은 토마토를 번갈아가며 길렀다. 근대-토마토-쑥갓, 상추-토마토-시금치, 하는 식이었지만 농산물 시장은 워낙에 들쑥날쑥이었고, 때마침 외환위기까지 겹치자 안 먹어도 안 죽는 토마토 따위를 사람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부모님은 자식들이 방학을 하거나 겨울 농사를 쉬는 시골 이모들이 와서 도와줄 수 있겠다 싶으면 직접 수확을 했고, 일손을 구하기 어렵겠다 싶으면 밭떼기로 넘기곤 했다. 포전거래를 하면 산지상이 작업자들을 직접 데려오는데, 당시 ‘조선족 할머니’라 부르던 중국 동포들이 끼어 있었다. 지금은 규모가 더 커져 농촌에는 불법과 합법을 뒤섞은 외국인 이주노동자 작업단이 전라도에서 강원도까지, 국토를 아래위로 훑으며 농사를 짓는다. 자기 땅도 없고, 트럭도 한대 없이 짓는 농사는 매번 누군가의 손을 빌리고 현금으로 셈을 하는 일이었으니 부모님이 수중에 쥐는 돈은 아주 적거나 아예 없었고 빚을 지기도 했다. 그렇게 아버지, 엄마는 버스를 타고 빙그레에 내려, 근교농업의 특징으로 꼽히는 출퇴근 농사를 지었다.
방학이 오면 종종 밭일을 거들어야 했다. 겨울에는 가끔 비닐하우스 채소들 이불을 덮거나 걷으러 혼자 갈 때도 있었다. 해 짧은 겨울에 빙그레 앞에 내려 하우스까지 걷는 길은 어둡고 무서웠다. 이중창이 단열에 뛰어나듯 요즘 비닐하우스는 이중 구조로 짓고, 겨울에는 기름보일러를 때는 가온방식으로 작물을 기른다. 하지만 우리 집 비닐하우스는 여러 임차농들이 돌려쓰던 구형이었다. 비닐하우스를 새로 짓고 싶어도 언제 임대차 관계가 깨질지 몰라 시설투자를 하기에는 부담이 컸다. 홑이불에 불과한 비닐은 바람은 막아도 밤새 곤두박질치는 수은주는 막지 못했다. 그래서 작물 위에 얇은 비닐과 카시미론 보온덮개를 한번 더 덮어, 가온이 아닌 보온을 해야 했다. 아침에는 작물들 숨 쉬라고 비닐과 이불을 걷어주고, 저녁에는 일일이 다시 덮어주어야 하는 고된 농사로 기름 대신 사람을 태우는 일이었다. 밭일을 하고 있으면 나가 놀고 싶어 화가 났고, 나가 놀고 있으면 엄마가 불쌍해서 화가 났다.
나는 부모님 허리를 베어 먹은 대신에 농사와 같은 험한 일은 피하고 살았다. 사범대 가서 선생 자리를 잡거나, 번듯한 직장을 얻어 살기를 바랐던 부모님 기대까진 끝내 맞추지 못하고 떠돌다 10년 전쯤 다시 이곳 남양주로 돌아왔다. 지방이라 부르는 곳에서 지내다 한강 이북까지는 올라왔으니 수도권 진출이라 할 수도 있겠으나, 세입자 신세는 벗어나지 못했다. 원래도 ‘엄마처럼 살지 않겠어!’라고 외치면서 떠난 것이 아니고,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겠다는 비장함도 없었다. 일을 하려면 손이 많이 가는 어린아이들을 봐줄 사람이 필요해 터울이 많이 지는 언니네 근처로 돌아온 것이기도 했다. 여전히 보호자가 필요한 삶이 한심했지만 그건 한국에서 ‘워킹맘’이란 자장 속에 갇힌 한 불가항력의 일이었다. 아마 엄마가 살아계셨다면 엄마의 손을 빌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고된 농사일에 지쳐 진즉에 이승을 떠났고 아버지도 탈농을 한 지 오래되었다. 엄마의 첫 기제사 때는 탕국 끓이는 일에 영 서툴렀지만, 탕국도 제법 끓일 줄 알고 삼색나물까지 능숙하게 무칠 줄 아는 나이가 되어 다시 이곳 빙그레로 돌아왔다.
10년 만에 이곳으로 돌아와 보니 동네는 김용택의 시 「섬진강 1」에 나오는 “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식물도감에도 없는 풀”처럼 되어 있었다. 업데이트가 끝난 내비게이션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신도시 공사가 한창이었다. 아침에 다녔던 길이 저녁에 사라지기도 했다가 그다음 날은 가스관을 박기 위해 다시 파헤쳐지는, 지금도 만년 공사 중인 동네다. 미금이나 지금, 도농과 같은 지명은 가차 없이 버려지고 ‘6-2 지구’같이 숫자가 붙더니 2017년경 느닷없이 다산 정약용이 불려 나왔다. 백골이 진토되었을 다산은 남양주 능내리 출생이라는 이유만으로 남양주시 행정에 불려 나왔고 이후로 그의 이름을 딴 대단지 아파트와 공립학교들이 속속 들어오고 있다.
부모님이 처음부터 이곳 남양주 빙그레에서 농사를 지었던 것은 아니다. 충청북도 산골 출신들이 수도권 언저리로 올라올 때는 다시 농민으로 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작은 농토를 쪼개 살던 이십대의 젊은 부모님은 충주에 들어선 비료공장의 호황을 좇아 1970년 산골에서 충주로 나왔다. 이렇다 할 제조업이 없던 고장이라 충주의 비료공장을 뜯어먹고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비료공장 노동자들의 먹성에 기대 술집과 밥집들이 들어서고, ‘충비사택’이라 부르던 미국식 타운하우스에 직원들이 들고 날 때마다 장롱과 가재도구를 사들이기도 했으므로 기물 장사도 흥했다. 그 지역의 이름을 딴 명문고에 자녀들을 입학시키려는 부모들의 수요가 있어, 명문고에 재학 중인 고학생들은 중학생들 과외로 그럭저럭 고등학교 학비를 벌충할 수도 있던 때였다. 하지만 비료산업이 사양산업이 되면서 화려한 시절은 순식간에 끝났다. 1983년에 충주 비료공장이 문을 닫자, 생계가 어정쩡해진 부모님은 결국 다시 이주를 강행했다. 서울 마장동 터미널에 내려 가깝고 집값이 싼 중랑구(당시엔 동대문구) 일대로 흘러들어 자리를 잡았다. 호기롭게 서울로 먼저 떠난 친척들이 비만 오면 천변이 넘쳐나는 상습침수구역인 중랑구 일대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래도 얄따란 끈이라도 잡고 형님 아우 하는 이웃들로 살았고 더러는 ‘향우회’에 들어가 연고를 만들었다. 라디오 사연에도 소개되지 않을 고만고만한 이촌향도의 스토리다.
아버지와 엄마는 백분율 단위로 지급되는 상여금이 아닌 공장 사장의 다정함에 따라 ‘명절 떡값’을 주는, 그나마도 받기도 건너뛰기도 하는 고만고만한 직업들을 전전했다. 아이들 젖을 물리며 악착같이 도라지나 마늘을 까서 반찬값을 보태던—조금씩 꿍쳐 반찬으로도 삼던—알뜰한 새댁들이 많은 동네였고 엄마도 그렇게 살았다. 부모님은 서로 ‘알뜰한 당신’으로 살았으나 자식들 많고 밑천은 없으니 좀체 살림이 피지 않았다. 두 사람이 가진 원천 기술이 농사였던 탓에 버스 타고 오갈 수 있는 인근 빙그레 비닐하우스를 몇동 얻어 농사를 짓기로 했다. 그때부터 나는 아버지 직업란에 ‘건설업(막노동)’이 아닌 ‘농업’이라 적어 냈다. 호구조사 나올 것도 아니건만 ‘회사원’이라 적지 않은 것은 부모를 부끄러워 말라는 지속적인 도덕교육의 효과였을 수도 있고, 부패한 담임교사가 촌지라도 바랄까 싶어 미리 차단하자는 경제적 판단도 있었다. 명색이 서울 소재 학교였지만 인근의 구리, 남양주에서 통학하는 친구들이 절반에 가까웠다. 망우리고개를 넘어오는 친구들을 ‘도민’ ‘군민’들이라 놀려먹기도 했으나 ‘특별시민’이었대봤자 고만고만하게 사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충주에 비료공장이 있었듯, 도농리엔 아이스크림과 바나나우유 만드는 빙그레 공장과 인견을 만드는 ‘원진레이온’ 공장이 있었다. 지금 사는(정확히는 빌린) 아파트 단지가 원진레이온 공장 터다. 원진레이온은 1961년 고철에 가까웠던 일본 도레이레이온의 설비를 들여와 세운 것으로, 한일경제협정의 ‘전리품’이다. 실은 전쟁에서 이긴 적 없는 한국이 가져온 노획물이라기보다는 전쟁에서 진 일본이 넘긴 일종의 외상값이자 보상금이었다. 이미 일본에서 이황화탄소 중독으로 많은 사람들을 죽게 했던 낡은 기계를 화신백화점 박흥식이 인수해 원진레이온을 세웠다. 반짝했던 때도 잠시 있었으나 내내 산업은행의 법정관리를 받으며 근근이 버텼다. 그래도 도농리 사람들에게 원진레이온과 빙그레는 상여금을 주는 직장이었다. 하지만 독한 가스를 내뿜는 공장 주변에서는 가축들이 시름시름 앓다 죽고, 식물들은 바짝 타들어갔으며 새로 올린 블록담은 자꾸 녹아내렸다. 1970~80년대 원진레이온 공장이며 군청 앞에는 머리띠를 두르고 농사 피해를 배상하라는 시위가 잇따랐다. 하물며 공장 안에서 직접 원물을 만지고 정화시설도 없이 화학가스를 그대로 마신 이들의 몸은 어땠겠는가.
2014년 빙그레 공장에서 암모니아 유출사고가 터졌다. 하청 노동자가 목숨까지 잃는 큰 산업재해였다. 암모니아 가스가 유출되고 실제로 그 고약한 냄새가 퍼지면서 동네가 발칵 뒤집혔다. 지금도 빙그레 공장 앞에는 암모니아 농도를 나타내는 전광판이 설치되어 있을 정도로 예민한 사안이다. 주민들은 자연스럽게 빙그레와 원진레이온을 포개서 떠올렸다. 원진레이온의 기억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여름 한철 속을 시원하게 달래는 아이스크림을 얼리려면 암모니아가, 시원한 여름 옷감인 인견사가 뽑히려면 독한 이황화탄소가 필요하다. 학교에서 잠깐 배운 화학기호 속에 갇힌 추상성이 아니라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구체성이 훅 치고 들어왔다.
원진레이온의 노동자 고(故) 김봉환씨는 1939년생으로 53세가 되던 해인 1991년에 사망했다. 젊다고는 할 수 없으나 늙은 아버지도 아니었다. 살아 있었다면 내 아버지 연배고 정정하게 지낼 수도 있는 나이다. 김봉환씨가 사망하고 석달이 되도록 원진레이온과 노동부는 산업재해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는 원진레이온의 첫 죽음도 아니었다. 그 이전에 10명이 넘는 죽음이 있었던데다, 1989년에는 한국 최초로 이황화탄소 중독으로 인한 사망이 기록될 정도로 독한 일터였다. 당시 노동부가 조사 및 판정에 적극적이었던 이유가 88년 올림픽 성화가 원진레이온 공장 앞 경춘국도를 지나가야 하는데 머리띠 두른 노동자들의 데모 장면을 외신들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서였다는 후문도 있다. 당시로선 드문 직업병 판정 선례가 나와 있었지만 91년 김봉환씨의 사망은 직업병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게다가 장례식장에 공권력이 투입되어 유족과 노동조합원들을 폭행하는 만행까지 벌어지자, 그들은 장례를 멈추고 다시 원진레이온 공장 앞으로 돌아와 책임자 처벌과 직업병 인정을 요구하며 농성을 시작했다.
염습과 입관까지 끝낸 고인의 시신은 원진레이온 앞에서 51일간 버텨야 했다. 시체팔이라며 엄청난 비난도 받아야 했고 중학생이던 우리는 무서워서 그 앞으로 차마 지나다니지도 못했다. 안 그래도 공동묘지인 망우리고개를 넘으며 온갖 괴담을 듣고 자란 어린 우리들에게 원진레이온은 슬금슬금 피해 다녀야 하는 곳이 되었다. 버스를 타도 한 정거장 앞이나 뒤에 내려 걸으며 원진레이온 공장은 악착같이 피해 다녔다. 결국 1993년 파산한 원진레이온은 이후 ‘직업병 문제가 세상에 알려지면 공장 문을 닫고 실업자 신세가 될 수 있다’며 입을 다물라는 데 악용되기도 했다. 그래도 산업재해와 직업병에 대해 경종을 울린 사건으로 남았다. 내가 사는 곳은 이렇듯 한국의 산업화 역사에서 꼭 기억해야 할 역사적 장소이지만 아파트 단지 주변엔 작은 기림비조차 없다. 다만 김봉환씨와 동료들의 죽음을 계기로 만들어진 병원이 산업재해 전문병원이자 공공의료기관인 ‘녹색병원’이다. 이 동네 토박이들 중에서는 원진레이온에서 일을 하다 병을 얻어 녹색병원에서 생을 마친 이들이 많다. 내 친구들의 부모였으며 이웃이었다.
원진레이온의 기계는 중국 단둥으로 넘어가 또 많은 이들의 폐와 간을 갉아먹었다. 당시 한국과 일본의 환경운동가들과 양심있는 시민들은 중국으로 원진레이온 기계가 팔려나가서는 안 된다 외쳤으나, 고물값이라도 알뜰하게 받아내려 기어이 죽음의 기계를 팔아넘겼다. 가장 큰 담보물인 공장부지는 택지로 결정했다. 국내 유수의 건설사들이 이 부지를 거머쥐려 안간힘을 썼다. 서울이 지척인 대단지 경기도 땅에 깃발만 꽂는다면 큰 이문을 남길 수 있었다. 경기도 땅의 운명은 얼마나 평평하고 밀어버리기 쉬우냐에 따라, 그리고 서울 강남에 얼마나 가까운지에 따라 값이 매겨지고 결정됐다. 원진레이온 공장 터의 중금속 오염이 심각하다는 우려가 있었지만 아파트 분양 딱지를 쥔 이들에게 이는 쉬쉬해야 할 일이었다. 이렇게 원진레이온의 흔적을 지워 아파트를 올려 누군가는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뤘고 누군가는 가게를 얻어 장사에 나섰다.
1996년부터 공사를 시작한 이 아파트는 이제 ‘구축아파트’가 되었다. 밖으로는 신도시 공사가 한창인가 하면 구축아파트에서는 똑같은 모양의 욕조와 싱크대를 연일 뜯어내고 외벽을 새로 칠하느라 안팎으로 공사판이다. 더러는 구축을 신축처럼 리모델링해서 살고, 또 재빠른 누군가는 신도시의 아파트로 삶의 자리를 옮겼다. 남은 자들은 아파트의 가치를 올려보겠다며 아파트 이름을 뜻도 알 수 없는 라틴어로 바꿨다. 옛날 이름을 버리고 ‘다산신도시’의 신축아파트처럼 여겨지기를 앙망하면서. 원진레이온의 기억도 함께 묻히길 바라면서.
이곳으로 돌아와서도 한동안 ‘빙그레’ 인근에는 부러 가지 않았다. 수습하지 못하고 나온 빙그레 시절에 대한 골질을 부리느라 그랬다. 다산신도시가 들어서면서 옛날 풍경은 점점 밀리고 있지만, 몇몇 낡아빠진 것들이 오기를 부리며 버티고 있다. 재개발과 재생, 그 둘 사이에서 재개발로 쉽게 결론이 나버린 동네지만 빙그레 공장 인근에 식당과 주점이 몇곳 남아 있다. 빙그레 공장의 직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점포들이기도 하고, 주변 비닐하우스촌에 들밥을 배달하던 백반집들이기도 하다. 이제 비닐하우스는 모두 밀려 들밥 배달할 일은 없지만 아파트 공사 인부들에게 밥을 대는 함바집들이 되기도 했다. ‘한식뷔페’라는 간판을 걸고 말이다.
그런 백반집에서 동태찌개에 저녁을 먹었다. 볶여서 밑반찬으로 나온 멸치는 대가리와 몸통이 분리된 것을 보니 하품이다. 중국산 김치는 들쩍지근하고 뭉개진 맛이다. 며칠 뒤면 김치찌개로 팔릴 터다. 깻잎지 역시 식자재상에 가면 살 수 있는 시금털털한 중국산이지만, 그래도 생도라지를 시판 초장에 무쳐 낸 정성에 시금치를 삶아 내 푸른색도 곁들였으니 이 값에 이만하면 되었다. 어디 러시아 해역을 떠돌다 잡혀 왔을 꽁꽁 언 명태 한마리가 쑥갓을 뒤집어쓴 채 끓고 있었다.
식구들끼리 밭일을 할 때는 라면이나 국수를 끓여 식은 밥까지 말아 먹곤 했다. 때로는 양을 늘린다고 엄마가 라면에 소면을 던져 넣을 때도 있었다. 들밥을 시켜 먹는 날은 일꾼들이나 불렀을 때였다. 모두 다 돈이 나가는 일이어서다. 김칫국물이 염료처럼 물든 플라스틱 찬통에 어묵볶음이나 돈육 함량이 낮은 빨간 스모크햄볶음, 손님들이 남긴 김치를 버리지 않고 모아 조미료와 설탕을 잔뜩 넣고 볶은 김치볶음이나 총각무지짐, 식어빠진 고등어구이 한토막, 쩐내 올라오는 조미김, 콩나물 몇가닥이 헤엄을 치는 콩나물국 따위가 담겨 오토바이를 타고 날아왔다. 내비게이션도 없던 때에 “여기 도마도 집, 다섯명!”만 말해도 단박에 잘 찾아왔다. 지금 같은 배달 플랫폼 시대에는 오히려 보기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그런 배달 들밥이 참 맛있었다. 좀처럼 외식을 하지 않는 우리 집에서 돈을 내고 사 먹는 들밥이야말로 외식의 기분을 낼 수 있어서였다.
요즘은 종종 빙그레 주변 백반집에서 맥주나 막걸리를 시켜 밑반찬을 안주 삼아 반주를 한다. 가끔은 공깃밥은 됐다 하고 반찬과 찌개만 앞에 두고 먹기도 한다. 술을 못 드시는 아버지 때문에 반주 한잔 곁들여 밥을 먹는 것은 미지의 세계였다. 미성년자이자 여자아이였던 내게 백반집의 반주 풍경은 아저씨들의 세계였고 무서운 뒷골목의 세계였다. 하지만 이제 부러 후미진 골목의 백반집으로 찾아 들어가 아버지 대신 술을 시켜 밥을 먹고, 라면에 건국수를 넣어 양을 늘리던 알뜰한 엄마를 대신해 건성건성 먹으며 반찬을 남기기도 한다. 그 시절에 대한 작은 복수이자 해원이다.
얼마 전부터 신도시의 품격에 암모니아 뿜어내는 공장이 어울리지 않는다며 공장 이전을 요구하는 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혹여 공장이 밀리게 되면 그 자리에는 고급 아파트가 들어설지 오피스텔이 들어설지 알 수 없으나 아직까지는 빙그레다. 웃을 일은 없지만, 그래도 빙그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