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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정철훈 鄭喆熏
1959년 전남 광주 출생. 1997년 『창작과비평』으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살고 싶은 아침』 『내 졸음에도 사랑은 떠도느냐』 『개 같은 신념』 『뻬쩨르부르그로 가는 마지막 열차』 『빛나는 단도』가 있음. yaboo1959@naver.com
지구의 가을
오랜만에 산책을 했지요
내가 사는 동네가 아니라 남의 동네로
되도록 많은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서요
당신과 함께였지요
당신과 함께라는 느낌을 의식하지 않으려는 산책은
언제나 어렵더군요
우린 새로 단장한 천변을 걸어 재래식 시장통을 두바퀴 돌다가
들어가고 말았지요
내가 태어나기 전에 지어진 오래된 성당 안으로
경건함을 외양에서 느끼기가 지극히 어려운 시대에
낡은 성당에서 경건함을 읽어냈다는 건
그만큼 나의 내면이 위선과 위악으로 팽창했다는 증거겠지요
성당 입구, 수위실에 앉아 있는 사람이
언젠가 내가 다니던 회사 계단참에 쭈그리고 앉아
중년의 여자 청소부와 입을 맞추던 남자 청소부를 닮았다는 생각을 했지요
그렇다면 나는 성당 수위를 모독한 것일까요
하지만 나는 안색이 바뀌었을 뿐
결코 뉘우치지 않는 냉담자인 것이죠
그때가 언제쯤이냐고요
시장통이 전어축제로 번잡했으니 작년 가을일 겁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전어부침을 한가득 입에 넣느라 입술 주위가 붉게 물들었음에도
지구의 가을이 좀 외로워 보이던 그날이지요
당신과 헤어져 귀가한 밤
내가 키우던 고양이가
잠자리에 든 내 머리에 제 머리를 비벼댄 것도 외로움의 표시였지요
고양이는 고양이가 그립고 나는 사람이 그립고
고양이는 내 그리움의 냄새를 맡고 제 그리움을 내 머리에 묻혔던 것이죠
간밤에 고양이만 왔다 간 것은 아닐 겁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눌린 머리카락은 꿈의 항해가 어지러웠다는 게 아니라
꿈에도 중력이 있어 머리카락에 헝클어진 글자를 남겨놓았을 거라는 그런 생각
내가 잠들었을 때 머리맡에 누군가 찾아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을 거라는
그것은 숭고의 손이었을까요
우리는 산책을 했고 늙은 개가 뒤를 따라왔고
빛바랜 잔디와 잎새를 떨구는 가로수와 야위어가는 햇빛에 나는 폐결핵 환자처럼 현기증을 느꼈으니까요
우리는 과연 우리의 삶이 지나가면서 내는 향기를 맡을 수 있을까요
당신과 함께 헤어짐이 없는 국경에 가고 싶네요
톈산이 자리한 카자흐 알라타우 국립공원이 그런 곳일 거예요
카자흐 것도 타지크 것도 중국 것도 아닌 위대한 산
세 나라가 국경을 맞대고 있지만 어떤 철망도 쳐지지 않은
그곳이야말로 헤어짐이 없는 국경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우리도 그런 국경을 만들 수 있을까요
학교에 갑시다
당신은 물었지
어젯밤 왜 변기에 귤을 내던지고 손으로 주무르고 했는지
변명 따윈 안하겠소
쓰러져도 결국 나 자신에게 쓰러지고 만 거요
모독을 느꼈다면 용서하시오
나는 나를 모독했을 뿐
몇번을 고쳐 태어나도 이런 게 인간이라면
난 인간 아니고 싶소
가장 순수한 귤을
가장 더러운 변기에 넣고 주무르는 변태가
나라는 괴물 맞소
미와 추가 함께 있는 모순 자체를
변기에 넣고 싶었던 거요
돌이킬 수 없는 존재의 이중성 말이오
나란 괴물이 당신을 사랑한다는 게 가당키나 한가요
흑흑
당신 없이 어찌 살지
당신의 다섯명이 나에게 감겨오고
당신의 한명이 날 끌고 가서 변기에 머리통을 처넣고
당신의 또다른 한명은 나를 비웃고
당신은 구석에서 울고 있고
숨을 못 쉬어 입술이 파래진 채로
당신의 다섯명이
내 목을 조르고 있소
학교에 갑시다
정신병을 고치는 학교라는 간판을 단
정신병이 저절로 도지는 학교에 갑시다